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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
I. 한국 문학/2. 소설

잔인한 도시 - 이청준 (열림원)

by handaikhan 2023. 4. 24.

열림원 논술 한국문학 4

 

목차

병신과 머저리
매잡이
소문의 벽
잔인한 도시
서편제
눈길
침몰선

생애와 문학 - 인간과 현실을 향한 쉼 없는 탐구
논술

.........................................................

이청준 - 잔인한 도시 (1977년)

 

 날씨가 제법 싸늘해지기 시작한 어느 가을날 해질녘 그 사내가 문득 교도소 길목을 조그많게 걸어나왔다.

그것은 좀 희한한 일이 아니었다. 근래엔 좀처럼 볼 수 없던 일이었다.

교도소는 도시의 서북쪽 일각, 벚나무와 오리나무들이 무질서하게 조림된 공언 숲의 아래쪽에 있었다. 그리고 그 무질서한 인조림이 끝나고 잇는 공원 입구께에서 2백 미터 남짓한 교도소 길목이 꺾여들고 있었다. 공원 입구에선 교도소 길목과 높고 음침스런 소내 건물들을 제 손바닥 들여다보듯 한눈에 모두 내려다볼 수 있었다. 교도소 길목을 오르내리는 것이면 강아지 한 마리도 움직임이 빤했다.

하지만 그 길목은 언제부턴가 사람의 눈길을 끌 만한 움직임이 끊어진 지 오래였다. 교도소와 관련하여 길목을 오르내리는 사람의 모습을 거의 볼 수 없었다. 그것도 교도소를 새로 들어가는 쪽보다는 몸이 풀려 나오는 쪽이 더욱 그랬다. 교도소를 새로 들어가는 쪽가지 끊겨 사라졌을 리가 없었지만, 그쪽은 언제나 철망을 친 차편을 이용하고 있는 터여서 그것마저 ㄲ미새가 늘 분명칠 못했다. 그야 교도소 직원들이나 인근 주민들이 이따금 그 길목을 지나다니는 건 눈에 띄었다. 하지만 그건 물론 이 길목에서 특별히 사람의 눈길을 끌 만한 움직임이 못 되었다. 이 길목에서 사람의 주의를 끌 움직임이란 역시 형기를 끝냈거나 당국의 사면으로 몸이 풀려나오는 출소자들의 그것일 수밖에 없었다.

한데 어찌된 영문인지 이 몇 해 동안 교도소 수감자들 가운데서 몸이 풀려나 그 길을 걸어나온 사람이 없었다. 교도소 안엔 이미 내보낼 죄수가 아무도 없거나, 그곳엔 아예 종신형의 죄수들만 수감되고 있는 게 아닌가 의심이 될 지경이었다. 교도소의 출감자가 언제 마지막으로 그 길을 걸어나갔던가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조차 거의 없었다. 아마 이 교도소의 교도관들조차도 그 행운의 출감자를 내보내기 위해 언제 마지막으로 교도소의 철문을 열었던가를 더듬어낼 수 있는 소상한 기억력의 소유자는 흔치 않을 터이었다.

출감자의 모습이 끊어진 것만도 아니었다. 교도소를 나오는 출감자들의 발길이 뜸해지기 시작한 다음에도 길목은 한동안 재소자 면회를 찾아온 사람들의 발길로 인적이 심심치 않았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는 그 면회객들의 발길조차 이 길목에서 깨끗이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교도소 길은 이제 오랜 정적 속에 망각의 길목으로 변했고, 그 길목을 걸어나오는 출감자나 면회객들의 발길이 끊어지고 있는 시간만큼 교도소와 교도소 수감자들의 존재도 바깥 세상에선 까마득히 잊혀졌다.

하지만 그동안 교도소 사람들의 출퇴근 행사는 어김없이 계속되었고, 밤이면 높다란 감시탑의 탐조등 불빛들도 그 확고부동한 기능을 충실히 발휘했다. 그건 이를테면 그 깊은 세상 사람들의 망각 속에서도 교도소의 존재와 기능은 여전히 엄존하고 있다는 가차없는 증거였다.

그러다 이날 저녁 사내가 마침내 그 길목을 다시 걸어나온 것이다.

교도소는 과연 죄수가 없는 유령의 집으로 변한 것이 아니었다. 종신형 수형자들만 수감되고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이날 저녁 사내가 그 길목을 걸어나온 것은 바로 그런 의문들에 대한 가장 확실한 대답인 셈이었다.

사내의 뜻하지 않은 출감은 그러니까 교도소와 교도소 길목에선 그만큼 오랜만의 일이었고 그만큼 눈길을 끄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 길을 걸어나오고 있는 사내 자신의 표정엔 막상 어떤 새삼스런 감회나 즐거움의 빛 같은 것이 전혀 엿보이지 않고 있었다. (p.272-274)

 

그리고 마침내 오정 때가 가까워지면 한동안 손님의 발길이 뜸해질 기미가 보이자, 그는 그 모든 손님들의 즐거움 대신 진짜 자신의 즐거움을 만들고 싶은 듯, 그리고 그 즐거움을 아끼고 싶은 시간을 더 이상 참고 기다릴 수가 없는 듯 이번에도 그 공원 흙바닥에서 주워 모은 동전닢으로 자신의 새를 사러 나섰다.

"예 있소. 내게도 한 마리 내어주시오. 오늘도 날개값은 좀 모자란 것 같소마는..."

동전 움큼을 내밀고 나서는 사내의 표정은 이제 흡사 약값이 모자란 아편 중독자의 그것처럼 뻔뻔스럽고도 간절한 애원기 같은 것이 어려 있었다. 

가겟집 젊은이는 아무래도 좀 어이가 없어진 듯 사내를 새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사내는 그 젊은이 앞에 16개의 동전을 또박또박 정확히 세어 건네주고 나서 일방적으로 혼자 흥정을 끝내버렸다. 그리고 젊은이가 말없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새장을 끌어내려 신중하고도 알뜰한 동작으로 안의 녀석을 숲으로 내보냈다.

사내가 그렇게 새를 내보내고 나서도 뭔가 아직 아쉬움이 남은 눈길로 녀석이 사라져간 공원 숲 쪽을 응시하고 있을 때였다.

"노인장은 도대체..."

사내의 모습을 못내 딱해하는 눈초리로 바라보던 젊은이가 갑자기 새장수답지 않은 소리를 해왔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런 부질없는 짓을 하시는지 모르겠군요."

사내는 그러자 비로소 젊은이 쪽으로 몸을 돌이키며 무슨 변변치 못한 짓이라도 하다 들킨 사람처럼 쑥스럽게 웃어 보였다.

"그야, 내가 그렇게 하고 싶으니까....가막솔 나올 땐 언제나 그랬다오.."

"하지만 노인장은 어제도 새를 한 마리 사 보내주지 않았습니까."

공손한 말투와는 다르게 젊은이는 필경 어떤 경멸기를 숨기고 있음에 틀림없는 소리로 사내를 계속 추궁하고 들었다.

하지만 사내는 젊은이가 그런 식으로나마 그를 상대해주고 있는 것이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그는 점점 더 말씨가 의기양양해지고 있었다.

"그야 어저께도 물론 한 마릴 내보내주었지요. 하지만 그건 내 몫이었으니까. 오늘 사준 건 내 몫이 아니라오. 오늘은 송면장 대신으로 위인의 새를 한 마리 사준 거라오."

"송면장이라뇨?"

"아, 한방에 있던 내 친구 말이오. 예전에 저곳을 들어오기 전에 자기 고을 면장을 지낸 작가로 지금은 그 시절 얘길 자주 자랑하곤 하는 위인이지요. 벽돌집만 나가면 지금도 누구 부럽지 않게 살아갈 집과 재산이 있노라..."

"그런데 노인장이 어째서 그분의 새를 대신 삽니까?"

"그야 그치가 누구보다 몹시 날개를 사고 싶어했으니까. 가막소에 있는 위인들은 누구나 그렇게 한 번씩 날개를 사고 싶어한다오. 그러면서 그 날개를 사게 될 날만을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꼴들이지요. 그중에도 그 송면장이란 영감태긴 유난히 더 그걸 기다렸어요. 하지만 처지가 어디 그렇게 맘대로 됩니까? 그래 내가 위인 대신 새를 한 마리 사준 거지요."

"안에선 아직들 새 이야기를 하십니까?"

"하다마다요. 우린 대개 날개를 한 번씩 사본 경험들이 있는 위인들이니까. 누구나 새 이야길 하면서 새를 사게 될 날들을 기다리고 있지요. 안에선 바로 새를 산다고 하지 않고 언제부터선가 그저 날개를 산다고들 하지만 말이오..."

"새를 사고 싶은 사람은 그토록 많은데, 그렇담 교도솔 나오는 사람들은 어째서 전혀 볼 수가 없지요? 왜 그분들은 노인장처럼 이렇게 교도솔 나오지 못하고 있지요?"

젊은이는 문득 앞뒤가 안 맞는 소리를 사내에게 묻고 있었다. 수감자들이 감옥을 나오지 못하는 것이 마치 그 수감자들의 책임이라도 되는 것처럼, 또는 그 수감자들이 원하기만 한다면, 감옥이란 언제나 문을 열고 나올 수 있는 곳이라도 되는 것처럼.

하지만 사내는 경우가 뒤바뀐 젊은이의 물음에 조금도 기분을 상해하지 않았다.

"그건 아마도.."

사내는 마치 자신이 그 이유를 알고 있는 것처럼 진지한 표정이 되었다.

"그건 아마도 연락들이 잘 닿질 않아서 그리 된 걸 거외다. 편지들이 영 집까지 들어가질 못한 모양들이에요. 우린 누구나 자기 형기의 반 이상을 넘긴 사람들이라오. 그리고 그 형기의 반을 넘길 무렵이 되면서부터 우리는 누구나 열심히 편지들을 쓰기 시작하지요. 알다시피 우리는 모두 고향이 있고 가족이 있는 몸들이니까. 글쎄, 젊은인 우리가 저 안에서 자기 고향과 가족들을 얼마나 서로 자랑들을 하고 지내는지 알기나 하겠소. 날 맞아가다우...난 이제 형기가 거의 끝나가고 있으니 날 맞아갈 준비를 서둘러다구...우리들 가운데 누군가가 그런 편지를 쓰게 되면 우리는 참으로 얼마나 그를 부러워했으며, 당사자는 또 얼마나 그걸 자랑스러워했는지..."

"그럼, 집에서들도 곧 연락이 오나요?"

"그건 모르지요."

"모르다니요?"

"뒷일에 대해선 별로 생각들을 안 하니까. 뒷일에 관심을 가지고 그걸 알아보려는 위인도 없구요."

"가족 중에 누가 서둘러주어서 가석방 같은 걸 얻어 나간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나요?"

"없었소."

"면회를 와준다거나 편지 연락 같은 거라도 닿은 일은 있었을 거 아닙니까?"

"그런 일은 없었어요. 가족이 누가 면회를 와준 일도, 편지 답장이 있었던 일도..하지만 우리는 망를 않는다오. 우리가 저 안에서 생각하고 행하는 일들이란 결과가 어떻게 되었든 그걸 거짓말이라고 여기려 드는 사람은 없어요.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니까 그걸 말할 필요도 없는 거요."

"...."

"하지만 우리도 한 가지는 알고 있다오. 우리가 보낸 편지가 번번이 고향에 있는 가족들의 손에까지 들어갈 수가 없다는 걸 말이오. 젊은인 잘 이해가 안 가겠지만 우리가 쓴 편지는 한 번도 고향의 가족에게 제대로 닿아본 일이 없었다오. 그래 일이 그리 된 겝니다...편지 연락이 안 닿으니 가족들도 우릴 잊어버리고들 있는 거지요."

"그래 노인장께서도 아드님에게 편지를 쓰셨나요? 그리고 노인장께선 용케도 그 아드님과 연락이 닿아서 그렇게 출옥을 해 나오신 건가요?"

젊은이는 그때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모처럼 목소리가 부드러워지고 있었다.

하지만 사내는 갈수록 점점 기가 죽어갔다. 그는 힘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오. 그야 나도 아들놈에게 편지를 자주 쓰기는 했지만...내 소식도 역시 아들놈에게까진 아직 닿질 못하고 있는 것 같구려."

"그럼 아드님하고 연락이 닿기도 전에 노인장은 형기가 끝나버린 겁니까?"

"아니, 형기가 다 끝난 건 아니오. 아늘돔의 소식만 기다리고 있을 수가 없어 내 힘으로 어떻게 가석방 특사를 얻어 나온 거요. 그것도 따지고 보면 다 아들 녀석 덕분인 게지요. 아들놈과 그 아들놈의 고향집이 없었더라면 난 이렇게 나올 수가 없었을 게요. 아들놈과 손주놈들이 보고 싶고, 집이 그리워지고...난 한동안 아들놈과 아들놈의 집에 대한 꿈만 꾸었다오. 탱자나무 울타리가 우거지고 집터가 시원하게 트이고 게다가 햇볕도 깊고..그래 난 아들놈과 소식이 안 닿더라도 내가 먼저 녀석을 찾아 나서기로 작정을 한 거라오."

아들과 고향집 이야기가 시작되자 사내의 목소리엔 점차 다시 생기가 되살아나고 있었다. 사내는 마음속으로 잠시 그 고향집과 아들 생각에 젖어드는 듯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야기를 계속했다.

"결국은 그 아들놈에 대한 믿음이 내게 저 가막소를 나오게 한 것이지요. 다른 녀석들은 아마 나처럼 아들놈에 대한 믿음이나 고향집에 대한 그리움들이 작았을 게요. 그러고는 감히 가막소를 나올 엄두들이 날 수가 없지요. 하지만 난 어쨌거나 이제 아들놈을 보게 됐어요. 녀석은 아마 이런 식으로 아비가 가막소를 나오게 만든 걸 몹시 가슴 아파하겠지만서두.."

"그럼 아드님은 아직 노인장의 출옥 소식도 모르고 있는데, 노인장께선 여기서 이렇게 무작정 그 아드님만을 기다리고 계실 참이신가요?"

젊은이의 얼굴엔 서서히 다시 그 차가운 조롱기 같은 것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야 나도 언제까지나 여기 이러고 녀석을 기다리고 있을 순 없지요. 아들 녀석이 끝내 나타나지 않는다면 내 발로 녀석을 찾아 나서야지...하지만 아직은 좀더 기다려봐야지요. 여태까지 소식이 닿지 못했더라도 금명간에 편지가 닿을 수도 있겠구. 녀석이 혹 소식을 받고 달려왔다가 길이라도 엇갈리는 날이면 녀석의 낭패가 얼마나 하겠소."

"노인장께선 그럼 가막소 친구분들을 위해 앞으로도 계속 새를 사실 참이신가요?"

젊은이는 이제 거의 사내를 놀려대고 있는 어조였다. 그의 그 매끈한 얼굴에 노골적인 비웃음기가 번지고 있었다.

사내 쪽도 이젠 대꾸가 몹시 궁색스런 처지로 몰리고 있었다. 그는 젊은이의 말에 얼핏 대꾸를 못하고 쩔쩔맸다. 하다간 이윽고 기가 훨씬 꺾여든 목소리로 어물어물 말끝을 흐리고 있었다.

"그야 살 수 있는 형편만 된다면....녀석들은 그토록 날개를 사고들 싶어했으니까..." (p.297-303)

 

이날 밤 공원 숲 속에선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사내는 이날 밤도 공원 숲 속의 한 나무 걸상 위에다 옹색한 잠자리를 마련하고 있었다. 그런데 자정이 지난 지도 한식경이 지난 새벽 2, 3시쯤 되어서였을까. 숲 속의 어디쯤에선가 심상찮은 인기척 같은 것이 들려왔다.

사내는 그 소리에 어슴푸레 잠결에서 깨어나 머리 위에 뒤집어쓰고 있던 야전잠바 자락을 밀어냈다. 한밤중에 웬 전깃불의 환한 빛줄기가 어두운 숲 속을 장대처럼 이리저리 훑고 있었다. 빛줄기는 때로 나뭇가지들의 한 곳에서 곧게 고정되고 한 사내의 그림자가 그때마다 나무 위로 올라가 빛줄기의 끝에서 열매를 따듯 잠든 새들을 집어내렸다. 잠결에 빛을 맞은 새들은 눈먼 장님처럼 옴짝달싹을 못했다. 날개를 퍼득여 날아보는 새들도 방향을 못 잡고 좌충우돌하였다. 나뭇가지에 부딪쳐 떨어지는 놈도 있었고 제물에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쳐 내리는 놈도 있었다.

그림자는 끊임없이 빛줄기를 들이대며 잠든 새들을 사냥하고 있었다.

기이하게 손쉬운 새의 사냥법이었다.

- 녀석들이 그렇게 다시들 돌아오곤 하였군.

사내는 저절로 탄성이 새어나왔다. 하지만 그 손쉬운 사냥법에 대한 사내의 감탄은 그리 긴 시간 계속될 수가 없었다.

조용한 어둠 속에 빛줄기가 너무 세찼기 때문이었을까. 한동안 숨을 죽인 채 어둠 속으로 그런 광경을 숨어 보고 있던 사내는 자기도 모르게 문득 가슴이 몹시 떨려오기 시작했다. 빛줄기가 까닭없이 두렵고, 빛줄기를 조종하고 있는 사내의 그림자가 무턱대고 무서워졌다. 아무래도 안 볼 것을 엿보고 있는 듯 사지마저 조그맣게 움츠러들고 있었다. 게다가 그 빛줄기는 이제 사내  쪽으로 자꾸만 가까이 거리를 좁혀 들고 있었다.

이유 같은 건 알 수 없었지만, 사내는 아무래도 그 빛의 임자에게 그의 사냥이 들키고 있다는 걸 알게 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그는 갈수록 두렵고 초조했다. 불빛이 그에게로 가까이 다가들수록 사내의 머리는 자꾸만 야전잠바 옷깃 속으로 깊이 움츠려 들어갔다.

그러나 전깃불의 눈길은 실수가 없었다. 빛줄기가 끝내는 사내의 머리통을 맞혀잡고 말았다. 동시에 사내의 머리통도 완전히 야전잠바 깃 속으로 모습을 숨겨 들어가버렸다.

하지만 한 번 사내를 붙잡은 빛줄기는 그를 좀처럼 떠나려 하지 않았다. 그 빛줄기가 그의 잠바자락을 뚫고 점점 세차게 젖어들어왔다. 사내는 숫제 잠바자락 속에서 눈을 감고 있었으나, 감은 눈꺼풀 위로도 빛이 스며들어왔다.

이윽고 굵다란 발걸음 소리가 천천히 그의 곁으로 다가들었다. 그리고 몇 걸음 저쪽에서 소리를 죽인 채 한동안 밝은 빛줄기만 쏘아붙이고 있었다.

사내는 잠바자락 속에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무서운 빛줄기의 세례를 견디고 있었다.

빛줄기는 잠바자락 속의 사내를 거의 질식 상태로 짓눌러놓은 다음에야 간신히 그에게서 걷혀나갔다. 그리고 곧 발걸음 소리가 방향을 바꾸며 그에게서 천천히 멀어져갔다.

하지만 사내는 이미 뱀의 눈빛에 쏘인 개구리 한가지였다. 그는 이제 발걸음 소리와 함께 어둠 속으로 사라져가는 사냥꾼의 뒷모습이나마 엿봐 두고 싶었지만, 실제론 그렇게 몸을 움직여 나설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는 그냥 그대로 야전잠바 옷자락 속에 눈을 감은 채 발걸음소리가 귓가에서 멀리 사라져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p.311-313)

 

어느 날 아침 가게가 잠깐 조용해진 틈을 타서 가겟집 젊은이가 문득 사내에게 말했다.

"제 기억으론 노인장이 가막소를 나온 지도 벌써 한 주일은 넘은 줄 아는데 아드님은 어째서 여태도 소식이 감감이지요?"

할일없이 날마다 가게 부근을 서성대며 장사 거래만 지켜보고 있는 사내의 거동이 젊은이에겐 그렇게 신경이 쓰이고 있었을까. 아니면 젊은이는 이제 새도 사주지 않는 사내의 존재로 하여 자기 장삿일에 실제로 어떤 곤란을 겪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젊은이가 이날부턴 갑자기 작전을 바꾸어 사내를 비웃기 시작한 것이다. 그건 보나마나 그의 가게 근처에서 사내를 멀리 쫓아버리기 위한 음흉스런 계교가 분명했다.

"뭣하면 다시 편지를 한 장 써볼 수도 있지 않겠어요. 아마 노인장의 편지가 아직도 아드님께 닿지 못한지도 모르니까 말입니다. 주소가 어떻게 되세요. 아드님의 시골집 주소가.."

젊은이는 사내가 새를 사주지 않는 데 대한 원망의 기색은 손톱만큼도 나타내지 않았다. 그는 될수록 사내가 난처해질 소리들만 골라 그를 괴롭게 몰아부쳤다. 그래 결국엔 사내 스스로가 견디지 못하고 가게를 떠나게 하려는 것이었다.

- 아드님을 기다리신답니다. 아드님이 시골에 궁전을 지어놓고 영감님을 모시러 오시는 중이랍니다.

그는 때로 새를 사러 들어온 손님을 상대로 해서까지 그렇게 무첨스럽게 사내를 비웃고 무안을 주었다.

- 어디 만큼 왔나, 고개만큼 왔지...영감님은 날마다 효자 꿈에 행복하시지요.

사내는 그러한 그런 젊은이의 비웃음을 아랑곳하는 기색마저 조금도 없었다. 그는 젊은이의 공박에 할 말이 전혀 없는 사람처럼 주위를 짐짓 외면해버리곤 하였다. 젊은이가 정 그를 못 견디게 하고 들 때면 차라리 위인의 얕은 소갈머리가 안됐다는 듯 한참씩 그를 건너다보다 혼자서 조용히 한숨을 짓고 말 뿐이었다.

하면서도 사내는 좀처럼 젊은이의 새 가게를 떠날 생각을 안 했다. 아니 그는 젊은이의 그런 버릇없는 공박 따위로 가게를 아주 떠나버릴 처지의 사람이 아니었다.

그에겐 아직도 할 일이 남아 있었다.

"녀석들에게 모두 새를 사야...그래도 녀석들에게 빠짐없이 모두 한 마리씩의 새를 살 수 있어야..."

사네는 혼자 속으로 중얼거리곤 하였다. 그는 아직도 가막소 안에 남아 잇는 친구들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 가엾은 친구들을 위해 새를 사지 않고 혼자서 이곳을 떠날 수는 없다고 몇 번씩 자신을 다짐했다. 그는 그저 지금 당장은 새를 사는 일이 달갑게 여겨지지가 않고 있을 뿐이었다. 새를 사더라도 전날처럼 즐겁거나 기분이 가벼워지지 못하고 있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사내는 그것도 그저 그 빌어먹을 잠자리의 악몽 때문일 거라 자신을 변명했다. 밤마다 그를 괴롭혀대고 있는 빛줄기의 꿈만 꾸지않게 되면 그는 다시 기분이 회복되어 새로 즐겁게 살 수 있으리라 자신을 기다렸다. 도대체가 새들이 낙엽처럼 빛을 맞고 떨어져내리는 악몽이 계속되는 동안, 그리고 그 빌어먹을 새들이 어째서 이 공원 숲을 떠나지 못하고 자꾸만 다시 조롱 속으로 돌아오는지, 그런 사연을 석연히 이해하지 못하고는 새를 다시 사고 싶은 생각이 일어 오질 않았다. 그건 마치 어린애들 숨바꼭질과도 같은 어리석은 장난일 뿐이었다. (p.319-321)

 

후루룩 - !

어둠 속 어느 방향으론가부터 느닷없이 사내의 잠바깃 속으로 날아와 박혀드는 것이 있었다. 담뱃불을 붙이려다 말고 사내는 자신도 모르게 흠칫 놀라 손에 든 성냥불부터 날쌔게 꺼 없앴다. 그러고는 재빨리 그의 가슴께 잠바깃 속으로 박혀든 물체를 더듬어냈다.

사내는 이내 물체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다름 아니라 그것은 방금 숲 속의 불빛에 쫓겨온 한 마리의 새였다. 부드럽고 따스한 감촉이 손에 닿을 때부터 사내는 벌써 그것을 알 수 있었다. 옷깃 밖으로 끌려나온 새는 두려움 때문인지 가슴이 몹시 팔딱거리고 있었다. 사내가 담뱃불을 붙이기 위해 옷자락에 성냥불을 켰을 때 녀석이 그 불빛을 보고 달려든 게 분명했다.

"빛에 쫓긴 녀석이 외려 또 불빛에 덤벼들다니....역시 새짐승이란..."

사내는 녀석의 분별없는 행동이 희한하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였다.

하지만 사내의 그런 생각이 오히려 오해였는지도 알 수 없었다.

사내는 잠시 녀석을 어떻게 해주어야 좋을지 생각했다. 녀석을 금세 그대로 놓아보낼 수는 없었다. 녀석은 몹시 겁을 먹고 있었다. 빛줄기에 쫓긴 녀석이 사내에게 또 한 번 놀라고 있었다. 놀란 녀석을 무작정 다시 어둠 속으로 달아나게 할 수는 없었다.

그는 녀석을 좀 안심을 시켜서 놓아주기로 작정했다.

그는 조심조심 녀석을 한쪽 손바닥 위로 올려놓고 다른 손으로 가볍게 등덜미를 누르고 있었다. 그렇게 한동안 숨소리마저 죽인 채 녀석이 동정을 기다렸다. 녀석은 별반 사내의 손아귀로부터 몸을 빼내려는 움직임이 없었다. 사내의 속마음을 아는지 녀석은 손아귀 속에서 한동안 가슴만 팔딱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녀석이 그 움직임이 전혀 없는 사내의 따스한 손바닥에 마음이 놓인 것일까. 녀석이 이윽고 작은 부리로 손바닥을 콕콕 쪼아대는 시늉을 해왔다. 그리고 마침낸 두 손바닥 사이로 조그만 머리를 내밀고 갸웃갸웃 조심스레 어둠 속을 살피기 시작했다.

사내는 이제 안심이 되었다. 이젠 녀석을 보내주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녀석이 놀라지 않도록 위쪽을 누르고 있던 손바닥을 가만히 떼어 내렸다.

그런데 그때 또 한 번 희한스런 일이 일어났다.

녀석이 사내의 손바닥 위에서 달아날 생각을 안 했다. 녀석은 마치 등뒤를 누르고 있던 손길이 걷혀간 것도 알아차리지 못한 듯 고갯짓만 계속 갸웃거리고 있었다.

사내는 갈수록 기이한 생각이 더했다. 사정이 그쯤 되고 보니 사내는 더욱 거동이 조심스러웠다. 녀석을 좀더 두고보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는 무작정 녀석을 기다렸다. 녀석이 좀더 안심이 될 때까지 끈질기게 자신을 견디었다. 조마조마하면서도 기이한 생각이 그를 그렇게 견딜 수 있게 하였다.

녀석은 마침내 완전히 안심이었다. 사내의 손바닥을 녀석은 마치 나뭇잎쯤으로나 여기는 모양이었다. 손바닥을 콕콕 쪼아대기도 하고 사내를 갸웃갸웃 건너다보기도 하면서, 손바닥을 떠날 생각이 조금도 없는 놈 같았다.

안 되겠다 싶었다. 사내는 한 번 더 녀석을 시험해보기로 하였다. 그는 녀석이 너무 놀라지 않도록 조심스런 잔기침 소리로 주의를 잠깐 건드려보았다.

하지만 녀석의 반응은 사내를 더욱더 어리둥절하게 하였다. 사내의 잔기침 소리에 녀석은 아닌게아니라 잠깐 동안 주의가 쓰이는 듯 꽁지를 간들간들 깐닥거리고 있더니, 이번에는 숫제 사내의 무릎께로 자리를 홀짝 내려앉았다.

사내는 차라리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이제 그것으로 그간에 일어난 모든 일들의 사연을 알 것 같았다. 녀석은 필시 사내와 미리부터 눈이 익었던 놈임에 분명했다. 그는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녀석이 처음부터 사내를 알아보고 그를 찾아든 게 분명해 보인 것이다.

"그래, 이 녀석아, 이제 알겠다...네놈은 필시 나한테서 날갤 얻어 숲으로 돌아온 녀석이 분명하렸다...."

사내는 다시 두 손으로 천천히 녀석을 곱게 싸안아 들었다. 그리고 마치 녀석 쪽에서도 그의 말뜻을 알아들을 수 있는 양 중얼중얼 혼자서 속삭여댔다.

"난 네놈의 믿음을 안다. 그래 우리는 이렇게 서로를 믿으며 한 가족이 되는 게지. 넌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지만. 저 아래 가겟집 젊은이 그 사람도 그렇겠구. 글쎄 너 같은 야생의 날짐승도 이렇게 벌써 믿음이 생기는데, 이 미욱한 인간은 여태까지 그래 네놈들이 이렇게 숲을 떠나지 못하는 간단한 이치조다 깨우치질 못했구나....."

숲 속을 휘저어대던 빛줄기는 어느새 산을 내려갔는지 주위가 온통 잠잠해져 있었다.

사내는 이윽고 다시 벤치 위로 천천히 몸을 뻗어 누우면서 녀석을 싸안은 그의 두 손을 소중스럽게 가슴 위로 얹었다. 그리곤 조용히 눈을 감은 채 손바닥 안에서 따뜻한 깃털을 부드럽게 꼼지락대고 있는 녀석에게 귓속말하듯 낮게 속삭였다.

"넌 오늘 밤 나하고 여기서 이렇게 함께 지내는 게 좋겠구나. 숨길이 좀 답답하긴 하겠지만, 그 대신 내가 춥게는 안 할 테다. 그야 내가 잠이 든 담에는 너 좋은 대로 하겠지만 말이다..." (p.322-325)

 

"그래, 난 오늘부터 다시 새를 살 요량을 세웠다오. 그야 그런 일은 아직도 저 가막소 안에 남아 있는 위인들에 대한 내 마음의 빚값으로 하는 일이기는 하지만, 그게 다 뉘 좋고 매부 좋고 한다는 일 아니겠소. 젊은인 새를 팔아 좋고 난 위인들의 소망을 풀어주고 좋고 새들은 날개를 얻어 좋고, 거기다 그렇게 서로가 진심을 익히다 보면 우린 모두가 함께 너나없이 한 가족이 될 수 있게 되어 좋고..."

그러고 나서 사내는 다시 젊은이를 안심시키듯 혼자서 계속 지껄여대었다.

"하지만 뭐 한 가족이다 뭐다 하니 내게 무슨 딴 궁리가 있어서 그러나 의심을 할 건덕진 없어요. 그야 솔직하게 말하면 난 그동안 내 아들 녀석이 날 정말로 잊어버리고 있는 거나 아닌가 의심이 들기도 했었다. 오, 녀석이 정말 제 애빌 잊고 언제까지나 이런 곳을 헤매게 버려둘 참인가 싶어 은근히 혼자 낙담스런 생각이 솟기도 했었단 말이외다..."

"..."

"하기야 어찌 생각해보면 지금까진 그편이 오히려 다행이었는지 모르지요. 내 언젠가 이곳을 쉬 떠나지 못하는 소이가 녀석을 기다리는 일 밖에 다른 일 한가지가 있노라 말한 적이 있지만, 그 일이 아직도 끝나질 않았으니 말이오. 젊은이도 이젠 대략 짐작이 가리라 믿어 하는 말이지만, 그게 바로 내가 가막소 위인들의 새를 사주는 일 아니었겠소. 녀석들에게 새를 다 사주기 전에는 아들놈을 만나도 난 이곳을 떠날 수가 없는 처지란 말이외다. 그러니 아들놈이 나타났다가는 일이 오히려 낭패가 됐을 게라오. 녀석이 아직 나타나지 않은 건 그래 그런대로 다행이랄 수가 있어요. 하지만 그거야 물론 내 쪽 사정인 게구. 녀석이 여태도 날 찾으러 와주지 않은 건 제 일을 제가 외면하는 격 아니겠소. 난 그게 섭섭했던 게요. 은근히 마음이 조급해지기도 했었구..."

"...."

"하지만 이 늙은이의 주책없는 생각도 사실은 모두가 어제까지뿐이었다오. 오늘은 생각이 달라지고 말았어요. 젊은인 아마 이해하기가 어렵겠지만 오늘 아침부턴 모든 게 안심이 되는구료. 녀석이 머지않아 날 찾아 나타날 것 같아요. 그것도 물론 이 늙은이의 막연한 기대나 느낌에 불과한 것인지 모르지만, 난 그런 내 바람을 믿고 살아온 늙은이니까. 내가 가막소에서 늙도록 깨달아 얻은 마지막 지혜거든. 내 아들놈은 필시 날 찾아 나타날 거외다. 그리고 제 애빌 고향집으로 데려갈 거외다..."

"내 젊은이에게 바람이 있다면 다만 젊은이도 아까 말대로 내 한 가족이 되어서 그 한 가족이 된 사람의 정분으로 그걸 조금만 믿어줬으면 하는 것뿐이라오. 내게도 그런 아들 녀석이 있고 그 아들 녀석이 미구에 제 애빌 찾아 나타날 일을 말이오..."

젊은이는 끝끝내 대꾸가 없었다. (p.327-328)

 

이날도 젊은이는 벌써 스무 개 이상의 빈 새장을 새로 채워넣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 한 새장에서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사내가 무슨 버릇처럼 한 새장 문을 손가락 끝으로 톡톡 건드리자 장 속의 새가 포르륵 날개를 퍼득여 그의 손가락 쪽으로 나아와 붙었다.

사내가 손가락을 좀더 깊숙이 장 속으로 디밀었다. 그러자 다시 장 속의 새는 녀석의 조그만 부리로 사내의 손가락 끝을 조심스럽게 한두 번 콕콕 쪼아대는 시늉이더니, 나중에는 겁도 없이 홀짝 그 손가락 위로 몸을 날려 내려앉었다. 그리고 꽁지를 가볍게 간들거리며 조그만 눈망울로 말똥말똥 그의 표정을 살피고 있었다.

사내는 한동안 거의 넋을 잃은 듯한 얼굴로 장 속의 새 앞에 못박혀 서 있었다. 사내의 초라한 입가에 이윽고 누런 웃음이 번졌다. 그리고 거기서 그 사내의 오랜 기다림이 끝났다.

"그래, 나도 이젠 네놈을 알아볼 수가 있구말구..."

사내는 혼잣말처럼 낮게 중얼거리고 나서, 다시 가겟집 젊은이를 향해 자랑스럽게 말했다.

"내 오늘은 이 녀석을 사주겠소."

그는 곧 야전잠바 주머니를 뒤져 동전 스무 닢을 세워 내놓고 나서, 이젠 젊은이의 응\낙을 기다릴 것도 없이 스스로 새장 문을 따기 시작했다.

그는 열린 장문 사이로 손을 디밀어 녀석을 조심스럽게 손바닥에 싸안았다.그리고 무슨 소중스런 물건이라도 다루듯 자신의 코 앞까지 녀석을 높이 치올려 들고는 사람에게 하듯이 중얼중얼 말했다.

"하지만 이젠 알아두거라. 여긴 네놈들에게 그리 즐겨할 곳이 못 된다는 걸 말이다. 그래 나도 이게 네놈한텐 마지막일 테니 이번엔 좀 날개가 저리도록 멀찌감치 하늘을 날아가보거라..."

손안에 든 새가 사내를 재촉하듯 날개를 두어 번 퍼득대고 있었다.

그러자 사내도 이제 그만 녀석을 놓아줄 자세를 취했다. 퍼득여대는 녀석의 양 날개 밑으로 손끝을 집어넣어 녀석을 높이 받쳐 올렸다. 그리고 그가 뭔가 혼잣말 같은 것을 입속으로 중얼대며 녀석을 막 놓아주려던 참이었다.

사내는 금세 뭐가 이상해졌는지 숲으로 놓아주려던 녀석을 다시 가슴팍 밑으로 끌어내렸다. 그러고는 녀석의 날개를 들추고 벌어진 날갯죽지 밑을 유심히 살폈다.

사내가 들춰낸 녀석의 양쪽 날개 밑엔 무슨 가위 같은 물건으로 속깃을 잘라낸 자국이 역력했다.

사내는 일순 그것이 도대체 무엇을 뜻하며 어째서 그런 일이 생기게 댔는지 짐작이 안 가는 듯 멍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한동안 조용히 잘려나간 녀석의 속날개깃 자국을 들여다보고 있던 사내의 눈길에 이윽고 어떤 세찬 분노의 불길이 일기 시작했다.

그는 새를 거머쥔 손에 으스러지도록 힘을 주며 말없이 그의 거동만 훔쳐보고 있는 젊은이를 정면으로 쏘아보았다. 그 세찬 분노의 불길이 이글거리는 사내의 눈길은 사람까지 온통 달라 보이게 하였다. 그는 자신의 분노 때문에 손과 입술까지 마구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사내는 자신을 참는 데 너무도 깊이 길이 들여진 인간이었다.

그는 끝끝내 한마디 말도 없이 자신의 분노를 견뎌냈다. 분노와 증오에 불타던 사내의 눈길에서 이윽고 그 세찬 열기가 서서히 가라앉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분노와 증오의 빛 대신 그의 눈길엔 어느새 조용한 슬픔의 응어리 같은 것이 맺혀들기 시작했다.

그는 문득 가겟집 젊은이로부터 시선을 거두었다. 그리고 그 높고 푸른 가을 하늘을 오래도록 우러르고 있었다.

가겟집 젊은이는 그러나 여전히 남의 일을 구경하듯 거동이 태연스러웠다.

처음 한동안은 그도 역시 사내의 심상찮은 기세에 눌려 여느 때처럼은 처신을 못했다. 사내의 행동을 함부로 간섭하고 들지도 못했고, 거꾸로 사내를 깡그리 무시한 채 그 앞에서 금세 등을 돌리고 돌아서지도 못했다. 그리고 사내가 마침내 새의 날개 밑을 들춰내자 그는 무슨 몹쓸 비밀을 들킨 사람처럼 엉거주춤한 자세로, 그러나 될수록 자신을 잃지 않으려는 듯 조금은 뻔뻔스럽고 무관심한 표정으로, 끝끝내 그 사내의 눈길만 맞받고 서 있었다. 그게 사내의 눈길에 붙잡힌 젊은이의 거동새였다.

하지만 사내는 마침내 스스로 깨닫고 스스로 자신을 다스려주었다. 젊은이는 이제 그걸로 그만ㄴ이었다.

그는 순식간에 다시 자신을 되찾고 있었다. 그리고 그 하늘을 우러러 얼굴을 쳐들고 서 있는 사내를 향해 까닭 모를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이윽고 사내가 그 하늘로부터 조용히 눈길을 끌어내려 그를 다시 돌아다보았을 때도 그는 계속 그 비웃음과 연민기 같은 것이 뒤섞인 기묘한 웃음기 속에 유유히 사내를 구경하고 있었다. (p.330-333)

 

석양의 햇발이 점점 더 풀기를 잃어갔다.

구불구불 남쪽으로 뻗어나가고 있는 하얀 신작도길도 먼 곳에서부터 차츰 윤곽이 아득히 흐려져가고 있었다.

하지만 사내에겐 아직도 한 줄기 햇볕이 등줄기에 그토록 따스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한 줄기 햇살이 꺼지지 않는 한 그의 눈앞에서 남쪽으로 뻗어나가고 있는 좁은 신작로길이 그토록 따뜻하고 맑게 빛나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건 차라리 사내의 가슴속을 끝없이 비춰주는 영혼의 빛줄기와도 같았다.

사내는 아직도 지침이 없이 그 따스하고 행복스런 빛줄기를 좇으며 품속에서 가끔 발짓을 꼼지락거리고 있는 녀석에게 쉴새없이 혼자 중얼대고 있었다.

"하지만 네놈도 조금은 명념해봐야 한다. 탱자나무 울타리와 붉은색 벽돌 굴뚝이 높은 기와집, 게다가 뒷밭이 넓고 뒤쪽 언덕에 푸른 대숲이 우거져 내린 집...그런 집이 있는 동네가 나서는 걸 말이다. 그야 언젠간 너도 알겠지만, 그게 바로 우리가 찾아가는 남쪽 동네란다. 생각처럼 그렇게 쉽게 찾기는 어려운 곳이지. 하지만...글쎄, 그 남쪽 동네가 얼마나 따뜻한 곳인지 네가 어떻게 알기나 할는지..." (p.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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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해설>

1. 노인은 감옥에서 막 출소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는 일생의 대부분을 감옥에서 지냈기 때문에 자유의 소중함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또한 그는 아직도 감옥에서 자유를 꿈꾸고 있는 많은 수인들의 삶을 외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는 감옥에 있는 친구들을 위하여 열심히 돈을 모아 새를 한 마리씩 사서 하늘에 날려보내는 일을 합니다. 마치 그것이 그의 유일한 사람의 목표인 것처럼 말이지요. 그러나 새들에게 자유를 주는 일은 인간에게는 일시적이고 대리 만족적인 자유를 주는 것을 의미할 뿐입니다. 그래도 노인이나 공원에 놀러온 사람들은 기꺼이 그 일을 하려고 합니다. 이는 도시의 사람들이 또는 감옥에 있는 사람들이 자유를 그리워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2. 노인은 오랜 세월 동안 자유를 갈망해왔기 때문에 새를 날려보내는 일을 매우 성스럽고 훌륭한 일로 여기면서 젊은이의 마음에 들기 위해 무척 애쓰고 있습니다. 젊은이의 눈으로 보면 비현실적이고 감상적인 행위만을 일삼고 있는 노인이 시대착오적인 인물로 비춰지겠지요. 그리고 노인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감옥에 있는 다른 죄수들을 위해서 새를 날려보냅니다. 이러한 모습을 통해 노인이 이타적이고 세속에 물들지 않은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새를 파는 젊은이는 처음부터 새에 깊은 관심을 보내고 있는 사내에게 그다지 관심이 없습니다. 자유의 의미보다는 당장 돈을 버는 것이 삶의 목표이기 때문이지요. 또한 번을 벌기 위해 새의 날개를 자르는 잔인한 행동도 서슴지 않는, 매우 이기적이고 실리적인 사람입니다. 그리고 노인에게 그 사실이 발각되었을 때에도 전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무감각하고 매정하게 노인을 대합니다. 결국 젊은이는 매우 현실적이고 이기적인 인물임을 알 수 있습니다.

3. 감옥에 있는 사람들은 이전에 새를 사본 경험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 새 가게에서 새를 사는 사람들 중에 감옥에서 나왔거나 감옥에 있는 사람들을 면회하러 가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너무도 오랫동안 감옥에 감금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요. 게다가 감옥에 있는 사람들은 가족에게 편지를 보내도 소식이 닿지 않아 연락이 끊기고, 희망이 없기 때문에 더더욱 감옥에서 나올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자유를 간절히 갈망하고는 있지만 외부로부터 철저히 단절된 매우 절망적인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지요. 이는 자유의 진정한 의미를 모든 사람들이 잊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4. 소설 속에서 이 도시를 상징하고 있는 공간은 바로 교도소와 새 가게가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교도소는 사람들이 갇혀 있는 곳으로 자유를 상실한 공간이며 새 가게 역시 새들의 날개가 무참하게 잘려나가는 끔찍한 곳입니다. 또한 노인이 오랫동안 기다리던 아들도 오지 않습니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에게 절망과 상실감만을 안겨주는 폭력적인 곳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5. 대개 자유는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에 대한 희생의 대가를 치러야만 얻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소설 속 노인 역시 오랜 세월 동안 감옥에서 살아가면서 간절하게 자유의 몸이 되기를 고대하고 또 고대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교도소에서 나와 자유의 몸이 되었을 때, 쉽게 그곳을 떠나지 못하고 자유를 얻어 세상을 향해 날아가는 새들의 모습을 보며 자유의 기쁨이 무엇인지를 공감하면서 지냈던 것입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새의 날개에 얽힌 비밀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새로운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그저 기다리고만 있어서는 안 되며 스스로 자유를 찾아 떠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p.337-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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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청준(李淸俊, 1939년 8월 9일 ~ 2008년 7월 31일)

대한민국의 소설가.

전라남도 장흥군에서 출생했으며 광주제일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독어독문학과를 나왔다. 1966년 서울대를 나온 후 《사상계》에 입사했다가 1967년 《여원》사로 이직했으며 1971년에는 《월간 지성》 창간에 참여했다.
한편 그는 1968년 10월에 남경자와 혼인하여 13년 후 1981년에 외동딸 이은지를 득녀하였다.
1965년 《사상계》 신인 작품 모집에 단편 소설 <퇴원(退院)> 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고, 이후 단편 〈임부(姙婦)〉, 〈줄〉, 〈무서운 토요일〉, 〈굴레〉 등을 발표하여 작가의 기반을 확고히 다졌다.
1968년 《병신과 머저리》로 제12회 동인문학상을 수상하였으며, 계속해서 《소문의 벽》, 《등산기》 등을 발표해 현실과 이상 사이의 갈등과 그 속에서 일어나는 심리적 고통을 묘사했다. 그의 작품 세계는 사물의 겉모습을 표현하기보다는 그 이면에 숨겨진 진실을 탐색하는 경향이 있다. 그 밖의 주요 작품으로 《조율사》·《이어도》 《눈길》등이 있으며, 창작집으로 《별을 보여드립니다》·《예언자》·《당신들의 천국》·《자유의 문》·《서편제》 등 중·장편집이 있다.
2006년 여름 폐암 판정을 받고 2008년 6월 중순 병세가 악화돼 삼성서울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다가 7월 31일 새벽 4시쯤에 향년 70세(만나이 68세)로 영면했다. 그의 장례식 빈소에서는 삼일장 첫날에 김승옥, 이어령, 황동규 등의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동문 출신의 문인들이 조문, 애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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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인한 도시 - 이청준 (문학과지성사)

잔인한 도시 - 이청준 (문학과지성사)

잔인한 도시 - 이청준 (열림원)

이청준 전집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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