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책의 향기
VII. 아동, 청소년/1. 한국 문학

어두운 기억의 저편 - 이균영 (한국헤르만헤세)

by handaikhan 2023. 6. 5.

큰 한국문학 413 (80)

 

목차

 

신상웅

돌아온 우리의 친구

끝없는 곡예

 

이균영

어두운 기억의 저편

 

.........................................

이균영 - 어두운 기억의 저편

 

눈을 뜨자 그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벽을 더듬거려 겨우 문 옆에 붙은 스위치를 찾아냈다.

희미한 백열등이 켜졌다. 그곳은 장식이 없는 작고 낯선 방이었다.

지독한 두통과 함께 응급 환자와 같은 목마름이 그를 덮쳤다. 잠자리의 머리맡엔 주전자가 있었다. 컵이 있었으나 그는 허겁지겁 꼭지에다 입을 붙이고 두통과 목마름을 다스렸다. 머리는 여전히 지끈거렸다. 어느 때와는 모든 것이 달랐다. (p.70)

 

나비 리본은 생각을 굴려 보는 듯했다. 그는 짧은 시간을 오래오래 기다렸다. 산다는 건 어차피 기다리는 것이니까. (p.97)

 

이문동의 '박 치과', 그곳에는 혜수가 있다. 그렇다! 그는 어젯밤 박 치과로 혜수를 찾아간 것이다. 그는 이제 그 사실을 확신하였다.

이십수 년이 넘은, 그가 까마득하게 잊어버렸던 일을 어젯밤 그는 잊지 않고 있었다. 그는 이미 기억하기도 어려운 일을 찾아 나섰던 것이다. 생채기엔 새살이 돋고 이제 휴터도 남지 않았던 평온한 외모와 단조로운 일상의 내부가, 아, 술기운에 곪은 균들을 노출하고 말았다. 그는 자신이 알지 못하였던 여러 개의 자신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다. 하나의 존재도, 하나의 결론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제 그는 겨우 가방 때문에 많은 그의 존재 중 하나라를 만나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유리잔에 위스키를 진하게 섞어 마셨다. 세 잔을 거푸 마쳤다. 사위가 고요한 밤에 혼자 마시는 독한 술은 복받치는 설움을, 혹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욕망을, 사랑을 잔잔하게 만나게 해 줄 수 있다고 그는 생각하였던 것이다. (p.131)

 

그 고아원에서 혜수와 함께 지낸 것은 어림잡아 2년 정도의 기간이었다. 혜수는 그의 여동생이었다. 혜수는 그의 누나였는지도, 그렇지 않으면 쌍둥이일 수도 있었다. 얼굴은 기억되지 않지만 이름은 헤수였다.

박혜수라는 이름이 원래 혜수가 가지고 있던 이름인지 고아원의 누군가가 붙여 준 이름인지 아무도 알 수가 없다. 그때가 몇 살 이었을가. 그것도 역시 알 수 없는 일이다. 그가 그의 나이를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것과 꼭 같은 이유로 혜수도 그때 몇 살이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혜수와 그가 고아원에 맡겨진 것은 세 살이나 네 살 때로 생각되었다. 많은 아이들을 취급하는 고아원 사람들의 눈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6.25의 소용돌이 속에서 정확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낡은 필름에서 끊겨져 나온 듯한 희미한 기억 몇 편이 그가 겪은 전쟁의 전부였다. 엄마는 - 실상 그는 그녀가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얼굴도 모습도 모른다. 이름도 어디에 사는지도 알지 못한다. 그녀는 700만 피난민 중의 한 여자였다 - 그의 손을 잡고 한 계집 아이를 둘러업고 걸었다. 그를 업고 계집아이를 걸리기도 했다.

사람들의 행렬과 아우성, 잠자리 같은 비행기, 연기와 불길, 총소리, 추위, 아이들의 울음소리, 배고픔...이런 것이 기억의 전부였다. 그 기억은 그가 겪은 기억인지 혹은 책이나 영화로 본 십만이나 되는 전쟁고아들의 실상이 그의 것으로 변한 기억인지는 그 스스로도 정확하게 알 수 없었다.

엄마는 죽었다고 그는 단정했다. 손을 잡고 가던 엄마가 사람들 사이에서 편하게 누워 버렸다. 젖가슴을 찾던 그의 손에 묻어나던 선명한 피. 무엇인가 애타게 부르짖던 엄마의 마지막 목소리.

엄마가 마지막 하려고 했던 말은 손을 놓지 말라는 소리였다고 그는 믿었다. 그 계집아이, 그의 여동생인지 누나인지 쌍둥이인지 알지 못하는 그 게집아이가 혜수였다. 엄마는 혜수와 그가 손을 잡고 있어야 한다고 말했던 것이다. 그는 믿었다.

이 넓은 세상에 혼자 남으면 외로워서 못 산다. 손을 잡아라. 죽어도 헤어져서는 안 된다. 둘이서 손을 잡고 살아라.

어머니를 생각할 때마다 그는 어머니의 마지막 말을 생각하였다. 어머니가 긇게 말하지 않은 것인지도 모르며 어머니는 처음부터 그의 기억에 없는 존재인지도 모르지만 어머니의 마지막 말은 그에게 지울수 없는 것이 되었다. 커서는 자기 암시라는 말을 생각하기도 하였다. 모든 걸 따져 생각한다면 헤수가 그와 형제라는 사실조차 우스운 것이었다. 처음 고아원의 생활에 대해서 그가 기억하는 것은 피난길의 기억과 같은 것이었다. 다만 혜수에 대한 기억은 언제나 밝고 정확했다. 헤수는 그를 오빠라고 불렀다. 그리고 고아원 안에서는 혜수와 그가 형제라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늘 배가 고픈 철부지였을 때에도 그의 몫을 혼자 먹지 못했다. 혜수는에뻤다. 고아원의 아이들이 모두 혜수는 예쁘다고 했다. 우리 동생이니까 하고 그는 뽐냈다. 혜수가 예쁘기 때문에 그가 겪어야 했던 고통은 컸다. (p.131-133)

 

어머니는 몽유병 환자였다. 과거 속에서 살았다. 그녀에게 유일한 현실은 그였다. 그녀가 고아원에서 그를 데려온 것은 과거의 환각에 현실을 가져온 것과 다름이 없었다. 어머니를 따라 국립묘지에 가 보았다. 어머니는 거기에만 가면 하루를 그곳에서 보냈다. 하루 종일 묘비를 어루만졌다. 그는 혼자서 이곳저곳 구경을 다녔다. 그는 다음과 같은 묘비명을 보았다.

'보고 싶은 내 아들 불러도 대답이 없구나. 비 오는 날이나 바람 부는 밤이면 갈 곳 없어 이리저리 헤매지나 않느냐. 죽어도 에미 가슴엔 살아 있구나.'

그는 또 이런 묘비명도 보았다.

'사람이 한 번 죽는데 너는 큰 죽음을 하였다. 우리는 널 따라 떳떳하게 살다 만나리. - 아버지, 어머니, 형들과 누나-'

그는 아디 이런 묘비명을 보았다.

"아빠, 안녕. 안녕."

그는 묘비명 앞에서 우는 사람들을 보았다. 무엇인가 묘비를 향해 말하는 사람들을 보았다. 꽃을 꽂는 사람들을 보았다. 술을 붓는 사람들을 보았다. 어머니는 울지도 말하지도 않았다. 그녀의 슬픔은 그녀의 육비에 새겨진 것이었다.

그는 그 모든 것을 감동 없는 무성 영화를 보듯 보았다. 다만 하루 종일 앉아 있던 어머니가 일어서는 해 질 무렵, 그곳을 나오며 돌아보는 묘지의 정확한 질서가 그를 슬프게 하였다. 어머니가 세 아들이 있던 전쟁 전의 과거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만 그에게는 그러한 과거는 없었다. (p.143-144)

 

......................................................................................................................................................................................................................................................

이균영(李均永, 1951년 12월 30일 ~ 1996년 11월 21일)

대한민국의 소설가이자 역사가.

전남 광양에서 출생하였고, 경복고등학교와 한양대학교 역사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동덕여대 국사학과 교수를 역임하였다.
소설가로 비교적 잘 알려져 있으나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에서 활동하는 등 진보적 활동에도 앞장섰으며[1], 역사가로서도 일제 강점기 신간회와 지역사 연구, 그리고 한국 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연구 성과를 남겼다. 특히 《신간회 연구》(역사비평사, 1993)는 신간회에 대한 첫 단독 연구서로서 제8회 단재학술상을 받기도 했다. 《신간회 연구》 발표 이후 다시 소설을 준비하고 있었던 이균영은 1996년 11월 21일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2] 그 중에는 근현대사 전반을 다룬 십 수 권짜리 장편소설도 있었으나 결국 완성되지 못했다.

197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바람난 도시〉가 당선되어 소설가로 등단하였다. 주요 작품으로 《어두운 기억의 저편》,《풍화 작용》,《북망의 그늘》,《멀리 있는 빛》 등이 있다. 일상적 삶 속에서의 사물을 감각적으로 반영하면서 독특한 시적 분위기를 자아내는 작품세계를 보였다. 1984년에 〈어두운 기억의 저편〉으로 제8회 이상문학상을 수상했다.

 

...........................................

어두운 기억의 저편 - 이균영 (문학사상사)

어두운 기억의 저편 - 이균영 (창비)

바람과 도시 - 이균영 (책세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