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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
I. 한국 문학/2. 소설

옛 우물 - 오정희 (창비)

by handaikhan 2023. 4. 16.

창비 20세기 한국 소설 33

 

목차

오정희
저녁의 게임
중국인 거리
동경(銅鏡)
옛 우물

이순
병어회
백부(伯父)의 달

김채원
애천(愛泉)
겨울의 환(幻)

이메일 해설 - 박미진, 이혜령
낱말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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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정희 - 옛 우물 (1994년)

 

마흔다섯 살이 된 생일 아침, 나는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여섯 시에 맞춘 쾌종시계 소리에 눈을 떴다. 겨울 지나면서 해는 발돋움질하듯 조금씩 길어지고 매일매일 한 겹씩 엷어지는 어둠 속에 섬세하게 깃든 새벽빛, 친숙하고 익숙한 습관과 사물들 사이에서 잠을 깨었다. 여기저기, 가장 적합하다고 여겨진 자리에 의심 없이 놓여진 전기밥솥, 가스레인지, 프라이팬과 낡고 늙어 부쩍 모터 소리가 요란해진 냉장고 따위의 가운데서 움직이며 나는, 태어났을 때 사십오 년 후의 이러한 내 모습을 결코 상상하지 않았으리라는 생각을 잠깐 해본 것이 다르다면 다른 일이었을 것이다. 어느 해 이른 봄 오늘과 별로 다를 것 없는 어느 날 나는 스물세 살부터 십 년에 걸쳐 해 거름으로 아이 낳기를 한 서른세 살의, 아마 그녀로서는 마지막 출산이기를 바랐을 여자의 자궁에서 벗어나 시간의 그물에 걸려들었다.

어머니는 그 뒤로도 십 년 가까이 아이를 낳았다. 내가 여덟 살이 되었을 때 낳은 사내아이를 끝으로 자궁은 말린 오얏처럼 쭈그러들었다.

내가 태어날 날임을 상기시키는 아무런 특별함은 없다.그해 봄날 바람이 불었는지 비가 내렸는지 맑았는지 흐렸는지, 이제는 층계를 오르는 일조차 잊어버린 치매 상태의 노모에게 묻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리라. 다산의 축복을 받은 농경민의 마지막 후에인 그녀에게 아이를 낳는 것은, 밤송이가 벌어 저절로 알밤이 툭 떨어지는 것, 봉숭아 여문 씨들이 바람에 화르르 흐트러지는 것처럼 자연스럽고 범상한 일이었을 것이다.

나는 막내 동생이 태어나던 때를 기억하고 있다. 깨끗한 바가지에 쌀을 담고 그 위에 마른 미역을 한 잎 걸쳐 안방 시렁에 얹어 삼신에게 바친 다음 할머니는 또다시 깨끗한 짚을 한 다발 안방으로 들여갔다. 사람도 짐승처럼 짚북데기 깔갯짚에서 아이를 낳나? 누구에게도 물을 수 없었던 마음속의 의문으로 안방 쪽으로 가는 눈길이 자꾸 은밀하고 유심해졌다.

할머니는 아궁이가 미어지게 나무를 처넣어 부엌의 무쇠 솥에 물을 끓였다. 저녁 내내 어둡고 웅숭깊은 부엌에는 설설 물 끓는 소리와 더운 김이 가득 서렸다. 특별히 누군가 말해준 적은 없지만 아이들은 무언가 분주하고 소란스럽고 조심스런 쉬쉬함으로 어머니가 아기를 낳으려 한다는 눈치를 채게 마련이다.

할머니는 언니에게, 해 지기 전에 옛 우물에서 물을 길어 와 독을 채워놓으라고 말했다. 머리카락 빠뜨리지 마라. 쓸데없이 수다 떨다 침 떨구지 마라. 부정 탄다. 할머니는 엄하게 덧붙였다. 열다섯 살 큰 언니는 물 뜨러 다니는 것을 부끄러워해서 물 길러 갈 때마다 입을 한 발이나 내밀었지만 불평 없이 물 초롱을 찾아 들고 나는 두레박을 챙겨 따라나섰다. 정자나무 지나 먼 옛 우물까지 가는 동안 언니는 한번도 입을 열지 않았다. 물을 떠 오면 할머니는 검불이나 먼지가 떴는지 살핀 뒤 먼저 흰 사발에 담아 장독대로 돌아갔다. 다음에는 부뚜막의 조왕 각시 사발에 채웠다. 아버지는 보이지 않았다. 마실이나 갔다 오게. 아이야 여자가 낳는 거지. 할머니가 손사래를 쳐서 내 보냈다. 남자야 아이를 만드는 데나 소용 있는 거지 하는 뜻이었을게다.

우리들은 불길이 잘 들이지 않아 싸늘한 윗방에 모여 재미도 없는 놀이에 열중하는 체하지만 귀는 온통 어머니의 신음소리가 새어 나오는 안방에 쏠려 있었다. 실뜨기도 공깃돌 놀이도 재미없었다. 우리들이 모이면 으레 아웅다웅 벌이는 싸움질도 하지 않았다. 이슬이 비친다거나 양수가 터졌다거나 문이 덜 열렸다거나 아아직 멀었다, 하는 할머니의 목소리에 섞여 아이고 어머니 아이고 어머니, 고통에 찬 외침이 들릴 때마다 언니는 어깨를 움찔움찔 떨고 조그만 얼굴이 굳어지며 말했다. 난 시집 안 가. 아이를 안 낳을 거야. 나는 작은오빠에게 머리를 쥐어박히고 훌쩍훌쩍 울었다. 정옥이의 엄마, 염장이 마누라가 아기를 낳다가 아기와 함께 죽었다는 말을 했기 때문이었다. 밤 깊도록 불 켜진 안방의 수런거림과 산고의 신음에 불안하게 귀 기울이다가 옷을 입은 채로 가로세로 쓰러져 잠이 들었지만 아침 일찍 저절로 눈이 떠졌다. 햇살이 퍼지지 않았는데도 문창호지가 밤새 눈 내린 아침처럼 환했다. 한바탕 큰일이 지나간 것처럼 평온함이 감돌았다. 기름이 뜬 미역국과 흰밥으로 차려진 밥상을 보며 우리는 우리가 잠든 사이 어머니가 아기를 낳았다는 것을 알았다. 안방에 건너가면 윗목에 한 아름 꿍쳐 있는 수상쩍은 피빨래와 짚더미, 아기는 우리가 차례로 입었던 배냇저고리를 우리가 막 벗어난, 혹은 지나온 작은 생처럼 물려 입고 밤을 지새운 고통, 피와 땀과 젖 냄새가 비릿하고 후덥덥하게 뒤섞인 공기를 마시며 잠들어 있었다.

할머니는 뒤란으로 돌아가 피 묻은 짚과 태를 태웠다. 우리가 떠나온 세계는 시커먼 연기와 검댕이로 피어올라 할머니가 장독대에 떠놓은 정화수 흰 대접, 옛날의 우물물에 날아 앉고 그렇게 우리는 영원한 암호, 비밀일 수밖에 없는 한 세계와 결별한다.

마당은 어느새 깨끗이 쓸려 있고 아버지는 새끼를 꼬아 숯과 고추를 끼워 대문에 금줄을 쳤다. 우리들은 싸리비 자국이 선명한, 아직 아무도 밟지 않은 마당에 작은 발자국을 만들며 학교로 갔다. 길에서 만나는 아이들에게마다 비밀 얘기 하듯 소곤소곤 말했다. 우리 엄마가 아기를 낳았어. 동생이 생겼어. 사내아기야.

거기에는, 새 아기가 태어난 풍경에는 밝음과 고즈넉함, 슬픔 같은 것이 어려 있다. 우리는 누구나 가엾은 한 여자으 ㅣ가랑이에서 피투성이가 되어 태어난다. 그리고 익히 알고 있는 길을 걸어가듯 생애 속으로 한 걸음씩 옮겨놓는다. 삶에 대한 상상력이란 대개의 경우 지나치게 황당하거나 안일하다. 묘지에 갔을 때 사람의 생애란 묘비에 적힌 생물연대 이상이라거나 그 이상이 아니라는 상반된 느낌들이 동시에 고개를 들지만 간단한 생몰연대에 비해 그의 생애와 업적을 적은 비문은 구차한 변명이나 췌사로 보여질 수도 있으리라.

한 사람의 생애에 있어서 사십오 년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부지도 가난뱅이도 될 수 있고 대통령도 마술사도 될 수 있는 시간일뿐더러 이미 죽어서 물과 불과 먼지와 바람으로 흩어져 산하에 분분히 내리기에도 충분한 시간이다. (p.102-106)

 

그러나 나는 지금 작은 지방도시에서, 만성적인 편두통과 임신 중의 변비로 인한 치질에 시달리는 중년의 주부로 살아가고 있다. 휴애하는 시와 에세이를 읽고 티브이의 뉴스를 보고 보수적인 것과 진보적인 것으로 알려진 두 가지의 일간지를 동시에 구독해 읽는 것으로 세상을 보는 창구로 삼고 있다. 한 달에 한 번씩 아들의 학교 자모회에 참석하고 일주일에 두 번 장을 보고 똑같은 거리와 골목을 지나 일주일에 한 번 쑥탕에 가고 매주 목요일 재활센터에서 지체부자유자들의 물리치료를 돕는 자원봉사의 일을 하고 있다. 잦은 일은 아니지만 이름난 악단이나 연주자의 순회공연이 있을 때면 남편과 함께 정장을 하고 밤 외출을 하기도 한다.

갈라파고스를 떠올린 것도 엊그제, 벌써 한 주일 이상이나 화재가 계속되어 희귀생물의 희생이 걱정된다는 티브이 뉴스에 비친 광경이 의식의 표면에 남긴 잔상 같은 것일 테고, 더 먼저는 아들이, 자신이 사용하는 물건들에 붙여 놓은, '도도'라는 말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도도가 무엇인가를 묻자 아들은 사백 년 전에 사라진, 나는 기능을 잃어 멸종된 새였다고 말했었다. 누구나 젊은 한 시절 자신을 전설 속의, 멸종된 종으로 여기지 않겠는가. 관습과 제도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두려움과 항거를 그렇게 나타내지 않겠는가.

우리 삶의 풍속은 그만큼 빈약한 상상력에 기대어 부박하다. 삶이 내게 도태시킨 가능성에 대해 별반 아쉬움도 없이 잠깐 생각해본 것은 내가 새로 보태어진 나이테에 잠깐 발이 걸렸다는 뜻일 게다. 그러나 나는 이제 혼례에서나 장레에 꼭 같은 한 가지 옷으로 각각 알맞은 역할을 연출할 줄 알고 내 손으로 질서 지워주는 일들에 자부심을 갖고 있다. 마늘과 생각이 어우러져 내는 맛을 알고 행주와 걸레의 질서를 사랑하지만 종종 무질서 속으로 피신하는 것도 한 방법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남편과 아들이 서둘러 아침식사를 하고 각각 일터와 학교로 간 뒤 화장실 청소를 하려다가 나는 픽 웃었다.

깔끔한 성격의 남편은 그답지 않게 자주 변기의 물을 내리는 일을 잊는다. 나는 한 번도 그 점을 지적한 적이 없다. 비교적 성공한 봉급 생활자인, 이제 머리가 벗어지기 시작하고 몸이 불기 시작하는 장년의, 일자리나 술자리, 잠자리에서까지 능숙하고 세련된 그에게 어린날을 떠올리게 하는 것은 거의 없다. 내게서 어린 날의 심한 허기와 도벽, 노란 거품을 게워내던 횟배앓이의 흔적을 찾을 수 없는 것처럼. 그러나 나는 사타구니에 손을 넣고 모로 누워 웅크리고 자는 그의 모습을 볼 때, 채 물 내리는 것을 잊은 변기 속의, 천진하게 제 모양을 지니고 물에 잠겨 있는 똥을 볼 때 커다란, 늙어가는 그의 속에 변치 않은 모습으로 씨앗처럼 깊이 들어 있는 작은 그를, 똥을 누고 나서 자산이 눈 똥을 신기하고 이상해하는 눈길로 물끄러미 바로보는 어린아이, 유년기의 가난의 흔적을 본다. (p.106-108)

 

택시 정류장의 표지판을 찾아 망설이듯 느릿느릿 걷가 옛날로부터 홀연히 나타난 낯익은 찻집의 문 앞에서 문득 멈춰 섰다.

문득, 이라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나는 집으로부터 이곳까지의 먼 길이 여러 해에 걸친 우회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찻집의 유리창에 바짝 붙어 서서 뚫고 들어갈 듯 이마를 대었다. 오래전 내가 앉았던 자리, 강이 맞바로 내다보이는 창가의 탁자 위에 담뱃갑과 반쯤 마시다 만 찻잔, 몇 개의 열쇠가 매달려 있는 열쇠고리가 무심히 놓여 있었다. 그리고 재떨이에 걸쳐진 담배에서 피어오르는 연기. 의자는 비어 있었다. 유리 밖의 내 모습이 유령처럼 그 물상 위로 비비적 대며 어른거렸다. 나는 훅 숨을 들이마시며 눈을 부릅떴다. 그것은 텅 빈 공허, 사라짐의 공포였을까. 그곳은 사과가 떨어져도 "'툭' 소리가 나"지 않는 저편의 세계. 내가 때때로 송수화기를 통해 듣게 되는, 어둠의 심부로 한없이 빨려가 사라지는 신호음. 이제는 영원히 과거시제로 말해질 수밖에 없는 비인칭 명제. 그러나 나로서는 간신히 온 힘을 다해 '그'라고 부르는.

(같이 읽으면 좋은 책)

박목월 시 전집 - 박목월 (민음사)

 

< 하관(下棺) > 박목월

 

관(棺)이 내렸다.
깊은 가슴 안에 밧줄로 달아 내리듯.
주여
용납하옵소서.
머리맡에 성경을 얹어 주고
나는 옷자락에 흙을 받아
좌르르 하직(下直)했다.


그 후로
그를 꿈에서 만났다.
턱이 긴 얼굴이 나를 돌아보고
형님!
불렀다.
오오냐. 나는 전신(全身)으로 대답했다.
그래도 그는 못 들었으리라.
이제
네 음성을
나만 듣는 여기는 눈과 비가 오는 세상.


너는
어디로 갔느냐.
그 어질고 안스럽고 다정한 눈짓을 하고
형님!
부르는 목소리는 들리는데
내 목소리는 미치지 못하는
다만 여기는
열매가 떨어지면
툭 하는 소리가 들리는 세상.

 

하관은 아우를 잃은 슬픔과 그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하면서 삶과 죽음의 의미를 성찰하고 있는 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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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내게 죽음은 흰 봉투였다. 가끔 학교에서 돌아올 때나 아침에 집을 나설 때 대문과 문설주 사이에 반으로 접혀 꽂힌 흰 봉투를 보곤 했었다. 집안 식구들 중 아무도 누가 언제 그것을 끼워 넣었는지 알지 못했다. 어른들은 그것이 부고라는 것을 알려주지 않았지만 아이들은 함부로 만지거나 열어보면 안 되는 불길하고 부정한 그 무엇이라는 것을 저절로 알았다. 아무것도 씌어지지 않은 흰 봉투에 넣어져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순간에 살짝 문틈에 끼워진 죽음은 두렵고 낯선 비밀이었다.

한여름 청청히 물오르는 계절에도, 죽음의 자리에 누운 아버지는 자꾸 뚝뚝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가 들린다고 말했다. 저승으로 열린 귀는 셀로판지처럼 얇고 투명해져 다른 사람들은 볼 수 없는, 오직 이미지 속에서만 존재하는 또 다른 세계의 소리를 듣고 있었다. 죽음을 앞둔 사람의 환청이라 귀담아듣지 않으면서도 임종을 지키기 위해 모여든 가족들은 자주 밖을 내다보는 시늉을 하고 아버지를 안심시켰다. 우리는 그것이 죽음의 소리라는 것을 몰랐다. 우리는 죽음을 알아보기에는 너무 젊었던 것이다. 참 깨끗이 곱게 가셨다. 입관을 하기 전 어머니가 자부심을 가지고 말했으나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버지는 냄새를 풍기기 시작했다. 온몸을 흔들며 웃던 평소의 습관처럼 전신으로 냄새를 풍겼다. 어머니는 그런 말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몰랐다. 오래된 미신이라 하더라도 옛사람들이 옳았다. 그들은 죽음에 위엄을 부여할 줄 알았다. 죽은 자에 대해 말하는 것은 금기였다. 야삼경 지붕 위에 올라가 망자의 흰 저고리를 흔들며 캄캄한 천공에 외치는 초혼제를 지낼 때 나의 어린 아들은 아주 커다랗고 하얀 새가 날개를 펄럭이며 어두운 하늘로 날아가는 것을 보았다고 말했다.

그가 죽은 후 오랫동안 나를 괴롭히던 귀울음은 나았다. 한없이 귀가 부풀어 오르는 느낌, 세상의 온갖 소리들이 종잡을 수 없이 웅웅대며 끓어올라 뇌 속을 파고드는 고통을 호소하자 이비인후과의 젊은 의사는 아마 달팽이관에 이상이 생긴 듯하다는 자신 없는 진단을 내렸다. 이제 범상히 살아가는 내게 그의 흔적은 없다. 밥을 먹고 잠을 자고 혼자 있는 시간에 뜻 없이 내뱉는 탄식처럼 짧고 습관적인 성교를 한다. 그러나 모든 죽은 사람들이, 그들에 대한 기억이 소멸한 뒤에도 그들이 남긴 살아 있는 사람들의 유전자 속에 깃들듯 그는 나의 사소한 몸짓과 습관 속에 남아 있다. 예기치 않았던 날,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신문의 부고란에서 그의 죽음을 보았을 때부터 내게는, 그의 떠도는 전화번호를 불러내어 꾹꾹 눌러대는 버릇이 생겼다. 어둠의 심부를 향해 신호음을 울리며 이제 그가 사용할 수 없는 일련의 숫자들은 캄캄한 공허 속으로 끝없이 퍼져갔다. 그가 왜, 어떻게 죽었는가를 묻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리라.

그가 죽은 뒤 한동안 내게는 모든 사람들이 시체처럼 보였다. 먹고 마시고 너털웃음 치는 시체. 걸어 다니는 시체, 쾌락을 느끼거나 고통을 느끼는 시체. 어릴 때 동무 정옥이의 아버지가 옳았는지도 모른다. 술주정뱅이 염장이인 정옥의 아버지는 밤마다 관 속에 들어가 잔다고 했다. (p.114-116)

 

사람의 생애나 내일은 예측할 수 없는 것이긴 하지만 우리가 이제껏 살아온 것처럼 별달리 모험을 하려 하지 않는다면 남편과 나는 아마 그러한 노년을 누리게 될 것이다. 남편은 욕심 없이 깨끗하고 점잖게 늙고 싶어 하고 그러한 마음이 내게 신뢰를 준다. 나는 우연히 그가 종교단체에서 벌이는 운동에 동참해서 사후의 장기기증을 약속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을 내게 말하지 않은 것은 나의 선택권에 대한 존중으로 여겨진다. 나의 정서로서는 아직 나의 죽은 몸이 채 식어지기 전 벌거벗겨져 낯선 손에 의해 열린다는 것, 내용물을 뽑아낸 텅 빈 자루가 되어 땅에 묻힌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렵다. 만약 남편이 먼저 죽는다면 나는 아마 그이 박제를 매장하게 될 것이다. (p.120-121)

 

인도바람은 한물간 것 같은데 명상이 대유행이에요. 고도의 경지에 이르면 뭐든지 가능하대. 가만히 혼자 앉아서 섹스도 가능하고 오르가슴까지도 느낀대. 그거야 마스터베이션과 뭐가 달라요? 나는 신문에 끼어 온 명상센터 광고지를 보며 남편에게 말했다. 생산적이진 않겠지. 남편이 대답했다. 우리의 생활에서 더 이상 생산적인 것은 있는 것일까. 우리의 삶의 내용을 이루는 것들. 그와 나, 합법적인 관게에서 태어난 아들을 나날이 싱싱하게 자라는 나무처럼 바라보며 소망과 걱정을 나누고 자잘한 생활의 문제, 음식과 성을 나눈다. 물론 배반과 환멸과 분노의 몫도 있을 것이다. 그릇에 담긴 물의 평화와 고약한 항변처럼 끓어오르는 장항아리의 곰팡이가 있고 무엇보다도 이 모든 것들을 싸안는 충실한 관습, 질서가 있다. 기나긴 습관의 미덕에 기대어 약간의 불면과 무기력한 고통의 기억을 잠재운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나란히 누워 잠들지만 각각 꾸었던 지난밤의 꿈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당신은 나를 어떻게 견디나. 나는 때때로 마음속으로 그에게 물음을 던지지만 그것은 똑같이 나 자신에게도 유효한 물음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한 번도 그러한 말을 한 적이 없다. 잠수에 자신이 없는 사람은 어떤 경우에나 수면 아래로 내려가면 안 될 것이었다. 익사의 위험이 따르므로. 그러나 우리의 관계를 단순히 관습이라거나 시간의 길들임이라고 말하는 것은 정직하지 않다. 남의 환심을 사기 위해 짐짓 해보는, 자신에 대한 능멸처럼 비겁하고 위선적이다. 그렇게 말할 수만은 없는 무엇인가가 분명히 있다. (p.121-122)

 

지난겨울 내내 거의 매일 나는 연탄보일러의 불이 꺼지면 온수 파이프가 얼어 터질 것이라는 구실로 이 집에 왔다. 빗자루와 쓰레받기 그리고 그들이 잊고 간 노트 외에 이 집에는 아무것도 없다. 아, 벽에는 장롱이 놓이고 액자가 걸렸던 자리의, 빛에 바랜 다른 벽지에 비해 조금 짙은 색깔로 남아있는, 정사각형 혹은 직사각형의 흔적이 있다. 사라진 뒤에야 비로소 드러나는 존재의 흔적. 나는 이곳에서 낯잠을 자기도 하고 창밖을 내다보기도 하면서 아무런 하는 일이 없이 시간을 보냈다. 세탁소 배달 차에서 흘러나오는 <소녀의 기도>나 트럭 행상인의 외침 그리고 어디선가 들리는, 내가 이제는 잊어버린, 어란아이의 울음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도 한다. 서향의 창으로 해가 들 무렵이면 으레 우리 가족이 이곳에서 살았던 짧은 동안의 시간들이 곧 스러질 금빛 햇살 속에 환각처럼 살아나 슬픔이 차오르곤 했다. (p.128)

 

기척 없이 조용한 집 안에서 바보가 나왔다. 마당의 수돗가에서 세수를 하고 삽을 집어 들고는 휑하게 터진 동쪽 울타리 쪽으로 갔다. 울타리를 뽑는 일을 하려는가보았다. 톱으로 상처를 입은 바보는 아마 다시는 톱을 만지지 않을 것이다. 휑하니 열린 대문 옆 울타리에는 아직도 내 낡은 스카프가 불그죽죽한 빛깔로 매어져 있었다. 바보는 힘이 세다. 쉴 새 없이 울타리나무를 쑥쑥 뽑아 던지는 모습은 춤을 추는 것같이 보이기도 했다. 바보는 보이지 않는 끈에 매어 있는 것처럼 언제나 집 주위를 맴돌며 일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창밖, 내가 바로보는 풍경 속에는, 바람 속에는 언제나 바보가 있었다. (p.129-130)

 

옆자리에서 배가 봉긋이 부른 젊은 여자가 아이를 씻기고 있어다. 제 엄마에게 몸을 맡기고 있는 네댓 살 된 여자아이는 끊임없이 플라스틱 인형의 몸을 씻기고 있었다. 여자에게 모성이란 생래적인 본능인가. 결혼을 하자 나는 재빨리 모성의 자리로 옮겨 앉았다. 마치 방과 방 사이의 마루를 의심 없이 건너듯. 오늘 아침 나는 서둘러 현관문을 나서는 아들을 보며 까닭 모르게 가슴이 서늘해졌다. 얼결에 이름을 불러 세웠지만 아들이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자 아무것도 아니라고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문득 그토록 강하게 가슴을 치고 지나간 것이 그 애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순수한 성, 무 싹 같은 동정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문을 잠그고 돌아서서였다.

아이를 낳은 뒤로 나는 이전에 그토록 빈번하게 꾸던 꿈, 날거나 추락하는 꿈을 꾸지 않는다. 아주 조그많고 조그마해져서 어디론가 숨어드는 꿈을 꾸지 않는다.

아이엄마가 비누거품으로 뒤덮인 아이의 몸에 맑은 물을 끼얹었다. 앗 뜨거, 쌍년. 물이 뜨거웠는지 아이가 공처럼 튀어 오르며 비명을 내질렀다. 아이의 느닷없이 낭랑한 욕설은 방자하고 통쾌했다. 말없이 몸을 씻던 사람들이 쿡 웃으며 돌아보았다. 아이엄마는 당혹한 표정으로 손을 멈칫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반사적으로 얼결에 욕설을 내뱉은 아이는 어쩔 줄 몰라 으앙 울음을 터뜨렸다. 엄마 미안해, 엄마인 줄 모르고 그랬어. 아이의 새된 울음소리가 휑뎅그렁 비어 높은 천장에 부딪혀 울렸다.

샤워 꼭지 밑에서 쏟아지는 더운 물줄기에 몸을 맡기고 섯따가 섬뜩 놀랐다. 거울 속에 내가 없다. 수증기 탓에 거울이 흐려졌기 때문이라고 알면서도 반드시 있으리라는 것이 없다는 것은 두렵다.

나는 샤워기의 물을 잠그고도 한참을 그대로 거울을 보며 서 있었다. 차츰 수증기가 걷히고 맑아지는 거울 면세서 아주 먼 곳으로부터 다가오듯 천천히 얼굴 윤곽이 살아났다. 잘못 당겨진 천처럼 좌우대칭이 깨진 얼굴. 그가 죽은 뒤 내게 미미하게 나타난 변화.

마른빨래를 개키면서 건성 눈길을 주었던 신문의 부고란에서 그의 이름을 보았을 때, 괄호 속에 박힌 직장과 전화번호를 재차 확인한 후 내가 제일 먼저 한 일은 거울을 본 것이었다. 왜 그랬는지 어떤 심리가 나를 거울 앞으로 이끌었는지 나 자신도 알 수 없었다. 거의 무의식적으로 다가간 거울에 조각조각 균열된 얼굴이 비쳤다. 갑자기 눈에 띄는 주름살도, 처음의 놀람처럼 거울이 깨진 것도 아니었다. 오랜 세월 길들여진 관습과 관행이 한순간에 깨진 얼굴이었다. 아, 내 안의 비명이 새어 나오기도 전에 깨진 얼굴은 스러지고 익히 알고 있는 얼굴이 나타났다. 자신의 것이면서도 거울이나 사진이라는 방법을 통하지 않고는 알 수 없는, 거울 앞을 떠난 나는 빨래를 마저 개키고 낮에 절여둔 배추를 버무려 김치를 담갔다. 하던 일을 계속하는 것 말고 달리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아들의 도시락 반찬을 만들고 남편과 티브이를 보며 농담을 나누고 방충망의 허술한 틈새로 비비적대며 들어와 절박하고 불안한 날갯짓으로 등 주위를 맴도는 나방이를 내보내었다.

그의 죽음은 내게 전혀 비개인적인 방법으로 그렇게 심상히 통보되었다.

존재하던 한 사람이, 그가, 이 세상에서 영영 사라졌다는 기미는 어디에도 없는, 여느 날과 다름없이 예사롭고 평온한 저녁시간은 느릿느릿 흘러갔다.

그가 죽고 내 안의 무엇인가가 죽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아마 알고자 하는 소망조차 없는 건지도 모른다. 내게는 문득 걸음을 멈추고 상점의 진열장에, 슈퍼마켓의 거울에, 물 위에 비치는 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습관이 생겼다. 저녁쌀을 씻다가 문득 눈을 들어 어두워지는 숲이나 낙조를 바라보는 시선 속에, 물에 떨어진 한 방울 피의 사소한 풀림처럼 습관 속에 은은히 녹아 있는 그의 존재와 부재. 원근법이 모범적으로 구사된 그림의, 점점 멀어져가는 풍경의 끝, 시야 밖으로 사라진 까마득한 소실점으로 그는 존재한다. 지금의 나는 지나간 나날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가끔 행복하고 가끔 불행함을 느낀다. 나는 그렇게 늙어갈 것이다. 다른 사람들과 다르지 않은, 공평하게 공인된 늙음의 모습으로. 

목욕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거실 긴 의자에 누워 깊이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 나는 조그만 게집애로 옛 우물가에 서서 울고 있었다. 두레박을 빠뜨린 것이다. 까치발을 하고 가슴팍까지  닿는 우물 턱에 매달려 내려다보지만 까마득히 깊은 우물 속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빠뜨린 두레박도, 아무도 없는 밤이면 슬며시 떠오르기도 한다는 금빛 잉어도 보이지 않았다. 잠을 깨어서도 꿈속에서의 막막하기만 하던 기분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즈음 나는 가끔 옛 우물의 꿈을 꾼다. 내용은 언제나 비슷했다. 두레박을 빠뜨려 울고 있거나 어릴 때 죽은 동무 정옥이와 함께 가없이 둥그렇고 적막하게 가라앉은 우물 속을 들여다보는 것. 우물 치는 광경 따위였다.

내게 오래된 우물과 그 속에 사는 금빛 잉어에 대해 말해준 사람은 증조할머니였을 것이다.

어릴 때 살던 동네 가운데에 큰 우물이 있었다. 물맛이 달아 단샘. 커다랗다고 해서 한우물이라고도 했지만 사람들은 예부터의 습관대로 엣 우물이라고 불렀다. 아주 옛날부터 있어온 우물이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우물은 물이 깊고 물맛이 좋았다. 증조할머니는 내게 말했다. 옛 우물에는 금빛 잉어가 살고 있단다. 천 년이 지나면 이무기가 되고 또 천 년이 지나면 뇌성벽력 치는 밤 용이 되어 하늘에 올라가지. 아흔 살이 넘은 할머니에게서 검은 머리털이 돋아나고 텅 빈 입에 누에씨 같은 희고 깨끗한 이가 돋아나자 어머니는 그것을 불길한 재앙의 징조로 여겼다. 노망이 들었다고 말해다. 할머니에게 대꾸도 하지 않았고 바로 보지도 않았고 밥도 조금씩밖에 주지 않았다. 노망든 노인네들은 오래 산다는 속설을 두려워했다. 그러나 할머니는 고양이 혼이 씌어 밤마다 고양이 울음소리를 내며 쥐를 잡으러 다니는 광자네 할머니 같지는 않았다. 오돌이네 할아버지처럼 자기가 싼 똥을 주워 먹지도 않았다.

달빛 가득한 우물을 들여다보면 금빛 잉어가 슬몃슬몃 물속에서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는 듯도 했다. 계집아이들은 학교에서 오전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면 해 지기 전까지 물을 길어놓아야 했다. 두레박을 빠드리면 매를 맞거나 밥을 굶었지만 아이들은 늘 두레박을 빠뜨리고 저물 때까지 우물가에서 무력하고 절망적이고 공포에 찬 울음을 울곤 했다. 방심은 언제나 용서받지 못할 악덕이었다. 계모가 낳은 아기를 업고 물을 길러 나오던 염장이의 딸 정옥이는 자주 두레박을 빠뜨렸다.

정옥이의 집에는 어엿이 동해장의사라는 간판이 걸려 있었지만 동네 사람들은 정옥이의 아버지를 염장이라고 불렀다. 밤이면 가게에 쌓아놓은 관 속에 들어가 잔다는 말도 떠돌았다. 그럴지도 몰랐다. 사람들은 그다지 자주 죽지 않았기에 할 일이 없는 염장이는 거의 늘 술에 취해 있었다. 계모는 시장에서 떡 장사를 했기 때문에 정옥이는 밥을 하고 빨래를 하고, 그래서 손은 늘 커다랗고 물에 불어 있었다. 등에 언제나 아기가 달려 있었지만 신이 많고 흥이 많은 정옥이를 막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무섭고 이상한 냄새가 나는 듯한 정옥이의 집까지 찾아가 불러낼 필요가 없었다. 집에서 아기를 보고 있으라고 아무리 야단을 쳐도 계모가 나가면 대여섯 발짝 뒤에서 아기를 들쳐 업은 정옥이가 싱긋이 웃으며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아기를 업은 채 줄넘기를 하다가 아기가 혀를 깨물린 뒤로는 전봇대에 포대기째 매어놓고 술래잡기, 줄넘기를 했다. 숨바꼭질을 하다가 아기를 달아놓은 것을 잊어버려 저물도록 아기가 보따리처럼 매달려 잠든 적도 있었다. 두레박을 빠뜨리면 정옥이는 빈 초롱을 들고 집에서 쫓겨났다. 종종 해 질 때까지 우물가에 서서 울었다. 물을 길러 나온 아주머니나 동네 큰언니들은 정옥이의 덜렁대는 버릇을 한바탕 나무란 뒤 '이것도 빠뜨리면 네가 우물 속에 들어가서 건져 와야 해' 경고하듯 선심 쓰듯 두레박을 빌려주었다.

물이 가득 찬 두레박을 힘겹게 끌어 올리다 보면 어느 결에 우물 속에서 끌어당기는 아귀센 힘이 따라 올라왔다. 아앗 놀라라 하는 순간 줄이 긴장된 손아귀에서 미끄럽게 빠져나가거나 두레박에 단단히 묶었던 줄이 스르르 풀려 빈 줄만 허전하게 올라가기도 했다.

아이들은 우물 속에 금빛 잉어가 산다는 내 말을 아무도 믿지 않았고 거짓말쟁이, 허풍쟁이라고 했지만 정옥이는 내 말을 믿어주었다. 게다가 '소원을 들어주는 잉어'일 거라고 덧붙였다. (p.131-136)

 

동네 어른들은 우물 속에 차오르던 황톳물이 가라앉기를 기다려 날을 잡아 떡과 돼지머리, 과일을 차려놓고 고사를 지냈다. 고사를 지낸 뒤 남자들이 물을 퍼냈다. 그러고는 제대군인 순옥이 삼촌이 양말과 신발을 벗고 옛날얘기에 나오는 사람처럼 튼튼히 엮은 삼태기를 타고 우물 밑으로 내려갔다. 아이들은 순옥이 삼촌이 까무룩히 아래로 내려가는 것을 불안하게 바라보았다. 한없이 깊고 어두운 동그라미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푸른 이끼 자라는 우물의 돌틈에서 손톱만 한 개구리들이 팔짝팔짝 뛰어오르고 빈 우물이 우우웅 웅숭깊은 소리로 울었다. 바닥을 긁는 소리, 그리고 올리어어라는 순옥이 삼촌의 소리가 땅 밑으로부터 벽에 부딪혀 몇 바퀴 돌아나오면 우물가의 남자들이 줄을 당겼다. 삼태기에는 바닥의 흙이며 녹슨 두레박과 두레박 건지는 갈고리, 삭아버린 고무신 한 짝, 썩은 나무토막, 사금파리 따위들이 한없이 실려 올라왔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까마득히 깊은 우물 속에서 허리를 굽히고 그 안의 것들을 퍼 담는 순옥이 삼촌은 난쟁이처럼 납작해 보였다. 삼태기가 올라올 때마다 모두들 유심히 그것들을 살펴보았다. 아무도 내려가본 적이 없는 깊은 우물 속에는 우리가 알지 못했던 무엇인가 굉장한 것들이 있으리라는 기대였을까. 삼태기에 고운 모래흙만 담겨 올라오자 일은 끝났다. 마지막으로 순옥이 삼촌이 한 오백 살이나 나이 먹은 얼굴로 삼태기를 타고 올라왔다. 빛에 눈이 부신지 한동안 낯선 눈길로 주위를 둘러보다가 으허허 영문 모를 웃음을 터뜨렸다.

순옥이 삼촌과 우물 치던 남자들은 술을 마시러 갔고 아이들은 우물 턱에 조롱조롱 매달려 아무것도 텅 빈 우물 속을 말없이 들여다보았다.

우물 속에 금빛 잉어는 없었다. 그래도 나는 맑은 물이 그득 고이면 금빛 잉어가 살리라는 생각을 버릴 수 없었다. 정옥이는, 금빛 잉어는 사람들 눈에 띄면 안 되니까 샘이 솟는 깊은 구멍으로 잠시 숨어버렸을 거라고, 맑은 물이 고이면 다시 돌아올 거라고 말했다.

종옥이는 그해 늦가을 우물에 빠져 죽었다. 해가 퍼지기 전 물을 길러 간 사람이 우물가에서 빈 초롱과 우물 속에 떠 있는 정옥이를 발견했다. 동네 누구도 해 진 뒤 물을 긷는 것을 금기로 알았기에 정옥의 죽음은 밤중이리라 했다. 정옥의 계모는 밤중에 물을 길러 내보낸 적이 없다고 말했지만 정옥이는 밤중에 물을 길러 나간 것이 틀림없었다. 어른들은 그 어린것이 무엇엔가 홀린 것이 틀림없다고 수군거렸다. 일찍 죽은 제 어미가 불러 간 것이리라고도, 우물 치는 일에 부정이 끼어들었기 때문이라고도 말했다.

우물은 메워졌다. 하루 동안 굿을 하고 흙으로 메워 물귀신을 꽝꽝 묻어버렸다. 아이들은 대낮에도 우물가에 얼씬거리지 않았고 한밤중에 오줌을 쌌다. 죽은 정옥이가 우수수 바람 부는 밤, 창호지 문에 비치는 검고 비죽비죽한 나무 그림자로 찾아와 물에 불어 커다란 손을 내저으며 자꾸자꾸 불러대었기 때문이었다. 정옥이는 금빛 잉어를 보기 위해 한밤중 옛 우물로 간 것이 아니었을까.

늙은이들은 옛 우물의 차고 단 물맛을 그리워했지만 자라나는 아이들은 죽은 동무와 매몰된 우물의 두려움을 쉽게 잊었다. 집집이 펌프를 박아 물을 길러 다니지 않아도, 두레박을 빠뜨려 매를 맞을 일도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p.136-138)

 

밀봉된 것을 뜯을 때의 모독감과 긴장으로 살아 있는 물고기의 배를 가를 때면, 피융 하는 약한 소리가 났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창조되고 봉인된 그리고 아무도 볼 수 없었던 내부가 드러났다. 밀폐된 공간의 어둠이 있고 최초의 빛의 순간이 있었다. 갑작스런 외기에 놀란 붉고 푸른 내장들이 푸르르 경련하고, 찬피동물의 어둡고 축축한 몸속에서, 의지하고 있는 세계의 무너짐을 감지한 더 작은 생물체들이 고래 배 속에 들어간 요나처럼 고통의 몸부림으로 흩어졌다.

아파트로 이사 오기 전 주택에 살 때는 손질하고 난 나머지, 내장과 머리를 마당 화단에 묻었다. 좋은 비료가 되리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면 밤새 그것을 탐하는 쥐 떼가 끓었다. 화단 밑에 쥐구멍이 숱한 공동을 만들어 맥없이 발이 빠졌다. 쥐덫을 놓으면 덫에 걸린 살찐 쥐들이 밤 내내 쥐덫을 끌고 맴돌며 단말마의 비명을 질러대었다.

추억이란 물속에서 건져낸 돌과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물속에서 갖가지 빛깔로 아름답던 것들도 물에서 건져내면 평범한 무늬와 결을 내보이며 삭막하게 말라가는 하나의 돌일 뿐. 우리가 종내 무덤 속의 흰 뼈로 남듯. 돌에게 찬란한 무늬를 입히는 것은 물과 시간의 흐름일 뿐이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나는 종종 이즈음에서도 옛 우물과 금빛 잉어의 꿈을 꾼다. (p.139)

 

방 안 가득 붉은 기운이 어려 있었다. 잠이 들었었나? 후닥닥 일어났다. 열린 채로인 창밖 하늘이 불을 지른 듯 붉었다. 베개도 없이 방바닥에 그대로 누워 잠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일어나 앉아 우두커니 노을빛이 짙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해가 질 때, 그리고 떠오를 때 우리들은 그들을 기억하리라. 일차대전에서 죽은 무명용사들의 묘비문. 사람들은 그렇게 살아 있음을 변명한다.

왜 장엄한 황혼을 볼 때면 열패감을 느끼게 되는 것일까.

어릴 때 해가 지고 노을이 물든 무렵이면 몹시 울었다. 계집애가 사위스럽게 청승을 떤다고 매를 맞으면서도 까닭 없이 서러워 목 놓아 울게 하던 것은 어찌해볼 수 없는 운명, 어쩌면 비겁하고 허약할 수밖에 없는 인간으로서의 열패감, 두려움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 여름, 나를 찾아온 그의 전화를 받았을 때 나는 아이에게 젖을 먹이고 있었다. 허둥대는 어미의 기색을 본능적으로 느낀 아이는 필사적으로 젖꼭지를 물고 놓지 않았다. 진저리를 치며 물어뜯었다. 이가 돋기 시작한 아이의 무는 힘은 무서웠다. 아앗,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며 아이의 뺨을 후려쳤다. 불에 덴 듯 울어대는 아이를 떼어놓자 젖꼭지가 잘려나간 듯한 아픔과 함께 피가 흘러내렸다. 아이의 입에도 피가 묻어 있었다. 브래지어 속에 거즈를 넣어 흐르는 피를 막으며 나는 절박한 불안에 우는 아이를 이웃집에 맡기고 그에게 달려 나갔다. 그와 함께 강을 건너 깊은 계속을 타고 오래된 절을 찾아갔다.

여름 한낮. 천 년의 세월로 퇴락한 절 마당에는 영산홍 꽃들이 만개해 있었다. 영산홍 붉은빛은 지옥까지 가 닿는다고, 꽃빛에 눈부셔하며 그가 말했다. 지옥까지 가겠노라고, 빛과 소리와 어둠의 끝까지 가보겠노라고 나는 마음속으로 대답했을 것이다. (p.143-144)

 

잠에서 깬 아이가 서럽디서러운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살아 있는 오소리를 사러 간 아이들의 부모는 아작 돌아오지 않았다. 먼저 울음을 그친, 누나인 듯한 계집애가 작은아이를 달랬다. 신발을 신기고는 오소리의 피와 술 자국으로 더러운 차일을 벗어나 손을 잡고 강을 따라 걸어갔다. 아이들은 곧 보이지 않게 되었다. 짙은 노을을 치받으며 피어오르는 땅거미가 조그맣게 멀어져가는 아이들의 모습을 지웠다.

강물이 그렇게 더럽지만 않았다면, 그렇게 짙은 황혼이 아니었다면, 황혼과 어둠 속으로 조그많게 지워져간 그 두 아이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그토록 극력 감추고 있던 욕망의 본질을, 허위를 단번에 꿰뚫어 보는 일은 없었으리라. 지옥까지 가겠노라는 행복감의 또 다른 얼굴을 보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와 나는 똑같은 생각을 동시에 하였음에 틀림없었다. 나는 나의 집과 아이를 생각하고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그의 가족과, 그를 맞아줄 저녁식탁과 불빛을 생각했다. 그 역시 그러했을 것이다. 그가 시계를 보았다. 나는 마지막 배 시간이 많이 남아 있었음에도, 그와 함께 있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늘려보려는, 그는 모를 필사적인 소망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태우고 각자 떠나온 곳으로 안전하게 데려갈 배가 다가오는 것에 안도감을 느끼며 일어났다. (p.145-1446)

 

어둠이 깃드는 숲에 발걸음을 멈추고 서 있으면 현자가 된 느낌이 든다. 나무의 몸체에 가만히 귀를 대어보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나무의 말을 알아듣기에는 너무 나이를 먹었다. 나무의 몸에서 귀를 떼고 팔을 벌려 안아보았다. 따뜻한 기운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신을 벗고 나무 위로 기어올랐다. 거친 줄기의 속 깊이 흐르는 수액이 향기롭게 맡아졌다. 나무는 곧게 자라 자칫 주르르 미끄러지거나 떨어질 듯 긴장이 되었다. 나는 다리를 꼬아 힘껏 굵은 줄기를 휘감았다. 돌발적이고 불합리한 욕구로 몸이 뜨거워졌다. 나는 나무를 껴안고 감아 안은 다리에 힘을 주며 온 힘을 다해 비틀었다. 아아, 억눌린 비명이 터져 나오고 나는 산산이 해체되어 흰빛의 다발로 흩어지는 듯한 짧은 희열을 느끼며 축 늘어졌다. 나는 조금 울었던가?

오동의 보랏빛 꽃이 어둠 속에서 나울나울 피고 있었다. 별과 꽃이 난만한 밤에 그는 죽었다. 내가 존재하지 않을 어느 시간대에도 이 나무에는 꽃이 피고 잎이 피고 새가 깃들이겠다.

나는 나의 생보다 오랠 산과 나무, 별 들을 바라보았다. 비로소 먼 옛날 증조할머니가 내게 해준 말을 정확히 기억해내었다. 옛날 어느 각시가 옛 우물에 금비녀를 빠뜨렸는데 각시는 상심해서 죽고 금비녀는 금빛 잉어로 변해.... (p.148)

 

<문예중앙> (1994년 여름)

<불꽃놀이> (문학과지성사 1995년)

 

옛 우물 - 오정희 (청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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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해설 - 이혜령>

1. 이 작품에서 옛우물은 우선 주인공의 어릴 적 기억의 장소입니다. 어머니가 동생을 낳는 날 할머니는 언니에게 옛날 우물에서 물을 길어오라 했으며, 계모에게 구박을 받던 친구 정옥은 그곳에 빠져 죽습니다. 증조할머니는 옛 우물에 관한 전설을 들려주죠. 어머니와 할머니, 물을 길러 나온 동네 언니들, 그리고 우물에 빠져 죽은 친구 정옥이 등과 같은 여성들 간의 경험이 만들어지고 공유되는 장소라는 점에서도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생성의 장소라는 점에서 옛 우물은 여성의 장소이자 여성의 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할머니의 금빛 잉어 이야기가 상징하는 바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막연히 금빛 잉어가 살고 있다는 식으로만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었던 '나'는 할머니가 들려준 옛 우물의 전설을 마지막에서야 온전히 기억해냅니다. "옛날 어느 각시가 옛 우물에 금비녀를 빠뜨렸는데 각시는 상심해서 죽고 금비녀는 금빛 잉어로 변해..." 상실과 소멸이 곧 생성이라는 이 이야기는 어쩌면 '나'의 이야기일는지도 모릅니다. '나'가 '그'에게로 향한 욕망을 단념하고 나서야 모성의 자리로 돌아갈 수 있었듯이 말입니다. 화자가 마흔다섯 살이 된 생일날 아침에 옛날에 어머니가 막냇동생을 낳던 날을 회상하는 것으로 시작한 소설은 이렇게 옛 우물의 전설을 통해 그 의미를 상징화하면서 끝을 맺고 있었습니다.

2. <옛 우물>의 화자이자 주인공인 중년 여성은 마흔다섯 살의 현재만을 살지 않고 과거를 함께 살고 있으며, 정상적이고 평범한 가정주부이지만 동시에 일탈과 광기의 징후를 갖고 있는 아주 다른 존재이기도 합니다. 내 안에 또 다른 나의 존재들이 동거하고 있으며 그것이 기억과 성창을 통해 현재적인 것으로 환기되는 양상을 보여주는 방식이 바로 화자의 심리에 따라 현실과 과거를 복합적인 것으로 구성한다 하겠습니다.

이 소설에서 과거란 단지 지나가버린 것이 아니라 큰 인형 안에 작은 인형들이 계속해서 포개져 있는 러시아 인형처럼, 아니면 동심원을 그리는 나무의 나이테처럼 한 사람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여러 겹 중에 하나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이 작품에서는 사라지거나 죽어버린 것에 대해 함부로 '부재'를 선고하지 않습니다. 예컨대, 200년이 된 연당집이 허물리고 있는데도 연당집의 사보 사내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매번 의아한 몸짓을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나'가 그의 부고를 보고서도 그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 정옥이가 빠져 죽은 옛 우물은 메워져 사라지고 없지만 여전히 '나'의 기억과 삶의 해석을 관장하고 있는 것 등 화자의 심리는 부재하는 것의 현존성, 과거의 현재성을 응시하는 방식으로 펼쳐지고 있기 때문에 과거는 현재와 교차되고 투영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고 볼 수 있습니다. (p.364-3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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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정희(吳貞姬, 1947년 11월 9일 ~ )

대한민국의 소설가이다.

1947년 서울 사직동에서 태어났고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1968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완구점 여인」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소설집 『불의 강』, 『유년의 뜰』, 『바람의 넋』, 『불꽃놀이』, 『오정희의 기담』, 장편소설 『새』, 동화집 『송이야, 문을 열면 아침이란다』, 산문집 『내 마음의 무늬』 등을 펴냈고, 다수의 작품들이 영어·독일어·프랑스어 등으로 번역 출판되어 일찍이 한국 문학의 대표작들로 해외에 소개되었다. 한국 문학에 여성 작가들의 활약이 드물던 시절부터 자신만의 작품 세계로 탄탄한 입지를 다져 이후의 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으며, 『오정희 깊이 읽기』를 비롯하여 수많은 논문과 평론들에서 다양한 맥락으로 주목되어 왔다. 만해대상 문예대상(2021), 대한민국문화예술상(2012), 독일 리베라투르상(2003), 동서문학상(1996), 오영수문학상(1996), 동인문학상(1982), 이상문학상(1979)을 수상했다. 현재 강원도 춘천에 살고 있고,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로 후진을 양성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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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의 뜰 - 오정희 (문학과지성사)

새 - 오정희 (문학과지성사)

저녁의 게임 - 오정희 (문학과지성사)

불의 강 - 오정희 (문학과지성사)

바람의 넋 - 오정희 (문학과지성사)

불꽃놀이 - 오정희 (문학과지성사)

가을 여자 - 오정희 (랜덤하우스코리아)

중국인 거리 - 오정희 (사피엔스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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