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책의 향기
I. 한국 문학/2. 소설

사하촌 - 김정한 (창비)

by handaikhan 2023. 4. 20.

창비 20세기 한국소설 11

 

목차

 

안수길

목축기

제3인간형

 

김정한
사하촌(寺下村)
추산당과 곁사람들
모래톱 이야기
수라도(修羅道)


이메일 해설: 노영민·서은주
낱말풀이

 

....................................

김정한 - 사하촌 (1936년)

 

타작마당 돌가루 바닥같이 딱딱하게 말라붙은 뜰 한가운데, 어디서 기어들었는지 난데없는 지렁이가 한 마리 만신에 흙고물 칠을 해가지고 바동바동 굴고 있다. 새까만 개미떼가 물어뗄 때마다 지렁이는 한층 더 모질게 발버둥질을 한다. 또 어디선가 죽다 남은 듯한 쥐 한 마리가 튀어나오더니 종종걸음으로 마당 복판을 질러서 돌담 구멍으로 쏙 들어가버린다.

군데군데 좀구멍이 나서 썩어가는 기둥이 비뚤어지고, 중풍 든 사람의 입처럼 문조차 돌아가서, 북쪽으로 사정없이 넘어가는 오막살이 앞에는, 다행히 키는 낮아도 해묵은 감나무가 한 주 서 있다. 그러나 그게라야 모를 내 후 비 같은 비 한 방울 구경 못한 무서운 가뭄에 시달려, 그렇지 않아도 쪼그라졌던 고목잎이 볼 모양 없이 배배 틀려서 잘못하면 돌배나무로 알려질 판이다. 그래도 그것이 구십 도가 넘게 쪄 내리는 팔월의 태양을 가리어, 누더기 같으나 밑둥치에는 제법 넓은 그늘을 지웠다. 그걸 다행으로 깡라둔 낡은 삿자리 위에는 발가벗은 어린애가 파리똥 앉은 얼굴에 땟물 조르르 흘리며 울어댄다. 언제부터 울었는지 벌써 기진맥진해서 울음소리조차 잘 아니나왔다. 그 곁에 퍼뜨리고 앉은 치삼노인은, 신경통으로 퉁퉁 부어오른 두 정강이 사이에 깨어진 뚝배기를 기우고 중얼거려댄다.

"요게 왜 이렇게 안 죽을까? 요리조리 매끈거리기만 하고....예끼!"

그는 식칼 자루로 뚝배기 밑바닥을 탁 내리찧었다. 뻑! 하고 미꾸라지는 또 가장자리로 튀어 내뺀다. 신경통에 찧어 바르면 좋다고 해서, 딸애 덕아가 아침 일찍부터 나가서 잡아온 미꾸라지다. 그것이 남의 정성도 모르고!

"요 망할 놈의 짐승!"

치삼노인은 다시 식칼로 겨누었으나, 갑작스레 새우처럼 몸을 꼽치고는 기침만 연거푸 콩콩한다. 그럴 때마다 부어오른 다리의 관절이 쥐어뜯는 듯이 아프며, 명줄이 한 치씩이나 줄어드는 것 같았다. (p.75-76)

 

매미란 놈들이, 잎사귀 하나 까딱 아니하는 높다란 포플러나무에서, 그 밑에 누워 있는 농군들을 비웃는 듯 구성지게 매암매암매한다. (p.91)

 

반달같이 생긴 다리 아래편 백사장에는 애새끼들이 송사리처럼 모여서, 노래로 장난으로 혹은 반딧불 쫓기로 부산하게 떠들고 뛴다. 비를 기다리는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이 달만 밝고, 달빛 속에 묻힌 성동리 집집에서는, 구름인 듯 다투어 모기 연기만 피워, 산으로 기어오르고 들로 내리깔려 연긴가 달빛인가 알 수도 없다. (p.92)

 

간평꾼들이 물러가자, 덕아는 시무룩해가지고 돌아오는 들깨를 안타까운 듯이 쳐다보았다.

"말은 무슨 말을 해?"

"세 좀 매지 말라구..."

"그놈들 제멋대로 매는 걸 어떻게."

"그럼 오빠는 이까짓 메밀 간 세도 바치려네?"

덕아는 자못 서글퍼하는 말씨였다.

"글쎄, 먹고 남으면 바치지!"

들깨는 픽 웃었다. 그는 최근에 와서 갑자기 무던히 배짱이 커졌다.

덕아는 오빠의 말에 확실히 일종의 미더움을 느꼈다. 그러나 허리에 낫을 여전히 꽂은 채 담배만 빡빡 피우고 앉은 오빠의 마음속은 결코 그리 후련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메밀밭 위를 바삐 나는 고추잠자리처럼 조급하지도 않았지만. (p.112)

 

쇠다리 주사댁 감나무 알감이 주렁주렁 달리고, 여물어진 박들이 희뜩희뜩 드러난 잿빛 지붕들에 고추가 발갛게 널리자 가을은 깊을 대로 깊었다.

그러나 농민들 생활은 서리맞은 나뭇잎같이 점점 오그라져서, 밤이면 야학당에 모여드는 친구가 부쩍 늘어갔다. 하룻밤에는 몇 사람이 쇠다리 주사댁 감을 따왔다.

"빨리들 먹게!"

또쭐이는 뒷일이 떠름했지만, 다른 친구는 오히려 고소한 듯한 표정들을 하였다.

"아따, 개똥이 저놈. 나무 재주는 아주 썩 잘해! 그저 이 가지 저 가지 휘뚝휘뚝 타고 다니는 것이 꼭 귀신 같데."

철한이는 먹기보다 감 따던 이야기를 더 재미있게 했다.

"먹고 싶어서 먹었다. 체하지는 말어라!"

한 놈이 벌써부터 두 가슴을 두드린다. 그러면서도 또 한 개를 골라 든다. 사실, 퍼런 콩잎이랑 고춧잎 따위에 물린 그들의 입에, 감은 확실히 일종의 별미였다.

"제에기, 또 연설 마디나 있겠지?"

또쭐이가 담배를 피워 물며 두덜대니깐, 바로 곁에 있던 고서방이,

"연설 아니라, 무릎을 꿇고 빌어도 허는 수 없지!"

자칫하면 동네 집회소 - 이 야학당에다 사람들을 모아놓고, 소위 사상선도의 연설이 있곤 하였다. 그러나 연설만으로써 어떻게 될 리는 만무하였다. 더구나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교풍회장 쇠다리 주사나 진흥회장 진수 따위가 씨부렁대는 설교에는 인제 속을 사람은 없었다.

지금은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농민들은 결코 자기들대로 하는 수밖에 없었다. 소작료도, 빚도 인젠 전과 같이는 두렵지가 않았다. 그저 제가 지은 곡식이면 모조리 떨어다 먹었다. 뿐만 아니라 가다가는 남의 것에도 손이 갔다. 그러할수록 동네의 소위 유산자인 쇠다리 주사와 진수의 신경은 극도로 날카로워졌다. (p.114-115)

 

"아이고, 어느 도둑놈이 그 벼를 베어갔을까? 생벼락을 맞아 죽을 놈! 그 벼를 먹구 제가 살 줄 알아...창자가 터질 거여 터져!"

하며 봉구 어머니가 몽당치마 바람으로 이 골목 저 골목 외고 다니고, 호세 징수를 나온 면서기가 그녀를 찾아다니던 날, 성동리에서는 구장 이외 고서방, 들깨, 또쭐이 들 사오 인이 대표가 되어 보광사 농사조합으로 나갔다. 그들의 하소연은, 자기들이 봄에 빌려 쓴 소위 저리자금의 - 대부분은 비료대금이지만 - 지불 기한을 조금 더 연기해달라는 것이었다.

보광사 소작인들은 해마다 소작료와 또 소작료 매석에 대해서 너되씩이나 되는 조합비와 비료대금과 그것에 따른 이자를 바쳐야만 되었다. 그리고 비료대금은 갚는 기한이 해마다 호세와 같았다.

의젓하게 교의에 기댄 채 인사도 받는 양 마는 양하는 이사님은 빌듯이 늘어놓은 구장의 말을랑 귀밖으로, 한참 시끼시마 껍데기에 낙서만 하고 있더니, 문득 정색을 하고는,

"그런 귀치 않은 논은 부치지 않는 게 어때요?"

해던졌다.

"..."

"해마다 이게 무슨 짓들이요? 나두 인젠 그런 우는소리는 듣기만이라도 귀찮소. 호세만 내고 버티겠거든 어디 한번 버티어들 보시구려!"

"누가 어디 조합돈을 안 내겠다는 겁니까. 조금만 연기를 해달라는 거지요."

이번에는 또쭐이가 말을 받았다.

"내든 안 내든 당신들 입맛대로 해보시오. 난 이 이상 더 당신들과는 이야기 않겠소."

이사님은 살결 좋은 얼굴에 적이 노기를 띠더니, 그들 틈에 끼어 있는 곰보를 힐끗 보고는,

'고서방 당신은 또 뭘 하러 왔소? 작년 것도 못다 내고서 또 무슨 낯으로 여기 오우?"

매섭게 꼬집었다. 그리고 그는 다시 장부를 뒤적거리면서, 하던 일을 계속했다. 일행은 허탕을 치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며칠 뒤, 저수지 밑 고서방의 논을 비롯하여 여기저기에, 그예 입도차압의 팻말이 붙기 시작했다.

농민들은 알아보지도 못하는 그 차압 팻말을 몇 번이나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았다. 피땀을 흘려가면서 지은 곡식에 손도 못 대다니? 그들은 억울하고 분하기보다, 꼼짝없이 인젠 목숨을 빼앗긴다는 생각이 앞섰다.

고사방은 드디어 야간도주를 하고 말았다.

"이렇게 비가 오는데, 그 어린것들을 데리고 어디로 갔을까?"

이튿날 아침, 동네 사람들은 애터지는 말로써 그들의 뒤를 염려했다.

무심한 가을비는 진종일 고서방이 지어두고 간 벼이삭과 차압 팻말을 휘두들겼다.

무슨 불길한 징조인지 새벽마다 당산등에서 여우가 울어대고, 외상술도 먹을 곳이 없어진 농민들은 저녁마다 야학당이 터지게 모여 들었다.

그리하여 하루아침, 깨어진 징소리와 함께, 성동리 농민들은 일제히 야학당 뜰로 모였다. 그들의 손에는, 열음 못한 빈 짚단이며 콩대, 메밀대가 잡혀 있었다.

이윽고 그들은 긴 줄을 지어가지고 차압 취소와 소작료 면제를 탄원해보려고 묵묵히 마을을 떠났다. 아낙네들은 전장에나 보내는 듯이 돌담 너머로 고개를 내가지고 남정들을 보냈다. 만약 보광사에서 들어주지 않는다면...하고 뒷일을 염려했다.

그러나 또쭐이, 들깨, 철한이, 봉구 - 이들 장정을 선두로 빈 짚단을 든 무리들은 어느새 벌써 동네 뒤 산길을 더위잡았다. 철없는 아이들도 행렬의 꽁무니에 붙어서 절 태워 간다고 부산히 떠들어댔다. (p.118-120)

 

<조선일보> (1936.1.8-23)

<김정한소설선집> (창작과비평사 1983)

 

..................................................................

<작품 해설 - 서은주>

1. 1908년 경남 부산 동래에서 태어난 요산 김정한은 어린 시절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다 1919년에서야 정식 학교에 입학합니다. 그가 다닌 명정 소학교는 범어사 경내에 있는 불교 계통의 학교이며, 범어사는 한용운이 불교활동을 벌였던 중심지기도 합니다. 또한 명정학교의 교사 김법린은 프랑스 유학파 엘리뜨로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불교운동가였습니다. 이러한 환경은 어린 김정한이 민족의식을 형성하는 데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동래고보시절 동맹 휴교로 집단 구금되기도 하였고, 졸업 후 교사 생활 중에는 조선인 교사에 대한 차별 문제에 반발하다 피검되기도 하였습니다. 이후 교직을 그만두고 일본으로 유학해 와세다대학 부속 제일고등학원 문과에 입하하였고, 이때 맑스주의 서적을 접하게 되어 그 사상에 심취하게 됩니다. 그는 이 시기 시와 소설을 발표하여 등단하였으며, 귀국 후 다시 교사로 취임하였으나 <사하촌>으로 인해 불교계의 반발에 부딪혀 곤욕을 치르게 됩니다. 동아일보 지국을 열어 활동하다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었고, 이후 경찰의 탄압이 심해지자 붓을 꺾게 됩니다.

해방 이후 김정한은 건국준비위원회에 관계하였으며, 언론과 교육 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입니다. 4.19 때는 부산대학교 교수 데모에 가담했고, 5.16 쿠데타가 일어나자 대학에서 파면당하기도 합니다. 복직 후 1966년 <모래톱 이야기>를 발표하면서 공식적으로 창작활동을 재개하였고, 평판작 <수라도> <인간단지> <산거족> 등을 창작하였습니다. 퇴임 이후에도 그는 민주화와 관련된 문학단체 및 사회단체에 이름을 올려놓으며 사회활동을 계속했습니다. 1996년 병환으로 타계하기까지 김정한은 한평생 반식민, 반독재를 위해 살았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그는 문학이 삶과 별개의 것이 아니라 하나임을 실천적으로 증명한 작가이자, 인간적인 삶을 방해하는 시대와 권력에 대해 힘없고 약한 자의 편에서 저항했던 양심적 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사하촌>은 가난한 소작인들의 반대편에 보광사 중들을 중심으로 하는 친일세력을 지주계층으로 설정하고 있습니다. 사실 일제 식민지하의 지주들은  자신의 땅을 지키고 부를 축적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인정하고 보호해 주는 식민지 관리들과 결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따라서 대부분의 지주들은 자발적이든 아니든 친일적인 성격을 지닐 수밖에 없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일제 말기의 불교사찰은 민족적 현실을 외면하고 일제와 결탁하는 사레가 많았습니다. 당시의 많은 사찰들은 법당 안에 일본 황군의 승리를 기원하는 팻말을 붙이고, 신도들이 헌납한 땅을 사유화하여 가난한 소작농들을 착취하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객관적 현실에서 소재를 취한 이 소설은 물질적 소유 앞에서 종교도 타락하고 마는 현실을 문제 삼음으로써, 유산계급과 무산계급의 갈등이 다른 여타의 가치를 압도하는 본질적인 문제임을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3. 이 소설에는 특별한 능력을 지닌 농민이 단일한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인물의 유형이 다각적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보광사 중들의 수하에 있는 쇠다리 주사, 진수, 수동이, 산지기 같은 부정적 인물들이 있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논을 떼이고 곡식을 차압당하자 자살이나 야반도주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통해 저항하는 소작농들이 있습니다. 특히 순박하고 성실했던 농민들이 오랜 가뭄과 착취에 시달리면서 불평불만이 많은 거친 성격으로 변모해 가는 모습을 사실감 있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농민들이 겪는 고통의 비극적 형상화는, 소작농들이 개인의 나약함과 이기심을 떨치고 소작쟁의라는 집단적인 행동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상황을 개연성 있게 뒷받침하는 효과를 갖습니다. 물론 이 소설은 패배와 절망만을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고 절망적 상황에서도 자기 삶의 중심을 잃지 않고 일어서려는 강인한 농민들도 동시에 보여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소설은 식민지적 조건에 처한 우리 농촌의 내부적 모순을 정확히 보고 이를 농민의 편에서 가차 없이 묘사함으로써, 순응주의와 허무주의를 벗어나 농민문학의 새로운 전망을 확보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4. 김정한은 비록 카프카에 직접 참여한 바는 없지만 카프의 조직이 와해된 이후에 등장한 신인 가운데 카프의 자장에 가장 가까이 위치했던 작가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사하촌>으로 정식 등단하기 이전 검열로 인해 전문이 삭제되어 제목만 전해지는 <구제사업>이나 <그물> 등이 프로문학 계열의 잡지에 실렸던 점으로 보아 탈경향성, 탈프로문학 바람이 거셌던 1930년대 후반의 문단에서 그의 소설은 드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김정한의 소설은 소작 농민들이 자연발생적으로 쟁의에 돌입하기까지를 정통 사실주의 수법으로 충실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작품을 끌고 가는 기본 갈등은 물론 지주와 소작농을 가르는 계급적 갈등이지만, 그럼에도 지주와 소작인들을 각자 개성이 살아 있는 생동감 있는 인물로 형상화함으로써 카프문학의 상투성에서 벗어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소작농의 생활에 밀착하여, 그들의 비굴과 무지, 그로 인한 자기파괴적 행동들, 예컨대 물을 둘러싼 농민 내부의 다툼이나 아내의 딸들에 대한 남성 농민들의 폭력 등을 리얼하게 그려낸 점은 높이 살 만합니다. 이러한 소설적 특징은 지주와 소작농을 악과 선의 대결구도로 단순 도식화했던 카프식의 소설과는 구별된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습니다. (p.280-284)

 

........................................................................................................................................................................................................................

김정한(金廷漢, 1908년 10월 20일 ~ 1996년 11월 28일)

대한민국의 소설가이다.

김정한(金廷漢, 음호는 요산(樂山). 경상남도 동래(東萊)(지금의 부산광역시) 출생. 어려서 서당에 다니다가 1923년 중앙고등보통학교(中央高等普通學校)에 입학, 다음 해 동래고등보통학교로 전학해서 1928년 졸업 후, 울산 대현보통학교(大峴普通學校)의 교사가 되었다.
1930년 일본 와세다[早稻田]대학 제일고등학원 문과에 입학, 1931년 유학생회에서 발간하는 『학지광(學之光)』의 편집에 참여하였다. 한편 『조선시단』에 「구제사업(救濟事業)」이란 단편을 기고하였다가 작품 제목만 살리고 내용은 전문이 삭제를 당하였다.
1932년에 귀국, 양산(梁山) 농민봉기사건에 관련되어 투옥, 1933년 남해보통학교(南海普通學校) 교사로 있으면서 농민문학에 투신하게 되었다. 1936년에 단편 「사하촌(寺下村)」이 『조선일보』 신촌문예에 당선되면서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어 소설 「옥심이」·「항진기(抗進記)」·「기로(岐路)」 등을 발표하였다.
그 후 동아일보사 동래지국을 인수하여 그일에 관여하였다가 치안유지법위반이라는 죄명으로 경찰에 피검되었다. 그는 일제의 탄압이 극심해지자 붓을 꺾었다. 광복 후 1947년 부산중학교 교사를 거쳐 1949년 이후 부산대학교 교수로 재직하였다.
5·16 직후 부산대학교 교수직을 물러나 『부산일보』 상임논설위원으로 논설과 칼럼을 집필하는 한편 1967년 한국문인협회 및 예총부산지부장을 역임하였다. 다시 부산대학교 교수로 복직하여 1974년 정년퇴직하였고, 그 뒤 1987년 민족문학학회 초대회장직을 맡았다.
교수직에 있으면서 1966년 단편소설 「모래톱이야기」 발표를 계기로 중앙문단에 복귀하고, 이후 5년 동안 낙동강변의 순박하고 무지한 시골사람들을 주인공으로 하는 암담한 일제치하와 그 이후 핍박당하는 농촌현실을 폭로하는 소설을 썼다.
1969년 중편소설 「수라도(修羅道)」로 제6회 한국문학상을 받고, 1971년 「산거족(山居族)」으로 제3회 문화예술상을 수상했다.
특히 문제작으로 평가된 「수라도」는 한말부터 광복 직후에 이르는 한 여인의 일생을 통하여 허 진사(許進士)댁의 가족사(家族史)와 한민족의 수난사가 사실적으로 재현되고 있다. 이름 없는 민중의 항거정신을 뚜렷이 부각시킨 작가의 문제작의 하나로 꼽힌다.
한편 그의 대표작으로 1971년 창작집 『인간단지(人間團地)』를 발간하여 높이 평판되었다. 1990년 『월간문학』에 발표된 단편 「인간단지」는 반인간적·반사회적·반민족적 상황에 대한 문학적 저항의 압권이란 평을 받았다.
이 작품은 나환자 수용소를 무대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박 원장의 비인도적인 처사에서 가까스로 풀려난 우 노인 일행은 정치지배를 받지 않는 새로운 공화국 ‘인간단지’를 창설하기에 이른다. 필생의 소원을 이룬 듯 하였으나 나병환자들과는 이웃할 수 없다는 이웃 부락민들의 습격에 일대 난투극이 벌어진다. 체제의 질곡에서 벗어나 복지사회를 모색해 본 민중의지의 강한 외침이라 할 것이다.
그 후 1977년 작품집 『사밧재』와 장편소설 「삼별초」, 그리고 수상집 『낙동강의 파수군』 등이 출간되었다. 1976년 은관문화훈장을 받았고 1994년 심산(心山)상 문학부문을 수상하였다.

 

.................................................

사하촌 - 김정한 (문학과지성사)

사하촌 - 김정한 (사피엔스21)

사하촌 - 김정한 (현대문학)

수라도 - 김정한 (일신서적)

모래톱 이야기 - 김정한 (푸른사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