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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
I. 한국 문학/2. 소설

무녀도 - 김동리 (창비)

by handaikhan 2023. 2. 20.

창비 20세기 한국 소설 10

 

김동리 - 무녀도 (1936년)

 

뒤에 물러 누운 어둑어둑한 산, 앞으로 폭이 넓게 흐르는 검은 강물, 산마루로 들판으로 검은 강물 위로 모두 쏟아져내린 듯한 파아란 별들, 바야흐로 숨이 고비에 찬, 이슥한 밤중이다. 강가 모래펄에 큰 차일을 치고 차일 속엔 마을 여인들이 자욱이 앉아 무당의 시나위 가락에 취해 있다. 그녀들의 얼굴들은 분명히 슬픈 흥분과 새벽이 가까워 온 듯한 피곤에 젖어 있다. 무당은 바야흐로 청승에 자지러져 뼈도 살도 없는 혼령으로 화한 듯 가벼이 쾌잣자락을 날리며 돌아간다....

이 그림이 그려진 것은 아버지가 장가를 들던 해라 하니, 나는 아직 세상에 태어나기도 이전의 일이다. 우리 집은 옛날의 소위 유서있는 가문으로, 재산과 문벌로도 떨쳤지만, 글 하는 선비란 것도 우글거렸고, 특히 진귀한 서화와 골동품으로서는 나라 안에서 손꼽힐 만큼 높이 일컬어졌었다. 그리고 이 서화와 골동품을 즐기는 취미는 아버지에서 아들로, 아들에서 다시 손자로, 대대 가산과 함께 물려져 내려오는 가풍이기도 했다. (P.53-54)

 

그들 아비 딸은 달포 동안이나 머물러 있으며 그림도 그리고 자기네의 지난 이야기도 자세히 하소연했다고 한다.

할아버지께서는 그들이 떠나는 날에 이 불행한 아비 딸을 위하여 값진 비단과 충분한 노자를 아끼지 않았으나, 나귀 위에 앉은 가련한 소녀의 얼굴에는 올 때나 조금도 다름없는 처절한 슬픔이 서려 있었을 뿐이라고 한다.

....소녀가 남기고 간 그림 - 이것을 할아버지께서는 '무녀도'라 불렀지만 - 과 함께 내가 할아버지로부터 전해 들은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p.55)

 

경주읍에서 성 밖으로 오 리쯤 나가서 조그만 마을이 있었다. 여민촌 혹은 잡성촌이라 불리어지는 마을이었다.

이 마을 한구석에 모화라는 무당이 살고 있었다. 모화서 들어온 사람이라 하여 모화라 부르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살고 있는 집은 마을의 어느 여염집과도 딴판이었다. 그것은 한 머리 찌그러져가는 묵은 기와집으로, 지붕 위에는 기와버섯이 퍼렇게 뻗어올라 역한 흙냄새를 풍기고 집 주위는 앙상한 돌담이 군데군데 헐린 채 옛 성처럼 꼬불꼬불 에워싸고 있었다. 이 돌담이 에워싼 안의 공지같이 넓은 마당에는 수채가 막힌 채, 빗물이 괴는 대로 일 년 내 시퍼런 물이끼가 뒤덮여 늘쟁이, 명아주, 강아지풀 그리고 이름도 모를 여러가지 잡풀들이 사람의 키도 묻힐 만큼 거멍게 엉키어 있었다. 그 아래로 뱀같이 길게 늘어진 지렁이와 두꺼비같이 늙은 개구리들이 구물거리고 움칠거리며 항시 밤이 들기만 기다릴 뿐으로, 이미 수십 년 혹은 수백 년 전에 벌써 사람의 자취와는 인연이 끊어진 도깨비굴 같기만 했다.

이 도깨비굴같이 낡고 헐린 집 속에 무녀 모화와 그 딸 낭이는 살고 있었다. 낭이의 아버지 되는 사람은 경주읍에서 칠십 리가량 떨어져 있는 동해변 어느 길목에서 해물가게를 보고 있는데, 풍문에 의하면 그는 낭이를 세상에 없이 끔찍이 생각하는 터이므로 봄가을 철이면 분 잘 핀 다시마와 조촐한 꼭지미역 같은 것을 가지고 다녀가곤 한다는 것이었다. 나중 욱이가 돌연히 나타나지 않았다면 이 도깨비굴 속에 그녀들을 찾는 사람이래야, 모화에게 굿을 청하러 오는 사람들과 봄가을에 한 번씩 낭이를 찾아주는 그녀의 아버지 정도로, 세상 사람들과는 별로 왕래도 없이 살아가는 쓸쓸한 어미, 딸이었던 것이다. (p.55-57)

 

욱이가 돌아온 뒤부터 이 도깨비굴 속에는 조금씩 사람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부엌에 들어서기를 그렇게 싫어하던 낭이도 욱이를 위하여는 가끔 밥을 짓는 것이었다. 그리고 밤이면 오직 컴컴한 어둠과 별빛만이 차 있던 이 허물어져가는 기왓집 처마 끝에도 희부연 종이 등불이 고요히 걸려지곤 했다.

욱이는 모화가 아직 모화마을에 살 때, 귀신이 지피기 전 어떤 남자와의 사이에 생긴 사생아였다. 그는 어릴 적부터 무척 총명하여 신동이란 소문까지 났으나 근본이 워낙 미천하여 마을에서는 순조롭게 공부를 시킬 수가 없어, 그가 아홉 살 되었을 때 아는 사람의 주선으로 어느 절간에 보낸 뒤, 그동안 한 십 년간 까맣게 소식조차 묘연하다가 얼마 전 표연히 이 집에 나타난 것이었다. 낭이와는 말하자면 어미를 같이하는 오뉘뻘이었다. 낭이가 대엿 살 되었을 때, 그때만해도 아직 병으로 귀가 멀어지기 전이라 "욱이" "욱이" 하고 몹시 그를 따르곤 했었다. 그러던 것이 욱이가 절간으로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낭이는 자리에 눕게 되어 꼭 삼 년 동안을 시름시름 앓고 나더니, 그길로 귀가 먹어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귀가 어느 정도로 먹은지는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한두 번 그의 어미를 향해 어눌하나마,

"우, 욱이 어디 가아서?"

이렇게 물은 적이 있었다. (p.60)

 

모화는 장에서 돌아와 처음 욱이를 보았을 때 그 푸른 얼굴에 난데없는 공포의 빛이 서리며 곧 어디로 달아날 것같이 한참 동안 어깨를 뒤틀고 허둥거리다 말고 별안간 그 후리후리한 키에 긴 두 팔을 벌려 흡사 무슨 큰 새가 저희 새끼를 품듯 달려들어 욱이를 안았다.

"이게 누고. 이게 누고. 아이고....내 아들아, 내 아들아!"

모화는 갑자기 목을 놓고 울었다.

"내 아들아, 내 아들아! 늬가 왔나, 늬가 왔나?"

모화는 앞뒤도 살피지 않고 온 얼굴을 눈물로 씻었다.

"오마니, 오마니."

욱이도 어미의 한쪽 어깨에 왼쪽 볼을 대고 오래도록 울었ㄷ. 어미를 닮아 허리가 날씬하고 목이 가는 이 열아홉 살 난 청년은 그동안 절간으로 어디로 외롭게 유랑해 다닌 사람 같지도 않게 품위가 있고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낭이도 그때에야 이 청년이 욱이인 것을 진정으로 깨닫는 모양이었다. 처음 혼자 방에 있는데 어떤 낯선 청년이 와서 방문을 열기에 너무도 놀라고 간이 뛰어 말 - 표정으로라도 - 한마디도 못하고 방구석에 서서 오들오들 떨고만 있었던 것이다. (p.61)

 

욱이는 그길로 이 지방의 예수교인들을 찾아보기로 했다. 그날 곧 돌아올 줄 알았던 욱이는 해가 지고 밤이 깊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모화와 낭이, 어미, 딸은 방구석에 음울하게 웅크리고 앉아 욱이가 돌아오기만 기다리는 것이었다.

"예수귀신 책 거 없나?"

모화는 얼마 뒤에 낭이더러 이렇게 물었따. 낭이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갑자기 낭이도 욱이의 그 <신약전서>란 책을 제가 맡아두지 않았음을 후회했다. 모화는 욱이의 <신약전서>를 '예수귀신 책"이라 불렀다. 모화는 분명히 욱이가 무슨 몹쓸 잡귀에 들린 것으로만 간주하는 모양이었다. 그것은 마치 욱이가 모화와 낭이를 으레 사귀 들린 여인들로 생각하는 것과도 같았다. 그는 모화뿐만 아니라 낭이까지도 어미의 사귀가 들어가서 벙어리가 된 것이라고 믿는 모양이었다. 

'예수 당시에도 사귀 들려 벙어리 된 자를 예수께서 몇 명이나 고쳐주시지 않았나.'

욱이는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자기 힘으로, 자기가 하느님께 열심으로 기도를 드림으로써 그 어미와 누이동생의 병을 고쳐야 한다고 마음속으로 굳게 결심하는 것이었다. 9p.66-67)

(같이 읽으면 좋은 책)

사람의 아들 예수 - 칼릴 지브란 (박영만 옮김, 프리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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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이었다.

밤중이나 되어 욱이가 잠결에 문득 그의 품속에 언제나 품고 있는 성경책을 더듬어보았을 때 품속이 허전함을 느꼈다. 그와 동시 웅얼웅얼하며 주문을 외우는 소리도 들려왔다. 자리에서 일어나 보았으나 품속에서 성경을 찾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낭이와 욱이 사이에 누워 있을 그의 어머니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어떤 불길하고 무서운 느낌에 몸이 부르르 떨리었다. 바로 그때였다. 그의 귀에는 땅속에서 귀신이 우는 듯한 웅얼웅얼하는, 주문을 외우는 듯한 소리가 좀더 또렷이 들려왔ㄷ. 순간 그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방에서 부엌으로 난 봉창 구멍에 눈을 갖다대었다.

"서역 십만 리 굶주리던 불귀신하

한쪽 손에 불을 들고 한쪽 손에 칼을 들고

.........

수놈이 멍멍 불꽃이 죽고

암놈이 멩멩 불씨가 죽고...."

모화는 소복 단장에 쾌자까지 두르고 온갖 몸짓, 갖은 교태를 다 부려가며 손을 비비다, 절을 하다, 덩싯거리며 춤을 추다 하고 있다. 부두막 위에는 깨끗한 접시불(들기름불)이 켜져 있고, 그 아래 차려진 소반 위에는 냉수 한 그릇과 흰 소금 한 접시가 놓여 있을 따름이다. 그리고 그 곁에는 지금 막 그 마지막 불꽃이 나불거리고 난 새빨간 불에서 파란 연기 한 오리가 오르는 <신약전서>의 두꺼운 표지는 한 머리 이미 파리한 재가 되어가고 있었다.

모화는 무엇에 도전이나 하는 것처럼 입가에 야릇한 냉소까지 띠며, 소반에 얹힌 접시의 소금을 집어 인제 연기마저 사라진 새까만 재 위에 뿌렸다.

"서역, 십만 리 에수귀신이 돌아간다.

당산에 가 노자 얻고 관묘에 가 신발 신고

....

춘삼월에 다시 오랴, 배가 고파 못 오겠다.."

모화의 음성은 마주 같은 향기를 풍기며 온 피부에 스며들었다. 그 보석 같은 두 눈의 교태와 쾌잣자락과 함께 나부끼는 손짓은 이제 차마 더 엿볼 수 없게 욱이의 심장을 쥐어짜는 것이었다. 욱이는 가위눌린 사람처럼 간신히 긴 숨을 내쉬며 뛰어 일어났다. 다음 순간, 자기 자신도 모르게 방문을 뛰어나온 그는, 부엌문을 박차고 들어가 소반 위에 차려놓은 냉수 그릇을 집어들려 하였다. 그러나 그가 냉수 그릇을 집어 들기 전에 모화의 손에는 식칼이 번득이고 있었고, 모화는 욱이와 물그릇 사이에 식칼을 두르며 조용히 춤을 추는 것이었다.

"엇쇠, 귀신아 물러서라.

너 이제 보아하니 서역 십만 리 굶주리던 잡귀신하

여기는 영주 비루봉 상상봉헤

깎아질린 돌벼랑헤, 쉰 길 청수헤, 엄나무 발에

너희 올 곳이 아니다

바른손헤 칼을 들고 왼손헤 불을 들고

엇쇠, 서역 잡귀신하, 썩 물러가라."

이때, 모화는 분명히 식칼로 욱이의 면상을 겨누어 치려 하였다. 순간 욱이는 모화의 칼날을 왼쪽 귓전에 느끼며 그의 겨드랑이 밑을 돌아 소반 위에 차려놓은 냉수 그릇을 들어 모화의 낯에다 그릇째 끼얹었다. 이 서슬에 접시의 불이 기울어져 봉창에 붙었다. 욱이는 봉창에서 방 안으로 붙어 들어가는 불길을 잡으려고 부뚜막 위로 뛰어 올랐다. 그러자 물그릇을 뒤집어쓰고 분노에 타는 모화는 욱이의 뒤를 쫓아 칼을 두르며 부뚜막으로 뛰어올랐다. 봉창에서 방 안으로 붙어들어가는 불길을 덮쳐 끄는 순간 뒷등어리가 찌르르하여 획 몸을 돌이키려 할 때 이미 피투성이가 된 그의 몸은 허옇게 이를 악물고 웃음 웃는 모화의 품속에 안겨져 있었다. (p.72-75)

 

그러나 '예수귀신'들은 결코 물러가지 않았을 뿐 아니라 점점 늘어만 갔다. 게다가 옛날 모화에게 굿과 푸닥거리를 빌러 다니던 사람들까지 예수귀신이 들기 시작하였다.

이러는 중에 서울서 또 부흥 목사가 내려왔다. 그는 기도를 드려서 병을 고치는 능력이 있다 하여 온 고을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그가 병자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이 죄인은 저이 죄로 말미암아 심히 괴로워하고 있사옵니다."

하고 기도를 올리면, 여자들은 월수병 대하증 쯤은 대개 '죄 씻음'을 받을 수 있었고, 그 밖에도 소경이 눈을 뜨고, 앉은뱅이가 걷고, 귀머거리가 듣고, 벙어리가 말하고, 반신불수와 지랄병까지 저희 믿음 여하에 따라 모두 '죄 씻음'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여자들의 은가락지 금반지가 나날이 수를 다투어 강단 위에 내걸리게 된다. 기부금이 쏟아진다. 이리 되면 모화의 굿 구경에 견줄 나위가 아니라고 하였다.

"양국놈들이 요술단을 꾸며왔어."

모화는 픽 웃고, 이렇게 말했다. 굿과 푸념으로 사람 속에 든 사귀 잡귀신을 쫓는 것은 지금까지 신령님께서 자기에게만 허락하신 자기의 특수한 권능이었다. 그리고 그의 신령님은 오늘날 예수꾼들이 그렇게도 미워하고 시기하는 고목이기도 했고, 산이기도 했고, 물이기도 했다.

"무당과 판수를 믿는 것은 절대적 한 분 밖에 안 계시는 거룩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께 죄가 됩니다."

'예수귀신'들이 나발을 불고 붉을 치며 비방을 하면, 모화는 혼자서 징을 울리고 꽹괴리를 치며,

"꽁무니에 불을 달고, 두 귀에 방울 달고, 왈강달강 왈강달강, 서역 십만 리로, 물러서라 잡귀신아."

이렇게 응수하곤 했다. (p.77-78)

 

 

<중앙>31호 (1936.5)

<김동리대표작선집> (삼성출판사, 1967)

<한국대표명작 : 김동리> (지학사, 1985)

 

창비 20세기 한국 소설 10 (개정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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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리(金東里, 본명: 김시종; 1913년 ~ 1995년 6월 17일)

대한민국의 소설가, 시인이다. 

본관은 선산(善山). 호적명이 김창귀(金昌貴), 족보명은 김태창(金太昌), 아명(兒名)은 창봉(昌鳳). 자는 시종(始鍾), 호는 동리(東里). 경상북도 경주 출생. 조선 초기의 문신 김종직(金宗直)의 17대 손으로 아버지는 김임수(金壬守)이다. 동리에게 아버지와 같은 존재인 큰형은 동양철학자 범부(凡父) 김기봉(金基鳳)이며, ‘동리’라는 호는 그가 지어준 것이다.
5남매의 막내로 태어난 동리는 어머니가 기독교인이었던 관계로, 기독교 계통의 학교에서만 수학하였다. 경주 제일교회 소속의 계남소학교와 대구의 계성중학교 및 서울로 편입한 경신중학교 모두 기독교 계통의 학교이다. 하지만 그의 학창 생활은 17세 되던 1929년 경신중학교를 중퇴하고 낙향하는 것으로 종료된다.
큰형의 제자였던 서정주(徐廷柱)와 교우 관계를 맺으면서, 그와 함께 한국문학사에 있어 순수문학의 전통을 수립하게 된다.
서라벌예술대학 교수를 거쳐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장을 역임하였고, 한국문인협회 회장 · 예술원 회장 · 한국소설가협회 회장 · 한일문화교류협회장 등 주요 문예 단체의 대표를 맡아 활발한 문단 활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1968년에 『월간문학』을 창간하였으며, 1973년에는 『한국문학』을 창간하였다.
193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 「백로(白鷺)」가 입선되면서 등단하였고, 이듬해 1935년 『조선중앙일보』 신춘문예에는 단편소설 「화랑(花郞)의 후예(後裔)」가 당선됨으로써 소설가로서 창작 활동을 펼치게 된다. 이어서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산화(山火)」가 또 다시 당선된다.
그리하여 본격적인 창작 활동을 시작한 그는 단편 「무녀도(巫女圖)」(중앙, 1936.5.) · 「바위」( 신동아, 1936.5.) 등의 문제작을 잇따라 발표하면서 1930년대 후반 가장 주목받는 신세대 작가로 부각된다.
특히, 유진오(兪鎭午)로 대별되는 구세대의 문학과 이른바 세대 논쟁을 벌이면서 1930년대 후반 신세대 문학의 기수가 된 그는 서정주와 함께 『시인부락』(1937)을 결성하면서 자신의 문학세계를 구축하게 된다.
이후 그는 해방공간에서 좌우익의 대립과 혼란 속에 좌익계 문학단체인 ‘문학가동맹’에 대항하여 우익계 단체인 ‘한국청년문학가협회’를 결성하고, 1946년 초대 회장에 오른다.
1947년부터 1948년까지 또다시 순수문학 논쟁을 벌이는데, 그는 「순수문학의 진의(眞義)」( 서울신문, 1946.9.14.)를 계기로 다수의 평론을 발표하며 김병규(金秉逵) · 김동석(金東錫) 등의 좌파 이론가와 맞서서 논쟁을 벌인다.
한편 소설작품에서도 우파의 정치적 관점을 적극적으로 투영시키는 작품을 발표한다. 좌파 이론가와 논쟁을 벌인 그는 ‘본격문학’이란 용어를 사용하면서, 좌파 계급주의 민족문학론에 대항하여 인간주의 문학론을 제창한다.
그가 제창하는 인간주의 문학론은 그 스스로 ‘본령정계의 문학’으로 명명한 것인바, 「순수문학의 진의」에서 “자본주의적 기구의 결함과 유물변증법적 세계관의 획일주의적 공식성을 함께 지양하여 새로운 보다 더 고차원적 제3세계관을 지향하는 것이 현대 문학정신의 세계사적 본령이며, 이것을 가장 정계적으로 실천하려는 것”이 바로 “순수문학 혹은 본격문학”으로 규정을 내린다.
즉, 그는 문학의 사회 참여와 공리성을 부정하는 문학적 입장에 서 있다. 그리하여 그의 대표작인 단편소설 「무녀도」 · 「황토기(黃土記)」(문장, 1939.5.) · 「실존무(實存舞)」(문학과 예술, 1955.6.)와 장편소설 「사반의 십자가」( 현대문학, 1955.11.∼1957.4.) · 「을화(乙火)」( 문학사상, 1978.4.) 등을 통해 역사와 현실을 초월한 인간의 본질적 문제를 탐구하여 들어간다.
그것은 인간과 생명의 원형질적 정수(精髓)를 탐구하는 것이다. 이처럼 그는 ‘본격문학=순수문학=민족문학’이란 문학적 이념 아래 왕성한 창작 활동을 보였다. 그는 한국 소설사에서 토착적이고 민족적인 소재를 ‘생(生)의 구경적(究竟的) 탐구’로써 형상화하여 민족문학의 전통을 정립하고 확대시킨 작가이다.
그밖에 주요 작품으로 「역마(驛馬)」(1948) · 「등신불(等身佛)」(1961) · 「까치소리」(1966) 등의 단편소설이 있고, 단편집으로 『무녀도』(1947) · 『황토기』(1949) · 『실존무』(1955) · 『등신불』(1963) · 『바위』(1973) · 『밀다원시대(密茶苑時代)』(1975) 등과, 평론집으로 『문학과 인간』(1948) · 『소설작법』(공저, 1965) · 『고독과 인생』(1977) · 『문학이란 무엇인가』(1984), 시집으로 『바위』(1973)와 유고시집 『김동리가 남긴 시』(1988), 수필집으로 『자연과 인생』(1977) · 『사색과 인생』(1973) 등의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의 정력적 창작 활동과 화려한 문단 활동으로 아세아자유문학상, 예술원 문학부문 작품상, 3.1문화상 예술부문 본상, 서울시문화상 문학부문 본상, 5.16민족문학상 등을 수상하였고, 또한 국민훈장동백장과 국민훈장모란장을 수여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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