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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
I. 한국 문학/2. 소설

영자의 전성시대 - 조선작 (푸른사상)

by handaikhan 2023. 4. 15.

푸른사상 - 한국소설의 얼굴 8

 

목차


초식 - 이제하
만적 - 유금호
어둠의 혼 - 김원일
영자의 전성시대 - 조선작
흐르는 고향 - 오성찬
파하의 안개 - 호영송
토끼와 잠수함 - 박범신
섬섬옥수 - 황석영

개발독재기의 한국소설의 표정 - 박덕규
작품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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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작 - 영자의 전성시대 (1973년)

 

실로 우연한 기회에 나는 영자를 다시 만나게 되었는데, 그것은 정말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일이었다. 영자를 다시 만나게 된 것은 내가 군대에서 돌아와 한 공동목욕탕에서 일자리를 구한 다음의 일이었다.

군대에서 돌아온 뒤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서 나는 진짜로 고군분투했었다. 그러나 결국 낙착된 것은 목욕탕의 '때 미는 사람'이었다. 사실 내가 군대에서 배운 것이라고는 사람을 죽이는 일밖에 없었다. 월남에서 실제로 나는 많은 사람을 죽였는데 화염방사기로 토굴 속에 숨어 있는 일곱 명의 베트콩을 불태워 죽이고 이름 있는 무공훈장을 획득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훈장이 나에게 취직자리를 약속해 주는 것은 아니었다.

훈장을 받고 의기양양해졌을 때는 군대에 말뚝을 콱 박아버릴까도 생각했었다. 그러나 나는 내 소싯적부터 꿈을 그렇게 쉽사리는 버릴 수가 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어느 철공장에 빌붙어 견습 용접공으로 밥을 얻어먹었지만, 내 꿈이란 무교동의 한 화려한 술집에서 보타이를 매고 일하는 것이라든지 명동의 한 소문난 양복점에서 재단사로 일 해보는 것 따위의 그럴듯한 것이었다. 군대에서 돌아온 뒤 사실 나는 그런 곳에 일자리를 찾았었다. 그러나 웨이터 자리를 위해서는 내게 보증금이 없었고, 양복점의 '시다'로서는 나이가 너무 많이 먹어버렸던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어쩔 수 없이 나 자신을 불명예스럽게도 공동목욕탕의 때 미는 녀석으로 낙착시키지 않을 수 없었는데, 따지고 본다면 실상 이 일자는 실속은 있는 일이었다.

열심히만 뛴다면 까짓 시시하게 술집의 웨이터나 양복점의 재단사가 문제가 아니라 양복점의 사장도 될 수도 있는 판국이었다. 월남에서 용맹을 날리던 우리 중대장이, 아직도 불도저가 산을 깎아내려 택지를 만들고 있는 이 신흥 주택가에 엉성한 목욕탕을 하나 차려놓고 치사스럽게도 돈을 긁어모으는 일에 설미쳐 있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내가 거기서 손님들의 때를 밀고 있는 사실도 피장파장이 아닐 수 없다.

아무튼, 우리 중대장이 차려놓은 목욕탕에 일자리를 구하고 나서 내게는 약간의 여유가 생기게 되었다. 여유가 생기자 나는 내가 군대에 들어가기 전에 사귀었던 계집애, 창숙이 년을 찾아 나서게 되었는데 엉뚱하게도 영자를 만나버렸던 것이다.

영자는, 내가 군대에 들어가기 전 청계천 2가에 있는 한 철공장에서 용접공으로 빌붙어 밥을 얻어먹고 있었을 때 그 주인집의 식모였다. 짐작하겠지만 그때 나는 영자를 좋아했었다. (p.10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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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 현대사 - 서중석 (웅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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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 한 짝이 없는 창녀라니, 이건 정말 요절할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검객물 영화에는 외팔뚝이 검객이 등장하여 흥을 돋우곤 하지만 사창굴에 외팔뚝이가 등장하다니, 이게 무슨 천재지변이란 말인가. 나는 계집을 발길질로 밀어붙이며 서둘러서 말했다.

"야, 꿈자리 사나울라. 빨리 나가서 못 들어오게 하란 말이야."

"월남에서는 사람을 일곱 명이나 죽였다고 큰 소리 탕탕 치시던 양반이 그까짓 일에 뭐 그리도 기급이시우. 한 번 보기만이래두 해요. 얼마나 이쁘게 생긴 앤데..."

그때 이미 방문 밖에서는 인기척이 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쇤 듯한 목소리가, 알고 있는 사람의 그것처럼 친근한 목소리가 이렇게 말했다.

"언니, 나야. 들어가도 좋아?"

"그래. 어서 들어와."

계집은 이렇게 대답하면서 가까운 발끝으로 미닫이 문짝을 조금 열어 주었다. 밖의 계집은 조금 열어진 문틈으로 다섯 손가락을 끼워 문틀을 잡고 살그머니 밀어 연 다음, 게처럼 발을 옆으로 움직여 들어왔다. 그리고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말했다. "실례합니다."

그것이 바로 저 철공장 주인집의 영자였던 것이다.

실로 이런 우연한 자리에서 영자를 다시 만나보게 되리라고는 꿈엔들 생각해 보았을까? 나는 기절해 나자빠질 지경이었다. 비로소 나를 발견한 영자도 경악의 표정을 짓고 화석처럼 굳어 있었다.

영자는 옛날보다는 대체로 야위어 있었다. 그 싱싱했던 피부의 탄력이나 풍만했던 가슴의 융기는 시들해졌고, 크고 뚜렷뚜렷한 얼굴의 윤곽만이 그린 듯이 변치 않고 남아 있었다. (p.111-112)

 

나는 영자의 성한 팔목을 낚아채서 끌어 앉히며 말했다. "팔뚝은 어쩌다 그렇게 됐어."

"시시한 이야기는 집어쳐요. 놀고 싶으면 돈부터 내시던가..."

영자는 아주 쌀쌀맞은 음성으로 말했다. 영자는 내 손아귀에 잡힌 팔목을 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나는 더욱 힘주어 영자의 팔목을 비틀어 잡으며 성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너하고 놀겠어. 가지 말아."

"이것 놓아요. 아프단 말이야요. 한쪽뿐인 팔목이 그것마저도 부러지겠어요."

영자가 조금 느슨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영자의 팔목을 잡았던 손을 조심스럽게 풀었다. "그래. 그럼 달아나지 말아."

영자는 갑작스럽게 소리를 내서 깔깔거리며 웃었다. 웃음을 그치고 딸꾹질까지 하면서 영자가 말했다.

"화대를 내겠다는 손님을 버려두고 도망치는 미친년도 있을까."

서슬에 놀라서 나는 입을 벌렸는데, 이제는 영자가 철공장 주인집의 식모였던 그 옛날의 영자가 아니로구나 하는 절실한 깨달음에 괜스레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내가 투덜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자꾸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지 말아."

영자는 또 한번 깔깔거리며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은 어딘지 생소한 구석이 있었다. 웃다가 영자는 빈 소맷부리를 잡아당겨 내 앞으로 내밀면서 흉칙스런 표정을 만들어가지고 말했다.

"웃기지 말아요. 이것 안 보여?"

나는 새삼스럽게 흠칫 놀라서 한걸음 물러앉으며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왜 그랬어. 어쩌다가 팔뚝을 그랬느냔 말이야."

"시시한 이야기는 진짜로 집어치우라니까 그러네. 신경질 나게."

 영자가 짜증을 부리며 말했다. 그러나 나는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전쟁판에까지 갔다 온 나도 이렇게 사지가 멀쩡한데 진짜 무슨 일이야?"

"씨발, 듣기 싫다는데 왜 자꾸 신경을 돋구실까. 놀 테면 빨리 한번 놀고, 그렇잖으면 나는 갈 테야."

"알았어."

나는 마치 몰이에 쫓기는 토끼처럼 다급한 마음으로 벌떡 일어나 벽에 걸려 있는 바지 주머니에서 지폐 한 장을 꺼냈다. 나는 괜스레 허둥대고 있는 나 자신에게 화가 나서 그것을 영자에게 심통스럽게 던져주었다. 종잇장들은 마치 가랑잎처럼 날렸다.

그런데 영자는 그것을, 굶주린 사람이 허둥지둥 밥술을 떠 넣듯 그렇게 줍는 것이 아닌가. 비로소 나는 사람을 죽일 때와 마찬가지의 잔인스런 쾌감에 떠받치기 시작했다. 내가 난폭한 목소리로 말했다.

"난 너를 돈 주고 샀어. 옷을 벗어. 사그리 벗어버리란 말야."

"좋았어. 진작에 그렇게 나올 일이시지."

영자는 내 심정 같은 것은 아랑곳없이 기를 돋우며 말했다. 그리고 난서 한 손만으로는 불편한 동작으로, 그러나 아주 익숙한 솜씨로 옷을 벗었다. 나는 마치 내가 죽인 시체를 내려다볼 때처럼 복잡한 마음으로 영자의 알몸뚱이를 내려다보았다. 민둥하게 싹뚝 잘리어 나간 영자의 어깨를 보았을 때, 나는 까닭 없이 호흡이 가팔라지기 시작했다.

영자는 알몸을 미끄러지듯이 더러운 홑이불 속으로 감추며 일부러 꾸민 듯한 명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부끄럽사와요, 자꾸 쳐다보지 마시와요.'

철공장집의 식모로 있을 때 내가 영자를 올라타 버리지 못한 것은 대단한 잘못이었다. (p.113-115)

 

나는 어리석게도 영자의 그곳을 향해 달려들 통증을 상상하며 영자를 깊숙히 점령했다.

그러나 영자의 그곳은 슬프게도 마치 헐거운 팔찌검처럼 반들반들하게 길이 나 있었다.

일을 마치고 나서 영자는 장난기만도 아닌 어조로 말했다. "자주 찾아 달라고도 못하겠네. 팔뚝이 한 짝 없어놔서는 이 장사도 해먹기 어렵더군요. 그래도 댁 같은 분이나 자주 찾아와 준다면 그럭저럭 견딜만할 텐데....난 그저 빚투성이라구. 잘 좀 부탁해요. 그래도 이렇게 부탁드리는 도리밖에 별수가 있겠어?"

영자의 말은 다분히 감동적이었다.

이렇게 우연찮게 영자를 만나게 되었는데, 영자를 만난 뒤로 나는 창숙이 년을 찾아야겠다는 생각 같은 것은 까마득하게 잊어먹게 되었다. 대신 나는 영자를 자주 찾아갔다. 영자의 그 감동적인 부탁이 아니었더라도, 나는 영자를 찾아갔을 것만은 틀림없다. 나도 알고 있지만, 이런 것이  바로 나의 기특한 점인 것이다. (p.115-116)

 

내가 영자에게 의수를 하나 만들어주겠다는 생각을 갑작스럽게 해 내게 된 것은 정말로 천우신조였다. 그것은 골목에 가득 차, 마치 모든 것을 곪아 터지게 할 듯한 한 여름의 열기도 아침저녁으로는 시들해지기 시작한 어느 날이었다. 그날 어떤 일이 계기가 되어 내가 갑작스럽게 그런 신통한 생각을 해내게 되었던지 지금 분별할 수는 없지만 아무튼, 내게도 그 천재적인 영감이라는 것이 전혀 없으란 법은 없는 모양이었다.

소맷자락 속에 의수를 달고 어두운 골목길로 나아가 손님을 청한다면, 누구라 감히 그것을 눈치채겠는가. 손 부분에는 장갑을 끼우거나, 아니면 바지주머니 속에 슬쩍 찔러 넣는다. 팔굽이 마치 패션모델처럼 처억 꺾어진다. 나는 이런 모습을 상상하며 눈물까지 찔끔거리고 웃었다. 나는 우선 목욕탕의 보일러실 창고에서 팔뚝만한 굵기의 부서진 의자 다리 한 개를 찾아냈다. 나는 그것을 영자의 성한 오른팔만한 길이로 잘랐고, 또 세 토막을 냈다. 손 부분은 작은 널빤지 조각을 따로 구해 정교하게 다듬었다. 팔굽의 이음매에는 한쪽으로만 굽힐 수 있도록 쇠고리를 붙였다. 팔목에는 양쪽으로 고리못을 박아 이어 앞뒤 좌우로 움직일 수 있게 만들었다. 그리고 팔뚝의 굵기에 알맞게 붕대를 감아 굵은 부분과 가는 부분을 조절했다. 내가 목욕탕에서 이런 물건을 만들고 있는 동안 청소원인 박군이나 보일러실의 천씨는 보통으로 의아스럽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었다. 천씨는 심지어 나에게 "미친 새끼."라고 말하기조차 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을 이해시키기 위해서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이렇게 만든 물건을 나는 영자에게 가지고 갔다. 처음에는 영자도 어리둥절하여 바라보았다. 그러나 내가 벽에 걸린 영자의 원피스를 떼 내려 그것을 소맷자락 속에 집어넣고 어깨 부분에서 끈으로 붙잡아매고 바늘로 꿰맬 즈음에는 영자도 허리가 부러져 나가도록 깔깔거리며 웃었다.

"이걸 달고라면 골목길에 나가 설 수가 있겠어. 누구라도 암, 어떤 싹수없는 자식도 꼼짝없이 속아 넘어가고 말 거야." 영자는 의기양양해서 이렇게 말했다. 영자는 나무팔뚝이 든 소맷자락이 대롱거리는 원피스를 한 팔로 치켜들고 바라보며 또 한번 깔깔거리고 웃었다. 기뻐하는 영자의 모습을 보자 덩달아 나도 기뻤다. 나는 기쁨과 열적은 표정으로 뒤덤벅이 된 얼굴을 감추지 못하고 말했다. "머리는 써야 돼."

"어쩌면 이렇게 기발 난 생각을 다 해 냈을까? 참말 난 돌대가리인 모양이야. 당장 골목길로 나가보겠어. 아마 틀림없이 걸려들 거야."

이렇게 말하며 영자는 대담한 동작으로 원피스를 걸쳤다. 나는 영자의 어깨로부터 흘러내려 대동거리는 나무 팔을 잡아서, 팔굽 부분은 처억 굽히고 손을 허리께에 파여진 주머니 속에 찔러 넣어주었다. (p.118-120)

 

그 뒤로 영자는 정말 악바리처럼 뛰었다. 그만한 정성이라면 이루어지지 않을 일이 없었다.

"돈을 모아야지. 이젠 무조건 돈이나 모으는 거야." 영자는 이를 갈아 마신듯 다부진 말투로 입버릇처럼 자주 이렇게 말했다. 영자는 가난한 시골 농삿집에서 태어났다고 말했다. 농삿집이래야 밭 두 뙈기뿐이어서 굶기를 밥 먹듯 했다고 설명했다. 서울로 식모살이 온 것은 오로지 배불리 먹어보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p.121-122)

 

가을도 깊어지자 오팔팔 일대에서 나는 어느덧 영자의 서방으로 통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내게 치명적이랄 것까지는 없지만 과히 듣기 좋은 호칭은 아니었다. 그러나 따지고 본다면 목욕탕에서 손님들 사타구니의 때를 밀어주며 세상을 빌붙어 사는 주제에, 창녀의 서방도 과분할 밖에 없었다. 영자가 손님과 시비가 붙으면 그때마다 나는 그 사내를 교묘한 수단으로 구슬리고 위협해서 적당히 해결해 놓았다. 그러나 월남에서 돌아온 개선용사라는 점을 특별히 고려해서 과대한 처분을 내릴 만한 우직한 일을 나는 더는 저지르지 않았다. 그건 내가 미련한 녀석은 아니라는 단적인 증거였다. 영자는 부지런히 돈을 모았고, 모은 돈을 나이롱 아줌마에게 맡기고 있었다. 영자는 일금 이십만 원을 목표로 정해놓고 매일 그 달성 비율을 따지며 사기를 돋우었다. 그럭저럭 한여름과 가을을 우리들은 별일 없이 보냈다.

그런데 겨울에 들어서면서부터 갑자기 그 일대는 경찰의 철저한 단속을 받기 시작했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당국의 방침이 이 일대의 사창굴을 완전히 소탕시킬 계획이라는 것이었다. 마치 우리들 중대가 평정지역의 베트콩 잔비들을 깨끗이  소탕했듯이 소탕시킬 계획이라는 것이었다. 이른바 '불도저 작전'이라는 것이라고 했다. (p.129)

 

나는 영자를 구해내기 위해서 현장을 돌아보며 세밀한 작전을 생각하고 있었다. 우선 백화점 쪽의 블록으로 쳐 두른 담을 뛰어넘어 행인들 틈에 섞이는 방법이었다. 그러자면 우선 그 블럭담 옆의 집들 지붕 위로 올라가야만 한다. 이 방법은 외팔뚝이인 영자로서는 무리가 아닐 수 없다. 내가 생각한 또 하나으 ㅣ방법은 그 골목길의 네거리에 위치한 맨홀의 뚜껑을 쳐들고 하수도 속으로 들어가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나오는 구멍을 알 수 없다는 큰 난점을 지니고 있었다.

그날 밤 나는 자정이 가까워서야 영자를 만날 수가 있었다. 그런데 영자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더욱 비상한 탈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영자는 사내처럼 머리를 짧게 깎았고, 어디서 구했는지 그래도 걸맞은 말쑥한 차림의 신사복을 입고 있었다. 와이셔츠에 넥타이까지 처억 매고 있으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나는 어안이 벙벙하여 입을 헤벌리고 쳐다보았다. 나를 발견하자 영자는 호들갑을 떨면서 서둘러 말했다.

"어디서 이제 와요. 자, 동무해줘요, 도망치게. 통금 전까지는 빠져나가야 하니까...." (p.130-131)

 

영자가 죽은 것은 그러부터 보름쯤 뒤였다. 영자는 그해 겨울 청량리 일각의 그 사창굴에서 일어난 원인 모를 화재 속에서 불에 타 죽었다. 영자가 공교롭게도 그날 밤 청량리에 갔던 것은 그 악질적인 나이롱 여편네에게 맡겨 두었던 돈을 찾기 위해서였다. 나는 영자를 내가 일하고 있는 목욕탕으로 데리고 와서, 목욕탕 친구들의 얄궂은 눈길 속에서도 불구하고 잔심부름이나 시키며 밥을 얻어 먹이고 있었는데, 영자는 나도 모르게 살짝 빠져나가 그곳에 드나들고는 했던 모양이었다. 우리들은 그것 때문에 한두 차례 다투었는데, 그래도 영자는 막무가내였다. 영자는 어떻게든 그 돈을 찾아다가 따로 방을 얻어 살림을 차려야겠다는 것이었다. 한 번은 다녀와서 영자는 그곳 형편을 이렇게 설명했다. "아무것도 없어. 마치 염병으로 죽어나간 집들 같더라니까. 나이롱 여편네도 때갔다는 거야. 그렇지만 거짓말일 거야. 아무래도 나를 따돌리려고 그러는 것 같아. 어디로들 다 갔을까?"

탈의실에서 라디오를 듣고 있던 천씨에게 그곳에 불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그날 밤 아홉시 경이었다. 나는 손님의 때를 밀다 말고 홀로 뛰쳐나와 영자부터 찾았다. 영자는 물론 없었다. 나는 허둥지둥 화재 현장으로 달려갔다. 판잣집들에서 터져 나온 불길은 하늘 높이 치솟아오르고 있었다. 나는 구경꾼들을 헤치며 불길 앞으로 달려갔다. 소방차들의 소화 작업도 길 건너편의 건물들에게 불길이 번지는 일을 막는 정도에서 그치고 있었다. 물줄기는 불길 쪽보다도 엉뚱하게 백화점이나 호텔의 벽을 후려 때리며 식히고 있었다.

그러나 그 화재에 대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구경꾼들의 전렬에 나와서 화기에 얼굴을 익히며 구경이나 할밖에 또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그때도 나는 설마 영자가 저 불길속에서 타 죽었으랴고 생각했었다.

날이 샐 무렵, 잿더미 속에서 길거리로 끌어내 놓은 세 구의 시체를 나는 보았다. 그 화재 속에서 타죽은 사람은 모두 네 명이라고 했다. 한 명은 구출하여 인근 병원까지 옮겼는데, 병원에서 숨졌노라고 누군가 말했다. 그것이 바로 나이롱 여편네였는데 나는 나이롱 여편네의 집에서 갑자기 솟아올랐다고 했다.

세 구의 시체들은 마치 화염방사기에 타죽은 베트콩의 그것들처럼 시꺼멓게 그을려 있었다. 그 세 명 속에서 영자를 찾아내기는 어렵지 않았다. 영자는 외팔뚝이었으니까. 불에 그을려 알아볼 수 없게 되었어도 영자의 시체에는 역시 팔뚝 한 짝이 없었다. 나는 영자의 시체 옆에 쭈그리고 앉았다. 나는 이를 악물어 울음을 삼켰다. "이 바보야 누가 널 보고 이 불길 속으로 뛰어 들랬어, 누가." 그러나 영자는 마치 장난기까지 섞인 말투로 "불은 내가 질렀는걸요." 하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왜냐하면 나라도 지금 심정 같아서는 어디라도 한 군데 싹 쓸어 불 질러버리고 싶었으니까 말이다. (p.132-134)

 

<세대>120, 1973.07

 

<작품 해설 - 박덕규>

'화려한 술집의 보타이 맨 종업원', '소문난 양복점의 재단사' 따위를 인생 목표로 삼아 온 한 사내가 있었다. 이 사내는 목표 달성을 위해, 베트남 전쟁에 참전해 공을 세우고 무공훈장을 받고 나서 "군대에 말뚝을 콱 박아버릴까"하던 생각도 버리고 전역을 한 처지다. 그러나 목표 달성은 커녕 "불명예스럽게 공동목욕탕의 때 미는 녀석"이 되었다. 그래도 일을 하게 되면서 점차 여유가 생겼고, 그러자 옛날에 사귀던 창녀를 찾아 사창가를 돌아다닐 수 있게 된다. 그 사창가에서 우연히 입대 전 철공장에서 일할 때 혼자 욕심을 내던 사장님 식모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녀는 "팔 한쪽 없는" 장애인이 되어 근근이 창녀 생활을 유지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사내는 그 창녀의 단골손님이 되어 돈이 벌리는 대로 그녀를 찾아온다.

이런 스토리라면 마땅히 음담패설, 굳이 좋게 설명해도 성인잡지에 나오는 도색소설 같은 걸로 치부해도 좋겠다. 식모, 때밀이, 공장의 육체노동자, 파병 제대 군인 등의 등장인물들이 사창가를 중심으로 펼쳐가는 시시껄렁한 뒷골목 이야기 따위를 어떤 미학적 가치를 부여해 수용하는 일은 도무지 상상하기 어렵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한국문학의 공간으로 옮겨놓은 작품이 있었다. 주인공격인 창녀 이름이 영자, 그 작품 제목은 <영자의 전성시대>. 작가 조선작의 출세작이고, 1970년대 소설의 넓은 직업 체험 영역을 두드러지게 증명한 '작부'소설의 대표적인 소설이다.

음담패설에서나 들을 수 있는 이야기를 서사 축으로 삼고 있으면서도 이 소설은 어째서 한국문학의 한 시대를 증명하는 소설인가. 이에 대해서는 우선은, 한국 자본주의가 뚜렷한 실체로 형성되는 산업화 시대라는 시대적 배경이 뚜렷하다는 점, 자본주의 성장의 동력이면서도 변두리로 밀려나 사는 하층민들의 '뿌리박지 못한 삶'을 사실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 등으로 설명할 수 있겠다. 실상은 이런 특징이라면 한쪽으로 황석영의 <삼포 가는 길>로 대표되는 뜨내기 노동자 이야기와 연계되거나, 그 반대쪽으로 최인호의 <별들의 고향>으로 대표되는 호스티스 이야기와 연계될 수 있을 것이다. 조선작의 <영자의 전성시대>의 경우 그 양 측면을 아울러 지니면서도, 전자가 표방하는 소위 '민중주의'나 후자가 무기로 삼고 있는 '감각주의'로 귀착되지 않는다는 데서 그 신성한 지위가 유지된다.

산업화의 동력이면서도 그것이 가져다주는 화려한 부의 축제에서 지극히 소외된 변두리로 밀려나 비전 없는 삶을 유지하는 계층들을 다루면서도 그들을 옹호하는 의지의 규합에 대해 말하지도 않고 또한 그들의 사연을 신비화하지도 않는 그 지점에 <영자의 전성시대>가 있고, 조선작의 다른 대표작들인 <성벽>, <지사총> 등의 소설이 있다. 다산정책의 소산으로 태어난 무수한 '영자'들의, 대량생산 정책의 소산으로 극빈층으로 밀려나 살게 된 사연을 '리얼'하게 그려내면서도, 그 정책에 대해 항변하지도 않았고 그 '영자'들의 몸과 마음에 깃든 '아름다움'에 대해 과장해 보이지도 않아서 더욱 소중한 자리에 있게 된 이 소설은, 그러나 바로 그런 가치중립 때문에 또한 특별한 지향점을 확보하지 못했다는 비판에도 시달리게 된다. (p.10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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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작(趙善作, 1940년~ )

대한민국의 소설가이다.

1940년 대전에서 태어났다. 1971년 단편 '지사총'으로 문단에 데뷔했다. 주요 작품으로 '시사회', '불나방 이야기', '여자줍기', '미술대회', '미스 장의 모험', '고독한 청년', '말괄량이 도시', '초토', '완전한 사랑', '우주의 사슬', '굴레' 등이 있다. 지은 책으로 창작집 <영자의 전성시대>, <고독한 청년>, <그대는 별인가>, <꿈길>, <지사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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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자의 전성시대 - 조선작 (창비)

지사총 - 조선작 (범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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