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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

I. 한국 문학/2. 소설82

통도사 가는 길 - 조성기 (민음사) 민음사 오늘의 작가 총서 13 목차 통도사 가는 길 불일폭포 우리 시대의 소설가 영화구경 우리 시대의 무당 위대한 창녀 공습경보 한 문장이 채 되지 않는 이야기 홍소령기 만화경 하얀 가시관 커튼 속 유년 광시곡 ....................................................... 조성기 - 통도사 가는 길 (1992년) 나는 왜 통도를 ' 通 道'로 알았을까. 배낭 하나를 어깨에 메고 훌쩍 여행길에 올랐습니다. 실직자도 아니면서 언제나 마음만 먹으면 여행을 할 수 있다는 것도 여간 큰 특권이 아닙니다. 내 친구 변호사는 자기도 자유직이라면서, 하루 동안 임의로 사무실에 나가지 않고 식으로 술집 아가씨를 고향으로 데려다주고 온 이야기를 진지하게 한 적이 있었는데, 그 친구도 .. 2024. 3. 9.
도시와 유령 - 이효석 (홍신문화사) 이효석 - 도시와 유령 (1928년, 조선지광) 어슴푸레한 저녁, 몇 리를 걸어도 사람의 그림자 하나 찾아볼 수 없는 무아지경인 산골짝 비탈길, 여우의 밥이 다 되어 버린 해골덩이가 똘똘 구르는 무덤 옆, 혹은 비가 축축이 뿌리는 버덩의 다 쓰러져 가는 물레방앗간, 또 혹은 몇 백 년이나 묵은 듯한 우중충한 늪가! 거기에는 흔히 도깨비나 귀신이 나타난다 한다. 그럴 것이다. 고요하고, 축축하고 우중충하고, 그리고 그것이 정칙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그런 곳에서 그런 것을 본 적은 없다. 따라서 그런 것에 관하여서는 아무 지식도 가지지 못하였다. 하나 - 나는 자랑이 아니라 - 더 놀라운 유령을 보았다. 그러고 그것이 적어도 문명의 도시인 서울이니 놀랍단 말이다. 나는 그래도 문명을 자랑하는 서울에.. 2024. 1. 8.
장마 - 윤홍길 (민음사) 민음사 오늘의 작가 총서 7 윤홍길 - 장마 (1973년) 밭에서 완두를 거두어들이고 난 바로 그 이튿날부터 시작된 비가 며칠이고 계속해서 내렸다. 비는 분말처럼 몽근 알갱이가 되고, 때로는 금방 보꾹이라도 뚫고 쏟아져내릴 듯한 두려움의 결정체들이 되어 수시로 변덕을 부리면서 칠흑의 밤을 온통 물걸레처럼 질펀히 적시고 있었다. (p.7) 아버지와 구장어른은 빈손으로 돌아왔다. 아버지가 헛걸음을 한 것이 우리에겐 삼촌이 실제로 돌아온 거나 다름없는 경사였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여느 때와 매일반으로 별로 말이 없는 게 이상했다. 아버지의 얼굴에는 성질이 전혀 다른 두 개의 표정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적이 안심이 되는 한편 더욱더 착잡해지기도 하는 듯한 두 개의 얼굴이 수시로 변덕을 부리며 엇갈리고 있었다.. 2023. 12. 29.
수라도 - 김정한 (창비) 창비 20세기 한국 소설 11권 목차 안수길 목축기 제3인간형 김정한 사하촌(寺下村) 추산당과 곁사람들 모래톱 이야기 수라도(修羅道) ....................................... 김정한 - 수라도 (1969년) "저 애씨는 시집 몬 갈까봐 불공 디리러 왔나? 이 비좁은 방에 온!" "와 그라노, 우리 부체새끼를....그라지 마라, 내 손지다." 아직 불당답게 채 꾸며지지도 않은 방 안벽받이에 안치된 커다란 돌부처 곁에 빠듯이 끼어 앉아 있는 소녀는, 겨우 여남은 살 될까 말까 하는 나이다. 소복 차림의 보살할머니들이 웅성대는 양을 눈여겨 보고 있던 소년, 별안간 자기를 놀려주는 핀잔 소리에 눈이 오끔해지다가, 할머니 가야부인의 감싸주는 말이 떨어지자 모두들 딱다그르 하고 웃는 .. 2023. 9. 22.
모래톱 이야기 - 김정한 (창비) 창비 20세기 한국 소설 11권 목차 안수길 목축기 제3인간형 김정한 사하촌(寺下村) 추산당과 곁사람들 모래톱 이야기 수라도(修羅道) ....................................... 김정한 - 모래톱 이야기 (1966년) 이십 년이 넘도록 내처 붓을 꺾어오던 내가 새삼 이런 글을 끼적거리게 된 건 별안간 무슨 기발한 생각이 떠올라서가 아니다. 오랫동안 교원 노릇을 해오던 탓으로 우연히 알게 된 한 소년과, 그의 젊은 홀어머니, 할아버지, 그리고 그들이 살아오던 낙동강 하류의 어떤 외진 모래톱 - 이틀에 관한 그 기막힌 사연들조차, 마치 지나가는 남의 땅 이야기나, 아득한 엣날이야기처럼 세상에서 버려져 있는 데 대해서까지는 차마 묵묵할 도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p.149) '섬 얘.. 2023. 9. 20.
길위의 집 - 이혜경 (민음사) 오늘의 작가 총서 18 이혜경 - 길위의 집 (1995년) 낯선 진동음이 은용의 몸을 들까부른다. 은용은 우무처럼 점성이 강한 공기에 갇혀 있어서, 진동은 제 파장을 한 번 굴절시킨 다음에야 전달된다. 은용은 팔을 헤집어, 끈덕지게 들러붙는 공기층을 걷어낸다. 저 소리, 저 소리가 나를 부르는 소리지. 그런데 공기가 왜 이리 끈적거리지? 이걸 어떻게 걷어내지? 은용은 허우적거리다 눈을 번쩍 뜬다. "아가씨, 아가씨, 전화 받아요." 입 밖에 나오지 못한 외침을 흡, 삼키며 은용은 눈을 떴다. 흐릿한 빛살 아래 올케의 얼굴이 대각선으로 비쳤다. 고개를 들며 몸을 일으키자, 쪼그리고 앉은 올케가 제대로 보였다. 은용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쳐들었다. 링거 방울은 여전히 무덤덤하게 떨어지고 있었다. 그새 잠들었던.. 2023. 9. 7.
배드민턴 치는 여자 - 신경숙 (문학과지성사) 신경숙 - 배드민턴 치는 여자 (1992년) 그녀는 의자 위에서 몸을 약간 기울어지게 해본다. 처음엔 그녀 혼자 창 쪽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거기 앉아 있었다. 그러다가 빗소리와 함께 차차 그가 느껴졌다. 아니다. 그렇게 늦게는 아니다. 그녀는 새벽녘이 다 되어 겨우 잠이 들었었다. 그 잠을 아침까지 잇지 못하고 동이 트기도 전에 다시 눈이 떠졌을 때, 그때도 그의 얼굴이 바로 눈앞에서 그녀를 그윽히 내려다보았었다. 이제 일어났니? 그는 가만 웃는 것도 같았다. 마치 그녀가 잠 깨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그녀는 그 환영을 외면하기 위해 눈을 질끈 감았고, 그래서 그는 잠시 사라진 듯했다. 그러나 사라진 게 아니라 그가 먼저 창가의 의자로 가 앉아 있었을까? 맨 먼저 눈을 뜨자마자 그의 얼굴을 생각해내고.. 2023. 8. 9.
풍금이 있던 자리 - 신경숙 (문학과지성사) 신경숙 - 풍금이 있던 자리 (1992년) 어느 동물원에서 있었던 일이다. 한 마리의 수컷 공작새가 아주 어려서부터 코끼리거북과 철망 담을 사이에 두고 살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 주고받는 언어가 다르고 몸집과 생김새들도 너무 다르기 때문에 쉽게 친해질 수 있는 사이가 아니었다. 어느덧 수공작새는 다 자라 짝짓기를 할 만큼 되었다. 암컷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서는 그 멋진 날개를 펼쳐보여야만 하는데 이 공작새는 암컷 앞에서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는 엉뚱하게도 코끼리거북 앞에서 그 우아한 날갯짓을 했다. 이 수공작새는 한평생 코끼리거북을 상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했다....알에서 갓 깨어난 오리는 대략 12-17시간이 가장 민감하다. 오리는 이 시기에 본 것을 평생 잊지 않는다. - 박시.. 2023. 8. 9.
젊은 날의 초상 - 이문열 (민음사) 「젊은 날의 초상」은 1979년에 발표한 「그해 겨울」, 1981년에 발표한 「하구」와 「우리 기쁜 젊은 날」을 1981년에 민음사에서 묶어 출간한 3부작 연작 소설이다. 이문열 - 젊은 날의 초상 (1991년) 목차 1부 하구 2부 우리 기쁜 젊은 날 3부 그해 겨울 .................................................... 이문열 - 젊은 날의 초상 (1991년) 흔히 나이가 그 기준이 되지만, 우리 삶의 어떤 부분을 가리켜 특히 그걸 꽃다운 시절이라든가 하는 식으로 표현하는 수가 있다. 그러나 세상 일이 항상 그러하듯, 꽃답다는 것은 한번 그늘지고 시들기 시작하면 그만큼 더 처참하고 황폐하기 마련이다. 내가 열아홉 나이를 넘긴 강진에서의 열 달 남짓이 바로 그러하.. 2023. 7. 14.
천하무적 - 김남일 (창비) 창비 20세기 한국소설 (45권) 목차 김남일 천하무적 김영현 포도나무집 풍경 벌레 공지영 인간에 대한 예의 고독 김하기 살아 있는 무덤 주인석 광주로 가는 길 .......................................... 김남일 - 천하무적 (1991년) 어린 시절 밤하늘을 쳐다보다 문득 저 우주에 끝은 있을까 하고 생각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당신은 이미 알고 있다. 시작이 있는 것은 끝이 있고, 시작이 없으면 끝도 없다는 것을. 그런데 문제는 밤하늘이다. 만일 저 밤하늘에 끝이 있다면 그 바깥은 무엇일까? 가령 하늘을 나는 돛단배를 타고 끝없이 끝없이 자꾸만 가면 갑자기 툭 떨어지는 가파른 낭떠러지라도 나타나게 될 터인가? 아니면 우주란 처음부터 끝까지 그저 무궁한 미궁이란 말인지.. 2023. 7.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