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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
I. 한국 문학/2. 소설

낙동강 - 조명희 (홍신문화사)

by handaikhan 2023. 4. 30.

홍신 한국 대표 단편선 7

 

목차

 

나도향

물레방아

벙어리 삼룡이

 

김성한

바비도

5분간

암야행

 

손창섭

잉여인간

 

조명희

낙동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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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희 - 낙동강 (1927년)

 

낙동강 칠백 리 길이길이 흐르는 물은 이곳에 이르러 곁가지 강물을 한몸에 뭉쳐서 바다로 향하여 나간다. 강을 따라 바둑판 같은 들이 바다를 향하여 아득하게 열려 있고, 그 넓은 들 품안에는 무덤무덤의 마을이 여기저기 안겨 있다.

이 가오가 이 들과 저기에 사는 인간 - 강은 길이길이 흘렀으며, 인간도 길이길이 살아왔었다. 이 강과 이 인간, 지금 그는 서로 영원히 떨어지지 않으면 아니 될 것인가?

 

봄마다 봄마다

불어 내리는 낙동강 물

구포벌에 이르러

넘쳐 넘쳐흐르네 -

흐르네 - 에 - 헤 - 야.

 

철렁철렁 넘친 물

들로 벌로 퍼지면

만 목숨 만만 목숨

젖이 된다네

젖이 된다네 - 에 - 헤 - 야.

 

이 벌이 열리고 -

이 강물이 흐를 제

그 시절부터

이 젖 먹고 자라 왓네

자라 왔네 - 에 - 헤 - 야.

 

천 년을 산, 만 년을 산

낙동강! 낙동강!

하늘가에 간들

꿈에나 잊을소냐 - 

잊힐소냐 이- 히 - 야.

 

어느 해 이른봄에 이 땅을 하직하고 멀리 서북간도로 몰려가는 한 떼의 무리가, 마지막 이 강을 건널 제, 그네들 틈에 같이 끼여 가는 한 청년이 있어 뱃전을 두드리며 구슬프게 이 노래를 불러서, 가뜩이나 슬퍼하는 이사꾼들로 하여금 눈물을 자아내게 하였다. 한다.

과연, 그네는 뭇 강아지떼 같이 이 땅 어머니의 젖꼭지에 매달려 오랫동안 살아왔다. 그러나 그 젖꼭지는 벌써 자기네 것이 아니기 시작한 지도 오래였다. 그러던 터에 엎친 데 덮친다고 난데없는 이리떼 같은 무리가 닥쳐와서 물러 박지르며 빼앗아 먹게 되었다.

인제는 한 모금의 젖이라도 입으로 들어가기 어렵게 되었다. 하는 수 없이 이 땅에서 표박하여 나가게 되었다. 이렇게 된 것을 우리는 잠깐 생각하여 보자.

이네의 조상이 처음으로 이 강에 고기를 낚고, 이 벌에 곡식과 열매를 딴 때부터 세지도 못할 긴 세월을 오래오래 두고 그네는 참으로 자유로웠었다. 서로서로 노래 부르며 서로서로 일하였을 것이다. 남쪽 별도 자기네 것이요, 북쪽 별도 자기네 것이었었다. 동쪽도 자기네 것이요, 서쪽도 자기네 것이었다.

그러나 역사는 한 바퀴 굴렀었다. 놀고목는 계급이 생기고, 일하여 먹여 주는 계급이 생겼다. 다스리는 계급이 생기고, 다스려지는 계급이 생겼다. 그럼으로부터 임자 없던 벌판에 임자가 생기고 주림을 모르던 백성이 굶주려 가기 시작하였다. 하늘의 햇빛도 고운줄을 몰라 가게 되고, 낙동강의 맑은 물도 맑은 줄을 몰라 가게 되었다. 천 년이다. 오 천년이다. 이 기나긴 세월을 불평의 평화 속에서 아무 소리 없이 내려왔다. 그네는 이 불평을 불평으로 생각지 아니하게까지 되었다. 흐린 날씨를 참으로 맑은 날씨인 줄 알 듯이, 그러나 역사는 또 한 바퀴 구르려고 한다. 소낙비 앞잡이 바람이다. 깃발이 날리었다. 갑오 동학이다. 을미 운동이다. 그 뒤에 이 땅에는 아니, 이 반도에는 한 괴물이 배회한다. 마치 나래치고 다니는 독수리 같이. 그 괴물은 곧 사회주의다. 그것이 지나치는 곳마다 기어가는 암나비 궁둥이에는 수없는 알이 쏟아지는 셈으로 또한 알을 쏟아 놓고 같다. 청년 운동, 농민 운동, 형평 운동, 노동 운동, 여성 운동...오천 년을 두고 흘러가는 날씨가 인제는 먹장구름에 싸여 간다. 폭풍우가 반드시 오고야 만다. 그 비 뒤에는 어떠한 날씨가 올 것은 뻔히 알 노릇이다. (p.244-247)

 

그가 갓 서울로 와서, 일을 하여 보려 하였으나, 그도 뜻과 같이 못하였다. 그것은 이 땅에 있는 사회 운동 단체란 것이 일에는 힘을 아니 쓰고, 아무 주의 주장에 틀림도 없이, 공연히 파벌을 만들어 가지고 동지끼리 다투기만 일삼는 판 때문이다. 그는 자기의 뜻이 같은 사람끼리 어울려, 양방의 타협 운동도 일으켰으나 아무 효과도 없었고, 여론을 일으켜 보기도 하였으나, 파쟁에 눈이 뻘건 사람들의 귀에는 그도 크게 울리지 못하였다. 그는 분연히 떨치고 일어서며,

"이 파벌이란 시기가 오면 자연히 파멸될 때가 있으리라."

고 예언같이 말을 하여 던지고서는, 자기 출생지인 경상도로 와서 남조선 일대를 망라하여 사회 운동 단체를 만들어서 정당한 운동에만 힘을 쓰게 되었다.

그리고 자기는 자기 고향인 낙동강 하류 연안 지방의 한 부분을 떼어 맡아서 일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이 땅의 사정을 보아,

"대중 속으로 브 나로드..."

하고 부르짖었다. (p.255-256)

<참고>

브나로드(v narod)

동아일보사는 1931년부터 1934년까지 4회에 걸쳐 전국 규모의 문맹퇴치운동을 전개하였는데, 제3회까지 이 운동을 ‘브나로드’로 부르다가 민중이 이해하기 어려운 이름이라 하여 제4회부터 ‘계몽운동’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의 금지 조처로 계속하지 못하였다.
원래 ‘브나로드(v narod)’는 제정(帝政)러시아 말기에 소련의 지식인들이, 이상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민중을 깨우쳐야 한다는 취지로 만든 ‘민중 속으로 가자.’는 뜻의 러시아말 구호이다. 이 구호를 내세우고 1874년 수백 명의 러시아 청년학생들이 농촌으로 들어가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뒤부터 이 말은 계몽운동의 별칭으로 사용되었는데, 동아일보사는 뒤에 명칭만을 빌려 쓴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그 뒤에도 계속하여 우리 나라에서도 계몽운동의 애칭으로 사용되었다.
‘브나로드’로 애칭되었던 계몽운동은 1920년대 초부터 서울의 학생과 지식청년, 문화단체 그리고 동경 유학생들에 의해서 실시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유학생이 방학 때 실시한 귀향계몽운동은 큰 주목을 받았다. 천도교 조선농민사(朝鮮農民社)에서도 1926년 여름방학 때 귀농운동(歸農運動)을 폈는데, 이것 역시 학생에 의한 농촌계몽운동이었다.
이러한 사회문화운동의 배경하에 각급 학교 학생은 학생 서클 조직을 이용, 농촌계몽운동에 나서기도 하였다. 1926년 수원고등농림학교 한국인 학생들은 건아단(健兒團)을 조직하고, 그 해부터 농민을 계몽하는 야학운동을 전개하다 1928년 9월 경찰에 발각되어 좌절된 적이 있다.
그러나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수원고등농림학교의 한국인 학생들은 다시 교외활동으로 개학중에는 수원 인근에 야학을 개설하여 민족의식을 깨우치며 문맹퇴치운동을 계속하였고, 방학중에는 전국에 퍼져 있던 선배 졸업생들과 제휴하여 농촌개발을 위한 여러 가지 계몽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운동을 상록수운동(常綠樹運動)이라고도 불렀는데, 이와 같은 농촌계몽운동은 당시 어느 학교를 다니든간에 우리 나라 학생이라면 누구에게서나 찾아볼 수 있는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한편, 한말에 한글을 전용한 《독립신문》이 발행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한글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였다. 국권상실 이후 식민통치의 억압으로 한글연구활동이 중단되어 오다가 3·1운동 후 일제가 회유책으로 내세운 이른바 문화통치를 이용해 1921년 처음으로 한글학자들이 조선어연구회를 만들고 기관지로 월간 《한글》(1927. 2. ∼1928. 10. )을 발행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훈민정음 반포 8회갑(480주년)을 맞는 1926년에는 그 기념식을 준비하면서 학계와 언론계와 각종 잡지계가 한글의 가치와 의미를 새롭게 인식하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1930년에는 조선어연구회에서 〈한글맞춤법통일안〉을 제정하기로 결정을 보았고, 1933년 10월 19일 드디어 〈한글맞춤법통일안〉이 확정되었다. 이러한 배경으로 우리 민족의 소중한 문자인 한글을 민중에게 보급해야겠다는 필요성이, 민족독립운동을 목표하였던 당시의 문화운동에 깊이 침투되어 있었던 것이다.
동아일보사는 이러한 시대의 요청에 따라 1928년 8월 창간 8주년 기념행사의 하나로 문맹퇴치운동을 전개하려 하였으나 조선총독부가 제지, 좌절된 적이 있었다. 그 다음 해 조선일보사가 여름방학을 이용, 제1회귀향남녀학생문자보급운동을 전개하였다.
조선일보사는 제4회 때부터 ‘아는 것이 힘이다. 배워야 산다. ’는 구호를 내세웠고, 교재로 《한글원본》(4주간용)도 펴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에 의한 동아일보사 브나로드운동의 금지와 함께 조선일보사의 이 운동도 함께 중지되었다. 동아일보가 1931년부터 1934년까지 4회에 걸쳐 전개한 이 운동의 경과는 비교적 상세하게 남아 있다.
이 운동은 한글과 산술을 가르치는 고등보통학교 4,5학년 학생으로 조직된 학생계몽대와 전문학교 이상의 학생으로 조직된 학생강연대, 여행일기·고향통신·생활수기 등을 써서 신문사에 보내는 임무를 맡은 학생기자대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학생조직과는 별도로 조선어연구회 이름을 바꾸어 1931년에 새로 조직된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의 후원을 얻어 3회에 걸쳐 전국 주요 도시에서 조선어강습회를 열었으며, 만주의 간도 지방까지 나가기도 하였다. 이 강습회 역시 총독부의 방해로 계속할 수 없었다.
김윤경(金允經)은 그의 《한국문자급어학사 韓國文字及語學史》에서 이 때 조선어강습회를 개최한 지역과 일자, 강습을 담당한 학자의 이름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제1회 때 37개 지역, 제2회 때 46개 지역, 제3회 때 40개 지역에서 개최한 것으로 기록하면서, 제3회 때는 개최된 지역이 40개이였지만 총독부의 금지조처로 당초에 계획했던 대부분의 지역을 포기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이것으로 보아 그 규모가 대단히 컸음을 알 수 있다.
동아일보사는 학생계몽대에서 쓸 교재로 《한글공부》(3주간용)를 출판하기도 하였다. 동아일보의 브나로드운동은 한글을 가르치는 일에만 한정하지 않았다. 각 지방에 나간 학생들은 야학을 개설하고 한글 이외에도 위생·음악·연극도 지도하면서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계몽운동과 문화운동을 겸하는 민중운동을 주도해 나갔던 것이다.
4년간에 걸친 이 운동의 성과에 관한 통계는 앞에서 든 김윤경의 저서와 정세현(鄭世鉉)의 《항일학생민족운동사》에 실려 있는데 두 통계에 차이가 있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이 운동은 단일조직이 아니라 계몽대·강연대·강습회·기자대로 이루어져 있어서 통계작성에 혼란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에 브나로드운동으로 애칭되었던 청년학생들의 민중계몽운동은, 민족독립운동에 있어 민중계몽을 통한 민족자강으로 독립의 기반을 튼튼히 하고자 한 운동으로서, 언론계와 조선어학회·청년학생이 힘을 합쳐 거국적으로 전개하였던 주목할 만한 문화운동이었다. → 농촌계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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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원래 정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근래에 그 감정을 의지로 누르려는 노력이 많은 터이다.

"혁명가는 생무쇠쪽 같은 시퍼런 의지의 마음씨를 가져야한다!"

이것이 그의 생활의 지표이다. 그러나 그의 감정은 가끔 의지의 굴레를 벗어나서 날뛸 때가 많았다.

그는 먼저 일할 프로그램을 세웠다. 선전, 조직, 투쟁, 이 세가지로, 그리하여 그는 먼저 농촌 야학을 실시하여 가지고 농민 교양에 힘을 썼었다. 그네와 감정을 같이할 양으로 벗어부치고 들어 덤비어 그네들 틈에 끼여 생 일도 하고, 농사 일터나, 사랑 구석에 모인 좌석에서나, 야학 시간에서나 기회가 있는 대로 교화에 전력을 썼었다.

그 다음에는 소작 조합을 만들어 가지고 지주, 더구나 대지주인 동척의 횡포와 착취에 대하여 대항 운동을 일으켰었다.

첫해 소작 쟁의에는 다소간 희생자도 내었지마는 성공이다. 그 다음해에는 아주 실패다. 소작 조합도 해산 명령을 받았다. 노동 야학도 금지다. 동척과 관영의 횡포, 압박,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열성이 있으나, 아무리 참을성이 있으나, 이 땅에서는 어찌 할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이 침체되고 말 뿐이었다. 그리하여 작년 가을에 그의 친구 하나는 분연히 떨치고 일어서며,

"내 구마 밖으로 갈란다. 여기에서 무슨 일을 할 수 있는가? 하자면 테러지, 테러밖에는 더 없다."

"아니다, 그래도 여기 있어야 한다. 우리가 우리 계급의 일을 하기 위하여는 중국에 가서 해도 좋고, 인도에 가서 해도 좋고, 세계의 어느 나라에 가서 해도 마찬가지다. 하지마는 우리 경우에는 여기 있어 일하는 편이 가장 편리하다. 그리고 우리는 죽어도 이 땅 사람들과 같이 죽어야 할 책임감과 애착을 가지고 있다."

이같이 권유도 하였으나, 필경에 그는 그의 가장 신뢰했던 동무 하나를 떠나 보내게 되고 만 일도 있었다.

졸고 있는 이 땅, 아니 움츠러들고 있는 이 땅, 그는 피칠할 일이 생기고 말았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이 마을 앞 낙동강 기슭에 여러 만 평 되는 갈밭이 하나 있었다. 이 갈밭이란 것도 낙동강이 흐르고 이 마을이 생긴 뒤로부터, 그 갈을 베어 자리를 치고 그 길을 털어 삿갓을 만들고, 그 갈을 팔아 옷을 구하고, 밥을 구하였었다.

 

기러기 떴다 낙동강 위에

가을 바람 부누나 갈꽃이 나부낀다.

 

이 노래도 지금은 부를 경황이 없게 되었다. 그 갈밭은 벌써 남의 물건이 되고 말았다. 그것은 이 촌민의 무지로 말미암아, 십 년전에 국유지로 편입이 되었다가 일본 사람 가등이란 자에게 국유 미간지 처리라는 명의로 넘어가고 말았다. 이 가을부터는 갈도 벨수가 없었다. 도 당국에 몇 번이나 사정을 하였으나, 아무 효과가 없었다. 촌민끼리 손가락을 끊어 맹세를 써서 혈서 동맹까지 조직하여 항거하려 하였다. 필경에는 모두가 다 실패뿐이다. 자기네 목숨이나 다름없이 알던 촌민들은 분김에 눈이 뒤집혀 가지고 덮어놓고 갈을 베어 제쳤다. 저편의 수직꾼하고 시비가 생겼다. 사람까지 상하였따. 그 끝에 성운이 선동자라는 혐의로 붙들려 가서 가뜩이나 경찰 당국에서 미워하던 끝에 지독한 고문을 당하고 나서 검사국으로 넘어가 두어 달 동안이나 있다가 병이 급하게 되어 나온 터이다. (p.257-260)

 

"그러면, 어매 아배는 날 사람 노릇 시킬라꼬 공부시킨 것이 아니라, 돼지 키워서 이 보드끼 날 무슨 덕 볼라꼬 키워 논 물건으로 알았는 게오?" (p.263)

 

<작품 해설>

<낙동강>은 조명희의 대표작이며, 혁명 의식(사회주의적 전망)을 주제로 한다는 점에서 카프 문학을 대표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신경향파의 자연 발생적인 계급주의 문학에 반기를 들고, 의도적으로 계급 의식과 정치 투쟁에 입각하여 쓴 작품이다. 또 1920년대의 신경향파 문학에서 본격적인 목적성을 추구하는 프로 문학으로 방향 전환을 모색하던 시기에 민족 해방 투쟁의 전반을 보여준 이정표적인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작품의 서두에 삽입된 민요는 낙동강을 소재로 한 민요인데, 그 주제는 낙동강이 이 민족의 젖줄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노래를 부르는 이들은 지금 낙동강을 떠나 북으로 이주하는 사람들이다. 이 강을 떠나 전혀 생소한 세계로 향해 가는 그들의 두려움과 애환이 이 민요를 통해 대조적으로 그려지는 것이다. 또한 에나 지금이나 그 유장한 흐름을 변함없이 지속하고 있는 낙동강과 더불어 파란만장한 애환의 삶을 살아온 우리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채 흐르는 것으로 상징화된다. 그리고 주인공 박성운의 행적이 이 작품의 핵심인데, 그것이 구체화되지 않고 요약적으로 제시되어 있을 뿐이어서 플롯의 흐름을 부자연스럽게 하고 극적 긴장도 줄이고 말았다. 또한 작가의 직접적 개입이 흔하게 이루어진다는 점도 소설적 미학을 떨어뜨리는 한 요소가 된다. (p.267-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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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희(趙明熙, 1894년 8월 10일 ~ 1938년 5월 11일)

조선에서 태어난 소비에트 연방의 작가이다. 본관은 양주(陽州). 호는 포석(抱石), 필명은 목성(木星), 적로(笛蘆).
조선 충청북도 진천군에서 출생하였다. 3살 때 부친을 여의고, 서당과 진천 소학교를 다녔으며, 서울 중앙 고보를 중퇴하고 북경 사관학교에 입학하려다가 일경에게 붙잡혔다. 3·1 운동에 관계되어 투옥되기도 하였다. 도일 후 도쿄 대학 철학과에 입학하였고 1920년 <김영일의 사>를 발표하여, 희곡무대에서 상연하였다. 귀국 후 1924년 봄 《잔디밭 우에》를 간행했다.
1928년 소련으로 망명하여, 소련작가동맹 원동지부 지도부에서 근무했다. 하바로브스크의 한 중학교에서 일하며 동포 신문인 《선봉》과 잡지 《노력자의 조국》의 편집을 맡기도 하였다. 1937년 가을 스탈린 정부의 스탈린 숙청 시절에 ‘인민의 적’이란 죄명으로 체포되어 1938년 4월 15일에 사형언도를 받고 5월 11일 소비에트 연방 하바롭스크에서 총살되었다.
사후 명예회복이 되어서 소련작가연맹회원으로 복권되었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악사코브스카야 박물관 앞 조명희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의 나보이 국립문학박물관에는 조명희 기념실이 만들어져 있다. 또, 타슈켄트의 남쪽에는 ‘조명희 거리’라고 명명된 거리가 있다. 대한민국에서는 조명희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1994년부터 조명희 문학제를 해마다 열고 있으며, 중국 연변에서도 2001년 《포석 조명희문학회》가 설립되고 중국동포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하는 ‘조명희청소년문학상’ 행사가 열리고 있다. 2019년 3월 1일 대한민국 정부는 고려인 문학’의 태두 역할을 한 포석 조명희선생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 했다.

 

동경유학시절 낭만적인 시로 출발해서 연극운동가로 변신하였다가 나중에는 소설가로 활약하였다. 1920년 봄 동경에서 근대극연구를 위하여 조직한 극예술협회 창립동인으로 참가하였고, 1921년 동우회(同友會) 순회극단의 일원으로서 전국을 순회하며 연극활동을 하였다.
이 때 희곡 「김영일(金英一)의 사(死)」를 써서 동우회 순회극단 극본으로 삼았고, 그 작품은 선풍적 인기를 모았다. 또, 「파사(婆娑)」(1923)라는 역사극을 발표하여 현실을 간접적으로 비판하였다.
후기에는 주로 소설을 많이 썼는데, 「땅속으로」·「R군에게」·「저기압」·「농촌사람들」·「동지(同志)」·「한여름 밤」·「아들의 마음」 등은 대표적인 단편소설이다. 1920년대 중반에 들어서서는 신경향파 작가로 두각을 나타냈고 카프(KAPF)의 결성과 함께 프롤레타리아작가로 활약하였으며, 단편집 『낙동강』을 남겼다.
프롤레타리아이념에 중독된 다음에는 매우 급진적 작품을 썼고 결국 시베리아로 떠나 행방불명되고 말았다. 그의 시는 낭만적 경향을 보이며, 희곡은 궁핍한 식민지 현실의 고발과 인도주의의 바탕 위에서 인간의 자유평등과 인습타파를 그리고 있으나 구성상의 취약점과 의식과잉을 보이고 있으며, 소설은 반항적인 사회주의사상을 보인다.
주요저서로는 시집 『봄 잔디밭 위에』, 희곡집 『김영일의 사』, 소설집 『낙동강』 등이 있다. 1920년대 들어 최초로 문제성을 띤 희곡을 발표한 극작가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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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 - 조명희 (창비)

낙동강 - 조명희 (글누림)

농촌 사람들 - 조명히 (훈민, 한국헤멩웨이)

낙동강 - 조명희 (범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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