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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
I. 한국 문학/2. 소설

광염 소나타 - 김동인 (범우사 사루비아총서)

by handaikhan 2023. 3. 5.

범우 사루비아 총서

 

김동인 - 광염 소나타 (1930년)

 

독자는 이제 내가 쓰려는 이야기를, 유럽의 어떤 곳에 생긴 일이라고 생각하여도 좋다. 혹은 사오십 년 뒤에 조선을 무대로 생겨날 이야기라고 생각하여도 좋다. 다만 이 지구상의 어떤 곳에 이러한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있는지도 모르겠다. 혹은 있을지도 모르겠다. 가능성만은 있다 - 이만큼 알아두면 그만이다.

그런지라, 내가 여기 쓰려는 이야기의 주인공 되는 백성수를, 혹은 알베트라 생각하여도 좋을 것이요, 짐이라 생각하여도 좋을 것이요, 또는 호모나, 기무라모로 생각하여도 괜찮다. 다만 사람이라 하는 동물을 주인공 삼아가지고, 사람의 세상에서 생겨난 일인 줄만 알면.....

이러한 전제롰허 자, 그러면 내 이야기를 시작하자.

"기회(찬스)라는 것이 사람을 망하게도 하고 흥하게도 하는 거을 아시오?"

"네, 새삼스러이 연구할 문제도 아닐 걸요."

"자, 여기 어떤 상점이 있다 합시다. 그런데 마침 주인도 없고 사환도 없고 온통 비었을 적에 우연히 그 앞을 지나가던 신사가 - 그 신사는 재산도 있고 명망도 있는 점잖은 사람인 - 빈 상점을 들여다보고 혹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않어요? 텅 비었으니깐 도적놈이라도 넉넉히 들어갈 게다. 들어가서 훔치면 아무도 모를 테다. 집을 왜 이렇게 비워둔담.... 이런 생각 끝에 혹은 그 - 그 뭐랄가, 그 돌발적 변태심리로써 조그만 물건 하나(변변치도 않고 욕심도 안 나는)를 집어서 주머니에 넣는 경우가 있을지도 모르지 않겠습니까?"

"글쎄요."

"있습니다, 있어요."

어떤 여름날 저녁이었었다. 도회를 떠난 교외 어떤 강변에 두 노인이 앉아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 기회론을 주장하는 사람은 유명한 음악 비평가 K 씨였다. 듣는 사람은 사회 교화자의 모씨였었다.

"글쎄, 있을까요?"

"있어요 - 좌간 있다 가정하고, 그러한 경우에 그 책임은 어디 있습니까?"

"동양 속담 말에, 외밭에서는 신끈도 다시 매지 말랬으니, 그 신사가 책임을 질까요?"

"그래버리면 그뿐이지만, 그 신사는 점잖은 사람으로서 그런 절대적 기묘한 찬스만 아니더라면 그런 마음은커녕 염도 내지도 않을 사람이라 생각하면 어찌됩니까?"

"................"

"말하자면 죄는 '기회'에 있는데 '기회'라는 무형물은 벌을 할 수가 없으니깐 그 신사를 가해자로 인정할 수밖에는 지금은 없지요."

"그렇습니다."

"또 한 가지 - 사람의 천재라 하는 것도 경우에 따라서는 어떤 '기회'가 없으면 영구히 안 나타나고 마는 일이 있는데, 그 '기회'란 것이 어떤 사람에게서 그 사람의 '천재'와 '범죄 본능'을 한꺼번에 끌어내었다면 우리는 그 '기회'를 저주하여야겠습니까, 축복하여야겠습니까?"

"글쎄요."

"선생님, 백성수라는 사람을 아시오?"

"백성수? 저....기억이 없는데요."

"작고가로서 그............."

"네, 생각납니다. 유명한 - <광염 소나타>의 작가 말씀이지요?"

"네, 그 사람이 지금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모릅니다. - 뭐 발광했단 말이 있었는데......."

"네, 지금 **정신병원에 감금돼 있는데, 그 사람의 일대기를 이야기할 테니 들으시고 사회 교화자로서의 의견을 말씀해주십시오." (p.167-169)

 

그는 야인이었습니다. 공포스런 야성은 때때로 비위에 틀리면 선생을 두들기기가 예사이며, 우리 학교 근처의 술집이며 모든 상점 주인들은 그에게 매깨나 안 얻어맞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한 야성은 그의 음악 속에 풍부히 잠겨 있어서 오히려 그 야성적 힘이 그의 예술을 빛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학교를 졸업하고 난 뒤에는 그 야성은 다른 곳으로 발전되고 말았습니다.

술 - 술 - 무서운 술이었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저녁부터 아침까지 술잔이 그의 입에서 떠나지를 않았습니다. 그리고 술을 먹고는 여편네들에게 행패를 하고, 경찰에 구류를 당하고, 나와서는 또 같은 일을 하고..........

작품? 작품이 더 무엇이외까? 술을 먹은 뒤에 취흥에 겨워 때때로 피아노에 앉아서 즉흥으로 탄주를 하고 하였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 귀기가 사람을 엄습하는 힘과 야성(베토벤 이래로 근대 음악가에서 발견할 수 없던), 그건 - 보물이라 하여도 좋을 것이 많았지만, 우리들은 각각 제 길 닦기에 바쁜 사람이라 주정꾼의 즉흥악을 일일이 베껴둔다든가 그런 일은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들은 그의 장래를 생각하며 때때로 술을 삼가기를 권고하였지만, 그런 야인에게 친구의 권고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술? 술은 음악이다!"

하고는 하하하 웃어버리고 다시 술집으로 달아나고 합니다.

그러한 칠팔 년이 지난 뒤에 그는 아주 폐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술이 안 들어가면 그의 손은 떨렸습니다. 눈에는 눈물이 끼었습니다. 그리고 술이 들어가면 - 술만 들어가면 그는 그 광포성을 발휘하였습니다. 누구를 막론하고 붙잡고는 입에 술을 부어 넣어주었습니다. 그러다가는 장소를 불문하고 아무데나 누워서 잡니다.

사실 아까운 천재였습니다. 우리들 사이에는 때때로 그의 천분을 생각하고 아깝게 여기는 한숨이 있었지만 세상에서는 그 장래가 무서운 한 천재가 있었다는 것을 몰랐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그는 어떤 양가의 처녀와 어떻게 관계를 맺어서 애까지 뱄습니다. 그러나 그 애의 출생을 보지 못하고 아깝게도 심장마비로 죽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유복자로 세상에 나온 것이 백성수였습니다. (p.170-172)

(같이 읽으면 좋은 책)

어느 아편장이의 고백 - 토마스 드 퀸시 (김석희 옮김, 시공사 세계문학의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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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작년 이른 봄 어떤 날이었습니다.

그때 나는 조용한 밤중의 몇 시간씩을 **예배당에 가서 명상으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었습니다. 언덕위에 홀로 서 있는 집으로서 조용한 밤중에 혼자 앉아 있노라면 때때로 들보에서, 놀라서 깬 비둘기의 날개 소리와 간간이 기둥에서 뚝뚝 하는 소리밖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말하자면 나 같은 괴상한 성미를 가진 사람이 아니면 돈을 주면서 들어가래도 들어가지 않을 음침한 집이었습니다. 그러나 나 같은 명상을 즐기는 사람에게는 다른 데서 구하기 힘들도록 온갖 것을 가진 집이었습니다. 외따르고 조용하고 음침하며, 간간이 알지 못할 신비한 소리까지 들리며, 멀리서는 때때로 놀란 듯한 기적 소리도 들리는........이것만으로도 상당한데, 게다가 이 예배당에는 피아노도 한 대 있었습니다. 예배당에는 오르간은 있을지나 피아노가 있는 곳은 쉽지 않은 것으로서, 무슨 흥이나 날 때에는 피아노에 가서 한 곡조 두드리는 재미도 또한 괜찮았습니다.

그날 밤도 (아마 두 시는 지났을 걸요) 그 예배당에서 혼자서 눈을 감고 조용한 맛을 즐기고 있노라는데, 갑자기 저편 아래에서 재재 하는 소리가 납디다. 그래서 눈을 번쩍 뜨니까 화공이 충천하였는데, 내다보니까 언덕 아래 어떤 집이 불이 붙으며 사람들이 왔다갔다 야단이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어떨지 모르지만,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서 불붙는 것을 바라보는 맛도 괜찮은 것이었습니다. 일어서는 불길이며 퍼져가는 연기, 불씨의 날아나는 양, 그 가운데 거뭇거뭇 보이는 기둥, 집의 송장, 재재거리는 사람의 무리, 이런 것은 어떻게 생각하면 과연 시도 되며 음악도 될 것이었습니다. 옛날에 네로가 불붙는 것을 바라보면서 자기는 비파를 들고 노래를 하였다는 것도 음악가의 견지로 보면 그다지 나무랄 것이 아니었습니다.

나도 그때에 그 불을 보고 차차 흥이 났습니다.

"네로를 본받아서 나도 즉흥으로 한 곡조 두드려볼까."

어렴풋이 이런 생각을 하며 나는 그 불을 정신 없이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갑자기 덜컥덜컥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예배당 문이 열리며 웬 젊은 사람이 하나 낭패한 듯이 뛰어들어왔습니다. 그리고 무엇에 놀란 사람같이 두리번두리번 사면을 살피더니, 그래도 내가 있는 것을 못 보았는지, 저편에 있는 창 안에 가서 숨어 서서 아래서 붙은 불을 내려다봅니다.

나는 꼼짝을 못 하였습니다. 좌우간 심상스런 사람은 아니요, 방화범이나 도적으로밖에는 인정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꼼짝을 못 하고 서 있노라니까 그 사람은 한참 정신 없이 서 있다가 한숨을 쉽니다. 그리고 맥없이 두 팔을 늘이고 도로 나가려고 발을 데려다가 자기 곁에 피아노가 놓인 것을 보더니, 교의를 끌어다 놓고 앞에 주저앉고 말겠지요. 나도 거기에는 그만 직업적 흥미에 끌렸습니다. 그래서 무엇을 하나 보자 하고 있노라니까, 뚜껑을 열더니 한번 뚱 하고 시험을 해보아요. 그리고 조금 있더니 다시 뚱뚱 하고 시험을 해보겠지요.

이때부터 그의 숨소리가 차차 높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씩씩거리며 몹시 흥분된 사람같이 몸을 떨다가 벼락같이 양손을 키 위에 갖다가 덮었습니다. 그 다음 순간 Q 샤프 단음계의 알레그로가 시작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다만 흥미로써 그의 모양을 엿보고 있던 나는 그 알레그로가 울리어 나오는 순간 마음은 끝가지 긴장되고 흥분되었습니다.

그것은 순전한 야성적 음향이었습니다. 음악이라 하기에는 너무 힘있고 무기교이었습니다. 그러나 음악이 아니라기엔 거기에는 너무 괴롭고 무겁고 힘있는 '감정'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야반의 종소리와도 같이 사람의 마음을 무겁고 음침하게 하는 음향인 동시에 맹수의 부르짖음과 같이 사람으로 하여금 소름 돋히게 하는 무서운 감정의 발현이었습니다. 아아, 그 야성적 힘과 남성적 부르짖음, 그 아래 감추어 있는 침통한 주림과 아픔, 순박하고도 아무 기교가 없는 표현!

나는 털썩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음악가의 본능으로서 뜻하지 않고 주머니에서 오선지와 연필을 꺼냈습니다. 피아노의 울리어 나아가는 소리에 따라서 나의 연필은 오선지 위에서 뛰놀았습니다. 등불도 없는지라 손짐작으로.

- 좀 급속도로 시작된 빈곤, 거기 연하여 주림, 꺼져가는 불꽃과 같은 목숨, 그러한 것을 지나서 한참 연속되는 완서조의 압축된 감정, 감자기 튀어나오는 광포. 거기 연한 쾌미, 홍소 - 이리하여 주화조로서 탄주는 끝이 났습니다. 더구나 그 속에 나타나 있는 압축된 감정이며 주림, 또는 맹렬한 불길 등이 사람의 마음에 주는 그 처참함이며 광포성은 나로 하여금 아직 '문명'이라 하는 것의 은택에 목욕하여보지 못한 야인을 연상케 하였습니다.

탄주가 다 끝난 뒤에도 나는 정신을 못 차리고 망연히 앉아 있었습니다. 물론 조금이라도 음악의 소양이 있는 사람일 것 같으면, 이제 그 소나타를 음악에 대하여 정통으로 아무러한 수양도 받지 못한 사람이 다만 자기의 천재적 즉흥만으로 탄주한 것임을 알 것입니다. 해결도 없이 감칠도화현이며 증육도화현을 범벅으로 섞어놓았으며 금칙인 병행오팔도까지 집어넣은 것으로서, 더구나 스케르초는 온전히 뽑아 먹은 - 대담하다면 대담하고 무식하다면 무식하달 수도 있는 자유분방한 소나타였습니다.

이때에 문득 내 머리에 떠오른 것은 삼십 년 전에 심장마비로 죽은 백**였습니다. 그의 음악으로서, 만약 정통적 훈련만 뽑고 거기다가 야성을 더 집어넣으면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그 음악가의 것과 같은 것이 될 것어었습니다. 귀기가 사람을 엄습하는 듯한 그 힘과 방분스런 표현과 야성 - 이것은 근대 음악가에게 구하기 힘든 보물이었습니다. (p.173-177)

 

그는 피아노를 향해 앉아서 머리를 기울였습니다. 몇 번 손으로 키를 두드려보다가는 다시 머리를 기울이고 생각하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서 번, 여섯 번을 다시 하여보았으나 아무 효과도 없었습니다. 피아노에서 울려오는 음향은 규칙 없고 되지 않은 한낱 소음에 지나지 못하였습니다. 야성? 힘? 귀기? 그런 것은 없었습니다.

"선생님, 잘 안 됩니다."

그는 부끄러운 듯이 연하여 고개를 기울이며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두 시간도 못 돼서 벌써 잊어버린담?"

나는 그를 밀어놓고 내가 대신하여 피아노 앞에 앉아서 아까 베낀 그 음보를 놓았습니다. 그리고 내가 베낀 곳부터 타기 시작하였습니다.

화염! 화염, 빈곤, 주림, 야성적 힘, 기괴한 감금당한 감정! 음보를 보면서 타던 나는 스스로 흥분이 되었습니다. 미상불 그때는 내 눈은 마친 사람같이 번득였으며 얼굴은 흥분으로 새빨갛게 되었을 것이었습니다.

즉 그때에 그가 갑자기 달려들더니 나를 떠밀쳐버렸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대신하여 앉았습니다.

의자에서 떨어진 나는 그 자리에 앉은 대로 그의 양을 쳐다보았습니다. 그는 나를 밀쳐버린 다음에 그 음보를 들고서 읽기 시작하였습니다. 아마 그의 얼굴! 그의 숨소리가 차차 높아지면서 눈은 미친 사람과 같이 빛을 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더니 그 음보를 홱 내어던지며 문득 벼락같이 그의 두 손은 피아노 위에 덧업혔습니다.

C 샤프 단음계의 광포스런 소나타는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폭풍우 같이, 또는 무서운 물결같이 사람으로서 하여금 숨막히게 하는 그 힘 - 그것은 베토벤 이래로 근대 음악가에서 보지 못하던 광포스러운 야성이었습니다.

무섭고도 참담스런 주림, 빈곤, 압축된 감정, 거기서 튀어져나온 맹염, 공포, 홍소 - 아아, 나는 너무 숨이 답답하여 뜻하지 않고 두 손을 홱 내저었습니다. (p.180-181)

 

"이보세요."

K 씨는 편지를 보는 모씨를 찾았다.

"비상한 열정과 감격은 있어두, 그것이 그대로 표현 안 된것이 그것 때문이었습니다. 즉 성수의 어머니는 몹시 어진 사람으로서 어렸을 때부터 성수의 교육을 몹시 힘을 들여서 착한 사람이 되도록, 착한 사람이 되도록 이렇게 길렀습니다그려. 그 어진 교육 /때문에 그가 하늘에서 타고난 공포성과 야성이 표면상에 나타나지를 못하였습니다. 그 타오르는 야성적 열정과 힘이 음보로 그려놓으면 아주 힘없는, 말하자면 김빠진 술같이 되고 하는 것이 모두 그 때문이었습니다그려. 점잖고 어진 교훈이 그의 천분을 못 발휘하게 한 셈이지요."

"흠!"

"그것이, 그 사람 - 성수가, 감옥생활을 한 동안에 한번 씻기기는 하였으나, 그러나 사람의 교양이라 하는 것은 온전히 씻지는 못하는 것이외다. 그러다가 그 '원수'의 집 앞에서 갑자기, 말하자면 돌발적으로 야성과 공포성이 나타나서 불을 놓고 예배당 안에 숨어 서서 그 야성적 광포적 쾌미를 한껏 즐긴 다음에 그에게서 폭발하여 나온 것이 그 <광염 소나타>였구려. 일어서는 불길, 사람의 비명, 온갖 것을 무시하고 퍼져나가는 불의 세력 - 이런 것은 사실 야성적 쾌미 가운데 으뜸이 되는 것이니깐."

'..........."

"아셨습니까? 그러면 그 다음에 그 편지의 여기부터 또 보세요.: (p.188-189)

 

"어떤 '기회'라는 것이 어"떤 사람에게서, 그 사람의 가지고 있는 천재와 함께 범죄 본능까지 끌어내었다고 하면, 우리는 그 '기회'를 저주해야겠습니까, 혹은 축복하여야겠습니까. 이 성수의 일로 말하자면 방화, 사체 모욕, 시간, 살인, 온갖 죄를 다 범했어요. 우리 예술가 협회에서 별 수단을 다 써서 정부에 탄원하고 재판소에 탄원하고 해서, 겨우 성수를 정신병자라하는 명목 아래 정신병원에 감금했지 그렇지 않으면 당장에 사형이 아닙니까. 그런데 이제 그 편지를 보셔도 짐작하시겠지만, 통상시에는 그 사람은 아주 명민하고 점잖고 온화한 청년입니다. 그러나 때때로 그 - 뭐랄까. 그 흥분 때문에 눈이 아득하여져서 무서운 죄를 범하고 그 죄를 범한 다음에는 훌륭한 예술을 하나씩 산출합니다. 이런 경우에 우리는 범죄를 밉게 보아야 합니까, 혹은 범죄 때문에 생겨난 예술을 보아서 죄를 용서하여야 합니까?"

"그거야, 죄를 범치 않고 예술을 만들어냈으면 더 좋지 않습니까?"

"물론이지요. 그러나 성수 같은 사람도 있는 것이니깐 이런 경우엔 어떻게 해결하렵니까?"

"죄를 벌해야지요. 죄악이 성하는 것을 그냥 볼 수는 없습니다."

K 씨는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겠습니다. 하나 우리 예술가의 견지로는 또 이렇게 볼수도 있습니다. 베토벤 이후로는 음악이라 하는 것이 차차 힘이 빠져가서, 꽃이나 게집이나 찬미할 줄 알고 연얘나 칭송할 줄 알아서, 선이 굵은 것은 볼 수가 없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엄정한 작곡법이 있어서 그것은 마치 수학의 방정식과 같이 작곡에 대한 온갖 자유스런 경지를 제한해놓았으니깐, 이후에 생겨나는 음악은 새로운 길을 재촉하기 전에는 한 기술이 될 것이지 예술이 될 수는 없습니다. 예술가에게는 이것이 쓸쓸해요. 힘있는 예술, 선이 굵은 예술, 야성으로 충일된 예술 - 우리는 이것을 기다린 지 오랬습니다. 그럴 때에 백성수 하나가 모두 우리의 문화를 영구히 빛낼 보물입니다. 우리의 문화의 기념탑입니다. 방화? 살인? 변변치 않은 집개, 변변치 않은 사람개는 그의 예술의 하나가 산출되는 데 희생하라면 결코 아깝지 않습니다. 천 년에 한 번, 만 년에 한 번 날지 못 날지 모르는 큰 천재를, 몇 개의 변변치 않은 범죄를 구실로 이 세상에서 없이 하여버린다 하는 것은 더 큰 죄악이 아닐까요. 적어도 우리 예술가에게는 그렇게 생각됩니다."

K 씨는 마주앉은 노인에게 편지를 받아서 서랍에 집어넣었다. 새빨간 저녁해에 비치어서 그의 늙은 눈에는 눈물이 번득였다. (p.199-201)

 

약한자의 슬픔 - 김동인 (범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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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인(1900년 10월 2일~1951년 1월 5일)

일제강점기의 소설가, 문학평론가, 시인, 언론인이다.

1900년 평안남도 평양에서 출생했다. 본관은 전주(全州), 호는 금동(琴童)·춘사(春士)이다. 필명으로는 금동인(琴童人), 김시어딤, 동 문인(東 文仁) 등을 썼다. 평양교회 초대 장로였던 아버지 김대윤(金大潤)과 어머니 옥씨(玉氏) 사이의 3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1912년 기독교 학교인 평양 숭덕소학교(崇德小學校)를 졸업했고, 같은 해 숭실중학교(崇實中學校)에 입학했으나 1913년 중퇴했다. 1914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학원[東京學院] 중학부에 입학했으나, 학교가 폐쇄되어 1915년 메이지학원[明治學院] 중학부 2학년에 편입했다. 1917년 부친상으로 잠시 귀국했다가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같은 해 9월 가와바타화숙[川端畵塾]에 입학했다. 1919년 2월 일본 도쿄에서 한국 최초의 순문예 동인지인 『창조(創造)』를 자비로 간행했다. 창간호에 첫 단편소설 「약한 자의 슬픔」을발표했다. 같은 달 히비야공원[日比谷公園]에서 재일본동경조선유학생학우회(在日本朝鮮留學生學友會) 독립선언 행사에 참여해 체포되었다가 하루 만에 풀려나기도 했다. 3·1운동 직후인 1919년 3월 5일 귀국했고, 동생 김동평(金東平)의 부탁으로 격문을 기초한 혐의로 구속되었다가 같은 해 6월 26일 풀려났다. 1923년에는 창작집 『목숨』을 자비로 출판하고, 1924년 8월 『창조』의 후신격인 동인지 『영대(靈臺)』를 간행해 1925년 1월까지 발간했다. 1930년 9월부터 1931년 11월까지 『동아일보』에 첫 번째 장편 소설 「젊은 그들」을 연재했다. 1933년 4월 조선일보사 학예부에 근무했고, 1935년 12월부터 1937년 6월까지 월간 『야담(野談)』지를 발간했으며, 이 잡지를 통해 「광화사(狂畵師)」를 발표했다.
1938년 2월 4일자 『매일신보』에 산문 「국기」를 쓰며 내선일체와 황민화를 선전, 선동하면서부터 일제에 협력하는 글쓰기를 시작했다. 1939년 4월부터 5월까지 ‘북지(北支) 황군(皇軍) 위문 문단 사절’로 활동했다. 같은 해 10월 조선문인협회(朝鮮文人協會)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42년 1월 23일자 『매일신보』에「감격과 긴장」을 통해 태평양전쟁을 지지했으나, 같은 해 일본 천황을 ‘그 같은 자’라고 호칭했다가 7월 불경죄로 징역 8월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1943년 4월 출범한 조선문인보국회(朝鮮文人輔國會)에 참가해 6월 15일부터 소설희곡부회 상담역을 맡았다. 1944년 1월 20일 조선인 학병의 입영이 시작되자 같은 해 1월 19일부터 1월 28일에 걸쳐 「반도 민중의 황민화」를 연재했다. 1945년 3월 8일부터 11일까지 『매일신보』에 「전시생활 수감」을 게재했다. 이 밖에 잡지 『조광(朝光)』, 『신시대』 등에 친일소설 및 산문을 여러 편 남겼다.
광복 이후 1946년 1월 전조선문필가협회(全朝鮮文筆家協會) 결성을 주선했고, 1947년 3월 『백민』에 「망국인기(亡國人記)」, 1948년 3월부터 1949년 8월까지 『신천지』에 「문단 30년의 자취」 등을 게재했다. 1949년 7월 중풍으로 쓰러졌으며, 1951년 1·4후퇴 때 가족들이 피난간 사이 하왕십리 자택에서 사망했다. 작품 「배따라기」(1921)로 확고한 문명(文名)을 얻었고,「감자」(1925)·「광염(狂炎)소나타」(1929)·「발가락이 닮았다」(1932)·「붉은 산」(1932)·「김연실전(金姸實傳)」(1939) 등 수많은 단편을 발표해 한국 근대단편소설의 양식을 확립했다. 대표적인 역사소설로는 「젊은 그들」(1929)·「운현궁(雲峴宮)의 봄」(1933)·「대수양(大首陽)」(1941) 등이 있다. 평론으로는 「제월(霽月)씨의 평자적 가치(評者的價値)」를 비롯해 「조선근대소설고(朝鮮近代小說考)」(1929)·「춘원연구(春園硏究)」(1934·1935) 등이 있다. 그 밖에 「목숨」(1921)·「정희」·「시골 황서방」(1925)·「송동이」(1929)·「반역자(反逆者)」(1946) 등의 단편과 「여인(女人)」(1930)·「왕부(王府)의 낙조(落照)」(1935) 등의 장편소설이 있다. 1955년 『사상계』가 동인문학상을 제정해 1956년부터 시상을 시작했으며, 1987년부터는 조선일보사가 주관하고 있다. 사후 1964년 『동인전집』 전 10권과 1976년 『김동인전집』 전 7권 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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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 - 김동인 (문하과지성사)

운현궁의 봄 - 김동인 (문학사상)

김동인 단편선 (에세이퍼블리싱)

발가락이 닮았다 - 김동인 (애플북스)

감자 - 김동인 (현대문학)

감자 - 김동인 (글누림) 

감자 - 김동인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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