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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

I. 한국 문학/3. 시15

낙화 - 이형기 이형기 - 낙화 이형기 - 낙화(落花)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 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이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 2024. 3. 24.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 유하 (문학과지성사)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1 -어떤 배나무숲에 관한 기억 압구정동에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라는 카페가 생겼다 온통 나무 나무로 인테리어한 나무랄 데 없는…… 그 옆은 뭐, 매춘의 나영희가 경영한대나 시와 포르노의 만남 또는 충돌…… 몰래 학생 주임과의 충돌을 피하며 펜트하우스를 팔고 다니던, 양아치란 별명을 가진 놈이 있었다 빨간 책과 등록금 영수증을 교환하던 녀석, 배나무숲 너머 산등성이 그애의 집을 바라볼 때마다 피식, 벌거벗은 금발 미녀의 꿀배 같은 유방 그 움푹 파인 배꼽 배…… 배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는 밤이면 옹골지게 익은 배가 후두둑 후두둑 녀석은 도둑고양이처럼 잽싸게 주워담았다 배로 허기진 배를 채운 새벽, 녀석과 난 텅 빈 신사동 사거리에서 유령처럼 축구를…… 해골바가지…….. 2023. 3. 21.
사평역에서 - 곽재구 (창비) 곽재구 - 사평역에서 (1981)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름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 2023. 3. 19.
향수 - 정지용 (휴먼앤북스) 향수 - 정지용 (한국대표시인 시선 5)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조름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립어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든 곳, -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의와 아무러치도 않고 여쁠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안해가 따가운 해ㅅ살을 등에지고 이삭 줏던 곳, -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석근 별 알수도 .. 2023. 2. 5.
사슴 - 노천명 (미래사) 노천명 시집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이 향그러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보다 물 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내고는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데 산을 쳐다본다. 노천명은 의 두 가지 존재양ㅅ힉, 과 를 문학정신(시세계)의 양대 지주로 하여 창작활동을 전개한다. 그런데 그 두 개의 이 가장 성공적으로 배합된 작품이 바로 이다. 이 시는 한 마리 사슴을 스케치한 한 폭의 그림이다. 그런데 이 시는 사슴의 전모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모가지 잇아만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는 지체가 어떻게 생겼든 관여하지 않는 의식 위주의 선언이 도사리고 있다. 아울러, 두상의 외형적 동작을 묘사함으로써 지성적 사유의 우위성을 들고 나온 그는, 다.. 2023. 2. 5.
김소월 시집 - 김소월 (범우사) 김소월 시집 (사루비아총서402) 김소월 - 진달래꽃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우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 (p.9) 김소월 -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봄 가을 없이 밤마다 돋는 달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이렇게 사무치게 그리울 줄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달이 암만 밝아도 쳐다볼 줄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이제금 저 달이 설움인 줄은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p.43) 김소월 - 가는 길 그립다 말을 할까 하니 그리워 그냥 갈까 그래도 다시 더 한번.... 저 산에도 까마귀, 들에 까마귀, 서산에는 해진다고 지저귑니다. .. 2023. 2. 1.
이육사의 시와 산문 - 이육사 (범우사) 이육사의 시와 산문 - 이육사 (범우 사루비아 총서 407) 이육사 - 광야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때도 참아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여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나리고 매화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p.14-15) 이육사 - 청포도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절이주절이 열리고 먼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 온다고 .. 2023. 2. 1.
김영랑 시집 - 김영랑 (범우 사루비아총서 416) 김영랑 시집 - 사루비아총서 김영랑 - 모란이 피기까지는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윈 설움에 잠길 테요 5월 어느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으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 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p.7) 김영랑 - 마당 앞 맑은 새암을 마당 앞 맑은 새암을 들여다 본다 저 깊은 땅 밑에 사로잡힌 넋 있어 언제나 먼 하늘만 내려다 보고 계심 같아 별이 총총한 맑은 새암을 들여다 본다 저 깊은 땅 속에 편히 누운 넋 있어.. 2023. 2. 1.
님의 침묵 - 한용운 (문학과 현실사) 한용운 - 님의 침묵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 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 놓고 뒤 걸음 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 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 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 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은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으로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 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 2023. 2. 1.
귀천 - 천상병 (미래사)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 천상병 (미래사) 천상병 - 귀천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 천.. 2023. 2.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