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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

I. 한국 문학/2. 소설82

학 - 황순원 (문이당) 문이당 청소년 현대문학선 33 목차 학 필묵 장수 잃어버린 사람들 너와 나만의 시간 내 고향 사람들 그래도 우리끼리는 차라리 내 목을 나무와 돌, 그리고 땅울림 마지막 잔 ............................................... 황순원 - 학 (1953년) 3.8 접경의 이 북쪽 마을은 드높이 개인 가을 하늘 아래 한껏 고즈넉했다. 주인없는 집 봉당에 흰 박통만이 흰 박통을 의지하고 굴러있었다. 어쩌다 만나는 늙은이는 담뱃대부터 뒤로 돌렸다. 아이들은 또 아이들대로 멀찌감치서 미리 길을 비켰다. 모두 겁에 질린 얼굴들이었다. 동네 전체로는 이번 동란에 깨어진 자국은 별로 없었다. 그러나 어쩐지 자기가 어려서 자란 옛 마을은 아닌 성싶었다. 뒷산 밤나무 기슭에서 성삼은 발걸음을.. 2023. 3. 12.
사평역 - 임철우 (창비) 창비 20세기 한국소설 41 목차 임철우 사평역 아버지의 땅 직선과 독가스 이창동 소지 김유택 자메이카여 안녕 정도상 친구는 멀리 갔어도 홍희담 깃발 이메일 해설 - 장소연, 김형중 낱말풀이 .................................................................. 임철우 - 사평역 (1983년)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물 말도 하지 않았다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별로 복잡한 내용이랄 것도 없는 장부를 마저 꼼꼼히 확인해보고 나서야 늙은 역장은 돋보기안경을 벗어 책상 위에 놓고 일어선다. 벌써 삼십 분이나 지났군. 출입문 위쪽에 붙은 낡은 벽시계가 여덟 시 십오 분을 가리키고 있다. 하긴 뭐 벌써라는 .. 2023. 3. 10.
수난이대 - 하근찬 (창비) 창비 20세기 한국 소설 18 목차 한무숙 감정이 있는 심연 김광식 213호 주택 한말숙 신화의 단애 하근찬 수난 이대 왕릉과 주둔군 삼각의 집 족제비 오유권 가난한 형제 김동립 대중관리 이메일 해설 - 고용우, 이봉범 낱말풀이 .................................. 하근찬 - 수난이대 (1957년) 진수가 돌아온다. 진수가 살아서 돌아온다. 아무개는 전사했다는 통지가 왔고, 아무개 아무개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통 소식도 없는데, 우리 진수는 살아서 오늘 돌아오는 것이다. 생각할 수록 어깻바람ㅁ이 날 일이었다. 그래 그런지 몰라도 박만도는 여느 때 같으면 아무래도 한두 군데 앉아 쉬어야 넘어설 수 있는 용머리재를 단숨에 올라채고 말았다. 가슴이 펄럭거리고 허벅지가 뻐근했다. 그러나 .. 2023. 3. 8.
자전거 도둑 - 김소진 (강) 김소진 - 자전거 도둑 (1995년) 자전거에 도둑이 생겼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나 몰래 훔쳐 타는 얌체족이었다. 내 골반뼈 높이에 맞춰놓은 자전거 안장이 엉덩이 밑선으로 밀려가 있었고 바퀴 틈새에는 방금 묻어난 것 같은 황톳물이 군데군데 배어 있곤 하는 게 바로 그 증거였다. 누군지는 몰라도 현관문 밖의 도시가스 연결 파이프에 쇠줄로 붙들어 매놓은 자전거의 자물쇠를 풀고 몰고 다닌 다음 내가 퇴근해 돌아오기 전에 얌전히 제자리에 갖다놓곤 하는 모양이었다. 신문사 일이라는 게 저녁 늦게 끝나기가 일쑤인데다 퇴근 후 술자리를 워낙 좋아하는 나로서는 낮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자전거를 산 지 얼마 되지 않아 자전거를 고정시킬 쇠줄의 열쇠 하나를 잃어벼렸다. 하지만 살 때.. 2023. 3. 7.
광염 소나타 - 김동인 (범우사 사루비아총서) 범우 사루비아 총서 김동인 - 광염 소나타 (1930년) 독자는 이제 내가 쓰려는 이야기를, 유럽의 어떤 곳에 생긴 일이라고 생각하여도 좋다. 혹은 사오십 년 뒤에 조선을 무대로 생겨날 이야기라고 생각하여도 좋다. 다만 이 지구상의 어떤 곳에 이러한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있는지도 모르겠다. 혹은 있을지도 모르겠다. 가능성만은 있다 - 이만큼 알아두면 그만이다. 그런지라, 내가 여기 쓰려는 이야기의 주인공 되는 백성수를, 혹은 알베트라 생각하여도 좋을 것이요, 짐이라 생각하여도 좋을 것이요, 또는 호모나, 기무라모로 생각하여도 괜찮다. 다만 사람이라 하는 동물을 주인공 삼아가지고, 사람의 세상에서 생겨난 일인 줄만 알면..... 이러한 전제롰허 자, 그러면 내 이야기를 시작하자. "기회(찬스)라는 것.. 2023. 3. 5.
들소 - 이문열 (아침나라) 이문열 중단편전집 1 이문열 - 들소 (1979년) ...........햇빛이 부드럽게 내리쬐는 동굴 어귀의 공터였다. 성년의 남자들은 모두 사냥을 떠나고 여인들도 젊고 힘 있는 축은 대개 야생의 열매나 낟알을 거두러 나가고 없었다. 보이는 것은 늙은이와 아이들 그리고 몇몇 특별히 남겨진 여인들뿐이었다. 여인들은 저마다 맡은 일에 분주하였다. 먹고 남은 고기로 포를 떠 말리고 있는 여인, 털가죽을 손질해 식구들의 입성을 준비하는 여인, 훑어온 강아지풀이나 돌피 같은 야생의 낟알을 널어 말리고 있는가 하면 결을 삭이기 위해 동자꽃, 지네보리, 애기똥풀, 미나리아재비 같은 거친 푸성귀를 다듬고 있었다. 그녀들 주위에는 작은 계집아이들이 언젠가는 자기들의 일이 될 그런 일들을 눈여겨 살피며 맴돌고 있었다. 사.. 2023. 3. 3.
바비도 - 김성한 (창비) 창비 20세기 한국 소설 15 김성한 - 바비도 (1956년) 바비도는 1410년 이단으로 지목되어 분형을 받은 재봉직공이다. 당시의 왕은 헨리 4세, 후일의 헨리 5세다. 일찍이 위대하던 것들은 이제 부패하였다. 사제는 토끼 사냥에 바쁘고 사교는 회개와 순례를 팔아 별장을 샀다. 살찐 수도사들을 외면하고 위클리프의 영역 복음서를 몰래 읽는 백성들은 성서의 진리를 성직자의 독점에서 뺏고 독단과 위선의 껍데기를 벗기니 교회의 종소리는 헛되이 울리고 김빠진 찬송가는 먼지 낀 공기의 진동에 불과하였다. 불신과 냉소의 집중공격으로 송두리째 뒤흔들리는 교회를 지킬 유일한 방패는 이단분형령과 스미스필드의 사형장뿐이었다. 영역 복음서 비밀독회에서 돌아온 재봉직공 바비도는 일하던 손을 멈추고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희.. 2023. 3. 2.
잉여인간 - 손창섭 (민음사) 민음사 오늘의 작가 총서 3 손창섭 - 잉여인간 (1958년) 만기 치과의원에는 원장인 서만기 씨와 간호원 홍인숙 양 외에도 거의 날마다 출근하다시피 하는 사람 둘이 있다. 그 한 사람은 비분강개파 채익준 씨요, 다른 한 사람은 실의의 인간 천봉우 씨다. 두 사람은 다 같이 서만기 원장의 중학교 동창생이다. 그들은 도리어 원장보다도 먼저 나와서 대합실에 자리 잡고 신문을 읽고 있는 날도 있었다. 더구나 채익준은 간호원보다도 일찍 나오는 수가 많았다. 큼직한 미제 자물쇠가 잠겨 있는 출입문 앞에 버티고 섰다가 간호원이 나타날 말이면 "미스 홍, 오늘은 나에게 졌구려." 익준은 반가운 낯으로 맞이하는 것이었다. 그런 날은 인순이가 아침 청소를 하는 데 한결 편했다. 한사코 말려도 익준은 굳이 양복저고리를 벗.. 2023. 2. 28.
지상에 숟가락 하나 - 현기영 (실천문학사) 현기영 - 지상에 숟가락 하나 (1999년) 살아서 박복했던 아버지는 그래도 죽음만큼은 유순하게 길들일 줄 알았나 보다. 이렇다 할 병색도 없이 갑자기 식욕을 잃더니 보름 만에 숟갈을 아주 놓아버린 것이었다. 마지막 3일은 계속 혼수 상태였다. 의사는 폐가 나빠서 노환이 좀 빨리 온 것이라고 했다. 미음죽을 입 안에 흘려넣어 봤지만, 이미 소화 기관은 기능을 잃고 항문의 괄약근은 맥없이 풀려 번번이 설사였다. 결벽증이다시피 유난히 깔끔했던 아버지는 혼수 상태에 빠져 있다가도 설사가 나올 기미이면 소스라치게 놀라깨면서 좌변기를 찾곤 했는데, 그렇게 서너 번 시달리고 난 후로는 미음죽도 거절하고 차분히 죽음을 맞이할 차비를 하던 것이다. 가쁜 숨 속에 신음 소리가 낮게 실려 있었지만 당신의 얼굴은 평온했다... 2023. 2. 28.
서편제 - 이청준 (창비) 창비 20세기 한국 소설 21 이청준 - 서편제 - 남도 사람 1 (1976년) 여자는 초저녁부터 목이 아픈 줄도 모르고 줄창 소리를 뽑아대고, 사내는 그 여인의 소리로 하여 끊임없이 어떤 예감 같은 것을 견디고 있는 표정으로 북장단을 잡고 있었다. 소리를 쉬지 않는 여자나, 묵묵히 장단 가락만 잡고 있는 사내나 양쪽 다 이마에 힘든 땀방울이 솟고 있었다. 전라도 보성읍 밖의 한 한적한 길목 주막. 왼쪽으로는 멀리 읍내 마을들을 내려다보면서 오른쪽으로는 해묵은 표지들이 길가까지 바싹바싹 다가앉은 가파른 공동묘지 - 그 공동묘지 사이를 뚫고 나가고 있는 한적한 고갯길목을 인근 사람들은 흔히 소릿재라 말하였다. 그리고 그 소릿재 공동묘지 길의 초입께에 조개껍질을 엎어놓은 듯 뿌연 먼지를 뒤집어쓰고 들앉아 있.. 2023. 2.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