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책의 향기
I. 한국 문학/2. 소설

오발탄 - 이범선 (열림원)

by handaikhan 2023. 4. 18.

열림원 논술 한국 문학 15

 

목차

이범선
오발탄
학마을 사람들
갈매기
사망보류
몸 전체로
청대문집 개

이범선의 생애와 문학

전광용
꺼삐딴 리
사수
흑산도
크라운장
초혼곡

전광용의 생애와 문학

|논술| 빈곤으로 인한 생활고와 소외감에서 비롯되는 범죄를 어떻게 볼 것인가

.............................................................................................................................

 

이범선 - 오발탄 (1959년)

 

계리사 사무실 서기 송철호는 여섯시가 넘도록 사무실 한구석 자기 자리에 멍청하니 앉아 있었다. 무슨 미진한 사무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장부는 벌써 접어 치운 지 오래고 그야말로 멍청하니 그저 앉아 있는 것이었다. 딴 친구들은 눈으로 시곗바늘을 밀어 올리다시피 다섯시를 기다려 휘딱 나가 버렸다. 그런데 점심도 못 먹은 철호는 허기가 나서만이 아니라 갈 데도 없었다.

"송선생은 안 나가세요?"

이제 청소를 해야 할 테니 그만 나가 달라는 투의 사환애의 말에 철호는 다 낡아 빠진 해군 작업복 저고리 호주머니에 깊숙이 찌르고 있던 두 손을 빼내어서 무겁게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나가야지."

하품 같은 대답이었다.

사환애는 저쪽 구석에서부터 비질을 하기 시작하였다. 먼지가 사정없이 철호의 얼굴로 몰려왔다.

철호는 어슬렁 일어섰다. 이쪽 모서리 창가로 갔다. 바께쓰의 물을 대야에 따랐다. 두 손을 끝에서부터 가만히 물속에 담갔다. 아직 이른 봄이라 물이 꽤 손끝에 시렸다. 철호는 물속에 잠긴 두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펜대에 시달린 오른손 장지 첫 마디에 콩알만 한 못이 박였다. 그 못에서 파란 명주실 같은 것이 사르르 물속으로 풀려났다. 잉크. 그것은 잠시 대야 밑바닥을 기다 말고 사뿐히 위로 떠올라 안개처럼 연하게 피어서 사방으로 번져 나갔다. 손가락 끝을 중심으로 하고 그 색의 농도가 점점 연해져 나갔다. 맑게 갠 가을 하늘 색으로 대야 가장자리까지 번져 나간 그것은 다시 중심의 손끝을 향해 접어들며 약간 진한 파랑색으로 달무리 모양 둥그런 원을 그렸다.

피! 이건 분명히 피다!

철호는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슬그머니 물속에서 손을 빼내었다. 그러자 이번엔 대야 밑바닥에 한 사나이의 얼굴을 보았다. 철호의 눈을 마주 쳐다보는 그 사나이는 얼굴의 온 근육을 이상스레 히물히물 움직이며 입을 비죽거려 웃고 있었다.

이마에 길게 흐트러진 머리카락. 그 밑에 우묵하니 파인 두 눈. 깎아진 볼. 날카롭게 여윈 턱. 송장처럼 꺼멓고 윤기 없는 얼굴. 그것은 까마득한 원시인의 한 사나이였다.

몽둥이 끝에, 모난 돌을 하나 칡넝쿨로 아무렇게나 잡아매서 들고, 동굴 속에 남겨 두고 나온 식구들을 위하여 온종일 숲 속을 맨발로 헤매고 다니던 사나이.

곰? 그건 용기가 부족하다.

멧돼지? 힘이 모자란다.

노루? 너무 날쌔어서.

꿩? 그놈은 하늘을 난다.

토끼? 퇴끼. 그래. 고놈쯤은 꽤 대려잡음 직하다. 그런데 그것마저 요즈음은 몫에 잘 돌아오지 않는다. 사냥꾼이 너무 많다. 토끼보다도 더 많다.

그래도 무어든 들고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무엇인가 때려잡은 모양이다. 곰? 멧돼지? 노루? 꿩? 토끼?

그런데 사나이가 들고 일어선 것은 그 어느 것도 아니었다. 보기에도 징그러운 내장. 그것이 무슨 짐승의 내장인지는 사나이 자신도 모른다. 사나이는 그 짐승의 머리도 꼬리도 못 보았다. 누군가가 숲 속에 끌어내어 버린 것을 주워 오는 것이었다.

철호는 옆에 놓인 비누를 집어 들었다. 마구 두 손바닥으로 비볐다. 

우구구 까닭 모를 울분이 끓어올랐다. (P.13-16)

 

철호는 천천히 골목 안으로 들어섰다. 

"가자!"

철호는 멈칫 섰다. 낮에는 이렇게까지 멀리 들리는 줄은 미처 몰랐던 어머니의 그 소리가 골목 어귀에까지 들려왔다.

"가자!"

그러나 언제까지 그렇게 골목에 서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철호는 다시 발을 옮겨 놓았다. 정말 무거운 발걸음이었다. 그건 다리가 저려서만이 아니었다.

"가자!"

철호가 그의 집 쪽으로 걸음을 옮겨 놓을 때마다 그만치 그 소리는 더 크게 들려왔다.

가자는 것이었다. 돌아가자는 것이었다. 고향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었다. 옛날로 되돌아가자는 것이었다. 그것은 이렇게 정신이상이 생기기 전부터 철호의 어머니가 입버릇처럼 되풀이하던 말이었다.

삼팔선. 그것은 아무리 자세히 설명을 해주어도 철호의 늙은 어머니에게만은 아무 소용없는 일이었다.

'난 모르겠다. 암만해도 난 모르겠다. 삼팔선. 그래 거기에다 하늘에 꾹 닿도록 담을 쌓았단 말이냐, 어쨌단 말이냐. 제 고장으로 제가 간다는데 그래 막는 놈이 도대체 누구란 말이냐?"

죽어도 고향에 돌아가서 죽고 싶다는 철호의 어머니였다. 그러고는, 

"이게 어디 사람 사는 게냐? 하루 이틀도 아니고."

하며 한숨과 함께 무릎을 치며 꺼지듯이 풀썩 주저앉곤 하는 것이었다.

그럴 때마다 철호는,

"어머니, 그래도 남한은 이렇게 자유스럽지 않아요?"

하고, 남한이니까 이렇게 생명을 부지하고 살 수 있지, 만일 북한 고향으로 간다면 당장에 죽는 것이라고, 자유라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갖은 이야기를 다 예로 들어 가며 어머니에게 타일러 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자유라는 것을 늙은 어머니에게 이해시키기란 삼팔선을 인식시키기보다도 몇백 갑절 더 힘드는 일이었다. 아니 그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 했다. 그래 끝내 철호는 어머니에게 자유라는 것을 설명하는 일을 단념하고 말았다. 그렇게 되고 보니 철호의 어머니에게는 아들 - 지지리 고생을 하면서도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만은 죽어도 하지 않는 철호가 무슨 까닭인지는 몰라도 늙은 애미를 잡으려고 공연한 고집을 피우고 하는 천하에 고약한 놈으로만 여겨지는 것이었다.

그야 철호에게도 어머니의 심정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무슨 하늘이 알 만치 큰 부자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꽤 큰 지주로서 한 마을의 주인 격으로 제법 풍족하게 평생을 살아오던 철호의 어머니 눈에는 아무리 그네가 세상을 모른다고 해도, 산등성이를 악착스레 깎아 내고 거기에다 게딱지 같은 판잣집들을 다닥다닥 붙여 놓은 이 해방촌이 이름 그대로 '해방촌' 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두 내 나라를 찾았다게 기뻐서 울었다. 엉엉 울었다. 시집올 때 입었던 홍치마를 꺼내 입구 춤을 추었다. 그런데 이 꼴 돟다. 난 삻다. 아무래도 난 모르겠다. 뭐가 잘못됐건 잘못된 너머 세상이디그래."

철호의 어머니 생각에는 아무리 해도 모를 일이었던 것이었다. 나라를 찾았다면서 집을 잃어버려야 한다는 것은, 그것은 정말 알 수 없는 일 이었던 것이었다.

철호의 어머니는 남한으로 넘어온 후로 단 하루도 이 '가자'는 말을 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그렇게 지내 오던 그날, 6.25사변으로 바로 발밑에 빤히 내려다보이는 용산 일대가 폭격으로 지옥처럼 무너져 나가던 날 끝내 철호는 어머니를 잃어버리고 말았던 것이었다.

"큰애야, 이젠 정말 가자. 데것 봐라. 담이 홈싹 무너뎄는데. 삼팔선의 담이 데렇게 무너뎄는데, 야."

그때부터 철호의 어머니는 완전히 정신이상이었다. 지금의 어머니, 그것은 이미 철호의 어머니는 아니었다. 아무리 따져 보아도 그것이 철호 자기의 어머니일 수는 없었다. 세상에 아들딸마저 알아보지 못하는 어머니가 있을 수 있는 것일까? 그날부터 철호의 어머니는,

"가자! 가자!"

하고 저렇게 쨍쨍한 목소리로 외마디 소리를 지를 뿐 그 밖의 모든 것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있었다. 철호에게 있어서 지금의 어머니는 말하자면 어머니의 시체에 지나지 않았다. (p.19-22)

 

고학으로 고생고생 다니던 대학 삼학년에서 군대에 들어갔다가 나온 영호로서는, 특별한 기술이 없어 직업을 잡지 못하는 것은 별도리도 없는 노릇이라 칠 수도 있었지만, 이건 어디서 어떻게 마시는 것인지 거의 저녁마다 이렇게 취해 들어오는 동생 영호가 몹시 못마땅한 철호의 말이었다.

"네, 조금 했습니다. 친구들이.."

그것도 들으나 마나 늘 같은 대답이었다. 또 그것이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도 철호는 알고 있었다.

"이제 술 좀 그만 마셔라."

"친구들과 어울리면 자연히 마시게 되는걸요."

"글쎄, 그러니까 그 어울리는 걸 좀 삼가란 말이다."

"그럴 수도 없구요, 하하하."

"그렇다구 언제까지 그저 그렇게 어울려서 술이나 마시면 뭐가 되나?"

"되긴 뭐가 돼요? 그저 답답하니까 만나는 거구, 만나면 어찌어찌하다 한잔씩 하며 이야기나 하는 거죠 뭐."

"글세, 그게 맹랑한 일이란 말이다."

"그렇지만 형님, 그런 친구들이라도 있다는 게 좋지 않수? 그게 시시한 친구들이라 해도, 정말이지 그놈들마저 없었더라면 어떻게 살 뻔 했나 하고 생각할 때가 많아요. 외팔이, 절름발이, 그런 놈들. 무식한 놈들. 참 시시한 놈들이지요. 죽다 남은 놈들. 그렇지만 형님, 그놈들 다 착한 놈들이야요. 최소한 남을 속이지는 않거든요. 공갈을 때릴 망정. 하하하하. 전우, 전우."

형호른 고개를 뒤로 젖히고 천장을 향해 후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철호는 그저 물끄러미 영호의 모습을 쳐다볼 뿐 아무 말도 없었다. 영호는 여전히 천장을 향한 채 피어오르는 연기를 바라보며 한 손으로 목의 넥타이를 앞으로 잡아당겨 반쯤 끌러 늦추어 놓았다.

"가자!"

아랫목에서 어머니가 소리를 질렀다.

영호는 슬그머니 아랫목으로 고개를 돌렸다. 한참이나 그렇게 어머니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는 영호는 아무 말도 없이 그저 눈만 껌뻑껌뻑하고 있었다.

철호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앞에 놓인 등잔불이 거물거물 춤을 추었다. (p.24-25)

 

"제가 무슨 돈이 있어서 양담배를 사서 피우겠어요. 어쩌다 친구들이 사주는 것이니 피우는 거지요. 형님은 또 제가 거의 저녁마다 술을 마시고 또 제법 합승을 타고 들어오는 것도 못마땅하시죠. 저도 알고 있어요. 형님은 때때로 이십오 환 전찻값도 없어서 종로서 근 십 리를 집에까지 터덜터덜 걸어서 돌아오시는 것을. 그렇지만 형님이 걸으신다고 해서, 한사코 같이 타고 가자는 친구들의 호의, 아니 그건 호의도 채 못 되는 싱거운 수작인지도 모르죠. 어쨌든 그것을 굳이 뿌리치고 저마다 걸어야 할 아무 까닭도 없지 않습니까? 이상한 놈들이죠. 술 담배는 사주고 합승은 태워 줘도 돈은 안 주거든요."

영호는 손끝으로 뱅글뱅글 비벼 돌리는 담뱃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어쨌든 너도 이젠 좀 정신 차려 줘야지. 벌써 군대에서 나온 지도 이태나 되지 않니/"
"정신 차려야죠. 그렇지 않아도 이달 안으로는 어찌 되든 간에 결판을 내구 말 생각입니다."

"어디 취직을 해야지."

"취직이요? 형님처럼요? 전찻값도 안 되는 월급을 받고 남의 살림이나 계산해 주란 말이지요?"

"그럼 뭐 별 뽀죡한 수가 있는 줄 아니?"

"있지요. 남처럼 용기만 조금 있으면."

"...?"

어처구니없는 영호의 수작에 철호는 그저 멍청하니 영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손끝이 따가웠다. 철호는 비루(맥주) 깡통으로 만든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껐다.

"용기?"

"네, 용기."

"용기라니?"

"적어도 까마귀만 한 용기만이라도 말입니다. 영리할 필요는 없더군요. 우둔해도 상관없어요. 까마귀는 도무지 허수아비를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참새처럼 영리하지 못한 탓으로 그놈의 까마귀는 애당초 허수아비를 무서워할 줄조차 모르거든요."

영호의 입가에는 좀 전에 파랑새 꽁초에다 불을 댕기는 철호를 바라보던 때와 같은 야릇한 웃음이 또 소리 없이 감돌고 있었다.

"너 설마 무슨 엉뚱한 계획을 세우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철호는 약간 긴장한 얼굴을 하고 영호를 바라보며 꿀꺽 하고 침을 삼켰다.

"아니요. 엉뚱하긴 뭐가 엉뚱해요. 그저 우리들도 남처럼 다 벗어던지고 홀가분한 몸차림으로 달려 보자는 것이죠, 뭐."

"벗어던지고/"

"네, 벗어던지고. 양심이고, 윤리고, 관습이고, 법률이고 다 벗어던지고 말입니다."

영호의 큰 두 눈이 유난히 빛나는가 하자 철호의 눈을 정면으로 밀고 들었다.

"양심이고, 윤리고, 관습이고, 법률이고?"

"..."

"너는, 너는...."

"...."

영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눈만은 똑바로 형 철호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렇게나 살자면 이 형도 벌써 잘살 수 있었다."

철호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그렇게나라니요?"

"양심을 버리고, 윤리와 관습을 무시하고, 법률까지도 범하고?"

흥분한 철호의 큰 목소리에 영호는 지금까지 철호의 얼굴에 주었던 시선을 앞으로 죽 뻗치고 앉은 자기의 발끝으로 떨구었다.

"저도 형님을 존경하고 있어요. 고생하시는 형님을. 용케 이 고생을 참고 견디는 형님을. 그렇지만 형님은 약한 사람이야요. 용기가 없는 거지요. 너무 양심이 강해요. 아니, 어쩌면 사람이 약하면 약한 만치, 그만치 반대로 양심이란 가시는 여물고 굳어지는 것인지도 모르죠."

"양심이란 가시?"

"네, 가시지요. 양심이란 손끝의 가십니다. 빼어 버리면 아무렇지도 않은데 공연히 그냥 두고 건드릴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는 거야요. 윤리요? 윤리, 그건 나이롱 빤쓰 같은 것이죠. 입으나 마나 불알이 덜렁 비쳐 보이기는 매한가지죠. 관습이오? 그건 소녀의 머리 위에 달린 리봉이라고나 할까요? 있으면 예쁠 수도 있어요. 그러나 없대서 뭐 별일도 없어요. 볍률? 그건 마치 허수아비 같은 것입니다. 허수아비. 덜 굳은 바가지에다 되는대로 눈과 코를 그리고 수염만 크게 그린 허수아비. 누더기를 걸치고 팔을 쩍 벌리고 서 있는 허수아비. 참새들을 향해서는 그것이 제법 공갈이 되지요. 그러나 까마귀쯤만 돼도 벌써 무서워하지 않아요. 아니, 무서워하기는커녕 그놈의 상투 끝에 턱 올라앉아서 썩은 흙을 쑤시던 더러운 주둥이를  쓱쓱 문질러도 별일 없거든요. 흥."

영호는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거기 문턱 밑에 담뱃값에서 새로 담배를 한 개 빼어 물고 지금까지 들고 있던 다 탄 꽁다리에서 불을 옮겨 빨았다.

"가자!"

어머니의 그 소리가 또 들렸다. 어머니는 분명히 잠이 들어 있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간간이 저렇게 '가자 가자' 소리르 ㄹ지르는 것이었다. 그것은 어쩌면 어머니에게는 호흡처럼 생리화해 버린 것인지도 몰랐다. (p.28-31)

 

"저도 형님의 그 생활 태도를 잘 알아요. 가난하더라도 깨끗이 살자는. 그렇지요, 깨끗이 사는 게 좋지요. 그런데 형님 하나 깨끗하기 위하여 치르는 식구들의 희생이 너무 어처구니없이 크고 많단 말입니다. 헐벗고 굶주리고. 형님 자신만 해도 그렇죠. 밤낮 쑤시는 충치 하나 처치 못 하시고. 이가 쑤시면 치과에 가서 치료를 하거나 빼어 버리거나 해야 할 거 아니야요? 그런데 형님은 그것을 참고 있어요. 낯을 잔뜩 찌푸리고 참는단 말입니다. 물론 치료비가 없으니까 그러는 수밖에 없겠지요. 그겁니다. 바로 그겁니다. 그 돈을 어떻게든가 구해야죠. 이가 쑤시는데 그럼 어떻게 해요? 그걸 형님처럼, 마치 이 쑤시는 것을 참고 견디는 그것이 돈을, 치료비를 버는 것이기나 한 것처럼 생각하는 것. 안 쓰는 것은 혹 버는 셈이 된다고 할 수도 있을 거야요. 그렇지만 꼭 써야 할 데 못 쓰는 것이 버는 셈이라고는 할 수 없지 않아요? 세상에는 이런 세 층의 사람들이 있다고 봅니다. 즉 돈을 모으기 위해서만으로 필요 이상의 돈을 버는 사람과, 필요하니까 그 필요한 만치의 돈을 버는 사람과, 또 하나는 이건 꼭 필요한 돈도 채 못 벌고서 그 대신 생활을 졸이는 사람들. 신발에다 발을 맞추는 격으로. 형님은 아마 그 맨 끝의 층에 속하겠지요. 필요한 돈도 미처 벌지 못하는 사람. 깨끗이 살자니까 그럴 수밖에 없다고 하시겠지요. 그래요. 그것은 깨끗하기는 할지 모르죠. 그렇지만 그저 그것뿐ㄴ이지요. 그래요. 그것은 깨끗하기는 할지 모르죠. 그렇지만 그저 그것뿐이지요. 언제까지나 충치가 쏘아 부은 볼을 싸쥐고 울상일 수밖에 없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야 형님! 인생이 저 골목 안에서 십 환짜리를 받고 코 흘리는 어린애들에게 보여 주는 요지경 이라면야 자기가 가지고 있는 돈값만치 구멍으로 들여다보고 말 수도 있겠지요. 그렇지만 어디 인생이 자기 주머니 속의 돈 액수만치만 살고 그만두고 싶으면 그만둘 수 있는 요지경인가요. 어디. 돈만치만 먹고 말 수 있는 그런 편리한 목구멍인가요, 어디? 싫어도 살아야 하니까 돈이 필요하구요. 필요한 돈이니까 구해야죠. 왜 우리라고 좀더 넓은 테두리, 법률선까지 못 나가란 법이 어디 있어요? 아니, 남들은 다 벗어던지고 법률선까지도 넘나들면서 사는데, 왜 우리만이 옹색한 양심의 울타리 안에서 숨이 막혀야 해요? 법률이란 뭐야요? 우리들이 피차에 약속한 선이 아니야요?"

철호는 여전히 턱을 가슴에 푹 묻은 채 묵묵히 앉아 두 짝 다 엄지발가락이 몽땅 밖으로 나온 뚫어진 양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일론 양말을 한 켤레 사면 반년은 무난히 뚫어지지 않고 견딘다는 말은 들었다. 그러나 뻔히 알면서도 번번이 백 환짜리 무명 양말을 사들고 들어오는 철호였다. 칠백 환이란 돈을 단번에 잘라 낼 여유가 도저히 없는 월급이었던 것이다.

"가자!"

어머니는 또 몸을 뒤치었다.

"그건 억설이야."

철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신문지를 바른 맞은편 벽에 쭈그리고 앉은 아내의 그림자가 커다랗게 비쳐 있었다. 꼽추처럼 꼬부리고 앉은 아내의 그림자는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괴물스러웠다. 철호는 눈을 감았다. 머리마저 등 뒤 칸막이 반자에 기대었다.

철호의 감은 눈 앞에 십여 년 전 아내가 흰 저고리 까만 치마를 입고 선히 나타났다. 무대에 나선 그네는 더욱 에뻤다. E여자대학 졸업음악회였다. 노래가 끝나자 박수 소리가 그칠 줄을 몰랐다. 그날 저녁 같이 거리를 거닐던 그네는 정말 싱싱하고 예뻤었다. 그러나 지금 철호 앞에 쭈그리고 앉은 아내는 그때의 그네가 아니었다. 무슨 둔한 동물처럼 되어 버린 그네. 이제 아무런 희망도 가져 보려고 하지 않는 아내. 철호는 가만히 눈을 떴다. 그래도 아내의 살눈썹만은 전처럼 까맣게 길었다.

"가자!"

철호는 흠칫 놀라 환상에서 깨어났다.

"억설이요? 그런지도 모르죠."

한참이나 잠잠하니 앉아 까물거리는 등잔불을 바라보던 영호의 맥빠진 대답이었다.

"네 말대로 한다면 돈 있는 사람들은 다 나쁜 사람이란 말밖에 더 되나, 어디?"

"아니죠. 제가 어디 나쁘고 좋고를 가렸어요? 나쁘긴 누가 나빠요? 왜 나빠요? 아, 잘사는 게 나빠요? 도시 나쁘고 좋고부터 따질 아무런 금도 없지요. 뭐."

"그렇지만 지금 네 말로는 잘살자면 꼭 양심이고 윤리고 뭐고 다 버려야 한다는 것이 아니고 뭐야?"

"천만에요. 잘못 이해하신 겁니다. 간단히 말씀드리면 이렇다는 것입니다. 즉, 양심껏 살아가면서 잘살 수도 있기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극히 적다. 거기에 비겨서 그 시시한 것들을 벗어던지기만 하면 누구나 틀림없이 잘살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억설이란 말이다. 마음 한구석이 어딘가 비틀려서 하는 억지란 말이다."

"글쎄요. 마음이 비틀렸다고요? 그건 아마 사실일는지 모르겠어요. 분명히 비틀렸어요. 그런데 그 비틀리기가 너무 늦었어요. 어머니가 저렇게 미치기 전에 비틀렸어야 했지요. 한강철교를 폭파하기 전에 말입니다. 하나밖에 없는 누이동생 명숙이가 양공주가 되기 전에 비틀렸어야 했지요. 환도령이 내리기 전에, 하다못해 동대문시장에 자리라도 한 자리 비었을 때 말입니다. 그러구 이놈의 배때기에 지금도 무슨 내장이기나 한 것처럼 박혀 있는 파편이 터지기 전에 말입니다. 아니, 그보다도 더 전에. 제가 뭐 무슨 애국자나처럼 남들은 다 기피하는 군대에 어머니의 원수를 갚겠노라고 자원하던 그 전에 말입니다."

"..."

"....그보다도 더 전에, 썩 전에 비틀렸어야 했을지 모르죠. 나면서부터 비틀렸더라면 더 좋았을지도 모르죠."

영호는 푹 고개를 떨구었다.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이 후르르 떨고 있었다. 철호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윗목에 앉아 있던 철호의 아내가 방바닥에 떨어진 눈물을 손끝으로 장난처럼 문지르고 있었다. 영호도 훌쩍훌쩍 코를 들이켜고 있었다.

"그렇지만 인생이란 그런 게 아니야. 너는 아직 사람이란 어떻게 살아야만 하는 것인지조차도 모르고 있어."

"그래요. 사람이란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지는 정말 모르겠어요. 그렇지만 이제 이 물고 뜯고 하는 마당에서 살자면, 생명만이라도 유지하자면 어떻게 해야 할는지는 알 것 같에요, 허허."

영호는 눈물이 글썽하니 고인 눈을 천장을 향해 쳐들며 자기 자신을 비웃듯이 허허 하고 웃었다.

"가자!"

또 어머니는 가자고 했다. 영호는 아랫목으로 눈을 돌렸다. 철호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앞의 등잔불이 크게 흔들거렸다. 방 안의 모든 그림자들이 움직였다. 집 전체가 그대로 기울거리는 것 같았다. 그것뿐 조용했다. 밤이 꽤 깊은 모양이었다. 세상이 온통 잠들고 있었다. (p.32-36)

 

마침 택시가 한 대 왔다. 그는 손을 한 번 흔들었다.

철호는 던져지듯이 털썩 택시 안에 쓰러졌다.

"어디로 가시죠?"

택시는 벌써 구르고 있었다.

"해방총."

자동차는 스르르 속력을 늦추었다. 해방촌으로 가자면 차를 돌려야 하는 까닭이었다. 운전수는 줄지어 달려오는 자동차의 사이가 생기기를 노리고 있었다. 저만치 자동차의 행렬이 좀 끊겼다. 운전수는 핸들을 잔뜩 비틀어 쥐었다. 운전수가 몸을 한편으로 기울이며 마악 핸들을 틀려는 때였다. 뒷자리에서 철호가 소리를 질렀다.

"아냐야. S병원으로 가."

철호는 갑자기 아내의 죽음을 생각했던 것이다. 운전수는 다시 휙 핸들을 이쪽으로 틀었다. 운전수 옆에 앉아 있는 조수애가 한 번 철호를 돌아다보았다. 철호는 뒷자리 한구석에 가서 몸을 틀어박은 채 고개를 뒤로 젖히고 눈을 감고 있었다. 차는 한국은행 앞 로터리를 돌고 있었다. 그때에 또 뒤에서 철호가 소리를 질렀다.

"아니야. X경찰서로 가."

눈을 감고 있는 철호는 생각하는 것이었다. 아내는 이미 죽었는데 하고.

이번에는 다행히 차의 방향을 바꿀 필요가 없었다. 그냥 달렸다.

"X경찰섭니다. 손님."

조수애가 뒤로 몸을 틀어 돌리고 말했다.

"가자."

철호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어디로 갑니까?"

"글쎄, 가."

"하 참, 딱한 아저씨네."

"...."

"취했나?"

운전수가 힐끔 조수애를 쳐다보았다.

"그런가 봐요."

"어쩌다 오발탄 같은 손님이 걸렸어. 자기 갈 곳도 모르게."

운전수는 기어를 넣으며 중얼거렸다. 철호는 까무룩이 잠이 들어 가는 것 같은 속에서 운전수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멀리 듣고 있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혼자 생각하는 것이었다.

'아들 구실, 남편 구실, 애비 구실, 형 구실, 오빠 구실, 또 계리사 사무실 서기 구실. 해야 할 구실이 너무 많구나. 그래 난 네 말대로 아마도 조물주의 오발탄인지도 모른다. 정말 갈 곳을 알 수가 없다. 그런데 지금 나는 어디건 가긴 가야 한다...'

철호는 점점 더 졸려 왔다. 다리가 저린 것처럼 머리의 감각이 차츰 없어져 갔다.

"가자!"

철호는 또 한 번 귓가에 어머니의 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하며 푹 모로 쓰러지고 말았다.

차가 네거리에 다다랐다. 앞의 교통신호대에 빨간불이 켜졌다. 차가 섰다. 또 한 번 조수애가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어디로 가시죠?"

그러나 머리를 푹 앞으로 수그린 철호는 아무 대답도 없었다.

따르르릉 벨이 울렸다. 긴 자동차의 행렬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철호가 탄 차도 목적지를 모르는 대로 행렬에 끼여서 움직이는 수밖에 없었다. 철호의 입에서 흘러내린 선지피가 흥건히 그의 와이셔츠 가슴을 적시고 있는 것은 아무도 모르는 채 교통신호대의 파랑불 밑으로 차는 네거리를 지나갔다. (p.53-55)

 

....................................................................................................

<작품 해설>

<오발탄>은 1959년 [현대문학]에 발표된 이범선의 대표작으로, 월남 실향민의 비극적인 삶을 통해 전후의 궁핍한 사회상과 부조리를 생생하게 그려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켰던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한국전쟁 직후의 서울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주인공 철호는 전후의 해방촌에서 전쟁의 충격으로 정신이상이 되어 버린 어머니와 가난에 찌들어 삶의 의욕과 말을 잃어버린 아내, 영양실조에 걸린 다섯 살 난 어린 딸, 제대 후 이 년 동안이나 취직을 하지 못하고 빈둥거리는 동생 영호, 그리고 양공주가 되어 버린 여동생 명숙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그는 계리사 사무실의 서기로 근면하고 성실하게 일하며 열심히 생활하는 평범한 가장이지만 극도의 가난으로 고통받고 있습니다. 떠나온 북쪽의 고향을 그리워하기도 하고 뭔가 마구 때려 부수고 싶은 충동을 느끼기도 하면서 하루하루 삶을 이어가던 그는, 불안스레 지탱해 온 가정마저 파괴되는 현실 앞에서 절망스러워합니다.

이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철호 일가의 가난이 무엇 때문인지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질 수 없을 만큼 적은 벌이에 매달려 살아야 하는 철호의 사정과 군에서 제대한 후 직장을 구하지 못한 영호나 양공주가 될 수밖에 없었던 명숙의 처지는 분단과 전쟁이 삶의 터전을 뿌리째 흔들어 놓았던 1950년대 후반의 궁핍한 현실을 잘 보여 줍니다. 현대적인 전쟁 무기의 사용으로 대규모 살상과 파괴를 초래했던 한국전쟁은 막대한 인명과 재산의 손실을 가져왔습니다. 경제활동의 기반이 되는 생산시설이 심각하게 파괴되고 생산력이 급격하게 떨어져 거리에는 실업자와 걸인, 고아와 장애인, 창녀 들이 넘쳐났습니다. 1952년 말 서울의 인구 중 직업을 가진 인구가 약 22페센트밖에 되지 않았다는 통계는 이와 같은 상황을 잘 말해 줍니다. 전쟁이 만들어 낸 절대적 빈곤이 사람들의 생활과 정신을 어둠과 절망 속으로 밀어 넣은 것입니다.

다음으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가난에 대해 동생 영호가 느끼는 분노의 감정입니다. 양심적으로 살고자 하지만 늘 정신적 황폐함과 궁핍에 허덕이는 형을 보며 영호는 "양심이고, 윤리고, 관습이고, 법률이고 다 벗어던지면 우리도 남들처럼 잘 살 수 있지 않겠느냐"고 소리칩니다. 영호의 외침은 부도덕한 사람들은 쉽게 부를 얻을 수 있지만 성실하고 정직한 사람은 생게조차 위협받던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격렬한 증오입니다.

양심과 윤리와 법률을 저버리고 남들처럼 근사하게 사는 길을 선택 하겠다던 영호는 자신의 결심을 실행하기에 앞서 어린 조카에게 빨간 운동화를 사줍니다. 삼촌이 사준 운동화를 신고 엄마와 함께 화신백화점에 놀러 갈 꿈에 부풀어 있는 어린 딸의 모습은 그들 가족의 답답한 처지 때문에 안쓰럽고 위태로워 보입니다. (P.10-12)

 

1. 퇴근하기 전에 손을 씻으면서 물에 씻긴 잉크를 본 철호가 피를 연상하며 자신을 원시인과 동일시 하는 까닭.

계리사 사무소에서 하루 종일 펜대를 잡고 일하던 철호는 퇴근 전에 대야에 물을 받아 손을 씻습니다. 대야에 파랗게 흘러내리는 잉크를 보며 철호가 '피'를 떠올리는 것은 그의 정신적 상처가 일으키는 무의식적인 연상작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철호의 정신적 상처는 남이 내다 버린 내장을 주워 가족들에게 돌아가는 초라하고 무능한 원시인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부분에서 구체화됩니다. 철호는 손가락에 못이 박히도록 펜대를 굴려도 가족의 생계조차 제대로 꾸려 가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가 하루 종일 숲을 헤매다 남이 내다 버린 짐승의 내장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초라한 원시인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자신에 대한 모멸감과 비애로 철호는 자신을 한없이 무능하고 초라한 사람으로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2. '가자! 가자!'라는 어머니의 외침은 소설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결정짓고 있는 독백어입니다. 철호 가족이 처한 암담한 현실을 더욱 강박적으로 느끼게 하는 이 외침은 소설의 분위기를 더욱 암울하게 만듭니다. 어머니가 외치는 '가자!'라는 말은 과거의 고향으로 돌아가자는 뜻입니다. 이 고향은 분단과 전쟁으로 인해 실향민들의 보편적 삶의 가치가 훼손되기 이전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과거의 행복했던 고향으로 갈 수 있는 길은 없으므로, 어머니의 '가자!'라는 외침은 현실의 각박함을 더욱 부각시키면서 뿌리 뽑힌 현실에 대한 절망감을 느끼게 합니다.

 

3. 어떠한 상황에서도 양심을 지키며 분수에 맞게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철호와 달리, 영호는 답답한 현실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윤리고 양심이고 관습이고 법률이고 다 벗어던질 용기가 필요할 뿐이라고 주장합니다.

영호의 눈에 비친 세상은 양심과 도덕과 법률을 지키는 사람들은 불행한 반면, 그 모든 것을 벗어던진 사람들은 오히려 잘사는 비틀리고 뒤집힌 모습입니다. 어머니가 정신이상이 된 것도, 여동생 명숙이 양공주가 된 것도 모두 가난 때문이고, 그 가난은 양심을 지키며 살려고 했던 순진하고 고지식한 생활 태도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영호는 비틀린 세상에서 살려면 제대로 비틀릴수록 더 좋다고 말합니다. 영호의 성실함만으로는 대답할 수 없는 분단 이후의 부조리한 남한 사회에 대한 비판이 담겨 있습니다.

이와 같이 상반되는 두 형제의 삶의 태도는 극도의 궁핍과 도덕성의 상실로 피폐해진 현실 속에서 '사람은 과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라는 물음을 던집니다. 영호는 결국 권청 강도 혐의로 경찰서에 잡혀갑니다. 양심적으로 살아가려고 애쓰는 철호에게 남은 것은 아내의 죽음이라는 절망적인 현실뿐입니다. 출구가 보이지 않는 현실 속에서 자신이라면 어떠한 행동을 할 수 있을지, 인간은 어떠한 경우에도 인간다운 삶의 질서를 인정하고 그에 따라 살아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어떻게 해서든 생존의 욕구를 충족시키며 살아야 할 것인지 깊은 성찰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4. 철호는 치과에 갈 돈이 없어서 밤낮 쑤시는 충치를 어떻게 하지 못하고 치통을 참고 지냅니다. 치과에 갈 돈은 철호에게 꼭 필요한 돈이지만, 그는 꼭 필요한 만큼만 벌지 못하므로 생활을 졸일 수밖에 없습니다. 철호가 더 많은 돈을 벌지 못하는 것은 양심을 지키며 깨끗이 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남들처럼 탈법적인 방법으로 살 마음을 먹는다면 생활에 필요한 얼마간의 돈쯤은 마련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는 도덕과 양심을 소중히 여기는 생활 태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철호는 깨끗하고 정직한 삶을 살려면 충치의 고통을 참을 수밖에 없는 형편이므로, 그의 치통은 양심을 지키는 사람이 겪어야 하는 생활의 고통, 정신적 고통을 의미합니다.

 

5. 명숙은 미군들에게 몸을 파는 '양공주'입니다. 철호는 양공주 노릇을 하다 경찰에 걸려든 여동생 명숙의 신원보증을 위해 경찰서에 갈 때마다 누이동생이 밉고 원망스러워 올곤 했습니다. 명숙이 부끄럽고 원망스러워 말 한마디 붙이지 않을 정도로 냉담하게 대합니다.

그런 명숙이 아내의 병원비로 그동안 모아 두었던 백 환짜리 한 다발을 선뜻 내놓았을 때, 철호는 명숙의 나일론 양말에 계란만 한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무원처럼 차려입고 색안경을 쓰고 다니며 멋을 부리는 명숙이지만, 그녀 역시 구멍 난 양말을 그대로 신을 정도로 가난을 견디며 애쓰고 있었던 것입니다. 철호가 여동생의 구멍 난 양말에서 깨끗함을 느낀 것은, 구멍 난 양말을 그냥 신을 정도로 아끼며 모아 두었던 돈을 오빠네 가족을 위해 선뜻 내놓은 명숙의 착하고 따듯한 마음을 엿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6. 영호의 구속을 목격하고 아내의 죽음을 확인한 철호가 찾아간 곳은 치과였습니다. 가족을 위해 치통을 참아 가며 최선을 다해 왔지만 정작 자신은 동생과 아내의 불행을 막을 수 없었으므로 더 이상 치통을 참아야 할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아내의 죽음과 동생의 구속이라는 감당하기 어려운 불행 앞에서 가장의 책임을 다하며 도덕적으로 살고자 하는 의지가 무너져 내린 순간, 철호는 충치를 뽑아 버립니다. 철호가 의사들의 경고를 무시하고 충치를 두 개나 한꺼번에 뽑아 버리는 것은 일종의 자기 파괴 행위로 볼 수 있습니다. 삶의 이유와 의미를 잃어버린 철호는 자신의 생명을 보호해야 한다는 안전의 욕구마저도 의식하지 못합니다. 이가 쑤시니 뽑아 버러야겠다는 맹목적이고 단순한 생각 외에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 철호의 상태는 그가 받은 정신적 충격의 강도를 실감 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7. 어금니를 두 개나 빼고 선지피를 쏟아 정신이 흐려진 철호는 자신이 가야 할 곳을 알지 못합니다. 몽롱한 의식 가운데서도 어디로든 가긴 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의 무의식은 삶을 이대로 포기할 수 없다는 마지막 안간힘인 것입니다. 그러나 어디로도 갈 수 없는 그는 삶의 방향감각을 잃어버린 소시민의 삶의 비극적인 절망과 좌절을 그대로 보여 줍니다.

어머니의 '가자!'라는 외침이 떠나온 북쪽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염원이라면, 혼수상태에 빠진 철호가 택시 안에서 반복하는 '가자!'라는 외침은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절박한 심리의 표출이라 볼 수 있습니다. 분단을 인정하지 않고 고향으로 가자는 어머니의 외침을 지긋지긋해했던 철호가 의식을 잃어 가는 상태에서 '가자!'라고 외치는 것은, 그도 어머니처럼 '지금 이대로'는 살아갈 수 없다는 심리상태에 이르렀음을 말해 줍니다. 다시 말해 '가자!'라는 외침 속에는 부정성이 극한까지 이른 남한 사회가 어떻게든 변해야 한다는 절박한 열망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8. 오발탄은 말 그대로 '잘못 발사된 탄환'을 의미합니다. 누구보다 성실하게 양심을 지키며 살려고 애쓰지만 삶의 엄청난 무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철호 같은 소회된 인간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철호 가족의 모습은 전쟁 이후 주변부로 밀려나 정신적 황폐함과 경제적 궁핍 속에서 허덕이며 살아가는 소외된 이들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삶은 자신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부조리한 상황속에서 세상과 어긋나기만 합니다. 이런 삶이 곧 오발탄, 목적도 없고 어떤 보람도 없이 희생되고 마는 인생을 의미합니다.

죽어 가는 철호를 태운 택시가 긴 자동차의 행렬에 끼여서 무심히 움직이는 모습은 개인의 비극을 외면한 채 제 갈 길을 가고 있는 거대한 세상의 흐름을 연상시키며, 선량한 개인들을 오발탄으로 만드는 세상이 이대로 계속 흘러가도 좋은지 질문을 던지게 합니다. (p.56-66)

 

.......................................................................................................................................................................................................................................................................................

이범선(李範宣, 1920년 12월 30일 ~ 1982년 3월 13일)

대한민국의 소설가이다.

호는 학촌(鶴村). 평안남도 신안주(新安州) 출신. 1938년 진남포공립상공학교를 졸업하고, 평양에서 은행원으로 근무하다가 일제 말기에 평안북도 풍천(風泉) 탄광에 징용되었다.
광복 후 월남해서 동국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하고, 6·25 때는 거제고등학교에서 3년간 교편을 잡았다. 이때 『현대문학』에 단편 「암표(暗票)」(1955)와 「일요일」(1955)로 김동리(金東里)의 추천을 받고 문단에 등단하였다.
그 뒤 휘문고등학교·숙명여자고등학교·대광고등학교 등에서 교편생활을 하면서 작품을 발표하였다. 1968년 한국외국어대학 전임강사로 부임하여, 1977년부터 교수로 재직하였다. 그동안 한국문인협회 이사, 소설가협회 부대표위원에 선임되었고,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에 선출되었다.
초기의 작품 「암표」·「일요일」·「이웃」(1956)·「학마을 사람들」(1957)·「수심가(愁心歌)」(1957)·「갈매기」(1958) 등에는 그의 생활 체험이 반영된 것으로서 어두운 사회의 단면과 무기력한 인간상(人間像)이 많이 등장한다.
담담한 필치의 서경적 묘사의 수법으로 토착 서민의 생태를 표현, 길흉의 미신 또는 무욕(無慾)의 인간상을 다루었다는 평을 받았다.
그 뒤 「피해자」(1958)·「오발탄」과 장편 「춤추는 선인장」(1966∼1967) 등에서는 사회고발의식이 짙은 리얼리즘의 문학으로 전환하여 약자의 생존과 침울한 사회상, 종교의 위선, 남녀의 생태 등을 부각시키는 객관적 묘사를 보여 주었다.
후기의 작품이라 할 수 있는 「냉혈동물」·「돌무늬」·「삼계일심(三界一心)」(1973)에서는 인간의 궁극적 모순을 추구하려는 존재론의 회의적 허무가 깃들인 잔잔한 휴머니티가 짙게 깔려 있다.
1958년 처녀창작집 『학마을 사람들』로 제1회 현대문학상 신인문학상을, 1961년「오발탄」으로 제5회 동인문학상과 1962년 제1회 오월문예상을, 또 「청대문집 개」(1970)로 제5회 월탄문학상(月灘文學賞)을 수상하였다. 창작집으로 『학마을 사람들』·『오발탄』·『피해자』·『분수령』이 있다.

 

...........................................

오발탄 - 이범석 (문학과지성사)

학마을 사람들 - 이범석 (사피엔스21)

이범선 대표 중단편선집 - 이범선 (책세상)

오발탄 - 이범선 (창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