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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
I. 한국 문학/2. 소설

불꽃 - 선우휘 (민음사)

by handaikhan 2023. 2. 21.

민음사 오늘의 작가 총서 21

 

목차
테러리스트
불꽃
오리와 계급장
단독 강화
망향
묵시
희극배우

- 작품 해설 : 전후 세대 휴머니즘의 진폭 / 한기

 

선우휘 - 불꽃 (1957년)

 

산과 산, 또 산 이어간 산줄기와 굽이치는 골짜기. 영겁의 정적. 

멀리서 보면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이 골짜기가 마치 푸른 모포를 드리운 것같이 부드러운 빛깔로 보였다.

그러나 골짜기를 뒤덮고 있는 관목의 가지와 잎사귀에 가리어 험한 바위가 짐승처럼 엎드리고, 담그면 손목이 끊길 것 같은 차디찬 냇물이 그 밑을 흐르고 있었다. 이 골짜기가 내려다보이는 서녘, 부엉산 산무라, 거기 동굴이 있었고 그 동굴을 등지고 고현은 앉아 있었다. 기대고 있는 바위가 퍽 차가웠다. 해가 산무라 뒤로 기울기 시작하면서 골짜기의 이편에 지어졌던 그늘이 차차 저편 산허리로 물들어갔다. 그곳 검푸르게 우거진 솔밭 한가운데 현의 중조부의 산소가 보였고, 거기서 눈길을 북으로 돌리면 보이지 않는 오욕의 날(칼)이 영겁의 산줄기를 끊어놓고 있었다. 아니 지금은 그 흔적뿐, 포성과 함께 피를 품고 남쪽으로 옮겨간 오욕의 날. 오욕, 인간이 땅과 인간에게 가한 오욕.

현은 손바닥으로 턱을 쓰다듬었다. 짐승처럼 사람의 눈을 피해 쫓겨다닌 기나긴 시간이 턱과 뒷덜미에 흐르고 있었다. 가마솥 같이 거친 턱수염, 덜미를 뒤덮은 머리카락, 그리고 가슴에는 무수한 가시가 돋쳐 있었다.

이 동굴에 기어오른 지 두 시간. 방금 소총의 손질을 끝냈다. 두 달 남짓, 누더기로 감싸 동굴 안 바위 위에 올려 둔 소총은 싸리를 박아놓았던 총열 안 탄도를 남기고 거의 붉은 색깔로 변해 있었다.

'세세세엘(CCCP)' 소련제 아식 보총. 그와 흡사히 녹슨 세 발의 탄환. 손바닥에 스며드는 싸늘한 그 감촉.

현은 가만히 무릎에 놓은 소총 멜빵을 어루만져 보았다. 따각 하고 고리가 총신 목판을 치는 소리를 냈다. 견디기 어려운 죽음 같은 고요가 그의 전신을 엄습했다.

사르르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바위에 돋은 풀잎사귀가 하늘거렸다. 그리고 뒤이어 풀숲에서 벌레 소리가 들려왔다. 갑자기 외로움이 현의 가슴에 흘러들었다. 현은 외로움을 누르려는 듯이 두 팔을 가슴 위에 얹었다. 동굴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뚝하고 났다. 그는 가만히 고개를 돌려 어두운 동굴 안을 들여다보았다. 

31년 전 바로 이 동굴 안에서 그의 부친이 스물네 살의 짧은 생애를 끝마쳤던 것이다. (p.36-37)

 

1919년 3월 상순. 일요일도 아닌 어느 날 하오. 서울에서 북으로 백여 리 떨어진 P고을. 이곳 조그만 교회 안에는 남녀 교인 30여 명의 조용한 모임이 열리고 있었다.

한 늙은 교인이 일어서서 손을 움켜쥐면서 고개를 국이자 여러 교인들도 자리에 앉은 채 눈을 감았다.노인의 기도 소리가 천장에 튀어 울렸다. 간간이 교인들 입에서 "아아멘" 소리가 흘러나왔다.

기도가 끝나자, 노인은 옆에 놓인 보따리를 풀어 차곡차곡 접어 놓은 헝겊을 들어 한 장씩 나눠주었다. 교인들은 말없이 그것을 펴 보았다. 그것은 삼색으로 물들여진 태극의 기폭이었다. 한 젊은이가 싸리로 깎은 한 묶음의 댓가지를 가져왔다. 모두 말없이 그 댓가지에 기폭을 달았다. 어떤 교인은 그것을 좌우로 가만히 흔들어보고, 어느 젊은 여인은 기폭을 손으로 꼭 쥐어보았다.

일행은 조횽히 밖으로 나갔다. 교인들의 경건한 얼굴에 갑자기 긴장의 빛이 떠올랐다. 교회를 나와 거리에 나서자 깃대를 나누어 주던 키 큰 젊은이가 선두에 섰다. 결의에 얼굴이 핀 젊은이는 번쩍 두 팔을 들며 만세를 절규했다. 30여 명이 그 뒤를 따랐다.

대한독립만세! 일행의 걸음은 갈수록 빨라지고, 목이 터질 것 같은 만세 소리는 더욱 높아갔다. 몇 차례의 만세 소리가 그치면 흥분된 가락의 찬송가가 뒤를 이었다.

"믿는 사람들아 군명 같으니 앞에 가진 주를 다라갑시다...."

이 때아닌 만세 소리에 문을 열고 내다보는 군중들의 눈은 휘둥그레졌다. 어떤 사람은 놀란 표정을 하고 황급히 문을 닫았다. 어떤 사람은 저도 모르게 밖으로 뛰어나와 뒤를 따라가며 마구 미친 듯이 만세를 불렀다. 창백한 얼굴, 찢어진 입부리, 휘청대는 다리와 다리, 감동과 공포에 찬 눈, 눈, 눈.

경찰서 가까운 싸전가게 앞에 군중들이 밀려갔을 때 목에서 찢어진 만세 소리는 마치 울음처럼 들렸다. 경찰서의 담장 위에는 밀물 같은 이 군중들을 기다리는 싸늘한 총구가 햇빛에 번득이고 있었다.

싸전가게에서 이 군중의 선두에 선 키 큰 젊은이를 발견한 혹부리 주인은 "악!" 하고 경악의 비명을 질렀다. 목에 달린 혹이 주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손발이 떨리고 눈앞에 확 검은 장막이 내리는 듯했다.

"저 녀석이, 저 녀석이."

하고 외쳤으나, 그 소리는 목구멍 안에서 굴고 있었다. 무거운 덩어리가 머리 위를 꽉 짓누르는 것 같았다. "어이쿠! " 주인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자 비명 같은 만세 소리에 뒤섞여 튀는 듯한 총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집안이 망했구나!"

주인은 가슴을 쥐어뜯었다. 뿌륵 하면서 뜯겨진 옷고름이 떨리는 손아귀에 남았다.

또 콩을 볶는 듯한 총소리가 들려왔다. 만세 소리는 멎고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우르르 흩어져 달아나는 어지러운 신발 소리가 들려왔다.

주인의 눈에 총을 맞고 피를 흘리며 저편 가게와 골목으로 뛰어드는 군중들이 보였다. 총알이 그 뒤를 쫓았다. 주인은 번쩍 정신을 차렸다. 벌떡 일어나 버선발로 뛰어나가서 가게문에 덥석 손을 대었다. 그리고 미친 듯이 문짝을 뜯어 밖으로 내동댕이치기 시작했다. 마지막 한 장을 밀어던지고 몸을 날려서 방 안으로 통하는 문짝에 손을 대었을 때 덩그런 가게 안에 총에 몰린 몇 사람이 뛰어들었다.

경악에 눈초리가 찢긴 주인은 쌀 되는 굴대를 들고 "개액" 하고 짐승 같은 소리를 지르며 덤벼들었다.

"나가아, 썩 나가아!"

고함이 목젖에 걸려 비껴나갔다. 이 주인의 기세에 그들은 다시 밖으로 튀어나갔다. 그중 한 명이 가게 문턱을 나서자 총에 맞아 시궁창에 몸을 처박았다.

주인은 펄쩍 가게 한가운데 다리를 겯고, 황급히 도사리더니 떨리는 손으로 담뱃대를 끌어당겨 불을 그어댔다. 그러고는 눈을 꾹 감고 뻑뻑 담배를 빨았다. 군중을 쫓아 총질하며 가게 앞까지 이른 경찰들은 사납게 일그러진 얼굴로 힐끔 안을 들여다보고는 그대로 달려가 버렸다. 그럴 때마다 한편 눈을 지그시 뜬 주인은 "허우"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한 시간 후 피투성이의 시체가 늘어진 도로를 줄줄이 묶인 군중들이 개새끼처럼 끌려가기 시작했다. 경찰은 절름거리는 상한 다리를 총대로 후려갈겼다.

공포와 죽음의 그림자가 며칠 이 고을 위에 무겁게 뒤덮고 있었다. 8명이 죽고 20여 명이 상했다. 80여 명은 경찰서 유치장과 복도에, 그러고도 모자라 마구간에까지 꾸역꾸역 수용되었다. 그 안에서 밤새 무딘 신음 소리가 들려 나왔다.

일행의 선두에서 만세를 절규하던 젊은이는 총에 맞은 다리를 간신히 끌며 친구 두 명의 부축으로 그곳서 40리 떨어진 부엉산 산마루 동굴 속에 몸을 감췄다. 출혈이 심했다. 40리 길에 염증이 생겼다. 몽롱한 정신 속에 고통을 견디는 젊은이의 얼굴에는 차차 죽음의 빛이 짙어갔다. 한밤을 신음으로 보낸 젊은이는 날이 밝자 친구가 떠다 준 골짜기의 얼음같이 찬 냇물을 마시고는 죽었다.

다음 날은 비가 내렸다. 살아남은 두 명은 이 동굴까지 뻗친 경찰의 손에 잡혀가고 젊은이의 시체는 그의 부친에게 인도되었다. 싸전 주인인 젊은이의 부친은 눈물 한 방울 없이 아들의 시체를 공동묘지에 묻었다. 그는 죽은 아들을 가엾다기보다 증오했다.

"이것은 내 아들이 아니오."

하고 냉정히 딱 자른 그의 한마디는 일본 경찰이 입회한 탓만은 아니었다. 아비를 두고 죽은 자식이 아니라 요물이라는 것이었다. (p.38-41)

(같이 읽으면 좋은 책)

한국사를 보다 - 박찬영 (리베르스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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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은 어느 일요일, 할아버지의 혹을 두고 조롱하는 싸전 근처의 애들에게 맹렬히 대들어 얼굴에서 피를 내고 갈가리 옷이 찢긴 일이 있었다.

할아버지의 명예를 위해 싸운 자랑에서 현은 의젓이 할아버지에게 사연을 얘기하고 은근히 공명과 찬사를 기다렸다. 그러나 할아버지의 입에서 떨어진 것은 뜻밖에도 질책이었다.

"뭐 혹 얘기? 그래....그렇다고...이런 꼬락서닐 하고, 누구하고? 뭐? 김 주사 아들 녀석을? 이런! 야 이 녀석아 웬 말썽이냐. 제발, 네, 애비처럼..."

허둥지둥 가게를 달려 나가는 할아버지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현의 가슴에 예기치 않았던 물안이 밀려들었다. 할아버지에게 가해진 모멸, 분연히 일어선 행동의 동기, 용감했던 대결, 까랃ㄱ 모를 할아버지의 심뇌와 분노, 그것은 마치 주인에게 대드는 사람에게 덤벼들다 되레 주인의 몽둥이를 맞고 꼬리를 거두는 개에게 비길 수 있는 의혹과 환멸의 감정이었다. 그 후 현은 그러한 경우 말없이 발길을 돌렸다. 처음에는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었으나, 나중에는 도리어 일종의 쾌감까지 느끼게 되었다. 현이 열 살을 넘으면서부터 가끔 죽은 아버지 얘기를 물을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현 모는 초점 없는 시선을 저편에 부으며 흠모와 자랑에 떠는 목소리로 일렀다.

"참 훌륭한 분이었어. 남을 위하는 마음이 두터웠고 바른 일을 위해서는 무엇이고 두려워하시지를 않으셨지. 야학을 짓고 애들을 가르치기도 하시고 지나가는 가엾은 행인을 그대로 보내시는 일이 없었지 그리고 이 고을에서 너의 아버지처럼 의젓한 이는 또 없었단다."

그러고는 현의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고는 그 눈매와 입언저리에서 죽은 남편의 모습을 엿보고,

"아버지의 얼굴을 보려거든 거울을 들여다보렴."

하며, 손가락으로 현의 머리를 똑똑 두드리곤 했다. 가엾고 귀여운 내 아들, 단 하나의 내 생명.

그러나 현 모에게 있어서 돌아간 남편에게 내리는 고 노인의 가혹한 평가는 가슴을 에는 아픔을 주었다. 그것은 현이 열일곱 살 나던 해 여름, 발 같은 햇빛이 내리쏟던 어느 날, 고 노인은 자기는 아들의 모에서 멀찍이 떨어져서 현더러 절하게 하곤 자리에 제물을 펴놓고 먼저 한 잔을 마시고 나서 또 한 잔을 따라 현보고 마시라고 일렀다. 현 모는 그것을 보고 고개를 돌렸다. 현이 놀라며 머뭇거리는 것을 보자 고 노인은,

"너두 이건 마실 나이가 되었느니라."

하며, 손을 흔들어 재촉을 했다. 현은 그래도 잔을 들고 주저하다가 간신히 한 잔을 삼키고는 느껴서 기침을 했다.

"술은 어른 앞에서 배워야 하느니. 그래야 술버릇이 점잖아지지."

"....."

"..... 요즘 젊은 녀석들은 버릇이 없어. 신학문 했다는 녀석들은 버릇이 없어 탈이란 말이야."

"........"

"신학문이니 뭐니 하지만 글은 제 이름자만 쓰면 족한 것이고 예의범절은 <명심보감> 한 권이면 알아본단 말이야.

"그런데 할아버지....돌아가신 아버지 얘기 좀 들려주세요."

"음, 네 애비가 사람은 똑똑했지. 유달리 영특했기에 나는 내 앞 장감이 생겼다고 적지 않아 바란 것이 있었다만, 이르는 말을 안 듣고 야소교를 믿기 시작해서부터 잘못되어 갔지."

고 노인은 저편 언덕에 햇살을 받고 눈부시게 솟아 있는 예배당을 내려다보고 이맛살을 찌푸렸다. 현 모는 고개를 숙였다.

"그때부터 네 애비는 산소에 가서 간신히 절을 했다만 죽어도 음복은 안 했거든. 절조차 어디를 보고 했는지 모르고, 조상을 위하는 미풍을 저버리구 생고집만을 부리다가 그 몰골이 되고 만 것이지. 어디서 흘러왔는지 그 야소란 귀신이 탈이란 말이야."

현은 말없이 풀을 듣고 있는 어머니를 훔쳐보고는 취기를 느끼며 다시 물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훌륭한 일을 하시고 돌아가신 것이라고 저번에 선생님도 말씀하시던데요..."

고 노인이 버럭 화를 내고 소리를 질렀다. 성성한 흰 수염이 떨렸다.

"어떤 놈이 그런 소릴 하던. 훌륭한 일을 했다구? 애비 두구 죽는 불효가 훌륭하다던, 네 어미를 청상과부 만든 것이 훌륭하다던?"

"그러나 나라를 찾으려구 한 일이 아닙니까?"

현 모가 현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눈짓을 했다.

"나라라구, 그래 그놈의 나라가 뭘 하는 나라랬다던? 벼슬하는 놈들만 버티고 앉아서 백성들 것을 모주리 훑어가기질이나 하구, 안 내면 잡아다 볼기나 치구. 그런 놈들의 나라가 뭣이 아쉬워서 도루 찾느니 뭐이니 야단이냐 말이다. 나라를 판 놈들도 바로 그놈들인걸. 그래 그렇지 않다 치고 나라를 찾는다니 뭐라고 제가 나서서 야단을 했다는 거냐."

"그러나, 할아버지."

"글쎄, 그때보다야 지금이 살기가 낫고 사람들도 많이 깼지. 네 애비 죽은 생각을 하면 나도 가슴이 아프다만, 그래 어리석은 짓을 했지 뭐이냐. 그 총칼 가진 놈들 앞에 무슨 수가 있겠다구 맨손으로 덤벼들었단 말이냐. 죽을려구 환장을 한 것이지."

"......"

"네 애비가 살아 있었다면 네 어민들 무슨 고생을 그리 하겠느냐. 네 어미 볼 때마다 죽은 네 애비가 고얀 생각이 들더구나."

고 노인의 음성이 차차 젖어들었다.

"네 애비가 살아 있었으면 이 늙은 것두 오죽이나 편하겠니. 요즘은 도무지 습증 때문에 요동을 할 수가 없으니 말이다."

잠시 입을 다물었던 고 노인은 이마의 땀을 훔치고 다시 노기 띤 소리를 질렀다.

"그래. 네 애비 훌륭한 일 했다니, 그놈들은 어째서 번번이 살아서 너한테 쓸데없는 귀띔을 한단 말이냐. 고을 놈들도 봐라. 네 애비가 죽은 뒤에 무어 거들어주는 놈이 하나 있더냐. 이런 놈의 세상이니라. 네 애비를 쏜 놈두 일본 놈이 아닌 같은 조선 종자 보조원 녀석이었느니라. 네가 공립중학엘 못 가고 사립 가게 된 것두 그 때문이 아니냐."

현의 등 뒤에서 현 모의 참고 견디려고 애써도 새어 나오는 오렬이 들려왔다.

"사람은 순리대로 해야 하느니라. 나라 빼앗긴 것이 좋을 리야 있으랴만 종자가 원래 제 구실 못 하는 말종이니 말이다. 그리구 언제는 나라가 사람 살렸다던? 그저 세상형편에 따라 제 주먹으로 제 일처리를 해야지 믿을 것은 자기밖에 없느니라. 딴 녀석을 위해 손가락 하나 까닥거릴 것도 없고, 손톱만큼이라두 남의 도움을 바랄 것도 없어. 제 몫으로 제 살림을 해야지."

고 노인은 얘기를 그치고 현 모를 건너다보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얘기가 좀 과했나 보다만 말인즉 그렇다는 게지."

고 노인은 담배를 한 대 말아 물고 "으흠으흠"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이젠 집으로 돌아가자."

하고는, 먼저 일어서서 뒤도 안 보고 성큼성큼 산을 내려갔다.

집으로 돌아온 현 모는 눈이 붓도록 울었다. 그리고 현더러 다시는 할아버지 앞에서 아버지 얘기를 꺼내지 말라고 애원했다.

그러나 현은 할아버지의 얘기가 그처럼 가혹한 것이기만 하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부친의 죽음을 할아버지처럼 생각할 수는 없었다.

오직 그때 부친이 그렇게 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할 어쩔 수 없었던 마음 가운데의 그 무엇, 빈손으로 의젓이 죽음과 대결하고 생명을 태웠던 그 무엇에 대한 모색과 두려움이 현의 첫 술에 타는 가슴속에 사납게 회오리치고 있었다. (p.44-48)

 

이듬해 봄, 현은 학교를 졸업했다. 친구들이 고등학교니 전문대학이니 서두는 때에도 현은 오직 집으로 돌아갈 생각만 하고 있었다.

현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담임선생도 너무나 무관심한 그 태도에 놀랐다.

"이만하면 저는 족합니다. 무리를 할 생각은 없습니다. 저는 집에 돌아가 어머니를 모시고 편히 살아갔으면 합니다."

"그러면 인생에 대한 아무런 목적도? 청년다운 아무런 야망도?"

"네, 남을 괴롭히지 않고 그저 저는 저대로 살아간다는 것, 저는 그것뿐입니다."

현은 돌아가는 차 안에서 눈앞을 스치는 낯익은 시골 풍경을 내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저 나대로 살아가겠다는 것은 할아버지 같은 그런 생각일까. 아니 할아버지와는 다르다고 생각되자만 설혹 같은 것이라면 그것이 또 어떻다는 것이냐. 인생의 목적? 야망? 포부?)

모두 그에게는 걷잡을 수 없이 희미한 술어에 지나지 않았다.

(남이야 어떡하든 내야 얼려들 것이 무엇이랴.)

검푸른 부엉산 밑에 질펀한 들이 눈앞에 전개되고, 창문으로부터 흙냄새 섞인 바람이 날아들었을 때, 상쾌한 아픔이 찌르르 가슴을 스쳐갔고 전류 같은 흥분이 전신의 혈관을 굽이쳐 흘렀다.

그리운 땅, 그에게 있어서 오직 이것만이 분명한 것이었다.

현은 어머니의 힘을 덜어주는 일이 즐거웠다. 모자가 같이 아침을 치르고 들로 나가서 밭을 갈고 씨를 뿌렸다. 현이 삽으로 도랑을 칠 때면 어머니는 삽에 맨 줄을 당겼다. 저녁이면 어머니는 먼저 돌아가 밥을 지어놓고, 민요처럼 찬송가를 부르며 아들을 기다렸다. 푸성귀 찬이나마 그것은 철에 맞아 신선한 맛이 있었다.

그러한 가운데도 어머니는 일요일의 예배를 빠지는 일이 없었다.

흰 무명옷으로 차린 어머니가 성경책을 들고 사립문을 나설 때마다 현은 그 뒷모습에서 젊었을 시절의 어머니를 그려보곤 했다. 어머니의 그 얼굴에서 슬픔과 신고의 그늘을 거두면, 아직도 꺼지지 않은 아름다움의 자국이 피어져서 현의 안막에 젊은 어머니의 얼굴이 되살아오는 것이다. 그리고 오랜 세월 오직 자기에게 바쳐진 희생된 어머니의 젊음에 생각이 가면 현의 마음은 스스로 암연해지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다. (p.50-51)

 

"해치웠어, 기어이 해치웠단 말이야."

으슥히 추운 겨울에 들어선 어느 날 아오야기는 한 장의 호외를 움켜쥐고 현의 하숙으로 뛰어들었다. 진주만 공격. 이어서 싱가로프 함락. 필리핀 상륙. 자바 점령. 축하 행진. 광적인 흥분과 도취가 떠돌고 거리에는 국방색이 범람해 갈 때, 현은 어딘지 각본에 어긋나는 연극이 연기자도 관중도 얘기할 수 없는 엄청난 종막을 향해 줄달음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동양 윤리를 강의하는 다카다 교수는 갑자기 엄숙한 표정을 짓게 되었고, 서양 문명의 몰락과 절망, 동양의 정신문화의 세계사적 의의를 강조하기 시작했다.

그날도 다카다 교수는 마치 십 억 아시아 민족 전체를 눈앞에 놓은 듯이 신이 나서 떠들어대고 있었다.

"'오노오노 소노 도코로오 예시무(각기 그 응당한 자리에 서게 함)...'란 만고불면의 진리다. 개인을 절대적 단위로 하고 무원칙적인 평등과 무제한한 자유를 목적으로 한 서구의 사회 질서는 극도의 혼란을 조장케 되었고 그 문명은 바야흐로 몰락의 과정에 돌입하게 되었다......으흠."

"그러므로 일찍이 니체나 슈펭글러는 솔직히 그들 자체의 몰락을 예언했고..."

".....서구 사상 자체의 모순의 필연적 기형아로서 출생한 유물 변증법은 계급 투쟁을 도발하여....서구의 기게 문명은 총 와해에 있고....이때야말로 빛은 동방으로부터...천손 민족이 궐기할 때는 당도한 것이다..."

"오노오노...그것은 존재의 조화 원리를 투시한 것이며 겸허한 인간 정신의 가치는 '고에 다카라카니 우다우 모노(소리 드높이 노래하는 것)'이다...."

이까지는 또 몰랐다.

"역사적 대사명...팔굉일우, 얼마나 장엄한 선언이냐....대동아 공영권 건설의 정신이 바로 이것이다....미영의 굴레에서 억압된 황색 민족을 해방하고....새로운 아시아의 질서를 회복한다...일본은 그 맹주가 되는 사명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얼마나 비장하고 장엄한 사명이냐."

그래서?

"따라서 국민 각자는 높은 긍지를 파지하고 전 아시아 창생의 구출과 나아가 거룩한 정신을 펴기 위해....자아를 멸하여 이 대목적에 헌납해야 한다. 그것이 하나의 섭리인 것이다. 그것은 또한 얼마나 빛나는 영광이겠느냐...."

"보라, 들에 노니는 축생일지라도 그들 자신을 멸함으로써 그 가치를 발휘하고 있지 아니하냐....그들은 그들의 한 가닥 뼈마저 달게 인간을 위해 바치고 있는 것이 아니냐. 창생의 절, 섭리의 묘."

달게?

"축생조차 그러하거늘 아물며 인간에 있어서랴. 아시아 민족이 각기 그 응당한 자리에 서게 하기 위해서 자아를 멸하여 대의에 살아야 한다. 슬프고도 아름다운 인간 존재의 원칙ㄹ이다!"

불쾌!

거기에는 현의 부친도 그 희생자의 한 사람인, 평화적 시위의 군중에 총탄을 퍼부은 일경의 행동을 정당화하고 할아버지와 같은 무원칙적 순종의 인생을 요구하는 강요가 있었다. 천손 일본 민족과 아시아의 여러 미녹, 인간과 축생, 고양이와 쥐와의 우애와 단합.

더욱 현의 비위가 상한 것은 교수의 고고한 것 같은 표정과 강의답지 않은 웅변에서 누구도 원치 않는데 스스로 나서서 결과적으로 남을 괴롭히는 선민의식과 값싼 영웅주의적 감상, 그리고 자기기만을 발견한 것이다. 현은 어느덧 자기 손이 들려진 것을 깨달았다. 교수는 유창한 자기 강의에 취하고 있다가 얘기를 멈추고 불쾌한 얼굴을 했다.

"한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자아 멸각과 대의에 순해야 한다는 뜻은 잘 알았습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소나 돼지가 인간을 위해 달게 그 생명을 바친다고 하셨는데 물론 인간은 그들 고기를 부득이 먹어야겠지요....그런데 저는 어렸을 때 도살장에 가본 일이 있습니다. 소는 도살장에 끌려들어 갈 때 발을 버티고 들어가기를 주저했습니다. 특히 돼지 같은 것은 굉장한 소리를 지르며 야단을 하다가 도살당하는 것을 보았는데....그들은 결코 달게 그 생명을 바치는 것 같이는 안 보였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 약간의 설명을....."

교수는 쓴웃음을 짓고, 학생들은 소리를 내어 웃었다. 그러나 저도 모르게 웃고 난 학생들도 웃음이 사라지자 석연치 못한 것을 느끼는 것 같아 보였다.

현은 자리에 앉으며 벌써 자기의 행동을 후회하고 있었다. 교수가 불쾌히 생각한다는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공연히 충동을 받고 발끈하고 일어선 자기의 멋이 싫어졌던 것이다. 십 억 아시아 민족의 청탁이나 받은 듯이 스스로 일어서서 항의한 것이 싫어져다. 그래서 어쩌자는 것이었던가?

"비유라는 것은 때로 오류를....그러나 이 경우는 ....동양인의 직관력은...."

중얼거리는 교수의 얘기가 귀에 들리지 않았고 그는 다만 자기혐오 속에 깊숙이 잠겨 들어가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드러냈던 자기의 알몸이 부끄러워 다시 껍질 속에 몸을 처박는 소리와도 같았다.

철학사를 가르치는 젊은 히다키 조교수는 다카다 교수와는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명철한 두뇌와 섬세한 정서를 가진 그는 소집을 받고 떠나면서 찾아간 현에게 이런 얘기를 했다.

"틀렸어. 모두 돌아 있어. 느지막이 세계 역사의 조류에 뛰어든 일본은 한다는 모든 일이 빗나가고 있단 말이야. 70년의 달음박질에 무리가 생긴 탓이겠지. 빅토리아 왕조의 꿈과 전체주의의 결합, 완전히 시대착오지. 중원에 사슴을 쫓는다. 이미 그런 시대가 아닌데. 중국 민중에 대한 선무 하나 제대로 안 되는 모양이야. 그래서 전진훈도 나와야 하는 게지. 중국인은 되레 대범한데 이편에서 공연히 독이 들어 까불어대거든. 구할 수 없는 도국(섬나라) 근성의 비극이지. 전투엔 이겨도 승리를 거두기는 힘들어. 강력한 문화의 뒷받침이 없거든. 아시아 민족의 해방. 좋은 말이야. 그렇다면 선결문제는 조선의 자치나 독립에 있었지. 기껏 한다는 것이 창씨개명, 성명을 고쳐놓는다고 무엇이 되겠나? 웃지 못할 넌센스지. 나가긴 하네만 나는 이 나라의 국민 된 죄로 국가가 뿌린 씨를 거두러 나가는 셈이야."

그리고 중부 중국으로 떠난 조교수는 일 년도 못 가서 전사하고 말았다.

다시 일 년 -

전세는 반전되기 시작했다.

병력 증강에 따르는 하급간부의 부족을 느끼게 된 일군 당국은 젊은 학생들에게 단기간의 훈련을 베푼 후 전열에 배치하는 안을 세웠다.

학도 출진의 일대 시위에서 돌아온 아오야기는 현을 찾아와 흥분에 익은 얼굴로 죽는 얘기만 했다.

"전쟁터에 나간다구 모두가 죽는 것은 아니겠지. 아니 죽는다는 결의가 되레 마음을 거울같이 맑은 심경으로 이끌어가거든."

산란한 마음을 모으기 위해 아오야기는 기를 쓰고 있는 것이라고 현은 생각했다.

"이건 마음을 남길 아무것도 없어."

그리고 약간 어두운 표정을 짓더니

"다만 어머니 일이 걱정되기는 하지만 그도 전열의 뒤에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돌봐주겠지."

현은 말없이 듣고만 있었다.

"토머스 그린 것과 학생총서는 자네한테 주지. 나는 <하가쿠레>하고 <만뇨오슈우> 두 권이면 돼. 실토하면 고민이 없지는 않아. 그러나 나에게 있어서 아시아의 해방이라는 명분은 어떻든 하나의 구원이야."

현은 가슴에 젖어드는 측은한 감정을 억제하지 못했다.

(여기 어긋나는 하나의 톱니바퀴, 원치도 않는데 기를 쓰며 구해 주려는 것은 고맙지 않은 참견.)

깊은 밤 아오야기의 멀어져 가는 게다 소리를 들으며 현은 고향에 생각을 보냈다. 일인 학생들을 휩쓴 회오리바람 속에서 벗어나 그는 한껏 고독한 자신을 발견했던 것이다.

앉은자리에서 그는 어머니를 그리는 긴 편지를 썼다. 곧, 모두 편안하며, 허약한 탓으로 고향으로 돌아와 있는 영선은 면소에서 일을 보게 되었다는 회답이 있었다. 할아버지는 처음 못마땅히 입맛을 다셨으나 지금은 아들을 안전한 곳에서 잡아두게 된 것을 적이 만족해하고 계시며, 어느 때나 그러하듯이 편지의 말미에는 항상 너를 위해 하느님께 기도드리고 있다고 쓰여 있었다. (p.55-60)

 

원죄의식과 박명의 검은 강박관념의 굴레 속에서 갈피를 못 잡고 극도의 고뇌에 사로잡힌 현 모는 자기에게 가해질 하느님의 형벌에서 그 아들을 제외해 달라고 애원했다.

"아들에 대한 사랑에서 주께서 부르신 남편에 대해 더욱 깊은 사랑을 느낄 수 있사옵는 이 죄인, 주어진 단 하나의 아들에 대한 사랑을 통해서 더욱 하느님의 은혜를 알게 되옵는 믿음이 약한 이 죄인. 주여! 저의 깊은 죄를 용서하시와 아들의 생명을 구해 주옵소서."

현은 가슴을 치미는 대상 없는 노여움에 떨었다.

(나는 내 자신이 믿는 것은 아니었지만 신의 존재를 인정해 왔다. 그것은 어머니의 신산한 생활에 마음의 평안을 주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 어머니는 까닭 없이 깊은 죄인을 자처하며 신 앞에 몸을 떨고 있다. 살고 있는 모든 인간이 죄인일망정 머머니는 죄인일 리가 없다. 형무관 같은 신. 이유 없는 원죄. 어머님. 나기도 전의 일에 책임을 질 수야 없지 아니합니까...) (p.62)

 

다음 해 봄, 현은 북부 중국에 파견되는 노병들 가운데 섞여 있었다. 황막한 중국 땅에 내려섰을 때 현은 틈을 타서 도주할 결심을 했다.

(구타, 학대, 잔인, 오만, 비굴, 허위의 범벅, 군대란 인간이 있을 때가 못 된다. 그래도 명분이 있다면 참기라도 하겠다. 그런데 내게는 털끝만 한 명분이 없다. 어째서 내가 중국인을 죽여야 하는가.)

얼어붙었던 대지가 철을 맞아 지르르 녹아나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밤이 되면 추위가 뼛속에 스며들었다. 으스름달밤. 현은 보초를 서다가 틈을 탔다.

덮어놓고 서쪽으로 달리면 된다는 막연한 계획어었다. 숨겨두었던 건빵 두 주머니, 통조림 한 통, 캐러멜 두 개를 끼고 밤새 허리까지 오는 마른 잡초 사이를 걸었다. 몇 번 뒹굴어 손등과 얼굴을 긁혔다. 끝없는 대지 위 칠흙 속에서 현은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공포에 떨었다. 지구 밖 어두운 허공 속에 혼자 던져진 느낌이었다. 그대로 지옥으로 열린 문을 향해 걷고 있는 것 같았다.

동쪽 하늘이 희미하게 밝아올 때, 현의 손에는 이미 소총이 없었다. 불그레 동쪽 하늘이 물들기 시작하더니 붉은 커다란 덩어리가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대로 못박혀진 현은 꼼짝 않고 그 장엄한 광경을 황홀이 주시하고 있었다. 아아! 이 커다란 것, 그 앞에 초라한 이 모습. 그는 갑자기 짐승 같은 소리를 질렀다. 아아악. 꺄아악. 괴었던 잡것이 터져 나가는 가슴속에 태양은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어 주는 듯했다. (p.64-65)

 

저녁에 현이 중국인 부락으로 내려가 한자를 써가며 사유를 납득시키고 따뜻한 한 그릇의 옥수수 죽을 마실 때, 걱정 어린 눈으로 싸맨 다리를 응시하고 있는 소녀의 영롱한 눈은 현에게 끝없는 기쁨과 안도를 주었다. 그곳은 주로 팔로군이 유격 활동하는 지녁이어서 그 길로 연안으로 안내되었다. 그는 여기서 숨을 돌리기 전에 먼저 놀랐다. 토굴 같은 집에 살고 있는 그들의 양식은 수수밥이었다. 그것은 어느 때고 그들이 활개를 칠 수 있는 세계가 오고야 말리라는 확신이었다. 현은 중국 거지 같은 초라한 모습을 한 김 모라는 노인에 접하고 아연했다. 인민의 해방이 멀지 않아서 이루어지리라고 예언하는 김 노인은 실은 까닭 모를 복수심을 만족시키는 기회를 노리고 있는 것이었다. 공산주의 이론은 <정감록>과 다름없는 운명의 예언서, 다르다면 그것이 과학의 이름을 붙인 예언서라는 것, 김 노인은 그것을 놓고 잃어버린 자기 반생의 몇 배를 미래에 충당할 수 있는 노다지 판을 그리고 있었다.

그렇지 못하면 초라한 그 모습이 사진틀 속에 담겨진 벽에 걸리거나 그 이름이 당사의 찬란한 한 페이지를 차지하리라는 개기름같이 번쩍거리는 욕망.

인민의 해방이란 방정식에 절대적인 의미를 붙이고 이를 갈고 있는 이들은 말하자면 청탁자가 없는 청부업자였다.

(도대체 이들은 어째서 그렇게도 남의 걱정에 밤낮을 가리지 않고 야단일까. 그보다도 오히려 그들의 솜옷에 끓는 이를 퇴치하는 것이 급선무일 텐데. 아마 이들은 이들의 때가 오기만 하면 겪어온 빈궁과 고통의 몇백 배의 보수를 요구하겠지.)

현이 한 달도 못 되어 다시 이곳을 빠져나와 남만주에 잠복한 것은 1945년 7월 중순이었다. 넓고 어수선한 것이 중국의 대지였다. (p.67-68)

(같이 읽으면 좋은 책)

중국 혁명론 - 마오쩌둥 (박광종 옮김, 범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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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에서 헤매던 현은 9월 중순이 지나 고향 p마을로 돌아왔다.

그동안 소련군이 진주한 만주에서 현이 목격하고 느낀 것은 인간이란 개 이하가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약탈, 강간, 파괴, 살인....현은 그 책임을 전쟁에 돌려버리는 의견에 찬동할 수 없었다. 문제는 그러한 행동을 저지를 수 있는 본질적인 것이 인간에게 잠재해 있다는 데 있었다. 그것은 오히려 개보다 못했다. 인간은 거기에 이유를 붙이기 때문. 어떻든 일본을 대신해서 인민의 해방자로 나선 청부업자 소련인들은 처음부터 그처럼 으리으리했던 것이다.

(원래 청부업자란 수지가 맞는 법이니까.)

현은 인간에 대한 실망과 환멸을 거쳐 이렇게 뇌까리고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남루한 차림을 하고 낯익은 사립문을 들어섰을 때, 마루에 앉았던 어머니는 잠시 멍하니 현을 바라보다가 버선발로 뛰어나와 와락 현을 붙들고 울기만 했다. 동네 사람들이 집으로 몰려왔을 때 어머니는 마루에 엎드린 채 소리를 내어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8.15를 당하고도 절실한 해방의 뜻을 느끼지 못한 현 모는 이 순간에 남다른 해방감에 가슴이 터질 듯했다. 현 모의 가슴속에 굳게 뿌리박고 있던 원시 종교적 숙명의식의 장벽이 소리를 지르며 분화구처럼 터져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현 모는 그것이 터져나가 환히 트이는 곳에서 소낙비처럼 쏟아져내리고 하느님의 은혜를 보는 듯했다.

고 노인의 경우 8.15는 쌀 공출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했다. 아들 영선 덕을 보기는 했으나 워낙 냅뜰성 없는 영선의 힘이란 별것이 없었다. 고 노인은 전쟁 말기의 일제 당국의 처사에 대해 마구 욕설을 퍼부었다. 작은 꾀를 부려서 고런 짓을 했으니 망하지 않을 리가 있었겠느냐고 떠들었다.

아슬아슬한 고비에서 삼팔선 이남으로 책정된 이 고을에는 미군들의 풍부한 물자의 시위가 있었다. 모두가 놀랍게 보이는 고 노인은 둘째 아들더러 단단히 영어 공부를 하라고 일렀다. 그리고 영선이 무사했고 현이 목숨을 건져 돌아온 것은 선친의 묘를 이장했던 탓이라고 더욱 풍수 원리에 대한 믿음을 굳게 했다.

현에게는, 몇 갈래로 찢겨 서로 엇먹고 켕기는 소용돌이가 모두 현실의 정곡에서 빗나가고 있다고밖에 보이지 않았다.

해방이란 앉아서 얻어진 것, 그러므로 호통을 칠 이유도 없었다.. 아무에게도 나에게 돌을 던질 자격이 없었다. 따지고 보면 있어야 할 것은 오직 얼굴을 붉힐 부끄러움과 조심성 있게 건네야 할 조용한 어조뿐이었다. 그런데 오고 가는 무수한 돌멩이와 고막이 터질 노호.

또한 논하자면 해방이란 당연한 것. 응당 있어야 할 것이 지금까지 그렇기 못했다는 거. 그런데 누구를 보고 국궁 재배, 아양을 떨어야 한단 말인가. '스파시이바그라스나야 아르미아(고맙소 붉은 군대)', 도 그렇지 않으면 어린애 같은 경탄. '원더풀 C레이션.'

이런 곳에서 생겨날 것은 과연 어떤 것, 암담한 실망이 현의 마음을 뒤덮고 내디디려던 그의 일보는 허공을 휘젓고 다시 제자리에 못 박혀 버리고 말았다. (p.68-69)

(같이 읽으면 좋은 책)

살아있는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 김육훈 (휴머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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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해 현은 교장의 간청으로 여학교 교원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네 소견대로 하려무나."

사회의 혼란은 더욱 조장되고 대립은 더욱 첨예화되어 갔으나 학교의 울타리 안은 그래도 그 권외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학교만을 남겨두지는 않았다.

사회의 혼란이 반영되어 학생들이 동요하기 시작하고 몇몇 교원은 거기다 불을 지르는 역할을 했다. 교내에 삐라를 뿌린 학생들은 마치 순교자 같은 얼굴로 끌려갔다. 어지러운 흥분 속에 사로잡힌 어린 학생들을 보면, 현은 가엾은 생각이 들었다. 무엇 때문에 흥분, 누구를 위한 순교.

불을 지르는 교원들, 시간에 들어가 가르칠 것은 걷어치우고 무책임한 발언으로 철없는 학생들의 머리를 어지럽히는 것은 죄악에 속했다. 자신이 있거든 걷어붙이고 나서 직접 행동을 해야 할 것이다. 교단과 연단, 교원과 연기자와의 차이. "학생에겐 손을 대지 말고 그대로 두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신념은 다만 현 자신에게만 적용되는 좁은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북으로 남으로 흘러가는 인간의 행렬은 그치지 않고 그 수효는 더욱 늘어만 갔다. p고을에서 하루 이틀을 묵어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으리으리한 청부업자의 입찰을 거부한 사람들. 현은 지금 그곳서 대단한 감투를 쓰고 있다고 전해지는 중국 연안에서 만난 노인 김 모를 생각해 보았다. 하루에 몇 번 목욕을 하고 눈이 부신 흰 밥에 입맛을 다실 그 모습을.

(대를 이어온 땅을 버리도록 낙찰된 가격은?)

그러나 현에게 있어서 이러한 현상은 그의 눈앞을 지나가는 한낱 영화의 화면에 지나지 않았다. 현은 그것을 보고만 있으면 되었다. 다만 비극영화를 구경하는 관중이 느끼는 그런 정도의 동정심을 가지고.

현의 흥미는 이 2년간에 확대된  꽃밭에 들어가 갖가지 꽃을 가꾸는 데 있었다.

가지각색의 꽃이 봄에서 가을에 이르는 동안, 그치지 않고 화려히 장식하는 화단이 있음으로써 현의 마음은 푸근했다. 금잔화, 복숭아, 달리아, 석죽, 나팔꽃, 카네이션, 문플라워, 나비꽃...

넓은 하늘 밑에 하루의 노동에 곤란해진 다리를 뻗고 부엌에서 새어 나오는 생선 굽는 냄새를 맡는다. 왕성한 기능의 위, 재촉을 하면 어머니는 어린애 같다고 꾸중을 한다. 찬란한 꽃밭. 매미의 울음과 뭇새의 지저귐. 이것이 곧 인간의 삶. 생명을 받고 태어난 인간이면 누구나 향유할 수 있는 삶의 조그만 권리.

그동안 현은 몇 번 혼담을 퇴했다. 갈피를 잡을 수 없는 현실의 혼돈 속에서 혼인이란 생각조차 하기 싫었다.

(저 북에서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 그을리고 피로한 얼굴에 슬픔과 분노를 가득히 담은 눈동자. 그 무수한 눈동자는 다만 살 곳을 마련하며 그대로 안주할 그런 미지근한 눈동자일까.)

그 무수한 눈동자에 그토록 분노의 불길을 불어넣은 으리으리한 신흥 청부업자들. 그들은 한 가지 공사를 끝냈다고 그대로 있을 그런 절제 있는 업자가 될 수 있을 것일까. 악착같은 이윤의 추구. 그들이 즐겨 퍼붓는 기성업자에 대한 욕설. 그것은 그대로 그들이 이어받은 것. 태풍의 징조에 불안을 느끼며 새로운 집을 지으려는 어리석은 짓은 삼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없는 자기의 미래에 한 사람의 남을 끌어들일 수는 없었다. (나 자신이 그러하거늘 더욱 남의 생애에 대한 자신이란.)

현은 그러한 때에 더욱 뼈저리게 어머니의 반생을 그려보았다.

어두운 초가 안에서 지낸 30년, 괴로움과 신고, 자기의 혼인이 또 하나의 어머니를 만들어낼는지도 모른다는 의구.

고 노인은 몇 번 달래보다 내어 던지고 말았고, 현 모는 현 모대로 병정으로 보낼 때 한 번 겪고 나서는 무엇이고 간에 강요는커녕 권유도 하지 않고 현이 하는 그대로 두었다. 그 팔에 한 번 묵직한 손자의 무게를 느껴보고자 목마르게 원하고 있으면서도. (p.70-72)

(같이 읽으면 좋은 책)

해방전후사의 인식 - 박현선 외 (한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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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떠한 경우에도 별다른 의사 표시를 하지 않는 현보고 어느 땐가 이렇게 물은 일이 있었다.

"고 선생은 아무 일에도 관심이 없으세요?"

"네?"

"왜 어떤 일에도 의사 표시가 없으세요?"

"그것은 할 사람이 따로 있겠지요. 저는 남의 일에 이러니 저러니 할 입장에 있지 못합니다."

"소극적이시군요/"

"소극적일는지는 몰라도 저는 남의 일에 흥미도 없거니와 남의 한계를 침범할 생각은 더욱 없습니다."

"어쩌면 그러실까/"

"싸움을 말리려다 더 큰 싸움을 만드는 일이 있지요. 자기 하나도 가누기 힘든 형편에 남의 일 참견이라..."

"주위가 어떻게 되어도 괜찮으세요/"

"되어가는 것이야 제가 어떻게 하겠습니까?"

"선생님은 그렇게 뵈진 않는데요?"

"저는 공연히 참견해서 남에게 누를 끼치는 경우를 여러 번 보아왔습니다. 남을 위한다는 것이 결과적으로 남을 해치는 경우가 더 많다는 것을 너무나 많이..."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지 않겠어요?"

"물론 그야 그렇겠지만, 사리를 통찰하는 예지나 심정에 있어서 훨씬 뛰어난 성자 같은 소수인에게만 해당되겠지요."

"고 선생님은 자신이 뛰어나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천만에, 저는 제 자신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아무 특징도 없는 일게 속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그래서 기껏 자기만을 지키고 이처럼 살아가면 됩니다."

"그럼 저 같은 경우, 즉 생활양식을 강요받게 된다면 그때도 자기를 지키고 그대로 살아가실 수 있겠어요?"

조 선생은 8.15 다음 해 가을 가족과 함께 이북에서 넘어왔던 것이다.

"글쎄 그건 지내봐야 알겠지만..."

"저는 지내봤어요. 부친은 더욱 뼈저리게 느끼셨지요."

"무슨 해를 입으셨습니까?"

"해가 아니라 처음은 몹시들 떠받들었지요. 부친은 젊은 시절에 사회주의 운동을 하시다 몇 년 고생을 하신 일이 계셨대요. 과수원을 하시던 부친은 해방이 되자, 끌려나가다시피 인민위원장을 하시게 되었지요. 그런데 소련군이 진주하면서부터 부친은 퍽 언짢아하시더니 쌀 공출을 강요받고는 거북해 하시던 끝에 사임을 하시고 마셨지요. 아버지는 내가 젊었을 때 하려고 한 것은 저런 것이 아니었다고 하시면서 우울증에 걸리셨어요. 그 후부터 그들은 뒤에서 이러니 저러니 귀찮게 굴기 시작하더니 한 번은 무슨 혐의가 있다고 보안서에서 아버지를 불러갔었어요. 두 주일 후 나오신 부친은 아무 말씀도 않고 계시더니 갑자기 이남으로 떠나자고 하셨어요. 거기서 자기를 지킨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한 일이에요."

"물론 저도 제가 하고 싶은 일, 꽃밭을 가꾸며 즐기고 싶은 시간이나 마루에 누워 하늘을 쳐다보는 시간조차 못 가지게 된다면 글쎄 저도 생각을 달리하겠지요."

"그것뿐이겠어요? 무슨 집단에 가입해라, 모임에 빠지지 마라, 누구를 미워하라, 누구를 쫓아야 한다, 누구를 죽여야 한다, 연설에 찬성하는 박수를 쳐라, 주먹 쥔 팔을 높이 흔들어라, 하면요?"

"그야 그렇다면 그땐 저도..."

"어떻게 하시겠어요?"

"그럴 땐, 그럴 땐 조 선생처럼 도망을 치지요."

현이 자기 얘기가 우스워 그만 실소를 하자 조 선생도 따라 웃었다.

"어디까지나 소극적이시군요." (p.76-78)

 

의혹, 끝없는 혐오, 하늘도 산도들도 눈에 띄는 모든 것, 꽃을 보아도 회색이었다. 며칠 후, 이북으로 갔다던 연호가 머리를 길게 늘이고 P고을로 들어오자 먼저 현을 찾았다.

"어때, 고생 많이 했지?"

"뭐 별반."

"고통이 많았을 거야. 그러나 이전 강도 놈들도 물러가고..."

"...."

"그런데 자네 왜 이러고 있나?"

"뛰어나와 일을 해야 할 게 아닌가?"

"일을?"

"이 사람아! 자네가 이처럼 배겨 있는 것도 이때를 기다린 것이 아닌가?"

"때를 기다리다니?"

무슨 뜻인지 의아하다는 현의 표정

"물론 예기치 않았던 일이니까! 그러나 어리둥절할 것은 없어."

"그야 충격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나야 한 개 평범한 속인에 지나지 않으니까."

"그래 이대로 이러고 있을 작정인가?"

"이대로 나는 흡족하니까."

"아니 굿이나 보다 떡이나 먹을 셈인가?"

"떡은 둘째치고 굿을 볼 흥미조차 없네."

"자네 왜 그러나?"

뜻밖이라는 연호의 표정

"왜 그러긴? 나야 원래 이런 놈이 아닌가. 부탁이니 나를 이대로 가만히 버려두어 주게."

"버려두다니? 자네야말로 열성적으로 일해야 할 사람이 아닌가?"

"일이야 할 사람이 얼마든지 있는걸. 나까지 뛰어들 필요가 없지. 나는 모든 것이 귀찮게만 생각이 드네. 자네가 들어오기 전 나는 들로 나가던 길가에서 어떤 젊은 군인의 시체를 보았지. 속눈썹이 길고 검은 머리를 늘인 앳된 얼굴을 하고 있더군. 나보다도 10년이나 어려 뵈는 소년이야. 그는 며칠 전만 해도 자기 가족에게 편지를 보냈고, 이웃에 사는 어떤 처녀를 그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어째서 그가 이 길가에서 이처럼 생명을 잃어야 했는가의 의문이 들더군. 살아야 했을 인간이 인위적으로 죽은 것이다. 어째서 누구의 탓으로?"

"물론 사람이 죽는다는 건 유쾌한 일이 못 되지. 그러나 피의 대가 없이 어떻게 혁명의 성취를 바랄 수 있겠나?"

"누구의 피, 누가 흘려야 하는 핀데?"

"그것은 혁명을 가로막는 원수들의 피, 그리고 혁명에 바쳐지는 인민전사들의 고귀한 피. 그러나 더 많은 원수들의 피가 요구되지."

"자네는 죽는 사람의 경우를 생각해 본 일이 있나? 다만 살고자 발버둥 치는 인간들의 죽음을, 고통과 공포. 죽는 인간에 있어서는 죽는 그 순간에 그 자신의 모든 것 - 아니 전 세계가 상실된다는 것을."

"그러나 새로운 희망, 프롤레타리아트는 그 시체를 넘어서 전진해야 하지."

"전진? 어디를 향해? 얼핏 들으면 감동적인 얘기긴 하지. 그런데 그 감동이란 게 탈이거든."

"모든 것은 불가피한 혁명의 첫 과정이니까."

"도대체 그처럼 많은 시체를 넘어서야 하는 혁명의 목적이란 무엇인가?"

"착취 없고 계급 없는 사회의 건설."

어린애 같은 질문에 불과하다는 표정의 연호.

"나도 그러한 사회가 오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네. 그러나 그 목적에 이르는 과정이라는 것, 그것은 어떠한 과정이며 또 언제까지를 과정으로 치나? 과정 속에서도 인간은 살아야 하고 또 인간은 계속 과정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인생의 목적이란 곧 인간이 산다는 것, 사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닌가, 최후의 목적 그런 것이 있을 리 없지. 구태여 말하자면 조그만 중간 목표가 있다고 할까."

"그럼 자네는 전적으로 이 혁명을 인정치 않는군."

"혁명이 획득한 어떠한 결과도 인간의 생명보다 귀할 수는 없으니까."

"그러면 자네는 역사 자체를 부정하는군."

"혁명이란 말에는 확실히 매력이 있겠지. 역사가들도 그 태반은 혁명은 역사적 전환에 필요한 하나의 중요한 계기라고 하니까."

"자네도 그것까지 부정하지는 않는군."

"아니지. 다만 역사가들이 다루기 좋은 재료에 지나지 않는다는 거야. 요행이 삶의 골패짝을 쥐어든 인간들은 태연히 소파에 앉아 '소수의 희생된 생명 운운' 하고 뇌까릴 수도 있겠지. 그렇게 허다한 혁명이 없었던늘 별로 지금보다 못한 세상은 안 되었을 것이네."

"이건 놀랐는데."

"어떻든 나는 분명치도 않은 목적을 위해 공연히 남에게 미움의 눈길을 보낸다든가, 내 생명을 희생할 그런 용기는 가지고 있지 못하니까."

"인민의 투쟁을 그렇게 보는군."

"투쟁? 어째서 그렇게 싸우고 싶은가. 그렇게 싸우고 싶거든 싸우고 싶은 친구끼리 클럽을 만들어 게임을 하면 되지 그래. 그런데 실상은 그렇지 않은 인간들끼리 끌어들여 싸우게 하고 있으니 말이야. 애매히 피를 흘리는 것은 이들이거든. 자네 익수를 보게."

"익수, 그는 기막힌 투사야."

"자네, 지금 그가 올바른 제정신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나? 익수 같은 처지에 있는 친구가 가난을 벗어나야 하고 인간다운 생활을 해야 한다는 데는 의론의 여지가 없어. 그러나 지금의 익수는..."

"지금의 익수는?"

"그의 눈을 보게. 무엇에 열중하는 것이야 좋겠지. 그러나 그의 눈에는 독기가 가득 차 있어. 귀염성 있고 선량하던 그의 조그만 눈 속에 차 있는 것은 증오와 살기뿐이란 말이야. 나는 그를 보았을 때 어째서 인간이 저런 눈을 해야 하는가 의문이 생기더군. 그리고 측은하다는 생각이. 물론 자네야 되레 이러한 나를 측은히 생각하였지만."

"도대체 지금이 어떤 때인 줄 아나?"

답답하다는 연호의 표정.

"근거 없는 미움이 들끓고 있는 때이겠지."

"근거없는 미움이라니?"

"그럼 자네는 그렇게 뼈아픈 원한을 누구한테 품게 되었고 대체 누구를 저주하고 어떻게 미워하고 있나?"

맑은 눈으로 연호를 응시하는 편.

"지금에 와서 그런 질문을 하다니?"

"자본가, 지주, 친일파, 반동분자...이런 거란 말이지?"

"그리고 기회주의자."

연호의 언성이 튀었다.

"나는 기회주의자가 아니야. 미워할 것을 지적할 수 있는 그 누구가 아닐세. 인간 서로의 미움이란 미움이 낳는 악순환밖에 가져오질 않아."

"그러면?"

"미워할 것은 인간이 지닌 어리석은 조건일세. 자네나 내 가슴속에 숨어 있는 인간 심리의 독소. 남을 억압하려는 포악성. 착취하려는 비정, 남보다도 뛰어났다는 교만, 스스로 나서려는 값싼 영웅주의적 참견, 남을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다는 무엄, 그런 것들이겠지."

"언제부터 자네는 목사가 되었나?"

"나는 신자도 아니네만, 이웃을 사랑해라. 뺨을 치거든 또 하나의 뺨을 내어놓으라고 이른 때부터 지금은 50년이 모자란 2000년. 인간은 겨우 이 모양 요 꼴일세. 물론 자네야 내 뺨을 칠 리도 없고 나도 왼뺨을 맞고 바른 뺨을 내놓을 아량까지는 없네만."

"그래서?"

"나는 싸운다는 건 질색이니까. 내놓기 전에 도망을 치고 말겠지. 이전 나는 내가 인간으로 태어난 것 자체가 창피한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네. 나 자신이 싫고 또 누구 할 것 없이 인간이란 게 싫어졌어. 그렇다고 무슨 대단한 절망을 느꼈다고 지레 죽을 것까지는 없으니 살아갈 대로 살아가 보자는 게지."

연호는 멸시와 동정이 뒤섞인 눈으로 현을 쳐다보았다. 자본주의 사회의 혼탁 속에서 갈피를 못 잡고 허우적거리는 '프티부르주아'의 퇴영. 그는 현에게 혁명가들의 영웅적인 고난과 자기희생을 얘기해 주려고 했다.

"혁명가들의 자기희생을 생각해 보게."

"어째서 그것이 자기희생인가. 누가 그것을 청탁했던가. 자아도취와 허영에 치른 값이 어째서 희생인가? 단지 값이 비싸게 먹혔다는 것뿐이지. 되레 일반 대중의 꼬락서닌즉 가관이지. 그것은 불의의 재액이며 더할 수 없는 모욕이니까."

"모욕이라니?"

"그럼 모욕이지. 그 이상의 모욕이 또 어디 있나. 누구한테서 무엇을 받았다는 거야? 도리어 응당 받아야 할 것을 오래도록 막아온 것은 다름 아닌 청탁 없는 그들 청부업자들이지."

"청부업자?"

"그들은 자기 멋에 겨워서 흥분하고 비운하고 때로는 웃고 때로는 눈물을 흘린다. 그 노호와 웃음과 눈물 속에 애매한 인간들은 희생되거든. 어떤 종경과 무슨 갈채를 보내라는 거야. 각기 제 생명을 타고난 인간들은 그것이 어떻게 초라하든 간에 모두 자기의 세계를 가지고 있는 법이야. 그것은 누구도 범할 수 없지. 그들은 결코 청부업자들의 연기에 동원된 엑스트라는 아니거든. 나는 이렇게 생가하네. 다음에는 어떠어떠한 세계가 반드시 올 것이니 재빨리 끼어들어 한몫을 보려는 인간 - 그러한 인간이란 폐품 불하에 눈치 빠르게 달려들어 낙찰시키려는 장사치와 다름이 없다고, 자기가 나서야 이 사회를 건질 수 있다는 무엄은 자기가 그 폐품을 맡아야 소비자들이 헐값으로 쓰게 된다는 장사치의 헛소리나 다름이 없거든. 다름없다기보다 도리어 못되었다고 볼 수 있지. 장사치는 이윤만을 탐내는데 그들은 존경과 지배까지를 요구하거든. 청탁도 않는 청부를 맡아가지고는 더욱 괴롭게 한단 말이야."

"자네의 그런 의견이 통용될 줄 믿는가?"

"얘기가 났으니 나대로의 생각을 말해 본 게지. 일제시에도 나는 병정으로 끌려가기까지 나대로 살았네. 8.15 후에도 역시 난 나대로 살아왔네. 이제부터라도 난 나대로 살고 싶네. 떠들어대 봤자 인간이 산다는 건 별것이 아니니까. 난 나대로 조용히 살아가자는 게지. 다만 그뿐이야."

"그건 어려울걸. 혁명은 무위의 한 사람도 용인하지 않아. 마비된 인간의 잠을 깨우고 그 머릿속에 새로운 인간의 의식을 불어넣어야 하니까."

연호가 떠난 뒤 현은 마루에 앉아 시름에 잠겼다. 뉘우칠 것은 없었다. 얘기를 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한 마음 가운데의 그 무엇.

망연히 꽃밭을 바라보았다. 며칠 동안 느끼지 못한 꽃들의 개성이 드러나 있었다. - 인간은 꽃에다 여러 가지 뜻을 붙인다. 정열, 불안, 비애, 고결, 죄악, 분노, 모호, 온순, 광약. 그러나 꽃은 그저 아름다울 뿐인데. 때가 오면 피고 때가 가면 말없이 지고. 그런데 인간은 꽃에다 제멋대로의 의미를 붙인다. 뿐더러 인간 자신의 색깔로 갈라놓고 편과 편을 만들어 서로의 가슴에 칼날을 겨눈다.

여태까지 현은 황금률을 뒤집어놓은 것, 즉 남에게서 괴로움을 받기 싫은 거처럼 나도 남을 괴롭히지 않는다는 신조를 굳게 지켜왔던 것이다.

러나 지금에 와서 현은 자기에게 파상적으로 몰려닥치는 위협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번의 청부업자는 종전의 유가 아닌 것 같았다. 한 명도 놓치지 않고 건드려놓고야 말려는 유능하고 가혹한 업자. 구석구석을 파헤치려는 집요하고 치밀한 계산자. 현이 웅크리고 있는 껍질도 그들의 날카로운 눈길에서 빠져날 수는 없는 듯싶었다.

발길을 돌린 연호는 혀를 찼다.

(무엇 그런 자식이 있나.)

이번 그가 공작의 임무를 맡고 고향인 P고을에 파견됐다는 건 3년이 넘는 자기의 신산을 갚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는 고을 사람들이 자기에게 퍼붓는 눈초리에서 제법 흡족한 걸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승리자에게 보내는 존경과 경탄, 외포와 선망의 눈초리, 그렇지 않으면 자기가 돋은 분노와 증오의 눈초리. 어떠한 눈초리든간에 거기에는 어떤 반응의 표시가 없었다. 두려움의 빛은커녕 무관심과 권태와 혐오가 뒤섞인 눈에 어딘지 연민과 동정의 빛조차 깃들이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공포 가운데서 또는 완강한 조직 가운데서 그렇게 애써 쌓아올린 탑을 그렇게도 가벼이 보아 넘기다니, 거기다 걷잡을 수 없었던 허망한 얘기의 논리.

(청부업자라구?)

승리자로서의 여유와 관용을 가지고 현의 얘기를 들어 넘긴 자신이 기특했다기보다 어리석었다. 가슴 한 귀퉁이에 생긴 솜사탕 같은 공허. 연호는 그 공허를 증오의 불길로 메워갔다. (p.81-88)

(같이 읽으면 좋은 책)

숲속의 방 - 강석경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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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정되었던 규탄과 계획한 대로의 군중의 아우성이 쏟아지며 인간의 것이 아닌 잔인한 흥분의 도가니를 이루어갈 때 연호는 옆에 세워놓은 현의 얼굴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반드시 무슨 변화가 있을 것이다. 초연히 홀로 고고하겠다는 너는 돌멩이가 아닌 이상 반드시 어떤 마음의 동요가 생길 것이다. 공포, 당황, 기겁, 애원, 그러면 너는 수월히 내 손아귀에 들어오게 된다. 그것은 굴복. 네 사설은 결국 하나의 관념의 유희.)

첫 번째 희생자, 국민회 회장이 언도를 받자, 군중의 까닭 모를 아우성과 함께 집해자들의 손에 쥐어졌던 굵다란 곤봉이, 올굴이 거의 흙빛이 된 반백의 머리 위에 쏟아졌다. 뼈가 부서지는 소리, 살이 떨어져 나가는 무딘 소리.

(어떠냐....)

연호는 현을 뚫어질 듯이 쏘아보았다. 그러나 그는 현의 얼굴에서 한 오라기의 공포의 빛도 찾아낼 수 없었다. 경화된 현의 얼굴에서는 다만 땀이 흘러내리고 있을 뿐이었다.

(이런!)

그러나 그것은 연호의 오진이었다. 현의 얼굴을 흐르는 땀은 더위  때문이 아니라 가슴에서 타는 분노의 불길 때문이었다. 두 번째의 희생자가 끌려나왔을 때 현이 흘린 땀은 땀이 아니라 전신의 혈관에서 배어나오는 피였다. 희생자는 다른 사람 아닌 조 선생의 부친이었다. 다만 어울리지 않는 생활양식을 거부하고 남으로 내려온 것 외에 아무런 반항도 꾀하지 않은, 한 무력한 늙은이에 지나지 않았다. 순간적으로 현의 뇌리를 조 선생의 모습이 스쳐갔다.

현은 땀이 흐르고 있는 얼굴을 돌려 연호를 쳐다보았다. 그 야릇한 눈동자와 입가에 띤 까닭 모를 웃음. 이것이 같이 자라난 친구....인간의 얼굴이라니.

그 얼굴이 눈앞에서 크게 확대되는 착각을 느끼자, 현의 입에서 찢는 듯한 비명이 터져나왔다.

"살인이다!"

오랜 회상에 잠겼던 현은 감았던 눈을 크게 뜨며 어두운 하늘에 송송이 박힌 별들을 쳐다보았다. 뚝! 동굴 안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 어느덧 바람은 자고 벌레 소리가 있었다.

그다음의 일을 더듬을 수 있는 분명한 기억이 없었다. 그것은 불연속선. 순간적으로 내민 자기의 주먹에 쓰러지던 연호. 앞에 버티고 섰던 보안서원의 소총을 낚아채고 군중의 틈을 빠져나갔던 기억. 수라장이 된 네거리. 집행자들의 고함과 군중들의 비명. 몇 발의 총성. 눈앞에 드리웠던 황갈색 베일. 그 베일을 통해 눈에 뛰어들던 땅을 밞으며 어디를 어떻게 달리었던지. 쫓기던 끝에 **강 하류에 이르러 물속에 뛰어들던 기억. 그래도 소총은 그 손에 있었다.

(그때의 충동. 그렇게 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한 마음의 충동은 그 무엇이었을까. 이 검은 눈으로 목격한 살인. 목격은 일종의 묵인. 묵인하는 군중의 일원으로 그대로 늘이고 있을 수 없었던 마음의 줄. 그리고 아픔. 희생자의 머리와 어깨와 허리에 내려지는 아픔은 곧 나 자신의 머리와 어깨와 허리에 내려지는 아픔이었다. 어찌하여? 나와 그와 그리고 모든 군중, 거기에는 아무런 육체적인 연결이 없었다. 그런데 나는 아픔을 느꼈다. 그리고 그 아픔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그리고 결국 도망을 치고 말았던 것이다.)

현은 지난날의 그 몇 번인가의 저항의 충동을 생각해 보았다.

- 일인 교수에 대한 반발 - 자기혐오와 함께 몸을 오므린 퇴각

- 학교장에 대한 항의 - 겸연쩍어 사직을 하고 만 패배, 아니 패북.

- 일군에서의 탈주 - 또다시 연안에서의 도주. 도피의 연속.

어느 때 정면으로 싸워본 일이 있었던가. 단 한 번. 그것은 극히 어리던 시절의 일. 할아버지의 혹을 두고 얼굴에 흘린 피와 갈기갈기 찢긴 옷. 뜻밖에도 할아버지는 노하셨지. 모든 거북한 일에 등을 돌리는 습성이 내 가슴에 깃들인 것은 어느 때부터였던가. 그리고 껍질 속에 몸을 오므린 30년의 결산은 결국 도망을 놓았다는 것이다.

그러면 지금 이처럼 다시 귀딱지를 늘이고 P고을을 찾아든 것은 무슨 까닭일까. 지구의 끝까지 도망을 칠 수 없었던 때문이었던가. 동굴 안에 두고 간 소총 때문이었던가. 그렇지 않으면 외로움 때문이었던가. 실상 한없이 외로웠고 지금도 또한 말할 수 없이 외롭다. 수풀이나 산골짜기의 어둠 속에서 외로움에 못 이겨 어린애처럼 어머니를 그리던 나날, 어머니 - 30년의 신고를 견디며 길러준 어머니를 버려두고 나는 거침없이 혼자 도망을 쳤던 것이다.

외로움. 그것은 뭇사람들과 떨어져 홀로이 있는 외로움이 아니었다. 한 번도 그들과 함께 있어 본 일이 없었다는 인식에서 오는 외로움이었다. 섞여 있으면서도 거기엔 보이지 않는 장벽이 가로막고 있었다. 완전히 단절되어 있었던 것이다.

(...견딜 수 없는 이 외로움. 거기서 더욱 목마르게 바라는 그리움. 어째서 이렇게 사람이 무서우며 또 그리운가. 파상적으로 밀어닥치는 그리움. 그 그리움 속에서 더욱 생생히 피어오르는 하나의 얼굴.)

그것은 바로 이 동굴에 기어오르기 전, 지금은 칠흑의 어둠 속에 파묻힌 P촌.

그 앞 등을 비껴 흐르는 내에서 만난 조 선생의 때 묻은 베옷에 골이 떨어진 짚세기. 아무렇게나 뒤로 동여맨 먼지 앉은 머리카락. 그을은 얼굴. 경악에 차던 그 눈동자.

현은 거기 인간의 모욕을 보았다. 절망과 슬픔이 뒤섞여 멀거니 흩어진 그 눈동자. 살아 있는 인간이 그런 눈을 가져야 하다니. 거기에 갑자기 환희의 빛이 몰아치며 터져나오던 눈물, 아니 그것은 피.

(날이 밝으면 조 선생이 이 동굴을 찾아올 것이다. 이런 속에서도 한줄기의 빛은 있구나. 그때를 기다리고 한잠 눈을 붙여야 한다.)

현은 흩어진 풀을 모아 깔개를 하고 누웠다. 소총에 탄환을 재고 그것을 베개로 했다. 녹슨 쇠냄새가 났다. 올려다보는 눈에 무수한 별들이 아름다웠다. 서로 당기고 있으면서도 저렇게 자기 자리에서 빛나고 있다는 실감이 들지 않았다.

문득 가슴에 치솟는 한 가지 불안이 있었다. 조 선생과 헤어져서 마을 어귀를 지날 때 느낀 방앗간 밑에서 자기를 응시하던 한 젊은이의 시선. 잠시 깃들였던 그 불안은 곧 피로 속에 흩어지고 현의 두 눈이 감기더니 어느덧 가느다란 코 고는 소리가 들렸다. (p.89-92)

 

고 노인은 연호의 재촉이 이제는 아무렇게도 생각되지 않았다. 다만 기나긴 생애 속에서 항상 재촉하는 소리에 떤 자기 자신에 대한 연민만이 있었다.

그래도 자기 딴에는 주어진 팔십 년의 생애를 악착같이 살려고 애를 써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한번 쿵 하는 포소리. 저 포 소리만 없었어도 고 노인은 현을 불러내는 데 다시 한 번 애를 썼을는지 몰랐다. 그러나 다가오는 저 소리. 삶과 죽음! 그 어느 하나의 선택을 재촉하는 저 소리.

고 노인은 또 한 번 동굴을 올려다보았다. 저 동굴 안에서 아들이 죽었고, 지금 또 손자가 저 속에서 죽음의 위험에 직면해 있다. 그리고 자기도 또한 그것을 목격하며 위기의 순간에 서 있었다. 이 야릇한 숙명적인 불행의 부합, 다시 고 노인은 눈길을 선친의 산소에 돌렸다. 문득 이처럼 가혹한 숙명의 사슬에 엉키도록 자기는 조상의 뼈를 묻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이 거대한 변사 - 전쟁 앞에는 과거의 어떠한 원리도 무색해지는 것일까. 혈통이 이어져 뻗어가는 기준의 상실. 골수에 젖은 풍수 원리를 굳게 믿고 조상의 뼈다귀를 메고 다닌 지난날의 노력의 공허.

그렇게 허탈해 가는 고 노인의 마음속에 차차 하나의 새로운 감정이 흘러들었다. 모두가 기정의 숙명에서 벗어나 있다는 해방감과 다음 순간의 운명은 누구도 헤아릴 수 없다는 어떤 종류의 감동이었다. 그 감동 속에서 고 노인은 팔십 평생에 처음 무엇에도 구애되지 않는 순수한 자신의 의지를 결정했다.

(예까지 용케 견디어온 가상한 나의 팔십 생애. 산소의 탓도, 달린 복의 상징이란 혹의 탓도 아닌 맨주먹 알몸으로 기를 쓰며 살아온 팔십 평생, 나는 이것으로 족한 것. 지금은 가는 것이다. 현아 이전 네가 살아야 한다.)

여울 같은 감동이 고 노인의 전신을 흘렀다. 머리카락과 수염이 햇살을 받아 은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크게 숨을 들이모았다.

"현아! 너는 살아야 한다. 저 대포 소리를 듣거라. 어떻게든지 여길 도망해서..."

순간 고 노인은 등을 꿰뚫는 불덩이를 느꼈다. 중심을 잃고 풀 숲에 쓰러지는 고 노인은 총성의 메아리 속에 현의 절규를 들었다. 그리운 음성.

"할아버지!"

따각! 불발탄을 끄집어내고 다음 탄환을 밀어잰 현의 소총과 연호의 권총에서 불이 튀었다.

순간, 현은 왼편 어깨에 뜨거운 쇠갈고리의 관통을 느끼며 연호가 천천히 왼쪽으로 몸을 틀면서 숲 속으로 굴러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할아버지!"

바위를 넘어 밑으로 내리달으려던 현은 아찔하면서 그대로 바위 위에 쓰러지고 말았다. 어깨를 움켜쥔 손가락 사이로 붉은 피가 뿜어나왔다. 땅으로 끌려가는 듯한 의식의 강화. 어깨의 고통 - 꼭 30년을 살고 지금 여기서 죽어가는구나. 생각을 모아야겠다. 목숨이 끊어지기 전에 생각을, 생각을 모아보자. 이것이 한 인간의 삶? 30년! 어떻게 살았던가? 외면, 도피, 밤낮을 가림 없이 도피, 외면, 도주, 그 밖에 무엇을 하고 지내왔는지 도무지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 첫 번째 탄환처럼 불발에 그친 30년. 그것은 영, 산 송장, 그렇다면 결국 살아본 일이 없지 아니한가.

나는 다음 탄환으로 연호의 가슴을 뚫었다. 사람을 죽인 것이다. 남에게 손가락 하나 가풋하지 않으려던 내가 사람을 죽인 것이다. 가엾은 연호와 나와는 아무런 원한도 없었는데 인간이란 이래서 죄인아른 것일까. 어쩔 수 없이 살인을 하게 되는 인간의 불여의. 죄악을 내포한 인간의 숙명? 그것은 원죄?

우거진 꽃밭의 울타리 안에서 스스로 죄 없다는 내 자신을 잠재우고 있을 때, 밖에서는 검은 구름과 휘몰아칠 폭풍이 그리고 사람이 죽어가는 비명이 준비되고 있었다.

그것은 먼저 내가 질러야 할 비명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어린 병사 대신 내가 그 길가에 누웠어야 했을는지도 모른다. 나 같은 인간은 아직 살아 있었고 살아야 할 인간은 죽어갔다. 이런 것이 그대로 허용될 수 있었다고 생각되는가. 동굴에서 죽은 부친, 강렬히 살아서 아낌없이 그 생명을 일순에 불태운 부친. 부친은 살아남는 인간들을 대신해서 죽었고, 그들의 삶에 어떤 의미를 부여했을는지도 모른다. 저 숲 속에 누운 할아버지. 시체가 아니라 그것은 삶의 중거. 모든 불합리에 알몸으로 항거하고 불합리 속에 역시 불합리한 삶을 주장한 피어린 한 인간의 역사. 거인의 최후 같은 그 죽음.

어머니. 가냘픈 여인의 몸으로 그토록 견딘 인간의 아픔. 아픔을 넘어서 내게 대한 사랑, 죽은 부친에 대한 사랑 그리고 기어이 모든 것을 의탁하는 신에 대한 사랑으로 높인 어머니.

너는 어느 때 어떠한 아픔을 견디었던가. 껍질 속에서 아픔을 거부한 무엄과 비열. 너는 너절한 녀석이었다. 생생한 여자의 알몸을 안기가 두려워 자독 행위로 스스로의 육체를 기만한 너절한 자식. 져야 할 책임이 두려워 되지 못한 자기 변명으로 자위한 비겁.

껍질 속에 몸을 오므리고 두더지처럼 태양의 빛을 꺼린 삶. 산 것이 아니라 다만 있었다. 마치 돌멩이처럼 결국 너는 살아본 일이 없었던 것이다. 살아본 일이 없다면 죽을 수도 없는 일이 아닌가. 살아본 일이 없이 죽는다는 것 아니 죽을 수도 없다는 안타까움이 현의 마음에 말할 수 없는 공포의 감정을 휘몰아왔다. 현을 잃어져가는 생명의 힘을 돋우어 이 공포의 감정에 반발했다.

(살아야겠다. 그리고 살았다는 증거를 보이고 다시 죽어야한다.)

현은 기를 쓰는 반발의 감정 속에는 예기치 않은 새로운 힘이 움터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 힘이 조금씩 조금씩 마음에 무게를 가하더니 전신에 충족감이 느껴지자 현은 가슴속에서 갑자기 우직하고 깨뜨려지는 자기 껍질의 소리를 들었다. 조각을 내고 부서지는 껍질, 그와 함께 거기서 무수한 불꽃이 튀는 듯했다. 그것은 다음 차원에의 비약을 약속하는 불꽃. 무수한 불꽃. 찬란한 그 섬광, 불타는 생애의 의욕. 전신을 흐르는 생명의 여울, 통절히 느껴지는 해방감, 현은 끝없이 푸른 하늘로 트이는 마음의 상쾌를 느꼈다.

(나머지 한 알의 탄환. 그처럼 내가 살아남은 것이라 하자. 그러면 어떻게 될 것인가. 그것은 누구도 모른다. 먼저 나 자신이 선택한 것이다. 다음은 - 그것은 더욱 누구도 모른다.)

분명한 한 가지는 외면하거나 도피하지는 않을 것이다. 외면하지 않고 어떻든 정면으로 대하자. 도피할 수 없도록 절박된 이 처지. 정면으로 대하도록 기어이 상환은 바싹 내 앞으로 다가온 것이다.)

이미 꽃밭의 시대는 끝난 것이다.

살아서 먼저 청부업자들을 거부하자. 떠들어대야 인생은 더욱 무의미할 뿐이라는 것을 뼈저리도록 알려주자. 꺼리고 비웃는 데 그치지 말고 정면으로 알몸을 던져 거부하자. 나 같은 처지의, 아니 나 이상의 경우의 무수한 인간들.

이웃을 보는 눈 귀 하나에도 조심을 담고, 건네는 한마디의 얘기에도 남을 괴롭힐사 애쓰는 인간들. 늙은, 젊은 어린 남녀의 수많은 얼굴들....그리고 그 얼굴들이 있지 아니한가. 나는 외로울 수 없다. 이제부터 그들 가운데서 잃어진 나 자신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청부업자들을 격리하고 주어진 땅 위에 그들과 함께 새로운 마을을 세우자. 거기에 내 덤의 삶을 바치는 것이다. 청부업자들의 교만과 포악을 곧 같은 인간인 자기 자신의 부끄러움으로 돌리고 한결같이 고통을 참고 견뎌온 '조용한' 인간들, 광기의 청부업자는 사라지고 '조용한' 인간들의 세계가 와야 한다. 조용한 인간들의 세계...

현은 가슴에서 피어오르는 훈훈한 것을 억제치 못했다. 되살아오는 어깨의 아픔. 땅 위에 가득 찬 이 몇백 배의 아픔. 이만한 아픔이면 기꺼이 받고 수월히 이겨내야 한다.

- 그리고 살아서 먼저 가까운 사람들에게 조용히 내가 지내온 얘기를 들려주어야 한다.

현은 흐려져가는 의식 속에서 자기를 부르는 하나의 소리를 들었다. 쿵 하고 들려오는 포 소리보다 가까운 하나의 부르짖음. "보아, 저 소리, 벌써 저기 가까워오는 그리운 저 목소리."

울음에 가까운 그 부르짖음은 차차 이 동굴로 가까워오면서 산과 산에 부딪치고 골짜기를 감돌아 메아리에 또 메아리를 일으켜갔다.

산과 산. 어디까지나 이어간 산줄기. 굽이치는 골짜구니. 영겁이 정적은 깨뜨려지고 거기 새로운 생명이 날개를 치며 퍼득이기 시작했다. (p.96-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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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우 휘(鮮于 輝, 아명(兒名)은 鮮于 煇, 1922년 1월 3일 ~ 1986년 6월 12일)

대한민국의 언론인이자 소설가.

평안북도 정주 출생. 1943년 경성사범학교 본과를 졸업하였다. 1946년 월남하여 조선일보사 사회부 기자와 인천중학교 교사를 지낸 뒤 정훈장교로 입대하여 1958년 대령으로 예편하였다.
1959년 한국일보 논설위원으로 다시 언론계에 돌아와 1986년 조선일보사를 정년퇴임하기까지 편집국장·주필·논설고문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군복무 중이던 1955년 『신세계(新世界)』에 단편 「귀신」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등단하였다. 1957년 『문학예술(文學藝術)』 신인특집에 「불꽃」이 당선되고 이 작품으로 제2회 동인문학상을 받으면서 작가로서의 기반을 다졌다.
언론인과 작가 생활을 병행하면서 「오리와 계급장」(1958)·「깃발없는 기수(旗手)」(1959)·「십자가 없는 골고다」(1965)·「노다지」(1986) 등 수많은 중·장편소설을 발표하였다.
1950년대와 1960년대의 문단에서 주목받는 작가의 한 사람으로 떠올랐다. 1986년 자신의 소설을 드라마로 만드는 제작 과정에 참여하여 지방 출장을 갔다가 뇌일혈로 죽었다.
생전에 80여 편에 이르는 중·장편 소설과 1,000여 편의 사설 및 칼럼과 수필 등을 남겼다. 그의 작품 경향은 사실주의적 기법에 바탕을 둔 행동주의 계열로 특징지을 수 있다.
작품에 깔려 있는 행동주의적 특성은 전후(戰後)의 많은 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이 현실의 모순과 부조리에 침묵하거나 내면의 세계로 도피하는 소극적 순응주의를 드러내는 데 비하여, 그의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현실에 맞서 적극적으로 싸워나가는 인물들이 많다는 점으로 나타난다.
대표작 「불꽃」은 일제강점기부터 광복과 6·25를 거치는 30여 년간의 근·현대사의 격동기를 고현이라는 한 청년 지식인의 삶을 통하여 조망하고 있다.
이 작품은 일본 군국주의 파시즘과 광복 직후 좌익 이데올로기를 비이성적이고 비인간적인 광기(狂氣)의 역사를 만들어낸 가장 큰 원인으로 파악한다. 그리고 휴머니즘에 대한 강한 지향과 함께 역사에 대한 문학적 관심의 회복을 꾀함으로써 선이 굵고 스케일이 웅대한 그의 작가적 개성을 잘 드러내고 있다.
말년에 완결된 대하소설 「노다지」는 한말로부터 6·25가 종결되는 1953년까지 2대에 걸친 한 가족사를 통하여 우리 근·현대사의 다양한 전개 과정을 형상화하고 있는 작품이다. 그의 문학세계를 집대성하여 보여준 마지막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그의 세계관적 기반을 이루는 강한 반공 이데올로기로 인하여 역사에 대한 그의 문학적 해석이 더러 객관성을 유지하는 데 어려움을 가져오기도 하였다. 또한 이로 인하여 만년에 이루어진 그의 언론 활동에도 늘 찬반의 격렬한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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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꽃 - 선우휘 (문학과지성사)

쓸쓸한 사람 - 선우휘 (문학사상사)

테러리스트 - 선우휘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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