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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
VII. 아동, 청소년/1. 한국 문학

겨울의 환 - 김채원 (한국헤르만헤세)

by handaikhan 2023. 6. 12.

큰 한국문학 413 (제82권)

 

목차

 

김채원

겨울의 환

 

조성기

우리 시대의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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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채원 - 겨울의 환 (1989년)

 

언젠가 당신은 제게 나이 들어가는 여자의 떨림을 한번 써 보라고 말하셨습니다. 저는 그 얘기를 지나쳐 들었습니다, 라기보다 글이라고는 편지와 일기 정도밖에 써 보지 못한 제가 어떻게 그런 것을 쓸 수 있을까 두려운 마음이 앞섰습니다. 저는 감정의 훈련도, 또한 그 감정을 끌어내어 표현하는 능력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음 한편으로는 그때부터 죽 나이 들어가는 여자의 떨림에 대해서 분명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아니, 그보다 그 말 자체가 가지는 의미에 대해서 어떤 매혹을 느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습니다. 그 말에서 스스로를 여자로 느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얘기한다면 조금 어폐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정말입니다. 저는 이제껏 마흔세 살이라는 나이가 되도록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여자로 느끼지 못했습니다. 저는 단지 여자의 흉내만을 내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때, 목욕을 하고 나서 새 속치마를 꺼내어 입을 때, 혹은 화장을 할 때, 혹은 생리 냅킨을 꺼낼 때 자신이 여자의 흉내를 낸다는 느낌에 젖게 됩니다만 그 외에는 언제나 나의 용모나 성 따위를 전혀 잊고 있는 것입니다. 즉, 외부에서 보는 나가 아니라 내 안에 있는 나 그것일 뿐입니다(다른 여자들도 그런지 어떤지 그것은 모르겠습니다). 그런 연고로 당신이 그 말을 하셨을 때 저는 젊었을 때도 느끼지 못했던 여자라는 성과, 그 성이 가지는 떨림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된 것입니다. 그 말 자체에는 무언가 설레게 하는, 인생에의 어떤 신묘한 가능성까지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늙어 가는 것이 단지 멸해 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여자로서의 떨림이 있을 수 있는 것이로구나 하는 확연한 느낌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 말에 비로소 여자가 된 듯한 기분을 맛보았습니다.

늙어 가는 사람의 떨림이란 좀 어색하지 않습니까. 늙어 가는 사람의 떨림이라기보다 늙어 가는 여자의 떨림이란 말이 훨씬 자연스러운 것이고 보면 제가 스스소를 언제나 사람이라고 느끼던 것에서 저의 성을 찾아 여자가 된 것이, 그 자각이 이제라도 기쁨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저는 비로소 여자에 눈떴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리고 그 자각이 나 하나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내 어머니와 할머니, 이분들은 내가 실제 보았던 인물들이고, 말로만 들었던 증조할머니 그리고 더 거슬러 올라가 선조의 여자들까지도 생각해 보게 되고, 인맥을 통해 면면히 흐르는 여자로서의 숙명 같은 것도 감지하게 되었습니다.

자궁을 가진 여자로서의 숙명감, 아버지가 아닌 어머니로서의 모(母)라는 의미, 결연히 인생과 마주한 여자로서 서야 하는, 또한 그중에서도 동양의 여자, 소나무가 크고 있는 지역의 여자, 이런 의미들이 밀려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것은 복받을 만한 서구의 자연, 그리고 그들의 깨어 있는 문화가 만들어 놓은 개인주의, 저는 한때 그 개인주의에 공감하고 그를 따르려 했습니다만 서구의 개인주의와 동양의 미덕과는 어쩔 수 없이 다를 수밖에 없다는 그런 깨달음이 망연히, 그러나 어떤 확신감을 가지고 다가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양에서만 보던 서양의 잣나무와 솔바람을 품어 안는 소나무와는 다를 수밖에 없다는 자각, 우리가 이 시간 그리고 동양권인 이 공간 속에 태어났다는 것은 하나의 운명이기도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하여 당신과 만났다는 운명이라고 생각합니다. (p.9-11)

 

집에는 화투 손님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인원은 대개 두 사람이나 세 사람, 섰다가 아닌 민화투로서 작은 푼돈이 왔다 갔다 하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판이 큰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머니는 화투를 짝짝짝 다듬어 치다가 늦은 저녁때가 되면 다락문을 열고, 부엌에서 떨고 있는 동생과 내게 소리치셨습니다. 다락문을 열어야만 부엌에 그 소리가 잘 들리기 때문입니다.
“얘 가혜야, 왜 아침에 먹던 된장찌개 있잖니? 거기다 된장을 한 숟가락 떠다가 더 풀고 두부 한 모 썰어 넣고 마늘 다져 넣고 보글보글 끓여라. 그리구 며루치도 좀 집어넣어라. 그래서 밥하구 상을 차려서 좀 가지구 들어와라, 응. 김치는 새것을 썰어라.”
부뚜막에서 졸듯이 쪼그리고 앉아 연탄 냄새를 맡고 있던 동생과 나는 비로소 부스스 몸을 일으켜 어머니가 지시한 대로 막숟가락과 양재기를 하나 가지고 된장을 푸러 어두워진 장독대로 더듬어 갑니다.
그때 우리가 느낀 것은 손님 앞에서 큰 소리로 부엌에다 대고 소리치는, 교사까지 지낸 어머니의 교양에 대한 반감이었을까요. 더구나 신비감도 없이 아침에 먹던 된장찌개에다가, 라고 서슴없이 말하는 것은 정말 싫은 기분이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불을 땐 방이라고는 화투 치는 방뿐인데, 아이들이 있을 곳이 없는 데 대한 배려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그런 감정들이 뒤엉켜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바로 그 된장찌개를 이제 와서 자랑하는 것입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정말 그 된장찌개가 맛이 있었다면, 첫째는 우리 집의 장맛이 좋았을 것이고(그것은 어머니의 손이 단 데 연유했을 것입니다만, 아니 그보다 할머니가 시골에서 쑤어 오신 메주에 달렸을 것입니다.), 그러고는 아침에 먹던, 의 바로 그 먹던에 원인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한번 끓였던 것에다 다시 끓이면 그만큼 재료가 여러 가지 많이 들어간 결과가 되고, 아울러 푹 달구어진 맛이 우러나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는 음식에서 늘 영양가를 우선으로 생각했고, 또 아무리 조금 남은 것이더라도 절대로 버리는 일이 없으므로, 그런 것들이 늘 찌개에 들어가게 마련이어서 두루뭉수리 독특한 찌개 맛을 자아냈는지 모릅니다.
이렇게 정의 내리듯 생각해 보지만 돌이켜 보면 어린 시절 항상 음식에 대한 아쉬움을 품고 지냈던 것 같습니다. 즉, 된장찌개에 가장 생명이라고도 할 수 있는, 마지막에 파를 썰어 넣는 일이 대개 빠져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어머니의 음식에서 항상 그 파와 같은 부분이 빠지는 것입니다.
음식점에서 장국밥을 처음 먹어 보던 날, 음식점 특유의 그 깔끔한 맛이 후춧가루와 깨소금, 파 같은 양념들에서 오는 것임을 알고, 후춧가루라는 처음 맛보는 양념에 거의 경의마저 품었을 지경이었으니까요.
어머니는 왜 후춧가루와 파와 같은 부분을 생략했는가. 가난했던 탓일까. 그 당시는 전후로서 모두들 대강 그냥 끓여 먹고 살던 시절이었다고 생각해 보려 해도, 그 후 이웃집이나 친구들 집이 그런 것들을 점점 갖춘 생활로 변해 감에 비해 우리 집은 항상 그대로였습니다.

오히려 점점 더 빛을 잃은 뭉뚱그려진 음식이었습니다.

어머니의 자랑을 제가 시큰둥하게 넘기게 되는 것은 바로 그런 까닭입니다. 뿐더러 어머니의 음식이 설혹 맛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늘 우리에게 먹게끔 해 주었던 그런 따뜻한 밥상은 아니었다는 인상 때문입니다.누구나 늘 따뜻한 손길 같은 것을 그리워하고 있듯이 누구나 다 바로 그 따뜻한 밥상을 그리워하고 있을 것입니다.

하루 종일 그림자처럼 조용히 일만 하고 있는 여인, 조용히 묵묵히 끝도 없이 일을 하고 있는 여인, 아플 때 와서 손을 얹어 주고 물을 떠다 주고, 그리고 매일매일 밀물처럼 닥쳐오는 세끼의 밥을 따뜻이 먹게끔 차려 주는 여인이 비치어 옵니다. 대부분의 옛 여인의 모습이 그랬을 것입니다.

어린 시절 기억에 떠오르는 할머니가 그랫으므로 실지 제가 본 생생한 여인의 모습으로 다가듭니다.

어머니와 저는 그런 여인이 아닙니다. 그런 여인이 아닐뿐더러 오히려 밥상을 깨부수는 힘을 가지고 있지 않는가 하는 솔직한 두려움을 느낍니다. 아니, 깨부순다는 표현이 너무 과격하다면 언제까지나 부엌과 밥상에 친해지지 않는다고 할까요. 부엌에서 찬바람 같은 것이 돈다고 할까요.

이것이 가히 손금, 어머니와 저의 운명에서 비롯된다고 얘기할 수 있을까요.. (p.19-23)

(같이 읽으면 좋은 책)

댈러웨이 부인 - 버지니아 울프 (이태동 옮김, 시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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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깊은 곳에서는 가만히 무엇인가가 울려 퍼집니다.

저는 동생과 동치미를 먹으며 촉수가 희미한 전등불 밑에서 방학 숙제 그림일기 속에 눈이 내리고 있는 풍경을 그려 넣습니다.

벌판 위에 기와집이 한 채 서 있고 바둑이가 대문 앞에서 꼬리를 흔들고 눈사람이 모자를 쓰고 지팡이를 들고 서 있으며 설빔을 입은 아이들이 하늘에 연을 띄우고 있습니다. 눈 위에는 어디로인가 사라져 버린 사람의 발자국이 찍혀 있습니다. 이것은 제가 본 눈의 풍경이 아니라 달력이나 어린이 책에서 본 풍경입니다. 눈송이를 확대해 보면 정육면체 혹은 팔면체의 예쁜 꽃송이라는 눈의 세계, 멍멍이와 눈 위의 하얀 발자국과 벌판 위에 서 있는 집 들창 속의 느낌, 이런 것들을 나는 그림 속에서나 있는 먼 세계로 느끼며 그려 넣었습니다. 그 나이의 내게 그것은 있는 그대로 쉬운 동요였건만, 그 정서를 왠지 박차고, 먼 곳에 있는 것으로 느껴 그리워 하였습니다. 그것은 어른이 된 지금에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가령,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싸리문 여잡고 기다리는 가, 기러기 달밤을 울고 간다. 이 노래를 생각할 때의 정서 또한 저는 아직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어려서 이 노래를 들을 때는 어른이 되면 자연스레 몸속에 익을 수 있는 감정이려니 했습니다. 그 세계를 감당 못 하여 멀리 느끼기보다는 몸 안에서 우러나오는 그런 느낌의 세계이려니 했습니다. 기러기가 우는 달밤에 싸리문을 여잡고 누군가를 기다릴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성숙한 여자의 세계를 가슴속에 품고 그리워하며 자랐던 것입니다. 이제 알겠습니다. 당신이 말한 나이 들어가는 여자로서의 떨림, 그러고 보니 그 여자의 성을 저도 느끼지 않은 것은 아님을 알겠습니다. 오히려 어린 시절 바로 방학 숙제 속에 눈의 세계를 그려 넣던 그 시절부터 저는 성숙한 여인의 세계를 그리워하며 가슴에 품고 커 왔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럼에도 당신이 그런 애기를 했을 때 매혹까지 느끼며 처음으로 여자라는 성을 감지하는 느낌을 그리워했듯 여자라는 성을 그저 그리워만 했던 것인 듯합니다. 누군가 내게 여자의 성을 띄워 놓아주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제 속에 있는 무한한 여자, 심포니 9번을 들으며 사람의 감정의 폭이 어쩌면 저렇게 무한대일 수 있을까 생각한 바로 그 감정의 폭을 제게 띄워 준 사람이 없었기 때문인지 모릅니다. 그리하여 저는 이제 뒤늦게 마흔셋이라는 나이에 처음으로 나이들어 가는 여자의 떨림을 감지하고 무언가 스스로 북받쳐 오르는 어떤 격류에 휘말리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운명과 같은 것인지 모릅니다. 아마 그것이 바로 이름하여 운명이라 부르는 것일까요. 어머니와 저의 운명이 한줄기라고 하는 바로 그 운명 말이지요. 그 운명을 얘기하기 위해서 좀 더 저의 지난 시절들을 들추어 나가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p.26-28)

 

제게 돌아올 용기를 직접적으로 부어 준 것은 눈입니다.

홀시아버님이 돌아가시던 때의 눈, 그 눈의 아우성을 잊을 수 없습니다. 저는 현관 가득히 벗겨져 있는 문상객들의 구두를 차례로 정돈해 놓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눈을 들어을 때, 현관문 하나 가득히 새까맣게 떨어져 내리고 있는 눈을 보았습니다.

추운 엄동의 바람이 휘몰아치고, 그 사이로 눈은 내려오기에 고심하면서 비집을 틈이 없는 공간 속으로 새까맣게 내렸습니다. 저는 검은 치마저고리의 상복을 입고 구두 정리를 하던 그대로 허리를 굽힌 채 잠시 눈을 바라보았습니다. 어마, 눈이, 라고 뜻도 없이 중얼거리며 주저앉을 때, 고무신이 벗겨져 나간 채 버선발이 내려다보였습니다. 며칠 동안 갈아 신지못한 버선은 부엌 바닥에서 찐득한 때가 새까맣게 달라붙어 있었습니다.

급한 마음에 시댁으로 올 때 갈아 신을 버선을 가져오지 않은 탓이지요. 이상한 불행감이 저를 휩쌌습니다. 제 인생이 바로 이 버선 바닥처럼 더럽게 구겨져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p.33)

 

그는 사우디에서 몇 통인가의 엽서 - 햇빛이 너무 살인적이서 옆 건물에 잠시 갈 때 신문지를 머리에 펼치고 뛰노라면 우박 쏟아지듯 햇빛 쏟아지는 소리가 들린다 - 를 보내기도 했으며, 그곳에서의 임기를 마친 후 미국으로 건너가 재혼을 했고, 아이를 낳아 잘 살고 있다는 소식을 인편을 통해 들었습니다. 그는 제 운명의 역할을 충실히 해 준 저의 엑스트라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릅니다. 그는 음식이 마음에 맞지 않아 화르르 내고, 친척 집으로 가는 버스에서 눈을 샐쭉하게 내리떠야 하는 역을 맡은 것뿐인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말한다면 밥상을 깨부순다는 표현처럼 너무 과격한 것일까요.

저는 왜 저 자신을 밥상을 깨뜨린다고 생각하려 드는 것일까요.

어머니와 살면서 저녁밥 짓는 시간을 가장 아늑하고 보람되게 느끼면서....종종걸음으로 달려가 가까운 거리에 있는 시장에서 파를 한 단 사 올 때, 이런 아늑함이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 조바심 섞인 의구심마저 품으면서 말입니다. 집의 불빛이 창으로 보이면 저는 숨을 멈추듯 걸음을 멈추고 아, 하는 감회와 함께 다른 인생을 찾아 남의 인생을 살아 주기 위해 어디 멀리까지 헤매다가 이제 제 운명 속으로 돌아온 안도감을 느끼곤 했습니다. (p.36)

(같이 읽으면 좋은 책)

자기만의 방 - 버지니아 울프 (공경희 옮김, 열린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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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렵부터 어머니는 관절염으로 바깥출입을 전혀 못 하고 있었으므로 어머니와 제가 때로 외식을 하고 영화라도 구경하고 들어오는 작은 기쁨마저 생활에서 차단되어 있었습니다.

감자를 벗긴 후 볶음을 하려고 보니 면실유가 떨어져 있기에 손지갑을 챙겨 들고 동네 슈퍼마켓으로 향했지요. 현관문을 닫는데 어머니가 무어라 하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저는 왠지 심사가 사나워져서 못 들은 체 꽝 문을 닫아 버리고 말았습니다. 쾅 하고 닫히는 문소리에 제 마음속의 무엇인가가 쾅 하고 닫히는 듯 어떤 어둠이 일시에 몰려드는 느낌을 맛보았습니다. 그러나 한편, 쾅 하고 닫히는 그것은 이제까지의 제 생활이 쾅 닫혀 버리는, 어떤 새로움의 장을 기대해 보는 소망의 마음이 깃든 소리로도 느껴졌습니다. (p.39)

 

그 당시의 저는 어머니의 검버섯과도 같은 그 칙칙함, 무미건조함에 젖어 있었으니까요. 밥상 위의 것들을 말끔히 남기지 않고 비운 후 텔레비전 앞에 앉아 즐기는 그 즐거움이란 사실 내게 있어 허위가 아니었을까요.

아니, 이렇게 말한다면 정확한 표현이 아닙니다. 거기에도 일상의 아늑함은 확실히 있었습니다. 저는 그 일을 무엇보다 고마워했습니다. 이런 조용하고 아늑한 생활이언제까지 가려나 스스로 조바심마저 쳐졌으니까요. 그러면서 한편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등줄기로 진땀이 주르륵 흘러내리며 나보다 더 멀리, 나보다 더 창조적으로를 구호처럼 속으로 부르짖었습니다. 인생이란 것이 이런 식으로 이렇게 스치고 지나가 버리는 것인가 하고 허망한 심정이 자주 되었습니다.

이제 생각하면 그 당시의 저는 희망이 없는 노년과 같았다고 할까요. 칠순을 넘긴 저의 어머니와 같은 형편에 저를 몰아넣고는 이대로 목고살 최소한의 돈만 있으면 밖에 나가서 돈을 벌어 오지 않아도 되고, 현관문을 닫은 후 그 안의 생활에서만 진정한 아늑함을 찾으려 했던 것에는 확실히 무언가 무리가 있었습니다. (p.42)

 

그날 우리는 플라타너스 가로수 밑을 걸었습니다. 누군가 우리를 보아다면 저녁 후 산보 나온 부부로 보았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여름내 자란 플라타너스의 밑가지는 우리의 키보다 낮게 잎을 드리워 나무 밑을 지날 때마다 허리를 굽히는 행동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천천히 느릿느릿 걸으며 나뭇가지가 우리의 키보다 밑으로 내려올 때마다 허리를 붑히는 그 리듬은 일정하게 반복되었고, 우리는 그저 간간이 몸을 서로 스치기도 하며 걸었습니다.

당신과 저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된 것입니다.

그것이 첫 시작이었습니다. 그렇게 시작되어 어느새 3년이 지났습닏. 횟수로 따지면 불과 서른 번을 넘지 못한 것 같습니다. 만나는 일을 두 달이고 석 달이고 건너뛸 때도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그런 일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누군가 있다는 것과 없다는 것은 크나큰 차이지요. 오로지 그것이 중요하지요.

만나지 않아도 누군가 저기 어디 있다는 것만으로도 저의 생활은 달라지며 매일매일 노력하게 됩니다. 손지갑을 챙겨 들고 저녁에 시장에 나갈 때의 행동 하나만 보더라도 에전과 다릅니다. 감자를 벗기는 일, 빨래를 너는 일 하나에도.

그렇습니다. 당신이 말하는 나이 들어가는 여자의 떨림, 바로 그 떨림이 배어 있는 그런 표정과 행동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무언가 조심스럽고, 남자를 그리워하는 몸짓이란 그렇지 않은 행동과 전혀 다른 것입니다. (p.48-50)

 

논두렁길, 누런 벼 그리고 벼메두기의 빛깔, 이런 것이 정말로 아득하게 넘어가는 저편 하늘처럼 떠오릅니다. 이러한 비현실적인 실체감을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요. 이것이야말로 존재의 본질일까요. 제가 삼촌을 생각할 때 떠오르는 이 무엇, 형상도 실체도 거의 잡히지 않게 아스름하지만 그럼에도 더욱 뚜렷이 뭉쳐져 오는 이 실체감, 제가 삼촌을 생각할 때 느끼는 아련한 실체감과 당신을 떠오릴 때 느끼는 실체감은 거의 비슷합니다. 아무것도 잡히지 않으며 그러나 없는 것이 아닌, 거기에 두렷이 있는 바로 이것이 우리 모두의 존재일까요. (p.64)

 

당신을 얻게 되어 말할 수 없이 기쁘면서도 도대체 언제를 위해 지금을 살고 있는 것인가. 어린 시절부터 꿈꾸던 꿈의 시간은 바로 언제인 것인가. 사랑하는 사람을 얻은 지금인가. 그렇다면 나는 지금 꿈의 한가운데 들어와 있는 것이련만 아직도 어디로 가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은? 어린 시절 눈을 보면서 왠지 반가운 일이 이제 앞날에 올 것 같던, 그 앞날이 아직도 온 것 같지 않으며, 아직도 이제 앞날에 올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은 어쩐 일일까?

이런 의문을 당신에게 한 번 실토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언제를 위해서 사는 것일까 하고요. 그대 당신은, 어차피 사는 일은 하나의 준비 과정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명대답을 해 주셨습니다.

사는 일은 하나의 준비 과정, 정말 그런가 봅니다. 어딘가로 향해서 끝없이 나아가는 과정일 뿐입니다. (p.83)

 

그런데 왜 좀 더 사랑할 수 없는 것일까.

왜 이정도에서 그치고 마는가, 정말로 사랑한다는 것은 어떤 형태의 것일까, 그것 역시 준비 과정일 뿐일까, 정말 사랑하기 위한 준비 과정밖에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할 수 없는 것일까. 아니, 그라는 대상보다 나라는 존재의 문제가 우선이고 나는 거기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저는 이렇게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지요.

밀려드는 나른한 피곤감과 함께 또 한 번의 만남을 치러 냈다는 생각을 하며 저는 택시와 함께 당신을 뒤로하고 미끄러져 갑니다.

언제 언제까지일까? 저는 이렇게 중얼거립니다.

이것 또한 악마의 짓일까요. 모래시계 속에 인간을 가두어 버리는 악마의 짓일 거예요. (p.87)

 

이제 한 자도 더 쓸 수 없도록 피곤이 한꺼번에 밀려옵니다.

저는 조금 눈을 붙여 한숨 자고 일어나서 아침을 지어야겠습니다.

그때 일어나서 들창을 열고 눈의 세계를 아주 새로운 눈으로 보고 싶습니다. (p.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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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이해>

<겨울의 환>은 나와 어머니, 할머니로 이어지는 여성 일생의 연대기적 삶을 통해 여성이란 무엇인가를 다룬다. 독백으로 시작되는 이 작품은 결혼 6년 만에 이혼하고 친정어머니와 단둘이 사는 여성의 고백이다. 화자는 어린 시절부터 어른이 되어 결혼과 이혼을 하고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담하게 들려준다. 마흔이 되어서야 비로소 여성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의문을 갖고 여성의 성과 평등에 대해 다시금 곱씹는다. 부제 '밥상을 차리는 여인'에도 나타나듯 여성은 단지 밥상을 차리는 사람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밥상에서 멀어진 여성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여성으로 늙어 간다는 것은 단지 소멸해 가는 것이 아니라 여성으로서 다시 태어나는 일이며 '떨림'과 같이 삶의 활력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한다.

<겨울의 환>은 김채원의 한국 전쟁 체험과 어린 시절의 체험을 바탕으로 운명의 끈으로 묶여 있는 여성 삶의 가능성을 들여다보며 섬세하게 여성 정체성을 다루었다는 데 문학사적 의의를 지닌다. 자전적 고백체를 통해 독특한 심리 구조 속에서 새롭게 작품의 공간을 창조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p.178-179)

(같이 읽으면 좋은 책)

사양 - 다자이 오사무 (김난주 옮김, 열린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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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채원(金采原, 1946년 12월 13일 ~ )

대한민국의 소설가이다

1946년 경기도 남양주 덕소 출생이다. 시인 김동환과 소설가 최정희의 막내딸이다.

1968년 이화여자대학교 회화과를 학사 졸업했다.
1972년 일본 동경 한국초중고등학교 미술교사를 하였으며 1974년 <먼바다>로 현대문학지에 황순원의 초회 추천을 받았다.
1975년 언니 김지원이 있는 미국 뉴욕 아트스튜던트리그에서 수업하였고 <밤인사>로 추천 완료 등단하였으며 1976년 프랑스 파리에 유학하였고 1978년 귀국하였다.
1989년 <겨울의 환>으로 이상문학상 수상
2016년 <베를린 필>로 현대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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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의 환 - 김채원 (문학사상사)

겨울의 환 - 김채원 (창비)

미친 사랑의 노래 - 김채원 (작가정신)

봄의 환 - 김채원 (미학사)

달의 몰락 - 김채원 (청아출판사)

베를린 필 - 김채원 (현대문학)

쪽배의 노래 - 김채원 (문학동네)

지붕밑의 바이올린 - 김채원 (현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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