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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

I. 한국 문학/2. 소설82

삼포가는 길 - 황석영 (창비) 창비 20세기 한국소설 25 황석영 - 삼포가는 길 (1973년) 영달은 어디로 갈 것인가 궁리해보면서 잠깐 서 있었다. 새벽의 겨울바람이 매섭게 불어왔다. 밝아오는 아침 햇빛 아래 헐벗은 들판이 드러났고, 곳곳에 얼어붙은 시냇물이나 웅덩이가 반사되어 빛을 냈다. 바람 소리가 먼 데서부터 몰아쳐서 그가 섰는 창공을 베면서 지나갔다. 가지만 남은 나무들이 수십여 그루씩 들판가에서 바람에 흔들렸다. 그가 넉 달 전에 이곳을 찾았을 때에는 한참 추수기에 이르러었었고 이미 공사는 막판이었다. 곧 겨울이 오게 되면 공사가 새봄으로 연기될 테고 오래 머물 수 없으리라는 것을 그는 진작부터 예상했던 터였다. 아니나 다를까, 현장사무소가 사흘 전에 문을 닫았고, 영달이는 밥집에서 달아날 기회만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 2023. 2. 24.
불꽃 - 선우휘 (민음사) 민음사 오늘의 작가 총서 21 목차 테러리스트 불꽃 오리와 계급장 단독 강화 망향 묵시 희극배우 - 작품 해설 : 전후 세대 휴머니즘의 진폭 / 한기 선우휘 - 불꽃 (1957년) 산과 산, 또 산 이어간 산줄기와 굽이치는 골짜기. 영겁의 정적. 멀리서 보면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이 골짜기가 마치 푸른 모포를 드리운 것같이 부드러운 빛깔로 보였다. 그러나 골짜기를 뒤덮고 있는 관목의 가지와 잎사귀에 가리어 험한 바위가 짐승처럼 엎드리고, 담그면 손목이 끊길 것 같은 차디찬 냇물이 그 밑을 흐르고 있었다. 이 골짜기가 내려다보이는 서녘, 부엉산 산무라, 거기 동굴이 있었고 그 동굴을 등지고 고현은 앉아 있었다. 기대고 있는 바위가 퍽 차가웠다. 해가 산무라 뒤로 기울기 시작하면서 골짜기의 이편에 지어졌던 .. 2023. 2. 21.
무녀도 - 김동리 (창비) 창비 20세기 한국 소설 10 김동리 - 무녀도 (1936년) 뒤에 물러 누운 어둑어둑한 산, 앞으로 폭이 넓게 흐르는 검은 강물, 산마루로 들판으로 검은 강물 위로 모두 쏟아져내린 듯한 파아란 별들, 바야흐로 숨이 고비에 찬, 이슥한 밤중이다. 강가 모래펄에 큰 차일을 치고 차일 속엔 마을 여인들이 자욱이 앉아 무당의 시나위 가락에 취해 있다. 그녀들의 얼굴들은 분명히 슬픈 흥분과 새벽이 가까워 온 듯한 피곤에 젖어 있다. 무당은 바야흐로 청승에 자지러져 뼈도 살도 없는 혼령으로 화한 듯 가벼이 쾌잣자락을 날리며 돌아간다.... 이 그림이 그려진 것은 아버지가 장가를 들던 해라 하니, 나는 아직 세상에 태어나기도 이전의 일이다. 우리 집은 옛날의 소위 유서있는 가문으로, 재산과 문벌로도 떨쳤지만, 글 .. 2023. 2. 20.
별을 헨다 - 계용묵 (창비) 창비 20세기 한국 소설 10 산도 상상봉 맨 꼭대기에까지 추어올라 발뒤축을 도두들고 있는 목을 다 내빼어도 가로놓인 앞산의 그 높은 봉은 눈 아래 정복하는 수가 없다. 하늘과 맞닿은 듯이 일망무제로 끝도 없이 빠안히 터진 바다, 산너머 그 바다, 푸른 바다, 고향의 앞바다, 아아 그 바다 그리운 바다. 다시 한 번 발가락에 힘을 주고 지끗 뒤축을 들어본다. 금시 키가 자랐을 리 없다. 역시 눈앞에 우뚝 마주 서는 그놈의 산봉우리. "으아-" 소리나 넘겨 보내도 가슴이 시원할 것 같다. 목이 찢어져라 질러본다. "으아-" 그러나 소리 또한 그 봉우리를 헤어 넘지 못하고 중턱에 맞고는 저르릉 골안을 쓸데도 없이 울리며 되돌아와 맞는 산울림이 이켠 아래로 낙엽 긁기에 배바쁜 어머니의 가슴만을 놀래놓는다. 별.. 2023. 2. 19.
백치 아다다 - 계용묵 (창비) 창비 20세기 한국 소설 10 질그릇이 땅에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고 들렸는데 마당에는 아무도 없다. 부엌에 쥐가 들었나? 샛문을 열어 보려니까. "아 아 아이, 아아 아아!" 하는 소리가 뒤란 곁으로 들려온다. 샛문을 열려던 박씨는 뒷문을 밀었다. 장독대 밑 비스듬한 켠 아래 아다다가 입을 해벌리고 납작하니 엎더져 두 다리만을 힘없이 버르적거리고 있다. 그리고 머리 편으로 한발쯤 나가선 깨어진 동이 조작이 질서 없이 너저분하게 된장 속에 묻혀 있다. "아이구테나! 무슨 소린가 했더니 이년이 동애를 또 잡는구나! 이년아! 너더러 된장 푸래든, 푸래?" 어머니는 딸이 어딘가 다쳤는지 일어나지도 못하고 아파하는 데 가는 동정심보다 깨어진 동이만이 아깝게 눈에 보였던 것이다. "어 어마! 아다아다 아다 아다다다.. 2023. 2. 19.
요람기 - 오영수 (다림) 한빛문고 오영수 - 요람기 (1967년) 기차도 전기도 없었다. 라디오도 영화도 몰랐다. 그래도 소년은 고장 아이들과 함께 마냥 즐겁기만 했다. 봄이면 뻐꾸기 울음과 함께 진달래가 지천으로 피고, 가을이면 단풍과 감이 풍성하게 익는, 물 맑고 바람 시원한 산골 마을이었다. 먼 산골짜기에 얼룩얼룩 눈이 녹기 시작하고 흙바람이 불어 오면, 양지 쪽에 몰려 앉아 해바라기를 하던 고장의 아이들은 들로 뛰쳐나가 불놀이를 시작했다. 잔디가 고운 개울둑이나 논밭 두렁에 불을 놓는 것을 아이들은 '들불놀이'라고 했다. 겨우내 움츠리고 무료에 지친 아이들에게, 아직도 바람끝이 매운 이른 봄, 이 들불놀이만큼 신명나는 장난도 없었다. 바람이 없는 날, 불꽃은 잘 보이지 않으면서도 마치 흡수지가 물을 빨듯 꺼멓게 번져 가는.. 2023. 2. 9.
사랑손님과 어머니 - 주요섭 (창비) 창비 20세기 한국문학 주요섭 - 사랑손님과 어머니 (1935년) 나는 금년 여섯 살 난 처녀애입니다. 내 이름은 박옥희이구요. 우리집 식구라구는 세상에서 제일 이쁜 우리 어머니와 단 두 식구뿐이랍니다. 아차 큰일 났군. 외삼촌을 빼놓을 뻔했으니. 지금 중학교에 다니는 외삼촌은 어디를 그렇게 싸돌아다니는지 집에는 끼니때나 외에는 별로 붙어 있지를 않으니까 어떤 때는 한 주일씩 가도 외삼춘 코빼기도 못 보는 때가 많으니까요. 깜빡 잊어버리기도 예사지요, 무얼. 우리 어머니는, 그야말로 세상에서 둘도 없이 곱게 생긴 우리 어머니는, 금년 나이 스물네 살인데 과부랍니다. 과부가 무엇인지 나는 잘 몰라도 하여튼 동리 사람들이 날더러 '과부 딸'이라고들 부르니까 우리 어머니가 과부인 줄을 알지요. 남들은 다 아버.. 2023. 2. 6.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 이문열 (아침나라) 이문열 중단편집 4 이문열 -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1987년) 벌써 삼십 년ㄴ이 다 돼 가지만, 그해 봄에서 가을까지의 외롭고 힘들었던 싸움을 돌이켜 보면 언제나 그때처럼 막막하고 암담해진다. 어쩌면 그런 싸움이야말로 우리 살이(생)가 흔히 빠지게 되는 어떤 상태이고, 그래서 실은 아직도 내가 거기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받게 되는 느낌인지도 모르겠다. 자유당 정권이 아직은 그 마지막 기승을 부리고 있던 그 해 삼 월 중순, 나는 그때껏 자랑스레 다니던 서울의 명문 초등학교를 떠나 한 작은 읍의 별로 볼 것 없는 초등학교로 전학을 가게 되었다. 공무원이었다가 바람을 맞아 거기까지 날려간 아버지를 따라 가족 모두가 이사를 가게된 까닭이었는데, 그때 나는 열두 살에 갓 올라간 5학년이었다. (p.11.. 2023. 2. 5.
메밀꽃 필 무렵 - 이효석 (문학과지성사) 목차 (소설 19편/ 수필 1편) 도시와 유령 깨뜨려지는 홍등 마작철학 프레류드 돈 계절 산 들 석류 메밀꽃 필 무렵 삽화 개살구 장미 병들다 공상구락부 해바라기 여수 하얼빈 산협 풀잎 낙엽을 태우면서 ............................................................... 이효석 - 메밀꽃 필무렵 (1936년) 여름 장이란 애시당초에 글러서 해는 아직 중천에 있건만 장판은 벌써 쓸쓸하고 더운 햇발이 벌여놓은 전 휘장 밑으로 등줄기를 훅훅 볶는다. 마을 사람들은 거지반 돌아간 뒤요 팔리지 못한 나무꾼 패가 길거리에 궁싯거리고들 있으나 석유병이나 받고 고깃마리나 사면 족할 이 축들을 바라고 언제까지든지 버티고 있을 법은 없다. 츱츱스럽게 날아드는 파리 떼도 장난꾼 .. 2023. 2. 1.
날개 - 이상 (문학과지성사)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전집 16 목차 일러두기 12월 12일 지도의 암실 지팡이 역사(轢死) 황소와 도깨비 공포의 기록 동해(童骸) 날개 봉별기(逢別記) 실화(失花) 종생기(終生記) 주 작품 해설 이상의 삶과 문학 그리고 전위와 해체에 대하여 / 김주현 작가 연보 작품 목록 참고 문헌 기획의 말 ................................ 이상 - 날개 (1936년)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 나는 유쾌하오. 이런 때 연애까지 유쾌하오. (p.268) 육신이 흐느적흐느적하도록 피로했을 때만 정신이 은화처럼 맑소. 니코틴이 내 횟배 앓는 뱃속르로 스미면 머릿속에 으레 백지가 준비되는 법이오. 그 위에다 나는 위트와 패러독스를 바둑 포석처럼 늘어놓소. 가증할 상식의 병이오. 나는 또 여.. 2023. 2.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