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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
VII. 아동, 청소년/1. 한국 문학

가리봉 연가 - 공선옥 (한국헤르만헤세)

by handaikhan 2023. 6. 8.

큰 한국문학 413 (94권)

 

목차

 

공선옥

가리봉 연가

남쪽 바다 푸른 나라

 

권여선

반죽의 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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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선옥 - 가리봉 연가 (2005년)

 

명화는 눈을 떴다. 사방이 꽉 막힌 데다가 빛이 들어오는 곳이라고는 출입문 위에 끼워진 손바닥만 한 반투명 유리뿐이라서 시간을 가늠하긴 힘들다. 그나마 그 출입문조차도 이쪽 방과 저쪽 방 사이에 놓인 좁다란 복도로 나 있어서 명화가 묵는 이 방에 햇빛이 들 날은 없다. 명화는 눈을 뜨자마자 반사적으로 휴대폰부터 찾는다. 사실, 그 휴대폰이야말로 명화의 목숨줄이나 다름없다. 잠을 자면서도 명화는 휴대폰을 손에 쥐고 잠드는 버릇이 있다. 언제라도 벨이 울리면 명화는 반사적으로 눈이 떠진다. 명화는 이곳, 가리봉동 조선족의 노래방들에서는 거의 가수로 통했다. 밤이면 이 노래방 저 노래방에서 명화에게 연락이 왔다. 노래방뿐만이 아니었다. 이따금 '소라'나 '민들레'에서도 휴대폰을 통해 아르바이트 제의가 드러오고는 했다. 그러니 명화에게 휴대폰은 없어서는 안 될 생계 수단이 되어 주고 있는 것이다. 휴대폰에 새겨진 시간은 오전 10시다. 밤에만 불기가 들어오는 이 여인숙은 이 시간쯤이면 벌써 방바닥의 온기가 거의 사라진다. (p.9-11)

 

경수는 말했다.

아버지는 술을 너무 많이 마셔요. 그래서 간이 탈 나 버린 거예요. 어머니요? 아버지 땜에 농약 마셔 버렸어요. 제초제요. 아버지와 어머니는 희망이 없었던 거예요. 삶에 대한 희망이요. 저요? 안 죽으려면 서울로 가야죠. 아저씨, 그거 알아요? 여긴요. 죽음의 땅이에요. 왜냐면, 나라에서 돌봐 주지 않잖아요. 킬링필드라고 아시죠. 바로 그거라고요. 죽지 못해 사니까 죽은 거나 마찬가지잖아요. 여긴 맨날 그런 사람들만 산다고요. (p.20)

 

경수를 만나고 온 그때도 물론 한은 기고하는 어떤 매체에도 경수에 대한 이야기는 쓰지 못했다. 경수의 슬픈 사진을 세상에 내놓지 못했다. 한의 카메라 렌즈에 잡힌 무수한 슬픈 얼굴들과 한가지로, 경수의 슬픈 얼굴도 끝내 인화되지 못한 필름 속에 갇혀 있을 뿐이다. 그때 경수는 한에게,

"아저씨, 책에 사진 나오면 보내 주실 건가요?"

하고 수줍게 물었다. 한은 기꺼이 그러마고 했다. 그때가 아마 한의 나이 지금 경수만 할 때였던 것 같다. 세월은 정말 무지막지하게 흘러간다. 그리고 세월이 가는 만큼, 세상의 슬픈 얼굴은 새로운 슬픈 얼굴들로 대체되어 끊임없이 존재하고 그 슬픈 얼굴들은 또 끊임없이 한에게 묻는다. 사진 보내 주실 건가요?

그런데 어쩌자고 한은 그 사진들을 한 번도 그 사진 주인들에게 보내 주지 못했을까. 그리하여 '순 공갈배 사진사'가 될 수밖에 없었을가. (p.20-21)

 

여전히 미순의 눈치를 보는 품이, 한의 눈에 그리 보기 싫지는 않다. 아니, 남편은 눈치 주지 않는 아내 눈치를 보고 그 아내는 또 눈치 주지 않으면서 눈치를 주는 척하는 품들이 오히려 행복해 보이는 것이 한에게는 여간 다행스러워 보이지 않는다. 가난 때문에 가정이 파괴되는 모습을 무수히 보아 온 한이었다. 가난은 사람을 황폐하게 만들기도 하고 난폭하게 만들기도 하고 무기력하게 만들기도 했다. 가난은 다양한 형태로 사람들의 삶을 무너뜨렸다. 가난한 사람들이 그들의 가정을 지켜 낼 수 있는 마지막 무기는 사랑뿐이었다. 그 사랑이 경수 부부에게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이냐. 부자들의 사랑보다 가난한 사람들의 사랑이 한에게는 그래서 더 눈물 나는 사랑이다. 돈도 받쳐 주지 못하는 것을 사랑이 받쳐 주지 않는가. 가난한 사랑이. (p.27)

 

내도 중국에서 왔지만 중국 사람들 돈밖에 모릅네다. 한국에서는 우리 중국 사람들 다 내쫓을라 하지만 한번 중국 떠난 ㅅ하람 다시는 중국에 안 갑네다. 자고로 똥파리도 똥 있는 데 꼬여 들 듯이 사람은 밥 있는 데로 꼬여 드는 것이 인지상정 아니겠습네까? 한번 고향 떠난 한국 사람들 다시는 고향에 안 가는 이치와 같은 겁네다. 돈 없는 고향 왜 갑네까. 가면 앞날이 보이지 않는 고향은 고저 심정 안에 고향일 뿐입네다. 피죽을 먹어도 돈 있는 땅에서 먹는 게 좋습네다. 먹고살기 어려워 돈 찾아 고향 떠난 사람은 절대로 고향 안 가요. (p.41)

 

"거 뭣이냐, 나는 지난번 텔레비전에 나와서 외국인 노동자가 어떻고, 인권이 어떻고 해 쌓던 목사, 교수들 말 듣고 분개까지 했다니까. 뭐? 핍박? 돈 없으면 인간 대접 못 받는 건 당연한 것 아녀? 어이, 김 사장, 삼십 년 전에 우리 막 서울 와서는 어쨌어. 자국민 핍박받을 때는 암 소리 안 하고 있다가 외국인들 인권이 어쩌네, 야만이네, 하여간 배운 인간들 하는 짓거릴란 이제나 저제나 맘에 안 들드만 이?"

"우리가 이렇게 말하면 또 유식한 인간들이 뭐라 그런 줄 알아? 자국민 이기주의라나, 뭐라나. 우리같이 못사는 자국민이 얼마나 많은데 그럼, 자국민 이기주의 해야지 안 해?" (p.44)

 

"형도 글을 쓰려거든 현실이 어떻다는 걸 확실히 아셔야 해요. 맨날 착한 척만 하지 마시고요. 저는 그러니까, 여자가 아니라, 현실을 보여 주고 싶은 거예요." (p.51)

 

"하, 한국 사람이라고 외, 외롭지 않은지 아요?"

"한국 사람은 왜 외롭답니까?"

"그, 그야 뭐, 도, 돈 없고, 짜, 짝 없으니 외롭지요, 뭐."

기석도 용철이 말투를 닮아 간다.

"한국 사람은 왜 돈 없습니까?"

"배, 배운 거 없으니 그렇지요 뭐."

"맞아요. 지식 없으면 어디서나 돈 벌기 힘들어요. 나는 열네 살에 아버지 죽고 열다섯에 농사를 지었다 아닙니까. 어머니, 누나, 형 있고 형이랑 형수는 안산, 오이도에 안 있습니까. 내 고향은 흑룡강 해림시 신향 강북촌입니다. 해운 학교 육 개월 필업하고 한국 상선 일 년 반 탔다 아닙니까. 그때 그냥 육십만 원 그대로 받고서 그길로 한결같이 매진하지 못한 내 경솔한 처신에 대하여 지금은 엄청 후회한다 아닙니까. 이게 다 내가 한때 옳지 못한 마음을 먹어 그리된 것이긴 한데...." (p.54)

 

허승희, 아니 장명화는 그날 밤, 도저히 더 이상 노래방 일을 할 수가 없어서 두 사람의 한국 남자가 놀러 온 자리에서 <슬픈 노래는 부르지 않을 거야>, <첨밀밀>, <야래향>, 세 곡 정도만 뽑고 나서 그만 핸드폰을 꺼 버렸다. 몸도 안 좋은 데다가 아무래도 복래 반점에서 술을 마시고 일을 했던 게 화를 더 자초한 것 같았다. 숙소인 신도 여인숙으로 서둘러 걸어가고 있는데 자꾸 발걸음이 헛디뎌지면서 눈앞이 아득해졌다. 그래서 잠시 쉬어 갈 짬으로 신도 여인숙 간판이 보이는 골목 입구에 몸을 부렸다. 그러고 있자니 갑자기 눈물이 났다. 사람이 가장 서러울 때가 몸 아플 때라더니, 눈물이 절로 샘솟았다. 눈물 속에서 기석이가 생각났다. 정을 주지 않고 살았으므로 천 년이 가도 생각 같은 건 나지 않을 줄 알았던 전라도 가난뱅이 기석이의 삐쭉한 얼굴이 눈물 속에 잠깐 보였다 사라졌다. 승애는 돈을 좇아 내 여기까지 왔노라며, 슬피 울었다. 나는 무얼 찾아 여기까지 오게 되었을까. 결국 가난이 나를 여기까지 오게 했지, 가난이. 용철이와 낳은 향미 얼굴인지 기석이 조카 숙희 얼굴인지 알 수 없는 게집애의 얼굴들이 잠깐씩 떠올랐다 사라졌다. 목을 빼고 돈을 기다리고 있을 고향의 부모가, 그 부모와 살았던 제 고향 해림의 흙바람 일던 골목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p.58)

 

<작품 이해>

<가리봉 연가>는 <<유랑 가족>>이라는 연작 소설집에 실려 있는 작품이다. 소설집의 제목이 말해 주듯 <유랑 가족>에는 이 땅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고 떠도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가리봉 연가>의 주인공 명화만 해도 그렇다. 중국 흑룡강 해림에서 온 조선족 출신 명화는 농촌으로 시집왔다가 가출하여 가리봉동의 노래방을 전전하는 신세가 된다. 이혼하고 딸까지 있는 명화는 가난한 가족들을 위하여, 간암에 걸린 오빠 병을 낫게 하기 위해서 처녀라고 속이고 기석과 결혼하지만 가난을 벗어나지 못한다. 야반도주하다시피 농촌을 떠나 가리봉동에 온 그녀는 싸구려 여인숙에 하룻밤을 의탁하는 힘겨운 삶을 이어 가다 괴한의 칼에 찔려 죽고 만다. 이 작품은 명화를 중심으로 그녀의 전 남편 용철, 노동일을 하게 되는 기석, 중국에서 돈 벌러 온 승애 등 이 땅을 떠도는 가난한 군상들의 모습을 실감 나게 보여 주고 있다. (p.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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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선옥 (1963 - )

대한민국 소설가.

1963년 전라남도 곡성 출생. 전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중퇴하고 1991년 「창작과 비평」 겨울호에 중편 '씨앗불'을 발표하며 작가로 활동을 시작하였다. 1992년 여성신문학상, 1995년 제13회 신동엽창작기금수여, 2004년 제36회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2005 제2회 올해의 예술상 문학부문 올해의 예술상, 만해문학상, 요산김정한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우리 사회의 소외된 이웃의 모습과 가난의 문제를 현실적으로 다뤄온 작가 공선옥. 특히 여성들의 끈질긴 생명력과 모성을 생동감 넘치는 언어로 표현해 내는 소설가이다.
"근대에 태어났지만 전근대적인 삶을 살았다"고 전하는 작가의 음성은 유년시절 아버지는 밖으로 나돌고, 세 자매가 생존을 위해 뛰어야 했던 상황에서 둘째 딸의 책무를 지닌 채 "같은 연배 또래들이라고 해서 같은 시대를 사는 것은 아님"을 깨닫는다. 참외 파는 소녀이기도 했으며, 입학만 한 상태에서 무학점 학생으로 남아야 했고, 빚에 쫓겨 다니는 아버지, 몸이 불편한 어머니의 병간호가 작가 공선옥에게 주어진 삶의 조건이었다.
공장을 떠돌며 위장 취업자가 아닌, 대학생 출신 생계 취업자였으며, 나중에는 고속버스, 관광버스, 직행버스를 전전하며 안내양을 하던 어느 날 “나의 궁핍한 시절이 글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떠올리며 작가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소설가 공선옥은 작품 활동을 시작한 이후, 「목마른 계절」 「우리 생애의 꽃」 등 개성있는 작품을 잇따라 발표하며 가진 자에게는 눈물의 슬픔을, 없는 사람들에게는 희망의 기쁨을 안겨 주는 작가이다.
화려한 정원에서 보호받고 주목받는 꽃보다는 눈에 잘 띄지 않는 바람 부는 길가에서 피었다 지는 작은 꽃들에게 눈길을 보내온 작가는 작품 속에서 주로 우리 사회의 소외된 이웃들의 삶, 특히 여성들의 끈질긴 생명력과 모성을 섬세하면서도 생동감 넘치는 언어로 담아내고 있다. 2002년 『멋진 한세상』이후 5년만에 내놓은 소설집 『명랑한 밤길』역시 그녀의 작품 경향을 그대로 보여준다. 이 소설집 역시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세상의 중심이 아닌 변방에서 버둥거리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는 국내 최초로 온라인 독자 커뮤니티 문학동네에 일일연재되어, 화제를 모았으며, 가장 아픈 시대를 가장 예쁘게 살아내야 했던 젊은이들의 고뇌를 생생하게 그려내었다. 스무 살 시기의, ‘사람들이 많이 죽어간 한 도시’에서의 쓸쓸함과 달콤함에 관한 이야기이다. 『영란』에서는 가족의 빈자리를 견디며 꿋꿋이 살아가야 하는 인물들을 중심으로 그들이 일궈낼 수 있는 삶의 행복한 순간을 유려하고 따뜻하게 그려냈으며, 『꽃 같은 시절』은 삶의 터전을 위협받는 사람들, 철저하게 이 사회의 '약자'로 살아가고 있는 그들의 꽃 같은 싸움을 담고 있다.
소설집 『피어라 수선화』, 『내 생의 알리바이』, 『멋진 한세상』, 『명랑한 밤길』, 『나는 죽지 않겠다』, 장편소설 『유랑가족』,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영란』, 『꽃 같은 시절』, 『그 노래는 어디서 왔을까』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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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 가족 - 공선옥 (실천문학사)

명랑한 밤길 - 공선옥 (창비)

내가 가장 예뻤을 때 - 공선옥 (문학동네)

영란 - 공선옥 (웅진 뿔)

목마른 계절 - 공선옥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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