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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
I. 한국 문학/2. 소설

바비도 - 김성한 (창비)

by handaikhan 2023. 3. 2.

창비 20세기 한국 소설 15

 

김성한 - 바비도 (1956년)

 

바비도는 1410년 이단으로 지목되어 분형을 받은 재봉직공이다. 당시의 왕은 헨리 4세, 후일의 헨리 5세다.

 

일찍이 위대하던 것들은 이제 부패하였다.

사제는 토끼 사냥에 바쁘고 사교는 회개와 순례를 팔아 별장을 샀다.

살찐 수도사들을 외면하고 위클리프의 영역 복음서를 몰래 읽는 백성들은 성서의 진리를 성직자의 독점에서 뺏고 독단과 위선의 껍데기를 벗기니 교회의 종소리는 헛되이 울리고 김빠진 찬송가는 먼지 낀 공기의 진동에 불과하였다. 불신과 냉소의 집중공격으로 송두리째 뒤흔들리는 교회를 지킬 유일한 방패는 이단분형령과 스미스필드의 사형장뿐이었다.

 

영역 복음서 비밀독회에서 돌아온 재봉직공 바비도는 일하던 손을 멈추고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희미한 등불은 연신 깜박인다. 가끔 무서운 소름이 온몸을 스쳐 지나갔다. 생각하면 할수록 못된 세상에 태어난 것만 같다. 순회재판소는 교구마다 돌아다니면서 차례차례로 이단을 숙청하고 있다. 내일은 이 교구가 걸려들 판이다. 성경만이 진리요, 그 밖의 모든 것은 성직자들의 허구라고 열변을 토하던 경애하던 지도자들도 대개 재판정에서는 영역을 읽는 것이 잘못이요, 성찬의 빵과 포도주는 틀림없이 그리스도의 살과 피라고 시인하고 전비(非)를 눈물로써 회개하였다. 자기와 나란히 앉아 같은 지도자의 혁신적 성서 강의를 듣고, 그 정당성을 인정하고, 그것을 목숨으로써 지키기를 맹세하던 같은 재봉직공이나 가죽직공들도 모두 맹세를 깨뜨리고 회개함으로써 목숨을 구하였다. 온 영국을 휩쓸고 있는 죽음의 공포 앞에서 구차한 생명들이 풀잎같이 떨고 있다. 권력을 쥔 자들은 권력 보지에 양심과 양식이 마비되어 이 폭풍에 장단을 맞추고, 힘없는 백성들은 생명의 보전이라는 동물의 본능에 다른 것을 돌아볼 여지가 없다.

어저께까지 옳았고, 아무리 생각하여도 아무리 보아도 틀림없이 옳던 것이 하루아침에 정반대인 극약으로 변하는 법이 있을 수 있는 일이냐? 비위에 맞으면 옳고 비위에 거슬리면 그르단 말이냐?

가난한 자, 괴로워하는 자를 구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본의일진대. 선천적으로 결정된 운명의 밧줄에 묶여서 라틴말을 배우지 못한 그들이, 쉬운 자기 말로 복음의 헤택을 받는 것이 어째서 사형을 받아야만 하는 극악무도한 짓이란 말이냐? 성찬의 빵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분신이니 신성하다지마는 아무리 보아도 빵이요 먹어도 빵이다. 포도주 역시 다를 것이 없다. 말짱한 정신으로는 거짓이 아니고야 어찌 인정할 도리가 있을 것이냐? 무슨 까닭에 벽을 문이라고 내미는 것이냐? 절대적으로 보면, 같은 수평선상에 서 있는 사람이 제멋대로 꾸며낸 것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할 근거가 어디 있단 말이냐?

바비도는 울화가 치밀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위로 로마 교황부터 아래는 사제에 이르기까지 거창한 조직체가 자기를 억누르고 목을 졸라매는 위압을 느꼈다. 전체 로마 교회와 일개 재봉직공과는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대조였다. 선택의 자유는 있을 수 없었다. 죽음이냐 굴복이냐 두 갈래 길밖에는 없다. 죽음.......소름이 끼친다. 등불에 비친 손을 어루만지고, 다시 손으로 얼굴을 만져보았다. 이 손, 이 얼굴이 타서 재가 되어버린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내 자체가 없어진다!

아무것도 없이, 생각이라는 것도 없어진다!

그는 공포에 떨었다.

그래도 사람이라는 것이 자기의 똑바른 마음을 속이지 않을 권리가 이 천하의 어느 한구석에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하는 자체가 현실에서는 망상이다. 이런 조건하에서도 흑백을 똑바로 말해야 하느냐? 그럼으로써 재가 되고, 영원한 시간의 흐름이 이 일점에 단 한 번 존재하는 이 주체가 없어져야만 하느냐?'

전신의 힘이 일시에 풀렸다.

'나같이 천한 놈이 양심을 안 속였다고 별수 있을 것도 아닌데....되는대로 대답하고 목숨을 구하는 것이 상책이 아닐까?'

이렇게 변명하면 할수록 마음속은 더욱더 께름칙하고 가슴이 답답하였다. 맥이 풀린 손에서는 일감이 저절로 떨어졌다.

일이 손에 붙지 않아서 그냥 자리에 드러누었다. 얼빠진 사람같이 등불을 물끄러미 보았다. 사형의 선풍이 전국을 휩쓸자 거짓 회개와 거짓 눈물을 방패로 앙달방달 이것을 막아내는 짓밟힌 백성들의 눈물겨운 모습이 눈앞에 선하다. 하루살이가 등불에 뛰어들어 씩 하고 죽는다.

'불행의 시초는 도대체 인간세상에 태어났다는 사실에 있따. 누가 이 세상에 나고 싶다고 했더냐? 이놈은 이 소리 하고 저놈은 저 소리하다가 자기 말을 안 듣는다고 도끼질할 권리는 어디서 얻었단 말이냐? 너희들은 자기가 옳다는 것, 아니 자기에게 이익되는 것을 창을 들고 남에게 가요할 권리가 있고, 나는 왜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내 자신만 행할 권리, 가슴에 간직할 권리조차 없단 말이냐?'

식은땀이 온몸을 적셨다.

'힘이다! 너희들이 가진 것도 힘이요, 내게 없는 것도 힘이다. 옳고 그른 것이 문제가 아니라 세고 약한 것이 문제다. 힘은 진리를 창조하고 변경하고 이것을 자기 집 문지기 개로 이용한다. 힘이여 저주를 받아라!'

바비도는 가래침을 뱉었다. 흉측한 힘의 낯짝에 검푸른 가래침을 뱉어 짓밟힌 자의 불붙는 증오심을 내뿜고 싶었다.

자리에서 핑 돌아누웠다.

가물거리는 등불과 더불어 그림자가 까막인다. 주먹으로 힘껏 벽을 두드렸다. 쿵 소리와 함께 약간 울리고는 도로 잠잠해진다. 벽에다 또 가래침을 뱉었다. 그는 자기 자신이 정의 자체인 양 참을 수 없이 화가 치밀었다. 힘이란 불의의 추구였다.

'가래침아, 너는 영원히 남아서 바비도의 모멸을 기념하여라!'

쳐다보니 일전에 주문을 받아 어저께 완성한 무에라고 하는 귀족의 옷이 걸려 있다. 그놈의 옷이 공연히 사람의 부아를 돋운다. 번개같이 일어나서 잡아채었다. 힘껏 마룻바닥에 내동댕이치고 짓밟았다. 그래도 시원치 않다. 옷을 겨누고 오줌을 쐈다.

이번에는 구석에 있는 궤짝이 밉살스럽다. 발길로 제겨찼다. 문짝이 부서졌다. 잡아서 모로 쓰러뜨리고 두 발로 힘껏 구르고 문질러서 쪼가쪼각 부숴버렸다. 사람이 꾸며낸 것은 무엇이든지 눈에 불이 나듯 원수 같았다. 닥치는 대로 찢고 물어뜯고 짓밟았다. 깜박이는 등불이 얄밉다. 문을 열어젖히고 힘 자라는 대로 멀리 냅다 던졌다.

숨을 허덕이면서 자리에 쓰러졌다. 사람 허울을 쓴 놈이 눈앞에 나타나기만 하면 단번에 모가지를 비틀어서 쑥 잡아빼어버리고 싶었다. 큼직한 빗자루가 있으면 영국에 사는 놈을 모조리 쓸어다가 템즈강에 처박고 침을 뱉어주고 싶었다. 이러고 저러고 꾸미고 죽이고 뽐내고 눈물을 짜고 애걸하고 손을 비비는 인간의 연극이여 저주를 받아라! (p.65-69)

 

"바비도, 한마디 회개한다고 말할 수 없느냐?"

사교는 애걸하는 어조였다.

"당신은 내게 강요하는 것을 모두 옳다구 확신하십니까?"

"그렇다."

사교는 서슴지 않고 대답하였다.

"그것은 당신 자신의 양심입니까?"

사교는 안색이 변하면서 입을 머뭇거리다가 손을 내저으면서 외쳤다.

"나는 조직, 교회라는 조직에 복종하는 사람이다. 내게는 교회의 명령이 있을 뿐이요 양심은 문제가 안된다."

"사람을 위한 교횐가요, 교회를 위한 사람인가요?"

"사람은 하느님의 교회에 모든 것을 바쳐야지. 교회 앞에서는 죄많은 사람은 보잘것없는 물건이야."

"그럼 사람은 교회의 도구에 불과하군요."

"도구라도 하느님의 도구니 얼마나 영광이냐?"

사교는 미소를 띠면서 바비도를 내려다보았다.

".........잘 알았습니다."

"그럼 회개한단 말이지?"

바비도는 고개를 옆으로 흔들었따.

"얼마든지 살길이 있는데 구태여 죽음을 택하는 그 심사를 모르겠구나."

"산다는 것과 존재한다는 것은 다른 문제죠. 당신같이 썩은 사람은 살아 있지도 않고 살 가망도 없습니다. 산송장이죠. 구데기가 이물이물하는."

"무슨 곡절이 있구나, 왜 그러지?"

"곡절은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명명백백한 것을 이리저리 비틀어 놓은 당신네들한테 있죠."

"도저히 안되겠느냐?"

"나는 나대로 인간을 폐업하렵니다. 이 인간사를 뛰어넘은 길을 가야겠습니다."

"아, 바비도..."

사교의 가슴속에서는 압도적인 교회조직에 억눌린 인간의 양심이 꿈틀거렸다. 바비도의 눈에서도 눈물이 한 방울 떨어졌다.

".........회개하지?"

바비도는 고개를 옆으로 흔들었다. 장내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머리를 떨어뜨리고 발끝만 보고 있다.

"........그럼 마지막으로 할 말은 없느냐?"

".........별로 없습니다. 다만 어지러운 이 인간세상에 태어난 것을 슬퍼할 뿐입니다." (p.72-74)

 

"..........죄의 씨는 영원히 퍼져서 걷잡을 수 없는 화를 가져오거던."

"선은 그 보수를 받고 악은 반드시 화를 당한다는 말씀이죠?"

"그렇지, 바비도."

태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사는 그렇지두 않은가봅니다. 우선 당신의 조상 헨리 2세만 하더라도 사냥터에서 쓰러진 자기 형의 시체를 팽개치구 부리나케 돌아와서 왕위를 가루채지 않았습니까? 자자손손이 그 덕분에 영화를 누리고 당신도 그 '악'의 헤택으로 일국의 태자요 장차의 천자가 아닙니까?......"

태자는 침을 삼키고 흥분한 빛을 띠었다.

".............나는 대대로 종살이하는 가난한 집에 태어나서 앉으라면 앉고 서라면 서고,, 일년 삼백육십여 일을 일만 해왔습니다. 이 손을 보시우, 남한테 싫은 소리 한마디 한 일 없고 남의 것을 넘겨다본 일도 없고 양심대로 살아오고 양심대로 말한 결과가 사형입니다."

"바비도, 나루선 더 할 말이 없는가부구나. 시비는 어떻든간에 너는 한마디만 하면 목숨을 구하고 새 출발을 할 수도 있지 않느냐? 나두 내 힘 자라는 데까지 앞날을 개척하는 데 조력하지."

바비도는 말없이 빙그레 웃었다.

"어때?"

"오히려 나는 내가 걸어온 길이 지금 생각하면 즐거운 길이었습니다. 이 길을 그냥 가렵니다. 다행히 하찮은 영혼이라도 없어지지 않고 지옥 한구석에 남아 있다면 오시는 걸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동안 될 수만 있으면 권력세계의 주역을 깨끗이 치르고 오십시오."

태자는 한숨을 쉬었다.

".........할 수 없구나, 법은 법이니까, 집행하라!"

"법......"

하고 빙그레 웃는 바비도에게 달려들어 사형 집행리들은 다시 포승으로 묶고 장작더미 위에 비끄러매었다.

바짝 마른 장작에 불은 순식간에 퍼져서 불길은 각각으로 바비도에게 육박하고 있었다.

고개를 떨어뜨리고 생각에 잠겨 있던 태자는 별안간 뛰어 일어나면서 고함을 질렀다.

"불을 꺼라, 사람을 끌어내려라!"

사형 집행리와 포졸들ㅇ른 벌떼같이 달려들어 불을 끄고 바비도를 끌어내렸다.

태자는 불티 묻은 옷을 털면서 연기에 거멓게 된 바비도를 달래기 시작하였다.

"바비도, 누가 옳고 그른 것은 논하지 말자, 하여간 네 목숨이 아깝구나."

"감사합니다."

"마음을 돌렸느냐?"

"그 뜻은 잘 알겠습니다마는 내 스스로 이 방에서 저 방으로 가는 심사로 떠나는 길이니 염려할 건 없습니다. 이미 동정으로 해결될  문제는 아닌가 합니다."

따에 주저앉은 바비도는 한마디 한마디 고요한 어조로 말하고 나서 맑게 갠 하늘을 쳐다보았다.

"도저히 안되겟느냐?"

바비도는 말없이 고개를 옆으로 흔들었다.

"할 수 없구나, 잘 가거라. 나는 오늘날까지 양심이라는 것은 비겁한 놈들의 겉치장이요, 정의는 권력의 버섯인 줄만 알았더니 그것들이 진짜로 존재한다는 것을 내 눈으로 보았다. 네가 무섭구나, 네가....."

 

스미스필드이 창공에는 다시 연기가 오르고 장작더미는 불을 토하였다. 이따금 일어나는 군중의 고함소리에 섞여서 한결 높은 폭소도 들려왔다.

한 생명은 연기와 더불어 사라지고, 구경에 도취한 군중이 흩어진 뒤에도 하늘은 여전히 푸르렀다. (p.78-80)

 

<사상계> 34호 (1956.5)

<김성한 중단편전집> (책세상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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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한(金聲翰, 1919년 1월 17일 ~ 2010년 9월 6일)

대한민국의 소설가이다. 본관은 김해(金海)이고 호(號)는 하남(霞南)이다.

1919년 1월 17일 함경남도 풍산에서 아버지 김병협과 어머니 강정 사이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1936년 한남중학교에 입학하였으며, 1940년 졸업 후에는 일본 야마구치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1943년 도쿄대학 법과에 입학하였으나 1944년 중퇴하였다. 해방 후인 1946년 서울대학교 문리대와 사범대, 한국외국어대학의 강사를 지냈다. 195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하였으며, 1955년 사상계사에 입사한 후에는 주간을 역임하였다. 1958년 사상계사를 퇴직한 후 1965년에는 영국으로 떠나 맨체스터대학교 대학원 석사과정에서 사학을 전공하여 인문과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1981년 퇴임할 때까지 동아일보사에서 근무하였으며, 1986년에는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이 되었다. 2010년 9월 6일 노환으로 타계하였다.
1950년 『서울신문』의 신춘문예에 단편 「무명로」가 당선되면서 문단 활동을 시작한 후, 단편 「김가성론」(1950)과 「암야행」(1954), 「제우스의 자살」(1955, 이후 「개구리」로 개제) 등으로 주목받았다. 특히 「오 분간」(1955)과 「바비도」(1956)는 평단의 주목을 각별하게 받은 작품이다. 이 시기 그는 동물을 통한 우화 기법이나 신화 또는 서구 역사의 일화를 변용한 알레고리 수법의 작품들을 주로 썼지만, 어디까지나 주요한 관심은 얼핏 보기에 낯선 시공간의 사건을 통해 전후의 부패하고 혼란스러웠던 한국사회를 풍자하고 비판하는 데 있었다. 1960년대 중반에 사학을 전공하면서 그의 관심은 역사소설로 옮아가 『이성계』(1966), 『이마』(1976), 『요하』(1980) 등을 상재하였으며, 1990년에는 대하역사소설 『임진왜란』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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