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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
I. 한국 문학/2. 소설

바람난 마을 - 전상국 (책세상)

by handaikhan 2023. 4. 19.

책세상 소설르네상스 8

 

목차
작가의 말 - 새로 펴내며

동행
맥(脈)
여름 손님
바람난 마을
악동시절
전야
할아버지 묻힌 날
돼지 새끼들의 울음
껍데기 벗기
바다 재우기
소인의 나들이
광망(光芒)
육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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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상국 - 바람난 마을 (1977년)

 

처음 우리들은 그 반편이 같은 새끼가 그런 일을 저질러 놓고 병삼이네 황소를 훔쳐 도망쳤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외팔이 병신에다 낯짝마저 멍청해가지고 허구한 날 마을을 비실비실 배돌거나 왜갈봉 중턱 줄바위 위에 네 활개를 펴고 자빠져 멀뚱하니 하늘만 쳐다보는 게 고작인 그 쓸모 반푼어치도 없는 새끼가 남의 계집과 배가 맞아 놀아났다니 참말 기가 찰 노릇이었다.

어이없게도 그 반편이와 놀아났다는 계집이 바로 다른 사람 아닌 지금 월남에서 베트콩 머리통을 허리에 매달고 화염방사기를 뿜어대고 있을 택수의 색시이고 보면, 이 날벼락 같은 소식이야말로 마을을 벌컥 뒤집어 놓기에 족했던 것이다.

보름여나 질금거리던 장맛비가 드디어 무슨 끝장이라도 낼 것처럼 억수로 내리부은 간밤 그 비에 혹시 봇둑이 터지지 않았나 싶어 눈뜨기 무섭게 깻들 논으로 달려가던 우리들은 그 어처구니없는 소식을 듣고 곧장 택수네 집으로 몰려갔다.

택수네 발방앗간 추녀 밑에 동네 아낙네 네댓이 팔짱을 끼고 서서 안채를 기웃거리고 있었다. 그 안채 마당에는 택수 어머니가 두 다리를 퍼더버리고 앉아 건넌방을 향해 삿대질 섞어 고래고래 악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흥, 이 우라질 것이 이젠 양잿물 그릇을 들고 날쳐? 오냐, 너 이년, 니 죄 무서운 줄 인제 알았냐? 흥, 니 맘대루 죽어? 그렇게는 안 될 거다아. 넌 뒈져두 네 서방한테 맞아 뒈져야 해!"

빗물 질펀히 고인 마당 한가운데 두 쪽이 난 양잿물 사발이 뒹굴어 있었다.

"그래, 즈 연놈들이야, 제 좋아서 한 짓들이니까 당장 베락 맞아 뒈져두 원통할 거 읍지만, 글쎄 죄읍는 우리 택순 어쩌유? 눈깔이 시퍼렇게 살아 있는 내 새낀 어쩔 것이여? 이 오살을 맛을 녀언 -"

그네는 다시 발작하듯 언성을 높이며 봉당 한 켠에 쌓여 있는 감자 더미에서 감자가 집히는 대로 건넌방을 향해 던졌다.

"아이구, 내 팔자야! 니가 전생에 나하구 무슨 웬수졌길래....그저 이 연놈들을 으적으적 물어 죽여야 속이 휑 풀릴 텐데..."

발방앗간 추녀 밑에 비를 피해 들어선 아낙네들은 쯧쯧 혀를 차며 한껏 기차다는 얼굴을 했다.

"거 봐 내 뭐랬어? 그게 예삿내기가 아니랬잖아!"

"아니, 예삿내기가 아니면 그래 서방이 시퍼렇게 살아 있는 년이..."

"팔려 온 계집 아닌가!"

"아무리 팔려 온 계집아이로서니 그래, 그 반펭이하구, 원 세상에!"

"왜, 외팔이가 어때서? 반편이라서 그렇지 허위대야 좀 좋아?"

"어따, 그러구 보니 돼지 어머이두 외팔이헌테 맘 있었구먼 그래!"

"어이구 흉칙해!"

"그나저나, 그 집은 왜 그래? 즈 어머이두 옛날 딴 서방 봤다가 등에 북을 지구 읍내까지 돌아왔다던데, 이젠 그 아들마저..."

"사내야 그렇다손 치더라두, 글러먹은 건 바루 저 계집이지 뭘! 팔려온 주제에.."

그네가 처음 전라도 어느 시골에서 십만 원에 팔려 택수에게 시집왔을 때 온 마을이 왜자했다. 택수 그 놈이 인근 마을 한다 하는 청혼자리 다 마다더니 결국 이런 봉 잡으려고 그랬다며 모두 고개 주억거렸다. (p.114-116)

 

그러나 더 솔직히 말하자면, 우리들이 이처럼 외팔이를 잡기 위해 살기 등등해진 데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외팔이, 그것이 우리들 가슴 밑바닥의 부아란 부아는 모조리 긁어 놓았던 것이다. 그 요염스런 계집이 또한 불을 질렀다. 그 연놈이 우리들 가슴에 지른 불로 해서 우리들은 눈이 뒤집힐 지경이었다. 언제고 한 번쯤은 안겨들 것 같은 그 얌냠한 몸매, 눈을 살큼 내리깔고 도톰한 아랫입술을 얄깃얄깃 빨아대며 물동일 이고 눈앞을 지나던 그네의 그 팡팡한 엉덩이 때문에 우리들은 얼마나 마음 뒤숭숭한 시간을 가졌던가? 정 환장할 마음이 일 때는 성불구자인 택수의 전사 통지서가 날아드는 그런 끔찍한 생각까지도 했던 것이다. 그렇게 우리들은 그네를 탐했다. 우리들이 아는 한 그네는 처녀였으니까. 우리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들은 굳세어 끄떡없는 이 마을의 주인이었고 효부열녀 많은 이 마을의 자랑스러운 사내들이었던 것이다. 더구나 그네는 엄연한 택수 색시요, 어엿한 집안의 며느리였으니 그 어는 누가 감히 엄두를 냈겠는가? 그런데, 이럴 수가! 한 걸음 늦어 다된 일을 망쳤을 때처럼 우리들은 정신 잃고 어리둥절했다. 마을의 반편이며, 사람 축에 끼이지도 못하던 외팔이가 선수를 쳤던 것이다. 한 마디로 억울했다. (p.122-123)

 

우리들은 가슴이 터질 것 같이 긴장한 채 왜갈봉 산봉에 올라섰다. 왜갈봉 저 아래 도도한 탁류가 산비탈을 기고 흐르고 있는 게 눈에 번쩍 잡혔다.

다시 눈을 치마바위 쪽으로 돌린 순간 우리들은 보았다.

깎아지른 듯한 그 절벽, 치마바위 위 허공을 향해서 비스듬히 뻗어나간 노송 한 그루, 멀리 깻들 논에서 바라보면 마치 날아가는 새 모양을 하고 있는 소나무였다. 치마바위 정수리에는 오직 이 노송 한 그루만이 마을 쪽을 향해 비스듬히 누워 있었던 것이다.

이 노송에 대해서 우리들이 기억해 낼 수 있는 단 한가지는 십여 년 전 택수가 그 나무 중간쯤에 박혀 있는 비행기 폭탄 파편을 빼냈다는 사실이다. 육이오 사변 때 박힌 채 십여 년간 아무도 손댈 수 없었던 그 녹슨 파편을 빼내기 위해서 아슬아슬 기어오른 택수가 까마득한 절벽을 눈짓하며 혀를 낼름 꺼내 보이던 그 기억. 그것은 택수만이 해낼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 노송 중간쯤에 붙어 있는 것은 외팔이었던 것이다. 눈을 비비고 다시 볼 것도 없이 그것은 분명 외팔이었다. 그는 십여 년 전 택수만이 기어오를 수 있었던 노송 중간쯤에 한 마리 곰처럼 붙어 있었다.

붙어 있는 게 아니라 그는 분명 움직이고 있었다. 한 뼘 한 뼘 위로 (달리 말하면, 차츰차츰 허허한 공중으로) 기어오르고 있었다.

오직 하나의 손, 맨발인 두 발바닥과 비에 흠뻑 젖은 그의 몸뚱이 - 그것은 일체가 되어 한아름 되는 소나무에 거머리처럼 붙어 서슴서슴 움직였다. 한눈에 죽을힘을 다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우리들은 노송 위의 외팔이를 발견한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그 자리에서 한 발짝 물러설 수도 더 나아갈 수도 없이 숨 쉬는 것마저 잊을 지경이었다. 만약 우리들 중 누가 한 발짝이라도 움직이거나 숨소리라도 크게 낸다면, 그것으로 하여 소나무 위의 외팔이는 그 외팔을 풀고 그대로 절벽 아래로 떨어져 내려 박살이 날 것만 같았던 것이다.

우리는 숨죽인 채 꼼짝없이 이 기막힌 작업을 지켜보지 않을 수 없었다. 참말이지 속수무책이었던 것이다.

만일 우리들 중에 누가 나무를 잘 타 그 빗물에 젖어 미끈거리는 노송으로 천신만고 끝에 기어올라 외팔이가 오른 데까지 이르렀다고 하자. 그 다음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외팔이는 옛날 택수가 올랐던 그 지점을 훨씬 지나 계속 굼틀굼틀 위로 오르려 안간힘을 다하고 있었다.

우리들은 알 수가 없었다. 도대체 그는 왜 이처럼 어처구니없고 어려운 일을 저다지 열심으로 해내는 것일까?

어/ 우리는 놀라 무심결에 한 걸음 물러섰다. 오를 수 있는 높이만큼 오른 외팔이가 쌍가닥 난 나뭇가지에 몸을 붙인 채 외팔로 웃저고리를 벗기 시작했던 것이다. 비에 흠뻑 젖은 그 허름한 남방셔츠는 생각보다 쉽게 벗겨져 너풀거리는 일 없이 곧장 아래로 떨어져 내려 아득한 골짜기 한 바위 모서리에 답삭 붙였다. 더 놀라운 것은 그의 벗은 윗몸에 감겨 있는 쇠고삐였다. 그 고삐 한 쪽은 그의 목에 매여 있었다. 외팔이는 바지까지 벗기 시작했다. 그것은 좀 더 어렵고 초조한 시간이 흘렀다.

그는 드디어 쇠고삐만을 목에 맨 완전히 벌거벗은 몸뚱이가 됐다. 그가 여태까지 드러내기 싫어한 팔 잘려나간 어깨의 그 뭉툭한 부분과 어느 사내의 그것과도 다름없는 아랫도리를 우리는 보았다. 산꼭대기 한 그루 절벽 위에 비스듬히 누워 있는 그 노송에 달라붙은 벌거벗은 몸뚱이를 그 물건을 칠칠했다.

그는 계속 굼틀거렸다. 이번에는 그의 목에 맨 고삐의 한 끝을 마을 쪽으로 뻗은 나뭇가지에 잡아매는 실로 어려운 작업을 시작했던 것이다. 서서히, 그는 해내고 있었다.

우리들은 그 자리에 굳어진 채 벙어리가 되어 하릴없이 자살 방조자가 되어가고 있었을 뿐이다.

외팔이는 전설 속의 용마처럼 마을로 날아 내려 개천에 곤두박질치지는 않았다. 그는 우리들이 아니었더라면 그 절벽의 허공에 언제까지라도 매달려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아주 오랜 시간 죽을힘을 다하여 그 건장한 주검을 땅으로 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그 일로 해서 우리들이 지치고 넋 나간 얼굴로 젖은 몸을 덜덜 떨며 뿔뿔이 흩어져 집으로 돌아온 그 늦은 밤, 우리들의 마누라는 이불 속으로 파고들며 아침나절 울타리 구멍으로 훔쳐본 병삼이네 황소의 그 가관스런 홀레 얘기를 느물느물 한 상 푸짐하게 벌여 놓은 것이었다.

그렇게 산에서 겅둥겅둥 뛰어 내려온 코뚜레 없는 황소는 멀리 답풍리에서 씨 받으러 와 사흘씩이나 묵어치고 있는 암컷을 그예 끌어냈다는 것이다. 발정한 암컷이 외양간 고삐를 끊고 뛰쳐나와 텃논 바닥에서 황소와 힘차게 어우러졌다는 그 이야기 속에는 고삐 바투 쥔 병삼이의 솜씨 같은 건 아예 없었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 마을 사내들은 맹렬한 기세로 고삐 풀린 황소가 되어갔으며, 마누라들은 덩달아 코맹맹이 소리로 별것을 다 다짐 두었다.

"나, 당신 죽더라두유, 열녀는 안 될 줄 알아유!" (p.128-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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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상국(全商國, 1940년 3월 24일~ )

대한민국의 소설가이다.

1940년 강원도 홍천에서 태어나 춘천고,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196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동행」 당선으로 등단했다. 소설집 『바람난 마을』, 『하늘 아래 그 자리』, 『아베의 가족』, 『우상의 눈물』, 『우리들의 날개』, 『외등』, 『형벌의 집』, 『지빠귀 둥지 속의 뻐꾸기』, 『사이코』, 『온 생애의 한 순간』, 『남이섬』과 장편소설 『늪에서는 바람이』, 『불타는 산』, 『길』, 『유정의 사랑』 등이 있다. 그 밖의 저서로 『김유정』, 『전상국 교수의 소설 쓰기 명강의』, 『우리가 보는 마지막 풍경』, 『물은 스스로 길을 낸다』,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 『춘천山 이야기』, 『춘천 사는 이야기』 등과 꽁트집 『식인의 나라』, 『장난 전화 거는 남자를 곯려준 남자』, 『우리 시대의 온달』 등이 있다.

수상 경력으로는 현대문학상(1977), 한국문학작가상(1979), 대한민국문학상(1980), 동인문학상(1980), 윤동주문학상(1988), 김유정문학상(1990), 한국문학상(1996) 후광문학상(2000), 이상문학상특별상(2003), 현대불교문학상(2004), 경희문학상(2014), 이병주국제문학상(2015) 및 강원도문화상(1990)과 동곡상(2013)이 있고, 황조근정훈장(2005) 보관문화훈장(2018)을 수훈했다. 현재 강원대학교 명예교수,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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