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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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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스 - 토마스 하디 (김문숙 옮김, 열린책들) 토마스 하디 - 테스 (1891년) 제1권 5월 하순의 어느 날 저녁, 한 중년 남자가 샤스턴에서 블레이크모어 또는 블랙무어라고도 부르는 인근 계곡의 말롯 마을의 집을 향해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남자를 지탱하고 있는 두 다리는 비틀거렸고 걸음걸이는 일직선에서 조금씩 왼쪽으로 기울어지곤 했다. 남자는 어떤 의견에 동의라도 하듯 이따금 고개를 크게 주억거리곤 했지만, 사실 무슨 특별한 생각이 있는 것 같진 않았다. 팔에는 텅 빈 달걀 광주리가 축 늘어진 채 걸려 있고 모자에는 보풀이 엉켜 있으며 벗을 때 엄지손가락이 닿는 챙의 헝겊 부분도 너덜너덜했다. 남자는 곧 회색빛 당나귀에 걸터앉아 알아들을 수 없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다가오는 나이 지긋한 목사와 마주쳤다. (p.11-12) 실제로 행렬의 대부분을 차.. 2023. 7. 4.
수고양이 무어의 인생관 - 호프만 (박은경 옮김, 문학동네) 에른스트 테오도어 아마데우스 호프만 - 수고양이 무어의 인생관 (1819년) 삶에는 그래도 무언가 아름다운 것, 멋진 것, 숭고한 것이 있다! - "오 그대 달콤한 존재의 습관이여!" 하고 저 네덜란드의 주인공은 비극에서 외친다. 나 역시 이렇게 외치노라. 하지만 비극의 주인공처럼 삶과 결별해야 하는 고통스러운 순간에 외치는 것은 아니다. 천만의 말씀! 그게 아니라 내가 이제 그 달콤한 습관 속에 완전히 빠져들었고 언제고 그것에서 다시 빠져나올 의향이 전혀 없다는 생각에서 솟아나는 충만한 즐거움이 바야흐로 나를 가득 채우는 순간에 이렇게 외치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내 생각에 정신적 힘, 미지의 권력, 혹은 앞서 말한 습관을 내 동의 없이 강제로 떠맡기다시피 한 우리를 지배하는 원칙이 달리 또 어떻게.. 2023. 7. 1.
마당깊은 집 - 김원일 (문학과지성사) 김원일 - 마당깊은 집 (1988년) 고향 정터거리의 주막에서 불목하니 노릇을 하며 어렵사리 초등학교를 졸업하자, 선례누나가 나를 데리러 왔다. 나는 누나를 따라 대구시로 가는 기차를 탔다. 그때, 심한 차멀미 탓도 있었겠지만, 풀죽은 내 ㅅ니세가 팔려가는 망아지 꼴이었다. 왠지 어머니와 함께 살아갈 앞으로의 생활이 암담하게만 느껴졌다. 삼 년 동안의 전쟁이 멈춘 휴전 이듬해였으니, 1954년 4월 하순이었다. 나는 전쟁이 났던 해 겨울부터 가족과 떨어져 살았으므로 삼 년만에야 비로소 식구들과 한솥밥을 먹게 되는 셈이었다. 대구시는 내게 낯선 도시였다. 누나를 따라 진영에서 대구시로 오니 이미 중학교 입학 시기는 끝난 뒤였다. 우리집은 대구시의 중심부에 해당되는 약전골목과 중국인이 많이 거주하는 종로통을.. 2023. 6. 26.
목마른 뿌리 - 김소진 (한국헤르만헤세) 큰한국문학413 (71권) 목차 김소진 목마른 뿌리 이문구 관촌수필(여요주서) 장천리 소태나무 .............................................................. 김소진 - 목마른 뿌리 (1996년) "내가 바로 김태섭이외다." 물이 많이 빠진 낡은 자줏빛 반코트를 입은 사내가 천천히 걸어오며 말했다. 나는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등 뒤에는 해가 떠 있어 눈이 부셨다. 나는 이마에 손갓을 만들어 붙엿다. 사내는 굵은 모직 천으로 만든 흰 운동화를 신은 왼쪽 다리를 땅에 대고 가볍게 끌고 있었다. "예....제가 김영호입니다.어서 오시지요.' 나는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처음 인사드립니다. 아주버님. 호영 씨 안사람 됩니다." 아내가 머리를 숙.. 2023. 6. 25.
동백꽃 누님 - 이청준 (다림) 이청준 - 동백꽃 누님 (2004년) "하늘 천 땅 지 검을 현 누를 황? 누가 그렇게 외우랬어? 하늘 천 따따지 검은 솥에 누룽지.....이게 맞는 거야. 아까 선생님도 그렇게 외우라시던걸." 아랫동네 골목집의 서당 글공부는 준영이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재미있고 신명났다. 나이 먹은 글방 형들의 장난 소리에 동갑내기 판동이 녀석이 어수룩하게 잘 속아 넘어가는 것부터 그랬다. 낮 시간이 한참 지나 글공부가 지루해지면 나이 먹은 형들은 이따금 선생님의 눈길을 필해 어린 학생들에게 그런 우스개 장난 소리를 하곤 했다. (p.9) "허, 그래. 나이가 너무 어린가 싶었더니 글공부를 일찍 다니길 잘했구나. 하지만 글공부는 글만 외우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그 글 속에 있는 세상살이의 이치와 사람의 도리를 .. 2023. 6. 23.
설국 - 가와바타 야스나리 (장경룡 옮김, 문예출판사) 목차 설국 이즈의 무희 금수 ............................................. 가와바타 야스나리 - 설국 (1948년) 현 접경의 긴 터널을 빠져 나오자 눈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서 기차가 멎었다. 건너편 좌석에서 처녀가 일어나 이쪽으로 걸어오더니, 시마무라 앞에 있는 유리창을 열었다. 차디찬 눈의 냉기가 흘러들었다. 처녀는 차창 밖으로 잔뜩 몸을 내밀더니 멀리 대고 외쳤다. "역장니임, 역장니임!" 등불을 들고 천천히 눈을 밟으며 다가온 사나이는 목도리로 콧등까지 싸매고 귀는 모자에 달린 털가죽으로 내리덮고 있었다. 벌써 저렇게도 추워졌나 싶어 시마무라가 창밖을 내다보니, 철도관사처럼 보이는 바라크들이 산기슭에 으스스하게 흩어져 있을 뿐, 하얀 눈.. 2023. 6. 23.
풀베개 - 나쓰메 소세키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3 나쓰메 소세키 - 풀베개 (1906년) 산길을 오르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이지(理智)만을 따지면 타인과 충돌한다. 타인에게만 마음을 쓰면 자신의 발목을 잡힌다. 자신의 의지만 주장하면 옹색해진다. 여하튼 인간 세상은 살기 힘들다. 살기 힘든 것이 심해지면 살기 편한 곳으로 옮겨 가고 싶어진다. 어디로 옮겨 가도 살기 힘들다는 깨달았을 때 시가 태어나고 그림이 생겨난다. 인간세상을 만든 것은 신도 아니고 귀신도 아니다. 역시 가까운 이웃들과 오가는 보통 사람들이다. 보통 사람들이 만든 인간 세상이 살기 힘들다고 해서 옮겨 갈 나라는 없을 것이다. 있다면 사람도 아닌 사람의 나라일 뿐이다. 사람도 아닌 사람의 나라는 인간 세상보다 더욱 살기 힘들 것이다. 옮겨 갈 수도 없는 세.. 2023. 6. 17.
부생육기 - 심복 (김지선 옮김, 달아실) 심복 - 부생육기 (1808년) 1. 규방기락 (閨房記樂 규방의 즐거움을 노래하다) 나는 건륭 계미년 겨울 11월 22일에 태어났다. 당시는 태평성대였고 명문세가에서 태어나 소주의 창랑정 옆에 살았으니 하늘이 나에게 내린 복은 정말로 컸다고 할 수 있다. 소동파가 "모든 일이 봄날 꿈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지네"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만약 내 삶을 붓으로 기록해두지 않으면 하늘이 내려준 복을 저버리는 일이 될 것이다. 단지 부부의 사랑을 읊은 가 [시경] 삼백 편 가운데에서도 맨 처음에 실린 것을 고려하여, 나도 우리 부부의 이야기를 책 첫머리에 두었다. 그 외 다른 이야기들은 순서대로 기록하고자 한다. 부끄럽게도 젊은 시절 학문에 뜻을 잃어 아는 것이 거의 없고, 이 책도 진실한 감정과 사실을 적은.. 2023. 6. 14.
우리시대의 소설가 - 조성기 (한국헤르만헤세) 큰 한국문학 413 (제82권) 목차 김채원 겨울의 환 조성기 우리 시대의 소설가 ............................................ 조성기 - 우리 시대의 소설가 (1991년) 이곳은 소설가가 살 만한 동네가 아니다. 그렇다고 소설가 강만우 씨는 다른 곳으로 옮기는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도 없다. 다른 동네로 옮겨 봐도 결국 비슷한 상황이 전개되고 말 것이 아닌가 싶을 뿐이다. 언젠가 만우 씨는 충무로 대한극장에서 영화 한 편을 보고, 남산에 올라가서 벤치 같은 데 앉아 쉬었다 갈까 하고, 남산으로 오르는 길을 찾아 동국대 정문 앞으로 해서 필동이라는 동네로 들어서 보았는데, 이전에는 고즈넉하기 이를 데 없던 그 동리가, 만우 씨가 소설가로서 본격적으로 활동하게 될 .. 2023. 6. 13.
겨울의 환 - 김채원 (한국헤르만헤세) 큰 한국문학 413 (제82권) 목차 김채원 겨울의 환 조성기 우리 시대의 소설가 ..................................................... 김채원 - 겨울의 환 (1989년) 언젠가 당신은 제게 나이 들어가는 여자의 떨림을 한번 써 보라고 말하셨습니다. 저는 그 얘기를 지나쳐 들었습니다, 라기보다 글이라고는 편지와 일기 정도밖에 써 보지 못한 제가 어떻게 그런 것을 쓸 수 있을까 두려운 마음이 앞섰습니다. 저는 감정의 훈련도, 또한 그 감정을 끌어내어 표현하는 능력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음 한편으로는 그때부터 죽 나이 들어가는 여자의 떨림에 대해서 분명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아니, 그보다 그 말 자체가 가지는 의미에 대해서 어떤 매혹을 느꼈다고 .. 2023. 6.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