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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
I. 한국 문학/2. 소설

감자 - 김동인 (문학사상사)

by handaikhan 2023. 2. 1.

 

김동인 - 감자 (1925년 조선문단)

 

싸움, 간통, 살인, 도둑, 구걸, 징역, 이 세상의 모든 비극과 활극의 근원지인 칠성문 밖 빈민굴로 오기 전까지는, 복녀의 부처는 (사농공상의 제2위에 드는) 농민이었었다.

복녀는, 원래 가난은 하나마 정직한 농가에서 규칙 있게 자라난 처녀였었다. 이전 선비의 엄한 규율은 농민으로 떨어지자부터 없어졌다하나, 그러나 어딘지는 모르지만 딴 농민보다는 좀 똑똑하고 엄한 가율이 그의 집에 그냥 남아 있었다. 그 가운데서 자라난 복녀는 물론 다른 집 처녀들같이 여름에는 벌거벗고 개울에서 멱감고, 바짓바람으로 동네를 돌아다니는 것을 예사로 알기는 알았지만, 그러나 그의 마음 속에는 막연하나마 도덕이라는 것에 대한 저품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열다섯 살 나는 해에 동네 홀애비에게 팔십 원에 팔려서 시집이라는 것을 갔다. 그의 새서방(영감이라는 편이 적당할까)이라는 사람은 그보다 이십 년이나 위로서, 원래 아버지 시대에는 상당한 농민으로 밭도 몇 마지기가 있었으나, 그의 대로 내려오면서는 하나 둘 줄기 시작하여, 마지막에 복녀를 산 필십 원이 그의 마지막 재산이었다. 그는 극도로 게으른 사람이었었다. 동네 노인의 주선으로 소작 밭깨나 얻어 주면, 종자만 뿌려 둔 뒤에는 후치질도 안하고 김도 안 매고, 그냥 버려 두었다가는, 가을에 가서는 되는 대로 거두어서 '금년은 흉년이네' 하고 전주집에는 가져도 안 가고 자기 혼자 먹어 버리고 하였다. 그러니까 그는 한 밭을 이태를 연하여 부쳐 본 일이 없었다. 이리하여 몇 해를 지내는 동안 그는 그 동네에서는 밭을 못 얻으리만큼 인심과 신용을 잃고 말았다.

복녀가 시집을 온 뒤, 한 삼사 년은 장인의 덕으로 이렁저렁 지내갔으나, 이전 선비의 꼬리인 장인도 차차 사위를 밉게 보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처가에까지 신용을 잃게 되었다.

그들 부처는 여러가지로 의논하다가 하릴없이 평양성 안으로 막벌이로 들어왔다. 그러나 게으른 그에게는 막벌이나마 역시 되지 않았다. 하루종일 지게를 지고 연광정에 가서 대동강만 내려다보고 있으니, 어찌 막벌이인들 될까. 한 서너 달 막벌이를 하다가, 그들은 요행 어떤 집 막간(행랑)살이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그 집에서도 얼마 안하여 쫓겨 나왔다. (...)

인제 어리도 가나? 그들은 하릴없이 칠성문 밖 빈민굴로 밀리어 오게 되었다.

칠성문 밖을 한 부락으로 삼고 그곳에 모여 있는 모든 사람들의 정업은 거러지요, 부업으로는 도둑질과 (자기끼리의) 매음, 그 밖에 이 세상의 모든 무섭고 더러운 죄악이었었다. 복녀도 그 정업으로 나섰다. (p.203-205)

 

복녀는 열아홉 살이었다. 얼굴도 그만하면 빤빤하였다. 그 동네 여인들의 보통 하는 일을 본받아서, 그도 돈벌이 좀 잘 하는 사람의 집에라도 간간 찾아가면, 매일 오륙십 전은 벌 수가 있었지만, 선비의 집안에서 자라난 그는 그런 일을 할 수가 없었다. 

그들 부처는 역시 가난하게 지냈다. 굶는 일도 흔히 있었다. (p.205)

 

어떤 날 송충이를 잡다가 점심때가 되어서, 나무에서 내려와서 점심을 먹고 다시 올라가려 할 때에 감독이 그를 찾았다

"복네! 얘, 복네!"

(..)

"가보자"

감독은 저편으로 갔다. 복녀는 머리를 수그리고 따라갔다.

"복네 돟갔구나."

뒤에서 이러한 조롱 소리가 들렸다. 복녀의 숙인 얼굴은 더욱 발갛게 되었다.

그날부터 복녀도 '일 안하고 품삯 많이 받는 인부'의 한 사람이 되었다. (p.206-207)

 

복녀의 도덕관 내지 인생관은, 그때부터 변하였다.

그는 아직껏 딴 사내와 관계를 한다는 것을 생각해 본 일도 없었다. 그것은 사람의 일이 아니요, 짐승의 하는 짓쯤으로만 알고 있었다. 혹은 그런 일을 하면 탁 죽어지는지도 모를 일로 알았다.

그러나 이런 이상한 일이 어디 다시 있을까. 사람인 자기도 그런 일을 한 것을 보면, 그것은 결코 사람으로 못할 일이 아니었었다. 게다가 일 안하고도 돈 더 받고, 긴장된 유쾌가 있고, 빌어먹는 것보다 점잖고...일본말로 하자면 '삼박자' 같은 좋은 일은 이것뿐이었었다. 이것이야말로 삶의 비결이 아닐까. 뿐만 아니라, 이 일이 있은 뒤부터, 처음으로 한 개 사람이 된 것 같은 자신까지 얻었다.

그 뒤로부터 그의 얼굴에는 조금씩 분도 바르게 되었다. (p.207-208)

 

가을이 되었다.

칠성문 밖 빈민굴의 여인들은 가을이 되면 칠성문 밖에 있는 중국인 채마밭에 감자며 배추를 도둑질하려, 밤에 바구니를 가지고 간다. 복녀도 감자깨나 잘 도둑질하여 왔다.

어떤 날 밤, 그는 감자를 한 바구니 잘 도둑질하여 가지고, 이젠 돌아오려고 일어설 때에, 그의 뒤에 시꺼먼 그림자가 서서 그를 꽉 붙들었다. 보니, 그것은 그 밭의 주인인 중국인 왕 서방이었었다. 복녀는 말도 못하고 멀찐멀찐 발 아래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우리 집에 가"

"가재믄 가디, 훤, 것두 못 갈까."

복녀는 엉덩이를 한 번 홱 두른 뒤에, 머리를 젖히고 바구니를 저으면서 왕 서방을 따라갔다.

(..)

'난 삼 원 받았디"

복녀는 자랑스러운 듯이 대답하였다.

십 분쯤 뒤에 그는 자기 남편과, 그 앞에 돈 삼 원을 내어놓은 뒤에, 아까 왕 서방의 이야기를 하면서 웃고 있었다. (p.209-210)

 

그 뒤부터 왕 서방은 무시로 복녀를 찾아왔다.

(...)

복녀의 부처는 이제 이 빈민굴의 한 부자였었다. (p.210)

 

복녀의 송장은 사흘이 지나도록 무덤으로 못 갔다. 왕 서방은 몇번을 복녀의 남편을 찾아갔다. 복녀의 남편도 때때로 왕 서방을 찾아갔다. 둘의 사이에는 무슨 교섭하는 일이 있었다. 사흘이 지났다.

밤중 복녀의 시체는 왕 서방의 집에서 남편의 집으로 옮겼다. 그리고 시체에는 세 사람이 둘러앉았다. 한 사람은 복녀의 남편, 한 사람은 왕 서방, 또 한 사람은 어떤 한방 의사 - 왕 서방은 말없이 돈 주머니를 꺼내어, 십 원짜리 지폐 석 장을 복녀의 남편에게 주었다. 한방 의사의 손에도 십 원짜리 두 장이 갔다.

이튿날, 복녀는 뇌일혈로 죽었다는 한방의의 진단으로 공동 묘지로 가져 갔다. (p.212-213)

 

         <조선문단> 4호, 19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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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해설 - 김치수 (문학평론가, 이화여대교수)]

생존권을 박탈당한 식민지 백성의 비극적인 삶

원래 농민 출신이었던 복녀는 농토를 빼앗기고 소작농의 생활을 하다가 평양의 막벌이꾼으로 전전한다. 남편의 게으름 때문에 스스로 벌어야 했던 복녀는 송충이 잡기에서 편안하게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을 발견하고, 그때부터 자기의 몸을 파는 것이다. 일종의 배금중의에 의해 남편은 복녀의 매춘 행위를 묵인한다.

복녀는 중국인 왕 서방의 감자를 훔치다가 왕 서방과도 똑같은 관계를 유지한다. 그러나 왕 서방의 결혼을 계기로 그녀는 질투의 본능을 발휘하다가 왕 서방에게 살해당한다.

이것은 식민지 시대에 농촌 출신의 한 여자가 생존권을 박탈당한 채 비극적인 삶을 살고 있음을 이야기 한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생명 자체에 대한 아무런 보장도 있을 수 없었던 식민지 시대에서, 복녀의 죽음은 삼십 원으로 거래되었던 것이다.

이 작품에 있어서 더욱 주목해야 할 것은 복녀라는 한 개인의 비극을 통해서 민족적 빈곤의 비극을 이야기하는 사실일 것이다.

삶의 기본적인 바탕 자체가 박탈당한 그들에게 있어서는 윤리도 도덕도 있을 수 없으며 생존 자체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이라면, 다시 말해서 한 끼니를 먹을 수 있는 일이라면 어떤 행위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에게는 생존의 문제를 해졀해 주는 것이 급선무였음에도 불구하고 식민지 시대에서는 이러한 것이 도외시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민족적 빈곤을 가져오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비극이 아름다움으로 느껴지는 것은, 비극 자체의 철저성을 그릴 수 있는 이 작가의 능력 때문일 것이다. (p.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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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인(金東仁, 1900년 10월 2일~1951년 1월 5일)

대한민국의 소설가, 문학평론가, 시인, 언론인.
1900년 평안남도 평양에서 출생했다. 본관은 전주(全州), 호는 금동(琴童)·춘사(春士)이다. 필명으로는 금동인(琴童人), 김시어딤, 동 문인(東 文仁) 등을 썼다. 평양교회 초대 장로였던 아버지 김대윤(金大潤)과 어머니 옥씨(玉氏) 사이의 3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생애 및 활동사항1912년 기독교 학교인 평양 숭덕소학교(崇德小學校)를 졸업했고, 같은 해 숭실중학교(崇實中學校)에 입학했으나 1913년 중퇴했다. 1914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학원[東京學院] 중학부에 입학했으나, 학교가 폐쇄되어 1915년 메이지학원[明治學院] 중학부 2학년에 편입했다. 1917년 부친상으로 잠시 귀국했다가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같은 해 9월 가와바타화숙[川端畵塾]에 입학했다. 1919년 2월 일본 도쿄에서 한국 최초의 순문예 동인지인 『창조(創造)』를 자비로 간행했다. 창간호에 첫 단편소설 「약한 자의 슬픔」을발표했다. 같은 달 히비야공원[日比谷公園]에서 재일본동경조선유학생학우회(在日本朝鮮留學生學友會) 독립선언 행사에 참여해 체포되었다가 하루 만에 풀려나기도 했다. 3·1운동 직후인 1919년 3월 5일 귀국했고, 동생 김동평(金東平)의 부탁으로 격문을 기초한 혐의로 구속되었다가 같은 해 6월 26일 풀려났다. 1923년에는 창작집 『목숨』을 자비로 출판하고, 1924년 8월 『창조』의 후신격인 동인지 『영대(靈臺)』를 간행해 1925년 1월까지 발간했다. 1930년 9월부터 1931년 11월까지 『동아일보』에 첫 번째 장편 소설 「젊은 그들」을 연재했다. 1933년 4월 조선일보사 학예부에 근무했고, 1935년 12월부터 1937년 6월까지 월간 『야담(野談)』지를 발간했으며, 이 잡지를 통해 「광화사(狂畵師)」를 발표했다.1938년 2월 4일자 『매일신보』에 산문 「국기」를 쓰며 내선일체와 황민화를 선전, 선동하면서부터 일제에 협력하는 글쓰기를 시작했다. 1939년 4월부터 5월까지 ‘북지(北支) 황군(皇軍) 위문 문단 사절’로 활동했다. 같은 해 10월 조선문인협회(朝鮮文人協會)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42년 1월 23일자 『매일신보』에「감격과 긴장」을 통해 태평양전쟁을 지지했으나, 같은 해 일본 천황을 ‘그 같은 자’라고 호칭했다가 7월 불경죄로 징역 8월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1943년 4월 출범한 조선문인보국회(朝鮮文人輔國會)에 참가해 6월 15일부터 소설희곡부회 상담역을 맡았다. 1944년 1월 20일 조선인 학병의 입영이 시작되자 같은 해 1월 19일부터 1월 28일에 걸쳐 「반도 민중의 황민화」를 연재했다. 1945년 3월 8일부터 11일까지 『매일신보』에 「전시생활 수감」을 게재했다. 이 밖에 잡지 『조광(朝光)』, 『신시대』 등에 친일소설 및 산문을 여러 편 남겼다.광복 이후 1946년 1월 전조선문필가협회(全朝鮮文筆家協會) 결성을 주선했고, 1947년 3월 『백민』에 「망국인기(亡國人記)」, 1948년 3월부터 1949년 8월까지 『신천지』에 「문단 30년의 자취」 등을 게재했다. 1949년 7월 중풍으로 쓰러졌으며, 1951년 1·4후퇴 때 가족들이 피난간 사이 하왕십리 자택에서 사망했다. 작품 「배따라기」(1921)로 확고한 문명(文名)을 얻었고,「감자」(1925)·「광염(狂炎)소나타」(1929)·「발가락이 닮았다」(1932)·「붉은 산」(1932)·「김연실전(金姸實傳)」(1939) 등 수많은 단편을 발표해 한국 근대단편소설의 양식을 확립했다. 대표적인 역사소설로는 「젊은 그들」(1929)·「운현궁(雲峴宮)의 봄」(1933)·「대수양(大首陽)」(1941) 등이 있다. 평론으로는 「제월(霽月)씨의 평자적 가치(評者的價値)」를 비롯해 「조선근대소설고(朝鮮近代小說考)」(1929)·「춘원연구(春園硏究)」(1934·1935) 등이 있다. 그 밖에 「목숨」(1921)·「정희」·「시골 황서방」(1925)·「송동이」(1929)·「반역자(反逆者)」(1946) 등의 단편과 「여인(女人)」(1930)·「왕부(王府)의 낙조(落照)」(1935) 등의 장편소설이 있다. 1955년 『사상계』가 동인문학상을 제정해 1956년부터 시상을 시작했으며, 1987년부터는 조선일보사가 주관하고 있다. 사후 1964년 『동인전집』 전 10권과 1976년 『김동인전집』 전 7권 간행되었다.김동인의 이상과 같은 활동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11·13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2: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177∼210)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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