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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
I. 한국 문학/2. 소설

삼포가는 길 - 황석영 (창비)

by handaikhan 2023. 2. 24.

창비 20세기 한국소설 25

 

황석영 - 삼포가는 길 (1973년)

 

영달은 어디로 갈 것인가 궁리해보면서 잠깐 서 있었다. 새벽의 겨울바람이 매섭게 불어왔다. 밝아오는 아침 햇빛 아래 헐벗은 들판이 드러났고, 곳곳에 얼어붙은 시냇물이나 웅덩이가 반사되어 빛을 냈다. 바람 소리가 먼 데서부터 몰아쳐서 그가 섰는 창공을 베면서 지나갔다. 가지만 남은 나무들이 수십여 그루씩 들판가에서 바람에 흔들렸다.

그가 넉 달 전에 이곳을 찾았을 때에는 한참 추수기에 이르러었었고 이미 공사는 막판이었다. 곧 겨울이 오게 되면 공사가 새봄으로 연기될 테고 오래 머물 수 없으리라는 것을 그는 진작부터 예상했던 터였다. 아니나 다를까, 현장사무소가 사흘 전에 문을 닫았고, 영달이는 밥집에서 달아날 기회만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p.251)

 

"얼마나 있었소?"

사내가 물었다. 가까이 얼굴을 맞대고 보니 그리 흉악한 몰골도 아니었고, 우선 그 시원시원한 태도가 은근히 밉질 않다고 영달이는 생각했다. 그가 자기보다는 댓 살 쯤 더 나이 들어 보였다. 그리고 이 바람 부는 겨울 들판에 척 걸터앉아서도 만사태평인 꼴이었다. 영달이는 처음보다는 경계하지 않고 대답했다.

"넉 달 있었소. 그런데 노형은 어디루 가쇼?"

"삼포에 갈까 하오."

사내는 눈을 가늘게 뜨고 조용히 말했다. 영달이가 고개를 흔들었다.

"방향 잘못 잡았수. 거긴 벽지나 다름없잖소. 이런 겨울철에."

"내 고향이오."

사내가 목장갑 낀 손으로 코밑을 쓱 훔쳐냈다. 그는 벌써 들판 저 끝을 바라보고 있었다. 영달이와는 전혀 사정이 달라진 것이다. 그는 집으로 가는 중이었고, 영달이는 또 다른 곳으로 달아나는 길 위에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참....집에 가는군요."

사내가 일어나 맹꽁이 배낭을 한쪽 어깨에다 걸쳐 메면서 영달이에게 물었다. 

"어디 무슨 일자리 찾아가쇼?"

"댁은 오라는 데가 있어서 여기 왔었소? 언제나 마찬가지죠."

"자, 난 이제 가봐야겠는걸."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질척이는 둑길을 향해 올라갔다. 그가 둑위로 올라서더니 배낭을 다른 편 어깨 위로 바꾸어 메고는 다시 하반신부터 차례로 개털모자 끝가지 둑 너머로 사라졌다. 영달이는 어디로 향하겠다는 별 뾰족한 생각도 나지 않았고, 동행도 없이 길을 갈 일이 아득했다. 가다가 도중에 헤어지게 되더라도 우선은 말동무라도 있었으면 싶었다. 그는 멍청히 섰다가 잰걸음으로 사내의 뒤를 따랐다. 영달이는 둑 위로 뛰어 올라갔다. 사내의 걸음이 무척 빨라서 벌써 차도로 나가는 샛길에 접어들어 있었다. 차도 양쪽에 대빗자루를 거꾸로 박아놓은 듯한 앙상한 포플러들이 줄을 지어 섰는 게 보였다. 그는 둑 아래로 달려 내려가며 사내를 불렀다.

"여보쇼, 노형!"

그가 멈춰 서더니 뒤를 돌아보고 나서 다시 천천히 걸어갔다. 영달이는 달려가서 그 뒤편에 따라붙어 헐떡이면서,

"같이 갑시다. 나두 월출리까진 같은 방향인데...."

했는데도 그는 대답이 없었다. 영달이는 그의 뒤통수에다 대고 말했다.

"젠장, 이런 겨울은 처음이오. 작년 이맘때는 좋았지요. 월 삼천원짜리 방에서 작부랑 살림을 했으니까. 엄동설한에 정말 갈 데 없이 빳빳하게 됐는데요."

"우린 습관이 되어놔서."

사내가 말했다.

"삼포가 여기서 몇 린 줄 아쇼? 좌우간 바닷가까지만도 몇백 리 길이오. 거기서 또 배를 타야 해요."

"몇 년 만입니까?"

"십 년이 넘ㅇ멌지. 가봤자....아는 이두 없을 거요."

"그럼 뭣 하러 가쇼?"

"그냥....나이 드니까, 가보구 싶어서."

그들은 차도를 들어섰다. 자갈과 진흙으로 다져진 길이 그런대로 걷기에 편했다. 영달이는 시린 손을 잠바 호주머니에 처박고 연방 꼼지락거렸다. (p.254-256)

 

"인사가 늦었네요. 나 노영달이라구 합니다."

"나는 정가요."

"우리두 기술이 좀 있어놔서 일자리만 잡으면 걱정 없지요."

영달이가 정씨에게 빌붙지 않을 뜻을 비쳤다.

"알고 있소. 착암기 잡지 않았소? 우리넨, 목공에 용접에 구두까지 수선할 줄 압니다."

"야, 되게 많네. 정말 든든하시겠구만."

"십 년이 넘었다니까."

"그래도 어디서 그런 걸 배웁니까?"

"다 좋은 데서 가르치고 내보내는 집이 있지."

"나두 그런 데나 들어갔으면 좋겠네."

정씨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지금이라두 쉽지. 하지만 집이 워낙에 커서 말요."

"큰집...."

하다 말고 영달이는 정씨의 얼굴을 쳐다봤다. 정씨는 고개를 밑으로 숙인 채로 묵묵히 걷고 있었다. 언덕을 넘어섰다. 길이 내리막이 되면서 강변을 따라서 먼 산을 돌아 나간 모양이 아득하게 보였다. 인가가 좀처럼 보이지 않는 황량한 들판이었다. 마른 갈대밭이 헝클어진 채 휘청대고 있었고 강 건너 곳곳에 모랫바람이 일어나는 게 보였다. (p.257)

 

"언제요?"

하고 나서 작년 겨울이라고 재차 말하자 껄껄 웃기 시작했다.

"좋았지 정말. 대전 있었습니다. 옥자라는 애를 만났었죠. 그땐 공사장에서 별 볼일두 없었구 노임두 실했어요."

"살림을 했군?"

"의리 있는 여자였어요. 애두 하나 가질 뻔했었는데. 지난봄에 내가 실직을 하게 되자, 돈 모으면 모여서 살자구 서울루 식모 자릴 구해서 떠나갔죠. 하지만 우리 같은 떠돌이가 언약 따위를 지킬 수 있나요. 밤에 혼자 자다가 일어나면 그 애 때문에 남은 밤을 꼬박 새우는 적두 있습니다."

정씨는 흐려진 영달의 표정을 무심하게 쳐다보다가,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고는 조용하게 말했다.

"사람이란 곁에서 오랫동안 두고 보지 않으면 저절로 잊게 되는 법이오."

뒤란으로 나갔던 뚱뚱이 여자가 호들갑을 떨면서 돌아왔다.

"아유 어쩌나....눈이 올 것 같애. 하늘에 먹구름이 잔뜩 끼고, 바람이 부는군. 이놈의 두상이 꼴에 도중에서 가다 말고 돌아올 게 분명하지."

정씨가 뚱뚱보 여자의 계속될 수다를 막았다.

"월출까지는 몇 리요?"

"한 육십 리 돼요."

"뻐스는 있나요?"

"오후에 두 대쯤 있지요. 이년을 따악 잡아갖구 막차루 돌아올 텐데...참, 어디까지들 가슈?"

영달이가 말했다.

"바다가 보이는 데까지."

"바다? 멀리 가시는군. 요 큰길루 가실 거유?"

정씨가 고개를 끄덕이자 여자는 의자에 궁둥이를 붙인 채로 앞으로 다가앉았다.

"부탁 하나 합시다. 가다가 스물두엇쯤 되고 머리는 긴 데다 외눈 쌍까풀인 계집년을 만나면 캐어봐서 좀 잡아오슈. 내 현금으루 딱, 만 원 내리다."

정씨가 빙그레 웃었다. 영달이가 자신 있다는 듯이 기세 좋게 대답했다.

"그럭하슈. 대신에 데려오면 꼭 만 원 내야 합니다."

"암, 내다뿐이오. 예서 하룻밤 푹 묵었다 가시구려."

"좋았어."

그들은 일어났다. 문을 열고 나오는 그들의 뒷덜미에다 대고 여자가 소리쳤다.

"머리가 길구 외눈 쌍까풀이에요. 잊지 마슈."

해가 낮은 구름 속에 들어가 있어서 주위는 누런 색안경을 통해서 내다본 것처럼 뿌옇게 보였다. 바람이 읍내의 신작로 한복판에서 회오리기둥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들은 고개를 처박고 신작로를 따라서 올라갔다. 영달이가 담배 한 갑을 샀다. 들판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 소리가 날카롭게 들려왔다. (p.262-263)

 

털썩, 눈 떨어지는 소리만이 가끔식 들리는 송림 사이를 지나는데, 뒤에 처져서 걷던 영달이가 주춤 서면서 말했다.

"저것 좀 보슈."

"뭣 말요?"

"저쪽 소나무 아래."

쭈그려 앉은 여자의 등이 보였다. 붉은 코트 자락을 위로 쳐들고 쭈그린 꼴이 아마도 소변이 급해서 외진 곳을 찾은 모양이다. 여자가 허연 궁둥이를 쳐들고 속곳을 올리다가 뒤를 힐끗 돌아보았다.

"오머머!"

여자가 재빨리 코트 자락을 내리고 보퉁이를 집어 들면서 투덜거렸다.

"개새끼들 뭘 보구 지랄야."

영달이가 낄낄 웃었고, 정씨가 낮게 소곤거렸다.

"외눈 쌍까풀인데그래."

"어쩐지 예감이 이상하더라니...."

여자는 어딘가 불안했는지 그들에게로 다가오기를 꺼리며 주춤주춤했다. 영달이가 말했다.

"잘 만났는데 백화 아가씨. 찬샘에서 뺑소니치는 길이구만."

"무슨 상관야, 내 발루 내가 가는데."

"주인아줌마가 댁을 만나면 잡아다 달래던데."

여자가 태연하게 그들에게로 걸어 나왔다.

"잡아가보시지."

백화의 얼굴은 화장을 하지 않았는데도 먼 길을 걷느라고 발갛게 달아 있었다. 정씨가 말했다.

"그런 게 아니라...행선지가 어디요? 이 친구 말은 농담이구."

여자는 소변보다가 남자들 눈에 띈 일보다는 영달이의 거친 말솜씨에 몹시 토라져 있었다. 백화가 걸음을 빨리하며 내쏘았다.

"제 따위들이 뭐라구 잡아가구 말구야. 뜨내기 주제에.":

"그래. 우리두 너 같은 뜨내기 신세다. 찬샘에 잡아다 주고 여비라두 뜯어 써야겠어."

영달이가 여자의 뒤를 바싹 쫓아가며 농담이 아님을 재차 강조했다. 여자가 휙 돌아서더니, 믿을 수 없을 만큼 재빠르게 영달이의 앞가슴을 밀어냈다. 영달이는 미처 피할 겨를도 없이 눈 위에 궁둥방아를 찧고 나가떨어졌다. 백화가 한 팔은 보퉁이를 기고, 다른 쪽은 허리에 척 얹고 서서 영달이를 내려다보았다.

"이거 왜 이래?" 나 백화는 이래 봬두 인천 노랑집에다, 대구 자갈 마당, 포항 중앙대학, 진해 칠구, 모두 겪은 년이라구. 조용히 시골읍에서 수양하던 참인데....야야, 내 배 위루 남자들 사단 병력이 지나갔어. 국으루 가만있다가 조용한 데 가서 한 코 달라면 몰라두 치사하게 뚱보 돈 먹자구 나한테 공갈 때리면 너 죽구 나 죽는 거야."

영달이는 입을 벌린 채 일어설 줄을 모르고 백화의 일장연설을 듣고 있었다. 정씨는 웃음을 참느라고 자꾸만 송림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영달이가 멋쩍게 궁둥이를 털면서 일어났다.

"우리두 의리가 있는 사람들이다. 치사하다면, 그런 짓 안해."

세 사람은 나란히 눈 쌓인 길을 걸었다. 백화가 말했다.

"그럼 반말 놓지 말라구요."

영달이는 입맛을 쩍쩍 다셨고, 정씨가 물었다.

"어디까지 가오?"

"집에요."

"집이 어딘데..."

"저 남쪽이에요. 떠난 지 한 삼 년 됐어요."

영달이가 말했다.

"얘네들은 긴 밤 자다가두 툭하면 내일 당장에라두 집에 갈 것처럼 말해요."

백화는 아까와 같은 적의는 나타내지 않았다. 백화는 귀 옆으로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자꾸 쓰다듬어 올리면서 피곤한 표정으로 영달이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그래요. 밤마다 내일 아침엔 고향으로 출발하리라 작정하죠. 그런데 마음뿐이지, 몇 년이 흘러요. 막상 작정하고 나서 집을 향해 가보는 적두 있어요. 나두 꼭 두 번 고향 근처까지 가봤던 적이 있어요. 한번은 동네 어른을 먼발치서 봤어요. 나 이름이 백화지만, 가명이에요. 본명....아무에게도 가르쳐주지 않아."

정씨가 말했다.

"서울식당 사람들이 월출역으로 지키러 가던데...."

"이런 일이 한두 번인가요 머. 벌써 그럴 줄 알구 감천 가는 길루 왔지요. 촌놈들이니까 그렇지, 빠른 사람들은 서너 군데 길목을 딱 막아놓아요. 나 그런 사람들께 손해 끼친 거 하나두 없어요. 빚이래야 그치들이 빨아먹은 나머지구요. 아유, 인젠 술하구 밤이라면 지긋지긋해요. 밑이 쭉 빠져버렸어. 어디 가서 여승이나 됐으면....냉수에 목욕재계 백 일이면 나두 백화가 아니라구요, 씨팔."

걸을수록 백화는 말이 많아졌고, 걸음은 자꾸 처졌다. 백화는 여러 도시에서 한창 날리던 시절의 얘기를 늘어놓았다. 여자가 결론지은 얘기는 결국 화류계의 사랑이란 돈 놓고 돈 먹기 외에는 모두 사기라는 것이었다. 그 여자는 자기 보퉁이를 꾹꾹 찌르면서 말했다.

"아저씨네는 뭘 갖구 다녀요? 망치나 톱이겠지 머. 요 속에는 헌 속치마 몇 벌, 빤쓰, 화장품, 그런 게 들었지요. 속치마 꼴을 보면 내 신세하구 똑같아요. 하두 빨아서 빛이 바래구 재봉실이 나들나들하게 닳아 끊어졌어요."

백화는 이제 겨우 스물두 살이었지만 열여덟에 가출해서, 쓰리게 당한 일이 많기 때문에 삽십이 훨씬 넘은 여자처럼 조로해 있었다. 한마디로 관록이 붙은 갈보였다. 백화는 소매가 해진 헌 코트에다 무릎이 튀어나온 바지를 입었고, 물에 불은 오징어처럼 되어버린 낡은 하이힐을 신고 있었다. 비탈길을 걸을 때, 영달이와 정씨가 미끄러지지 않도록 양쪽에서 잡아주어야 했다. (p.266-269)

 

그들은 일곱 시쯤에 감천 읍내에 도착했다. 마침 장이 섰었는지 파장된 뒤인데도 읍내 중앙은 흥청대고 있었다. 전 부치는 냄새, 고기 굽는 냄새, 곰국 냄새가 풍겨 왔다. 영달이는 이제 백화를 옆에서 부축하고 있었다. 발을 디딜 때마다 여자가 얼굴을 찡그렸다. 정씨가 백화에게 물었다.

"어느 방향이오?"

"전라선이에요."

"나는 호남선 쪽인데. 여비는 있소?"

"군용차를 사정해서 타구 가면 돼요."

그들은 장터 모퉁이에서 아직도 따뜻한 온기가 남아 있는 팥 시루떡을 사 먹었다. 백화가 자기 몫에서 절반을 떼어 영달이에게 내밀었다.

"더 드세요. 날 업구 왔으니 기운이 배나 들었을 텐데."

역으로 가면서 백화가 말했다.

"어차피 갈 곳이 정해지지 않았다면 우리 고향에 함께 가요. 내 일자리를 주선해드릴게."

"내야 삼포루 가는 길이지만, 그렇게 하지?"

정씨도 영달이에게 권유했다. 영달이는 흙이 덕지덕지 달라붙은 신발 끝을 내려다보며 아무 말이 없었다. 대합실에서 정씨가 영달이를 한쪽으로 끌고 가서 속삭였다.

"여비 있소?"

"빠듯이 됩니다. 비상금이 한 천 원쯤 있으니까."

"어디루 가려오?"

"일자리 있는 데면 어디든지...."

스피커에서 안내하는 소리가 웅얼대고 있었다. 정씨는 대합실 나무의자에 피곤하게 기대어 앉은 백화 쪽을 힐끗 보고 나서 말했다.

"같이 가시지. 내 보기엔 좋은 여자 같군."

"그런 거 같아요."

"또 알우? 인연이 닿아서 말뚝 박구 살게 될지. 이런 때 아주 뜨내기 신셀 청산해야지."

영달이는 시무룩해져서 역사 밖을 멍하니 내다보았다. 백화는 뭔가 쑤군대고 있는 두 사내를 불안한 듯이 지켜보고 있었다. 영달이가 말했다.

"어디 능력이 있어야쟈죠.

"삼포엘 같이 가실라우?"

"어쨌든..."

영달이가 뒷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한 오백 원짜리 두 장을 꺼냈다.

"저 여잘 보냅시다."

영달이는 표를 사고 삼립빵 두 개와 찐 달걀을 샀다. 백화에게 그는 말했다.

"우린 뒤차를 탈 텐데....잘 가슈."

영달이가 내민 것들을 받아 쥔 백화의 눈이 붉게 충혈되었다. 그 여자는 더듬거리며 물었다.

"아무...안 가나요?"

"우린 삼포루 갑니다. 거긴 내 고향이오."

영달이 대신 정씨가 말했다. 사람들이 개찰구로 나가고 있었다.백화가 보퉁이를 들고 일어섰다.

"정말, 잊어버리지...않을게요."

백화는 개찰구로 가다가 다시 돌아왔다. 돌아온 백화는 눈이 젖은 채로 웃고 있었다.

"내 이름 백화가 아니에요. 본명은요...이점례에요."

여자는 개찰구로 뛰어나갔다. 잠시 후에 기차가 떠났다.

그들은 나무의자에 기대어 한 시간쯤 잤다. 개어보니 대합실 바깥에 다시 눈발이 흩날리고 있었다. 기차는 연착이었따. 밤차를 타려는 시골 사람들이 의자마다 가득 차 있었다. 두 사람은 말없이 담배를 나눠 피웠다. 먼 길을 걷고 나서 잠깐 눈을 붙였더니 더욱 피로해졌던 것이다. 영달이가 혼잣말로,

"쳇, 며칠이나 견디나..."

"뭐라구?"

"아뇨, 백화란 여자 말요. 저런 애들...한 사날두 촌생활 못 배겨나요."

"사람 나름이지만 하긴 그럴 거요. 요즘 세상에 일이 년 안으루 인정이 휙 변해가는 판인데..."

정씨 옆에 앉았던 노인이 두 사람의 행색과 무릎 위에 배낭을 눈여겨 살피더니 말을 걸어왔다.

"어디 일들 가슈?"

"아뇨, 고향에 갑니다."

"고향이 어딘데..."

"삼포라구 아십니까/"

"어 알지, 우리 아들놈이 거기서 도자를 끄는데..."

"삼포에서요? 거 어디 공사 벌릴 데나 됩니까? 고작해야 고기잡이나 하구 감자나 매는데요."

"어허! 몇 년 만에 가는 거요?"

"십 년."

노인은 그렇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말두 말우, 거긴 지금 육지야. 바다에 방둑을 쌓아놓구, 추럭이 수십 대씩 돌을 실어 나른다구."

"뭣 땜에요?"

"낸들 안. 뭐 관광호텔을 여려 채 짓는담서, 복잡하기가 말할 수 없데."

"동네는 그대루 있을까요?"

"그래두가 뭐요. 맨 천지에 공사판 사람들에다 장까지 들어섰는걸."

"그럼 나룻배두 없어졌겠네요."

"바다 위로 신작로가 났는데. 나룻배는 뭐에 쓰오. 허허, 사람이 많아지니 변고지. 사람이 많아지면 하늘을 잊는 법이거든."

작정하고 벼르다가 찾아가는 고향이었으나, 정씨에게는 풍문마저 낯설었다. 옆에서 잠자코 듣고 있던 영달이가 말했다.

"잘됏군. 우리 거기서 공사판 일이나 잡읍시다."

그때에 기차가 도착했다. 정씨는 발걸음이 내키질 않았다. 그는 마음의 정처를 방금 잃어버렸던 때문이었다. 어느 결에 정씨는 영달이와 똑같은 입장이 되어버렸다.

기차는 눈발이 날리는 어두운 들판을 향해서 달려갔다. (p.274-278)

 

<신동아> 109호 (1973.9)

<황석영 중단편전집> 2권 (창비, 2000)

삼포가는 길 - 황석영 (창비, 황석영 중단편집2)

 

<작품 해설 - 이재영(문학평론가)>

1. <삼포 가는 길>에서 영달, 정씨, 백화의 동행을 통해 보여주려고 한 현실은 어떤 것인가요? 그리고 '동행'과 '삼포'가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요?

<삼포 가는 길>은 작가의 체험을 기초로 한 작품인데, 공사장을 떠돌던 시절 작가는 실제로 돈이 없어서 밥값을 떼어먹고 도망친 일이 있다고 합니다. 공사장을 전전하는 뜨내기 노동자 영달, 감옥에 갔다 온 후 비슷한 생활을 하고 있는 정씨, 그리고 군부대 근처의 주점 작부로 일하던 백화, 이 세 사람은 모두 고향을 떠나 변변찮은 일자리를 찾아 떠돌아다니는 유랑민들입니다. 근대화 과정에서 삶의 근거지를 잃어버린 비슷한 운명의 세 사람 사이에서 잠시 동안의 동행만으로도 사랑과 연민의 감정이 싹틀 만큼 깊은 동류의식이 교감된 것은 우연이 아니겠지요. 백화에게는 확실하게 돌아갈 집이 있는 듯하고, 정씨는 10년 만에 아름다운 고향 삼포를 향하는 중이고, 밥집에서 도망 나온 영달은 무작정 바다를 향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백화도 완전한 귀향은 아니어서 또 고향을 떠나기 십상이고, 풍족했던 정씨의 고향 삼포는 관광호텔 공사판으로 바뀌어버렸으니 이들의 유랑은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영달을 좋아하게 된 백화가 그에게 자신의 고향으로 같이 갈 것을 권유하지만, 이미 가난 때문에 한 여자와의 동거생활을 청산해야 했던 경험이 있는 영달은 이를 마다합니다. 애정도 가난의 위력 앞에서는 사치일 뿐이지요. 그리고 정씨가 이상향처럼 그린 삼포도 실은 그런 풍족한 곳이 아니었겠지요. 그곳 생활이 그렇게 좋았다면 그가 고향을 등진 것이 이해되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삼포의 실상이 어떠했는지 간에 삼포는 그에게 혹독한 성년의 세상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퇴행욕망의 소실점이었을 것입니다. 순식간에 마음의 정처를 잃어버린 그의 허전함은 급격한 근대화의 물결 속에서 삶의 근거와 확실성을 상실한 무수한 삶들을 여실하게 상징하고 있습니다.

2. <삼포 가는 길>은 시대적 전형성을 띠고 있기 때문에 1970년대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평가 받고 있는데, 당대의 모습을 잘 보여주기는 하나 그것을 개선하거나 극복하려는 노력이 없다는 점에 대해 아쉽다는 주장에 대해서.

영달, 백화, 정씨가 향하는 곳이 원래 다 달랐는데, 작가가 이 작품의 제목을 '삼포 가는 길'로 정한 것은 '삼포'가 가지는 상징성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앞서 지적했듯이 삼포는 작품 안에서 실제 존재하는 지명이기는 하지만, 현실의 공간이라기보다는 정씨가 한껏 과장해놓은 관념의 공간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런 곳으로의 퇴행이 불가능하다는 것, 바로 이 점을 이 작품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현실의 삶에서 후퇴할 곳은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지요. 모든 저항과 극복의 노력이 이런 현실의식에서 출발한다고 할 때, 이 작품은 현실도피의 허망함을 지적함으로써 역으로 현실의식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있는 것입니다. 영달과 정씨가 당장 싸움에 나서는 것은 아니겠으나, 그들이 갈 곳은 삼포의 공사장 같은 노동현장밖에 없다는 것을 이제 인정하게 될 것이고, 이런 인정은 이미 문제의 극복을 위한 첫걸음을 의미합니다. 삼포의 공사장이 <객지>의 간척장으로 될 가능성은 다분히 크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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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黃晳暎, 1943년 1월 4일 ~ )

대한민국의 소설가.

20세기를 대표하는 작가이자 현대 실존주의 문학의 선구자. 카프카는 1883년 체코의 수도 프라하에서 유대인 상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01년 프라하 대학에 입학하여 독문학과 법학을 공부했으며, 1906년 법학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1년간 프라하의 형사법원과 민사법원에서 실무를 익혔으며, 1908년에는 노동자산재보험공사에 취직해 14년 동안 근무하면서 직장생활과 글쓰기 작업을 병행했다. 어릴 때부터 작가를 꿈꾼 카프카는 1904년 「어느 투쟁의 기록」을 시작으로, 「시골에서의 결혼 준비」 「선고」 「변신」 「유형지에서」 등의 단편과 『실종자』 『소송』 『성』 등의 미완성 장편, 그리고 작품집 『관찰』 『시골 의사』 『단식 광대』와 일기 등 총 3,400여 쪽에 달하는 많은 작품을 남겼다. 또한 약 1,500통의 편지를 작성하는 등 방대한 글쓰기 활동을 지속했다. 1917년 폐결핵 진단을 받았고 세 번의 파혼과 권위적이던 아버지와의 갈등, 신경쇠약 등에 시달리면서도 꾸준히 집필 활동에 몰두했으나, 병이 악화되어 1924년 6월 3일 오스트리아 빈 근교 키얼링의 한 요양원에서 사망했다. 카프카는 죽기 전 평생의 벗이었던 막스 브로트에게 자신의 미완성 작품을 모두 없애달라고 부탁했지만, 브로트는 이를 지키지 않고 그의 유작들을 정리해 출간했다. 세계의 불확실성과 인간 존재의 근원적 불안과 소외의 문제에 대한 통찰을 그려낸 카프카의 작품들은 지금도 다양한 측면에서 활발하게 연구되고 재발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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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 중단편 전집 (창비)

손님 - 황석영 (창비)

오래된 정원 - 황석영 (창비)

장길산 - 황석영 (창비)

돼지꿈 - 황석영 (민음사 세계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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