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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
I. 한국 문학/2. 소설

유황불 - 양귀자 (열림원)

by handaikhan 2023. 4. 10.

열림원 - 논술 한국 문학 5

 

목차

유황불

한계령
지하 생활자
원미동 시인
비 오는 날이면 가리봉동에 가야 한다
숨은 꽃
찻집 여자

생애와 문학 - 냉엄한 현실과 나약한 인간
논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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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귀자 - 유황불 (1984년)

 

잠에서 깨었을 때는 이미 밝은 기운이 곳곳에서 솟아버린 늦은 시각이었다. 너무 늦잠을 잤기 때문일까. 주위는 거짓말처럼 조용했고 부엌쪽에서만 가끔 그릇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깜짝 놀라서 거의 울상을 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느새 말짱 이불도 개켜져 장롱 속에 넣어진 듯 방 안은 깨끗하다. 무엇을 더 확인할 필요가 없었다. 햇살은 깊숙이 들어와 창호지를 적셔놓았고, 새롭게 정수리에 부어지던 신선한 기운도 녹아 없어져 닳아빠진 공기만 남아 있었다. 나는 황급히 책가방을 어깨에 메고 신발주머니를 집어들고 와르륵 마루의 밀창문을 열어젖혔다. 그러곤 여기저기 나동그라져 있는 운동화짝을 짝짝이로 꿰어차곤 대문까지 달려갔다.

그때 나는 집 앞의 기린봉 위에 걸려 붉게 물들어 있는 해를 보았다. 이상했다. 저것은 매일 아침 볼 수 있는, 노란빛의 깨끗한 빛살을 겹겹이 두르고 있던 눈부신 해가 아니었다. 그것은 쇠잔해질 대로 쇠잔해진, 그러나 타오르는 빛깔만큼은 선명하기 그지없는 붉은 덩어리였다.

"어딜 가니?"

우물가로 물을 버리러 나왔던 엄마가 내 뒤꼭지에 대고 소리쳤다.

"늦었단 말야. 깨우지도 않고...."

금방이라도 울어버리고 말 듯 퉁퉁 부어 있는 내 얼굴을 어머니는 멍하니 지켜보았다. 그리고 이내 기적과 바퀴 소리로 온 동네를 뒤흔들고 마는 여수행 특급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지나갔다. 저 기차는 5시 40분에 역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다시 기린봉을 보았다. 붉은 덩어리 주변으로 솜사탕처럼 퍼져가고 있는 낙조, 서쪽 산기슭의 밑자락에 어둔 그림자가 괴어 있었다. 저 산자락에 피어 있는 진달래를 보면서 철로변의 나물을 캔 것이 바로 오늘 낮의 일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그때였다. 나는 신발주머니를 내던지고 으앙 노을을 향해 울음을 터뜨렸다. 어머니는 두레박을 우물 속에다 던지며 웃었다. (p.10-11)

 

어머니는 내가 캐온 봄나물을 모두 쓰레기통에 집어넣었다. 똥만 먹고 자라난 거야. 똥 오줌 떨어지는 것을 받아먹고 자란 나물을 어찌 먹니.

"은자네는 먹는다는데?"

내 말에 어머니는 담박 이맛살을 찌푸렸다. 어머니는 은자네 식구들 모두를 마귀라고 불렀다. 교회를 다니는 어머니에게 있어서 사람들은 형제거나 마귀, 이 두 종류 이외엔 없었다. 손버릇이 나쁘다고 소문난 은자를 오빠들은 그래서 새끼마귀라고 놀려댔다. 나는 어머니가 똥 오줌 먹은 더러운 나물이어서가 아니라, 새끼마귀와 함께 어울려 캐온 나물이어서 쓰레기통에 버린 것이라고 생각했다. 먹을 수 있는 것을 버리다니. 나는 화가 나서 운동화짝을 거칠게 벗어던지곤 방으로 들어가 낮잠을 자 버렸다.

은자네는 철길에 딱 붙어서 찐빵가게를 열고 이었다. 찐빵이나 만두, 국수 같은 것을 파는 그애네 가게는 북향이어서 늘 어둡고 추적추적한 습기에 젖어 있었다. 밀가루를 반죽해서 만두나 찐빵을 만드는 일은 대개 그애네 아버지가 했다. 중학교를 졸업한 뒤, 장사를 거드는 은자 언니가 만두를 나르거나 엽자찬에 물을 따라 주었다. 그애의 엄마는 노상 입에 담배를 물고 의자에 앉아 늙은 고양이처럼 졸고 있었다. 은자의 말에 의하면 밤마다 되풀이되는 아버지의 술주정 때문에 고단해서 그러는 것이라 했다.

그 집의 단골은 주로 철길 건너에 있는 남자 중고등학교의 까까머리 남학생들이었다. 한창때의 남학생들은 맛이 있건 없건 우적우적 잘도 먹었다. 그래서 그 집 찐빵 맛은 도통 젬병이었다.

어머니는 아예 은자네 빵은 손도 못 대게 했다. 술로 범벅이 되어 시궁창에서 뒹굴다 나온 옷으로, 다음 날이면 밀가루 반죽을 한답시고 주물럭거리다 머리 속을 박박 끍어대는 그 애의 아버지 때문이었다. 하기야 은자 엄마도 특별히 다를 것은 없었다. 가게 유리창엔 흙먼지가 사계절 내내 요란한 무늬를 그렸고, 가게 뒤에 붙은 살림채는 철길 쪽으로 부엌이 나 있는데 열려진 쪽문으로 들여다보면 치우지 않은 밥상에 온종일 파리 떼가 진을 치고 있었다. (p.12-13)

 

어머니는 교실 안에 나를 밀어넣으면서 나지막하게 당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울면 안돼. 어머니는 교실 밖에서 나를 지켰고 나는 가끔가다 겁에 질린 시선으로 어머니의 눈길을 붙잡으려고 애썼다. 어머니는 참빗으로 매끈하게 빗어 넘긴 쪽머리를 교실 쪽으로 향하고 밖을 보다가 이내 내 눈길을 알아채고 고개를 돌렸다. 햇빛을 받아 치약처럼 희게 보이던 은비녀의 광택은 한순간 내 눈을 부시게 했지만 어머니는 거기에 있었다.

하지만 새집으로 이사온 뒤 상황은 달라졌다. 나는 이제 어린애가 아니었다. 세월의 때로 녹이 슬어 불그죽죽해진 침목을 하나하나 세어 가면서, 나 모르게 속력을 내고 있는 하행선 열차가 따라오고 있지나 않은지 살펴가며, 끝도 없이 길게 누워 있는 두 줄의 레일을 따라 걷는 등굣길은 내가 최초로 만난 자립의 길이었고 그래서 더욱 공포의 길이었다.

교문을 나서면 뜀박질로 단숨에 뛰어갈 거리에 집을 두고 있지 않은 나는 그동안 애써 가라앉혔던 눈물샘을 다시 왕성하게 일구었다. 치약처럼 희게 빛나던 어머니의 은비녀를 보려면 침목을 수천 개씩 밟아서 가야 했고 그 거리만큼의 약점을 짊어진 나는 걸핏하면 울었다. 지우개를 빼앗기고 울었으며 뒷자리 애가 잡아당기는 머리칼 때문에 울었다.

열흘쯤 지나 새 학교로 전학을 한 뒤에도 별로 달라진 것은 없었다. 다만 혼자 숨어서 울어야 했다는 것 외엔, 지우개를 빼앗아 가는 아이도 없었고 머리칼을 잡아당기는 아이도 없었다. 1학년 1학기를 거의 마칠 무렵이었던 아이들은 벌써 자기들끼리 똘똘 뭉쳐져 있었다. 머리칼이라도 잡아당겨 주었더라면. 이유도 없이 무조건 울 수는 없었다. 울 기회도 주지 않는 새 학교 역시 나는 싫었다.

공부에 취미가 붙으면 학교생활이 재밌어질 것이라는 큰오빠의 의견에 따라 새집에 이사 온 뒤 나는 꼼짝도 못하고 밤낮으로 글자를 깨우치고 읽기를 배웠다. 낮에는 주로 어머니가, 밤에는 오빠들이 맹렬하게 공부를 강요한 결과 2학기에 올라가기도 전에 나는 이미 지성적인, 혹은 인간의 본질 따위의 말까지도 익혔다. 다섯이나 되는 오빠들이 중구난방으로 학습교재를 선택해 이것저것 가르쳐준 결과였다.

그것으로 나는 만화 보는 법을 터득했다. 주로 3, 4학년들 틈에 끼어 만화를 보면서 나머지 글자들은 저절로 깨우쳤다. 십 원짜리 동전 하나만 생기면 몇 시간이고 어두컴컴한 만화가게에 틀어박혀 있었다. 그때 처음으로 엄희자를 발견했고 김세종을 알았다. 특히 엄희자 만화의 그 매력적인 발레리나들은 나를 매료시켰다. 그 당시 나의 꿈은 엄마 없는 아름다운 소녀 발레리나였다.

만화에의 탐닉은 2학년이 되어서도 여전했다. 그 시절의 만화는 언제나 연작이었다. 일주일쯤의 간격으로 2편 3편 4편이 나오고, 인기가 있다 싶으면 제2부 1편으로 끝없이 이어졌다. 나는 언제나 누구의 무슨 만화 몇 편이 오늘쯤 나올 텐데 하는 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했다.

만화가게에서 자주 부딪치던 은자가 찐빵집 딸임을 알고 놀라기도 했고, 열둘 살이나 된 아이가 여태껏 3학년이라는 데 두 번씩 놀란 것도 그 무렵이었다. 한동네 아이를 몰라볼 만큼 나는 만화 이외의 것에는 관심을 두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은자하고 단짝이 되어 놀기 시작한 것은 그러고도 얼마쯤 지난 후였다. 완연한 봄기운에 모두들 겉옷들을 벗어던지던 3월 중순쯤의 어느 날이었다. 나는 식구들과 함께 저녁밥을 먹고 있었다. 그 무렵 어머니는 혼자 고생하는 큰오빠를 위해 대청에 방을 들여서 어른 하숙생을 두고 있었다. 늦게 들어오던 하숙생 아저씨 하나가 밖에 친구가 와 있다고 일러주었다. 나는 오빠들에게 뺏기지 않으려고 내 밥그릇 위에 얹어둔 고등어토막을 못 미더워하며 젓가락을 든 채로 대문 밖에 나가보았다.

어둠 속에 서 있는 아이는 은자였다. 뜻밖이었다. 그때까진 가끔 얼구이 마주치면 씩 웃고 마는 사이엿으니까. 그애가 소곤거렸다. 나 돈이 생겼어. 만화 보러 가자. 그애의 몸에선 찐빵 냄새가 풍겨왔다. 입에서도 만두 속의 돼지고기 냄새가 났다. 만화라면 사양할 내가 아니었다. 나는 잠자코 그애의 뒤를 따랐다.

철길을 건너 주욱 올라가면 새로 생긴 만화가게가 하나 있었다. 우리는 텅 비어 있는 만화가게에 들어가서 보고 싶은 만큼 책을 골라 오른편에 높이 쌓아 두었다. 젓가락은 주머니에 찔러넣고서.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오른편 쪽 만화가 거지반 왼쪽으로 옮겨져 갔고 지폐를 내보이며 은자는 또 만화를 골랐다. 그때 하품을 삼키며 주인 남자가 말했다.

"얘들아, 내일 와서 보렴. 이제 곧 사이렌 불 텐데...."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12시 10분 전이었다. 주머니 속에서 젓가락 한 짝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밥그릇에 얹어놓고 나온 고등어토막이 생겨났고 어머니의 화난 얼굴이 떠올랐다. 아버지 없는 자식이라는 손가락을 제일 겁내하는 어머니는 엄할 땐 담임선생님보다 무서웠다. 내 얼굴은 하얗게 질려갔다. 12시 10분 전은커녕, 밤 9시까지라도 거리에 있어본 적이 없었던 때였다.

바들바들 떨며 거리로 나와 보니 세상은 이미 암흑이었다. 저 멀리 철길이 보이고 백열구를 환히 밝힌 건널목 망대 옆에 어머니가 서 있었다. 나는 숨을 헉 들이마셨다. 피가 맺히도록 맞아야 할 종아리보다는 어머니의 화난 얼굴이 더 무서웠다. 둘째오빠는 손으로 나팔을 만들어 내 이름을 불러대고 있었다. 그제서야 나는 은자가 생겨났다. 그애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내 곁에 있었다. 그애네 집도 진작 어둠에 싸여버렸지만 아무도 그애를 찾아 나서지는 않았다. 그애 또한 얼마든지 태평스런 얼굴이었다.

이만큼 늦은 밤에 귀가해도 걱정하지 않는 아이, 종아리를 맞거나 꾸지람을 들을 필요가 없는 아이, 나는 은자가 정녕코 위대하게 보였다. 그애는 열두 쌀짜리 거인이었다. 이윽고 통금을 알리는 사이렌이 울렸다. 사이렌 소리에 놀란 나는 울먹이는 소리를 내지르며 어머니에게 뛰어갔다. 어머니에게 끌려가면서 문득 뒤돌아보니 은자는 그때까지도 그림자처럼 우두커니 서서 돌아가는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어둠 속에 홀로 남아 내 뒤를 지켜주던 은자의 모습은 나를 압도했고 그날부터 나는 맹목적으로 그애의 추종자가 되었다. (p.14-18)

 

그애의 꿈은 가수였다. 겨우내 입었던 보푸라기 투성이의 곤색 스웨터에 제 언니가 물려준 여학교 교복 바지를 입은 은자의 키는 유달리 커 보였다. 청중은 하나였지만 노래는 심각했다. 그대 나를 버어리고 어느님에에 품에 갔나. 가슴에 상처어 잊을 길 없네. 그애여어, 이 밤도 나는 목메어 우네...어디서 보았는지 눈은 살풋이 내리깔고 두 손을 가슴에 묻었다, 뺨에 대었다 하는품이 영락없이 진짜 가수 같았다.

"가수가 되려면 말야, 날마다 목청을 닦아야 된다구. 라디오에 나오는 노래라면 난 뭐든지 부를 수 있단다. 가수가 되어 돈을 벌면 최고로 예쁜 옷만 골라 입을 거야. 눈썹도 이렇게 그릴 거고..."

눈썹 그리는 흉내를 낸다고 팔을 쳐들면 터진 겨드랑이 틈새로 땟국물 흐르는 내복이 보였다.

"어떻게 하면 빨리 가수가 될 수 있지?"

나는 어서 빨리 은자가 가수가 되어 엄희자 만화에 나오는 발레리나처럼 멋진 옷을 입고 있는 모습이 보고 싶어 침을 꿀꺽 삼켰다.. 그대여, 이 밤도 나는 목메어 우네를 부르는 은자의 음성은 너무나 슬프고 가슴아팠으므로 그애가 가수가 되는 일은 시간 문제라는 생각이었다.

"빽이 있어야 돼. 빽만 잘 잡으면 난 내일이라도 가수가 되어 라디오에 나갈 거야."

그애가 어찌가 강렬한 밞음으로 '빽'이라고 말했던지, 지금도 나는 그 목소리를 기억할 수 있었다. (p.18-19)

 

은자는 별반 달라진 게 없는 것처럼 보였다. 집에 들어가기를 싫어하는 게 조금 더 심해졌을 뿐, 아버지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내가 조심스레 그날 어디에 갔었느냐고 물었을 때 그애는 히죽이 웃기까지 했다.

"라디오 방송국에 갔었어. 서울에서 가수들이 많이 내려왔다구. 공개 방송을 했단 말야."

은자로서는 아버지가 죽었다는 사실보다 가수들을 많이 만나본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나는 이해할 수 있었다. 누구든 나처럼 그애의 노래를 수백 번씩 들어볼 수 있었다면 아마도 이해할 수 있으리라. 은자에겐 노래 이상으로 소중한 것은 없었다. 그애가 나를 친구로 만든 것도 따지고 보면 노래 때문이었다. 그애는 청중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기로는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내가 필요했다. 다른 아이들은 그애가 도둑년이라는 사실을 들어 벌레 보듯이 피해 다녔으니까. (p.27-28)

 

정말이지 그 무렵엔 꿈도 많았다. 그것도 모두 악몽이었다. 높은 산꼭대기에서 구름에 밀려 툭 떨어지기도 하고, 학교 변소에서 보았다는 달걀귀신이 꿈속에 나타나 붉은 종이를 흔들기도 했다. 아침에 일어나 꿈 이야기를 하면 어머니는 못된 애와 어울려 다니느라고 마귀가 틈탄 것이라 말했다. 어머니는 내가 주일학교에 열성이지 않은 것도 모두 마귀 탓이라고 힐난했다.

더 이상 마귀와 어울려 다닌다면 마지막 심판날, 하늘이 내리는 불과 유황에 휩싸여 지옥으로 떨어지게 될 거라고 무서운 경고도 서슴치 않았다. 지옥으로 떨어지는 나를 구할 수 있는 어떤 힘도 어머니에게는 없다고 했다. 천국으로 가는 사다리는 단 한 사람씩밖에 매달릴 수 없다는 사실과, 어머니의 사다리는 어머니의 혼자만의 것임을 알게 된 나는 더더욱 두려웠다. 어머니가 들려주는 지황의 유황불과 천국의 사다리 때문에라도 나는 밤마다 악몽을 꾸지 않을 수 없었다.

신문쟁이 최씨는 어머니와는 다른 견해를 갖고 있었다. 내 또래 아이들은 모두 자라기 위해 그런 꿈을 꾼다는 것이었다. 꿈을 꿀 때마다 손가락 한 마디만큼씩 키가 클 것이라고 나를 위로했다. 나는 최씨 아저씨가 대단히 유식한 사람이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말을 믿으려 애썼다. 최씨는 저녁밥상에서 종종 그날치의 신문을 읽어주곤 했는데, 그 무렵엔 주로 새 대통령이 선출될 거라는 내용이 많았다. 창고지기 주씨는 일자무식을 감추기 위해 가장 열심히 그의 이야기를 들었고 제법 질문도 많았다.

"투표를 하겠구만그랴, 암. 투표를 해야 하구말구."

주씨의 고개가 끄덕여지면 최씨는 신바람이 나서 선거법을 설명했다. 최씨는 모든 것을 신문에서 배웠고, 신문에 나오지 않는 이야기는 절대 믿지 않았다. 그가 제일 존경하는 인물은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이었는데 혼자 존경하는 것만으로는 모자라 오빠들이 주씨에게도 그를 존경하도록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했다. 그 설득력 또한 대단해서 막내오빠는 학교에서 존경하는 위인을 조사할 때 케네디를 써냈다고 했다. (p.29-30)

(같이 읽으면 좋은 책)

존 에프 케네디의 위대한 협상 - 제프리 삭스 (이종인 옮김, 21세기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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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에서 이긴 새 대통령 이야기로 꽃을 피우던 무렵이었다. 여름에 있었던 끔찍한 살인사건도 슬몃 잊혀져가는 판에, 갑자기 젊은 간수가 망대 안에 앉아 있다가 달려든 경찰들에게 묶여 갔다. 온 동네 사람들이 다 몰려나와 살인범을 바라보며 치를 떨었다. 파리 목숨 해치듯,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죽인 살인마 고재봉이나 꼭 같은 놈이라고 혀를 내둘렀다. 경찰들이 달려들어 수갑을 채울 때 발악하듯이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는 누군가의 말에 사람들은 또 한 번 치를 떨었다.

"그 자식은 사람도 아니예요! 자기 딸을 팔아먹었다구요. 돈에 환장해서 자기 딸을 팔아먹었다구요!"

어머니는 말했다. 시집갈 나이에 있는 딸을 다방에 팔아먹은 애비나, 장인 될 사람을 죽인 간수나 모두 지옥의 유황불에 떨어질 것이라고.

우리들은 한동안 고재봉과 젊은 간수에 대한 이야기로 시간을 보냈다. 달걀귀신이 주는 막연한 공포에 비해 살인범에 관한 이야기는 며칠을 계속해도 언제나 새롭고 소름이 돋았다.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이, 나와 이야기를 나누던 사람이 살인범이란 사실은 오래도록 내 머리에 남아 악몽으로 되풀이되풀이 살아남았다.

그리고 연달아서 은자가 도망을 간 사건이 일어났다. 집에 있는 쓸 만한 것들을 모두 챙겨 서울로 야반도주 한 그 애는 가수가 되어 성공하면 돌아오겠다는 쪽지를 남겼다. 그애가 불러주던 <검은 상처의 블루스>는 영영 들을 길이 없게 되고 말았다. 그대여...이 밤도 나는 목메어 우네. 그애 또한 어디선가 목메어 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 또한 목이 메어 몇 날을 침울하게 보내야만 했다. 아마 그애는 가수로 성공할 것이었다. 나는 믿었다. 그러나 그 믿음이 내 우울을 구원해주지는 못했다.

그 가을엔 나쁜 일만 일어났던 건 아니었다. 홀어머니와 함께 다섯 동생을 부양했던 큰오빠가 결혼을 했던 것이다. 우리는 학교에서 조퇴를 맡아가지고 신바람이 나서 식장으로 달려갔다. 흰 면사포를 쓴 아름다운 신부는 수숫대 사이로 우리를 지켜보던 분홍 저고리의 처녀였다.

새 식구가 하나 들어옴으로 해서 어머니는 방을 비우기 위해 하숙생들을 내보내기로 했다. 대신 오빠들과 같은 방을 쓸 수 있는 또래의 남학생들을 들이기로 결정을 보았다.

창고지기 주씨는 어차피 창고지기에서 목이 달아나 시골로 내려갈 판이었다. 신문쟁이 최씨는 묵은 신문철을 싸들고 다른 집으로 떠났다. 신문쟁이 최씨가 떠나자마자 그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었던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이 피살되었다는 이야기가 오빠들이 모인 자리에서 분분히 오가고 있었다.

그 가을을 보내면서도 나는 은자가 돌아오리라는 기대를 버리지않고 있었다. 낯선 간수가 지키고 있는 망대 안을 들여다보거나, 노인네들이 모여앉아 해바라기를 하고 있는 공터의 풀밭을 지날 때마다 나는 은자의 노래를 떠올렸다.

그러나 겨울이 가고 봄이 왔을 때도 은자는 돌아오지 않았다. 은자 어머니는 다시 찐빵가게를 열었다. 그애가 가수가 되었다고 일러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소식이나마 알고 있는 사람조차 아무도 없었다.

철로변 둑길에 어린 쑥들이 푸르게 솟아나던 봄날, 나는 3학년이 되었다. (p.34-36)

 

<작품해설>

1. 유황불의 의미

이 글의 서술자로 등장하는 초등학교 2학년인 어린 소녀는 교회를 다니는 엄마로부터 유황불 이야기를 듣고 자랍니다. 마귀의 유혹에 굴복하여 악의 소굴에 빠지는 사람은 죽어서 유황불이 이글거리는 지옥에 가게 된다는 수없는 경고를 엄마에게 들으며 유황불은 절대적인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으로 각인됩니다.

그런데 어린 시절 겪은 여러 경험으로 말미암아 유황불이 이글거리는 무서운 곳은 나쁜 사람이 죽어서 만나는 지옥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어두운 현실임을 알게 됩니다. 서술자는 자신의 어린 시절 친구였던 은자의 노래를 들으며 세상을 배우고, 큰오빠의 헌신과 가족들의 단결로 어려운 생활을 꿋꿋하게 이겨나갑니다. 그러나 은자 주변을 둘러싸고 일어났던 비극적인 사건들로 인해 이 세상이 지옥만큼 두렵고 혼란스럽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2. 두 세계

서술자의 어머니는 파리 떼가 들끓는 찐빵가게에서 비듬도 털지 않고 만두를 빚던 은자네 가족들을 마귀라고 부릅니다. 저녁이면 날마다 술을 마시고 아내를 때리던 은자 아버지나, 부모 몰래 돈을 훔쳐 만화를 보는 은자는 모두 마귀가 유혹하는 삶을 살고 있다고 보는 것이죠. 그러던 중 은자네 아버지는 딸을 다방에 레지로 팔아넘겼다는 이유로 사위가 될 뻔한 간수에게 살해당하고 맙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죽은 와중에도 은자는 가수 구경을 가고 노래자랑을 나갑니다. 이런 비극적인 현실이 유황불이 이글거리는 어둠의 세계라면 어머니는 이를 종교적으로 초월하고 도피하여 살고 있는 세계로 나타납니다. 이 두 세계 중 서술자가 살아가야 하는 세상은 은자가 속해 있는 어둠의 세계입니다. 친구인 은자와 헤어진다고 해서 혼탁한 어둠의 세계를 피해갈 수는 없습니다. 세상은 이미 부조리와 폭력이 난무하는 어둠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소설을 자세히 읽어보면 혼란스럽고 힘든 세상을 꿋꿋하게 헤치고 나아가는 것이 중요한 삶의 문제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3. 철길

서술자는 전학을 오면서 철길을 따라 등하교를 하게 됩니다. 오래된 침목의 개수를 세며 집으로 돌아오고, 봄이면 그 옆에서 자란 쑥과 냉이를 캡니다. 이 철길은 작품 속에서 서술자가 만난 최초의 '자립과 공포의 길'로 나타납니다. 사람은 나이가 들어가면 조금씩 세상 속으로 발을 옮겨야 하고 그 안에서 세상의 어둠과 싸워가며 자신을 키우는 고달프고도 숙명적인 여정을 시작해야 합니다. 이 글에서 철도는 엄마의 보호 아래 살고 있던 서술자가 자신이 알지 못한 세상으로 나아가 만나게 되는 최초의 길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외로움과 두려움에 떨며 인생의 여정이 끝없이 이어진 철도를 빨고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4. 은자가 부르는 노래의 의미

은자는 성장환경이 좋지 않습니다. 앞서 지적했듯이 파리떼가 우글거리는 찐빵가게에서 세상의 어둠에 익숙해져 있는 아이입니다. '열두 살짜리 거인', '어른처럼' 이 세상에 대해 알 것을 어지간히 알아버린 은자는 자신의 가게에서 돈을 훔칠 줄도 알고, 자신의 간절한 꿈인 가수로 성장하려면 무엇보다 '빽'이 있어야 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은자는 아버지의 죽음 이후 가출하여 세상의 혼란과 어둠 속으로 한 발자국 더 깊이 들어갑니다. 이때 어둠 속에 홀로 놓인 은자가 가진 것은 오로지 노래밖에 없습니다. 여기에서 은자의 노래는 자신의 상처를 달래주는 위안이자 포기할 수 없는 삶의 희망으로 나타납니다. 은자가 즐겨 불렀던 '검은 상처의 블루스"라는 노래 또한 은자의 비극적인 아픔을 감싸고 위로하는 안식처요, 희망이었던 것입니다.

5. 희망

양귀자의 유년 시절의 체험이 그대로 드러난 이 작품은 제목이 말해주듯이 혼란과 두려움의 색채가 진하게 깔려 있습니다. 죽음과 홍수, 살인과 도피란 단어로 얼룩진 현실의 삶은 비극적일 수밖에 없지만, 그 속에서도 희망의 싹은 자라납니다. 추석날 성묘를 가는 길에 큰오빠는 분홍 치마 저고리를 입은 색시와 연애를 하고 사랑의 결실로 결혼을 합니다. 친구인 은자도 자신의 꿈을 찾아 떠나갑니다. 이러한 자연들은 현실의 어둠 속에서도 굴복되지 않는 미래의 꿈을 보여줍니다. 이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 씌어진 '철로변 둑길에 어린 쑥들이 푸지게 솟아나던 봄날, 나는 3학년이 되었다'는 내용도 어려운 시간들을 보내고 한결 성숙해져 있는 서술자의 모습을 연상케 함으로써 혼란스러운 경험이 단순한 비극으로 끝\나지 않고 세상의 어둠을 응시하고 미래를 향해 한걸음 나아가는 의미를 담아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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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귀자(梁貴子, 1955년 7월 17일 ~ )

대한민국의 소설가이다.

1955년 전북 전주에서 태어났고 원광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1978년에 『다시 시작하는 아침』으로 [문학사상] 신인상을 수상하면서 문단에 등장한 후, 창작집 『귀머거리새』와 『원미동 사람들』을 출간, “단편 문학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다”는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았다. 1990년대 들어서 양귀자는 장편소설에 주력했다. 한때 출판계에 퍼져있던 ‘양귀자 3년 주기설’이 말해주듯 『희망』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천년의 사랑』 『모순』 등을 3년 간격으로 펴내며 동시대 최고의 베스트셀러 작가로 부상했다. 탁월한 문장력과 놀라울 만큼 정교한 소설적 구성으로 문학성을 담보해내는 양귀자의 소설적 재능은 단편과 장편을 포함, 가장 잘 읽히는 작가로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소설집으로, 『귀머거리새』 『원미동 사람들』 『지구를 색칠하는 페인트공』 『길모퉁이에서 만난 사람』 『슬픔도 힘이 된다』를, 장편소설 『희망』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천년의 사랑』 『모순』을, 산문집 『내 집 창밖에서 누군가 울고 있다』 『삶의 묘약』 『양귀자의 엄마노릇 마흔일곱 가지』 『부엌신』 등이 있으며 장편동화 『누리야 누리야』가 있다. 1987년 『원미동 사람들』로 [유주현문학상]을, 1992년 『숨은 꽃』으로 [이상문학상]을, 1996년 『곰 이야기』로 [현대문학상]을, 1999년 『늪』으로 [21세기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주요 작품>
《귀머거리새》 (1985)
《원미동 사람들》 (1987)
《지구를 색칠하는 페인트공》 (1989)
《희망》 (1990)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1992)
《슬픔도 힘이 된다》 (1993)
《길 모퉁이에서 만난 사람》 (1993)
《천년의 사랑》 (1995)
《엄마노릇 마흔일곱 가지》(1995)
《비 오는 날이면 가리봉동에 가야 한다》(1995)
《모순》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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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 양귀자 (쓰다)

원미동 사람들 - 양귀자 (쓰다)

희망 - 양귀자 (쓰다)

 귀머거리새 - 양귀자 (책세상)

숨은꽃 - 양귀자 (문학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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