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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
I. 한국 문학/2. 소설

젊은 날의 초상 - 이문열 (민음사)

by handaikhan 2023. 7. 14.

 

「젊은 날의 초상」은 1979년에 발표한 「그해 겨울」, 1981년에 발표한 「하구」와 「우리 기쁜 젊은 날」을 1981년에 민음사에서 묶어 출간한 3부작 연작 소설이다.

 

이문열 - 젊은 날의 초상 (1991년)

 

목차

1부 하구

2부 우리 기쁜 젊은 날

3부 그해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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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열 - 젊은 날의 초상 (1991년)

 

흔히 나이가 그 기준이 되지만, 우리 삶의 어떤 부분을 가리켜 특히 그걸 꽃다운 시절이라든가 하는 식으로 표현하는 수가 있다. 그러나 세상 일이 항상 그러하듯, 꽃답다는 것은 한번 그늘지고 시들기 시작하면 그만큼 더 처참하고 황폐하기 마련이다. 내가 열아홉 나이를 넘긴 강진에서의 열 달 남짓이 바로 그러하였다.

강진은 이름처럼 낙동강이 다하여 남해바다와 합쳐지는 곳에 자리잡은 포구로, 마을 앞을 흐르는 것은 넓은 대로 아직 강의 형태를 하고 있었지만 물은 거기서부터 육십 리 상류까지 이미 소금물이었ㄷ. 행정구역으로는 그 무렵 갓 직할시가 된 부산시에 속해 있었는데 대도회의 일부라는 표지는 겨우 잊을 만하면 나타나던 시내 버스 정도였다.

내가 그곳에 가게 된 경위나 그때의 내 신세를 생각하면 지금도 약간은 한심하다. 그 열흘 전쯤 나는 어느 낯선 도시의 싸구려 하숙방에서 형에게 길고 간곡한 편지를 썼었다. 이것저것 사업에 실패를 거듭하다 그곳 강진까지 밀려나 조그만 발동선으로 모래 장사를 하고 있던, 세상에서 하나뿐이고 또 내게는 아버지나 크게 다를 바 없는 형이었다.

나는 그 편지에서 우선 목적 없는 내 떠돌이 생활의 쓰라림과 서글픔을 은근하게 과장하고, 속절없이 늘어만 가는 나이에 대한 초조와 불안을 숨김없이 털어놓았다.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는 내 믿음과는 달리 정말로 그때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벌써부터 어른들처럼 머리를 길게 길러 넘기고 어른들의 옷을 입고, 술이며 담배 같은 어른들의 악습과 심지어는 그들의 시시껄렁한 타락까지 흉내내고는 있었지만 나이로는 여전히 아이도 어른도 아니었으며, 정규의 학교 과정은 밟지 않고 있었으나 또한 책과 지식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생활도 아니어서 학생이랄 수도, 건달이랄 수도 없었다. 당시의 내 깊은 우려 중의 하나는 이대로 가다가는 평균치의 삶조차 누리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는데 나는 그것도 솔직하게 썼다. 그리고 함부로 뛰쳐나온 형의 그늘에 대한 진한 향수를 내비침과 함께, 만약 다시 받아들여만 준다면 지난날의 나로 돌아가, 무분별한 충동으로 턱없이 헝클어놓은 삶을 정리하고, 늦었지만 가능하면 모든 점에서 새로이 시작해 보고 싶다고 썼다.

답장은 곧 왔다. 벌써 오래 전부터 나에게 비난이나 충고 하기를 단념한 형은 지극히 담담하게 쓰고 있었다. 내 앞날에 대해서는 더 이상 간섭하고 싶지 않으나 어쨌든 그쯤에서 삶을 한번 정리해 보려고 생각한 것은 잘한 일 같다고.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전만 같지 못해 새로 결정한 일에 대해서 자신은 큰 힘이 되지 못할 것이며, 돌아오는 것은 기꺼이 허락하겠으나 그곳에 오더라도 최소한 내가 필요한 것은 스스로 마련해야 할 것이라고. 그리고 많지 않은 나이로 집을 나가 이 년 가까이 떠돌고 있는 혈육에게 스스로 생각하기에는 너무 지나치게 냉정했다는 생각이 들었던지, 난데없이 나를 업고 백 릿길을 걸었다는 6.25에 대한 감상적인 회상과 함께 내가 이 세상에서는 자신의 유일한 혈육이라는 것을 잠시도 잊은 적이 없었노라고 덧붙이고 있었다.

아아, 그리운 형님....편지를 읽고 나는 갑자기 콧마루가 시큰해지며 후회와도 흡사한 느낌에 젖어들었다. 입학한 지 일 년도 못 돼 고등학교에서 쫓겨나기 전만 해도, 그리하여 무분별한 충동 속에 집을 나선 후, 깊은 수렁과도 같은 떠돌이 생활에 재미를 붙이기 전만 해도 나는 정말로 얼마나 사랑받고 기대되던 아우였던가.

거기다가 실은 나도 어지간히 지쳐 있었다. 내가 형에게 편지를 낼 무렵의 일기장을 보면 이런 되다 만 시구가 눈에 띈다.

 

지상의 모든 방랑자들이

거룩한 안식을 노래하던 저녁도

나는 어둡고 낯선 길 위에서

피로를 슬픔 삼아 울었노라.

 

형의 답장이 유달리 감격스러웠던 데는 그 피로도 분명 한몫을 하고 있었다. (p.9-11)

 

<그란데 그 환상은 이복형이 나타나자부터 금가기 시작했지. 그는 아부지의 공소시효가 만료되자마자 행방을 찾아 나선 기라. 그라고 몇 년 만에 겨우 찾은 기 바로 지난 초가을이제.

그는 아부지를 뫼시고 가겠다고 떼를 쓰데. 글치만 아부지는 딱 잡아뗐어. 아까맨치로 자기는 이미 이십 년 전에 죽었다는 기라. 나는 그걸 일찍이 소중하게 품었던 이념에 대한 울아부지의 신의로 생각했어. 그란데 인자 보이, 그기 아잉 기라.

울아부지는 지난 이십 년 동안 불안하게 숨어 산 죄인이었을 뿐이라. 말하자면 공소시효가 차도 여전히 남아 있는 죄의식이 귀향을 가로막았을 뿐이었던 기지. 메칠 전에 아부지는 내보고 카더라. 이념이라 카는 거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 긴데 우리는 뭔가 잘못돼 그놈의 이념을 위해 인간이 죽었다고. 그리고 또 카더라. 한번 손에 묻은 고향 사람의 피는 죽기 전에는 절대 씻어지지 않는다꼬. 따라서 자기는 그 피의 임자들이 묻혀 있고 또 그 자손과 친척이 살고 있는 고향땅을 밟아서는 안 된다꼬.

다시 말하믄 아부지는 법과 국가가 용서해도, 자신은 자신을 용서할 수 없다는 기라. 도덕적으로 가치 있는 깨달음일는지는 몰라도 나로서는 왠지 허전해. 나는 울아부지가 초라한 도덕가가 되기보다는 비극적인 반역자이길 바랐거덩....이념 따우는 상관없이 그저 한 실패한 영웅으로 죽기를 바랐거덩....내 말 니 이해하겠제?">

물론 나는 그 미묘한 감정의 논리를 이해했다. 나는 그와 동갑이었고, 사물은 종종 그 실질보다는 외관으로 우리의 인식을 지배하던 때였으니까. 그러나 한편으로는 서 노인에 대한 깊은 동정도 금할 수 없었다. 그랬었구나, 아아, 그랬었구나...(p.63-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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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열(李文烈, 1948년 5월 18일 ~ )

대한민국의 소설가이며, 한국외국어대학교 석좌교수이다. 본관은 재령이다.

서울시 종로구 청운동에서 태어났다. 한국 전쟁 당시 공산주의자였던 아버지 이원철(李元喆)이 홀로 월북하였다. 아버지 이원철(일명 김환영)이 월북한 이후 그는 어머니 조남현(曹南鉉)의 슬하에서 5남매가 경상북도 영양군 등지를 떠돌아다니며 어렵게 살았다.
초등학교 졸업을 제외하고는 모두 검정고시이며, 이후 안동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1965년 안동고등학교를 중퇴하고 한동안 방황하다가 검정고시에 합격하고 1968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에 입학했다. 1970년에는 사법시험에 응시한다며 서울대학교 국어교육과를 중퇴하였다. 그러나 연좌제 등 여러 이유로 뜻을 이루지 못한다.
사법시험에 실패한 뒤 1973년 결혼과 동시에 군대에 입대했다. 그의 이런 생활이 기초가 되어 자전적 소설인 《젊은 날의 초상》을 쓰게 된다.

1977년 단편 《나자레를 아십니까》가 대구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가작으로 당선되면서 문인으로 등단했다. 이어 '대구매일신문' 편집기자를 지냈다. 1979년에는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새하곡(塞下曲)》이 당선되었다. 같은 해 중편 《사람의 아들》로 ‘오늘의 작가상’을 받으면서 왕성한 창작활동을 전개하여 1980년대에 가장 많은 독자를 확보한 작가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그의 소설의 특징은 탄탄한 구성과 문장의 탁월함으로, 자전적 요소가 강하게 드러나 있다. 주요작품으로는 《젊은날의 초상》(1981) 《황제를 위하여》(1982) 《영웅시대》(1987) 《변경(邊境)》 등이 있으며 《사람의 아들》 《그해 겨울》 《금시조》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등 소설집과 평역서인 《삼국지》와 《수호지》, 《초한지》가 있다. 또한, 동인문학상, 대한민국문학상, 이상문학상, 호암상(예술상) 등을 수상하였다.
한편 유신과 제5공화국의 권위주의적인 통치를 빗댄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을 통해 유명해졌다. 작품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서 반장 엄석대의 합법을 가장한 폭력, 규율을 가장한 폭력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폭력의 의미를 다시 보게 하였는데, 이는 박정희, 전두환 정권의 권위주의적인 태도를 희화, 풍자한 것이기도 했다. 작가 본인이 밝히기를, 작품 전반에 나오는 국민학교 5학년 때의 담임 선생님은 폭력적이고 반민주적인 독재 정권을 실리에 따라서 허락한 6~70년대 미국 외교 정책이고, 후반부에 등장하여 엄석대를 박살내놓은 6학년 때의 담임 선생님은 '경직되고 권위적인 이념'을 가리킨다. 세종대학교에서 교수직을 맡았으며, 1998년부터 부악문원의 대표로 있다. 작품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등의 작품들이 프랑스어, 스페인어, 독일어, 영어, 일본어 등으로 그의 작품이 번역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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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를 위하여 - 이문열 (민음사 세계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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