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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
I. 한국 문학/2. 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 이문열 (아침나라)

by handaikhan 2023. 2. 5.

이문열 중단편집 4

이문열 -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1987년)

 

벌써 삼십 년ㄴ이 다 돼 가지만, 그해 봄에서 가을까지의 외롭고 힘들었던 싸움을 돌이켜 보면 언제나 그때처럼 막막하고 암담해진다. 어쩌면 그런 싸움이야말로 우리 살이(생)가 흔히 빠지게 되는 어떤 상태이고, 그래서 실은 아직도 내가 거기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받게 되는 느낌인지도 모르겠다.

자유당 정권이 아직은 그 마지막 기승을 부리고 있던 그 해 삼 월 중순, 나는 그때껏 자랑스레 다니던 서울의 명문 초등학교를 떠나 한 작은 읍의 별로 볼 것 없는 초등학교로 전학을 가게 되었다. 공무원이었다가 바람을 맞아 거기까지 날려간 아버지를 따라 가족 모두가 이사를 가게된 까닭이었는데, 그때 나는 열두 살에 갓 올라간 5학년이었다.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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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십 년이 가까워지는 오늘날까지도 그 전학 첫날을 생생하게 기억하도록 만든 것은 아무래도 엄석대와의 만남이 될 것이다.

"모두 저리 비켜!"

아이들이 나를 둘러싸고 앞서 말한 그런 실없는 것들이나 묻고 있는데, 문득 그들 등 뒤에서 그런 소리가 나지막이 들려 왔다. 잘 모르는 나에게는 담임 선생이 돌아온 것이나 아닐까 생각이 들 만큼 어른스런 변성기의 ㅁ고소리였다. 아이들이 움찔하며 물러서는데 나까지 놀라 돌아보니 가운데 맨 뒤쪽에 한 아이가 버티고 앉아 우리쪽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 같은 반이 된 지 한 시간밖에 안 됐지만 그 아이만은 나도 알아볼 수 있었다. 담임 선생님과 내가 처음 교실로 들어왔을 때 차렷, 경례를 소리친 것으로 보아 급장인 듯한 아이였다. 그러나 내가 그를 엇비슷한 육십 명 가운데 금방 구분해 낼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급장이어서라기보다는 다른 아이들보다 머리통 하나는 더 있어 뵐 만큼 큰 앉은키와 쏘는 듯한 눈빛 때문이었다.

"한병태랬지? 이리 와봐."

그가 좀 전과 똑같은, 나지막한 힘 실린 목소리로 말했다. 손끝하나 까딱하지 않았으나 나는 하마터면 일어날 뻔했다. 그만큼 그의 눈빛은 이상한 힘으로 나를 끌었다.

하지만, 나는 서울에서 닮은 아이다운 영악함으로 마음을 다잡아 먹었다. 이게 첫 싸움이다. - 문득 그런 생각이 들며 버티는 데까지 버터 볼 작정이었다. 처음부터 호락호락해 보여서는 앞으로 지내기 어려워진다느 나름의 계산도 있었찌만, 다른 아이들의 까닭 모를, 거의 절대적인 복종을 보자 야릇한 오기가 난 탓이기도 했다.

"왜 그래?"

내가 아랫도리에 힘을 주며 깐깐하게 묻자 그가 피식 웃었다.

"물어 볼 게 있어."

"물어 볼 게 있다면 네가 이리로 와."

"뭐?"

일순 그의 눈꼬리가 치켜올라가는 것 같더니 이내 별소리 다 듣는다는 듯 다시 피식 웃었다. 그런 다음 더는 입을 열지 않고 나를 가만히 보았는데, 그 눈길이 너무도 쏘는 듯해 맞받기가 몹시 어려웠다. 하지만 이미 내친 김이었따. 이것도 싸움이다 싶어 안간힘을 다해 버티고 있는 데 그 아이 곁에 앉아 있던 키 큰 아이 둘이 일어나 내게로 왔다.

"일어나 임마."

둘 다 금세 덤벼들기라도 할 듯 성난 기색이었다. 아무리 가늠해봐도 힘으로는 어느 쪽도 당해 내기 어려울 것 같은 녀석들이었다. 나는 얼결에 벌떡 일어났다. 그 중에 하나가 왁살스레 내 옷깃을 잡으며 소리쳤다.

"임마 엄석대가 오라고 하잖아? 급장이."

내가 엄석대란 이름을 들은 건 그때가 처음이었따. 그 이름은 듣는 순간 내 기억에 새겨졌는데 - 아마도 그것은 그 이름을 말하는 아이의 말투가 유별났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무언가 대단히 높고 귀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고 있다는, 그래서 당연히 존경과 복종을 바쳐야 한다는 그런 느낌을 주는 것이었다.

그게 다시 나를 까닭 모르게 움츠러들게 했지만 그래도 물러설 수는 없었다. 백여 개의 눈초리가 나를 지켜보고 있는 까닭이었다.

"너희들은 뭐야?"

"나는 체육 부장이고 잰 미화 부장이다."

"그런데 너희가 왜...."

"엄석대가, 급장이 와보라고 하잖아?"

내가 그에게 가서 대령해야 되는 유일한 이유가 그가 엄석대이고 급장이기 때문이란 걸 두 번이나 되풀이 듣게 되자 비로소 나는 심상찮은 느낌이 들었다.

그때껏 서울에서 내가 겪었던 급장들은 하나같이 힘과는 거리가 멀었다. 집안이 넉넉하거나 운동을 잘해 거기서 얻은 인기로 급장이 되는 수도 있었으나 대개는 성적순으로 급장, 부급장이 결정되었고, 그 역활도 급장이란 직책이 가지는 명예를 빼면 우리와 선생님 사이의 심부름꾼에 가까웠다. 드물게 힘까지 센 아이가 있어도 그걸로 아이들을 억누르거나 부리려고 드는 법은 거의 없었따. 다음 선거가 있을 뿐만 아니라, 아이들도 그런 걸 참아 주지 않는 까닭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 날 새로운 성질의 급장을 만나게 된 것이었다.

"급장이 부르면 다야? 급장이 부르면 언제든 달려가서 대령해야 하느냐구?"

그래도 나는 서울내기다운 강단으로 마지막 저항을 해보았다. 그때 알 수 없는 일이 벌어졌따. 그런 말이 떨어지자마자 구경하고 있던 아이들이 갑자기 큰소리로 웃어댔다. 내가 무슨 바보 같은 소리를 했다는 듯, 그때껏 나를 을러대던 두 녀석과 엄석대까지를 포함한 쉰 몇 명 모두가 홍소였다. 나는 어리둥절했따. 겨우 정신을 가다듬어 내가 한 말 어디가 그들을 웃게 만들었는지를 생각해 보고 있는데 미화 부장이라는 녀석이 웃음을 참으며 물었다.

"그럼, 급장이 부르는데 안 가? 어디 학교야? 어디서 왔어? 너희 반에는 급장도 없었어?

그런데 그 무슨 어이없는 의식의 굴절이었을까. 나는 문득 무엇인가 큰 잘못을 하고 있다는 느낌, 특히 담임 선생님이 부르시는데 뻗대고 있었던 것과 흡사한 착각이 일었다. 어쩌면 그때까지도 멈춰지지 않고 있던 아이들의 와작한 웃음에 압도된, 굴종에의 미필적 고의 섞인 착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머뭇머뭇 그에게 다가가자 엄석대는 그 동안의 웃음을 사람 좋아 뵈는 미소로 바꾸며 물었다.

"나한테 잠깐 오기가 그렇게도 힘들어?"

목소리도 전과 달리 정이 뚝뚝 묻어나는 듯했다. 나는 그 너그러움에 하마터면 감격해 펄쩍 뛰며 머리를 저을 뻔했따. 의식 밑바닥으로 가라앉기는 해도 아직은 나를 강하게 지배하고 있는 어떤 거부감이 겨우 그런 체신머리 없는 짓거리를 막아 주었다.

엄석대는 확실히 놀라운 아이였다. 그는 잠깐 동안에 내가 그에게 억지로 끌려갔다는 느낌을 깨끗이 씻어 주었을 뿐만 아니라 내가 담임 선생님에게 품었던 야속함까지도 풀어 주었다. (p.14-19)

 

"너는 저기 앉도록 해. 저게 네 자리야."

그 갑작스런 지시에 나는 약간 정신이 들었따.

"선생님이 저기 앉으라고 하셨는데...."

문득 되살아나는 서울에서의 기억으로 그렇게 대꾸했지만, 얼마 전의 투지는 되살아나지 않았다. 엄석대는 내 말을 못 들은 척 넘어갔따.

"어이, 김영수, 여기 이 한병태와 자리 바꿔."

석대가 그 자리에 앉았던 아이에게 그렇게 말하자 그 아이는 두말 없이 책가방을 챙겼다. 그 아이의 철저한 복종이 다시 묘한 힘으로 나를 몰아, 잠시 머뭇거린 것으로 저항에 갈음하고 나도 자리를 옮겼다. 하지만,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은 그 날만도 두 번이나 더 있었다. 한 번은 바로 그 점심 시간 때였다. 석대와 나의 대화가 끝난 뒤에 석대가 도시락을 책상 위로 올려놓자 아이들도 모두 도시락을 펼치기 시작했는데 그 중에 대여섯 명이 무엇인가를 들고 석대에게로 갔다. 그애들이 석대의 책상 위에 내려놓는 걸 보니 찐 고구마와 달걀, 볶은 땅콩, 사과 같은 것들이었다. 뒤이어 맨 앞줄의 아이 하나가 사기 컵에 물을 떠다 공손히 놓는 것까지 모두가 소풍 가서 담임 선생님께 하듯 했다. 그런데 석대는 고맙다는 말 한 마디 없이 그것들을 받았다. 기껏해야 달걀을 가져온 아이에게 빙긋 웃어 준 게 전부였다. 또 한 번은 다섯 번째 쉬는 시간에 내 옆 분단의 두 아이가 무슨 일인가로 싸워 한 아이가 코피가 난 때였다. 구경하던 아이들은 모든 걸 제쳐놓고 먼저 석대부터 찾았다. 마치 서울 아이들이 무슨 큰일을 만낫을 때 먼저 선생님부터 찾는 것과 비슷했고, 얼마 뒤 불려온 석대가 한 일도 선생님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코피가 난 아이는 구급함에서 꺼낸 솜으로 코를 막은 다음 고개를 뒤로 젖혀 기대 있게 했고, 코피를 나게 한 아이는 몇 대 쥐어박은 뒤 교단 위에 팔을 들고 끓어앉아 있게 했다. 두 아이 모두 신통하리만치 고분고분 석대의 말을 따랐는데, 더 이상한 건 여섯째 시간 수업을 들어온 담임 선생님이었다. 석대의 보고를 가만히 듣고 있다가 손바닥을 몇 차례 호되게 때려 줌으로써 내게는 월권이라고만 생각되는 석대의 처리를 그 어떤 말보다도 확실하고 강력하게 추인해 버리는 것이었다. (p.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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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내가 다시 그 새로운 환경과 질서에 대해 다시 곰곰히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온 뒤였다. 학교에서는 내가 갑자기 던져지게 된 그 환경의 지나친 생소함에서 온 어떤 정신적인 마비와, 또한 갑자기 나를 억눌러 오는 그 질서의 강력함이 주는 위압감이, 내 머리 속을 온통 짙은 안개 같은 것으로 채워 몽롱하게 만들어 버린 탓에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열두 살은 아직도 아이의 단순함에 지배되기 쉬운 나이지만, 그리고 아직은 생생한 낯의 기억들이 은근히 의식의 굴절과 마비를 강요하고 있었지만 나는 아무래도 그 새로운 환경과 질서에 그대로 편입될 수는 없다는 기분이 들었따. 그러기에는 그때껏 내가 길들어 온 원리 - 어른들식으로 말하면 합리와 자유 - 에 너무도 그것들이 어긋나기 때문이었다. 직접으로는 제대로 겪어 보지 못했으나, 그 새로운 질서와 환경들을 수락한 뒤의 내가 견디어야 할 불합리와 폭력은 이미 막연한 예감을 넘어, 어김없이 이루어지게 되어 있는 어떤 끔찍한 에정처럼 보였다.

하지만, 싸운다는 것도 실은 막막하기 그지없었다. 먼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가 그러했고, 누구와 싸워야 할지가 그러했고, 무엇을 놓고 어떻게 싸워야 할지가 그러했다. 뚜렷한 것은 다만 무엇인가 잘못되어 있다는 것뿐 - 다시 한번 어른들식으로 표현한다면, 불합리와 폭력에 기초한 어떤 거대한 불의가 존재한다는 확신뿐 - 거기에 대한 구체적인 이해와 대응은 그때의 내게는 아직 무리였다. 솔직히 털어놓으면 마흔이 다 된 지금에조차도 그런 일에는 온전한 자신을 갖지 못하고 있다. (p.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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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먼저 그날 내가 겪고 본 엄석대의 짓거리를 얘기한 뒤 앞으로 내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아버지에게 물으려 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겨우 엄석대가 그 날 한 일들을 모두 얘기한 내가 막 충고를 바라는 물음을 던지려는데 아버지가 불쑥 감탄 섞어 말했다.

"거, 참 대단한 아이로구나. 엄석대라고 그랬지?" 벌써 그만하다면 나중에 인물이 돼도 큰 인물이 되겠다."

도무지 불의 존재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것 같은 소리였다. 후끈 단 나는 합리적으로 선거되고 우리의 자유를 제한한 적이 없던 서울의 급장 제도를 얘기했던 것 같다. 그러나 아버지에게는 그 합리와 자유에 대한 내 애착이 나약의 표지로만 이해되는 것 같았다.

"약해 빠진 놈. 너는 왜 언제나 개를 뺀 나머지 아이들 가운데만 있으려고 해? 어째서 너 자신은 급장이 될 수 없다고 믿어? 만약 네가 급장이 되었다고 생각해 봐. 그보다 더 멋진 급장 노릇이 어디 있겠어?"

그리고는 반 아이들이 빠져 있는 불행한 상태니 그런 상태를 만들어 낸 제도의 그릇된 운용에 화낼 것 없이 엄석대가 차지하고 있는 급장 자리를 노려 보도록 권하는 것이었다. (p.23-24)

 

비록 내 굴복으로 끝나기는 했으나 전학 첫날의 그 작은 충돌은 엄석대에게 꽤 강한 인상과 더불어 어떤 경계심을 일으켰음에 틀림없었다. 그는 첫날의 승리가 못 미더웠던지 다음날 한 번 더 그걸 확인하려 들었다. 역시 점심 시간의 일이었다.

내가 바쁘게 도시락 뚜껑을 여는데 앞줄에 앉은 아이가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오늘은 네가 물당번이야. 엄석대가 먹을 물 떠다 주고 와서 밥 먹어."

"뭐야?"

나는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그애는 찔끔하며 석대 쪽을 보더니 빈정거리듯 내 말을 받았다.

"너 귀먹었어? 급장이 목 메지 않도록 물 한 컵 갖다 주란 말이야. 오늘은 네가 당번이니깐."

"그 당번 누가 정했어? 어째서 우리가 급장에게 물을 떠다 바쳐야 하느냔 말이야? 급장이 뭐 선생님이야? 급장은 손도 발도 없어?"

나는 더욱 격해 소리치듯 그렇게 따졌다. 그도 그럴 것이 서울에서라면 그 따위 심부름은 참을 수 없는 모욕에 속했다. 욕설을 퍼붓지 않는 것만도 내 딴에는 많이 참은 셈이었다. 그런데 내 서슬에 그 아이가 다시 추춤할 때였다. 문득 등 뒤에서 귀에 익은 엄석대의 목소리가 나를 위압하듯 들려 왔다.

"어이, 한병태. 잔소리 말고 물 한 컵 떠 와."

"싫어, 난 못해!"

나는 그 또한 매몰차게 거절했다. 이미 약이 오를 대로 오른 내 눈에는 엄석대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엄석대는 거칠게 도시락 뚜껑을 닫고는 험한 얼굴로 내게 다가왔다.

"요새끼, 요거 쬐끄만 게 안 되겠어."

석대는 눈을 부라리며 그렇게 얼러 대더니 주먹까지 울러메며 소리쳤다.

"어서 일어나! 가서 물 떠오지 못해!"

그는 힘으로라도 나를 굴복시키려고 마음을 굳힌 듯했다. 금세라도 큰 주먹을 내지를 것 같은 그 무서운 기세에 그제야 덜컥 겁이 난 나는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아무래도 그 심부름만은 할 수 없어 잠깐 멈칫거리고 있는데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좋아. 그럼 먼저 선생님께 물어 보고 떠주지. 급장이면 한반 아이라도 물을 떠다 바쳐야 하는지 말이야."

나는 그렇게 말하고 성큼성큼 걸었다. 그가 담임 선생님에게 잘 보이려고 애쓰는 눈치를 알아차리고 걸어 본 승부였다. 내 스스로도 놀랄 만한 효과가 있었다.

"서."

내가 몇 발짝 떼놓기도 전에 석대가 빽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이어 으러렁거리듯 덧붙였다.

"알았어. 그만둬. 너 같은 새끼 물 안 먹어도 돼."

얼핏 보면 나의 한바탕 멋진 승리였다. 하지만, 실은 그것이야말로 그 뒤 반 년이나 이어갈 내 외롭고 고달픈 싸움의 시작이었다.

사실 그 전 일 년을 거의 아무에게도 저항받지 않고 그 반을 지배해 온 석대에게는 그런 내가 얄밉고도 분했을 것이다. 그날의 내 행동은 단순한 저항을 넘어 중대한 도전으로 보이기조차 했을 것이다. 더군다나 그는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나를 혼내 줄 힘도 이쪽 저쪽으로 넉넉했다. 급장으로서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위임받은 합법적인 권한과 전 학년을 통틀어 가장 센 주먹이 그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성급하게 주먹을 휘두르기는커녕 직접적으로 적의조차 드러내지 않았다. (p.25-27)

 

나는 진작부터 아이들의 박해와 석대의 구원 사이를 연결하고 있는 보이지 않는 끈을 직감적으로 느끼고 있었으며, 결국은 그것이 나를 그의 질서 안으로 편입시키기 위한 음흉한 술책임도 차갑게 뚷어보고 있었다. 따라서 그가 베푸는 구원이나 해결도 언제나 고마움으로 나를 감격시키기보다는 야릇한 치욕감으로 떨게 했다. 그때마다 내 마음 속에서는 한층 더 치열하게 적의가 타올랐으며 - 그리하여 그것은 그 뒤의 길고 힘든 싸움을 내가 견뎌 낼 수 있게 해준 힘이 되었다. (p.29)

 

아무리 아이들의 정신 속이라고 해도, 어른들의 정의와 자유에 대한 열망에 순응하는 부분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내 개인적인 감정과 조급으로 그들을 대의로 깨우치거나 설득하는 대신 눈앞의 이익으로 매수하려고 들었을 뿐이다. 거기다가 기껏 더할 게 있다면 어른들의 선동에 해당되는 저급하면서도 교활한 정치 기술 정도였다. (p.30)

(같이 읽으면 좋은 책)

역사를 바꾼 모략의 천재들 - 차이위치우 (김영수 옮김, 들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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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의 힘 중에서 싸움 솜씨에 못지 않게 많은 부분이 담임 선생의 신임에서 왔다는 걸 알고 있었다. 청소 검사, 숙제 검사, 심지어는 처벌권까지 석대에게 위임하는 담임 선생의 그 눈 먼 신임이 그의 폭력에 합법성을 부여해 그를 그토록 강력하게 우리 위에 군림하게 했다. (p.32)

 

그가 주먹으로 전학년을 휘어잡아 적어도 우리 반 아이가 다른 반 아이에게 얻어맞는 일은 없게 된 것도 담임 선생으로서는 그리 불쾌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모반의 열정과도 비슷한, 가망이 없읈후록 더 치열해지는 비뚤어진 집착으로 그 힘든 싸움을 계속해 나갔다. 눈과 귀를 온통 석대에게만 모아 그의 잘못을 캐내는 일이었다.

지금도 잘 알 수 없는 것은 그런 내게 대한 석대의 반응이었다. 그때는 그럭저럭 전학간 지 석 달에 가까웠고, 그 동안 이런저런 내 바둥거림도 아이들을 통해 그의 귀에 들어갔을 법하건만 그는 조금도 처음과 달라지지 않았다. 그때껏 버티고 있는 나를 미워하는 기색을 보이기는커녕 초조해하는 눈치조차 없었다. 실로 두어 살의 나이 차이만으로는 설명이 안되는, 비상하다고밖에 할 수 없는 참을성이었다. 앞서 말한 그 모반의 열정 같은 것이 아니었다면 나는 아마도 그쯤서 그에게 무릎을 꿇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가다리고 기다린 보람이 있어 끝내는 내게도 때가 왔다. (p.33-34)

 

다음날 아침 나는 학교에 가기 바쁘게 교무실로 담임 선생을 찾아갔다. 그리고 별로 비겁한 짓을 하고 있다는 느낌 없이 윤병조의 일을 일러바침과 아울러 그 동안 내가 보고 들은 그 비슷한 사례들을 모조리 얘기했다. 서울서 온 아이의 똑똑함을 여지없이 보여 준 셈이었지만 담임 선생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무슨 소리야? 너 분명히 알고 하는 말이야?"

그렇게 묻는 담임 선생의 표정에서 내가 먼저 읽을 수 있었던 것은 귀찮음이었다. 나는 그게 안타까워 그때까지는 짐작일 뿐인 석대의 다른 잘못들까지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러나 담임 선생은 귀담아 들을려고도 않고 짜증난 목소리로 나를 쫓아냈다.

"알았어. 돌아가. 내 이따가 알아보지."

나는 그런 담임 선생의 반응이 못 미덥긴 했지만, 어쨌든 조사해 보겠다는 말에 한가닥 기대를 가지고 수업 시작을 기다렸다. (p.39)

 

"짐작은.....간다. 모든 게 - 맘에 차지 않겠지. 서울식과는...많이 다를 거야. 특히 엄석대가 급장으로서 하는 일은 어떻게 보면 못돼먹고 - 거칠기도 하겠지. 하지만 그게 바로....이 곳의 방식이다. 자치회가 있고, 모든 게 토론과 투표에 의해 결정되고 - 급장은 다만 심부름꾼인 그런 학교도 있다는 건 나도 안다. 아니 서울 아이들같이 모두가 똘똘 하면...오히려 학급은 그렇게 운영되는 게 마땅하겠지. 그러나 거기서 좋았다고...그게 어디든 그대로 되는 건 아니다. 이 곳은 이 곳의 방식이 있고...너는 먼저 거기 적응할 필요가 있어. 서울에서의 방식이 무조건 옳고 이 곳은 무조건 틀렸다는 식의 생각은 버려야 해. 굳이 그게 옳다고 고집하고 싶다면...너의 태도라도 바꿔. 네 편이 되어 주지 않는다고 반 아이들 모두와 싸우려 하거나 - 외토리로 빙빙 겉돌아서는 안 돼. 봤지? 오늘....육십 명 중 네 편은 단 하나도 없었어. 네가 꼭 석대를 급장 자리에서 쫓아내고...우리 반을 서울에서 네가 있던 반처럼 만들고 싶었다면....먼저 그 아이들을 네 편으로 만들었어야지. 석대가 이미 그 아이들을 휘어잡고 있어서 어찌해 볼 수가 없었다고 말할지도 모르겠지만 - 그래도 너는 내게 달려오기 전에 아이들부터 먼저 네 편으로 돌려놨어야 했어. 그게 안되니까 내게 왔다고 할지 모르지만...그리고...아이들이ㅣ 어리석으니까 선생인 내가 고쳐 놓아야 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건 틀렸어. 설령 네가 옳더라도...나는 반 아이들 모두의 지지를 받고 있는 석대를 지지할 수 밖에 없다. 네가 반드시 믿고 있을 것처럼...아이들의 그 지지란 것이 실상은 석대의 위협이나 속임수에 넘어간 거짓된 것일지라도...마찬가지야. 나는 어쨌든...아이들을 그렇게 만든 석대의 힘을...존중하지 않을 수 없어. 지금껏 흐트러짐 없이 잘돼 나가던 우리 반을....막연한 기대만으로 흩어 버릴 수 없기 때문이지. 거기다가...어쨌거나 석대는 전 학년에서 가장 공부 잘하고....통솔력 있는....모범적인 급장이다. 무턱대고 비뚤어진 눈으로만 보지 말고...그의 장점도 - 인정할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무엇보다도 그 아이들 속으로 들어가...그들과 함께 새로...시작해 보아라. 석대와 경쟁하고 싶다면...정당하게 경쟁해라, 알겠니..." (p.51-52)

 

만약 싸움이란 게 공격 정신이나 적극적인 방어 개념으로만 되어 있다면 석대와의 싸움은 그 날로 긑이었다. 그러나 불복종이나 비타협도 싸움의 한 형태로 볼 수 있으면 내 외롭고 고단한 싸움은 그 뒤로도 두어 달은 더 이어진다. 어른들 식으로 표현한다면, 어리석은 다수 혹은 비겁한 다수에 의해 짓밟힌 내 진실이 무슨 모진 한처럼 나를 버텨 나가게 해준 것이었다.

이미 내 수단이 다하고 궁리가 막힌 게 다 드러난 셈이건만 신중한 석대는 그 날 이후도 직접으로는 나와의 싸움에 나서지 않았다. 그러나 그 공격은 전보다 몇 갑절이나 더 집요하고 엄중했고, 따라서 내게는 그때부터 전보다 몇갑절이나 더 괴롭고 고단한 학교 생활이 시작되었다. (p.53)

(같이 읽으면 좋은 책)

시민불복종 - 헨리 데이비드 소로 (강승영 옮김, 은행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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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주먹 싸움의 등수가 터무니없이 뒤로 밀리거나 아이들로부터 소외되는 것에 못잖게 괴로운 것은 합법적이고 공공연한 박해였다. 앞서 내비친 적이 있듯, 어른들의 세계에서와 마찬가지로 아이들의 세계에서도 지켜야 할 규칙들은 있기 마련이고, 또한 어른들이 그 누구도 그런 걸 다 지키며 살아가지는 못하듯 아이들 역시 그 모든 걸 다 지켜 내기는 어렵다.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없다는 말처럼, 엄격히 보면 아이들도 어른들의 범법이나 부도덕에 견줄 만한 자질구레한 비행들을 수없이 저지르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학칙, 교장 선생님의 훈시, 주훈, 담임 선생님의 말씀과 자치회의 결정 같은 걸 지키지 않거나 부모님과 웃어른의 당부, 일반 윤리 및 사회가 통념으로 어린이에게 요구하는 행동 양식을 어기는 것인데, 나는 바로 그러한 규범들의 가장 엄격한 적용을 받았다. 조금만 손톱이 길어도, 며칠만 이발이 늦어져도 나는 어김없이 위생 불량자의 명단에 올랐고, 옷 솔기가 터지거나 단추 하나만 떨어져도 복장 위반자로 벌을 받아야 했다. 재수 없게 주번 선생님에게만 걸리지 않으면 되는 등하교길의 군것질도 내게는 모두가 범죄를 구성했으며, 동네 만화가게의 골방에 숨어서 읽는 만화도 담임 선생의 귀에 들어가 어김없이 꾸중을 듣게 되었다. 요컨대 딴 아이들이 다 하는, 그리고 어쩌다 재수 없이 걸려도 가벼운 꾸중으로 끝날 뿐인, 그런 자질구레한 잘못들도 내가 하면 엄청난 비행으로 여럿 앞에 까발려져 성토당하고, 자치회의 기록에 올려지고, 담임 선생의 매질이 되거나 변소 청소 같은 벌로 끝을 보았다. (p.56-57)

 

성의 없고 무정한 담임 선생의 위임으로 대개의 경우 그 같은 규칙 위반의 감찰권과 처벌권을 아울러 가지고 있는 석대는 아이들의 고발이 있을 때마다 겉으로는 공정하게 그 권한을 행사했다. (....)

어디까지나 짐작이기는 하지만, 석대는 그 밖에도 자신이 가진 합법적인 권한을 악용해 적극적으로 나를 불리하게 만들기도 했다. 다른 아이들에게는 그 전날 가만히 알려 주어 나만 갑자기 당하는 꼴이 되는 위생 검사나, 학교 오는 길에 말수레를 따라 걷다가 쇠고리에 걸려 옷이 찢긴 때와 같은 날만 골라 느닷없이 복장 검사를 하는 따위가 그 예였다. 그 바람에 나는 마침내 우리 반에서뿐만 아니라 학년 전체에 다 알려질 만큼 말썽 많은 불량스런 아이가 되어 버렸다. (p.58)

 

물론 그렇다고 내가 가만히 앉아 당하고 있었던 것만은 아니었다. 나름대로 있는 힘과 꾀를 다 짜내 그런 상태를 개선해 보려고 애썼다. 그 가운데 하나가 부모님을 동원하는 것이었다. 담임 선생에 대한 기대를 온전히 거둔 뒤 나는 먼저 아버지에게 내가 빠져 있는 외롭고 힘든 싸움을 ㅌㄹ어놓고 도움을 구했다. 그러나 무력감으로 전 같지 않게 비뚤어져 있던 아버지는 무정하고 성의 없는 담임 선생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못난 자식. 누구 일을 누구더러 해달라는 거야? 힘이 모자라면 돌도 있고 막대기도 있잖아? 그보다 공부부터 이겨 놓고 봐. 그래도 아이들이 안 따르나...."

내가 감정을 앞세워 상황을 잘 설명하지 못한 것도 있고, 아버지가 내 일을 아이들 세계에 흔히 있는 사소한 다툼쯤으로 쉽게 여기신 탓도 있겠지만, 나는 아버지의 그 같은 역정에 더 어떻게 말해 볼 기력을 잃고 말았다. (p.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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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백년 명문가의 자녀교육 - 최효찬 (예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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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싸움도 끝날 날이 왔다. 그렇게 한 학기를 채우자 나는 차츰 지쳐 가기 시작했다. 처음의 그 맹렬하던 투지는 간 곳 없어지고, 무슨 한처럼 나를 지탱시켜주던 미움도 차차 무디어져 갔다. 그리하여 새 학기가 시작되면서 나는 은근히 내 굴복을 표시하기에 마땅한 기회를 기다렸지만 괴로운 것은 그런 기회조차 쉬이 나타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그때껏 힘들여 싸웠으나, 한 번도 석대와 직접으로 맞부딪쳐 본 적은 없었다. 언제나 나를 괴롭힌 것은 그 아닌 다른 아이 또는 그 동아리였고, 아니면 이런저런 규칙이거나 반장이란 직책이 지닌 합법적인 권한이었다. 개별적으로 석대는 내게 말을 걸기는커녕 오래 마주보는 일조차 없었던 것이다. (p.60-61)

 

나는 그때 아마도 스스로의 무력함이 슬퍼서 울었고, 그 외로움이 슬퍼서 울었을 것이다.

"어이, 한병태."

그 갑작스런 눈물은 걷잡을 수 없이 흐느낌으로 변해 내가 창틀을 붙잡고 울고 있을 때 가까운 곳에서 그런 소리가 들렸다. 눈물을 싯고 그 쪽을 보니 아이들을 저만치 떼어놓고 석대 혼자 창틀 아래로 와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전에 없이 너그럽고 - 신비스러워 뵈기까지 하는 얼굴이었다.

"이제 돌아가도 좋아. 유리창 청소 합격." (p.66)

 

너무도 허망하게 끝난 싸움이고 또한 그만큼 어이없이 시작된 굴종이었지만, 그 굴종의 열매는 달았다. 오래고 끈질긴 반항 끝에 이루어진 굴종의 열매라 특히 더 달았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내가 그의 질서 안으로 편입된 게 확인되면서 석대의 은혜는 폭포처럼 쏟아졌다. (p.67)

 

따지고 보면 그 모든 것은 기실 석대가 내게서 빼앗아갔던 것들이었다. 냉정히 말하면 나는 내 것을 되찾은 것뿐이고, 한껏 석대를 보아준댔자 꼭 필요하지는 않은 곳에 약간의 이자를 보태 준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한 번 굴절을 겪은 내 의식에는 모든 것이 하나같이 석대의 크나큰 은총으로만 느껴졌다.

거기 비해 석대가 대가로 요구하는 것은 생각 밖으로 적었다. 다른 아이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던 듯도 싶지만, 그는 내게서 무엇을 빼앗기는커녕 달라는 법조차 없었다. (...)

또, 석대가 내게 무슨 의무를 지우거나 무엇을 강제하지 않았다. (p.68-39)

 

그가 내게 바라는 것은 오직 내가 그의 질서에 순응하는 것, 그리하여 그가 구축해 둔 왕국을 허물려 들지 않는 것뿐이었다. 실은 그거야말로 굴종이며, 그의 질서와 왕국이 정의롭지 못하다는 전제와 결합되면 그 굴종은 곧 내가 치른 대가 중에서 가장 값비싼 대가가 될 수도 있으나 이미 자유와 합리의 기억을 포기한 내게는 조금도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 (p.69-70)

 

저 화려한 역사책의 갈피에서와는 달리 우리 반의 혁명은 갑작스럽고 약간은 엉뚱한 방향에서 왔다. 그 이듬 해 담임 선생이 갈린 지 채 한 달도 안 돼 그렇게도 굳건해 보였던 석대의 왕국은 겨우 한나절로 산산조각이 나고 그 철권의 지배자는 한낱 범죄자로 전락해 우리들의 세계에서 사라져 간 것이었다. 그렇지만 내게는 그 혁명의 발단이나 결과를 얘기하기 전에 먼저 고백해 둘 일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석대의 왕국을 뿌리째 뒤흔든 계기가 된 그의 엄청난 비밀을 내가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p.69-70)

 

하지만, 그때 이미 나는 갑작스럽고도 세찬 유혹에 휘말려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 유혹이란 방금 알아낸 이 엄청난 비밀로, 어느 누구도 용서할 이 없는 무서운 비행의 이 움직일 수 없는 증거로, 이미 끝난 석대와의 싸움을 뒤집어 보자는 것이었다. 담임 선생이 아무리 무정하고 성의 없다 해도 석대의 그 같은 비행까지는 묵인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리하여 석대를 잡기만 한다면 지금껏 그를 두둔해 온 담임 선생에게 멋진 앙갚음이 될 뿐만 아니라, 나를 믿지 않고, 윽박지르기만 한 아버지, 어머니에게도 멋진 앙갚음이 될 것이었다. 억뉼려 참고는 있어도 실은 괴로워하고 있음에 틀림없는 아이들에게 나는 새로운 영웅으로 떠오를 것이고, ㅆ흐라림으로 포기해야 했던 자유와 합리의 지배가 되살아날 것에 대해서도 나는 분명 가슴 두근거렸다. (p.74)

 

그때는 이미 두 달 가까이나 맛들인 굴종의 단 열매나 영악스런 타산도 나를 말렸다. 사실 이런저런 어른들 식의 정신적인 허영을 빼면 석대의 질서 아래 있다고 해서 내게 불리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미 말했듯, 나의 끈질기고 오랜 저항은 오히려 훈장이 되어 내게 여러 가지 특권으로 되돌아온 까닭이었다. 어떤 면에서 나는 어린이 자치회와 다수결의 지배를 받았던 서울에서보다 더 많은 자유를 누렸고 반 아이들에 대한 영향력에 있어서도 서울에서의 내 위치였던 분단장급보다 크면 컸지 적지는 않았다. (p.75-76)

 

여하튼 나는 석대가 맛보인 그 특이한 단맛에 흠뻑 취했다. 실제로 그날 어둑해서 집으로 돌아가는 내 머릿속에는 그의 엄청난 비밀을 담임 선생에게 일러바쳐 무얼 어째 보겠다는 생각 따위는 깨끗이 씻겨지고 없었다. 나는 그의 질서와 왕국이 영원히 지속되기를 믿었고 바랐다. 그런데 그로부터 채 넉 달도 되기 전에 그 믿음과 바람은 모두 허망하게 무너져 버리고 몰락한 석대는 우리들의 세계에서 사라지게 되고 마는 것이었다. (p.79-80)

 

담임 선생님이 석대의 편이 아니라는 것, 전번 담임 선생처럼 석대를 턱없이 믿기는커녕 오히려 무언가를 의심하고 있다는 것이 점점 명백해지자, 그 전해 내가 그렇게 움직여 보려고 해도 꿈쩍않던 아이들이 절로 꿈틀대기 시작했다. 감히 정면으로 도전하지 못해도 조그마한 반항들이 심심찮게 일었고, 무슨 일이 일어나도 석대보다는 담임 선생님을 먼저 찾는 아이들이 하나 둘 늘ㄹ어갔다.

거듭거듭 말하자면 석대는 참으로 무서운 아이였다. 우리보다 나이가 많다 해도 기껏 열대여섯의 소년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는 참아야 할 때와 물러서야 하는 것을 아는듯했다. (p.82)

 

석대도 매를 맞는다. 저토록 비참하고 무력하게 - 그것은 나뿐만 아니라 우리 반 아이들 모두에게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 담임 선생님의 손에 들린 매는 반 토막으로 줄어 있었으나 매질은 멈춰지지 않았다. 아픔을 못이겨 몸을 비틀면서도 어지간히 견디던 석대도 마침내는 교실 바닥에 엎어지며 괴로운 신음을 뺕어냈다.

담임 선생은 그때를 기다리고 있었던 듯했다. 쓰러진 석대를 버려 두고 교탁으로 가더니 석대의 시험지를 찾아 다시 엎드려 뻗쳐를 하고 있는 석대 곁으로 갔다.

"엄석대, 여기를 잘 봐. 여기 이름 쓴 데 지우개 자국이 보이지?"

그제서야 나는 담임 선생님이 드디어 석대의 비밀을 눈치챘음을 알았다. 그러자 문득 석대를 향한 동정이나 근심보다는 일의 결말이 더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석대가 그전 라이터 사건 때처럼 자신의 잘못을 부인하고 아이들도 그때처럼 입을 모아 그를 뒷받침해 준다면 어떻게 될까 하는 것이었다.

"잘 못....했습니다."

한참 뒤에 들리는 석대의 대답은 실망스럽게도 그랬다. 아무래도 그는 열대여섯 살의 소년에 지나지 않았고, 또 굴복하기 쉬운 육체를 지닌 인간이었다. 어쩌면 담임 선생님의 그 모진 매질은 다른 번거로운 절차 없이 그에게 바로 그 말을 끌어내기 위함이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석대의 그 같은 말이 들리자 아이들 사이에는 다시 한 차례 눈에 보이지 않는 동요가 있었다. 석대도 항복을 한다 - 결코 있을 것 같지 않던 그런 일이 눈앞에서 벌어진데서 온 충격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도 그랬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찔했을 정도였다.

그 담임 선생님이 받은 유능하다는 평판은 두뇌가 조직적이고 치밀하다는 뜻이나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바라던 굴복을 받아 내자 담임 선생님은 석대에게 거의 생각할 틈을 주지 않고 다음 단계로 들어갔다.

"좋아, 그럼 교탁 위로 올라가 꿇어앉고 손 들어."

담임 선생님은 금세라도 모진 매를 다시 시작할 듯 석대에게로 다가가며 그렇게 명령했다. 뒷일로 미뤄보면 그때 아마 석대는 기습과도 같은 매질에 잠시 얼이 빠졌던 듯싶다. 채찍에 몰린 맹수처럼 어기적거리며 교탁 위로 올라가 두 손을 들고 꿇어앉았다.

그런 석대를 보며 나는 또 한번 이상한 경험을 했다. 그 전의 석대는 키나 몸집이 담임 선생님과 비슷하게 보였고, 따로 떼어 놓고 생각하면 오히려 석대 쪽이 더 큰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런데 그날 교탁 위로 꿇어앉은 석대는 갑자기 자그마해져 있었다. 어제까지의 크고 건장했던 우리 반 급장은 간 곳 없고 우리 또래의 평범한 소년 하나가 볼품없이 벌을 받고 있을 뿐이었다. 거기 비해 담임 선생님은 키와 몸집이 갑자기 갑절은 늘어난 듯했다. 그리하여 무슨 전능한 거인처럼 우리를 내려보고 서 있는 것이었다. (p.83-85)

 

그런데 담임 선생님의 그 같은 물음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그때것 초점을 잃고 반쯤 감겨져 있던 석대의 눈이 번쩍 치켜떠지며 갑자기 무서운 빛을 뿜었다. 들고 있는 팔의 무게로 처져 있던 그의 어깨도 어느 새 꿋꿋하게 세워져 있었다. 그걸 본 아이들이 움찍했다. 그러나 대세는 이미 기울어진 뒤였다. 아이들은 이미 석대가 약한 걸 보았고 따라서 서슴없이 강한 담임 선생님을 택했다. (p.86)

 

"모두 교단을 짚고 엎드려 뻗쳐!"

그리고는 한 사람 앞에 열 대씩을 매질해 나가기 시작했다. 맞는 동안에 두어 번씩 몸이 교실 바닥으로 내려앉을 만큼 모진 매질이었다.

매질이 끝나자 교실 안은 한동안 그들의 훌쩍거림으로 시끄러웠다.

"모두 일어나!"

이윽고 훌쩍거림이 잦아들자 담임 선생님은 그들 여섯을 일으켜 세우고 간신히 성을 가라앉힌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되도록이면 너희들에게 손을 안 대려고 했다. 석대의 강압에 못 이겨 시험지를 바꿔 준 것 자체는 용서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동안 너희들의 느낌이 어떠했는가를 듣게 되자 그냥 참을 수가 없었다. 너희들은 당연한 너희들의 몫을 빼앗기고도 분한 줄 몰랐고, 불의한 힘 앞에 굴복하고도 부끄러운 줄 몰랐다. 그것도 한 학급의 우등생인 너희들이...만약 너희들이 계속해 그런 정신으로 살아간다면 앞으로 맛보게 될 아픔은 오늘 내게 맞은 것과는 견줄 수 없을 만큼 클 것이다. 그런 너희들이 어른이 되어 만들 세상은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모두 교단 위에 손들고 꿇어 앉아 다시 한번 스스로를 반성하도록."

아마도 그때 담임 선생님은 우리에게 지나치게 어려운 걸 가르치려고 들었던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우리 중 누구도 그 자리에서는 그 말의 참뜻을 알아듣지 못했고, 더러는 삼십 년이 지난 지금에조차 그 말을 다 이해한 것 같지는 않다. (p.87-88)

 

"지금껏 선생님이 알아챈 것은 석대와 저 아이들이 시험을 바꾸어 공정한 채점을 방해한 것뿐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아직 넉넉하지 못하다. 우리 반을 새롭게 만들어 나가기 위해서는 먼저 그릇된 지난날부터 정리돼야 한다. 내 짐작으로는 그 밖에도 석대가 한 나쁜 짓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이제 1번부터 차례로 자신이 알고 있는 석대의 잘못이나 석대에게 당한 괴로운 일들을 있는 대로 모두 얘기해 주기 바란다."

이번에도 시작은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그러나 다시 눈을 흡뜨고 쏘아보는 석대의 눈길에 흠칫해진 아이들이 머뭇거리자 그 목소리에는 이내 날이 섰다.

"5학년 때 담임 선생님께 작년에 있었던 얘기 들었다. 그분의 말씀으로는 그때 아무도 석대의 잘못을 써내 주지 않아 이 학급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줄 알고 계속해 석대를 믿게 되었다고 하셨다. 오늘 나도 마찬가지다. 너희들이 석대의 딴 잘못들을 알려 주지 않는다면 이제 시험지 바군 일의 벌은 끝났으니 나머지는 지금까지 지내온 대로 다시 석대에게 맡길 수밖에 없다. 그래도 좋겠냐? 1번 우선 너부터 말해 봐."

그 말은 금세 효과를 냈다. 실은 아이들도 내가 늘 얕봤던 것처럼 맹탕은 아니었다. 다만 서로 힘을 합칠 줄 몰랐을 뿐, 마음 속에서 불태우던 분노와 굴욕감은 한참 석대와 맞서고 있을 때의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음에 분명했다. 변혁에 대한 열렬한 기대도, 그리하여 이제 문턱까지 이른 변혁이 다시 뒷걸음질치려 하자 용기를 짜서 거기 매달렸다. (p.89-90)

 

그런데 한 가지 묘한 것은 그런 것을 고발하는 아이들의 태도였다. 처음에는 마지못해 선생님만 쳐다보고 머뭇머뭇 밝히다가 한 번호 한 번호 뒤로 물릴수록 차츰 목소리가 커지면서 눈을 번쩍이며 쏘아보는 석대를 향해 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중에는 '임마', '새끼' 같은 전에는 감히 입끝에 올려 보지도 못한 엄청난 욕들을 섞어 선생님께 고발한다기보다는 석대에게 바로 퍼대는 것이었다.

이윽고 39번 내 차례가 왔다.

"저는 잘 모릅니다."

내가 선생님을 쳐다보고 그렇게 말하자 일순 교실 안은 조용해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담임 선생님보다 먼저 아이들이 와 하고 내게 덤벼들었다.

"너 정말 몰라?"

"저새끼, 순 석대 꼬붕이..."

"넌 임마, 쓸개도 없어?"

아이들은 담임 선생님만 없으면 그대로 내게 덮칠 듯한 기세로 퍼부어 댔다. 나는 그들이 뿜어 대는 살기와도 같은 흉맹한 기운에 섬뜩했으나 그대로 버텼다.

"정말로 모릅니다. 전학온 지 얼마 안 돼서..."

내가 그들 쪽은 보지도 않고 선생님만 바라보며 그렇게 되뇌이자 아이들은 한층 험한 기세로 나를 몰아세웠다. 그때 알 수 없느 ㄴ눈길로 나를 가만히 살피던 선생님이 그런 아이들을 진정시켰다.

"알겠어. 다음, 40번."

내가 석대의 비행에 대해 잘 모른다고 한 것은 오직 진심과 오기가 반반 섞인 것이었다. 내가 마지막 서너 달을 석대와 유난히 가깝게 지낸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때도 그는 어찌된 셈인지 자신의 치부만은 애써 감추었다. 첫 한 한기그에게서 받은 피해도 모두 간접적인 것이어서 내게는 증거가 없었으며 - 또 대강은 이미 딴 아이들의 입으로 들추어진 터였다. 거기다가 5학년 한 해 학급에서의 내 위치 자체가 구석구석 숨겨진 석대의 비행을 알아내기에는 묘하게 불리했다. 그 한 해의 절반은 내가 석대의 유일한 적대자였기 때문에, 그리고 다른 절반은 내가 그의 한 팔처럼 되었기 때문에 속을 터놓고 지낼 친구들을 얻을 수가 없었고, 그래서 어딩네가 불의가 존재한다는 막연한 느낌뿐, 교실 구석에서 은밀하게 벌어지는 일들을 잘 알수가 없었던 것이다.

오기는 그날 내 앞까지의 아이들이 석대를 고발하는 태도 때문에 생긴 것이었다. 석대의 나쁜 짓을 까발리고 들춰내는 데 가장 열성적이고 공격적인 아이들은 대개 두 부류였다. 하나는 간절히 석대의 총애를 받기 원했으나 이런 저런 까닭으로 끝내는 실패한 부류였고, 다른 하나는 그날 아침까지도 석대 곁에 붙어 그 숱한 나쁜 짓에 그의 손발 노릇을 하던 부류였다. 한 인간이 회개하는 데 꼭 긴 세월이 필요한 것은 아니며, 백정도 칼을 버리면 부처가 될 수 있다고도 하지만, 나는 아무래도 갑작스레 개종자나 극적인 전향 인사는 믿지 못하고 있다. 특히 그들이 남 앞에 나서서 설쳐 대면 설쳐 댈수록, 내가 굳이 석대를 고발하려 들면 거리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날 끝내 입을 다문 것은 아마도 그런 아이들에 대한 반발로 오기가 생긴 때문이었다. 내 눈에는 그 애들이 석대가 쓰러진 걸 보고서야 덤벼들어 등을 밟아 대는 교활하고도 비열한 변절자로밖에 비춰지지 않았다. (p.90-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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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불행은 당연하지 않습니다 - 김누리 (해냄)

우리에겐 절망할 권리가 없다 - 김누리 (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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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다. 너희들이 용기를 되찾은 걸 선생님은 다행으로 생각한다. 이제 앞으로의 일은 너희 손에 맡겨도 될 것 같아 마음 든든하다. 그렇지만 너희들도 값은 치러야 한다. 첫째로 너희들의 지난 비겁의 값이고, 둘째로는 앞으로의 삶에 주는 교훈의 값이다. 한번 잃은 것은 결코 찾기가 쉽지 않다. 이 기회에 너희들이 그걸 배워 두지 않으면 앞으로도 또 이런 일이 벌어져도 너희들은 나 같은 선생님만 기다리고 있게 될 것이다. 괴롭고 힘들더라도 스스로 일어나 되찾지 못하고 언제나 남이 찾아 주기만을 기다리게 된다." (p.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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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를 보다 (리베르스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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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제 선생님이 너희들을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은 다 끝났다. 너희들끼리 의논해서 다른 그 어떤 반보다 훌륭한 반을 만들어 봐라. 너희들은 이미 회의 진행 방법도 배웠고 의사를 결정지슨 과정과 투표에 대해서도 알 것이다. 지금부터 나는 그냥 곁에 앉아 지켜보기만 하겠다." (p.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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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혁명과 민주주의 - 박세영 (북멘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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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명이 좀 늦은 듯한 감이 있지만, 어떻게 보면 아무래도 혁명적이 못되는 석대의 몰락을 내가 굳이 혁명이라고 표현한 것은 실로 그 때문이었다. 비록 구체제에 해당되는 석대의 질서를 무너뜨린 힘과 의지는 담임 선생님에게 빚졌어도 새로운 제도와 질서를 건설한 것은 틀림없이 우리들 자신의 힘과 의지였다.거기다가 되도록이면 그날의 일을 우리들의 자발적인 의지와 스스로의 역량에 의해 쟁취된 것으로 기억되게 하려고 애쓰신 담임 선생님의 심지 깊은 배려를 존중하여 나는 이런저런 구차한 수식어를 더해 가면서까지도 굳이 혁명이란 말을 썼던 것이다. (p.94-95)

 

그런데 부끄럽지만, 여기서 한 가지 밝혀 두고 싶은 것은 그 무효표 2표의 내역이다. 한 표는 틀림없이 석대 자신의 것이었고 다른 한 표는 바로 내 것이었다. 그러나 그걸 곧 여러 혁명에서 보이는 반동과 동질로 볼 수는 없는 것이, 나는 이미 무너져 내린 석대의 질서에 연연해 하거나, 그 힘에 향수를 품고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때는 이미 담임 선생님이 은연중에 불지핀 그 혁명의 열기가 내게도 서서히 번져와, 나도 새로 건설될 우리 반에 다른 아이를 못지않은 기대를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막상 그 우리 반을 이끌 지도자를 선택해야 될 순간이 되자 나는 갑자기 난감해졌다. 공부에서건 싸움에서건 또 다른 재능에서건 남보다 나은 아이치고 석대가 받을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아이는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대리 시험으로 석대가 그전 담임 선생님의 믿음과 총애를 훔치는 걸 돕거나 석대의 보이지 않는 손발이 되어 그의 불의한 질서가 가차없이 우리 반을 위압하게 만들어 준 것은 바로 그들이었다. 내가 혼자서 그렇게 힘겹게 석대에게 저항하고 있을 때 가장 나를 괴롭게 한 것도 그들이었고, 갑작스런 반전으로 내가 석대의 가장 가까운 측근이 되었을 때 가장 많이 부러워하거나 시기한 것도 그들이었다.

그렇다고 6학년이면서도 아직 구구단도 제대로 외지 못하는 돌대가리나 싸움도 하기 전에 눈물부터 보여 앞줄의 꼬맹이들에게까지 업신여김을 당하는 허풍선이를 급장으로 세울 수도 없었다. 그 아침까지도 석대가 보장해 주는 특전에 만족해 있던 나 자신을 내세울 수는 더욱 없고 - 그래서 정직하게 던진 표가 무효를 가장한 기권표였다. 변혁을 선뜻 낙관하지 못하는 내 불행한 허무주의는 어쩌면 그때부터 싹튼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p.96-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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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전후사의 인식 - 백기완 (한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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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혁명에 따르는 혼란과 소모는 우리에게도 있었다. 아니 그저 단순히 있었다는 것 이상으로, 우리는 그 뒤 몇 개월에 걸쳐 처음과 끝을 온전히 우리의 힘만으로는 달성하지 못한 그 혁명의 값을 안팎으로 호되게 물어야 했다.

교실 안에서 우리에게 가장 많은 혼란과 소모를 강요한 것은 의식의 파행이었다. 선생님의 격려와 근거 없는 승리감에 취한 우리 중에 일부는 지나치게 앞으로 내달았고, 아직도 석대의 질서가 주던 중압에서 깨나지 못한 아이들은 또 너무 뒤처져 미적거렸다. 임원진으로 뽑힌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어른들 식으로 표현하면, 한쪽은 너무나 민주의 대의에 충실해 우왕좌왕했고, 또 한 쪽은 석대 식의 권위주의를 청산하지 못한 채 은근히 작은 석대를 꿈꾸었다. 걱기다가 새로 생긴 건의함은 올바른 국민 탄핵제도의 기능을 하기보다는 밀고와 모함으로 일 주일에 하나씩은 임원들을 갈아치웠다. (p.98-99)

 

우리 중에서도 좀 별나고 당찬 소전거리 아이들 다섯이 마침내 석대와 맞붙은 일이었다. 석대는 전에 없이 표독을 떨었지만 상대편 아이들도 이판 사판으로 덤비자 결국은 혼자서 다섯을 당해 내지 못하고 꽁무니를 뺐다. 선생님은 그 아이들에게 그 당시 한창 인기였던 케네디 대통령의 <용기 있는 사람들>이란 책 한 권씩을 나눠주며 우리 모두가 부러워할 만큼 여럿 앞에서 그들을 추켜세웠다. 그러자 다음날 미창 쪽에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그 뒤 석대는 두 번 다시 아이들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p.100)

(같이 읽으면 좋은 책)

용기있는 사람들 - J.F.케네디 (박광순 옮김, 범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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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내가 석대를 잊게 된 것은 반드시 내 삶이 숨가쁘고 힘겨웠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그 동안의 내 환경에 그 시절을 상기시킬 요소가 거의 없었다. 일류와 일류, 모범생의 집단을 거쳐 자라 가는 동안 나는 두 번 다시 그 같은 억눌림 또는 가치 박탈의 체험을 안 해도 좋았기 때문이었다. 재능과 노력, 특히 정신적인 능력과 학문에 대한 천착의 깊이로 모든 서열이 정해지고, 자율과 합리에 지배되는 곳들만을 지나와, 그때까지도 석대는 여전히 부정의 이미지에 묻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 석대가 다시 내 의식 표면으로 떠오르기 시작한 것은 군대를 거쳐 사회에 나온 내가 한 십 년 가까이 생활의 진창에 짓이겨진 뒤였다. 처음 일류 학교 출신답게 대기업에 들어갔던 나는 이태 만에 모래 위에 세운 궁궐같이만 느껴지는 그 곳을 떠나 고급 세일즈로 재출발했다. 근무하기에 자유롭지 못한 집단 속에서 젊음과 재능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나는 머지않아 닥쳐올 세일즈의 시대를 꿈꾸며 삼 년 가까이 이 나라의 대기업들이 만든 갖가기 허위와 과대 선전에 찬 상품들을 열심히 팔았다. 약품과 보험과 자동차의 상품 카탈로그를 한 가방 넣어 뛰어다니는 사이에 이 나라의 70년대 후반과 내 청춘의 끄트머리가 함께 지나갔다. 그리하여 결국 이 나라의 세일즈맨은 그 자체가 한 고객에 지나지 않거나, 기껏해야 내구 연한이 이 년을 넘지 않은 대기업의 일회용 소모품에 지나지 않음을 깨달았을 때는 벌써 삼십 대도 중반으로 접어든 헙수룩한 가장이 되어 있었다.

나는 그제서야 놀라 주위를 돌아보았다. 모래 위의 궁궐 같이만 느껴지던 대기업은 점점 번창하기만 했고, 거기 남아 있던 옛 동료들은 계장으로 과장으로 올라가 반짝반짝 윤기가 돌아았다. 어떤 동창은 부동산에 손을 대 벌써 건물 임대료만으로 골프장을 드나들고 있었고, 오퍼상인가 뭔가 하는 구멍 가게를 열었던 친구는 용도가 가늠 안 가는 어떤 상품으로 떼돈을 움켜 거들먹거렸다. 군인이 된 줄 알았던 동창이 난데없이 중앙 부처의 괜찮은 직급에 앉아 있었으며, 재수마저 실패해  따라지 대학으로 낙착을 보았던 녀석은 어물쩡 미국 박사가 되어 제법 교수티를 냈다.

나는 급했다. 그때 이미 내 관심은 그런 성공의 마뜩치 못한 과정이나 그ㅜ걸 가능하게 한 사회 구조가 아니라 그들이 누리고 있느 ㄴ그 과일 쪽이었다. 한 마디로 말해, 나도 어서 빨리 그들의 풍성한 식탁 모퉁이에 끼어들고 싶었다. 그러나 그 급함이 나를 한층 더 질퍽한 생활의 진창에다 패댕이를 쳤다. 겨우겨우 마련한 열아홉 평 아파트 팔고 이돈저돈 마구잡이로 끌어대 벌이 ㄴ어떤 수상쩍은 모험 사업의 대리점은 잘 수습됐다는 게 나를 두 칸 전세방에 들어 앉은 실업자로 만들어 버리는 것으로 끝났다.

실업자가 되어 한 발 물러서서 보니 세상이 한층 잘 보였다. 내가 갑자기 낯선, 이상한 곳으로 전학온 듯한 느낌을 가지게 된 것은 그 무렵이었다. 그전 학교에서의 성적이나 거기서 빛났던 내 자랑들은 아무 소용이 없는, 그들만의 질서로 다스려지는 어떤 가혹한 왕국에 내던져진 느낌 - 그리고 거기서 엄석대는 앋ㄱ한 과거로부터 되살아나왔다.

이런 세상이라면 석대는 어디선가 틀림없이 다시 급장이 되었을 것이다. - 나는 그렇게 단정했다. 공부의 석차도 싸움의 순위도 그의 조작에 따라 결정되고, 가짐도 누림도 그의 의사에 따라 분배되는 어떤 반, 때로 나는 운좋게 그 반을 찾아내 옛날처럼 석대 곁에서 모든 걸 함께 누리는 꿈을 꾸다가 서운함 속에 깨어나기까지 했다. 다행히도 실제 세상은 그때의 우리 반과 꼭 같지는 않아 그래도 내가 일류 대학과 거기서 닦은 지식을 써주는 곳이 아직은 더러 남아 있었다. 그 중에 하나 내가 찾아낸 곳이 사설 학원이었다. 그 곳도 꼭 옛날의 성적대로 되는 것은 아니고 뒤늦게 출발한 강사 생활이라 적응에 고생은 좀 됐지만, 어쨌든 나는 거기서 다시 아내와 아이들을 보살필 만한 수입은 벌어들일 수 있었다. 그리고 몇달 지나지 않아서는 제법 내 집 마련의 꿈까지 키울 수 있을 만큼 살이는 펴졌다. 하지만 석대에 대한 나의 그런 단정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p.102-105)

(같이 읽으면 좋은 책)

한강 - 조정래 (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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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석대 그 친구, 역시 물건이더구만, 그라나다 뒷자석에 턱 제끼고 앉아 가는 걸 봤지."

"고향에 갔다가 엄석대 걔 때문에 기분 콱 잡쳤어. 고향 친구들 불러 술 한잔하는데 온통 갸 애기뿐이더군. 무얼하는지 젊은 녀석 둘을 달고 와 중앙통을 돈으로 휩쓸고 간 모양이야."

녀석들은 감탄조로 그렇게 말했지만, 나는 오히려 그들이 석대를 일부러 왜소하게 만들고 있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우리들의 석대는 그렇게 작아서는 안 되었다. 그렇게 속된 성공으로 그쳐서는 이미 실패의 예감이 짙은 내 삶을 해명할 길이 없어지고 마는 것이었다. 또, 우리들의 석대는 그렇게 쉽게 그의 힘과 성공이 눈에 띄어서도 안 되었다. 보다 은밀하고 깊은 곳에 숨어 지금의 이 반을 주물러 대고 있어야 했고, 그래서 내가 자유와 합리의 기억을 포기하기만 하면 다시 그의 곁에 불러 앉혀 주어야 했다. 내 재능의 일부만 바치면 그는 전처럼 거의 모든 것을 내게 줄 수 있어야 했다. (p.105-106)

(같이 읽으면 좋은 책)

친일파는 살아있다 - 정운현 (책보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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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런 그의 선글라스 낀 얼굴이 이상하게 눈에 익어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추었다.

"튀어 봤자 벼룩이야, 역 구내에 쫙 깔렸어!"

형사 한 사람이 차갑게 내뱉으며 허리춤에서 반짝반짝 하는 수갑을 꺼냈다. 그걸 보자 붙잡힌 남자는 더욱 거세게 몸부림쳤다.

"이 새끼가 아직도 정신 못 차려?"

보다 못한 다른 형사가 그렇게 쏘아붙이며 한 손을 빼 그 남자의 입가를 쳤다. 그 충격에 선글라스가 벗겨져 날아갔다. 그러자 비로소 온전히 드러난 그 남자의 얼굴, 아 그것은 놀랍게도 엄석대였다. 삼십 년 가까운 세월이 지나갔건만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우뚝한 콧날, 억세 뵈는 턱, 그리고 번쩍이는 눈길....

나는 못 볼 것을 본 사람처럼 질끈 두 눈을 감았다. 그런 내 눈앞에 교탁위에서 팔을 들고 꿇어앉아 있던 이십육년 전 그날의 석대가 떠올랐다. 몰락한 영웅의 비장미도 뭐도 없는 초라하고 무력한 우리들 중의 하나가.

"여보, 당신 왜 그럿요?"

영문도 모르고 내 곁에 붙어 섰던 아내가 가만히 옷깃을 당기며 걱정스레 물었다. 나는 그제서야 눈을 뜨고 다시 석대 쪽을 보았다. 그 사이 수갑을 받은 석대는 두 손으로 피묻은 입가를 씻으며 비척비척 끌려가고 있었다. 내 곁을 지날 때 힐끗 나를 곁눈질했지만 조금도 나를 알아보는 것 같지는 않았다....

- 그날 밤 나는 잠든 아내와 아이들 곁에서 늦도록 술잔을 비웠다. 나중에는 눈물까지 두어 방울 떨군 것 같은데, 그러나 그게 나를 위한 것이었는지 그를 위한 것이었는지, 또 세계와 인생에 대한 안도에서였는지 새로운 비관에서였는지는 지금에조차 뚜렷하지 않다. (p.107-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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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열(李文烈, 1948년 5월 18일 ~ )

대한민국의 소설가

1977년 단편 《나자레를 아십니까》가 대구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가작으로 당선되면서 문인으로 등단했다. 이어 '대구매일신문' 편집기자를 지냈다. 1979년에는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새하곡(塞下曲)》이 당선되었다. 같은 해 중편 《사람의 아들》로 ‘오늘의 작가상’을 받으면서 왕성한 창작활동을 전개하여 1980년대에 가장 많은 독자를 확보한 작가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그의 소설의 특징은 탄탄한 구성과 문장의 탁월함으로, 자전적 요소가 강하게 드러나 있다. 주요작품으로는 《젊은날의 초상》(1981) 《황제를 위하여》(1982) 《영웅시대》(1987) 《변경(邊境)》 등이 있으며 《사람의 아들》 《그해 겨울》 《금시조》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등 소설집과 평역서인 《삼국지》와 《수호지》, 《초한지》가 있다. 또한, 동인문학상, 대한민국문학상, 이상문학상, 호암상(예술상) 등을 수상하였다.
한편 유신과 제5공화국의 권위주의적인 통치를 빗댄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을 통해 유명해졌다. 작품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서 반장 엄석대의 합법을 가장한 폭력, 규율을 가장한 폭력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폭력의 의미를 다시 보게 하였는데, 이는 박정희, 전두환 정권의 권위주의적인 태도를 희화, 풍자한 것이기도 했다. 작가 본인이 밝히기를, 작품 전반에 나오는 국민학교 5학년 때의 담임 선생님은 폭력적이고 반민주적인 독재 정권을 실리에 따라서 허락한 6~70년대 미국 외교 정책이고, 후반부에 등장하여 엄석대를 박살내놓은 6학년 때의 담임 선생님은 '경직되고 권위적인 이념'을 가리킨다[2]. 세종대학교에서 교수직을 맡았으며, 1998년부터 부악문원의 대표로 있다. 작품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등의 작품들이 프랑스어, 스페인어, 독일어, 영어, 일본어 등으로 그의 작품이 번역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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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 이문열 (민음사 오늘의작가총서)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 이문열 (창비 20세기한국소설)

이문열 중단편 전집 (RHK) 개정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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