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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
III. 고전 문학 (서양)/1. 서양 - 고전 소설

제인 에어 - 샬럿 브론테 (김은경 옮김, 주변인의 길)

by handaikhan 2025. 2. 14.

 

샬럿 브론테 - 제인 에어 (1847년)

 

그날은 산책을 할 수 없었다. 사실 아침에는 잎이 떨어진 관목 사이를 한 시간 동안 걸어 다녔다. 그런데 점심을 먹고 나니 차가운 겨울바람이 불면서 검은 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비가 세차게 내렸다. 그래서 야외 활동은 접어야 했다.

나는 그렇게 된 것이 내심 좋았다. 나는 으스스한 오후에 장시간 산책하는 일이 정말 싫었다. 쌀쌀한 날씨에 땅거미가 질 때 손발이 언 채로 집으로 돌아오는 일은 얼마나 싫은지. 더군다나 유모 베시의 잔소리를 들으면 우울해지고 일라이자, 존, 조지아나보다 체력이 약하다는 사실을 인식하면 스스로 초라해지는 기분이었다. 

일라이자, 존, 조지아나는 객실에서 저희 엄마 주변에 모여 있었다. 리드 부인은 난로 옆에 있는 소파에 기대 누워 있었고, 그 순간만큼은 싸우거나 울지 않는 자식들에게 둘러싸인 채 아주 행복해 보였다. 리드 부인은 내가 그들과 어울리지 못하게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너와 거리를 두는 것이 나도 편치는 않다. 하지만 천진하고 행복한 어린이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을 네게 줄 수는 없어. 네가 더 싹싹하고 순진하며 상냥하고 명랑해지려고, 한마디로 더 밝고 솔직해지려고 노력한다는 말을 베시한테도 듣고 또 내가 직접 목격할 때까지는 말이지."

"베시가 저에 대해 어떻게 했는데요?"

내가 물었다.

"제인, 나는 말꼬리 잡고 늘어지거나 귀찮게 질문하는 사람을 싫어한다. 더군다나 어른 말을 그렇게 가로막는 어린이가 얼마나 꼴 보기 싫은데. 고분고분하게 말할 수 있을 때까지 어디 가서 조용히 앉아 있거라."

객실 옆에는 작은 거실이 있었다. 나는 그곳에 슬그머니 들어갔다. 거실에 있는 책장에서 그림이 많이 들어간 책을 한 권 골랐다. 그리고 창가에 있는 의자 위에 올라가 터키 사람처럼 책상다리를 하고 앉았다. 붉은색 모직 커튼을 치니 갚은 은신처에 있는 기분이었다.

오른쪽으로는 겹겹이 주름이 잡힌 진홍색 커튼 때문에 시야가 막혔다. 왼쪽에는 깨끗한 유리창이 있어 나는 11월의 스산한 날씨로부터 보호받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차단하지는 못했다. 나는 책장을 넘기는 동안 이따금 겨울의 오후 풍경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멀리 안개와 구름이 어슴푸레하게 보였고 가까이에는 젖은 잔디와 폭풍을 견디는 관목이 보였는데, 오랫동안 지독하게 몰아치는 강풍 때문에 비가 사선으로 내리꽂혔다. (p.6-7)

 

하지만 얼마나 헛된 호의인가! 간절히 원했으나 오랬동안 받지 못했던 여러가지 호의처럼 그것은 너무 때늦은 호의였다! (p.28)

 

어린이는 감정을 느껴도 그것을 분석하지는 못한다. 설사 어느 정도 분석을 했다고 해도 그 결과를 언어로 표현하지 못한다. (p.33)

 

나는 곰곰이 생각했다. 가난이란 어른들에게 냉혹한 것인데, 어린아이에겐 특히 더 그렇다. 어린아이는 근면하게 일하는 사람의 존경받을 만한 청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그저 '가난'을 허름한 옷, 빈약한 식사, 불을 못 피우는 난로, 교양 없는 태도, 천한 결점과 연관된 단어로만 생각한다. 당시의 나 역시 가난을 불명에와 동의어로 생각했다.

"아뇨, 가난한 사람들과 살고 싶지 않아요."

"그들이 네게 친절하게 대해도?"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가난한 사람들이 어떻게 친절할 수 있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그들의 언어를 배우고, 그들의 습관을 익히며, 교육도 못 받는 데다, 게이츠헤드 마을의 오두막집 앞에서 아이를 젖 먹이거나 빨래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는 가난한 여인네들처럼 되기는 싫었다. 나는 사회적 신분을 버리고 자유를 선택할 만큼 대담하지 못했다. (p.34)

 

침대에 들 때는 항상 인형을 가져갔다. 인간은 사랑할 대상이 있어야 하는 법인데, 애정을 쏟을 만한 대상이 없었던 나는 작은 허수아비처럼 허름하고 빛바랜 우상을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는 데서 즐거움을 찾았다. 그 작은 장난감이 살아 있고 감정도 있다고 상상하면서 터무니없었지만 진실로 그것을 애지중지했던 일을 기억하면 지금도 얼떨떨한 기분이 든다. 나는 인형을 꼭 껴안지 않으면 잠을 이루지 못했으며, 인형이 안전하고 따뜻하게 내 품에 있을 때면 상당한 행복감을 느꼈고 그것도 나처럼 행복감을 느끼리라고 믿었다. (p.39-40)

 

내가 그랬듯, 어린이란 어른들과 싸우거나 격한 감정을 마구 발산하고 나면 양심의 가책과 무기력에서 비롯된 선뜩한 기분을 느끼게 마련이다. 리드 부인을 비난하고 위협할 때 내 마음은 매열하게 이글거리며 모든 걸 삼켜버릴 듯한 불붙은 히스 언덕과 같았다. 그러나 뒤이은 나의 상태, 그러니까 30분 동안 잠자코 생각한 결과 내 행동의 무모함과 미움받고 미워하는 처지의 쓸쓸함을 깨달았을 때의 내 심정은 불길이 꺼진 후의 시커멓고 을씨년스러운 언덕과 다르지 않았다.

생애 처음으로 복수라는 감정을 맛보았다. 그건 마치 향기로운 포도주처럼 마시면 따뜻하고 독특한 풍미가 있었다. 그러나 뒷맛은 쇠붙이 같았고 부식성이 있어서 독이라도 마신 듯한 기분이었다. 기꺼이 리드 부인에게 가서 용서를 구하고 싶ㅍ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그녀가 나를 두 배 더 멸시하고 거절할 것이며 그 결과 내 안의 사나운 충동이 다시 고개를 들리라는 사실을 경험으로나 직감으로나 잘 알고 있었다.

나는 거친 말을 내뱉는 것보다 더 나은 수완을 발휘하고 싶었다. 우울한 분노보다 정화된 감정을 기를 수 있는 자양분을 찾고 싶었다. 아라비아의 이야기가 담긴 책 한 권을 집어 들었다. (p.5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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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읽으면 좋은 책>

아라비안 나이트 - 리차드 버턴 (고정일 옮김, 동서출판사)

천일야화 - 앙투안 갈랑 (임호경 옮김, 열린책들)

아라비안 나이트 - 리차드 버턴 (오정환 옮김, 예술과 비평)

아라비안 나이트 - 리차드 버턴  (김병철 옮김, 범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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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누구나 완벽하지 못한 법인데! 아주 깨긋한 행성의 표면에도 검은 점은 존재한다. 그런데 스캐처드 선생은 그런 미세한 결점만 발견할 뿐 천체가 내뿜는 광휘는 보지 못했다. (p.95-96)

 

그녀의 영혼은 많은 사람이 긴 시간 동안 살아가는 기간을 매우 짧은 시간에 다 살아버리려고 서두르는 것 같았다. (p.104)

 

인간은 평온한 생활에 만족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인간은 활동을 해야 하며 활동할 거리가 없을 때 결국은 그것을 찾아내고야 만다. 수많은 사람이 나보다 더 안온한 생활을 하도록 운명 지워져 있고 역시 수많은 사람이 자신들의 운명에 말없이 저항하고 있다. 정치적 항거 외에도 얼마나 많은 저항이 지상에 사는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끓어오르고 있는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여성이 아주 평온한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여성도 남성처럼 느끼고 생각한다. 여성에게도 자신의 오빠나 남동생처럼 능력을 발휘하고 노력을 쏟을 수 있는 장이 필요하다. 여성도 남성처럼 너무 엄격한 구속을 받거나 극심한 침체기에 빠지면 괴로워한다. 보다 많은 특권을 누리는 남성이, 여성만이 푸딩을 만들고 양말을 뜨며 피아노를 치거나 가방에 수를 놓는 일따위나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편협하기 짝이 없는 주장이다. 그러므로 관습에 따라 여성에게 필요하다고 정해진 것보다 더 많은 활동을 하거나 더 많이 배우려고 하는 여성을 비난하거나 비웃는 일은 지각없는 행동이다. (p.159)

 

저보다 나이가 더 많다거나 세상 경험이 풍부하다는 이유로 제게 명령을 내릴 권리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시간과 경험을 어떻게 사용했느냐에 따라 우위를 주장할 수 있다고 봅니다. (p.196)

 

조지아나, 너보다 더 허영심 많고 어리석은 동물은 이 지구에 폐를 끼치도록 허락받지 않았을 거야. 넌 태어날 자격이 없었어. 삶을 활용하지 못하니까 말이야. 너는 분별 있는 인간이 그렇듯 너 자신을 위해서, 네 안에서, 네 스스로 살지 못하고 무력한 모습으로 다른 사람의 힘에 기대어 살려고만 해. 살찌고 허약하고 자만한 데다 쓸모없는 너를 기꺼이 받아줄 사람을 여자든, 남자든 찾지 못하면 너는 냉대받고 무시당해 비참하다면서 울부짖지. 게다가 생활이 항상 변화무쌍하고 흥미로워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렇지 않으면 이 세상을 지하 감옥처럼 느끼잖아. 넌 칭송받고 구애받고 아첨하는 말을 들어야 하고 음악과 춤과 교제가 있어야 하지. 그렇지 않으면 기운이 빠져서 시들해지잖아. 넌 다른 사람의 노력과 의지에 기대지 않고 네 스스로 살아갈 방법을 강구할 생각은 안 하니? 하루를 놓고 생각해봐. 하루를 몇 단위로 나누는 거야. 그리고 그 단위별로 할 일을 정해봐. 한 시간이든 십 분이든 오 분이든지 간에 아무 일도 안 하고 허비하는 시간을 남겨두면 안 돼. 일을 하나씩하나씩 체계적이고 규칙적으로 하란 말이야. 그러면 너도 모르는 사이에 하루가 금방 갈 거야. 그러면 무료한 시간을 때우기 위해 도움을 요청하지 않아도 되니 남에게 빚지지 않을 테고 친구나 대화, 공감이나 타인의 인내 따위를 구할 필요도 없어져. 그러면 넌 한마디로 독립된 인간으로서 살 수 있는 거야. 네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하는 충고니까 귀담아 들어. 그러면 어떤 일이 있더라도 다른 사람이나 나 없이 살아갈 수 있어. 하지만 충고를 무시하고 지금까지 하던 대로 계속 뭔가 바라기만 하고 푸념하며 빈둥거린다면 그 어리석음의 결과를, 아무리 지독하고 견딜 수 없는 것이라 해도 감수해야 할 거야. 내 분명히 말해두니까 잘 들어. 난 지금 하는 말을 앞으로 반복하진 않겠지만 착실하게 실행에 옮길 거야.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난 너와 관계를 끊을 거야. 어머니의 관이 게이츠헤드 교회의 납골당에 운반되는 날부터 너와 나는 아예 몰랐던 사람들처럼 남남이 되는 거야. 우리가 어쩌다가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났다고 해서 내가 너의 아주 사소한 요구에라도 얽매이리라고는 생각하지 마. 내 분명히 말해두지만, 온 인류가 휩쓸려 사라지고 너와 나만 지구에 남는다고 해도 나는 너를 옛날 세계에 남겨두고 혼자 새로운 세계로 갈 거야. (p.350-351)

 

진실하고 너그러운 감정을 중시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그런 감정이 부족한 탓에 이 두 사람 가운데 한 명은 견딜 수 없을 만큼 심술 사나운 성질을, 다른 한 명은 혐오스러울 정도로 풍미를 모르는 성질을 보였다. 판단이 결여된 감정은 물에 탄 약과 같다. 반면 감정으로 유연해지지 않은 판단은 너무 쓰고 까슬까슬해서 삼키기 어려운 약과 같은 법이다. (p.351)

 

하지만 젊음 만큼 사람을 무모하게 만드는 것도 없지 않은가? 무경험만큼 사람을 맹목적으로 만드는 것도 없지 않은가? (p.363)

 

저는 새가 아니에요. 그래서 어떤 그물에도 걸려들지 않아요. 저는 제 의지가 있는 자유로운 인간이에요. (p.378)

 

교육으로 곱게 다져지거나 비옥해지지 못한 마음의 땅에서 편견을 뿌리 뽑기란 쉽지 않은 법이다. 편견은 그런 마음에, 마치 돌에 난 잡초처럼 단단하게 뿌리를 내리고 자란다. (p.517)

 

성향을 억제하고 타고난 기질을 바꾸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나는 여러 가지 경험을 하면서 그게 가능하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인간에게 자신의 운명을 얼마간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구할 수 없는 양분을 원하고 우리의 의지로는 갈 수 없는 길을 가려고 애쓸 때에도 영양실조로 죽을 필요도, 절망에 빠질 필요도 없습니다. 금지된 음식처럼 소담하고 깨끗한, 마음의 다른 자양분을 찾으면 되는 겁니다. 그리고 운명의 여신이 막아놓은 길처럼 곧고 넓은 길을, 비록 더 거친 길일지라도, 모험을 좋아하는 우리의 발을 위해 개척하면 되는 겁니다. (p.551)

 

내 삶은 너무 비참하다, 그러니 바뀌어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죽는 수밖에 없다. (.551)

 

내향적인 사람은 활달한 사람보다 더 자주 자신의 감정과 슬픔을 솔직하게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너무나 엄격하게 보이는 금욕주의자도 결국은 인간이다. 그러므로 호의를 품고서 대담하게 그들의 '침묵의 바다'에 뛰어드는 일은 흔히 아주 값진 은혜를 베푸는 결과가 된다. (p.5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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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럿 브론테(Charlotte Brontë, 1816년 4월 21일 ~ 1855년 3월 31일)

잉글랜드 의 소설가

 

잉글랜드의 북부 요크셔의 손턴에서 출생한 브론테 자매의 첫째이다.
부친 패트릭 브론테 신부(아일랜드어: Rev. Patrick Brontë)는 아일랜드 출신의 성공회신부였다. 그녀는 6명의 자녀 가운데 셋째였으며 모친은 5세 때 사별하였다. 큰 네 아이는 부근의 기숙학교(寄宿學校)에 들어갔으나 학대와 볼품없는 식사로 그 중 둘은 폐병으로 죽었다. 이 곳의 생활이 후의 《제인 에어》에서 로드 학교의 생활로 재현된다.
집으로 돌아온 뒤에 샬롯은 동생들과 어울려서 공상 이야기를 지어서 즐거워하기도 했으나 1831년부터 또 학교로 보내어졌으며 가정교사를 하면서 자활하게 된다. 1842년에는 여동생 에밀리와 함께 벨기에의 브뤼셀에 유학하였다. 이 학교의 교사 에제를 사랑했지만 아내가 있는 기혼자였기에 비련(悲戀)으로 끝난다. 그러나 이 경험은 그녀의 소설로 되살아난다.
다시 영국에 돌아와 1846년에 동생 에밀리와 앤과 함께 시집을 출판하였으나 2부밖에 팔리지 않았다. 그러나 2달만에 다시 동생들과 《폭풍의 언덕》,《아그네스 그레이》와 함께 《교수》를 썼으나《폭풍의 언덕》, 《아그네스 그레이》만 채택되고 《교수》는 채택되지 못했다. 그렇지만 1847년에 소설 《제인 에어》를 발표하여 크게 호평을 받았다. 그리고 이 기세를 받아 《셜리》를 쓰던 샬럿은 에밀리와 앤이 결핵으로 죽고 장례식을 치른 후에 자신의 동생 에밀리를 그린 《셜리》(1849)를 출간했다. 후에 출판된 그녀의 《빌레트》(1853)등과 함께 연애에 있어서 정열의 묘사에 새로운 시기를 긋게 되었다.
《빌레트》를 쓴 1년 후 샬럿은 아서 벨 니콜스와 결혼을 하였으나 1년도 안돼 임신 뒤 폐렴으로 사망했다. 사후 2년인 1857년 《교수》가 다시 발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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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에어 - 샬럿 브론테 (유종호 옮김, 민음사)

제인 에어 - 샬럿 브론테 (조애리 옮김, 을유문화사)

제인 에어 - 샬럿 브론테 (이미선 옮김, 열린책들)

제인 에어 - 샬럿 브론테 (류경희 옮김, 펭귄출판사)

제인 에어 - 샬럿 브론테 (박순녀 옮김, 동서문화사)

제인 에어 - 샬럿 브론테 (배영원 옮김, 범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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