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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
III. 고전 문학 (서양)/1. 서양 - 고전 소설

25시 - 게오르규 (김병걸 옮김, 삼성당)

by handaikhan 2025. 3. 14.

 

게오르규 - 25시 (1949년)

 

정당성을 배제한 맹목적인 자에게는 어떤 이론이고 서질 않는다. 그는 완고한 노라의 고집을 꺾으려 하지 않았다. 이성을 상실한 사람에게 천 마디 지껄여 보았자 소용 없는 것이리라. 아무리 열성적으로 깨우쳐 주려 해도 공연한 헛수고에 지나지 않는다. (p.139)

 

"어느 곳의 공기가 그처럼 당신을 괴롭힌다는 말인가요?"

"나를 둘러싸고 있는 현사회의 공기지. 인류는 이젠 이 탁한 공기 속에서 더 견딜 수 없을 것 같아. 정부, 군대, 국가를 구성하고 있는 조직체, 행정 등 모든 것이 합세하여 인간을 질식시키고 산소를 빼앗고 있는 셈이지. 지금의 사회는 틀에 박힌 기계적 기술 노예로 끌려가고 있는 중이야. 마치 그것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 그러나 모든 인간은 질식할 운명에 처해 있으면서도 아직 그걸 인시하지 못하고 점차 거기에 도취되어만 가고 있어. 누구나 다 예전과 마찬가지로 정상적인 상태에서 생활하고 있다고 느끼고들 있는 모양이야. 내가 타고 있던 잠수함 승무원들은 몹시 탁한 공기 속에서 견디고 있었으나, 토끼가 죽은 지 6 시간 동안은 그들의 생명을 지탱할 수 있는 시간이라 아직 그걸 느끼지 못하고 있는데도 나는 이미 만사가 끝날 것을 알 수 있었거든." (p.148)

 

"흰 토끼가 죽은 후로는 즐거운 일이라고는 있을 수 없어. 모든 것의 종말이 다가오기까지 남은 시간이란 겨우 몇 시간 뿐인걸." (p.149)

(같이 읽으면 좋은 책)

토끼와 잠수함 - 박범신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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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무서운 세상입니다. 자신의 일신상의 안전을 위해서는 무고한 사람을 마구 짓밟아도 좋다는 그런 사고방식이지요. (p.168-169)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의 존재 가치와 명예와 자존심을 인정받지 못하는 인간은 가장 불쌍한 노예와 같은 인간이다.'

비르트리 백작은 내심 이렇게 생각했다.

'이 판국에서 진정한 자아 의식을 추구하고 삶을 영위해 가려는 사람은 스스로가 죽음을 택한 거나 다름없는 일이다. 현사회는 개인의 특출한 자존심, 명예, 즉 자유스런 인간의 영역을 탄압하고 있다. 요구되고 있는 것은 오직 노예 생활뿐이다. 그러나 이것 역시 오래 지탱하지는 못하리라. 그런 최악의 상황 속에 살고 있는 모든 인간은 위로는 장관으로부터 밑으로는 하인에 이르기까지 누구나 노예가 되어야 하는 지금의 사회 체계는 반드시 무너지고 만다. 그 종말의 순간이 하루빨리 다가와야 한다.(p.171)

 

아들 루시안은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제 시계는 죽었습니다. 아버지, 몇 시입니까?"

"25시야!"

"무슨 말슴이세요?"

루시안은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물론, 너는 처음 들어 본 말일 거야. 또 누구나 그것을 알려고도 하지 않으니까....25시란 유럽 문명의 시간이야." (p.175-176)

 

그의 머릿속은 안팀이 말한, 종신 노예라는 말로 꽉 차 있었다. 요한은 자신이 무슨 기구한 운명이기에 평생동안을 수용소에서 보내며 운하를 파고, 참호를 구축하고, 허기져 뱃가죽을 움켜쥐기도 하고, 모진 매를 맞아 실신하고, 이에게 듣겨야 하는가를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결국은 수용소에 억류당한 채로 죽어 가는 자신의 모습을 하나하나 그려 보았다.

수용소에서 죽고 말 거라는 생각이 들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는 여태껏 수많은 포로들이 죽어 없어지는 것을 역력히 보아 왔다. 죽은 사람의 옷을 벗겨 알몸뚱이로 파묻었었다. 요한은 '꼭 죽은 개와 같다.'고 생각했었다.

'개는 땅속에 파묻기 전에 가죽을 벗겨서 장갑을 만든다. 포로들도 옷을 벗기운다. 내가 죽을 때는 가죽까지 벗길지도 모를 일이다.'

요한은 급히 몸을 일으켰다.

'나를 평생토록 수용소에 가두어 두는 것은 좋다. 그러나 죽어 가는 그 순간만은 자유의 몸으로 석방시켜 주었으면 좋겠다. 제발 죽기 한 시간 전만에라도 자유롭게 놓아 준다면 한맺힌 그대로는 죽지 않을 것이다. 죽는 순간까지 줄곧 얽매인다는 건 정말 억울한 일이다. 이것은 인생 최대의 죄악이다. 그러나 이렇게 독일에 끌려온 이상 평생토록 일만 하다 죽게 되리라. 죽기 전의 최대의 소망마저 기대할 수 없으리라.' (p.178-179)

(같이 읽으면 좋은 책)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이영의 옮김,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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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틴 비르질 게오르기우(Constantin Virgil Gheorghiu, 1916년 9월 15일 ~ 1992년 6월 22일) 

루마니아의 작가.

루마니아 북동부 네암츠 주의 러즈보이에니(Războieni)에서 출생하여 부쿠레슈티 대학과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배운 후, 루마니아 외무성 특파 문화 사절의 수행 등을 하는 한편, 창작에 주력하여 시집 〈눈 위의 낙서〉를 발표하여 루마니아 왕국상을 받았다. 1949년 전쟁 소설 〈25시〉를 프랑스 파리에서 발표 간행하여 세계적으로 유명해졌으며, 그 밖의 저서로 〈제2의 찬스〉등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프랑스로 망명하였다. 한국에 방문하여 1988년 서울 올림픽에 관한 에세이를 쓰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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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시 - 게오르규 (최규남 옮김, 홍신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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