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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
I. 한국 문학/2. 소설

들소 - 이문열 (아침나라)

by handaikhan 2023. 3. 3.

이문열 중단편전집 1

 

이문열 - 들소 (1979년)

 

...........햇빛이 부드럽게 내리쬐는 동굴 어귀의 공터였다.

성년의 남자들은 모두 사냥을 떠나고 여인들도 젊고 힘 있는 축은 대개 야생의 열매나 낟알을 거두러 나가고 없었다. 보이는 것은 늙은이와 아이들 그리고 몇몇 특별히 남겨진 여인들뿐이었다.

여인들은 저마다 맡은 일에 분주하였다. 먹고 남은 고기로 포를 떠 말리고 있는 여인, 털가죽을 손질해 식구들의 입성을 준비하는 여인, 훑어온 강아지풀이나 돌피 같은 야생의 낟알을 널어 말리고 있는가 하면 결을 삭이기 위해 동자꽃, 지네보리, 애기똥풀, 미나리아재비 같은 거친 푸성귀를 다듬고 있었다. 그녀들 주위에는 작은 계집아이들이 언젠가는 자기들의 일이 될 그런 일들을 눈여겨 살피며 맴돌고 있었다.

사내아이들은 대부분 공터 쪽으로 나와 있었다. 아직 어린아이들은 늙은이들 주위에 옹기종기 둘러앉아 젊은 시절의 무용담이나 혈족의 신화에 귀기울이며 용기와 뱃심을 길렀다. 그러나 곧 성년식을 맞을 나이 든 소년들은 따로이 숲 가까운 공터에서 닥쳐올 성년을 대비하고 있었다. 벼락에 부러진 나무 그루터기를 향해 열심히 작은 돌도끼를 던지는가 하면 아버지들이 만들어 준 단순궁에다 촉없는 살을 메겨 여러 가지 사법(法)을 익히고 있었고, 날없는 주목나무의 창을 휘두르며 숲길을 달리기도 했다. 팔과 허리에 힘을 올리기 위해 묶어 둔 산양의 뿔을 잡고 씨근댔고, 둘씩 맞붙어 풀밭을 뒹구는 소년들도 있었다. 

그도 나이로는 바로 그 성년 연습을 하고 있는 아이들 축이었다. 그러나 그는 언제부터인가 그들로부터 떨어져나와 숲가 상수리나무 아래 홀로 앉아 있었다. 그는 예리한 석영의 박편으로 주운 사슴의 견갑골에 여러 가지 풀꽃들을 새기는 중이었다. 그러면서도 가끔씩 그의 열렬한 눈길은 동굴 어귀에 머물렀다. 직접 여인들의 일을 거들고 있는 좀 나이 든 소녀들 쪽이었다.

그러나 찾고 있는 '초원의 꽃'은 한번도 그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정작 그녀가 가끔씩 미소하며 바라보는 곳은 용케 목표를 명중시켜 환호를 지르거나 풀밭을 달리는 소년들 쪽이었다. 대신 그가 번번이 마주치게 되는 것은 '산나리'의 공허한 눈길이었다. 멀리서도 그녀는 분명 그가 하고 있는 일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오늘 밤 함께 모이게 되면 그녀는 또 내가 애써 새긴 이 뼛조각을 졸라 댈 테지. 그러자 그는 괜히 부아가 나고 초초해졌다. '초원의 꽃' 나를 봐줘. 제발 내가 만든 것을 탐내 줘. 나는 너를 위해 이 꽃잎들을 새기고 있어....(p.152-154)

 

"곧 성년식이 다가온다. 우리 혈족이 가장 존경하는 것은 용감한 전사와 날랜 사냥꾼이다. 그런데 너는 그 준비를 게을리하고 있어. 만약 네가 힘과 용기를 인정받지 못하게 되면 너는 '손의 동굴'로 가야 한다."

그것은 그에게 가장 쓰라린 위협이었다. 그는 또래의 형제들 중 이미 '손의 동굴'로 보내진 둘을 모두 알고 있다. 하나는 태어날 때부터 귀머거리였고 하나는 어릴 때 뱀에 물려 다리 힘줄이 굳어버린 소년이었다. 거기다가 그는 '손의 동굴' 사람들이 받고 있는 대우도 익히 보아 왔다. 그들이 배불리 먹을 수 있는 것은 모든 용사들이 충분히 먹고도 남을 때뿐이었다. 갑자기 불안해진 그는 또래의 형제들이 모여 있던 곳으로 황급히 눈을 돌렸다. 그러나 조금 전까지도 요란스럽게 떠들며 놀던 그들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늦었다. 이미 그 애들은 자기들끼리의 작은 사냥을 떠났다..."

그리고 다시 낭패한 듯한 그의 얼굴을 잠시 살피던 '위대한 어머니'는 이번에는 약간 누그러진 음성으로 말했다.

"내일부터는 결코 그들로부터 떨어져 나오지 마라. 언제나 그들과 함께 행동해라. 그들이 던질 때 너도 던지고 그들이 쏠 때 너도 쏘아라. 그들이 달리면 너도 달리고 그들이 웃으면 너도 웃어라......." (p.156-157)

 

그도 곧 숲가의 관목 사이를 헤치고 달려오는 들소를 보았다. 처음 그 소는 똑바로 '뱀눈'을 향해서 돌진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어느새 바위 위에 올라가 똑바로 창을 던질 자세를 취하고 있는 '뱀눈' 바로 곁에서 소는 갑자기 방향을 바꾸었다. 그 순간 그는 비로소 '뱀눈'에게 속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견 소는 '뱀눈'을 피해 가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은 '뱀눈'이 올라 서 있는 한 길 남짓한 바위를 피해 간 것이었다. 거기다가 소가 방향을 바꿀 때 소의 가장 넓은 옆면이 그대로 '뱀눈'에게 노출되었다. '뱀눈'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런 소에게 창을 날렸다. 창은 어김없이 소의 질긴 뱃가죽을 뚫고 깊숙이 박혔다. 결국 '뱀눈'은 가장 안전한 곳에서 '맨 먼저 찌른 자'란 며예를 확보한 셈이었다. 더군다나 그 바위는 풀숲에서 드러나 있어 큰아버지들에게는 '뱀눈'의 용기와 힘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무대와도 같았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그런 것을 한스러워하고 있을 틈이 없었다. 옆구리에 창을 받은 들소는 바로 그를 향해 돌진해 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황급히 창을 겨누었다. 그러나 달려오는 들소의 정면은 '뱀눈'이 맞힌 넓은 옆면의 삼분의 일도 안되었다. 남은 것은 정면대결뿐이었다. 그는 혼신의 용기로 창을 고쳐 잡았다. 하지만 그는 곧 덮쳐오는 사나운 콧김과 거친 발굽 소리에, 고통과 분노로 불타는 두 분과 치명적인 일격으로 고양된 생명력이 뿜어내는 엄청난 살기에 그만 압도되고 말았다.

그는 거의 본능적으로 창을 거두고 '붉은 노을' 쪽으로 도망쳤다. 참으로 위험한 순간이었다. 때맞추어 '붉은 노을'이 달려오지 않았던들 그의 가슴은 여지없이 들소의 에리한 뿔에 찢어지고 말았을 것이다. 용감한 '붉은 노을'의 창은 정확히 들소의 심장을 찔렀다. 달려온 기세 때문에 창날은 더욱 깊이 박혔다. 그리고 그 반작용으로 튕겨나간 '붉은 노을'이 도끼를 빼어들고 이어날 때쯤 달려온 '새벽 안개'의 창이 다시 가세했다.

잠시 후 그가 가수와도 흡사한 마비상태에서 깨어났을 때 일은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벌써 대여섯 개의 창을 받은 들소는 겉으로는 사납게 부르짖으며 날뛰고 있어도 거의 방향감각을 잃은 상태였다. 미숙한 사냥꾼들도 자신을 되찾아 빼어든 도끼로 그런 들소를 함부로 찍어대고 있었다.

그런데 그 후 오래오래 기억된 놀라운 일이 거기서 일어났다. 그때껏 그 바위 위에서 시키지도 않은 그 사냥의 지휘를 맡고 있던 '뱀눈'이 갑자기 뛰어내리더니 곧장 들소에게 달려가 그 날카롭고 긴 뿔을 잡았다. 소는 거칠게 떠받는 자세로 고개를 들었다. 그러다 이내 소의 목은 '뱀눈'의 힘에 눌려 꺾어지듯 힘 없이 아래로 처졌다. 그걸 보며 한 손을 뺀 '뱀눈'은 돌도끼로 소의 정수리를 힘차게 내리쳤다. 소는 움찔하더니 부르르 사지를 떨며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멀리서 보기에는 눈부신 '뱀눈'의 활약이었다. 그러나 그는 분명히 보았다. '뱀눈'이 뿔을 잡기 전에도 이미 소의 무릅은 몇 번이고 맥없이 꺾어지고 있었다. 번들거리는 두 눈에 짙게 어려 있는 것도 분명 꺼져 가는 생명의 고뇌였다. '뱀눈'이 안전한 바위에서 뛰어내린 것은 바로 그 모든 것을 확인한 후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날 '뱀눈'이 누린 영예는 대단한 것이었다. 세 번의 성년식에 한번 나올까말까 한 '뿔을 누른 자'란 칭호를 받았던 것이다. 그 밖에 다른 소년들도 각각 그들의 힘과 용기에 합당한 이름을 얻었다. 그런데 그가 얻은 이름은 치욕스럽게도 '소를 겁내는 자'였다. 창 한번 못 던지고 고함만 지른 '큰 울음 소리'도 겨우 '큰 목소리'로 이름이 바뀌었을 뿐이었다.

그는 으스스한 기운에 눈을 떴다. 잠들 때 이글거리도록 지펴 놓은 모닥불이 어느덧 가물가물 삭아지고 있었다. 동굴 속 입구가 구분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아직 날은 새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는 번갈아 드는 오한과 신열로 몸을 떨며 모아둔 나뭇가지를 한아름 모닥불 위에 얹었다. 이내 매캐한 연기가 동굴을 메우더니 불이 다시 활활 소리를 내며 타올랐다. 오한은 그 불로 곧 사라졌지만 대신 고통에 가까운 신열이 그를 엄습했다. 그러나 그 신열로 몽롱한 중에서도 그는 방금 꾼 그 생생한 꿈을 되살려 보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일찍이 늙은 스승은, 꿈이란 하늘이나 위대한 정령이 우리에게 어떤 게시로 내리는 것이라고 했었다. 그런데 이미 까마득히 사라져 버린 날들의 일이 지금에 와서 부쩍 자주 꿈속에 보이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오랜만에 돌아온 이 동굴이 어떤 신비한 힘으로 강력한 시간의 사슬을 풀어 버린 것일까. 그러면서도 다시 마른 풀더미 위에 누운 그는 이내 어수선한 잠 속으로 떨어졌다.

............'손의 동굴' 안이었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날렵한 손' 곁에 그와 귀머거리, 그리고 '독사의 저주'가 앉아 있었다. 그들은 모두 '날렵한 손'의 지시에 따라 도끼 자루에 무늬를 새기려는 중이었다. (p.162-165)

 

원래 그 동굴 안의 작업장은 거동이 불편한 사람ㄷ믈이 일하는 곳이었다. 그들은 그곳에 앉아서 날라 주는 창 자루나 화살을 다듬고 거기에 혈족을 상징하는 무늬를 새기거나 그 임자의 무훈과 이력을 과시하는 장식을 달았다. 그런데 그에게는 오히려 그곳이 견딜 만했다. 새기거나 그린다는 것은 그에게는 어릴 때부터 익숙한 작업이었다. 함께 보내졌던 '큰 목소리'가 그렇게 빨리 떠나 버린 것에 비해 그가 오랫동안 '손의 동굴'에 남아 있을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그 때문이었다. 진작부터 멀리 산 아래에 있다는 평원 지방과 그곳의 낯선 세계에 대한 열렬한 동경을 품어 왔던 '큰 목소리'는 '손의 동굴'에서 맞게 된 첫번째 봄에 벌써 자기의 꿈을 따라 떠나 버렸던 것이다.

그가 그 동굴 안의 생활에 싫증을 느끼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두 번째의 봄을 맞고서부터였다. 단순하고 공식화된 무늬와 변화없는 기법의 반복은 점점 그를 지치고 짜증나게 했다. 그는 도형화된 사물의 부분을 그리기보다는 자기의 눈으로 본 전체를 표현하고 싶었다. 결정된 대상을 그리지 않고 스스로 선택하여 그리고 싶었다. 그러나 '손의 동굴'에서는 그것이 인정되지 않았다. (p.166-167)

 

뒤이어 그들이 실제로 그려야 할 차례가 왔다. '날렵한 손'은 먼저 그들에게 독수리의 깃털 무늬를 물푸레나무 자루에다 새기라고 지시했다. 그는 그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자기도 모르게 깃털이 아니라 당당한 날개를, 날카로운 부리와 억센 발톱을 그려 가기 시작했다. 갑자기 두눈덩이에 번쩍 불이 일었다. 어느새 그의 엉뚱한 행동을 주시하고 있던 '날렵한 손'이 세차게 따귀를 후려친 것이다.

"이 건방진 놈. 사지가 멀쩡하면서도 소가 무서워 도망이나 다닌 주제에 - 시키는 짓은 하지 않고...."

"이 무늬는 우리의 핏줄을 표시하는 신성한 것이야. 물론 네가 '날렵한 손'이란 이름을 얻게 되면 네게도 자신의 무늬를 그릴 자격이 생긴다. 하지만 그때에도 그것을 용사들의 도끼자루에 새겨 넣기 위해서는 그들의 동의가 필요해. 그런데 - 있는 무늬조차 아직 제대로 못 그리는 주제에, 건방진 놈."

숨이 자주 가쁜 '날렵한 손'은 그러면서도 그가 그린 독수리를 다시 한번 살폈다.

"더구나 이것은 무늬가 아니고 그림이다. '신비의 동굴'에서나 그려져야 할 신성한 그림을 아무데서나 그리는 것은 거기에 행해지는 주술의 효과를 감하는 불경한 짓이야. 너는 어디까지나 '손의 동굴'에 속해 있어. 너는 식구들이 요구한 것만을 그려야 해. 네 입에 냄새나는 양꼬리 고기라도 처넣으려면...." (p.168)

 

우선은 건강을 회복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렇게 생각한 그는 닷히 모닥불 곁으로 돌아가기 전에 잠시 빗속에 잠긴 숲과 봉우리들을 깊은 애정으로 바라보았다. 한번 떠나간 후 오랫동안 그리워했던 것들이었다. 그러자 가까운 활엽수 잎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 탓이었을까. 그는 자신도 모르게 어느 우울한 날의 회상 속으로 떨어졌다. (p.170)

 

평소 무심코 지나쳤지만 꽤 깊은 바위 그늘이었다. 그는 겨우 비를 피할 정도의 잎새에 앉아 망연히 그의 앞길에 남겨진 괴롭고 긴 세월을 생각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음울한 사념중에도 무심코 주위를 살피던 그는 문득 맞은편 바위벽에 기대 세워진 창 한 자루를 보았다. 몹시 눈에 익은 것이었다. 붉은색 띤 창날과 들말의 갈기로 만들어진 수술 - 바로 유명한 '뱀눈'의 창이었다.

그가 '손의 동굴'에서 괴롭고 쓸쓸한 세월을 보내고 있는 동안도 '뱀눈'은 눈부신 성공을 거듭했다. 성년식을 마치고 네 번의 봄이 나기도 전에 '뱀눈'은 자신의 목걸이에 벌써 맹수의 이빨과 발톱으로 가득 채우고 있었다. 공식적인 명칭도 '뿔을 누른 자'에서 '위대한 자'로 승격되었다.

그러나 그는 '뱀눈'의 그런 성공에 대해 몇 가지 석연찮은 점을 듣고 있었다. 가장 힘세고 용감한 데도 언제나 가장 큰 공은 '뱀눈'에게 빼앗기는 '붉은 노을'이 주로 털어놓은 것으로, 거기 따르면 '뱀눈'의 그런 성공은 간교한 꾀로 얻은 첫번째의 성공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어찌된 셈인지 동배는 물론 연상의 용사들까지도 몇 번에 한 번씩은 자기들의 공로를 '뱀눈'에게 양보한다는 것이었다. 즉 빈사의 사냥감을 '뱀눈' 쪽으로 몰아주어 그에게 결정적인 일격을 가하게 함으로써 그의 성공 횟수를 늘려 준다는 식이었다.

"놈은 무언가 그들에게 더러운 속임수를 쓰고 있어. 그들은 자기들의 양보다 더 큰 대가를 놈이 줄 수 있다고 굳게 믿는 것 같았어......"

그것이 '붉은 노을'의 불만스러운 결론이었다.

거기다가 그가 몇 번이나 손보아 준 '뱀눈'의 창도 여느 것들과는 달랐다. 그 붉은색의 창날은 '손의 동굴'에서 흔히 쓰는 현무암이나 수석 따위는 아니었다. 훨씬 무겁고 단단하면서도 질겼다. 날을 세우기는 힘들었지만 한번 세우기만 하면 다른 것들보다 훨씬 날카로워 더 깊고 치명적인 일격을 사냥감들에게 가할 수 있었다. (p.173-174)

(같이 읽으면 좋은 책)

역사를 바꾼 모략의 천재들 - 차이위치우 (김영진, 김영수 옮김, 들녘) 모략의 개정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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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옛날에는 우리들도 사물을 실제와 일치하게 그리려고 애를 썼다 .그때는 그림 자체가 무슨 특별한 힘을 가졌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점차 사람들은 그것이 불필요한 노력과 시간의 낭비라는 걸 깨달았다. 그림은 그저 우리가 자연과 위대한 정령에게 우리의 뜻을 전달하는 도구이며, 동료 인간들에게 나누어주는 믿음과 격려의 부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즉 자연과의 교감을 통하여 그려진 이 짐승들은 실제로 우리의 힘에 굴복하게 되리라는 따라서 중요한 것은 손바닥 자국을 벽에 찍듯 정확한 모사가 아니라 대상을 상징하는 힘이다. 그리고 그 힘은 대상이 가지는 몇 개의 특징을 굵고 강한 선으로 강조함으로써 얻어진다. 예를 들면 사슴의 뿔을 나타내는 몇 개의 선만으로 우리는 그것들을 교감적인 마술 속으로 잡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앞으로 네가 고려하여 얻어야 할 것은 바로 그 대상의 특징을 파악하는 힘이며 그것을 가능하면 단순하고 원초적인 선으로 처리하는 대담함이다."

그가 처음으로 이 동굴에 왔던 날 늙은 스승은 그의 그림을 보고 그렇게 말하였고 그 후 그도 대체로 그 원리에 충실했다. 그러나 지금은 모든 것이 달라졌다. 그는 이미 교감적인 마술의 도구로 그리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추구하고 있는 것은 그림 너머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였다. 가장 가치 있는 것의 생생한 화체 - 그렇게도 열렬하게 쫓았으나 결국은 한번도 잡지 못한 들소 그 자체를 이제 자신의 선과 색으로 잡아 보고 싶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큰 목소리'의 경멸에 찬 눈길과 비양거리는 어조가 떠올랐다.

"나의 목소리가 노래부르기 위한 노래에만 바쳐질 수 없듯이 너의 선과 색도 그림 그리기 위한 그림에만 바쳐질 수 없어. 이 땅 위에서 행해지는 것은 모두 무엇인가를 향해 있어. 우리는 그것을 위대한 정령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신비한 자연이라고 부르기도 하지. 그러나 사실은 모두 동료인 인간들을 향한 거야. 우리가 무엇을 하든 그들의 이익과 관심에서 멀어져 가면 이미 아무런 가치가 없어. 아니 그 이상 - 그것은 배반이야. 우리가 창자루를 잡거나 숲을 달리며 땀흘리지 않아도 그들이 우리에게 매일의 고기와 낟알을 보내 오는 것은 분명 그런 의무와 책임을 전제로 하는 것이야. 너의 선과 색은 절대로 너만의 것일 수가 없어."

하지만 나는 그들을 떠났다 - 그는 중얼거렸다. 나는 혼자다. 나는 그들과의 그런 불투명한 연계에서 탈출해 나왔다. 이제 이 선과 이 색은 나만의 것이다. 나를 충족시킴으로써 충분한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강렬하게 항변하고 있는 동안 문득 한가닥 불안이 그를 엄습하였다. 두텁게 그를 둘러싸고 말 못할 무게로 그를 죄어 오는 외로움 때문이었다. 지금과 동기는 다르지만 지난날에도 한번 그는 이와 비슷한 탈출을 시도해 본 적이 있었다. 그는 용감하게 낯익은 혈족들과 정든 땅을 버리고 떠났었다. 그러나 결국 그 외로움 때문에 돌아오고 말았다. 

그때 그가 도망치려 했던 것은 두 번째의 실패로 확정된 자신의 운명으로부터였다. 몇 번의 달이 차고 기울자 소뿔에 찢긴 어깨의 상처는 아물었찌만 짓밟힌 왼 무릎은 영영 그대로 굳어 버려 그는 어쩔 수 없이 '손의 동굴'과 그 굴욕적인 삶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무턱대고 낮은 곳을 향해서 출발했다. 멀리 평원 지방과 그곳의 기름진 들에 낟알을 가꾸며 산다는 온순한 사람들을 향해. 일찍이 '큰 목소리'가 커다란 동경을 품고 떠나갔던 세계였다.

그러나 채 하루가 되기도 전에 그는 새로운 종류의 고통을 경험했다. 홀로 있게 된다는 것 - 낯선 사람들과 낯선 세계에 홀로 떵러져 살게 된다는 것 - 바로 고독에 대한 공포였다. 거기다가 계절도 아주 나빴다. 마침 사슴이 뿔을 가는 달이어서 숲에서는 한줄기 나무순 한 톨 밤알조차 얻을 수 없었다. 결국 굶주림과 추위 속에 부락 주위를 배회하던 그는 떠난 지 사흘 만에 사냥나온 혈족에게 발견되어 되돌아오고 말았다. 

그렇지만 그 출발이 전혀 무의미한 것은 아니었다 - 그는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러자, 의심스럽던 혈통의 비밀이 밝혀지고 자기에게 새로운 생이 열리던 순간이 그의 눈앞에 다시 선명하게 떠올랐다. (p.181-184)

 

그는 숨을 죽인 채 소들을 관찰했다. 그들은 물을 마시고 소금기를 핥은 후에도 유유히 주변을 배회하며 신선한 풀을 듣었다. 그런 그들을 발굽에서 뿔 끝가지 터럭 하나 놓치지 않겠다고 살피고 있는 그의 가슴은 들소와 대면했던 지난날의 그 어느 때보다도 세차게 뛰고 있었다.

그때는 기껏 고기와 가죽을 얻기 위해서였지만 이제는 네 존재 자체이다. 이제 나는 너를 나만의 선과 색으로 영원히 잡아두고자 한다. 누구에게 바쳐지는 것도 아니고 영력을 얻기 위해서도 아니다. 가장 가치 있는 것의 화체 바로 그림 자체를 위해서이다....(p.192-193)

 

"나는 거기서 매우 불길한 조짐을 보고 왔어. 권력이 - 인간이 인간을 명령하고 강제하고 학대할 수 있는 힘이 발생하고 있었어. 몇몇 힘 세고 영리한 소수가 조직과 폭력으로 어리석고 약한 다수의 동료 위에 군림하려고 획책하고 있었어. 아무런 반대 급부 없이 동료의 생산을 빼앗고 대가 없는 노동을 강제하려고 했어. 아니 그 이상 생명 조차도 그들을 위해 바쳐 주기를 강요하고 있었어. 그리고 그렇게 해서 축적된 힘으로 동족인 인간들을 사냥하기 시작했어. 호랑이도 곰도 동족을 사냥하지는 않아. 혹 그들은 서로 싸워도 상대의 생명까지 끊는 법은 없어. 그러나 이들 영악한 인간들은 가혹하게 동족을 살해하고 살려두는 자도 죽은 것보다 못한 상태에 빠뜨렸어. 그런데 그런 싸움이 그 땅 어디선가 매일 벌어지고 있었어. 하늘의 진노보다 더 무서운 재앙이야. 또 나는 보았어. 우리의 목소리가 치명적으로 타락하고 악용되는 것을. 신화는 함부로 만들어지고 용자나 영웅은 조작되었어. 자연이나 위대한 정령에 바쳐지던 노래는 이제 그들 강하고 영악한 자들을 위해 불려졌어. 에언도 끝나 버렸어. 저 하늘의 목소리는 더 이상 그들에게 닿지 못하고 땅 위를 떠도는 것은 언제나 그들이 꾸며낸 거짓말과 깨어지게 되어 있는 약속뿐이었어. 그들이 자기들의 압제와 폭력에 복종하는 대가로 약속하는 것은 항상 보다 풍부한 식량과 안락한 주거였지만 한번도 이행되는 것은 보지 못했어. 혹 이행되어도 그것은 보다 큰 복종과 희생을 요구하기 위한 미끼에 지나지 않았어...

거기다가 더욱 나쁜 것은 그런 권력이 점점 더 소수의 사람에게 몰리는 경향이야. 나는 실제로 그곳에서 겪은 적이 있어. 단 한 사람을 위해 수천 수백의 사람들이 피를 쏟고 땀흘리는 땅을. 생각해봐. 그 땅이 얼마나 끔찍한 땅일까를."

그렇게 말하는 '큰 목소리'의 눈에는 늙은 스승들 못지 않게 번적이는 예지가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그곳에서는 벌써 네 것과 내 것이 엄격하게 구분되고 있어. 우리가 한 끼의 몫을 배당받는 것으로는 언뜻 이해할 수 없는 소유야. 그들은 필요한 시기와 범위를 넘어서 자기의 낟알과 고기와 가족을 가졌고, 동굴이나 움막, 심지어는 땅 위에서 금을 그어 네 것과 내 것을 구분했어.

너는 그것이 왜 그렇게 심각한 것인가를 모를 테지만, 생각해봐. 한 사람의 동궁레선 고기와 낟알이 썩어 가고 있는데 한편에서는 굶어 죽는 동료가 있다면 이 땅 또한 얼마나 끔찍한 것일까를. 물론 많이 가진 자는 가지지 못한 자를 게으름뱅이나 무능한 자로 비난해. 그리고 자기들의 근면과 인내를 과장함으로써 그 불평등을 합리화하려고 들지. 그러나 아니야. 몇몇을 제외하면 그들의 그 막대한 소유는 우연한 행운이나 비열한 수단, 또는 탈취에서 출발한 거야. 예컨대 우연히 열매가 풍부한 숲을 홀로 알게 되었거나 동료를 속였거나 힘으로 빼앗아 그걸 바탕으로 삼은 거야.

어쨌든 그들이 한번 여분을 확보하자 그 뒤는 더욱 나빴어. 소유는 탐욕을 부르고, 거기서 결국 내가 말한 그런 끔찍한 결과로 발전해 간 거야.

나는 실제로 한 바구니의 과일을 꾸어 먹고 두 바구니를 갚아야 하는 경우를 보았어. 하넌 꾼 자는 부지런히 따 모아도 빚을 갚고 나면, 여전히 아무것도 남지 않지만 빌려준 자는 여분을 한 바구니에서 두 바구니로 만들었어. 그리고 그 다음날에는 네 바구니로 불어날 거야. 또 나는 가지지 못한 자를 고용해서 한 바구니를 삵으로 주고 두 바구니를 따들이게 하는 경우도 보았어. 결과는 꾸어 먹은 경우와 비슷해어. 불행하게도 처음 뒤떨어진 자는 영원히 가진 자를 따라잡을 수 없게 돼."

거기서 '큰 목소리는'는 문득 침울하게 가라앉았다.

"결국 - 나는 그런 것들을 견딜 수 없었어. 그들의 지식은 축적을 거듭하고 도구의 발전도 놀라운 것이지만 그런 발전의 방향은 도무지 용서할 수 없었어. 그런데도 진실로 우려되는 것은 그런 그들의 제도와 습속이 광범위하고 급속하게 전파되는 경향이야. 내가 이 골짜기의 정령이 나를 부르는 소리를 들은 것은 바로 그 우려 속이었어. 돌아와 그것들이 우리들의 계곡과 혈족을 오염시키지 못하도록 지키라는 거였어...." (p.196-199)

 

그런데 '뱀눈'과 '달무리'가 그들을 찾아온 것은 바로 그날 밤이었다. 그들은 훌륭한 고기와 과일들을 손수 메고 왔다. 그리고 '뱀눈'은 말했다.

"슬픔은 잠시지만 앞으로 우리가 살아야 할 세월은 길다. 이제 그들이 떠났으니 남은 것은 우리들의 시대다. 우리는 그것을 준비하지 않으면 안된다. 

나는 알고 있다. 애초에 하늘의 목소리라는 것은 없고, 또 우리가 천 번 만 번 이 동굴 벽에 짐승들을 그린들 실제로는 그들의 터럭 하나 다치지 못한다는 것을. 그러나 또한 알고 있다. 너희들과 이 동굴은 조상들 중 가장 현명하고 사려깊은 분이 생각해 낸 유용한 제도와 장치라는 것을. 즉 하늘의 목소리에 자기들의 뜻을 가탁함으로써 그들은 쉽게 혈족들의 의사를 가지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통일할 수 있었고 그림이 가진 어떤 힘을 신뢰하게 함으로써 혈족의 전사를 용감하고 자신 있게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이제 혈족들을 이끄는 것은 우리들이 세대다. 나와 몇몇 동지들은 모든 용사들에게서 신뢰와 존경을 얻기에 충분한 힘과 용기를 보였었고, 너희들은 이 동굴의 주인이 되었다. 남은 것은 너희들의 목소리나 그림과 우리들의 뜻을 일치시키는 일이다.

우리를 신뢰해 달라. 우리에게 협조해 달라. 대신 나와 내 충실한 동료들은 약속한다. 앞으로 너희들은 지금껏 받은 그 어떤 대우보다 나은 대우를 받게 될 것이다. 혈족들은 그 어느 때보다 너희들을 우러르게 될 것이고, 이 동굴은 언제나 회상의 고기와 과일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사실 그는 '뱀눈'의 제안이 무엇을 뜻하는지 금세 알아들을 수 없었다. 다만 하늘의 목소리를 부정하는 그의 불경만이 섬뜩할 뿐이었다. 그러나 '큰 목소리'는 '뱀눈'의 뜻을 속속들이 이해한 것 같았다. 그는 잠깐 동안 생각에 잠기더니 평소처럼 침착하게 대답했다.

"하늘의 목소리와 인간의 목소리를 구분하는 것은 무익하다. 아무리 하늘의 목소리라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 혈족의 희생을 요구하는 불리를 가져온다면 나는 그것을 전하지 않을 것이다. 또 비록 그것이 인간의 뜻일지라도 우리 혈족의 이익과 일치하고 자연의 원리에 합당한 것이라면 나는 그 어느 때보다 크고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해 줄 것이다. 너의 제안에 대한 우리들의 대답은 오직 그뿐이다."

그 말을 들은 '뱀눈'은 잠시 날카롭게 '큰 목소리'를 쏘아보았다. 그러나 이내 교활한 미소를 지으며 '큰 목소리'에게 다가와 두 손을 잡았다.

"나의 뜻 역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훌륭한 사제자를 맞게 돼 기쁘다."

'뱀눈'은 마치 그들이 자신의 제안을 전폭적으로 수락한 것처럼 말했다.

그 후 모든 것은 '뱀눈'의 약속대로 이행되었다. 전보다 훨씬 많고 질 좋은 고괴와 과일들이 그들의 동굴로 보내졌고, 흰 수달이나 꽃사슴의 가죽으로 지은 화려한 제복이 올라왔다. '큰 목소리'에 물리쳐지고 말았지만 아름다운 처들이 보내지기도 하였다. 

그는 처음에는 감사와 기쁨으로 모든 것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런 감정의 반복은 곧 자신도 모르게 그것들을 보내 준 '뱀눈'에 대한 희미한 복종감으로 변질돼 갔다. 그런 그를 '큰 목소리'는 노골적인 경멸로 대하면서도 자신은 왠지 불안에 쫓기는 표정이었다.

그때쯤 '뱀눈'이 다시 그들의 동굴을 찾아왔다. 그 겨울이 끝나고 잎돋는 달이 돌아온 지 얼마 안돼서 였다. 그해에 있을 혈족의 중요한 행사가 결정되는 새봄의 축제가 사흘을 남기고 있었다. '뱀눈'은 그들의 복종을 거의 확신하고 있는 듯했다.

"약속의 날이 가까워 온다. 우리들은 이제 우리들의 혈족을 가장 강력하고 풍요한 집단으로 만들고 싶다. 모든 형제와 처들을 굶주림과 목마름의 공포에서 구하고자 한다.

나는 너희들을 통해서 하늘의 소리가 전해지기를 바란다. 너희들은 조직하고 축적하라. 최고의 결정은 최상의 인물에게, 각자에게는 각자의 분을.

그리고 또한 너희들의 그림을 통해서 길들여진 소와 영양이 우리에게 풍부한 괴기와 젖을 주고 가꾸어진 낟알이 우리 동굴에 가득한 것을 보여주고 싶다. 나는 불확실한 수렵과 소득 적은 채취에서 우리 혈족을 해방시키고자 한다..."

그는 그런 '뱀눈'의 제안을 별 경계 없이 받아들였다. 그러나 '큰 목소리'는 원인 모를 침묵으로 '뱀눈'을 대했다.

"결국 우리에게도 올 것이 왔어....."

'뱀눈'이 떠나자 '큰 목소리'는 침울하게 중얼거렸다.

"그래 결국 이것이 우리가 반드시 걸어야 할 길인가.." (p.201-204)

 

"나는 하늘의 목소리를 들었다. 인간의 의지로 조작된 것이 아닌 진정한 하늘의 목소리를...."

깊은 잠에서 억지로 깨난 그에게 '큰 목소리'는 빠르고 흥분한 어조로 말했다.

"그 목소리는 말하였다. 우리들은 어떠한 형태로든 인위적으로 조직되어선 안된다고. 아무리 훌륭한 대의와 현명한 원리로 이루어지더라도 조직은 필경 그 조직을 꾸민 자 또는 원하는 자의 이익에 봉사하게 되어 있다고. 또한 그 목소리는 경고하였다. 조직은 반드시 의사의 위임을 요구하며, 결정권의 집중을 가져올 것이라고. 거기서 반드시 한 수장이 태어나며, 처음 그는 '동배 중의 으뜸'으로 출발할 것이지만 이윽고는 도전할 수 없는 절대자로 우리들 위에 군림하게 되리라고.

각자의 분과 그 축적에 대해서도 - 그 목소리는 엄격하게 선언하였다. 각자의 분은 필요한 때와 한도 내에서만 인정돼야 하며, 어떠한 명목으로든 그 여분을 각자의 배타적인 지배 아래 축적되게 해서는 안된다고. 축적된 여분은 먼저 그 소유자를 지배하고 이윽고는 우리들의 대다수를 지배하게 되리라고."

그렇게 말하는 '큰 목소리'의 두 눈은 불면과 기묘한 열정으로 충혈되어 있었다.

"그리고 나는 또 이 눈으로 그 생생한 계시를 보았다. 일찍이 내가 평원 지방에서 겪었거나 예감했던 것보다 몇 배나 끔찍한 그 실례를.

그 하나는 거대한 인간의 산이었다. 맨 위에 한 사람이 서 있었고 그를 세 사람이 받들고 있었는데, 또 그 세 사람은 아홉 명의 사람이 지탱하고 있었다. 그 아래에는 또 그 세 배의 사람이 떠받들고...그런데 아래로 내려갈수록 한 사람이 감당하는 무게는 늘어갔다. 왜냐하면 첫번째 층에서는 세 사람이 하나를 지탱하면 되지만 두 번째 층에서는 아홉 사람이 네 사람을 그 다음은 스물일곱의 열셋을 그 다음은 여든하나가 마흔 명을 지탱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겨우 한 사람이 간신히 지탱할 수 있는 곳에서 그 사람의 산은 끝나 있었다. 아니 그 이상 벌써 그 산의 하부는 휘청거리고 흔들거리고 있었다. 다만 그 산이 형태를 유지하는 것은 바로 위의 계층에서 아래 게층에 끊임없이 휘두르는 채찍의 아픔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한가지 이상한 것은 위로 올라갈수록 사람들은 자기가 위험한 구조물 위에 서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는 점이다. 아마도 중간 계층의 완충 작용으로 최하부의 동요와 비틀거림을 모르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사람도 그 산이 무너질 경우 가장 치명적으로 상하는 것은 자기라는 자각만은 가지고 있어 그 막연한 불안 때문에 끊임없이 채찍을 휘둘러 댄다. 그 산이 그대로 지탱하든 무너져 내리든 얼마나 끔찍한 일이냐...

지천으로 쌓인 고기와 낟알 곁에서 굶어 죽어 가고 있는 동료들과 산더미 같은 털가죽 더미 속에서 벌거벗은 채 떨고 있는 동료들, 한 줌의 낟알을 위해 자기의 마지막 한 방울의 힘까지 짜내 이미 가진자를 더 많이 가지게 해주어야 하는 불행한 형제들과 한 토막의 고기를 위해 아무 곳에서나 웃으며 다리를 벌려 주어야 하는 불행한 자매들 - 그 필요의 시기와 범위를 벗어난 '각자의 분'이 가져온 결과도 나는 생시처럼 똑똑히 보았다.

설령 내일 밤 이 동굴에 날아드는 것이 날카로운 '뱀눈'의 창칼일지라도 나는 남의 불행과 손해 위에서 추구되는 그들의 행복과 이익을 승인할 수 없다. 다수의 고통과 결핍 위에서 구가되는 풍요와 안락을 용서할 수 없어....

나는 내일 나의 혈족들에게 내가 들은 이 목소리와 내가 본 환영을 전할 것이다. '뱀눈'과 그의 패거리가 약속하는 미래의 진상을 폭로하겠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큰 목소리'의 그런 걱정은 광기와 기우로밖에는 느껴지지 않았다. '뱀눈'의 그 간단한 요구와 끔찍한 결과는 머릿속에서 선뜻 연관지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은근히 불안스럽던 것은 '큰 목소리'의 그런 엉뚱한 결정으로 인해 자기들이 누려 온 지위와 혜택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p.204-207)

 

그러나 그런 그를 시종 분노의 눈으로 노려보던 '큰 목소리'는 자신의 차례가 돌아오자 단번에 그런 분위기를 흐트려 버렸다. '큰 목소리'는 하늘의 뜻을 빌어 혈족 안에서 나타나고 있는 불길한 조짐을 지적하고 그 끔찍한 결과를 경고했다. 그리고 맞대놓고 '뱀문'의 음모를 공격하고 그 패거리들을 비난했다. (p.209)

 

"오해하지 마라. 솔직히 말해서 나는 네 말을 잘 이해할 수 없었다. 거기다가 우리가 어른들로부터 권유받아 온 남자들의 품성 중의 하나는 약속은 지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비록 우리가 제안한 것도 아니고 명백히 답을 한 적도 없지만 우리가 '뱀눈'과 그 패거리가 보낸 고기를 받아들임으로써 무언의 약속이 이루어졌다고 나는 생각했다."

궁색한 변명이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큰 목소리'는 그의 변명을 차분한 어조로 수긍했다.

"나는 너의 비굴이 미웠다. 그러나 이제 그것이 비굴이 아니라 무지였던 이상 너를 미워할 까닭은 없다.

너는 그들에게 협조한 이유를 약속 때문이라고 말했지만 진실로 약속을 어긴 것은 바로 너였다.

너는 우리가 받은 고기를 '뱀눈'과 그의 패거리가 보낸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따. 그 고기는 비록 그들의 이름으로 보내졌지만 실은 우리 혈족 모두의 것이다. 우리가 이 동굴에서 몽상에나 잠기고 숯덩이나 매만지고 있는 동안 피땀 흘리며 산야를 달린 혈족 모두의.

그러므로 내가 노래를 부르는 것이나 네가 그림을 그리는 것이나 그것은 모두 혈족 전체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 힘 있고 많이 가진 자를 위해 부르는 노래는 진정한 노래가 아니고 그들의 욕망을 표상하거나 주거를 장식해 주는 그림 또한 진정한 그림일 수 업성. 우리는 저 천상의 기억을 - 아니 우리의 예지가 닿는 한의 가장 완성된 세계의 이상을 혈족 모두를 위해 간직해야 하며, 우리의 영감에 와 닿는 불길한 징후는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그것을 경고해 주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거부할 수 없는 약속이며, 자기들의 시선은 항시 먹이를 찾아 지상에 박혀있으면서도 우리로 하여금 저 먼 하늘나라와 그 희미한 기억에 시선을 줄 수 있게 보살펴 준 혈족들에 대한 보답이다. 그런데 너의 무지는 어겨서는 안될 그 약속을 어겨 버렸다..."

숨이 가쁜 듯 거기서 말을 멈춘 '큰 목소리'는 잠시 그를 찬찬히 살폈다.

"거기다가 네가 나의 맘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은 더욱 유감이다. 하지만 어쨌든 너는 나의 동료다. 나의 예감을 믿어 다오. 우리가 힘써 불길한 변혁을 막지 못한다면 우리들 대부분은 저 평원 지방에 있는 노에보다 더욱 비참하게 되리라는 것. 썩은 고기더미 옆에서 굶주리게 되고, 털가죽 더미 곁에서 추워 떨게 되리라는 것..."

그리고 다시 '큰 모소리'는 결연한 어조로 덧붙였다.

"나는 내일부터 이 동굴에서 내려가겠다. 우리의 동굴은 혈족들로부터 너무 멀고 일상은 유리되어 있다. 여기서는 그들의 변화를 감지할 길이 없고 '뱀눈'과 그 패거리가 꾸미는 음모의 진전도 파악할 길이 없다. 혈족들을 경고하고 설득할 길도 이제 나는 당분간 그들 속에서 행동하겠다. 가서 끊임없이 경고하고 설득하겠다. 음모는 폭로하고 기도는 분쇄하겠다..."

그러부터 '큰 목소리'는 정말로 하루의 대부분을 동굴 밖에서 보냈다. 어쩌다 내닺에 돌아올 때가 있어도 그것은 자신의 패거리들과 은밀한 화합을 하기 위해서일 뿐이었다. 

의외에도 '큰 목소리'에게 호응하는 혈족들은 많았다. 그러나 그 대부분은 나이가 든 용사들이었고, 젊고 팔팔한 용사는 몇 되지 않았다. 늙은 용사들은 대개 사제자에 대한 신뢰와 존경 때문에 '큰 목소리'를 따르는 것 같았다. 거기 비해 젊은이들은 한결같이 '뱀눈'에 대한 사적인 적개심과 원한으로 모여들었다. (p.210-213)

 

하지만 이튿날 의식의 차례가 '큰 목소리'에게 돌아갔을 때 그도 '뱀눈'도 속았음을 깨달았다. '큰 목소리'는 여던히 자기의 주장을 하늘의 목소리에 가탁하여 되풀이했다. 그리고 그 마지막엔 더욱 격렬하게 덧붙였다.

"당신들의 양보와 포기는 저자들의 음모를 보다 용이하게 만들고 그 패거리의 힘을 더하고 있다. 하지만 언제나 기억해라. 내주기는 쉽지만 되찾기는 어렵다는 것을.

더구나 저자의 손에는 우리의 진정한 용사 '붉은 노을'의 피가 묻어 있다. 그가 그렇게도 허망하게 죽어 간 것은 저자가 은밀하게 찔러넣은 뱀독 때문이었다. 나는 이제 하늘의 뜻으로 저자와 그 패거리에게 '붉은 노을'의 피값을 받아낼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큰 목소리'의 그런 절규는 곧 '뱀눈'의 패거리들이 지르는 성난 고함 소리와 욕설로 중단돼 버렸다. 그들은 뒤이어 저마다 무기를 뽑아 들고 '큰 목소리'를 둘러쌌다. '큰 목소리'는 여전히 이미 전달되지 않은 자신의 절규를 계속하였다. 그러나 '뱀눈'의 말대로 '큰 목소리'를 위해 달려나가는 용사는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불만스레 웅성거리는 것은 한쪽으로 밀려나 있던 노인들과 여자들 쪽이었다.

끝내 '큰 목소리'의 절규는 둘러싼 무리들의 가해 때문에 무거운 신음소리로 변했다. 하지만 여전히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다들 공포와 경악으로 망연히 보고만 있었다. 그때였다. 냉정한 눈으로 그 광경을 보고 있던 '뱀눈'이 천천히 자기의 창을 집으며 일어났다.

"멈추어라. 그리고 모두 물러나라."

우렁차고 당당한 목소리였다. 둘러쌌던 사람의 막이 열리자 드러난 큰 목소리'의 몸에서는 이미 군데군데 피가 스며나오고 있었다. '뱀눈'은 천천히 그리로 다가갔다. 그리고 날카로운 창 끝으로 '큰 목소리'를 찌를 듯이 겨누었다가 이내 거두었다.

"너는 하늘의 목소리를 멋대로 왜곡시켰고, 우리 혈족을 이간시켰으며 사냥에서 쓰러진 용사의 피를 내게 뿌려 모함했다. 내가 지금 너를 찌르지 않는 것은 형제의 피를 나의 창날에 묻히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일어나 당장 떠나거라. 그리고 다시는 너의 사악하고 비열한 모습을 이 숲과 우리들 앞에 나타내지 말아라.

네가 다시 내 눈앞에 서게 되면 이 창이 먼저 너를 맞으리라. 네가 다시 이 땅에 나타나면 숲의 정령은 번갯불로 너를 태우리라."

그러나 '큰 목소리'는 상처가 심한지 숨만 거칠게 헐떡이고 있었다. '뱀눈'은 다시 무거운 침묵 속에 둘러서 있는 혈족들을 향해 엄숙하게 말했다.

"누구든지 나의 결정에 반대하는 자가 있으면 서슴없이 말해 주기 바란다. 저자의 거짓을 믿는 자. 내가 받은 모함을 의심하는 자도."

여전히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어는새 '뱀눈'의 주위를 저항할 수 없는 위엄이 무슨 찬란한 빛처럼 감돌고 있었다. '큰 목소리'를 위해 혼신의 힘으로 짜낸 그의 용기도 '뱀눈'의 그런 위엄 앞에서 어이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그런 혈족들의 동태를 하나하나 확인하듯 살피던 '뱀눈'은 다시 새로운 제의를 했다. 전보다 더 자신 있고 힘 실린 어조였다.

"다시는 이런 위험 있고 거짓에 찬 사제자를 갖는 일이 없도록 나는 당신들에게 제의한다. 사제자를 결정하는 권한을 늙은 어머니('위대한 어머니')로부터 회수하도록 하자. 보다 사려 깊고 현명한 판단을 가진 사람에게 맡기려는 것이다. 하늘의 뜻을 자의로 조작하지 않고 우리에게 보다 살기 좋은 앞날을 제시하는 사제자를 얻기 위해서이다. 어떤가? 여러분의 뜻은 어떠한가?"

그러자 그의 패거리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떠들었다. 

"당신의 생각이 옳다. 그리고 그 적임자는 바로 당신이다. 당신을 빼놓고는 아무도 올바르게 판단하지 못한다."

그런 자기 패의 외침을 들은 '뱀눈'은 다시 그 차갑고 깜박이지 않는 눈으로 혈족들을 찬찬히 쏘아보았다. 그러자 그의 눈길을 받은 곳부터 차례대로 짜낸 듯한 찬성의 외침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뱀눈'의 얼굴에 희미한 만족의 표정이 떠올랐다.

"좋다. 나는 여러분의 신뢰를 진심으로 감사하며 받아들인다."

그리고 잠깐 말을 중단한 '뱀눈'은 혈족들의 환호가 끝나기를 기다려 다시 계속했다.

"나는 비로 이 자리에서 '애기꾼'을 새로운 사제자로 추전한다. 나는 오래 전부터 그의 귀가 하늘과 위대한 정령들의 소리를 들을 만하다는 걸 알고 있다. 그의 시선도 우리와 함께 땅에 머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언제나 저 높은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얼핏 경박스러워 보이는 익살과 재치도 - 나는 사제자의 한 중요한 품성임을 확신한다. 오의와 신성의 가식으로 하늘의 뜻을 애매와 추상 속에 방치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누구 그보다 더 나은 사제자를 추천할 수 있는가? 보다 휼륭한 우리들의 목소리를 알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

이번에는 보다 빠르고 광범위한 동의가 여기저기서 환성과 함께 터져나왔다. 그제서야 '뱀눈'은 다시 '큰 목소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사이 '큰 목소리'는 일어나 있었다. 그러나 몸을 지탱하는 것이 몹시 힘들어 보였다.

"마지막으로 할 말은 없는가? 이곳에 머물고 싶다는 뻔뻔스러운 희망 외에는 무엇이든 허락한다."

그러자 '큰 목소리'는 금방 불이라도 쏟아질 것 같은 눈길로 천천히 주위를 돌아보더니 격앙된 어조로 말했다.

"나는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 있다는 걸 알고 있다. 그것은 고독이다. 그러나 이제 나는 기꺼이 그것을 향해 떠난다. 왜냐하면 앞으로 당신들이 맞을 것은 그 고독보다도 훨씬 고통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당신들 자신의 나약한 비겁으로 사들인 압제이다. 물론 당장은 아니다. 그러나 반드시 그날은 온다. 이것이 내가 마지막으로 당신들에게 전하는 하늘의 목소리다.

하지만 한가지 중요한 것을 당신들에게 깨우쳐 준다. 그날이 오거든 반드시 기억하라. 그와 그의 패거리가 아무리 강하고 크게 보이더라도, 당신들의 동의 위에 서 있지 않는 한 그들이 잡고 있는 것은 반 토막의 검에 불과하다. 나머지 반 토막은 언제나 당신들 손에 있다. 그러면 잘 있거라. 형제들이여. 그래도 나는 자유인으로 떠난다."

그리고 결연히 돌아선 '큰 목소리'는 비틀거리며 숲 속으로 사라졌다. 갑자기 숙연해진 분위기 속에서 몇몇 여인만이 소리 없이 흐느끼고 있었다.

"그의 거짓 에언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자유란 우리가 종종 속기 쉬운 환상에 불과하다. 우리가 안전한 나무에서 내려와 함께 모여 살기 시작한 이래 진정한 자유란 한번도 없었다. 그것은 언제나 열망의 형태로만 존재했다. 왜냐하면 모여 산다는 것은 바로 우리가 어떤 질서와 규율밑에 있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껏 우리가 스스로를 자유롭다고 착각하게 된 것은 그 질서와 규율이 동물적인 혈연에 근거해 있었다는 것과 은밀하고 교묘한 통치 기술 때문이었다. 당신들은 그 환상에 집착하기보단 오히려 그것들을 혐오해야 한다..."

언제부터 준비해 온 것인지 '애기꾼'의 목소리는 사제자로서 조금도 손색이 없었다. 혈족들은 어리둥절해서 그 새로운 사제자를 바라보았다.

"- 따라서 나는 당신들의 사제자로서 최초로 하늘의 목소리를 전한다. 방금 그 목소리는 내 심중에서 속삭였다. 이제 그 낡고 불합리한 제도와 기술은 타파되어야 한다고. 우리 혈족은 보다 정연하고 조리 있게 조직되어야 하며, 경험과 직관에만 맡겨졌던 그 기술도 객관적으로 제도화해야 한다고. 그 모든 것 위에는 가장 용기 있고 슬기로운 '동배 중의 으뜸'이 있어 우리를 대신해 판단하고 결정해야 한다고. 그것이 우리를 강대하게 만드는 지름길이며 풍요와 안락을 확보하게 되는 최선의 수단이라고.

리고 - 그 목소리는 또한 나로 하여금 당신들에게 묻기를 요구한다. 그 '동배 중의 으뜸'으로 여기 선 이 '위대한 자(뱀눈)'가 어떨까고."

그러나 '뱀눈'의 패거리를 중심으로 한 동의의 함성이 무슨 큰 파문처럼 혈족 사이를 퍼져 나갔다. 몇몇은 '뱀눈' 앞으로 달려나와 위대한 정령에게나 합당한 숭배와 복종의 자세를 취했다.

"그러면 하늘의 뜻과 당신들의 희망이 일치하였음을 나는 한 사제자로서 확인한다. 이제부터는 아무도 그를 '동배 중의 으뜸' 이상 다른 이름으로 불러서는 안된다. 누구도 그의 결정을 거부할 수 없고 그의 판단을 의심해서는 안된다..."

결국 '뱀눈'과 그의 패거리들은 '큰 목소리'가 그들을 타도하려고 기다리던 그날의 축ㅈ에에서 오히려 모든 것을 뜻대로 이루었다. 그리고 그들의 승리감은 묘하게도 점점 다른 혈족들에게도 전파되어 그날의 축제는 그 어느 때보다 열띠고 흥겨운 것이 되어 갔다.

그런데 반쯤 불에 그을린 '큰 목소리'의 시체가 그들 혈족 앞으로 운반돼 온 것은 그 이튿날 아침이었다. (p.216-223)

 

그 뒤 그들의 혈족은 많이 변했다. 자연적인 생활 집단이었던 그들은 점차 전투 조직으로 변해갔다. 그 조직을 이루는 원리는 오직 전투에서의 능률과 효과였다. 혈연적인 배분이나 연장에 대한 존경 같은 이전의 위계는 철저하게 부인되었다. 그리고 그 정점에는 이제는 '존엄한 분'으로 승격된 '뱀눈'과 그 패거리가 무겁게 얹혀져 있었다.

그리고 조직을 개혁한 '뱀눈'이 제일 먼저 착수한 것은 그 산록에 흩어져 살고 있는 동계 혈족의 통합이었다. 그리하여 '큰 목소리'가 죽고 채 두 해도 지나지 않아 본시 전체가 백오십 명 남짓하던 그들 혈족은 전사만 수백 명을 거느린 씨족으로 성장했다.

각자의 소유는 엄격하게 보호되었다. 그리고 그 비호 아래서 혈족자들은 개인의 소유를 늘려 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큰 목소리'가 우려하던 사태는 발생하지 않았다. '뱀눈'이나 그의 막료들은 아직도 근원적인 형제 감정을 혈족들에게 품고 있어 터무니없는 횡포나 압제를 가히는 일은 없었다. 식량이나 피복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변혁 초기에는 분업화하고 조직된 노동이 가져온 생산의 확대가 불필요한 착취를 막아 주었고 후기에는 강대한 힘을 배경으로 한 약탈이 그들을 결핍에서 구해 주었다.

오히려 '뱀눈'의 약속대로 그들은 강대해지고 풍요해졌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본능적으로 그 모든 발전이 결국은 '큰 목소리'의 에언을 실현해 가는 과정에 지나지 않음을 감지하였다. 실제로도 그들 혈족은 많은 피해를 입고 있었다.

그 두 해의 정복과 약탈을 위한 전투에서 죽거나 상한 용사의 수는 사냥에서 생기는 손실의 몇 배가 넘었다. 그것들이 쉽게 그들 혈족들의 의식에 표면화되지 않은 것은 다만 죽은 자의 침묵과 살아 있는 자의 탐욕 때문이었다. 더 많은 전리품을 차지하게 됨으로써 산 자는 죽은 형제들의 고통을 잊어버리는 것이었다. (p.224-225)

 

"우리가 남보다 좀 큰 목소리를 가졌다고 해서, 혹은 남보다 더 잘 선과 색을 다룰 수 있다 해서 그게 바로 우리에게 무슨 특별한 의무를 부여하는 것은 아니야. 물론 우리는 남보다 더 밝은 눈과 에민한 귀를 가져을지 모르지. 그러나 그것으로 그뿐이야. 우리가 무슨 노래를 부르고 무슨 그림을 그리든 세우러(역사)은 제 갈 길을 갈 뿐이야. 우리는 그저 변혁을 느낄 수 있을 뿐이지. 그것을 일으키거나 막을 힘까지는 없어. 낡은 신념에 매달려서 이미 밀려오는 것을 막으려 들거나 아직도 멀리 있는 것을 앞당기려고 서두르는 것은 마찬가지로 어리석은 일이야. 그건 이미 진실의 문제가 아니라 능력의 문제야.

결국 우리도 씨족의 한 평범한 구성원에 지나지 않아. 우리가 다른 구성원과 다른 것은 그들이 자기의 창과 칼로 먹이를 얻는 데 비해 우리는 노래나 그림으로 우리의 먹이를 얻는 것뿐이야...." (p.229)

 

"사람은 현란하게 꾸며진 말을 벗기면 모두 저마다의 소를 좇고 있을 뿐이에요. '벰눈'은 권력의 소를 좇고, '달무리'는 그 '뱀눈'이 나누어주는 부귀의 소를 좇는 식으로...그런데 제가 좇는 소가 무엇인지 아세요? 그것은 풍요와 안락의 소예요. 그리고 '뱀눈'을 좋아한 것은 그가 바로 그것들을 줄 수 있기 때문이죠. 이제 '뱀눈' 아닌 사람이 나를 데려간다 하더라도 그가 그런 것들을 줄 수 있다면 또 좋아질 수 있을 거예요. 더구나 그의 부족은 강성하고 그의 가축떼는 들판을 덮고 있어요. 그런데 내가 무엇 때문에 슬퍼하고 괴로워해야 하죠?"

그 말을 듣자 그는 원인 모를 안도와 함께 전보다 몇 배나 더 깊은 음울에 빠졌다. 그녀는 그런 그를 한동안 저으기 보더니 갑자기 다정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물론 당신처럼 무엇을 좇는지 얼른 알 수 없는 사람도 있죠. 당신은 그림을 그려 주고 '뱀눈'으로부터 고기와 가죽을 얻고 있지만 그게 바로 당신이 좇고 있는 소가 아닌것은 분명해요. 당신은 무언가 다른 소를 좇고 있는데, 물론 잡을 수만 있다면 그 어떤 소보다 훌륭할 테지만 사실 그것을 잡을 수 없는 환상의 소예요.

당신은 당신이 내게 보내준 그 오랜 애정을 제가 모르고 있는 줄 아세요? 그러나 내게도 당신의 진심이 몇 번이나 가슴 저리게 와 닿은 적이 있었어요. 하지만 철이 들면서 나는 알았어요. 당신은 나와 다른 소를 좇고 있고, 그 소는 아마 이 세상에선 잡히지 않으리라는 걸. 그래서 당신의 인생은 쓸쓸하고 고통스러울 것이라는 걸. 내가 당신을 피한 것은 바로 그런 당신의 운명이었어요.

만약 우리가 힘들여 먹이를 구하지 않아도 되고, 애써 이 땅 위의 더위와 추위를 피하지 않아도 된다면, 나도 누구보다도 당신을 나의 짝으로 선택하고 사랑했을 거예요. 그러면 나도 당신처럼 환상을 사랑하고 아름답고 진실한 것만 추구할 수도 있을 테니까. 그러나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은 환상은 반드시 깨어지게 되어 있고, 아름다움과 진실도 필경엔 한 토막의 고기보다 못하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아, 가엾은 사람..."

그녀도 결국은 자신의 감정을 이기지 못한 듯 음울하게 수그린 그의 머리를 껴안고 몇 번이고 그의 이마에 입맞추었다. 그리고 그의 두 눈 가득 흐르는 희열의 눈물을 조용히 훔쳐 주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내 그런 감상에서 깨어났다.

"자, 모두들 기다리겠어요. 이제 그만 나가 보지 않겠어요?"

다시 침착하고 무감동한 목소리였다. (p.232-233)

 

만족하고 웃고 떠드는 '뱀눈'과 그의 충실한 부하들, 구리빛 근육을 자랑하며 춤추는 전사들과 아름다운 여인들. 오 너희들은 너무 즐겁고 행복해 보이는구나. 나도 일찍이 너희들과 같은 소를 좇아야 했다. 그것을 위해 모든 단련과 준비를 게을리 말았어야 했다. 저 먼 하늘에 그렇게도 자주 동경의 눈길을 보내지 말았어야 했고, 스러지고 말 아름다움에 그렇게도 무모하게 집착하지 않았어야 했다. 그러나 이제는 모든 것이 끝나 버렸다. 무자비한 시간은 다시 지나간 날들을 되돌려주지 않는다...

그런데 그때였다. 그의 쓰라린 상념 사이를 한 줄기 빠르고 예리한 빛처럼 스쳐가는 목소리가 있었다. 바로 '초원의 꽃'의 목소리였다.

"물론 잡을 수만 있다면 당신의 소는 그 어떤 소보다 훌륭할 테지만..."

그렇다면 나의 소는 어떤 것일까. 그녀가 말했듯 내가 '뱀눈'에게 봉사하고 얻는 고기는 나의 소가 아니다. 산과 수렵 생활을 떠난 지금 그림이 가졌던 실용으로서의 주술도 의미를 잃었다. 그렇다고 '큰 목소리'처럼 낡은 이념의 희생으로 쓰러져야 할 것인가. 공허한 하늘의 목소리에 의지해서 강력한 인간의 조직과 그것이 가진 힘에 부딪쳐서 깨어져야 할 것인가. 언제 싹틀지 모르는 사상의 씨앗을 뿌린 것만으로 자신을 저 끝 모를 죽음과 허무의 심연에 던져 버려야 할 것인가.

그의 상념이 거기에 이르자 그는 다시 한번 암담한 절망에 빠졌다.

혹 나는 너무 일찍 태어났거나 너무 늦게 이 땅에 온 것이 아닐까. 나의 소는 이 땅에는 없는 것이 아닐까.

그리하여 그 축제의 광장을 빠져나온 그가 전혀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된 것은 그 새벽의 으스름 속이었다. 지금까지 그가 추구해 온 것은 '그림 너머'의 혹은 '그림으로써' 얻어지는 어떤 것이었다. 말하자면 그림은 하나의 종속적 가치로서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이나 도구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그가 새로운 추구의 대상으로 찾아낸 것은 그림 그 자체, 표상된 선과 색의 완전성이 가지는 가치였다. (p.234-235)

 

"나는....나의 소를....잡으러 떠나오...." (p.236)

 

그래. 소를 잡아야지. 나의 선과 색은 아직도 완전한 소를 잡지 못하고 있어. 그 등허리에 내리쬐는 부드러운 햇빛도 잡지 못했고, 털끝을 불어가는 미풍도 잡지 못했어. 따뜻한 콧김과 더 깊은 곳에서 숨쉬고 있는 싱싱한 생명력도. 그는 다시 관솔가지를 찾기위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마음뿐이었다. 그 시각 그의 병들고 지친 육신은 꺼져 가는 생명의 불꽃을 지켜보며 가늘게 경련하고 있었다. (p.237-238)

 

필론과 돼지 - 이문열 (RHK 이문열 중단편전집 1) 개정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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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열(李文烈, 1948년 5월 18일 ~ )

대한민국의 소설가이며, 한국외국어대학교 석좌교수이다. 본관은 재령이다.

서울시 종로구 청운동에서 태어났다. 한국 전쟁 당시 공산주의자였던 아버지 이원철(李元喆)이 홀로 월북하였다. 아버지 이원철(일명 김환영)이 월북한 이후 그는 어머니 조남현(曹南鉉)의 슬하에서 5남매가 경상북도 영양군 등지를 떠돌아다니며 어렵게 살았다.
초등학교 졸업을 제외하고는 모두 검정고시이며, 이후 안동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1965년 안동고등학교를 중퇴하고 한동안 방황하다가 검정고시에 합격하고 1968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에 입학했다. 1970년에는 사법시험에 응시한다며 서울대학교 국어교육과를 중퇴하였다. 그러나 연좌제 등 여러 이유로 뜻을 이루지 못한다.
사법시험에 실패한 뒤 1973년 결혼과 동시에 군대에 입대했다. 그의 이런 생활이 기초가 되어 자전적 소설인 《젊은 날의 초상》을 쓰게 된다.

1977년 단편 《나자레를 아십니까》가 대구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가작으로 당선되면서 문인으로 등단했다. 이어 '대구매일신문' 편집기자를 지냈다. 1979년에는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새하곡(塞下曲)》이 당선되었다. 같은 해 중편 《사람의 아들》로 ‘오늘의 작가상’을 받으면서 왕성한 창작활동을 전개하여 1980년대에 가장 많은 독자를 확보한 작가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그의 소설의 특징은 탄탄한 구성과 문장의 탁월함으로, 자전적 요소가 강하게 드러나 있다. 주요작품으로는 《젊은날의 초상》(1981) 《황제를 위하여》(1982) 《영웅시대》(1987) 《변경(邊境)》 등이 있으며 《사람의 아들》 《그해 겨울》 《금시조》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등 소설집과 평역서인 《삼국지》와 《수호지》, 《초한지》가 있다. 또한, 동인문학상, 대한민국문학상, 이상문학상, 호암상(예술상) 등을 수상하였다.
한편 유신과 제5공화국의 권위주의적인 통치를 빗댄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을 통해 유명해졌다. 작품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서 반장 엄석대의 합법을 가장한 폭력, 규율을 가장한 폭력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폭력의 의미를 다시 보게 하였는데, 이는 박정희, 전두환 정권의 권위주의적인 태도를 희화, 풍자한 것이기도 했다. 작가 본인이 밝히기를, 작품 전반에 나오는 국민학교 5학년 때의 담임 선생님은 폭력적이고 반민주적인 독재 정권을 실리에 따라서 허락한 6~70년대 미국 외교 정책이고, 후반부에 등장하여 엄석대를 박살내놓은 6학년 때의 담임 선생님은 '경직되고 권위적인 이념'을 가리킨다. 세종대학교에서 교수직을 맡았으며, 1998년부터 부악문원의 대표로 있다. 작품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등의 작품들이 프랑스어, 스페인어, 독일어, 영어, 일본어 등으로 그의 작품이 번역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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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열 중단편 전집 (RHK 6권) 개정판

삼국지 - 이문열 (RHK) 개정판

초한지 - 이문열 (RHK) 개정판

수호지 - 이문열 (RHK) 개정판

변경 - 이문열 (RHK) 개정판

젊은날의 초상 - 이문열 (민음사 오늘의 작가 총서 12)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 이문열 (민음사 오늘의 작가 총서 20)

사람의 아들 - 이문열 (민음사)

황제를 위하여 - 이문열 (민음사 세계문학)

시인 - 이문열 (아침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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