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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

III. 고전 문학 (서양)126

죄와 벌 - 도스토예프스키 (오병택 옮김, 삼성당) 도스토예프스키 - 죄와 벌 (1866년) 찌는 듯한 더위가 계속되는 7월 초순 어느 날, C 골목의 전셋집에 세들어 사는 한 청년이 저녁 무렵의 거리를 살피며 천천히 K 다리 쪽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그는 다행히 층계에서 그 집 안주인과 마주치지 않았다. 그의 골방은 5층 건물의 바로 지붕 밑에 있었는데, 그는 안주인에게서 식사뿐만 아니라 하녀까지 제공받고 있었다. 하숙집 안주인은 바로 아래층에 살림집을 가지고 있으므로 한길로 나가자면 항상 문이 활짝 열려진 주인집 부엌의 옆 층계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실은 하숙비가 잔뜩 밀려 있어서 청년은 안주인과 얼굴이 마주치게 될까 봐 겁이 난 터였고, 이 때문에 일종의 병적인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하지만 그렇게까지 기가 죽은 태도로 전전긍긍하지는 않았으며.. 2025. 2. 28.
제인 에어 - 샬럿 브론테 (김은경 옮김, 주변인의 길) 샬럿 브론테 - 제인 에어 (1847년) 그날은 산책을 할 수 없었다. 사실 아침에는 잎이 떨어진 관목 사이를 한 시간 동안 걸어 다녔다. 그런데 점심을 먹고 나니 차가운 겨울바람이 불면서 검은 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비가 세차게 내렸다. 그래서 야외 활동은 접어야 했다.나는 그렇게 된 것이 내심 좋았다. 나는 으스스한 오후에 장시간 산책하는 일이 정말 싫었다. 쌀쌀한 날씨에 땅거미가 질 때 손발이 언 채로 집으로 돌아오는 일은 얼마나 싫은지. 더군다나 유모 베시의 잔소리를 들으면 우울해지고 일라이자, 존, 조지아나보다 체력이 약하다는 사실을 인식하면 스스로 초라해지는 기분이었다. 일라이자, 존, 조지아나는 객실에서 저희 엄마 주변에 모여 있었다. 리드 부인은 난로 옆에 있는 소파에 기대 누워 있었고, 그.. 2025. 2. 14.
쿠오바디스 - 솅키에비치 (김기봉 옮김, 삼성당) 시엔키에비치 - 쿠오바디스 (1895년) 삼촌께서는 그리스는 지혜와 미를 창조하고 로마는 권력을 창조했다고 하셨지만 어디에 우리가 창조한 권력이 있습니까?그런 말을 하고 싶거든 킬로를 불러라. 그런 말보다 안티움에 가는 이야기나 하자. 거기서는 무서운 위험이 너를 기다리고 있을거야. 그렇지만 넌 황제의 명령을 거역할 수는 없다.위험하다고요? 우리는 모두가 죽음의 그림자 속에서 방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그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p.238)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지상은 지금 말세를 향해 치닫고 있다. 인간은 누구든 자신이 언젠가는 죽어 없어지리라는 걸 안다. 그러나 그때까지는 주어진 삶을 즐길 필요가 있지. 삶은 죽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 .. 2025. 2. 13.
타라스 불리바 - 고골(리) (동완 옮김, 계몽사) 우리 시대의 세계문학 1 (계몽사) 고골리 - 타라스 불리바 (1835년) "얘야, 어디 좀 돌아서 보아라! 그 꼬락서니가 참 우습구나! 그 장삼 같은 것은 도대체 뭐냐? 그 따위 꼴을 하고서 그래 학교에 다닌단 말이냐?"이와 같은 말로 늙은 불리바는 키예프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두 아들을 맞아들이는 것이었다.그의 두 아들은 지금 막 말에서 내려섰다. 둘 다 단단하고도 늠름한 체격으로 갓 졸업한 신학교 학생들이 흔히 보듯이 흘끔흘끔 곁눈질을 하고 있었다.똑똑하고도 건강해 보이는 그들의 얼굴에는 아직 면도날이 한 번도 지나가지 않은 솜털이 덮여 있었다. 그들은 아버지의 이와 같은 대접에 어리둥절하여 시선을 땅에 떨어뜨린 채 꼼짝도 못 하고 서 있을 뿐이다. (p.9) 불리바는 무섭고 완고했다. 그것은.. 2025. 2. 10.
체호프 - 단편집 (김순진 옮김, 일송북) 체호프 단편선 슬픔 이오나가 자신의 아들이 어떻게 죽었는지 이야기하려고 몸을 돌린다. 그러자 그때, 곱사등이가 한숨을 내쉬며 말한다. "이제야, 겨우 다 왔군."20코페이카를 받고 나서, 이오나는 한참 동안 어두운 입구로 사라져 가는 건달들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다시 혼자가 된 그를 정적이 감싼다.잠시 잠잠했던 슬픔이 다시 살아나 아주 강하게 몰아붙인다. 이오나의 시선이 거리를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을 좇아 불안하고 고통스럽게 흔들린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 중에 그의 얘기를 들어 줄 사람이 정말 한 사람도 없는 것일까? 사람들은, 그도 그의 슬픔도 아랑곳하지 않고 바삐 지나가고 있다....슬픔은 그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거대하다. 이오나의 가슴을 찢고 그 슬픔을 밖으로 쏟아 낸다면 아마 온 세상이 잠길 .. 2024. 7. 25.
무도회가 끝난 뒤 - 톨스토이 (박은정 옮김, 펭귄클래식) 벌목폴리쿠시카무도회가 끝난 뒤위조 쿠폰 ...........................................톨스토이 - 무도회가 끝난 뒤 (1903년) "지금 여러분은, 인간은 자기 스스로는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분별하지 못한다고 말씀하시는군요. 모든 게 환경에 달려 있고 환경이 인간을 해칠 수 있다고 말이지요. 하지만 저는 우연이 모든 걸 좌우한다고 생각합니다. 우연한 사건이 제 인생을 어떻게 바꿔놓았는지 조금 들려드릴까요." (p.187)   ........................................................................................................................................... 2024. 7. 3.
좁은문 - 앙드레 지드 (구자운 옮김, 일신서적) 앙드레 지드 - 좁은문 (1909년) 만일 다른 사람들이었더라면 이 이야기를 한 권의 책으로 꾸며 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내가 하고 싶은 이 이야기는 나의 모든 것을 다해 체험하였고, 그러한 만큼 나의 기력을 모두 소모시켜 버렸던 그러한 이야기이다. 그래서 될 수 잇는 한 간명하게 적어 나가려 한다. 나의 회상에 의한 이야기가 가끔씩 건너뛰며 흐트러져 있다 할지라도, 나는 그것을 시간적인 순서에 따라 잇거나 바로잡기 위해 의도적으로 꾸미거나 어떠한 것도 덧붙이지 않을 것이다. 회상을 꾸미려 하는 욕망은 그것을 이야기하는 데서 얻게 될 마지막 즐거움마저 망쳐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p.5)    ....................................................... 2024. 5. 18.
갈매기 - 안톤 체호프 (홍기순 옮김, 범우사) 안톤 체호프 - 갈매기 (1896년) 아르까지나: (미샤에게) 자, 일어서 봐요.두 사람이 일어선다나란히 서 봐요. 당신은 스물두 살, 내 나이는 거의 두 배지요. 예브게니 세르게이치, 우리 중에 누가 더 젊어 보여요?도른: 당신이죠, 물론.아르까지나: 그것 봐요.....왜 그럴까요? 왜냐하면 나는 일을 하고, 느끼며, 항상 바쁘게 다니지만, 당신은 한 곳에 앉아서, 활동을 하지 않기 때문이지요....그리고 나에게는 하나의 규칙이 있어요. 그것은 미래를 들여다보지 않는다는 거죠. 나는 절대로 노년이나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아요. 어차피 그런 것은 피하지 못하니까요. (p.50-51)  ................................................................... 2024. 5. 10.
휴먼 코미디 - 윌리엄 사로얀 (황성식 옮김, 인디북) 윌리엄 사로얀 - 휴먼 코미디 (1943년) 어느 날 율리시즈 마콜리라 불리는 꼬마가 자기 집 뒷마당에 새로 뚫린 뒤지 구멍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뒤지란 놈은 축축한 진흙을 밖으로 밀어내다 이 꼬마를 흘끗 쳐다보았다. 확실히 처음 보는 낯선 얼굴이지만 자기를 해칠 것 같지는 않다는 듯이...꼬마는 이 신기한 광경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그때 뒷마당의 오래된 호두나무 위로 새 한 마리가 날아와 앉았다. 그리고 기쁨에 가득찬 소리로 지저귀기 시작했다. 꼬마의 홀린 듯한 눈길은 땅바닥에서 나무 위로 옮아갔다.곧이어 저 멀리서 화물 열차가 기적을 울리며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꼬마는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달리는 기차 때문에 땅이 울렁거리는 것을 느꼈다. 꼬마는 갑자기 달리기 시작했다. 자기 딴에는 이 .. 2024. 5. 6.
어느 관리의 죽음 - 안톤 체호프 (김순진 옮김, 일송) 체호프 단편선  안톤 체호프 - 어느 관리의 죽음 (1883년) 어느 멋진 밤, 멋지게 차려입은 회계 관리원 이반 드미트리비치 체르뱌코프는 특석 두 번째 줄에 앉아 오페라글라스를 든 채로 플랑케트의 '코르네빌의 종'을 보고 있었다. 공연을 보는 내내 그는 더없는 행복감을 느끼며 오페라에 빠져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소설들에는 이 '그런데 갑자기'가 종종 나온다. 하지만 작가들이 이 말을 자주 쓸 수밖에 없는 것도 당연하다. 인생은 예기치 못한 일들로 가득하니까!그런데 갑자기 체르뱌코프가 얼굴을 찡그리고 눈을 크게 뜨며 희번덕거리면서 숨을 쉬지 않는가 싶더니, 눈에서 오페라글라스를 떼 내고 몸을 숙이자마자 에취! 재채기를 하고 만 것이다. 누구라도 어디에서라도 재채기는 막을 수 없다. 농부도, 경찰관.. 2024. 4.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