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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

I. 한국 문학/2. 소설82

마당깊은 집 - 김원일 (문학과지성사) 김원일 - 마당깊은 집 (1988년) 고향 정터거리의 주막에서 불목하니 노릇을 하며 어렵사리 초등학교를 졸업하자, 선례누나가 나를 데리러 왔다. 나는 누나를 따라 대구시로 가는 기차를 탔다. 그때, 심한 차멀미 탓도 있었겠지만, 풀죽은 내 ㅅ니세가 팔려가는 망아지 꼴이었다. 왠지 어머니와 함께 살아갈 앞으로의 생활이 암담하게만 느껴졌다. 삼 년 동안의 전쟁이 멈춘 휴전 이듬해였으니, 1954년 4월 하순이었다. 나는 전쟁이 났던 해 겨울부터 가족과 떨어져 살았으므로 삼 년만에야 비로소 식구들과 한솥밥을 먹게 되는 셈이었다. 대구시는 내게 낯선 도시였다. 누나를 따라 진영에서 대구시로 오니 이미 중학교 입학 시기는 끝난 뒤였다. 우리집은 대구시의 중심부에 해당되는 약전골목과 중국인이 많이 거주하는 종로통을.. 2023. 6. 26.
목축기 - 안수길 (창비) 창비 20세기 한국문학 11 목차 안수길 목축기 제3인간형 김정한 사하촌(寺下村) 추산당과 곁사람들 모래톱 이야기 수라도(修羅道) ........................................ 안수길 - 목축기 (1943년) 멀리서 보면 흡사 누워 있는 소 형국이었다. 밋밋한 등어리하며, 불룩한 배하며, 더욱이 지금은 황엽의 늦가을, 그것도 해질 무렵이라 낙조를 받아 함빡이 짙은 산 전체는 그 모습이 그대로 누워 있는 누른 소였고, 그것도 기름진 암소였다. 누가 짓든 그 산 이름을 소를 두고 생각할밖에 없겠으나, 와우산이란 평범하면서도 그 산을 가장 인상적으로 드러낸 이름이었다. 더욱이 소를 치고 돼지를 기르는 목장이 그 산을 배경으로 그 기슭에 자리를 잡고 보매, 와우산은 그 이름과 더불어 .. 2023. 5. 26.
깊고 푸른 밤 - 최인호 (창비) 창비 20세기 한국 소설 30 목차 최인호 타인의 방 깊고 푸른 밤 오탁번 굴뚝과 천장 한수산 타인의 얼굴 박범신 토끼와 잠수함 흰 소가 끄는 수레 ............................................ 최인호 - 깊고 푸른 밤 (1982년) 그는 약속대로 오전 여덟 시에 눈을 떴다. 눈을 뜨고 뻣뻣한 팔을 굽혀 손목시계를 보았다. 정각 아침 여덟 시였다. 누가 깨워준 것도 아닐 텐데 그처럼 곤한 잠 속에서도 시간의 흐름을 예민하게 감지하고 있는 동물적인 본능이 그를 정확한 시간에 자명종 소리를 내어 깨워준 셈이었다. 낯선 방이었다. 그는 자기가 지금 어디서 잠들어 있는가를 아직 잠이 완전히 달아나지 않은 혼미한 의식 속에서 헤아려보았다. 그는 눈이 몹시 나쁜 사람이 안경도 없이.. 2023. 5. 12.
타인의 방 - 최인호 (창비) 창비 20세기 한국 소설 30 목차 최인호 타인의 방 깊고 푸른 밤 오탁번 굴뚝과 천장 한수산 타인의 얼굴 박범신 토끼와 잠수함 흰 소가 끄는 수레 ............................................ 최인호 - 타인의 방 (1971년) 그는 방금 거리에서 돌아왔다. 너무 피로해서 쓰러져버릴 것 같았다. 그는 아파트 계단을 천천히 올라서 자기 방까지 왔다. 그는 운수좋게도 방까지 오는 동안 아무도 만나지 못했고 아파트 복도에도 사람은 없었다. 어디선가 시금치 끓이는 냄새가 나고 있었다. 그는 방문을 더듬어 문 앞에 프레스라고 씌어진 신문 투입구 안쪽의 초인종을 가볍게 두어 번 눌렀다. 그리고 이미 갈라진 혓바닥에 아린 감각만을 주어오던 담배꽁초를 잘 닦아 반들거리는 복도에 던져.. 2023. 5. 12.
논 이야기 - 채만식 (글누림) 글누림 한국문한전집 5 목차 태평천하 레디메이드 인생 치숙 논 이야기 낙조 작가 연보 작품 해설 ................................................. 채만식 - 논 이야기 (1946년) 일인들이 토지와 그 밖에 온갖 재산을 죄다 그대로 내어놓고, 보따리 하나에 몸만 쫓기어가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는 한생원은 어깨가 우쭐하였다. "거 보슈 송생원, 인전 들, 내 생각 나시지?" 한생원은 허연 탑삭부리에 묻힌 쪼글쪼글한 얼굴이 위아래 다섯 대밖에 안 남은 누-런 이빨과 함께 흐물흐물 웃는다. "그러면 그렇지, 글쎄 놈들이 제아무리 영악하기로소니 논에다 네 귀탱이 말뚝 박구섬 인도깨비처럼, 어여차 어여차, 땅을 떠가지구 갈 재주야 있을 이치가 있나요?" 한생원은 참으로 일본.. 2023. 5. 7.
치숙 - 채만식 (글누림) 글누림 한국문한전집 5 목차 간행사 태평천하 레디메이드 인생 치숙 논 이야기 낙조 작가 연보 작품 해설 ................................................. 채만식 - 치숙 (1938년) 우리 아저씨 말이지요? 아따 저 거시키, 한참 당년에 무엇이냐 그놈의 것, 사회주의라더냐 막덕이라더냐, 그걸 하다 징역 살고 나와서 폐병으로 시방 앓고 누웠는 우리 오촌 고모부 그 양반.... 뭐, 말두 마시오. 대체 사람이 어쩌면 글세....내 원! 신세 간데없지요. 자, 십 년 적공, 대학교까지 공부한 것 풀어 먹지도 못했지요. 좋은 청춘 어영부영 다 보냈지요. 신분에는 전과자라는 붉은 도장 찍혔지요. 몸에는 몸쓸 병까지 들었지요. 이 신세를 해가지굴랑은 굴속 같은 오두막집 단칸 .. 2023. 5. 6.
갈등 - 최서해 (사피엔스21) 사피엔스 한국문학 23 목차 홍염 탈출기 기아와 살육 갈등 ........................................ 최서해 - 갈등 (1928년) 봄날같이 따스하고 털자리같이 푸근한 기분을 주던 이른 겨울 어떤 날 오후였다. 일주일 전에 우리집에서 떠나간 어멈의 엽서를 받았다. 이날 오후에 사에서 나오니 문간에 배달부가 금방 뿌리고 간듯한 편지 석 장이 놓였는데 두 장은 봉서였고 한 장은 엽서였다. 봉서 중 한 장은 동경 있는 어떤 친구의 글씨였고 한 장은 내 손을 거쳐서 어떤 친구에게 전하라는 가서였다. 나머지 엽서 한 장은 내 눈에 대단히 서투른 글씨였다. 수시인안에 '경성 화동 백 번지 박춘식 씨'라고 내 이름과 주소 쓴 것을 보아서는 내게 온 것이 분명한데 끝이 무딘 동필에 잘 갈.. 2023. 5. 3.
기아와 살육 - 최서해 (사피엔스21) 사피엔스 한국문학 23 목차 홍염 탈출기 기아와 살육 갈등 ........................................ 최서해 - 기아와 살육 (1925년) 경수는 묶은 나뭇짐을 짊어졌다. 힘에야 부치거나 말거나 가다가 거꾸러지더라도 일기가 사납지 않으면 좀 더 하려고 하였으나 속이 비고 등이 시려서 견딜 수 없었다. 키 넘는 나뭇짐을 가까스로 진 경수는 끙끙거리면서 험한 비탈길로 엉금엉금 걸었다. 짐바가 두 어깨를 꼭 죄어서 가슴은 뻐그러지는 듯하고 다리는 부들부들 떨려서 까딱하면 뒤로 자빠지거나 앞으로 곤두박질할 것 같다. 짐에 괴로운 그는, "이놈 남의 나무를 왜 도적질해 가니?" 하고 산 임자가 뒷덜미를 집는 것 같아서 마음까지 괴로웠다. 벗어 버리고 싶은 마음이 여러 번 나다가도 식.. 2023. 5. 1.
낙동강 - 조명희 (홍신문화사) 홍신 한국 대표 단편선 7 목차 나도향 물레방아 벙어리 삼룡이 뽕 김성한 바비도 5분간 암야행 손창섭 잉여인간 조명희 낙동강 .............................. 조명희 - 낙동강 (1927년) 낙동강 칠백 리 길이길이 흐르는 물은 이곳에 이르러 곁가지 강물을 한몸에 뭉쳐서 바다로 향하여 나간다. 강을 따라 바둑판 같은 들이 바다를 향하여 아득하게 열려 있고, 그 넓은 들 품안에는 무덤무덤의 마을이 여기저기 안겨 있다. 이 가오가 이 들과 저기에 사는 인간 - 강은 길이길이 흘렀으며, 인간도 길이길이 살아왔었다. 이 강과 이 인간, 지금 그는 서로 영원히 떨어지지 않으면 아니 될 것인가? 봄마다 봄마다 불어 내리는 낙동강 물 구포벌에 이르러 넘쳐 넘쳐흐르네 - 흐르네 - 에 - 헤 - .. 2023. 4. 30.
백제의 미소 - 문순태 (금성출판사) 한국대표문학 28 문순태 - 백제의 미소 (1973년) 못 먹어 핏기라고는 하나 없이, 얼굴이 누르퉁퉁하고 부석부석한, 여남은살쯤 되어 보이는 같은 또래의 아이들이, 끝이 무지러진 부엌칼로 송기를 뭉떵뭉떵 벗겨 망태기에 집어넣고 있었다. 아이들은 송기를 벗기면서, 입안이 싸아하게 느껴지는 그 쫄깃쫄깃한 송기떡을 생각했다. 망태기가 무춤하게 송기를 벗긴 그들은 배가 고픈지 넓적넓적한 누리장나무 잎을 주욱주욱 훑어 한입에 넣고, 잎속에 든 벌레까지도 와작와작 씹어먹었다. 누리장나무 잎은 누리척지근한 누린내가 나는 것 같지만, 오랫동안 씹으면 끈적거리면서 달짝지근해지는 맛이 좋았다. 아이들은 소매끝이 떨어져 너덜너덜하고 누덕누덕 기운 옷을 입고 있었으며, 댕기도 땋지 않은 까치둥우리처럼 부스스한 머리에 지푸라.. 2023. 4.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