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I. 아동, 청소년/1. 한국 문학59 초정리 편지 -배유안 (창비) 배유안 - 초정리 편지 (2006년) 장운은 짚신을 꿰어 신고 마당으로 내려섰다. 상쾌한 아침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마당가에 서니 마을이 내려다보였다. 아래쪽에 양반들이 사는 기와집이 몇 채 있고, 그 뒤로 스무 채 남짓한 초가들이 작은 개울을 끼고 옹기종기 앉아 있다. 마을은 아침 햇살을 받으며 군데군데 연기를 피워 올리고 있었다. 장운은 이 시간이 가장 좋았다. 조금씩 깨어나고 있는 마을을 보노라면 오늘은 어제보다 나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오늘은 평소보다 일찍 눈을 떠서 마당을 쓸어 놓고 보리죽으로 간단히 요기까지 마쳤다. (p.7) "너, 글을 아느냐?" "글을요? 모릅니다." "배워 보련?" "예? 글을 배워요?" 할아버지가 고개를 돌려 선비에게 일렀다. "종이오아 붓을 가져오너라." 선비.. 2024. 4. 5. 앞산도 첩첩하고 - 한승원 (한국헤르만헤세) 큰한국문학 413 (66권) 목차 한승원 어머니 앞산도 첩첩하고 목선 유재용 관계 어제 울린 총소리 ................................................. 한승원 - 앞산도 첩첩하고 (1976년) 밤 봇짐을 싸 가지고 나간 딸아이가 갈 데가 그리도 없어, 하필 외할머니나 외할아버지 한 분도 살아 계시지 않는 외가엘 갔을까마는, 그 아이가 갔음직한 광주 호남 전지 공장이라든지, 서울 구로 공단이라든지, 마산 수출 자유 지역이라든지 하는 데를 둘러보고 뒤질 수 있는 데까지 샅샅이 뒤진다고 뒤졌으나, 끝내 찾아 내지를 못하고 돌아오는 아버지 오달병 씨는, 청도로 들어가는 배를 타기 위해 회진에서 하룻밤 머물러야 하는 걸음에,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그저 헛걸음 삼아 그 아이의 .. 2023. 7. 26. 첫눈 - 방영웅 (한국헤르만헤세) 큰한국문학 413 (75권) 목차 박범신 우리들의 장례식 토끼와 잠수함 방영웅 첫눈 노새 .......................... 방영웅 - 첫눈 (1972년) "눈이 오는구나. 저게 첫눈이지?" 옛날 직업이 이발소 깎사였던 철순이는 유리문을 통하여 바깥을 내다보고 혼자 중얼거린다. 어느 사이 바깥이 그렇게 어두워졌는지 거리의 불빛이 환했다. 그 환한 불빛 속에서 희끗희끗하게 휘날리고 있는 눈발이 보인다. 그것들은 그렇게 휘날리다가 땅에 떨어지는 순간 녹아 없어지나 보았다. "웬 놈의 사람이 그렇게 많지?" 꼬마 작부 미스 윤은 대폿집들이 양쪽으로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이쪽 골목이 참 한산하다는 듯이 한숨을 쉬어 대며 골목 어귀를 통하여 큰 거리를 내다보고 불평 비슷하게 중얼거린다. 눈발이 내리든.. 2023. 7. 25. 토끼와 잠수함 - 박범신 (한국헤르만헤세) 큰한국문학 413 (75권) 목차 박범신 우리들의 장례식 토끼와 잠수함 방영웅 첫눈 노새 ..................................................... 박범신 - 토끼와 잠수함 (1973년) 제복의 사내는 나의 어깨를 탁 쳐서 밀어넣고 회색의 문을 닫았다. 버스는 곧 파출소 앞을 출발하여 여름날 오후의 뜨거운 태양이 송글송글 묻어나서 찐득거리는 도심지로 빨려 들어갔다. 나는 엉거주춤 출입구 근처에 선 채 아직 반도 메워지지 않은 버스 속의 갖가지 모양을 한 사람들을 멀거니 둘러보았다. "뭘 하고 있어?" 갈라져서 오히려 뾰족하게 박혀 오는 목소리가 등을 때렸다. 어깨를 쳐서 밀어넣던 제복의 사내가 옆의 빈 좌석을 가리키고 있었다. 사내의 눈은 체격에 비해 형편없이 작고 .. 2023. 7. 25. 우리들의 장례식 - 박범신 (한국헤르만헤세) 큰한국문학 413 (75권) 목차 박범신 우리들의 장례식 토끼와 잠수함 방영웅 첫눈 노새 ..................................................... 박범신 - 우리들의 장례식 (1976년) "막걸리 한 되만...." 주전자를 내멸며 봉추는 말끝을 사렸다. 문구멍에 눈알만 내놓고 바라보던 주인 여자는 미닫이를 열고 한 발만 술청에 내려놓은 채 손을 뻗쳐 주전자를 받았다. 세 평쯤이나 될까, 좁은 술청은 전구 하나만 천장에 매달려 있을 뿐 썰렁하였다. 여자는 방 안과 술청에 한 발씩 벌려 세운 자세로 미닫이 옆에 놓인 술독에서 막걸리를 퍼 담았다. 머리가 헝클어진 여자의 얼굴은 늙고 메말라 보였다. 되질도 하지 않고 주전자 목까지 막걸리를 채운 그녀는 허리를 펴고 주전자.. 2023. 7. 24. 미지의 새 - 한수산 (한국헤르만헤세) 큰한국문학 413 (76권) 목차 한수산 침묵 미지의 새 윤후명 하늘 지팡이 송기원 월행 ....................................... 한수산 - 미지의 새 (1978년) 아내여, 겨울 오후, 2시에서 5시까지의 서해안은 때때로 참혹하게 아름답다. 아름다웠다. 송도도 그랬다. 지금은 매립이 되면서 없어져 버린 그 개펄과 낙조와 가슴을 저리게 하던 햇빛들을 기억하는가. 끄때 우리가 버스에 올라 삶은 달걀을 까 먹으며 찾아가곤 하던 그 서해안의 저녁에는, 우리가 껴안고 있던 가난도 남루함도 작은 방도....다 치열했었네. 육화와 변형을 거친 우리들 젊은 날의 비늘들이 와 함께 여기 남아 있음을, 아내여, 너는 알고 있지. 겨울 바다에 가 보았지. 미지의 새 보고 싶던 새들은 죽고 없.. 2023. 7. 21. 침묵 - 한수산 (한국헤르만헤세) 큰한국문학 413 (76권) 목차 한수산 침묵 미지의 새 윤후명 하늘 지팡이 송기원 월행 ....................................... 한수산 - 침묵 (1977년) 모래를 날리며 바람이 불어와서 우리는 일제히 강변 쪽으로 돌아섰다. 가슴 깊숙이 머리를 처박았다. 길 밑으로는 철책이 쳐져 있었고 그 밑으로 드문드문 푸른빛이 보이는 잔디들이 먼지를 뒤집어쓴 채 덮여 있었다. 바람은 여전히 불어와 우리들의 머리칼을 날리고 옷깃을 펄럭이게 했다. 강물 위에서는 햇빛이 잘디잘게 부서져 나가고 있었다. 먼지가 들어가지 않도록 가느다랗게 눈을 뜨면서 우리는 서로의 얼굴에서 번들거리는 음모를, 터질 듯한 기대를, 그리고 숨길 수 없이 도사리고 있는 나들이에 대한 불안을 보았다. 그러한 여러 .. 2023. 7. 21. 암사지도 - 서기원 (한국헤르만헤세) 큰한국문학413 (56권) 목차 선우휘 불꽃 서기원 암사지도 마록 열전 4 ...................................... 서기원 - 암사지도 (1957년) 형남이 작년 여름에 제대되어 의지할 곳이 없었던 차에 우연히 만난 옛 전우가 상덕이었다. 그들은 같은 중대에서 1년 남짓 함께 지냈었다. 중대장은 해방 직후 군대에 들어가서 6년 만에 대위가 된 사내로, 중대원들에게 훈시할 적마다, "본관의 사병 시대에는 침구를 정돈함에, 공장에서 갓 나온 벽돌을 포개어 놓듯 했는데, 귀관들은 도시 정신 상태가 돼 먹지 않았다." 고 기합을 넣다가, 으레, "그럼으로 해서 귀관들은 인격을 도치해야 된다." 고 다지곤 하였다. 못살던 자가 돈푼깨나 생기면 가난뱅이 업신여기기가 도리어 심하다더니, .. 2023. 7. 19. 목마른 뿌리 - 김소진 (한국헤르만헤세) 큰한국문학413 (71권) 목차 김소진 목마른 뿌리 이문구 관촌수필(여요주서) 장천리 소태나무 .............................................................. 김소진 - 목마른 뿌리 (1996년) "내가 바로 김태섭이외다." 물이 많이 빠진 낡은 자줏빛 반코트를 입은 사내가 천천히 걸어오며 말했다. 나는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등 뒤에는 해가 떠 있어 눈이 부셨다. 나는 이마에 손갓을 만들어 붙엿다. 사내는 굵은 모직 천으로 만든 흰 운동화를 신은 왼쪽 다리를 땅에 대고 가볍게 끌고 있었다. "예....제가 김영호입니다.어서 오시지요.' 나는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처음 인사드립니다. 아주버님. 호영 씨 안사람 됩니다." 아내가 머리를 숙.. 2023. 6. 25. 동백꽃 누님 - 이청준 (다림) 이청준 - 동백꽃 누님 (2004년) "하늘 천 땅 지 검을 현 누를 황? 누가 그렇게 외우랬어? 하늘 천 따따지 검은 솥에 누룽지.....이게 맞는 거야. 아까 선생님도 그렇게 외우라시던걸." 아랫동네 골목집의 서당 글공부는 준영이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재미있고 신명났다. 나이 먹은 글방 형들의 장난 소리에 동갑내기 판동이 녀석이 어수룩하게 잘 속아 넘어가는 것부터 그랬다. 낮 시간이 한참 지나 글공부가 지루해지면 나이 먹은 형들은 이따금 선생님의 눈길을 필해 어린 학생들에게 그런 우스개 장난 소리를 하곤 했다. (p.9) "허, 그래. 나이가 너무 어린가 싶었더니 글공부를 일찍 다니길 잘했구나. 하지만 글공부는 글만 외우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그 글 속에 있는 세상살이의 이치와 사람의 도리를 .. 2023. 6. 23. 이전 1 2 3 4 ··· 6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