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책의 향기
I. 한국 문학/2. 소설

수난이대 - 하근찬 (창비)

by handaikhan 2023. 3. 8.

창비 20세기 한국 소설 18

 

목차


한무숙
감정이 있는 심연
김광식
213호 주택
한말숙
신화의 단애
하근찬
수난 이대
왕릉과 주둔군
삼각의 집
족제비
오유권
가난한 형제
김동립
대중관리

이메일 해설 - 고용우, 이봉범
낱말풀이

..................................

하근찬 - 수난이대 (1957년)

 

진수가 돌아온다. 진수가 살아서 돌아온다. 아무개는 전사했다는 통지가 왔고, 아무개 아무개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통 소식도 없는데, 우리 진수는 살아서 오늘 돌아오는 것이다. 생각할 수록 어깻바람ㅁ이 날 일이었다. 그래 그런지 몰라도 박만도는 여느 때 같으면 아무래도 한두 군데 앉아 쉬어야 넘어설 수 있는 용머리재를 단숨에 올라채고 말았다. 가슴이 펄럭거리고 허벅지가 뻐근했다. 그러나 그는 고갯마루에서도 쉴 생각을 하지 않았다. 들 건너 멀리 바라보이는 정거장에서 연기가 물씬물씬 피어오르며 삐익 기적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아들이 타고 내려올 기차는 점심때가 가까워야 도착한다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었다. 해가 이제 겨우 산등성이 위로 한 뼘가량 떠올랐으니 오정이 되려면 아직 차례 멀었다. 그러나 그는 공연히 마음이 바빴다. 까짓것, 잠시 앉아 쉬면 뭐 할 끼고. (p.85)

 

"여보이소, 지금 몇싱교?"

맞은편에 앉은 양복쟁이한테 물어보았다.

"열시 사십분이오."

"예, 그렁교."

만도는 고개를 굽실하고는 두 눈을 연방 껌벅거렸다. 열시 사십분이라, 보자....그러면 아직도 한 시간이나 남았구나. 그는 이제 안심이 되는 듯 후유 숨을 내쉬었다. 궐련을 한 개 빼물고 불을 댕겼다. 

 정거장 대합실에 와서 이렇게 도사리고 앉아 있노라면, 만도는 곧잘 생각히는 일이 한 가지 있었다. 그 일이 머리에 떠오르면 등골을 찬 기운이 좍 스쳐 내려가는 것이었다. 손가락이 시퍼렇게 굳어진, 이끼 낀 나무토막 같은 팔뚝이 지금도 저만큼 눈앞에 보이는 듯했다. 

바로 이 정거장 마당에 백 명 남짓한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그중에는 만도도 섞여 있었다. 기차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으나, 그들은 모두 자기네들이 어디로 가는 것인지 알지를 못해다. 그저 차를 타라면 탈 사람들이었다. 징용에 끌려나가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십이삼 년 옛날의 이야기인 것이다.

북해도 탄광으로 갈 것이라는 사람도 있었고, 틀림없이 남양군도로 간다는 사람도 있었다. 더러는 만주로 가면 좋겠다고 하기도 했다. 만도는 북해도가 아니면 남양군도일 것이고, 거기도 아니면 만주겠지, 설마 저희들이 하늘 밖으로야 끌고 가겠느냐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그 들창코로 담배 연기를 푹푹 내뿜고 있었다. 그러나 마음이 좀 덜 좋은 것은 마누라가 저쪽 변소 뫁충이 벚나무 밑에 우두커니 서서 한눈도 안 팔고 이쪽만을 바라보고 있는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주머니 속에 성냥을 두고도 옆사람에게 불을 빌리자고 하며 슬며서 돌아서버리곤 했다.

플랫폼으로 나가면서 뒤를 돌아보니, 마누라는 울 밖에 서서 수건으로 코를 눌러대고 있는 것이었다. 만도는 코허리가 찡했다. 기차가 꽥꽥 소리를 지르면서 덜커덩! 하고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는 정말 덜 좋았다. 눈앞이 뿌우옇게 흐려지는 것을 어쩌지 못했다. 그러나 정거장이 까많게 멀어져가고, 차창 밖으로 새로운 풍경이 휙휙 날아들자, 그제야 아무렇지도 않아지는 것이었다. 오히려 기분이 유쾌해지는 것 같기도 했다.

바다를 본 것도 처음이었고, 그처럼 큰 배에 몸을 실ㄹ어본 것은 더구나 처음이었다. 배 밑창에 엎드려서 꽥꽥 게워내는 사람들이 많았으나, 만도는 그저 골이 좀 땡했을 뿐 아무렇지도 않았다. 더러는 하루에 두 개씩 주는 뭉칫밥을 남기기도 했으나, 그는 한꺼번에 하루것을 뚝딱해도 시원찮았다.

모두들 내릴 준비를 하라는 명령이 떨어진 것은 사흘째 되는 날 황혼 때였다. 제각기 봇짐을 챙기기에 바빴다. 만도는 호박덩이만한 보따리를 옆구리에 덜렁 찼다. 갑판 위에 올라가보니 하늘은 활활 타오르고 있고, 바닷물은 불에 녹은 쇠처럼 벌겋게 출렁거리고 있었다. 지금 막 태양이 물 위로 뚝 떨어져가는 중이었다. 햇덩어리가 어쩌면 그렇게 크고 붉은지 정말 처음이었다. 그리고 바다 위에 주황빛으로 번쩍거리는 커다란 산이 둥둥 떠 있는 것이었다. 무시무시하도록 황홀한 광경에 모두들 딱 벌어진 입을 다물 줄 몰랐다. 만도는 어깨마루를 버쩍 들어 올리면서 히야, 고함을 질러댔다. 그러나 섬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숨 막히는 더위와 강제노동과 그리고 잠자리만씩이나 한 모기떼.........그런 것뿐이었다.

섬에다가 비행장을 닦는 것이었다. 모기에게 물려 혹이 된 자리를 벅벅 긁으며 비 오듯 쏟아지는 땀을 무릅쓰고 아침부터 해가 떨어질 때까지 산을 허물어내고, 흙을 나르고 하기란 고향에서 농사일에 뼈가 굳어진 몸에도 이만저만한 고역이 아니었다. 물도 입에 맞지 않았고, 음식도 이내 변하곤 해서 도저히 견디어낼 것 같지 않았다. 게다가 병까지 돌았다. 일을 하다가도 벌떡 자빠지기가 예사였다. 그러나 만도는 아침저녁으로 약간씩 설사를 했을 뿐 넘어지지는 않았다. 물도 차츰 입에 맞아갔고, 고된 일도 날이 감에 따라 몸에 배어드는 것이었다. 밤에 날개를 치며 몰려드는 모기떼만 아니면 그냥저냥 배겨내겠는데, 정말 그놈의 모기들만은 질색이었다.

사람의 힘이란 무서운 것이었다. 그처럼 험난하던 산과 산 틈바구니에 비행장을 닦아내고야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일은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더 벅찬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연합군의 비행기가 날아들면서부터 일은 밤중까지 계속되었다. 산허리에 굴을 파 들어가는 작업이었다. 비행기를 집어넣을 굴이었다. 그리고 모든 시설을 다 굴속으로 옮겨야 하는 것이었다.

여기저기서 다이너마이트 튀는 소리가 산을 흔들어댔다. 앵앵앵하고 공습경보가 나면 일을 하던 손을 놓고 모두 굴 바닥에 납작납작 엎드려 있어야 했다. 비행기가 돌아갈 때까지 그러고 있는 것이었다. 어떤 때는 근 한 시간 가까이나 엎드려 있어야 하는 때도 있었는데, 차라리 그것이 얼마나 편한지 몰랐다. 그래서 더러는 공습이 있기를 은근히 기다리기도 했다. 때로는 공습경보의 싸이렌을 듣지 못하고 그냥 일을 계속하는 수도 있었다. 그럴 때면 모두 큰 손해를 보았다고 야단들이었다. 어떻게 된 셈인지 싸이렌이 미처 불기 전에 비행기가 산등성이를 넘어 들이닥치는 수도 있었다. 그럴 때는 정말 질겁을 했다. 가장 많이 피해를 낸 것도 그런 경우였다. 만도가 한쪽 팔뚝을 잃어버린 것도 바로 그런 때의 일이었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굴속에서 바위를 허물어내고 있었다. 바위 틈서리에 구멍을 뚫어서 다이너마이트 장치를 하는 것이다. 장치가 다 되면 모두 바깥으로 나가고, 한 사람만 남아서 불을 댕기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터지기 전에 얼른 밖으로 뛰어나와야 한다.

만도가 불을 댕기는 차레였다. 모두 바깥으로 나가버린 다음 그는 성냥을 꺼냈다. 그런데 웬 영문인지 기분이 꺼림칙했다. 모기에 물린 자리가 자꾸 쑥쑥 쑤시는 것이 아닌가. 긁적긁적 긁어댔으나 도무지 시원한 맛이 없었다. 그는 이맛살을 찌푸리면서 성냥을 득! 그었다. 그래 그런지 몰라도 불은 이내 픽 하고 꺼져버렸다. 성냥 알맹이 네 개째에서 겨우 심지에 불이 댕겨졌다. 심지어 불이 붙는 것을 보자, 그는 얼른 몸을 굴 밖으로 날렸다. 바깥으로 막 나서려는 때였다. 산이 무너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사나운 바람이 귓전을 후려갈기는 것이었다. 만도는 정신이 아찔했다. 공습이었던 것이다. 산등성이를 넘어 달려든 비행기가 머리 위로 아슬아슬하게 지나가는 것이었다. 미처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또 한 대가 뒤따라 날아드는 것이 아닌가. 만도는 그만 넋을 잃고 굴 안으로 도로 달려들어갔다. 달려들어가서 굴 바닥에 엎드리고 말았다. 그 순간이었다. 쾅! 굴 안이 미어지는 듯하면서 다이너마이트가 터졌다. 만도의 두 눈에서 불이 번쩍 했다.

만도가 어렴풋이 눈을 떠보니, 바로 거기 눈앞에 누구의 것인지 모를 팔뚝이 하나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었다. 손가락이 시퍼렇게 굳어져서 마치 이끼 낀 나무토막처럼 보이는 팔뚝이었다. 만도는 그것이 자기의 어깨에 붙어 있던 것인 줄을 알자, 그만 으악! 정신을 잃어버렸다. 재차 눈을 떴을 때는 그는 푹신한 담요 속에 누워 있었고, 한쪽 어깻죽지가 못 견디게 쿡쿡 쑤셔댔다. 절단 수술이 이미 끝난 뒤였다. (p.89-93)

(같이 읽으면 좋은 책)

한국사 100년의 기억을 찾아 일본을 걷다 - 생생한 사진으로 만나는 일제강점기 조선인 강제징용 잔혹사 - 이재갑 (살림)

................................................................................................................................................................................................

 

 땡땡땡 종이 울리자, 잠시 후 차는 소리를 지르면서 들이닥쳤다. 기관차의 옆구리에서는 김이 픽픽 풍겨 나왔다. 만도의 얼굴은 바짝 긴장되었다. 시커먼 열차 속에서 꾸역꾸역 사람들이 밀려 나왔다. 꽤 많은 손님이 쏟아져 내리는 것이었다. 만도의 두 눈은 곧장 이리저리 굴렀다. 그러나 아들의 모습은 쉽사리 눈에 띄지가 않았다. 저쪽 출입구로 밀려가는 사람들의 물결 속에 두 개의 지팡이를 짚고 절룩거리면서 걸어나가는 상이군이이 있었으나, 만도는 그 사람에게 주의가 가지는 않았다.

기차에서 내랄 사람은 모두 내렸는가보다. 이제 미처 차에 오르지 못한 사람들이 플랫폼을 이리저리 서성거리고 있을 뿐인 것이다. 그놈이 거짓으로 편지를 띄웠을 리는 없을 건데......만도는 자구 가슴이 떨렸다. 이상한 일인데.....하고 있을 때였다. 분명히 뒤에서,

"아부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만도는 깜짝 놀라며 얼른 뒤를 돌아보았다. 그 순간 만도의 두 눈은 무섭도록 크게 떠지고, 입은 딱 벌어졌다. 틀림없는 아들이었으나, 옛날과 같은 진수가 아니었다. 양쪽 겨드랑이에 지팡이를 끼고 서 있는데, 스쳐가는 바람결에 한쪽 바짓가랑이가 펄럭거리는 것이 아닌가.

만도는 눈앞이 노오래지는 것을 어쩌지 못했다. 한참 동안 그저 멍멍하기만 하다가,, 코허리가 찡해지면서 두 눈에 뜨거운 것이 핑 도는 것이었다.

"에라이 이놈아."

만도의 입술에서 모질게 튀어나온 첫마디였다. 떨리는 목소리였다. 고등어를 든 손이 불끈 주먹을 쥐고 있었다.

"이기 무슨 꼴이고, 이기."

"아부지!"

"이놈아, 이놈아....."

만도의 들창코가 크게 벌름거리다가 훌쩍 물코를 들이마셨다.

진수의 두 눈에서는 어느 결에 눈물이 꾀죄죄하게 흘러내라고 있었다. 만도는 모든 게 진수의 잘못이기나 한 듯 험한 얼굴로,

"가자, 어서!"

무뚝뚝한 한마디를 던지고는 성큼성큼 앞장을 서 가는 것이었다.

진수는 입술에 내려와 묻는 짭짤한 것을 혀끝으로 날름 핥아바리면서 절름절름 아버지의 뒤를 따랐다.

앞자서 가는 만도는 뒤따라오는 진수를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한눈을 파는 법도 없었다. 무겁디무거운 짐을 진 사람처럼 땅바닥만을 내려다보며 이따금 끙긍거리면서 부지런히 걸어만 가는 것이다. 지팡이에 몸을 의지하고 걷는 진수가 성한 사람의, 게다가 부지런히 걷는 걸음을 당해낼 수는 도저히 없었다. 한 걸음 두 걸음씩 뒤지기 시작한 것이 그만 작은 소리로 불러서는 들리지 않을 만큼 떨어져버리고 말았다. 진수는 목구멍에서 왈칵 넘어오려는 뜨거운 기운을 참느라고 어금니를 야물게 깨물어보기도 하였다. 그리고 두 개의 지팡이와 한 개의 다리를 열심히 움직여대는 것이었다. (p.94-95)

(같이 읽으면 좋은 책)

한국전쟁 - 박태균 (책과함께) 

.............................................................................

 

 주막을 나선 그들 부자는 논두렁길로 접어들었다. 조금 전처럼 만도가 앞장을 서는 것이 아니라, 이번에는 진수를 앞세웠다. 지팡이를 짚고 기우뚱기우뚱 앞서가는 아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팔뚝이 하나 밖에 없는 아버지가 느릿느릿 따라가는 것이다. 손에 매달린 고등어가 곧장 달랑달랑 춤을 춘다. 너무 급하게 들이부어서 그런지 만도의 뱃속에서는 우글우글 술이 끓고, 다리가 휘청거린다. 콧구멍으로 더운 숨을 훅훅 내뿜어본다. 정신이 아른하다. 좋다.

"진수야!"

"예."

"니 우짜다가 그래 됐노?"

"전쟁하다가 이래 안됐십니꼬. 수류탄 쪼가리에 맞았슴더."

"수류탄 쪼가리에?"

"예."

"음........."

"얼른 낫지 않고 막 썩어 들어가기 땜에 군의관이 짤라버립디더. 병원에서예."

"..........."

"아부지!"

"와?"

"이래가지고 나 우째 살까 싶습니더."

"우째 살긴 뭘 우째 살아. 목숨만 붙어 있으면 다 사는 기다. 그런 소리 하지 마라."

"................."

"나 봐라, 팔뚝이 하나 없어도 잘만 안 사나. 남 봄에 좀 덜 좋아서 그렇지. 살기사 와 못 살아."

"차라리 아부지같이 팔이 하나 없는 편이 낫겠어에. 다리가 없어노니 첫째 걸어댕기기가 불편해서 똑 죽겠심더."

"야야, 안 그렇다. 걸어댕기기만 하면 뭐 하노. 손을 제대로 논려야 일이 뜻대로 되지."

"그럴까예?"

"그렇다니까, 그러니까 집에 앉아서 할 일은 니가 하고, 나댕기메 할 일은 내가 하고, 그라면 안되겠나, 그제?"

"예."

진수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아버지를 돌아보았다. 만도는 돌아보는 아들의 얼굴을 향해서 지그시 웃어주었다. (p.98-99)

 

개천 둑에 이르렀다. 외나무다리가 놓여 있는 그 시냇물이다. 진수는 슬그머니 걱정이 되었다. 물은 그렇게 깊은 것 같지 않지만, 밑바닥이 모래흙이어서 지팡이를 짚고 건너가기가 만만할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외나무다리는 도저히 건너갈 재주가 없고......진수는 하는 수 없이 둑에 퍼지르고 앉아서 바짓가랑이를 걷어 올리기 시작했다.

만도는 잠시 멀둥히 서서 아들의 하는 양을 내려다보고 있다가,

"진수야, 그만두고, 자아, 업자."

하는 것이었다.

"업고 건너면 일이 다 되는 거 아니가, 자아, 이거 받아라."

고등어 묶음을 진수 앞으로 내민다.

진수는 퍽 난처해하면서 못 이기는 듯이 그것을 받아 들었다. 만도는 등어리를 아들 앞에 갖다내고 하나밖에 없는 팔을 뒤로 버쩍 내밀며,

"자아, 어서!"

진수는 지팡이와 고등어를 각각 한 손에 쥐고, 아버지의 등어리로 가서 슬그머니 업혔다. 만도는 팔뚝을 뒤로 돌리면서 아들의 하나뿐인 다리를 꼭 안았다. 그리고

"팔로 내 목을 감아야 될 끼다."

했다.

진수는 무척 황송한 듯 한쪽 눈을 찍 감으면서 고등어와 지팡이를 든 두 팔로 아버지의 목줄기를 부둥켜안았다.

만도는 아랫배에 힘을 주며 끙 하고 일어났다. 아랫도리가 약간 후들거렸으나 걸어갈 만은 했다. 외나무다리 위로 조심조심 발을 내디디며 만도는 속으로, 이제 새파랗게 젊은 놈이 벌써 이게 무슨 꼴이고, 세상을 잘못 만나서 진수 니 신세도 참 똥이다 똥. 이런 소리를 주워섬겼고, 아버지의 등에 업힌 진수는 곧장 미안스러운 얼굴을 하며,

"나꺼정 이렇게 되다니 아부지도 참 복도 더럽게 없지. 차라리 내가 죽어버렸더라면 나았을 낀데...."

하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만도는 아직 술기가 약간 있었으나, 용케 몸을 가누며 아들을 업고 외나무다리를 조심조심 건너가는 것이었다.

눈앞에 우뚝 솟은 용머리재가 이 광경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p.100-101)

 

<한국일보> (1957.1.1)

<한국소설문학대계> 37권 (동아출판사 1995)

  

..............................................................................................................................................................................................................................

하근찬(河瑾燦, 1931년 10월 21일 ~ 2007년 11월 25일)

대한민국의 소설가이다.

경상북도 영천 출신. 전주사범학교 재학 중이던 1945년 교원 시험에 합격하여 1954년까지 초등학교 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1954년부산 동아대학교 토목과에 입학하였으나 군대 문제 등의 이유 때문에 1957년 중퇴하였다. 1957년 군에 입대했으나 그 다음 해 의병제대한다. 이후 작품 활동을 계속하면서 1969년 전업 작가 생활을 시작하기까지 『교육주보』, 『대한 새교실』 등 교육 관련 잡지의 기자로 직장 생활을 하였다. 이후 소설 창작에 전념하여 많은 작품을 생산했으며, 2007년 11월 25일 작고하였다.

1957년 단편소설 「수난 이대」가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이후 1959년에 발표한 「흰 종이수염」이 문단을 주목을 받으면서 본격적으로 창작 활동을 하게 된다.
하근찬은 민중들이 험난한 역사의 격랑에 휩쓸려 당하는 고난을 주로 다루었다. 하근찬의 문학은 역사에서 주로 소재를 취했다는 점에서 역사물이라 할 수 있고, 민중의 수난을 주로 다루었다는 점에서 민중문학이라 할 수 있다.
하근찬의 작품 가운데 「수난 이대」와 「흰 종이수염」은 일제 강점기 말에서 6·25전쟁에 이르는 험난한 시기 경상북도 농촌 지역의 평범한 사람들이 겪는 수난과 그것에서 생겨난 그들의 고통과 슬픔을 밀도 있게 그린 뛰어난 수난의 문학이다. 두 작품이 오랫동안 중고등학교 국어 및 문학 교과서에 수록될 수 있었던 것은 이 때문이다.
하근찬 문학에 등장하는 수난당하는 민중은 고통스러워하고 깊이 슬퍼하지만 쓰러지지 않고 앞길을 열며 어기차게 나아가는 의지의 소유자들이라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하근찬 문학은 고통과 슬픔 속에서 솟아오르는 희망과 의지를 품고 있는 문학인 것이다.
1972년에 간행된 장편 「야호」는 야호(요강)가 상징하는 여성의 삶을 그린 것인데 여성 수난사를 다룬 우리 소설 가운데 대표작으로 평가받는다. 그의 작품 대부분과 마찬가지로 무대는 경북 영천의 농촌이다. 이 마을 출신의 여인 갑례의 삶이 중심내용이니, 이른바 ‘여자의 일생'형 소설이다. 대동아전쟁에서 정점에 이르는 일제 통치의 폭력성과 6·25전쟁의 폭력성은 그녀의 삶을 휩쓸어 파괴하고 상처 입힌다. 무력하기에 속수무책, 일방적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대대로 물려온 ‘야호'에는 다산과 부부화락을 비는 기원이 깃들었지만 그러나 갑례 당대를 살았던 대부분 농촌 여인네들의 삶은 갑례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니 갑례의 여로는 곧 그녀들의 여로이다.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어찌 농촌 여인들의 삶만 그러했겠는가. 이 시대 평범한 조선인들 일반의 삶이 그러했으니 그녀의 여로는 곧 그들의 여로이고 그것은 우리의 파행적인 근대사의 흐름에 대응한다. 작가의 역사해석은 소박하지만, 그러나 지극한 애정에서 비롯된 연민의 눈으로 그려내는 평범한 농민들의 수난상은 더 깊은 역사해석에 기초한 어떤 작품들의 그것보다 절실함과 호소력을 지니고 있다.
그 밖에 주요 작품으로는 장편 「남한산성」(1979), 「월례는 본래 그런 여자가 아니었습니다-월례소전」(1981), 「산에 들에」(1984) 등과 중편 「기울어지는 강」(1972)과 「직녀기」(1973) 및 단편 「왕릉과 주둔군」(1963), 「일본도」(1971), 「임진강 오리떼」(1976) 등이 있다.

 

.............................................

 내 마음의 풍금 - 하근찬 (바다출판사)

흰종이수염 - 하근찬 (다림)

수난이대 - 하근찬 (사피엔스21)

수난이대 - 하근찬 (범우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