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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
III. 고전 문학 (서양)/1. 서양 - 고전 소설

인간의 굴레 - 서머싯 몸 (김기봉 옮김, 삼성당)

by handaikhan 2025. 3. 10.

 

서머싯 몸 - 인간의 굴레 (1915년)

 

침묵이 흘렸다. 크론쇼도 자신의 생활을 들여다보고 있겠지. 찬란하고 희망에 불타던 청춘이 그 빛을 잃어 가던 수많은 실망의 추억들과 현재의 비참하고 단조로운 생활의 양상, 나아가서는 닥쳐올 앞날의 담담한 전망, 아마도 이런 것들이 그의 머릿속을 어지럽게 오가고 있을 테지. 필립의 시선은 테이블에 쌓인 접시 무더기로 옮겨 갔고, 크론쇼의 시선도 역시 거기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p.140)

 

2달의 세월이 흘러갔다.

이런 문제를 심사 숙고해 본 결과, 진정한 화가나 작가, 음악가 같은 예술가에게는 일체의 번뇌를 모두 청산해 버리고 그 일에 몰두하는 어떤 힘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인생을 예술에 종속시키는 일이 불가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로서도 잘 알 수 없는 어떤 힘에 사로잡혀서 끝내는 그 힘의 악령같은 환영을 좇아서, 마침내는 인생 그 자체가 무참하게 되어 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그러나 필립에게는 인생은 그려져야 한다기보다는 살아야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가지각색의 인생 경험을 쌓고 거기에서 얻게 되는 모든 감동을 인생의 순간순간에서 짜내고 싶었다.

그는 마침내 어떤 조치를 취하고 그 결과에 따르기로 결심하였다. 그리고 한 번 결정하면 결심이 흔들리기 전에 행동으로 옮기기로 하였다. (p.140)

 

먹고 사는 것을 항상 걱정해야 하는 것만큼 인생에서 고달픈 일은 없네. 난 금전을 무시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경멸하네. 그따위 녀석들은 위선자가 아니면 바보 두 가지 중의 하나이겠지. 돈이란, 다시 말해 육감과도 같아서 이것이 없이는 나머지 오감이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법일세. 적당한 수입이 없는 날에는 인생의 가능성의 반은 막히는 것일세. 꼭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은, 자네가 벌어들이는 1실링에 대한 대가로 1실링 이상을 지불해서는 안 된다는 것일세. 자네도 들어 알고 있겠지만, 세상 사람들은 흔히들 빈곤이 예술가에 있어 최상의 자극이 된다고들 하는데, 그건 빈곤의 칼날을 직접 겪어 보지 못한 철부지들의 소리지. 빈곤이란 것이 얼마나 사람을 비굴하게 만드는지 모르는 사람의 수작이지. 또 빈곤은 사람을 비열하게 하고, 날개를 잘라 버리고, 마치 암처럼 영혼을 마구 먹어 들어가는 무서운 것이지. 그렇다고 뭐 큰 부자가 되라고 하는 말은 아닐세. 다만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유지할 수 있고, 마음껏 일을 하며, 너그럽고 솔직하고 독립된 인간으로서 살아나가는 데 필요할 정도의 돈만 있으면 된단 말이지. 작가건 화가건 난 예술만을 생계의 유일한 방법으로 삼는 사람들을 정말 불쌍하다고 보네. (p.143)

 

이미 때가 늦은 후에 자신의 평범함을 깨닫는 것은 비참한 일일세. 그렇게 되면 기분이 지금보다 더 좋을 리도 없을테고. (p.144)

 

사람들은 모두 제각기 그 나름대로 철학가이고, 과거 위대한 철학가들이 만든 복잡한 체계들은 어디까지나 그 저자 자체에만 의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실은 먼저 자신이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며, 그것만 알게 되면 사상 체계는 저절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필립에게는 세 가지 알아 내야 할 것이 있는데, 첫째 그와 그가 살고 있는 세계와의 관계, 둘째는 그와 그가 생활하고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 셋째는 그와 그 자신과의 관계였다. 그는 열심히 연구 계획을 세웠다.

해외에서의 생활이 이로운 점은, 거주하게 되는 여러 나라의 풍습과 습관을 접하면서, 그것을 외부로부터 관찰하여 그들이 믿고 행하는 풍습과 습관에는 그렇게 해야 할 필연성이 전연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우리에게는 명백한 이치처럼 보이는 것도 외국인들 눈에는 불합리한 것으로밖에는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독일에서 1년, 파리에서 2년간의 그의 해외 생활은 필립의 마음을 회의적인 사상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하였으나, 이제는 이것을 기꺼이 용납하고 안도감 같은 느낌을 가져왔다.

거기에는 선도 없었고 악도 없었다. 만물은 어떤 목적을 위해 적응될 뿐이었다.

그는 <종의 기원>이란 책을 읽었는데, 그가 고민하던 많은 문제에 대한 설명을 해 주고 있었다. 이렇게 추리해 나가면, 어떤 일정한 자연의 양상이 나타날 것이라는 단정을 내려놓고, 큰 하천을 따라 올라가면 그곳에는 생각했던 바와 같은 지류가 있고, 또 비옥한 평야가 있고, 그래서 인구 밀도가 조밀하고, 그 너머에는 산맥이 가로놓여 있었다. 어떤 위대한 발견이 있을 때, 왜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느냐 하는 아쉬움이 뒤따르는 것을 나중에 가서야 알게 되는 법이고, 심지어 그 진리를 인정한 것도 의외로 대수롭지 않은 것이 많은 법이다.

처음으로 <종의 기원>을 읽는 독자들은 그들의 이성으로써 그것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그러나 행동의 근원인 감정에는 아무 양향을 주지 못하는 것이다.

필립은 이 책이 나온 지 한 세대 후에 태어났기 때문에, 이 책을 읽었던 그 시대 사람들의 전율과도 같은 대부분의 감정은 이미 그 당시의 시대 감정으로 사라져 버렸고 따라서 그는 오히려 가벼운 기분으로 그것을 인정할 수가 있었다.

그의 마음은 생존 경쟁이라는 장대한 사실에 크게 감동되었고, 이 책이 시사해 주는 윤리적 법칙은 그가 가졌던 것과 꼭 일치되는 것같이 느껴졌다. 그는 힘만이 정의라고 혼자 중얼거렸다.

한편에는 자신의 성장과 자기 보존의 법칙을 지닌 유기체인 사회가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는 개체라는 것이 존재한다. 사회의 이익이 되는 행위를 미덕이라고 하고, 그렇지 못한 행위를 악덕이라 부른다. 죄라는 관념은 적어도 자유로운 인간이라면 자기 자신으로부터 제거해 버려야 할 선입관과도 같은 것이다.

개인과의 투쟁에 있어 사회는 세 가지 의무를 가지는데 즉 법률, 여론, 양심이다. 법률과 여론은 교활함으로 대항할 수가 있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교활함만이 강자에 맞서는 약자의 유일한 무기이다. 죄라는 것은 발견됨으로써 죄가 된다.

그러나 양심이라는 것은 마치 성 안의 배반자와 같은 것이다. 각자의 가슴 속에서 사회를 위해 싸우고 개인으로 하여금 자진하여 희생물로 만들어 적의 번영을 촉진시키는 것이다.

국가라는 유기체와 자아를 의식하고 있는 개인이 화목하여 손을 잡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며, 전자는 개인을 다만 자기의 목적을 위해서 이용할 뿐이다. 만일 방해가 되면 유린해 버리고, 충실히 봉사하면 훈장과 연금과 명예가 주어진다.

한편, 후자는 독립인이 될 경우에만 강하고, 편의상 국가를 요리조리 재치 있게 빠져 나가는 데 불과하다. 자유인의 행동에는 악이 있을 리 없고,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이든지 빼놓지 않고 다 할 수 있다. 할 수만 있으면 힘만이 도덕의 유일한 척도인 것이다. 그는 국가의 법률을 인정하지만 법률을 위반하고서도 죄의식을 느끼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징벌을 당하는 경우엔 유감 없이 형벌을 달게 받으면, 원한은 조금도 품지 않는다. 사회에는 힘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일단 개인에게 옳고 그름이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면 양심은 완전히 그 힘을 상실하고 말 것 같았다.

마침내 그는 환호성을 울리며 양심의 목덜미를 잡아 내동댕이치고 말았다. 그러나 아직도 인생의 진의에 대한 의문은 많이 남아 있었다. 확실한 무슨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는 크론쇼가 말하던 페르시아 양탄자의 비유를 상기하였다. 말하자면, 이런 의문에 대한 답으로 주어진 것이었다.

자기 스스로가 발견하지 못하면 해답의 가치가 없는 것이라고 뇌까리던 일이 새삼 머리에 떠올랐다.

'도대체 무슨 뜻에서 그런 말을 했을까?'

필립은 미소지었다.

이렇게 하여 필립은 9월 마지막 날, 이러한 새로운 인생 이론을 실천에 옮기고자 불타는 열의를 안고 1600파운드의 돈을 가지고 세 번째 인생을 출발하기 위해 다시 런던을 향해 절름거리면서 떠났다. (p.156-158)

(같이 읽으면 좋은 책)

종의 기원 - 찰스 다윈 (송철용 옮김, 동서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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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서머셋 몸(영어: William Somerset Maugham, CH, 1874년 1월 25일~1965년 12월 16일)

영국의 작가이다. 파리의 외교 공관에서 태어났다. 
프랑스 파리의 영국대사관에서 일하던 영국 외교관의 아들로 프랑스에서 성장했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영국에서 목사로 있던 삼촌에게 거둬진다. 아이를 키워 본 적이 없는 삼촌의 집에서 어린시절을 외롭게 보냈고, 13세에 캔터베리의 왕립 학교에 입학한 뒤에도 급우들에게 따돌림을 받고 콤플렉스에 시달렸다. 그러던 중 폐결핵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프랑스에서 요양하던 중 1891년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청강생으로 1년간 자유로운 유학 생활을 했다. 이때 그는 문학에 관심을 갖게 된다. 이후 삼촌의 권유로 공인회계사 공부를 하다가 그만둔 뒤 킹스 칼리지 런던에서 의과대학을 졸업, 의사 면허를 취득했지만 문학에 더 큰 흥미를 느껴 작가로 활동했다.
다만 작가의 길을 걷기로 한 후 초창기 10년은 그에게 불행한 시기였다. 여러 편의 소설과 희극을 썼지만 이렇다 할 히트작은 없었다. 생활고로 돈을 위해 작품을 쓰기도 했던 그는 1907년 발표한 오스카 와일드풍의 코미디 희곡 '프레드릭 부인'이 성공하면서 경제적, 정신적 여유를 얻게 됐다. 1912년부터는 희극 집필을 그만두고 장편 소설 '인간의 굴레'를 쓰기 시작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직전에 완성한 장편 소설 '인간의 굴레'는 작가의 고독한 청소년 시절을 거쳐 인생관을 확립하기까지 정신적 발전의 자취를 더듬은 자서전적 대작으로 대표적 걸작이다. 그 외에 긴 생애에 걸쳐 많은 작품을 남겼다.
제1차 세계 대전 때 MI6 소속 스파이로 러시아에서 활동한 적이 있으며 그 체험을 소설로 남겼다.
더불어 당시만 해도 극히 일부에게 인정받던 폭풍의 언덕을 높이 평가하며 언론 여기저기에 크게 다루면서 이런 명작이 묻혀지다니 이건 죄악이라고 한탄했다. 이런 노력에 힘입어 이 소설은 재평가되고 영국 문학에서 전설이 되었다. 또한 당시 알려지지 못한 모비 딕도 엄청 높게 평가하여 여기저기 알린 인물이기도 하다. 모비 딕에 밀려보이긴 해도, 몸이 쓴 달과 6펜스나 인간의 굴레 또한 영문학 최고걸작 50에 들어가는 불후의 명작으로 엄청난 평가를 받고 있으며 몸도 서구 영문학 연구가들에게 대문호로 인정받고 연구 중이다.
1916년 남양 여행을 떠나 타히티 섬을 방문했는데, 훗날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달과 6펜스'를 발표했다. 혹자는 이 여행이 그가 정보부에서 물러난 후 개인적으로 떠난 것이라고도 하고, 또 다른 사람은 정보부의 특수 임무를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이후 그는 미국에서 결혼을 하고 딸을 낳았지만, 계속되는 여행으로 부인과 불화를 일으켜 결국 이혼했다.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후 그는 영국 정부의 요청으로 다시 정보부 활동과 선전 임무 등을 맡아 일했다.
대표작은 폴 고갱의 생애를 모델로 한 '달과 6펜스'. 엘리자베스 2세에게 명예 훈위(CH) 칭호를 받았다. 그후 1965년에 프랑스 니스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대중적이고 평이한 문체로 작품을 썼지만, 정교한 플롯으로 잘 짜여진 이야기를 통해 인간이라는 존재의 복잡성과 어리석음을 설득력있게 제시하는 한편,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는 믿음에 대해 회의를 드러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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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굴레 - 서머싯 몸 (송무 옮김, 민음사)

인간의 굴레 - 서머싯 몸  (조용만 옮김, 동서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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