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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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댈러웨이 부인 - 버지니아 울프 (이태동 옮김, 시공사) 시공사 세계문학의 숲 023 버지니아 울프 - 댈러웨이 부인 (1925년) 댈러웨이 부인은 자기가 직접 가서 꽃을 사 오겠다고 했다. 루시는 루시대로 준비해야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문들도 돌쩌귀에서 떼내야 했고, 럼플메이어 목공소에서 사람도 오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얼마나 상쾌한 아침인가. 마치 어린이들이 해변에서 맞는 아침처럼 맑고 신선하다고, 클라리사 댈러웨이는 생각했다. 어쩜 이렇게 화창하지! 바깥으로 뛰어들고 싶어! 부어턴에서 살던 시절에도 지금처럼 삐꺽 대는 돌쩌귀 소리가 나는 프랑스식 창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바깥공기 속으로 뛰어들면, 항상 그렇게 상쾌한 기분을 느꼈었다. 얼마나 상쾌하고 고요했나. 지금보다 더 조용했던 그때의 아침 공기는 철썩이는 파도처럼, 파도가 입 맞추는 물결처럼 .. 2023. 11. 6.
메데이아 - 에우리피데스 (강대진 옮김, 민음사) 에우리피데스 - 메디이아 (기원전 431년경) 유모: 아, 아르고호 작은 배가 콜키스인들의 땅을 향해 검푸른 쉼플레가데스 사이로 치닫지 않았더라면! 펠리온산의 골짜기에서 소나무가 베어져 쓰러지지 않았더라면! 펠리아스의 명을 좇아 온통 금으로 된 털가죽을 얻으려고, 뒤어난 자들의 손이 노를 젓지 않았더라면! 그랬더라면 나의 여주인 메데이아께서 이아손님을 향한 사랑으로 온 마음에 타격을 입고 이올코스 땅의 탑들을 향해 항해하지도 않았을 텐데! 아버지를 죽이도록 펠리아스의 딸들을 설득한 후에, 남편과 아이들과 함께 이곳 코린토스 땅으로 옮겨 와 사는 일도 없었을 텐데! 하지만 그녀는 이 망명으로써 자기가 옮겨 간 땅의 시민들을 흡족하게 했지요. 이아손님을 위해 이 모든 일을 행한 것이고요. 그런데, 여자가 남.. 2023. 10. 30.
인생의 베일 - 서머싯 몸 (황소연 옮김, 민음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7 서머싯 몸 - 인생의 베일 (1925년) 그녀가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왜 그러지?" 그가 물었다. 덧창이 닫힌 어두운 방 안이었지만 그는 그녀의 얼굴이 갑자기 공포로 사색이 되는 것을 보았다. "방금 누가 문을 열려고 했어요." "하녀나 하인 중 하나였겠지." "하인들은 이 시간에 얼씬도 안 해요. 내가 점심 후에 꼭 낮잠을 자는 걸 아니까." "그럼 누구지?" "월터...." 그녀가 속삭였다.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p.15) .......................................................................................................................................... 2023. 10. 23.
사랑할 때와 죽을 때 - 레마르크 (민음사) 민음사 세계문학 246 레마르크 - 사랑할 때와 죽을 때 (1954년) 러시아에서의 죽음은 아프리카에서의 죽음과는 다른 냄새를 풍겼다. 영국군의 격렬한 포화로 시체들이 묻히지도 않은 채 전장에 나뒹구는 것은 아프리카에서도 흔한 일이었다. 그러나 태양이 신속하게 작용했다. 그러다 밤이 되면 바람과 함께 달콤하면서도 숨 막히는 답답한 냄새가 전해져 왔다. 죽은 자들의 몸속으로 가스가 가득히 차오르면 낯선 별빛 아래서 마치 유령처럼 시체들이 몸을 일으켰다. 아무 희망도 없이, 모두들 제각각 혼자서, 말없이 다시 한 번 전투에 참가하기라도 하려는 듯이. 그러나 다음 날 아침이 되면 그것들은 다시 쭈그러들기 시작하여 그대로 땅에 착 달라붙을 것 같았다. 너무도 지쳐 땅속으로 기어들려는 것 같았다. 나중에 옮기려고.. 2023. 9. 24.
수라도 - 김정한 (창비) 창비 20세기 한국 소설 11권 목차 안수길 목축기 제3인간형 김정한 사하촌(寺下村) 추산당과 곁사람들 모래톱 이야기 수라도(修羅道) ....................................... 김정한 - 수라도 (1969년) "저 애씨는 시집 몬 갈까봐 불공 디리러 왔나? 이 비좁은 방에 온!" "와 그라노, 우리 부체새끼를....그라지 마라, 내 손지다." 아직 불당답게 채 꾸며지지도 않은 방 안벽받이에 안치된 커다란 돌부처 곁에 빠듯이 끼어 앉아 있는 소녀는, 겨우 여남은 살 될까 말까 하는 나이다. 소복 차림의 보살할머니들이 웅성대는 양을 눈여겨 보고 있던 소년, 별안간 자기를 놀려주는 핀잔 소리에 눈이 오끔해지다가, 할머니 가야부인의 감싸주는 말이 떨어지자 모두들 딱다그르 하고 웃는 .. 2023. 9. 22.
모래톱 이야기 - 김정한 (창비) 창비 20세기 한국 소설 11권 목차 안수길 목축기 제3인간형 김정한 사하촌(寺下村) 추산당과 곁사람들 모래톱 이야기 수라도(修羅道) ....................................... 김정한 - 모래톱 이야기 (1966년) 이십 년이 넘도록 내처 붓을 꺾어오던 내가 새삼 이런 글을 끼적거리게 된 건 별안간 무슨 기발한 생각이 떠올라서가 아니다. 오랫동안 교원 노릇을 해오던 탓으로 우연히 알게 된 한 소년과, 그의 젊은 홀어머니, 할아버지, 그리고 그들이 살아오던 낙동강 하류의 어떤 외진 모래톱 - 이틀에 관한 그 기막힌 사연들조차, 마치 지나가는 남의 땅 이야기나, 아득한 엣날이야기처럼 세상에서 버려져 있는 데 대해서까지는 차마 묵묵할 도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p.149) '섬 얘.. 2023. 9. 20.
연금술사 - 파울로 코엘료 (최정수 옮김, 문학동네) 파울로 코엘료 - 연금술사 (1988년) 양치기 산티아고가 양떼를 데리고 버려진 낡은 교회 앞에 다다랐을 때는 날이 저물고 있었다. 지붕은 무너진 지 오래였고, 성물 보관소 자리에는 커다란 무화과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그는 그곳에서 하룻밤을 보내기로 했다. 양들을 부서진 문을 통해 안으로 들여보낸 뒤, 도망치지 못하도록 문에 널빤지를 댔다. 근처에 늑대는 없었지만, 밤사이 양이 한 마리라도 도망치게 되면 그 다음날은 온종일 잃어버린 양을 찾아다녀야 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p.19) 그는 이 마을에서 많은 친구를 사귀었다. 친구를 사귀는 일은 여행의 큰 즐거움이었다. 늘 새로운 친구들과의 새로운 만남. 하지만 그렇게 만든 친구들과 며칠씩 함께 지낼 필요는 없었다. 항상 똑같은 사람들하고만 있으면 -.. 2023. 9. 15.
궁핍한 날의 벗 - 박제가 (안대회 옮김, 태학사) 태학 산문서 1 궁핍한 날의 벗 - 박제가 천하에서 가장 친밀한 벗으로는 곤궁할 때 사귄 벗을 말하고, 우정의 깊이를 가장 잘 드러낸 것으로는 가난을 상의한 일을 꼽습니다. 아! 청운에 높이 오른 선비가 가난한 선비 집을 수레 타고 찾은 일도 있고, 포의의 선비가 고관대작의 집을 소매 자락 끌며 드나든 일이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절실하게 벗을 찾아다니지만 마음 맞는 친구를 얻기는 어려우니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벗이란 술잔을 건네며 도타운 정을 나누는 사람이나, 손을 부여잡고 무릎을 가까이하여 앉은 자를 의미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 벗이 있고,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이 있으나 저도 모르게 저절로 입 밖으로 튀어 나오는 벗이 있습니다. 이 두 부류의 벗.. 2023. 9. 12.
길위의 집 - 이혜경 (민음사) 오늘의 작가 총서 18 이혜경 - 길위의 집 (1995년) 낯선 진동음이 은용의 몸을 들까부른다. 은용은 우무처럼 점성이 강한 공기에 갇혀 있어서, 진동은 제 파장을 한 번 굴절시킨 다음에야 전달된다. 은용은 팔을 헤집어, 끈덕지게 들러붙는 공기층을 걷어낸다. 저 소리, 저 소리가 나를 부르는 소리지. 그런데 공기가 왜 이리 끈적거리지? 이걸 어떻게 걷어내지? 은용은 허우적거리다 눈을 번쩍 뜬다. "아가씨, 아가씨, 전화 받아요." 입 밖에 나오지 못한 외침을 흡, 삼키며 은용은 눈을 떴다. 흐릿한 빛살 아래 올케의 얼굴이 대각선으로 비쳤다. 고개를 들며 몸을 일으키자, 쪼그리고 앉은 올케가 제대로 보였다. 은용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쳐들었다. 링거 방울은 여전히 무덤덤하게 떨어지고 있었다. 그새 잠들었던.. 2023. 9. 7.
마음 - 나쓰메 소세키 (송태욱 옮김, 현암사)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전집 (12) 나쓰메 소세키 - 마음 (194년) 나는 그분을 늘 선생님이라 불렀다. 그러니 여기서도 그냥 선생님이라고만 쓰고 본명을 밝히지는 않겠다. 이는 세상 사람들을 의식해서 삼간다기보다 나로서는 그렇게 부르는 게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나는 그분을 떠올릴 때마다 바로 '선생님'이라고 부르고 싶어진다. 글을 쓸 때도 그런 마음은 같다. 어색한 이니셜 따위는 도무지 쓸 마음이 들지 않는다. (p.16) "나는 나 자신조차 믿지 못하네. 말하자면 자신을 믿지 못하니까 남들도 믿을 수 없게 된 거지. 자신을 저주하는 것 외에 달리 방법이 없는 거네." "그렇게 어렵게 생각하면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요." "아니.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니네. 그렇게 해버린 거지. 그렇게 하고.. 2023. 8.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