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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
I. 한국 문학/2. 소설

석공조합대표 - 송영 (동아출판사)

by handaikhan 2023. 4. 23.

두산동아 - 한국소설문학대계 12

 

송영 - 석공조합대표 (1927년)

 

대동강의 물결은 노래만 하고 왔다.

질탕거리는 신사숙녀의 '배따라기' 노랫소리만 듣고 보아서, 그리고 젖어서 - 유탕한 기운에 찼었었다.

그러나, 보라! 들어라!

대동강의 물결 소리는 변하여 버리었다. 오인하는 사공의 탄식과 고기잡이 여인네의 가쁜 숨과 또는 청류벽 아래에서 땀 흘리는 석공들의 돌 쪼는 ㅅ호리에 훌륭하게 변하여 버렸다.

"이런 제기할 것 - 언제나 이것을 면하고 만단 말인가?"

붉은 햇발이 동쪽 기슭을 헤치고 나올 때마다 이러한 탄식 소리는 여러 석공의 입으로서 나왔다.

그들은 어디까지든지 그들의 하고 있는 생활을 싫증을 내면서도 또는 내어버리려고도 아니 하고 지내 가는 모순을 가지고 산다.

과연 그들은 그와 같은 모순을 스스로 지어 가지고 있나? 또는 막으려나 막을 수 없는 물결 모양 같은 불가항력의 자연으로 가지게 되었나? 우리들은 가장 단순하게 그 중의 하나인 젊은 석공 박창호의 지내 가는 꼴이나 검사하여 보자. (p.395-396)

 

섬뜩하였다. 그래서 그는 깜짝 놀랐다. 멀리 갔던 공상은 다시 공상 속에서 추억하던 옛날인 지금으로 돌아왔다. 승리를 축하는 술꾼이었던 그는 승리를 기약하는 젊은 석공으로 또다시 변하여 버렸다. (p.399)

 

모든 석공들이 다 간 뒤에 쥔은 더한층 얼굴이 이상하여졌다. 살기가 돌았다. 그리고 능멸하는 빛이 돌았다.

"자네, 그래, 꼭 갔다 오겠나."

그는 알았다. 물어 보는 말이 어떤 것은커녕 물어 본 뒤에 어떻게 하리라는 쥔의 마음새까지 알았다.

"그럼 어떻게 합니까? 저 혼자 마음도 아니고 여러 사람이 결정을 한 것을..."

쥔은 더한층 노하였다. 목소리는 떳떳하여졌다. 그 둥뚱한 몸뚱이에다가 대어미는 그 목소리는 너무나 작았고 떳떳만 하였다.

"아니 대체 석공조합이란 것은 뭔가?"

그도 홀연히 마음이 굳세어졌다. 언제든지 삯전 때문에 고개를 숙이고 지내 가던 쥔 앞에서 그는 엄연하게 한 사람이 되었다. 목소리는 떨렸다. 무거웠다.

"그건 별안간에 왜 물으십니까? 썩 쉬웁죠. 석공들이 모인 게죠."

"그건 누가 모르나."

금방 해라로 변하였다. 이 세상에서 그중 분하고 보기 싫은 것을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같이 쥔은 매우 분토되었다.

"그 목적이 뭐냐 말야."

그도 더 흥분이 되었다. 그와 쥔은 질서 있는 정비례적 분노로 흥분되어 간다.

"그 목적이야 물론 우리들의 행복을 위한 것이지요. 언제든지..."

말이 끝나기도 전에 쥔은 책상을 딱 치며 소리를 고래고래 지른다.

"행복...흥, 그래 멀쩡하게 남들이 피땀을 흘려 가며 모아 논 것을 뺏어 먹는 것이 너희들의 행복이냐. **주의니 뭐니 하는 것은 멀쩡한 도적놈들이야. 너도 젊은 녀석이...아니 어떤 녀석의 꼬임에 빠졌니...공연히 온공하게 시대를 맞춰 살아서 부모처자를 굶겨 죽이지 말아 아니 할 생각이나 해...국으로."

그는 불이 되었다. 그리고 벙어리가 되었다. 가슴에서 일어나는 불은 그의 말을 모두 태워 버린 듯싶다. 다만 불뚝불뚝하는 힘줄과 번쩍번쩍하는 두 눈빛만은 무섭게 되었다. 쥔은 좀 언성을 낮추어서 어린애 가지고 말하듯이 좀 유한 소리로,

"너 괜히 순히 이르는 것이니 다 그만두어라. 석공조합대표가 다 뭐냐. 대표 노릇 하면 누가 돈을 푹푹 갖다 줄 줄 아니....그리고 공연히 대회니 뭐니 해서 서울을 며칠씩 가서 있으면 그 동안에 느네집은 다 굶어 죽으란 말이냐."

쥔은 좀 누그러지자 그는 홀연히 더 흥분이 되었다. 엄연한 소리로,

"전 그런 말씀은 들을 줄을 모릅니다."

쥔은 그 소리에 또다시 분이 나서,

"뭐? 그럼 꼭 가겠단 말이냐/"

"꼭 가지요."

쥔은 별안간 외면을 하면서,

"그럼 어서 가거라. 귀찮다..."

다시 고개를 돌리면서,

"너 생각해서 해. 가려거든 너는 가고 관계 끊는 셈만 쳐라."

그는 흥분된 가운데에서도 분통하여져서,

"글쎄, 영감께 지가 거기 잠깐 다녀오기로 무슨 이해상관이 계십니까?"

"그래, 나는 이해상관이 실상은 없다고 그러자. 그렇지만 뻔히 너도 모르는 터도 아니고 하니까 너의 집안 사정을 봐서 그러는 말야...너 부모나 처자가 얼어 죽으면 네 생각은 시원하겠니."

그는 또다시 험하여 갔다. 일시 애상적이 되었던 그의 신경은 순전한 야수, 주린 야수의 부르짖는 그러한 험악으로 변하여 버렸다. 그래서 가슴속에서는 소리를 치면서 피가 끓었다. 머리는 전광 같은 공상이 전광같이 왕래하였다. 그래서 말도 하기가 싫고 더 섰기도 싫었다.

그는 딱 끊어서,

"저는 꼭 갈 터이니까 그런 줄 압쇼."

내어던지듯이 탁 쏘아 말하고 나왔다.

걸음은 매우 빨랐다. 분연하였다. 그리고 '그런 줄 아슈' 하는 시위적 언사, 남성적 결기를 남기고 온 자기의 행위가 매우 장쾌하였다. 그는 이러한 장쾌한 기분에 도취되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p.400-402)

 

"아니, 너 가는 것을 싫어서 그러는 게 아니다. 내가 아무리 늙었기로 그렇게 완고가 아닌 것은 너희들도 다 알지 않니. 나도..."

추억하는 빛이 나며,

"저 - 북만주로 돌아다니면서 학교도 세우고 회도 모으고 하던 내가 아무러기로 너희들의 하는 일을 방해야 하겠니...참말이지 너희들 어린것들이 그러는 것을 보면 기쁘고 거룩만 할 뿐이지."

진정으로 나오는 말이었었다. 그 소리에는 창호도 진심으로 감격하여서 하였다. 사상적으로 무섭게 압박하는 보통 **가운데에 태어나서 정으로나 마음으로나 철저하게 이해해 주시는 아버지에게 대하여서는 참으로 거룩한 생각이 났었다.

그래서 마음은 얼마큼 공축되었다. 그의 아버지는 다시 말을 이어,

"그런데 너도 다 알겠지만 너의 공장 쥔이란 자가 좀 그악이냐. 무슨 하필 너와 나뿐 아니라 이 평양 안에 사는 사람 쳐놓고 그 영감 좋다는 사람이 어디 있니. 그런데 더군다나 우리는 네가 거기에 매이지 않었니? 그리고 또 이 과원도 그 사람 게 아니냐. 만일 그 사람이 성만 더 나면 네가 거기 못 댄기는 것도 것이려니와 당장에 이 집까지 내놓으라고 그럴 테니 어떻게 하니...똥이 무서와서 피하니 더러와서 피하지...나도 생각이 너만 같지 못하지 않다. 내가 조금만 원만하면 너희들을 저렇게 고생을 시키겠니? 그러니까 잘 생각해 하란 말이다. 뭐 기회가 이번만이 아닐 것이고 또 일후에도 많을 것이니 너는 이번에 잠깐 빠져도 좋지 않겠니..."

그의 말소리는 충곡에서부터 떨려서 나왔다. 그리고 주름진 뺨에는 두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펄펄 뛰는 듯한 젊은 자식들을 생지옥 같은 괴로운 생활을 시키는 어버이의 마음 숭고한 감정에 접목된 까닭이다.

태산이라도 뚫을 듯한 창호의 의기는 그만 꺾어졌다. 울 것같이 되었다. 당장에 길거리에서 내어쫓긴 아버지와 처자의 그림자가 보였다. 굶어서 뻐드러진 송장이 보였다. 손가락질하는 세상 사람의 비소 소리가 들리었다. 마음으로 슬플 대로 슬펐다. 울 때까지 울고 싶었었다. 그래서 그는 잠짐히 고개를 숙이고 나왔다.

평생에 약한 소리를 하지 않던 그의 처는 가만한 소리로,

"그것도 옳은 말씀이긴 해요. 세상 일이란 시간이 걸리니까요."

즉 당장에 되는 일이 아니니 차차 살아가면서 해보지요 하는 말소리였다. 그러나 그의 귀에는 더 쓸쓸하게만 들리었다.

얼마 가다가 종로 네거리 앞까지 왔다. 언제든지 그들은 이렇게 두 사람이 같이 동행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무덤으로 향하여 가는 마지막 이별의 길을 걷는 듯이나싶이 추연하였다. (p.407-408)

 

그는 아버지와 처와 또는 집과 조합과...공장 쥔과 또는 서울 가는 것과...모든 것을 한데 뒤섞어서 어떻게 결정을 짓지 못하고 번민만 하다가 건듯 공장 안에 들어서면서 모든 것은 다 가라앉아 버렸다.

쪼고 새기고 갈고 깨트리면서, 서로 웃고 서로 시시덕거리면서, 대동강 물결에 저녁 별빛 나기만 기다리는 그러한 일개 석공의 기분이 되었다. 직업적 기분이 되었다. 요컨대 흥분되었던 감정은 다시 정연한 질서로 돌아왔다.

익진이와 마주 앉았다. 장도리로 정을 때렸다.

"여보게, 내일 저녁차에 갈까?"

익진이가 쾌활하게 묻는다.

창호는 익진이의 소리를 듣자마자 규칙 없이 둘러앉은 모든 석공들이 일제히 박수를 하며 자기를 대표자로 선정하던 광경이 생각났다. 숭엄한 장면에 그는 완전하게 또다시 순전한 조합원이 되었다.

자기네들의 행복과 이익과를 위하여 옳지 못한 협박을 하고 있는 자들과 싸우겠다는 씩씩한 조합원이 되었다.

"글쎄, 아무렇게 해도 저녁차가 낫겠지."

"쥔이 아무리 내쫓느니 뭐니 해두 무슨 상관 있나?"

"그럼! 그야말로 시들방귀일세."

"그럼! 굶어 죽기밖에 더 하겠나...사실 요렇게 알뜰하게 살아가는 것보다는 차라리 한 번 막 죽는 것이 더 낫지 않은가?"

"참 옳은 말이지. 자꾸 죽이는 놈에게 그저 조금만 더 두었다가 죽여 줍쇼 하는 것보다 이놈 하고 일어나서 죽더라도 낫지 않은가."

"그래..그렇지만 하여간 우리들은 불행한 놈일세. 이건 난 왜 요런 땅에가 태어났나 하는 생각도 안 날 적이 없네...아무리 젊은 것으로 있어서는 다사다단한 곳에서 활동을 하는 것도 외려 좋지 않은 것도 아니지만.."

"어떻든지 우리들은 모든 것이 쓸쓸하기가 짝이 없네. 이후에 기쁜 봄이 오더라도 지리한 겨울이 지긋지긋하이.."

두 사람은 장도리 소리에 맞추어 가면서 이 같은 감상과 담화를 하였다.

언제든지 어기여차만 부르는 뱃사공, 언제든지 동이만 이고 다니는 물거품꾼 여자, 언제든지 장도리만 가지고 되풀이하는 석공들...

삼천리 금수강산이 언제든지 푸름과 같이 푸르려는가? 혹은 산천이 벽해 되는 것과 같이 커다란 행복과 *****게 되려는가? (p.41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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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영(宋影 1903년 5월 24일 ~ 1977년 1월 3일)

일제강점기의 사회주의 계열 소설가이며 극장가.

본명은 송무현(宋武鉉)이지만 송영(宋영)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필명으로 송동량(宋東兩), 은구산(殷龜山), 수양산인(首陽山人), 관악산인(冠岳山人), 앵봉산인(鶯峯山人)을 썼고, 창씨개명한 이름은 산천실(山川實)이다.
1903년 5월 24일 서울 서대문 오궁골에서 태어났다. 1917년 배재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가정형편으로 1919년 중퇴하였다. 희곡, 소설, 아동문학, 수필, 비평 등 다방면에서 활동하였는데 문학 활동하게 된 것은 배재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면서부터였다. 1922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동경)에서 유리공장 노동자로 6개월 정도 일하면서 재일조선노총을 통해 사회주의 사상을 접하였다.
귀국한 후 최초의 사회주의 예술단체인 염군사(焰群社)의 구성원으로서 극단 ‘염군’을 조직하고 활동하면서 기관지 『염군』에 소설 「남남대전」과 희곡 「백양화」를 발표하였다. 1925년 7월 『개벽』 현상공모에 소설 「늘어가는 무리」로 공식 등단하였다. 같은 해인 1925년 결성된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KAPF)’의 맹원으로 가담하여 이후 카프의 대표적인 극작가·소설가로 활동하면서 평양고무직공 파업을 소재로 한 소설을 발표하였다. 1927년 카프 조직개편때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카프 위원이 된 후 직속극단에서 대본을 집필하면서 1929년 『조선문예』의 인쇄를 책임졌다. 1934년 7월 전주사건(신건설사)으로 검거되어 수감생활을 하였다.
1935년 12월 17일 출소한 후 소학교 교사를 하다가 1937년 극장에서 대본을 집필하는 극작가로 활동하였다. 동양극장에 수십 편의 멜로드라마, 사극의 대본을 제공하였다. 같은 해 박영호 등과 함께 극단 중앙무대를 결성하여 양심적이고 진보적인 연극운동을 주도하였다. 이기영의 리얼리즘 소설 「고향」을 각색해서 공연하려다가 조선총독부의 불허로 상연이 취소되었다.
송영의 초기 소설과 희곡은 식민지 생산직 노동자의 척박한 현실을 보여주었다. 주요 작품으로 소설 「용광로」(1926)·「석공조합대표」(1927), 희곡 「정의와 칸바스」(1929)·「호신술」(1932)이 있다.
1942년 2월 미국과 서양 기독교를 규탄하는 「삼대」를 상연하는 데 힘을 더했다. 1942년 7월 일제의 관변단체인 조선연극문화협회 이사로 위촉되었다. 1945년 1월 조선연극문화협회 주최 연극경연대회 참가작으로 「신사임당」과 「달밤에 걷던 산길」을 출품하였다.

해방 후 한설야, 이기영 등과 함께 조선프롤레타리아문학동맹을 결성하여 사회주의 노선을 견지하였다. 해방 후 첫 작품은 봉건 사회에 기초한 친일파의 몰락을 풍자한 희곡 「황혼」이었다. 1946년 조선문학동맹 결성을 계기로 월북하였다.
북한에서 북조선문학예술동맹 상무위원, 북조선연극동맹 위원장을 역임하면서 희곡 「자매」, 「나란히 선 두 집」과 봉건 사회의 부패상을 폭로한 풍자극 「금산군수」를 썼다. 한국전쟁 때는 작가로 참전하여 희곡 「그가 사랑하는 노래」, 역사극 「강화도」 등을 발표하였다. 1950년대 후반에는 내각 문화성 부상, 조소친선협회 중앙위원, 대외문화연락위원회 위원장, 당 중앙검사위원회 위원, 조선인민회의 대의원,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 조선작가동맹중앙위원회 상무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항일무장투쟁을 소재로 한 작품으로 가극대본 「밀림아 이야기하라」, 희곡 「불사조」 등을 발표하였다. 특히 「밀림아 이야기하라」는 1970년대 이후 집체작으로 재편되어 북한은 물론이고 세계 무대에 올려졌다. 송영은 월북 이후 북한 사회주의 체제의 건설에 큰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1959년에 북한에서 문인 최초로 ‘인민상’을 받았고, 1977년 1월 3일 사망후 평양 애국열사릉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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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영 소설전집 (현대문학)

석공조합대표 - 송영 (창비)

송영 단편집 (지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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