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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
I. 한국 문학/2. 소설

열린 사회와 그 적들 - 김소진 (열림원)

by handaikhan 2023. 4. 13.

열림원 - 논술 한국 문학 6

 

목차


쥐잡기
자전거 도둑
열린 사회와 그 적들
눈사람 속의 검은 항아리
갈매나무를 찾아서
두 장의 사진으로 남은 아버지
고아떤 뺑덕어멈
처용단장

생애와 문학 - 역사와 운명 앞에 휘둘린 아버지의 삶
논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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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진 - 열린 사회와 그 적들 (1991년)

 

"아따, 목젖이 따땃해짐시러 가슴이 후끈허고 봉알 밑까지 다 노글노글헌게 이제사 내 몸띠이가 오봇이 내 거 같네 그려."

담벼락에 바투 지펴올린 화톳불 가로 다가선 브루스 박이 엉거주춤 자세를 잡으며 너스레를 떨었지만 아무도 돌아보거나 대꾸를 하는 사람이 없다. 불가에 에둘러 앉은 사람들의 얼굴에 월렁월렁 끼얹어지는 불기운 때문에 눈동자에는 이글이글한 눈부처가 섰다가 사라지기를 되풀이하고 있다. 씻지 않고 말린 대낮의 땀자국이 번들거려 무표정한 사람들의 얼굴은 마치 가면을 둘러쓴 양 질겨 보였다.

"코피는 역시 목젖이 확 뒤집어번지도록 따끈할 때 빨아뿌는 게 제맛이어라우."

브루스 박은 종이컵에 담긴 커피가 뜨거운지 한 손씩 번갈아 들며 귓불로 손을 갖다댄다. 그는 자칭 '색소폰의 명수'로 밤무대 악사로 뛰는 사내다. 옷차림에서부터 이미 딴따라 냄새가 풍긴다. 한때는 초원의 집 무대에서도 반주를 넣어다고 은근히 자랑 삼아 떠벌리곤 했는데 그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백구두에 흰 나팔바지, 그리고 가슴팍에 요란한 꽃술 장식이 돼 있는 분홍색 블라우스가 왠지 주변 분위기에 잘 어울리지 않는다. 반죽이 좋아서 아무 사람들하고나 잘 어울린다. 사수대 학생들, 일반 시민들, 대책위 관계자들, 백병원 환자들, 심지어는 낮에 한가로울 시간이면 대치 중인 전경들한테도 접근해 엉너리를 쏟아내며 어느덧 구면지기처럼 시시덕거리는 품을 여러 번 보였다. 종이컵에 얻어온 커피도 학생 사수대가 직접 끓인 걸 받아온 게 틀림없을 성싶다. 어쩔 땐 그의 속없는 너울가지가 역겨울 때도 있었지만 그것을 버르집고 나오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새벽 1시를 넘은 시각이지만 병원 앞마당은 구석구석 서린 팽팽한 긴장감으로 초롱초롱하기만 하다. 규찰대에게 경찰의 동태를 묻는 소리, 삼삼오오 앞으로의 진행 사항을 숙의하는 모습, 간간이 터지는 구호와 졸음을 쫓는 듯한 노랫소리, 여러 가지 정황으로 봐서 오늘 새벽 경찰이 전격적 행동을 취할 깸새는 보이지 않는다. 병원 앞 도로 양쪽에 쌓아둔 바리케이드를 지키는 학생들이 교대를 하기 위해서 정문을 들어서는 모습이 보인다. (p.94-96)

 

"당신들 밥풀떼기들 때문에 민주화시위가 일반 시민들한테 얼마나 욕을 먹는 줄이나 아쇼? 당신들 도대체 누구, 아니 어느 기관의 조종을 받고 이런 망나니짓을 하는 거요?"

병원 현관 쪽에서 볼멘소리가 들렸다. 외팔이 강종천 씨가 웬 사내와 드잡이를 하고 있었다. 병원 마당의 모든 시선이 그리로 쏠렸다.

"그래, 우리는 밥풀떼기다. 근데 당신이 뭐 보태준 거 있냐고 썅."

"당신들이 뭔데 초대되지도 않은 곳에 끼어들어서 감 놔라 배 놔라 판 깨는 짓거리를 하냔 말이오."

서로 단단이 멱살을 거세게 틀어쥐는 바람에 단추 두엇이 바닥에 떨어지며 곧이라도 종주먹을 들이댈 기세였다. 강씨의 멱살을 거머쥔 사내는 뜯어말리는 주변 사람들에게 서부투자금융 홍보실 대리라는 신분증을 제시했다.

"아, 그렇잖아도 병원 관계자들로부터 강력한 항의를 받아 조심조심하는 판국에 왜 갑자기 병원을 향해 돌을 던지고 침을 뱉는 행위를 하느냔 말이죠. 난 이건 분명 우리 학생들과 대책위의 위상을 떨어뜨리려는 저의가 있는 고의적인 행동임이 틀림없다 이겁니다. 이제는 우리 시민들이 나서서 저런 밥풀떼기에 대해 분명한 선을 긋고 마침 검찰에서도 수사 의지를 밝힌 만큼 적극 수사에 협조해서라도 정화를 하든지 해야지 여론도 계속 우리 쪽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거 아닙니까?"

흰 와이셔츠의 팔소매를 걷어붙인 사내는 허릿장을 지른 채 버티고 서서는 연설조의 푸념을 털어놨다. 학생들과 주변 사람들에게 밀려 화톳불 가로 떠밀리다시피 다가온 강종찬 씨는 바닥에 마른침을 세게 뱉으며 뇌까렸다.

"니기미 씨펄, 그래 시민, 시민 해쌓는데 느그덜 판이 을매나 오래 갈는지 두고보자고."

"어따 웬일이여. 가뜩이나 우리덜얼 바라보는 눈길들이 점점 사나워 지는디 쌈박질까지 하고 나서면 워쩌자는겨?"

"얼룩이 성님은, 말이라두 고로케 창알머리 없게 하믄 내가 섭하지라. 조것들 말하는 뽄새 좀 보고도 그라요? 같이 민주화투쟁 하며 기껏 고생함시러도 시상에 밥풀떼기가 뭐라요. 얼통 터지게. 사람이 입성이 누추하고 행동이 거칠다고 그렇게 깔보는 경우가 제대로 된 경우라요? 아, 우리가 뭐 기생충이라? 싸가지 없는 것들 같으니라구. 민주화투쟁 허기 전에 저런 고상짜들하고 먼저 와장창 한판 붙어야지라."

얼룩이 성님이라고 불린 정을룡 씨는 은평구 일대에서 고물 줍기를 하는 사람이었다. 비슷한 처지의 거랭뱅이 두엇과 함께 천막생활을 하는데 오른쪽 눈가에서 뺨자위까지 시커먼 기미로 뒤덮여 별명이 얼룩이었다.

"애초에 왜 병원에다 대고 돌을 던짐감? 이 안동답답이야."

"그건 제가 잘못했지라. 근디 저그 오줌 좀 싸려고 백인제 선생인가 뭔가 하는 동상 앞을 지나려는데 현관 벽에 뭔 동판이 붙어 있어서 보니, 거시기 '산업재해보상보험 지정 의료기관'이라는 글이 써 있더라구요. 그게 눈에 띄는 순간 가슴에서 불꽃이 파바박 일어납디다."

흰자위가 많아진 강씨의 눈에서는 수은등 불빛이 퍼렇게 되비쳐 나왔다. (p.99-101)

 

"오늘 지냑에, 누가 쓰기 시작한 말인지는 모르지만 소위 밥풀떼기라고 불리는 우리 같은 축들을 학생인지 아니믄 대책위 사람들인지가 손가락 끝으로 백골단에 찍어주는 바람에 달려갔시다. 그래도 뭔가 같이 이뤄보자고 싸우던 사람덜인데 그래도 뭔가 같이 이뤄보자고 싸우던 사람덜인데 그래도 되는 것인지 모르겠구만요. 듣자니 대책위 쪽에서 백병원과 시위 현장에서 민주 시민을 가장한 폭력배들이 온갖 행패를 부리며 폭력을 선동하는 등 대책위의 입장을 곤란하게 하고 있는데 규찰대를 조직해 이를 막고 배후를 밝히겠다는 성명을 냈다고도 허는데 정말 몸 둘 바를 모르겠디다."

"우선 그런 일이 일어난 데 대해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대책위에서 알아본 바에 따르면 누구누구를 찍어준다거나 하는 일은 의논된 바도 지시한 바도 없음을 확인했습니다. 전혀 우발적인 사건ㄴ이라고 봅니다만, 어디까지나..."

과나놀이께에 힘줄이 불끈 솟구쳐오른 강씨가 결기 때문에 잠겨 버린 목소리로 외쳤다.

"쓰레기통의 고등어 대가리같이 썩고 무능한 정권 아래서는 인간적인 생활을 할 수 없다고 생각돼 몇년 전부터 야당이 개최하는 집회를 쫓아다녔수다. 그러나 야당 사람들도 우리 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학생들의 시위로 옮겨왔는데 우리들이 학생들과 달리 움직인다고 해서 기층 민중인 우리를 이렇게 대접할 수 있는가, 이 말이우다."

"그러게 첨부터 눈 먹는 퇴끼 얼음 먹는 퇴끼 따루 있다 이거 아닙니까."

현대영 씨는 몹시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처음에는 대책위의 얼굴에 먹칠을 하기 위해 정보기관에서 꾸미는 공작이 아닌가 하는 의혹도 생겼지만 그렇지 않다고 결론지었습니다. 또한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우리 대책위는 검, 경으로 부터 아마도 여러분들을 일컫는 말인 듯한데, 과거 폭력 시위를 일삼는 이른바 밥풀떼기들의 수사에 협조해달라는 제안을 정식으로 받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경찰에 여러분들도 김귀영 열사의 죽음을 애도하는 조문객임이 분명하므로 연행에 협조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는 공식 입장을 밝힌 바 있습니다."

"그럼 공식 입장 따루 안으로 꼬불쳐둔 입장 따루 이렇게 따루국밥집이라고 차려서 그렇게 허나사나 같이 투쟁하는 동지들 등에다 칼을 꽂는답디까?"

재복은 가슴팍을 펑펑 두들기며 울부짖었다.

"같이 애써주시는 건 충심으로 고맙게 여기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하나의 조직이 꾸려진 이상 그에 걸맞는 규칙과 체계가 있는 법이지요."

'누구한테서 고마움 사려고 투쟁을 했던 건 아니니까요. 공치사는 허실 필요 없시다. 어떤 사람들은 좀 빼뚤하게 행동한 게 사실이쥬. 뭐 대가나 바라고 싸우는 듯이 음식을 달라 어쩌라 하는 얼빠진 치들도 있었고, 아무 허락도 맡지 않고 병원 사무실이나 빈 입원실에 몰래 들어가 떼잠도 잤으니깐 영락없이 꼴사나운 부랑아 형티를 낸 거죠. 지들도 잘 알아요." (p.107-109)

 

"그런 것들이 사소한 문제 같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오늘만 해도 옷차림 보니깐 저기 누워 계신 분인 듯싶은데 저 명동성당 앞 공중전화박스를 깨뜨리고 그 유리조각으로 자해 소동을 벌이고 하면 모두가 정말 난처해집니다. 어제 검사들과 부검 의사들이 병원 구내로 들어왔을 때 일부 사람들이 거친 행동을 보여서 언론에는 봉면 운운하는 기사가 나갔지만 생각해보십시오. 그것은 그들이 진짜 부검을 하기 위해서 들어온 게 아니고 차후 병력 투입을 합리화하기 위한 명분축적용이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그 사람들 대충 혼내주는 건 단순한 화풀이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며 오히려 그들의 의도에 말려드는 결과를 낳습니다. 민주화운동 세력은 일반 국민이나 시민들과, 말하자면 물고기와 물의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서 살 수 없듯 우리 민족 민주 세력은 대중의 지지 없이는 존립할 수 없죠. 그런데 자신과 의견이 맞지 않는다고 아무한테나 심한 욕설을 퍼부어서 토론 분위기를 망치거나 국민대회가 다 끝났는데도 계속 지나가는 차량에 돌을 던지며 시민들의 일상생활에 불편을 주는 것, 그리고 같이 죽자는 말로 공포 분위기를 부추기는 일이 솔직히 많지 않았습니까? 심지어 어떤 분은 한국은행을 불태우러 가자는 얼토당토않은 발언도 하시더군요."

"낮에 핏방울 튄 런닝구 입구 댕기다가 주의를 받은 친구가 바로 저기 누워 있는 상선이가 맞기는 허지만 자해헌 거는 아뉴. 최루탄 파편이 살 속을 파고든 거라니까유. 아, 남은 거라곤 몸띵이밖에 없는 사람들이 워치케 지 손으로 몸을 상허게 허겄슈." (p.109-110)

 

"아, 지금 비난을 하기 위해서 그런 말을 꺼낸 건 아닙니다. 다만 그런 과격하고 충동적인 발언은 지금 우리의 투쟁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우리 사회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것 이렇게 말이죠. 폭압적인 반민주적 통치기구, 고질적 악법과 불평등한 제도 등이 그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의당 철폐돼야 하지만 예를 들어 은행 같은 제도는 그것과 다르다 이 말씀입니다. 그것은 시민사회의 고유한 제도요 핵심적 현상이기 때문이죠. 파출소를 기습하는 것과는 또 다른 의미입니다."

"어려운 말 허지 마슈. 내가 보시다시피 외팔이 빙신이다보니 겨우내 일자리도 못 찾고 세종대왕님이 그리워 껄떡거릴 때도 은행 창고에는 돈이 썩어났시다. 그게 억울하다는 말이 아니라, 그러면서 은행이 베고픈 사람 구제하는 건 고사하구 재벌들 돈 대줘서 땅투기나 허게 하고 알만한 사람에게 떡고물 잔치나 베푸는 데루다 밑구멍 틀어막는, 그따우 마름 노릇밖에 헌 게 뭐가 있었냐 이 말이우. 그리구 막말루다 우리 사회가 돈으루다 돌아가는 자본주의사회 아니유? 그렇다믄 문제는 돈이지, 독재도 칼자루 쥔 놈들끼리 잘 먹고 잘살려고 허는 거고, 민주화 투쟁은 그와는 다른 맘에서 잘 먹고 살려는 건데 그 와중에서 돈줄을 거머쥔 은행을 호령할 수가 없다믄 되레 없애는 게 뭔가 시상이 변하는 데 보탬이 될 거란 밑천 짧은 생각을 먹어봤던 거우다."

"아무튼 저희가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경찰이 여러분들이 삐삐에다 일당 운운하는 걸로 봐서 조직적 배후가 있다고 몰아치며 시경 특수대까지 낀 전담반을 편성해 전원 검거할 계획이라니깐 나름대로 신변 안전에 각별히 신경 쓰셔야 할 졸로 압니다." (p.110-112)

 

"애국 시민이 아니면 꽃을 보낼 자격이 없다니깐."

영안실 쪽에서 왁자한 고함이 터져나오며 돌연 시골 난장이라도 선 듯 왜자해졌다. 몇몇 사람이 큼직한 화환을 땅바닥에 태질을 치고는 그 위로 작신작신 짓뭉개느라 널을 뒤는 게 보였다. 서너 사람이 곁에서 그들을 말리느라 진땀을 빼는 모습이었다. 뭐야, 뭐 하면서 사람들이 순식간에 그리로 답쌓여들었다.

"삼당야합의 장본인이며 현 시국 불안의 주범 가운데 한 사람인 변절 정치인의 화환이 어떻게 무자비한 공권력에 무참히 숨진 우리의 순결한 동생 귀정이의 영정실에 버젓이 세워질 수 있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여러분?"

"밥풀떼기들이잖아."

둘러선 사람들 속에서 누군가 속삭이듯 뇌까렸다.

"그 말에 반대를 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러한 행동은 너무 과격이오. 우리는 어디까지나 평화적으로 우리의 의사를 표현하기로 이미 의견을 모은즉슨 앞으로는 그러한 감정적 행위를 삼가주기 바랍니다."

머리에 희끗희끗한 세치가 섞인 50대 가량의 사내가 점잖게 오금을 박고 나왔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동조하는 말들이 간간이 터져나왔다.

"지금은 열사의 주검을 지키는 일이 급선무인데 그런 쓸데없는 일로 저들의 감정을 자극하고 여론에 빌미만 제공해서는 안 되지 않습니까?"

사수대 셔츠를 입은 대학생이 한마디로 간추려 대답을 했다.

"무슨 소리야. 가장 앞장서서 싸워야 할 대학생들이 시신 사수에만 정신이 팔린 나머지 시위를 해서 싸울 생각은 안하니 그게 바로 문제가 아니고 뭐란 말이야. 싸우기가 겁나는 놈들은 당장 이 자리를 뜨라구."

"아무렴. 백골단이 귀정이를 죽였으니 너희들도 의당 백골단을 죽여야 아퀴가 맞아떨어지지 않냐 이거야. 아, 안 그래? 내 말이 틀렸냐구?"

그러나 그 목소리는 별다른 반향을 얻지 못했다. 화환을 짓밟았던 사내들을 중심으로 사람들은 한 발짝씩 더 죄어들었따.

"여기에 모인 사람들은 그 어느 누구도 그러한 단세포적 복수 심리를 갖고 모이진 않았소. 우리는 또다시 누구의 피를 보자고 그러는 게 아니란 말이오. 분명히 말해두지만, 우리는 다만 자유와 평등 그리고 평화를 위해서 싸우려 할 뿐이란 말이오."

"아, 그러니깐 그런 걸 위해서라도 열심히 싸워야 한다는 거 아뇨? 아무도 용감하게 나서서 싸우지도 않는데 누가 거저 나서서 그런 자유와 평화를 선떡 돌리듯 집어준답디까? 이마빡이 터지도록 허벌나게 싸워도 될까 말까 한데.."

"그렇게 책임성 없는 말이 어디 있소? 모든 걸 적대시하고 파괴하려고만 하는 건 기회주의자의 또 다른 측면일 뿐이오. 민주화시위도 이제는 아구잡이식으로 하는 게 아니고, 그렇다고 딱히 이렇다 할 규칙이 있는 건 아니지만, 아무튼 어느 정도 룰을 지켜야 하는 경기나 마찬가지란 말이오."

"뭐요? 그러면 이게 무슨 심심풀이 고스톱판이오 아니면 섰다판이란 말이오 잉? 목심을 걸고 뛰어든 판인데. 그러면 내 말 좀 듣소. 저쪽은 항상 단풍잎 두 장짜리 장땡 들고 판쓸이를 헐려고 대들 판국인데 그깟 룰인지 뭔지 지켜감시롱 시위는 애당초 혀서 뭣 헐라까나 잉? 아, 안 그렇소? 지 말이 틀렸으면 으디가 틀렸는지 꼬잡아 좀 주소."

메기처럼 커다란 입을 가진 사내는 답답한지 그 자리에서 쿵쿵 발을 구르며 한 발씩 성큼 사람들 앞으로 다가섰다.

"세계가 돌아가는 것을 봐도 그렇고 그간 우리가 쌓아온 경제, 사회적인 역량을 보더라도 우리 사회가 열린 사회의 구조로 접근해가고 있는 것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흐름이잖소. 이제 그 흐름의 물꼬를 정치 쪽으로 돌리려는 과도기적 진통을 지금 겪는 것으로 보면 될 것이오."

"무슨 비 맞은 중의 염불 소리런가 잉. 사회가 무슨 대문짝이어라? 열리고 닫히게?"

"여기서 열린 사회라는 건 계급이나 종족 그리고 이데올로기라는 신화가 더 이상 개인에게 굴레가 되지 않고 개개인이 사회의 진정한 주인으로서 질적으로 더 많은 자유와 민주주의, 물질적 풍요와 평등을 이룰 수 있는 마당이며, 소수에 의한 지배가 아니라 이성적으로 눈뜬 다수에 의한 착실하고도 양심적인 사회 운영이 기본 원리로 받아들여지는 사회를 가리키는 것이오."

"당신네들 지금 자꾸 어려운 말을 씀시롱 머릿속을 헷갈리게 하는데 한번 물어나 봅시다. 우리, 우리 하는데 도대체 거기에 낄 수 있는 축은 누가 되는 거요? 이데올로기의 신화니 이성적 원리니 하며 거창하게 빚어내는 사회라면 우리 같은 못 배우고 빽줄 없는 떨거지들은 여전히 찬밥 신세를 면치 못할 게 불 보듯 뻔한데 뭐가 진정한 사회란 거요?"

"그건 기회의 문제인데 그 기회의 범주는 갈수록 넓어..."

"필요 없다. 기회를 따지는 놈들이야말로 바로 기회주의다. 우리에게 토론은 더 이상 필요 없어. 당장 청와대로 가자."

밥풀떼기로 불린 사내들은 들고 있던 각목으로 시멘트 바닥을 두들기며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살인자들을 타도하자!"

"도둑놈들을 몰아내자!"

그러자 그들을 둘러싼 사람들은 험상궂은 표정을 지으며 포위망을 압축시켜왔다. 기세가 등등해서 구호를 외치던 사내들은 분위기가 심상찮게 돌아가는 듯싶자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그만들 두지 못해! 이게 뭐하는 짓거리야. 더 이상 두고볼 수가 없다구. 이따위로 나오면 우리는 당신들을 적으로 규정할 수밖에 없어. 어서 그 각목을 바닥에 놓고서 순순히 물러서라구. 아니면 이후로 당신들이 어떻게 되든 우리 책임이 아냐."

긴 침묵의 대치 끝에 시멘트 바닥에 네댓 개의 각목이 나뒹굴었다. 사람들이 물러가자 한 사내가 넋이 나간 듯한 표정으로 바닥에 주저앉아 멍하니 푸른 하늘 한구석빼기만 후벼파고 있었다. (p.114-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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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해설>

이 작품에서는 이상적 사회, 완전한 사회에 대한 질문을 던집니다. 아마도 작품에 등장하는 대책위 사람들은 이상적인 사회를 칼 포퍼가 말하는 '열린 사회'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칼 포퍼는 "열린 사회란 사회 구성원들의 자유로운 토론과 비판을 통해 점진적으로 구체적인 문제들을 각각 해결해 나가면서 이루어진다."고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이라는 이 작품과 동일한 제목의 글에서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책위 사람들은 칼 포퍼의 말을 인용하여, 점진적 발전이 이루어진다면 우리가 바라는 개개인이 사회의 진정한 주인으로 더 많은 자유와 물질적 풍요, 평등을 이루게 될 것이라고 말하면서 오히려 이성적이지 못한 '밥풀떼기'들을 '열린 사회의 적'으로 규정합니다. 그렇지만 과연 대책위 사람들이 말하는 열린 사회가 온다고 해서 '밥풀떼기'들이 사라질까요? 아니 그 반대로 '밥풀떼기'들이 깨끗이 사라져버린다고 이 땅에 진정한 열린 사회, 이상적인 세상이 올까요? 그러나 이 질문에 대해 작가는 부정적입니다. 우리가 선진국이라고 하는 나라들에도 여전히 '밥풀떼기'와 같은 소외되고 삶의 변두리로 밀려난 자들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 증거 아닐까요? 작가는 오히려 우리 마음속에 숨겨진 이중적인 태도. 즉 겉으로는 열린 사회를 외치면서 속으로는 소외된 이들을 향해 꼭꼭 문을 닫아버리려는 태도를 '열린 사회의 적'이라 말하려고 한 것입니다.

작가는 자신의 산문집에서 이렇게 밝혀두고 있습니다.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은 이런 바탕위에서 밥풀떼기의 삶의 무늬를 희미하게나마 더듬어봐야 한다는 부채 의식에서 출발한 작품이었다. 그들은 배척한다고 해서 없어질 그런 존재가 결코 아니며, 그들을 함께 끌어안고는 노력이 우러나는 사회의 진정한 가치를 더불어 상기시키고자 한 서툰 시도였다." (p.90-92)

 

- 칼 포퍼의 <열린 사회와 그 적들> -

1945년 영국에서 출판된 사회철학이다. 칼 포퍼는 오스트리아 출신 유대인으로 뉴질랜드 망명시절인 1938년 히틀러가 오스트리아를 침공했다는 소식을 듣고 집필하기 시작해 5년 뒤인 1943년 집필을 마치고 1945년에 출판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열린 사회'야말로 인류가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사회라고 주장하고, 자신이 말하는 열린 사회를 전체주의의 대립개념인 개인주의 사회이자 부분적인 개혁을 시도하는 점진주의적 사회라고 정의하였다. 또 역사주의로 불리는 전체론, 역사적 법칙론, 유토피아주의를 열린 사회의 최대의 적으로 규정하고 플라톤, 헤겔, 마르크스 등의 '닫힌 사회'로 이끈 '열린 사회의 적들'이라고 혹독하게 비판하였다. 그는 혁명을 통해 단번에 이루어지는 완전한 사회란 있을 수 없으며 이 세상을 더 나은 사회로 이끌기 위한 대안으로서 '점진적 사회공각'이라는 개념을 내세웠다. 즉 폭력과 유혈을 동반하는 혁명을 자유를 파괴할 뿐 결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며, 자유로운 토론과 비판을 통한 점진적 개선만이 인간답게 살수 있는 유일한 사회를 만들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이다.

이 책은 한때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사회주의운동에 참여했던 저자가 나치즘과 파시즘, 러시아 혁명 등을 목격한 뒤 전체주의 이데올로기의 비인간성에 환멸을 느끼고 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대변자로 변화하면서 내놓은 결과물로서, 저자가 20세기 철학사에서 비판적 합리주의의 대표로서 자리 잡는 데 큰 역할을 한 명저로 평가받고 있다. (p.92-93)

(같이 읽으면 좋은 책)

열린 사회와 그 적들 - 칼 포퍼 (이한구 옮김,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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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진(金昭晉, 1964년 1월 17일 ~ 1997년 4월 22일)

대한민국의 소설가.

강원도 철원 출신. 아버지 김응수, 어머니 김영혜의 이남이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5살 때 미아리 산동네로 이사와 1993년 결혼할 때까지 26년을 살았다. 1982년서울대학교 인문대에 입학하여 영문학을 전공하였고, 학생운동과 야학활동을 열심히 하였다. 이 무렵 그는 사회변혁운동의 한 방법으로 글쓰기를 염두에 두고 학회지에 글을 발표하는 등 습작을 하였다. 한겨레 기자를 하면서 작품활동을 활발히 하던 그는 1993년 소설가 함정임과 결혼을 하였다. 기자생활과 작품활동을 병행하던 그는 1995년 기자생활을 그만두고 전업작가가 된다. 1996년 제4회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을 수상하였고 계간 『한국문학』의 편집위원으로 참여하고 중경공업전문대학 문창과에 출강을 하기도 한다. 1997년 위암 판정을 받은 후 한 달 남짓 투병하다가 4월 22일 작고하였다.

1991년『경향신문』신춘문예에 단편소설「쥐잡기」가 당선돼 문단에 데뷔하였다. 6년 남짓인 짧은 기간 동안 그는『열린사회와 그 적들』(1993),『장석조네 사람들』(1995),『고아떤 뺑덕어멈』(1995),『자전거 도둑』(1996),『양파』(1996) 등 소설집과 콩트집『바람부는 쪽으로 가라』(1996), 창작동화집 『열한 살의 푸른 바다』(1996)를 잇따라 내놓는 등 왕성한 작품활동을 하였다. 1998년 지인과 부인 함정임은 유고작을 모아 『아버지의 미소』를, 짧은 소설을 모아 『달팽이 사랑』을 펴냈다.
김소진의 작품세계는 흔히 자신의 가족사 이야기, 미아리 산동네의 민중들의 이야기, 지식인의 자의식을 다룬 이야기 등 세 개의 계열로 분류된다. 사회변혁 운동이 실패를 하면서 무엇을 해야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가족사에 대한 기억을 쓰기 시작한다. 소설쓰기의 원동력이 되었던 가족에 대한 기억은 주로 아버지와의 갈등과 화해를 다루고 있다(「쥐잡기」,「춘하 돌아오다」,「사랑이 앓기」,「고아떤 뺑덕어멈」,「개흘레꾼」,「두 장의 사진으로 남은 아버지」,「자전거 도둑」,「원생학습생활도감」,「목마른 뿌리」). 자신을 탄생시킨 아버지와의 화해는 결국 아버지로 대표되는 산동네 민중들의 이해로 확대된다(『장석조네 사람들』,「비운의 육손이형」,「수습일기」, 「그리운 동방」). 그는 기억의 서사를 통해 아버지와 엄마로 대표되는 민중들의 삶을 사실적으로 구성해내었다. 90년 신세대 작가들이 사회나 역사 대신 개인과 욕망을 내세웠던 것과는 달리 그는 추상적인 이념으로만 존재하던 민중이 실제로 역사 앞에서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생생하게 그려내었다. 우리말 공부와 어머니의 입심의 영향으로 그는 계층에 맞는 언어와 생생한 생활어를 능숙하게 구사하여 산동네 민중들의 삶을 생동감 있게 그려내었다.
김소진은 또한 변혁운동의 실패 후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는 지식인을 다룬 소설을 썼다. 「처용단장」,「임존성 가는 실」,「혁명기념일」,「경복여관에서 꿈꾸기」,「울프강의 세월」,「신풍근배커리 약사」등에서 그는 자본제적 논리에 순응해가는 지식인의 모습을 비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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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사회와 그 적들 - 김소진 (문학동네)

장석조네 사람들 - 김소진 (문학동네)

그리운 동방 - 김소진 (문학동네)

바람부는 쪽으로 가라 - 김소진 (문학동네)

신풍근베커리 약사 - 김소진 (문학동네)

열린사회와 그 적들 - 김소진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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