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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

I. 한국 문학/2. 소설83

백제의 미소 - 문순태 (금성출판사) 한국대표문학 28 문순태 - 백제의 미소 (1973년) 못 먹어 핏기라고는 하나 없이, 얼굴이 누르퉁퉁하고 부석부석한, 여남은살쯤 되어 보이는 같은 또래의 아이들이, 끝이 무지러진 부엌칼로 송기를 뭉떵뭉떵 벗겨 망태기에 집어넣고 있었다. 아이들은 송기를 벗기면서, 입안이 싸아하게 느껴지는 그 쫄깃쫄깃한 송기떡을 생각했다. 망태기가 무춤하게 송기를 벗긴 그들은 배가 고픈지 넓적넓적한 누리장나무 잎을 주욱주욱 훑어 한입에 넣고, 잎속에 든 벌레까지도 와작와작 씹어먹었다. 누리장나무 잎은 누리척지근한 누린내가 나는 것 같지만, 오랫동안 씹으면 끈적거리면서 달짝지근해지는 맛이 좋았다. 아이들은 소매끝이 떨어져 너덜너덜하고 누덕누덕 기운 옷을 입고 있었으며, 댕기도 땋지 않은 까치둥우리처럼 부스스한 머리에 지푸라.. 2023. 4. 29.
뽕 - 나도향 (홍신문화사) 홍신 한국 대표 단편선 7 목차 나도향 물레방아 벙어리 삼룡이 뽕 김성한 바비도 5분간 암야행 손창섭 잉여인간 조명희 낙동강 ............................................... 나도향 - 뽕 (1925년) 안협집이 부엌으로 물을 길어 가지고 들어오매 쇠죽을 수던 삼돌이란 머슴놈이 부지깽이로 불을 헤치면서, "어젯밤에는 어디 갔었습던교?" 하며 불밤송이 같은 머리에 외수건을 질끈 동여 뒤통수에 슬쩍 질러 맨 머리를 번쩍 들어 안협집을 훑어본다. "남 어데 가고 안 가고, 임자가 알아 무엇할게요?" 안협집은 별 꼴사나운 소리를 듣는다는 듯이 암상스러운 눈을 흘겨보며 톡 쏴 버린다. 조금이라도 염량이 있는 사람 같으면 얼굴빛이라도 변하였을 것 같으나 본시 계집의 궁둥이라면 염.. 2023. 4. 29.
벙어리 삼룡이 - 나도향 (홍신문화사) 홍신 한국 대표 단편선 7 목차 나도향 물레방아 벙어리 삼룡이 뽕 김성한 바비도 5분간 암야행 손창섭 잉여인간 조명희 낙동강 ............................................... 나도향 - 벙어리 삼룡이 (1925년) 내가 열 살이 될락말락한 때이니까 지금으로부터 십사오 년 전 일이다. 지금은 그곳을 청엽정이라 부르지만 그때는 연화봉이라고 이름하였다. 즉 남대문에서 바로 내다보며는 오정포가 놓여 있는 산등성이가 있으니 이쪽이 연화봉이요, 그새에 있는 동네가 역시 연화봉이다. 지금은 그곳에 빈민굴이라고 할 수밖에 없이 지저분한 촌락이 생기고 노동자들밖에 살지 않는 곳이 되어 버렸으나 그때에는 자기네만은 행세한다는 사람들이 있었다. 집이라고는 십여 호밖에 있지 않았고 그곳에 .. 2023. 4. 29.
물레방아 - 나도향 (홍신문화사) 홍신 한국 대표 단편선 7 목차 나도향 물레방아 벙어리 삼룡이 뽕 김성한 바비도 5분간 암야행 손창섭 잉여인간 조명희 낙동강 ............................................... 나도향 - 물레방아 (1924년) 덜컹덜컹 홈통이 들었다가 다시 쏟아져 흐르는 물이 육중한 물레방아를 번쩍 쳐들어다가 쿵 하고 확 속으로 내던질 제, 머슴들의 콧소리는 허연 겻가루가 켜켜이 앉은 방앗간 속에서 청승스럽게 들려 나온다. 솰솰솰, 구슬이 되었다가 은가루가 되고 댓줄기같이 뻗치었다가 다시 쾅쾅 쏟아져 청룡이 되고 백룡이 되어 용솟음쳐 흐르는 물이 저쪽 산모퉁이를 십 리나 두고 돌고 다시 이쪽 들 복판을 오 리쯤 꿰뚫은 뒤에, 이방원이가 사는 동네 앞 기슭을 스쳐 지나가는데 그 위에 물레.. 2023. 4. 29.
병신과 머저리 - 이청준 (열림원) 이청준 - 병신과 머저리 (1966년) 화폭은 이 며칠 동안 조금도 메워지지 못한 채 넓게 나를 압도하고 있었다. 학생들이 돌아가버린 화실은 조용해져 있었다. 나는 새 담배에 불을 붙였다. 형이 소설을 쓴다는 기이한 일은, 달포 전 그의 칼끝이 열 살배기 소녀의 육신으로부터 그 영혼을 후벼내버린 사건과 깊이 관계가 되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그 수술의 실패가 꼭 형의 실수라고만은 할 수 없었다. 피해자 쪽이 그렇게 이해했고, 근 십 년 동안 구경만 해오면서도 그쪽 일에 전혀 무지하지만은 않은 나의 생각이 그랬다. 형 자신도 그것은 시인했다. 소녀는 수술을 받지 않았어도 잠시 후에는 비슷한 길을 갔을 것이고, 수술은 처음부터 성공의 가능성이 절반도 못 됐던 경우였다. 무엇보다 그런 사건은 형에게서뿐 아니라.. 2023. 4. 26.
잔인한 도시 - 이청준 (열림원) 열림원 논술 한국문학 4 목차 병신과 머저리 매잡이 소문의 벽 잔인한 도시 서편제 눈길 침몰선 생애와 문학 - 인간과 현실을 향한 쉼 없는 탐구 논술 ......................................................... 이청준 - 잔인한 도시 (1977년) 날씨가 제법 싸늘해지기 시작한 어느 가을날 해질녘 그 사내가 문득 교도소 길목을 조그많게 걸어나왔다. 그것은 좀 희한한 일이 아니었다. 근래엔 좀처럼 볼 수 없던 일이었다. 교도소는 도시의 서북쪽 일각, 벚나무와 오리나무들이 무질서하게 조림된 공언 숲의 아래쪽에 있었다. 그리고 그 무질서한 인조림이 끝나고 잇는 공원 입구께에서 2백 미터 남짓한 교도소 길목이 꺾여들고 있었다. 공원 입구에선 교도소 길목과 높고 음침스런.. 2023. 4. 24.
석공조합대표 - 송영 (동아출판사) 두산동아 - 한국소설문학대계 12 송영 - 석공조합대표 (1927년) 대동강의 물결은 노래만 하고 왔다. 질탕거리는 신사숙녀의 '배따라기' 노랫소리만 듣고 보아서, 그리고 젖어서 - 유탕한 기운에 찼었었다. 그러나, 보라! 들어라! 대동강의 물결 소리는 변하여 버리었다. 오인하는 사공의 탄식과 고기잡이 여인네의 가쁜 숨과 또는 청류벽 아래에서 땀 흘리는 석공들의 돌 쪼는 ㅅ호리에 훌륭하게 변하여 버렸다. "이런 제기할 것 - 언제나 이것을 면하고 만단 말인가?" 붉은 햇발이 동쪽 기슭을 헤치고 나올 때마다 이러한 탄식 소리는 여러 석공의 입으로서 나왔다. 그들은 어디까지든지 그들의 하고 있는 생활을 싫증을 내면서도 또는 내어버리려고도 아니 하고 지내 가는 모순을 가지고 산다. 과연 그들은 그와 같은 모순.. 2023. 4. 23.
탈출기 - 최서해 (동아출판사) 두산동아 - 한국소설문학대계 12 최서해 - 탈출기 (1925년) 김군! 수삼 차 편지는 반갑게 받았다. 그러나 나는 한 번도 회답하지 못하였다. 물론 군의 충정에는 나도 감사를 드리지만 그 충정을 나는 받을 수 없다. - 박군! 나는 군의 탈가를 찬성할 수 없다. 음험한 이역에 늙은 어머니와 어린 처자를 버리고 나선 군의 행동을 나는 찬성할 수 없다. 박군! 돌아가라. 어서 집으로 돌아가라. 군의 부모와 처자가 이역 노두에서 방황하는 것을 나는 눈앞에 보는 듯싶다. 그네들이 의지할 곳은 오직 군의 품밖에 없다. 군은 그네들을 구하여야 할 거이다. 군은 군의 가정에서 동량이다. 동량이 없는 집이 어디 있으랴? 조그마한 고통으로 집을 버리고 나선다는 것이 의지가 굳다는 박군으로서는 너무도 박약한 소위이다... 2023. 4. 23.
사하촌 - 김정한 (창비) 창비 20세기 한국소설 11 목차 안수길 목축기 제3인간형 김정한 사하촌(寺下村) 추산당과 곁사람들 모래톱 이야기 수라도(修羅道) 이메일 해설: 노영민·서은주 낱말풀이 .................................... 김정한 - 사하촌 (1936년) 타작마당 돌가루 바닥같이 딱딱하게 말라붙은 뜰 한가운데, 어디서 기어들었는지 난데없는 지렁이가 한 마리 만신에 흙고물 칠을 해가지고 바동바동 굴고 있다. 새까만 개미떼가 물어뗄 때마다 지렁이는 한층 더 모질게 발버둥질을 한다. 또 어디선가 죽다 남은 듯한 쥐 한 마리가 튀어나오더니 종종걸음으로 마당 복판을 질러서 돌담 구멍으로 쏙 들어가버린다. 군데군데 좀구멍이 나서 썩어가는 기둥이 비뚤어지고, 중풍 든 사람의 입처럼 문조차 돌아가서, 북쪽으.. 2023. 4. 20.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 박태원 (글누림) 글누림 한국 소설 전집 15 목차 적멸 수염 피로 낙조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 딱한 사람들 애욕 방란장 주인 비량 진통 성군 성탄제 이상의 비련 윤초시의 상경 골목 안 작가 연보 작품 해설 ............................................. 박태원 -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1948년) 어머니는 아들이 제 방에서 나와, 마루 끝에 놓인 구드를 신고, 기둥 못에 걸린 단장을 떼어 들고, 그리고 문간으로 향하여 나가는 소리를 들었다. "어디, 가니?"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중문 앞까지 나간 아들은, 혹은, 자기의 한 말을 듣지 못하였는지도 모른다. 또는, 아들의 대답 소리가 자기의 귀에까지 이르지 못하였는지도 모른다. 그 둘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 어머니는 이번에는 중문 밖에까.. 2023. 4.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