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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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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핍한 날의 벗 - 박제가 (안대회 옮김, 태학사) 태학 산문서 1 궁핍한 날의 벗 - 박제가 천하에서 가장 친밀한 벗으로는 곤궁할 때 사귄 벗을 말하고, 우정의 깊이를 가장 잘 드러낸 것으로는 가난을 상의한 일을 꼽습니다. 아! 청운에 높이 오른 선비가 가난한 선비 집을 수레 타고 찾은 일도 있고, 포의의 선비가 고관대작의 집을 소매 자락 끌며 드나든 일이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절실하게 벗을 찾아다니지만 마음 맞는 친구를 얻기는 어려우니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벗이란 술잔을 건네며 도타운 정을 나누는 사람이나, 손을 부여잡고 무릎을 가까이하여 앉은 자를 의미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 벗이 있고,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이 있으나 저도 모르게 저절로 입 밖으로 튀어 나오는 벗이 있습니다. 이 두 부류의 벗.. 2023. 9. 12.
길위의 집 - 이혜경 (민음사) 오늘의 작가 총서 18 이혜경 - 길위의 집 (1995년) 낯선 진동음이 은용의 몸을 들까부른다. 은용은 우무처럼 점성이 강한 공기에 갇혀 있어서, 진동은 제 파장을 한 번 굴절시킨 다음에야 전달된다. 은용은 팔을 헤집어, 끈덕지게 들러붙는 공기층을 걷어낸다. 저 소리, 저 소리가 나를 부르는 소리지. 그런데 공기가 왜 이리 끈적거리지? 이걸 어떻게 걷어내지? 은용은 허우적거리다 눈을 번쩍 뜬다. "아가씨, 아가씨, 전화 받아요." 입 밖에 나오지 못한 외침을 흡, 삼키며 은용은 눈을 떴다. 흐릿한 빛살 아래 올케의 얼굴이 대각선으로 비쳤다. 고개를 들며 몸을 일으키자, 쪼그리고 앉은 올케가 제대로 보였다. 은용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쳐들었다. 링거 방울은 여전히 무덤덤하게 떨어지고 있었다. 그새 잠들었던.. 2023. 9. 7.
마음 - 나쓰메 소세키 (송태욱 옮김, 현암사)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전집 (12) 나쓰메 소세키 - 마음 (194년) 나는 그분을 늘 선생님이라 불렀다. 그러니 여기서도 그냥 선생님이라고만 쓰고 본명을 밝히지는 않겠다. 이는 세상 사람들을 의식해서 삼간다기보다 나로서는 그렇게 부르는 게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나는 그분을 떠올릴 때마다 바로 '선생님'이라고 부르고 싶어진다. 글을 쓸 때도 그런 마음은 같다. 어색한 이니셜 따위는 도무지 쓸 마음이 들지 않는다. (p.16) "나는 나 자신조차 믿지 못하네. 말하자면 자신을 믿지 못하니까 남들도 믿을 수 없게 된 거지. 자신을 저주하는 것 외에 달리 방법이 없는 거네." "그렇게 어렵게 생각하면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요." "아니.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니네. 그렇게 해버린 거지. 그렇게 하고.. 2023. 8. 31.
사기 교양 강의 - 한자오치 (이인호 옮김, 돌베개) 한자오치 - 사기 교양 강의 1. 진 시황제 여불위는 재산을 털어 자초에게 투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여불위 덕분에 자초는 안국군의 태자가 되었습니다. 이와 함께 여불위는 자신의 씨앗을 잉태한 애첩을 자초에게 진상했고, 자초는 이 애첩을 무척 사랑하게 됩니다. 자초와 애첩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 훗날의 진 시황제입니다. 그렇다면 진 시황제는 여불위의 자식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사마천이 이런 이야기를 정말 그럴 듯하게 구체적으로 여불위열전에 기록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잔인하게, 동쪽 여섯 제후국을 멸해 천하를 통일하고, 이어서 폭압적으로 통치했던 진 시황제에 대해 불만스러운 감정을 어느 정도 드러내고 싶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이런 이야기를 날조하는 사람은 전형적인 '아큐 정신'을 가진 사람이겠지요. .. 2023. 8. 30.
한비자 - 왕굉빈 (황효순 옮김, 베이직북스) 한비자 - 왕굉빈 (황효순 옮김, 베이직북스) 인성이 악한 것은 후에 교화를 통하여 악한 본성을 선한 성품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 - 화성기위 사람의 악한 품성이 선하게 변화하는 것은 선한 행위를 꾸준히 연습하는 등 후천적인 노력이 차곡차곡 쌓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한비는 순자의 성악설을 계승하고 발전시켰다. 그는 사회의 현실적인 관계들에서 출발하여 인성은 모두 '이익을 탐하는 악한 성품이 잠재하며' 모두가 명예와 실리를 추구하려고 한다고 주장했다. (같이 읽으면 좋은 책) 순자 - 김학주 (을유문화사) ............................................... 법가의 학설은 상앙이 중시했던 법 (신하와 백성이 준수해야 하는 것), 신불해가 중시했던 술 (신화와 백성을 다루는 .. 2023. 8. 23.
자치통감을 읽다 - 장펑 (김영문 옮김, 37) 장펑 - 자치통감을 읽다 子曰 苟正其身矣 於從政乎何有 不能正其身 如正人何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자신의 몸을 바로잡았다면 정치를 함에 무슨 어려움이 있겠느냐? 자신의 몸도 바로잡을 수 없으면서 어떻게 남을 바로잡겠느냐? 대학의 도는 밝은 덕을 밝히는 데 있고, 백성을 새롭게 하는 데 있으며, 지극한 선에서 그치는 데 있다. 그칠 곳을 안 이후에 마음이 정해지고, 마음이 정해진 이후에 고요할 수 있고, 고요해진 이후에 편안할 수 있고, 편안해진 이후에 생각할 수 있고, 생각한 이후에 얻을 수 있다. 사물에는 근본과 말단이 있고, 일에는 끝과 시작이 있다. 그 선후를 알면 도에 가까워진다. 옛날에 밝은 덕을 천하에 밝히려는 사람은 먼저 자신의 나라를 잘 다스렸고, 자신의 나라를 잘 다스리려는 사람은 먼저 그.. 2023. 8. 17.
공자 인생강의 - 바오펑산 (하병준 옮김, 시공사) 바오펑산 - 공자 인생강의 목차 제1장 지우학 - 十有五而志于學 : 학문에 뜻을 두다 제2장 이립 - 三十而立 : 인생 목표를 수립하다 제3장 불혹 - 四十二不惑 : 흔들림 없는 주관으로 세상을 판단하다 제4장 지천명 五十而知天命 : 하늘의 뜻을 깨닫고 실천하다 제5장 이순 - 六十而耳順 : 모든 말을 객관적으로 이해하다 제6장 종심소욕불유구 - 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 : 마음 가는 대로 해도 어긋남이 없다 ................................................................. 제1장 지우학 - 十有五而志于學 : 학문에 뜻을 두다 子曰. 吾十有五而志於學 내 나이 열다섯 살 때, 나는 학문에 뜻을 두었다. 공자의 배움이란 첫째는 호구지책을 위한 배움입니다. 먹고살.. 2023. 8. 16.
닥터 지바고 -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이동현 옮김, 동서문화사)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 닥터 지바고 (1957년) 을 부르며 장례 행렬이 이어졌다. 잠시 노랫소리가 멎으면 장례에 참가한 사람들 발자국소리, 말발굽소리, 그리고 때때로 불어오는 바람 소리가 노래를 이어받은 것처럼 느껴져왔다. 지나가던 사람들은 길을 비켜주며 화환의 수를 헤아리고는 성호를 그었다. 호기심 많은 몇 사람이 행렬에 끼어들며 물었다. "어느 분의 장례입니까?" "지바고입니다." 장송속을 부르던 사람이 대답했다. "그렇군요. 그분이 돌아가셨군요." 아닙니다. 그분이 아니라 마님이십니다." "어쨌거나 그분의 명복을 빕니다. 참 성대한 장레식이군요." 두 번 다시 되돌릴 수 없는 마지막 순간이 찾아왔다. "이 세상과, 그 안에 가득한 것이 모두 야훼의 것, 이 땅과, 그 위에 사는 것이 모두 야훼의 .. 2023. 8. 11.
배드민턴 치는 여자 - 신경숙 (문학과지성사) 신경숙 - 배드민턴 치는 여자 (1992년) 그녀는 의자 위에서 몸을 약간 기울어지게 해본다. 처음엔 그녀 혼자 창 쪽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거기 앉아 있었다. 그러다가 빗소리와 함께 차차 그가 느껴졌다. 아니다. 그렇게 늦게는 아니다. 그녀는 새벽녘이 다 되어 겨우 잠이 들었었다. 그 잠을 아침까지 잇지 못하고 동이 트기도 전에 다시 눈이 떠졌을 때, 그때도 그의 얼굴이 바로 눈앞에서 그녀를 그윽히 내려다보았었다. 이제 일어났니? 그는 가만 웃는 것도 같았다. 마치 그녀가 잠 깨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그녀는 그 환영을 외면하기 위해 눈을 질끈 감았고, 그래서 그는 잠시 사라진 듯했다. 그러나 사라진 게 아니라 그가 먼저 창가의 의자로 가 앉아 있었을까? 맨 먼저 눈을 뜨자마자 그의 얼굴을 생각해내고.. 2023. 8. 9.
풍금이 있던 자리 - 신경숙 (문학과지성사) 신경숙 - 풍금이 있던 자리 (1992년) 어느 동물원에서 있었던 일이다. 한 마리의 수컷 공작새가 아주 어려서부터 코끼리거북과 철망 담을 사이에 두고 살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 주고받는 언어가 다르고 몸집과 생김새들도 너무 다르기 때문에 쉽게 친해질 수 있는 사이가 아니었다. 어느덧 수공작새는 다 자라 짝짓기를 할 만큼 되었다. 암컷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서는 그 멋진 날개를 펼쳐보여야만 하는데 이 공작새는 암컷 앞에서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는 엉뚱하게도 코끼리거북 앞에서 그 우아한 날갯짓을 했다. 이 수공작새는 한평생 코끼리거북을 상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했다....알에서 갓 깨어난 오리는 대략 12-17시간이 가장 민감하다. 오리는 이 시기에 본 것을 평생 잊지 않는다. - 박시.. 2023. 8.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