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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
I. 한국 문학/2. 소설

별을 헨다 - 계용묵 (창비)

by handaikhan 2023. 2. 19.

창비 20세기 한국 소설 10

 

<계용묵 - 별을 헨다 (1946년)>

 

산도 상상봉 맨 꼭대기에까지 추어올라 발뒤축을 도두들고 있는 목을 다 내빼어도 가로놓인 앞산의 그 높은 봉은 눈 아래 정복하는 수가 없다.

하늘과 맞닿은 듯이 일망무제로 끝도 없이 빠안히 터진 바다, 산너머 그 바다, 푸른 바다, 고향의 앞바다, 아아 그 바다 그리운 바다.

다시 한 번 발가락에 힘을 주고 지끗 뒤축을 들어본다. 금시 키가 자랐을 리 없다. 역시 눈앞에 우뚝 마주 서는 그놈의 산봉우리.

"으아-"

소리나 넘겨 보내도 가슴이 시원할 것 같다. 목이 찢어져라 질러본다.

"으아-"

그러나 소리 또한 그 봉우리를 헤어 넘지 못하고 중턱에 맞고는 저르릉 골안을 쓸데도 없이 울리며 되돌아와 맞는 산울림이 이켠 아래로 낙엽 긁기에 배바쁜 어머니의 가슴만을 놀래놓는다.

별안간의 지랄소리에 어머니는 흠칫 놀라고 갈퀴를 꽁무니 뒤로 감추며 주위를 둘러 살핀다. 소리의 주인공을 찾는 모양이다.

어머니의 구에는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큰 소리가 총소리보다도 무섭게 들린다. 집이라고 가마니 한 겹으로 겨우 둘러싼 산경의 단칸 초막. 날은 추워온다. 겨울 준비가 없을 수 없다. 그러나 산등성이에 자연히 자라난 풀도 금단의 영역에 속한다. 풀이 없으면 눈비의 사태질이 산밑에 집들을 위협하는 줄을 모르느냐는 핏줄 서린 눈알이 엄한 호령과 같이 군다. 가슴이 뜨끔거리는 낙엽 긁기다. 위로와 도움은 못 드릴망정 부질없는 고함소리로 어머니를 놀래었다. 자기인 줄을 알려야 할 텐데. 어서 알리고 싶어 몸짓을 하며 목을 내빼어보나 어머니가 그 형용을 알아줄 리 없다. 눈을 둘러주다가 자기의 그림자를 산상에서 찾고는 긁어모은 낙엽도 모르는 채 그대로 버리고 슬며시 돌아선다. 필시 자기를 아침마다 호령하는 그 눈 붉은 사나이로 아는 모양이다.

"소나무 우에서 까치가 푸뜩 하구 날아만 나두 가슴이 막 내려앉는 것 같구나! 글쎄."

어제 아침에도 낙엽을 한 아름 긁어 안고 들어오며 한숨과 같이 허리를 펴는 어머니의 말을 무어라 받아얄지 몰랐다.

귀국한 지가 일 년. 지난 겨울이 곱 돌아오도록 집 한 칸을 마련 못하고 초막에다 어머니를 그대로 모신 채 이전처럼 마음의 주름을 못 펴 드리는 자기는 구관을 제대로 가진 옹근 사람 같지가 못하다. 가세는 옛날부터 가난했던 모양으로 아버지도 나으르 하나를 만주에서 시달리다 돌아가셨다지만 제 나라에 돌아와서도 이런 가난을 대로 물려 누려야 하는 것이 자기에게 짊어지워진 용납 못할 운명일까. 만주에서의 생활이 차라리 행복이었다. 노력만 하면 먹고 살기는 걱정이 없었고, 산도 물도 정을 붙이니 이국 같지 않았다. 노력도 미치지 않는 고국. 무슨 일이나 인제 하는 일이 내 일이다. 힘껏 하자, 정성껏 하자, 마음을 아끼지 않아오건만 한 칸의 집, 한 자리의 일터에조차도 이렇게 정에 등졌다. 일본이 물러가고 독립이 되었다. 자기도 반가웠거니와 제 땅에 뼈를 묻게 된다고 기꺼워하시던 어머니. 아버지도 고토에 뼈 못 묻힘을 못내 한하셨다. 자기만 고토에 묻힐 욕심이 있으랴. 아버지의 유골도 같이 모시고 나가야 한다. 밤잠을 못 자고 무덤을 파서 뼈마디를 추려가지고 나온 것이 산 사람의 잠자리도 정치 못하였다. 나올 때에 보자기에 싸가지고 나온 그대로 어머니의 곁에서 초막살이다. 묻기야 어덴들 못 묻으련만 고국도 고향이 그렇게 그립다.

고향은 찻길이 직로라, 차로 오자던 고향이 배편이 안전타고 뱃길로 돌아왔다. 어디든 제 땅이 아니냐 아무 데나 내려서 가자. 인천에 와 닫고 보니 뜻도 않았던 삼팔선이 그어져 제 나라가 아닌 것처럼 남과 북이 제멋대로 굳었다. 그래도 내 땅이라 못 갈 리 없다고 삼팔의 경계선을 넘다가 빵 하고 산상에서 터져 나오는 총소리에 기겁들을 하고 서성이다 보니 동행자 중 한 사람이 거꾸러졌다. 삼팔선의 국경 아닌 국경을 넘기란 이렇게도 모험인 것을 체험하고, 고향이래야 일가친척도 한 사람 없는 그리 푸진 고향도 아니다. 어디를 가도 제 손으로 터를 닦아야 살 차비다. 서울도 내 땅이라 보퉁이를 풀어 놓고 터를 닦자니 날로 어려워만 지는 생활. 겨울까지 눈안ㅍ에 떨어졌다. 초막의 추위는 지금고 고작이다. 밤새도록 담요 한 겹에 싸여 신음하는 어머니. 가슴이 답답하다. 시원한 바람이 그립다. 눈이 짝해지자 산을 탔다. 산을 타니 산바람이나 시원할까. 고향이 그립다. 배꼽줄이 떨어져서부터 놀던 바다, 고향의 앞바다, 푸른 바다, 시원한 바다, 그 바다나 마음껏 바라보았으면 바다 끝같이 가슴이 뚫릴 것 같다. 부질없이 봉우리를 추어올라 지랄을 부려보니 마음이 후련할까? 아침이 늦었다고 시장기만이 구미를 돋운다. (p.33-36)

 

남대문시장의 남미창정 어귀라고만 하여놓은 것이 하도 사람이 안고 뒤여 좀해서는 찾을 수가 없다. 어른, 아니, 늙은이, 색시까지 뒤섞여 물건들을 안고 지고 밀치고 제치고 비비 튼다. 같이 비비고 끼어들어보니 안쪽 구석으로 낯익은 그림자가 시야에 들어온다. 잠바 흥정이 붙었다. 친구는 양복 위에다 잠바를 입었다. 물건 주인은 값이 맞지 않는 모양으로 어서 벗으라고 잠바 앞섶을 한 손으로 붙들고 당긴다. 조금도 닳아진 맛이 없는 것 같은 스물다섯이 채 됐을까 한 청년이다.

"안 팔다니, 팔백 원이면 제 시센데, 시세를 다 줘두 안 팔아? 이건 누굴 히야까시루 가지구 나왔어?"

친구는 눈을 매섭게 부릅뜨고 팔을 뿌리친다.

"글쎄 그러켄 못 팔아요, 이천 원 다 줘야 돼요."

청년의 손은 다시 잠바로 건너간다. 친구의 눈은 좀더 매섭게 모로 비끼더니,

"받아요."

지전 묶음을 청년의 호주머니 속에 억지로 넣어주고 돌아선다.

넣어준 돈을 청년은 다시 들어내 부르쥐고 뒤를 쫓는다.

"여보!"

친구의 옷자락을 붙든다.

"누구야! 웨, 붙들어? 바쁜 사람을...."

"인 줘요."

"주다니 멀 줘?"

"잠바 말이에요."

"당신 정신 있소? 물건을 팔구 돈까지 지갑에 넣구 다니다가 딴생각을 하구선...이건 누굴 바지저구리만 다니는 줄 알아? 맘대루 물건을 팔았다 물렀다...."

몸부림을 쳐 청년을 붙든 손을 떨구고, 떨어진 손을 와락 붙들어 이마빼기가 맞닿으리만치 정면으로 딱 당기어 세우고 눈을 흘기며 가슴을 밀어제친다.

"이러단 좋지 못해 괜히!"

밀어제쳐진 대로 물러난 청년은 더 맞잡이를 할 용기를 잃는다. 멍하니 친구를 바라보고만 섰더니 어처구니없는 듯이 뭐라고 혼자 중얼거리며 그대로 쥐고 있던 돈을 세어보고 집어넣는다.

무서운 판이었다. 총소리 없는 전쟁 마당이다. 친구는 이 마당의 이러한 용사이었던가? 만나기조차 무서워진다. 여기 모여 웅성이는 이 많은 사람들은 다 그러한 소리 없는 총들을 마음속에 깊이들 지니고 있는 것일까, 빗맞을까보아 곁이 바르다. (P.38-39)

 

어느 커다란 회사의 중역이 살던 숙사인 듯 반 양식의 빨간 기와집이다.

"이 집두 그렇게 얻었거든."

친구는 전령의 단추를 누른다.

꼭 같은 알몸으로 보퉁이 한 개씩을 등게 걸머진 채 인천에 내려서 헤어진 지 일 년. 친ㄴ구의 살림은 벌써 틀이 잡혔다. 가구의 준비까지도 완비가 된 듯 장롱이니 의걸이니 놓아야 할 건 제대로 다 들여놓였는데 놀랐다.

"팔백 원, 참 싸구나! 이건."

들고 온 잠바를 다다미 위에 내던진다.

"거긴 하루 한때만 들러두 밥벌인 되거든. 일자린 없것다. 쌀값은 비싸것다, 그대로 댕그라니들 앉아서 배겨날 장사가 있나. 전재민들이 가지구 나오는 물건이 여간 많은 게 아니야. 능지에서 자라난 풀대 모양으루 희멀쑥한 얼굴이 제대루 내놓지두 못허구 옆에다 끼구선 비실비실 주변으루만 도는 걸 붙들기만 허면 그건 그저 얻는 폭이지. 저 잠바도 만주 건가봐. 가죽이니 좀 좋아? 작자가 어리숭해가지구 그래두 첫마디엔 안 놓아주구 제법 쫓아오든데. 글쎄 외투루부터 저구리, 바지 차례루 다들 팔아자시군 쪽 발가벗고들 눈이 멀똥멀똥하야 누어서 천정에 팔똥만 세구 있는 사람두 있대나? 하하. 자네도 이런 데 눈뜨지 않으믄 파리똥 세게 되네, 괜히."

"파리똥두 집이 있어야 헤지. 난 별만 헤네."

농으로 받기는 하였으나 친구의 상식과는 대잡이가 되지 않는다. 기만 막히는 소리뿐이다.

"난 가겠네."

"아, 이 사람아, 같이 나가. 내 정말 한 놈 내쫓구 집 들게 해준달밖에."

"우리 단 두 식구 살 집 그리 커선 멀 허나. 난 방이나 한 간 얻을까봐."

"방은 그래 얻을 듯싶어? 보증금이 만 원두 넘는다네."

"방두 못 얻으면 이북으루 가지."

"저런! 이북선 누가 그저 집 주나? 다 저 헐 나름이라누. 여기서 못살면 거기 가두 못 살아. 괜히 고집 부리지 말구 앉게."

"그래두 가는 사람이 많든데...."

"아, 가는 사람만 봤나! 오는 사람이 더 많은 건 못 보구. 이 좋은 시세에 서울서 못 살면 어디서 산대는 게여."

"아니 정말 이러단 오늘두 참 내가...."

일어서는 옷자락을 친구는 붙든다.

"글쎄 앉아."

"놓아."

"앉으라니깐."

그래도 뿌리치고 기어코 돌아선다.

"저런 반편이....태만 길러서!"

쫓아 나와 중얼거리는 소리를 층층대를 내려서며 듣는다. (P.40-42)

 

낮의 거리는 여전히 사람들의 발부리에 닦인다. 거리가 비좁게 발부리를 닦는 무리들, 허구한 날을 이렇게 많을까. 겨레도 모르고 양심에 눈감은 무리들은 골목마다 차고, 땀으로 시간을 새기는 무리들은 일터마다 찼다. 차고 남아 거리로 범람하는 무리들이 이들의 존재라면 '반편이야 태만 길러서'의 축에 틀림없다.

이 반편의 축들은 다들 밤이면 별을 세다가 오라는 데도 없는 걸음이 이렇게도 낮이면 싱겁게 배바쁜 것일까. 언제까지나 싸늘한 별을 가슴에다 부둥켜안고 세어야 태 속에서 벗어나 거리에서의 정리에 도움이 될까. 피난민 구제회의 알선으로 어떤 문화사에 이력서를 내고 총무부장과의 인사 끝에 집이 있느냐고 묻기에 없다고 솔직히 대답한 한마디가 다 된 죽에 떨어진 코 격이었다. 기별이 있으니 그리 알라고 돌리어온 채 이래 반년을 감감소식임이 문득 생각되며 집이란 것이 사람으로서 존재의 인정을 받는 데 그렇게도 큰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임을 새삼스럽게 느끼다가 펄럭이는 복덩방의 휘장을 본다. (P.42-43)

 

아래윗동네에서 살다가 만주로 들어가게 되어 서로 떨어졌던 고향사람끼리 우연히도 여기서 만난다. 아들와 여인의 남편도 서로 알아본다.

"아, 이게 십 년 만이구나!"

감격한 악수가 손안에 다정하다.

"아니 그른데 아즈마니 어드케 여기서 만내요? 되따에선 원제 나오섯기..."

"참, 넌 어드케 여기서 만내네?"

?우린 지금 이북서 넘어와요. 살기가 너무 어려워서 듣는 말이 이남이 도타구 그래 강원도루 가는 길이에요."

"머이! 살기가 어려워? 우린 이북으루 가는 길인데..."

"이북으루요? 아이구 갈렴 마르우. 잜하는 사람은 잘살아두 못사는 사람은 거기 가두 못살아요. 돈 있는 사람 덴답과 집들을 다 뗐음 멀 허갔소. 없던 사람들이 당사들을 해서 그만침은 또 다 잡아놨는데...우리두 그른 당살 했음 돈 잡았디요. 우리 옥순이 아버진 그른 당사엔 눈두 안 뜨구 피픽 웃기만 허디요. 그르니 살긴 어려워만가구. 좀 허문 그러케 힘든 국겅(국경)을 넘어오갔소."

"아이구 우리 아와 신통이두 같구나. 만주서 같이 나온 사람덜은 야미(암거래) 당사들을 해서 돈 몬 사람덜이 많은데 우리 아가 그른건 피익픽 웃디 밥을 굶으맨서두. 거기두 고롬 그르쿠나 거저. 살기가 같은 바에야 멀 허레 그 끔즉헌 국겅을 넘어가간."

"그러믄요. 아이, 여기두 고롬 살기가 그러케 말째우다레. 잉이? 머 광다부(광목) 한 자에 삼십 원 헌다 사십 원 헌다 허더니."

"우리 갖에 와선 그르케두 했단다. 어즈께레 옛날인데 멀 그르네. 거기 집은 어드르니 그른데. 얻긴 쉬우니?"

"쉽다니요! 발라요. 거저 집이라구 우멍헌 건 내만 노문 훌떡훌떡 허디요. 그르기 어디 빈 간이 있게 그르우? 만주서 나와 집 찾는 사람두 있디요? 제길 쬧게나서 어디 빈 간이나 있을까 허구 돌아가는 사람두 있디요? 머 촌이나 골이나 딱 같습두다. 난이에요, 난."

"여기두 그르탄다. 우린 집을 못 얻구 한디에서 살았단다. 밥이라군 밀가루떡만 먹구."

"여기도 고롬 그르케 집이 없어요! 것두 같수다레 고롬?"

"글세 네 말을 들으니케니 집 없는 것꺼지 신통두 허게 같구나 참."

"아이, 괜히 넘어왔나봐."

"우린 괜히 넘어갈라구 허구."

두 여인만이 서로 한심해하는 게 아니다. 사내들도 같은 말을 바꾸고는 난처해 마주 섰다.

앉았던 사람들이 별안간 일어서며 웅성인다. 개찰이 시작되는 모양이다.

"어머니!"

"와 그러네."

"고향 가두 시언헌 건 없을까봐요."

"글쎄 박촌짓 딸 네기(이야기) 들으니께니 그르태누나."

한심해서 서성이는 동안 승객들은 다 빠져나가고 개찰구는 닫힌다.

물 썬 바다같이 갑자기 휑해진 대합실 안엔 한기만이 쨍학 휘이 떠돈다. (P.47-49)

 

<동아일보> (1946.12.1-31)

<별을 헨다> (학문사,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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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 20세기 한국 소설 10 (개정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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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용묵(桂鎔默, 1904년 9월 8일~1961년 8월 9일)

대한민국의 소설가, 시인, 수필가, 언론 기자, 작가, 기업인.

1904년 평북 선천에서 태어난다. 유년시절에 할아버지인 계창전 밑에서 ≪천자문≫, ≪동몽선습≫, ≪소학≫, ≪대학≫, ≪논어≫, ≪맹자≫ 등의 한학을 배운다. 1914년 삼봉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한 뒤 1919년 졸업한 후 서당에서 공부를 지속한다. 1918년에는 안정옥과 결혼한다. 1921년 조부 몰래 상경해 중동학교에 입학한다. 이때 만난 김억을 통해 염상섭, 남궁벽, 김동인 등과 교유하며 문학에 뜻을 두게 된다. 하지만 조부가 신학문을 반대해 잠시 학업을 중단하고 낙향하게 된다. 1922년 4월 다시 조부 몰래 상경해서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6월에 강제로 낙향하게 된다.
17∼18세에 이미 ≪조선일보≫에 논문, 감상문, 시 등을 발표하면서 스스로를 과대평가해, 선배들을 누르고 올라서겠다는 욕심에 5년 동안 두문불출하며 문학 공부를 하게 된다. 이때 이광수가 주재한 ≪조선문단≫으로 ‘최서해, 한설야, 채만식, 임영채, 박화성’ 등이 당선되어 문단에서 대우를 받은 것에 고무된다. 그리하여 1925년 ≪조선문단≫ 제8호에 ‘자아청년(自我靑年)’이라는 필명으로 소설 <상환>을 발표하며 등단한다. 하지만 작품 평이 마음에 들지 않아, 1927년 <최 서방>을 통해 ≪조선문단≫에 재당선된다. 하지만 최서해에 의해 원고가 당선된 것을 알고 부끄러움을 느끼게 된다.
1928년 3월 일본 도쿄로 건너가 동양대학 동양학과에서 공부하고 야간에는 정칙학교에서 영어를 배운다. 1929년에는 장녀 정원이 출생한다. 1931년 집안이 파산해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한다. 1932년 차녀 도원이 출생한다. 1935년에는 정비석, 석인해, 전몽수, 김우철, 장기제, 장환, 채정근, 허윤석 등과 함께 동인지 ≪해조(海潮)≫의 발간을 협의했으나 무산되었다. 1938년 5월 조선일보 출판부에 입사했고, ≪매일신문≫에 친일 수필인 <일장기의 당당한 위풍>(1942)을 발표한다. 1943년 8월 일본 천황 불경죄로 구속되었다가 10월에 석방된다. 12월에 방송국에 다시 취직했지만, 일인과의 차별 대우로 사흘 만에 퇴직한다. 징용을 피해 출판 업무를 보다가 ≪조선 전설집≫을 편집해 수만 부를 판매한다.
시골로 낙향했다 해방 이후 상경해서, 1945년 정비석과 함께 종합지 ≪대조(大潮)≫를 창간한다. 1948년 4월에는 김억과 함께 ‘수선사(首善社)’라는 이름의 출판사를 세운다. 또한 1951년 1·4 후퇴 당시 피난을 갔던 제주도에서 월간 ≪신문화≫를 창간해 3호까지 출간한다. 1954년 서울로 환도하고, 1961년 ≪현대문학≫에 <설수집(屑穗集)>을 연재하던 중 장암으로 세상을 떠난다. 1986년 은관문화훈장을 추서받는다.
<최 서방>(1927), <인두지주>(1928), <백치 아다다>(1935), <별을 헨다>(1949) 등 40여 편에 이르는 과작의 소설을 남겼다. 그의 작품은 기본적으로 인본주의적 관점을 밑바탕에 깔고 있으며,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 등 소외된 약자들에 대한 지속적 관심과 연민이 드러난다. 대표작인 <백치 아다다>(1935)는 벙어리 여성 ‘아다다’의 삶과 죽음을 통해 물욕에 물든 사회의 불합리를 지적하면서, 불구적 조건과 물질적 탐욕으로 인해 비극적 인생을 마감해야 했던 수난당하는 여성상을 형상화하고 있는 작품이다. 인간의 순수성에 대한 따뜻한 연민을 통해 삶의 비애와 질곡을 담담하게 포착하면서, 물욕에 젖은 인간성 상실의 시대에 대한 회의와 질문을 던진 휴머니스트로 평가된다.
첫 창작집 ≪병풍에 그린 닭이≫(1943)를 일제 말기에 출간하면서 창작에 대한 욕심과 겸손을 강조하며 부끄러움과 반가움을 토로한다. 해방 후 출간하는 두 번째 단편집 ≪백치 아다다≫(1946)에서는 검열의 탄압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상태임과 동시에 38선 이북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고백한다. 세 번째 창작집 ≪별을 헨다≫(1949)에서는 해방 이후 창작된 작품들만을 모아 묶어 내면서 작품 창작의 배경을 토로한다. 수필집으로 ≪상아탑≫(1955)이 있으며, 세계 명작 소개집인 ≪여자의 생태≫(1958)를 출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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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치 아다다 - 계용묵 (글누림)

백치 아다다 - 계용묵 (범우사)

백치 아다다 - 계용묵 (애플북스)

계용묵 선집 (에세이퍼블리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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