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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
III. 고전 문학 (서양)/1. 서양 - 고전 소설

모르는 여인의 편지 - 슈테판 츠바이크 (송용구 옮김, 고려대출판부)

by handaikhan 2023. 2. 4.

 

슈테판 츠바이크 - 모르는 여인의 편지 (1922년)

 

어둠 속에 숨어서 은밀하게 누군가를 지켜보는 소녀의 사랑을 이 세상의 그 어떤 사랑도 따르지 못할 거예요. 저의 사랑은 아주 절망적이고 헌신적이며 열정을 다 바치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은 나이 많은 여인들의 욕정에 불타오르는 충동적이며 이해타산적인 사랑과는 완전히 다른 사랑이랍니다.

고독을 아는 소녀들만이 진정한 사랑의 열정을 소유할 수 있는 법입니다. 고독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들은 의미없는 대화와 분별없는 사교에 자신들의 감정을 탕진해 버리고 맙니다. 그들은 사랑에 대해 남들로부터 들은 이야기나 책에서 읽은 사랑 이야기만을 가지고 그 이야기가 모든 이의 운명에 꼭 맞는 것이라고 믿어 버립니다. 그들은 장난감을 만지작거리듯이 사랑을 갖고 놉니다. 그들은 아이들이 처음 담배를 피우게 된 것을 자랑 삼아 떠들듯이 사랑을 자랑하고 다닙니다. (p.30-31)

 

당신을 바라보는 저의 마음은 쉴 새 없이 긴장하고 두근거렸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전혀 느끼지 못하셨습니다. 그것은 당신의 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시계가 어둠 속에서 똑딱거리며 끊임없이 시간을 헤아리고 있음에도 그 태엽의 떨리는 몸짓을 당신이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과 똑같은 것이었죠. 수백만 번 초침을 똑딱거리면서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당신의 걸음걸음을 따라다녀도 저는 당신의 흔한 눈길 한번 받지 못하는 주머니 속의 시계와 같은 불쌍한 여자였답니다. (P.34)

 

남자의 눈에 비추어지는 소녀의 얼굴, 아니 여인의 얼굴이란 언제나 변해 가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여인의 얼굴은 열정적으로 달아오르다가도 언제 그랬던가 싶게 순수해지며 권태로운 빛을 반사하는 거울이 되기도 합니다. 마치 거울 표면이 비추어 주는 형상처럼 갖가지 모습으로 때마다 달라지는 것이 여인의 얼굴이죠. (p.60)

 

모든 것은 스쳐 지나갈 뿐이다! 스쳐 지나가 영영 잊혀질 뿐이다! (p.113)

 

떠난 사람은 언젠가 반드시 돌아오는 법이지요.

맞는 말씀입니다. 떠난 사람이 돌아오는 것은 분명하지요. 그러나 돌아온다고 해도 그때는 이미 과거를 다 잊어버린 뒤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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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추억은 결코 잊혀지지 않는답니다. 나는 당신을 내 기억 속에서 떠나보내지 않을 거예요. (p.114-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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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테판 츠바이크 (Stefan Zweig, 1881년 11월 28일 ~ 1942년 2월 22일)

 

1881년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수도 빈에서 부유한 유대인 면직사업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유대인이기는 했지만, 본인은 정작 그 혈통에 대해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으며[1] 나중에는 유대교를 신랄하게 비판할 정도였다. 한가지 재밌는 점은, 츠바이크 본인은 생애 전반에 걸쳐 유대인이 유럽 상류층에 동화될 수 있다는 태도를 견지했지만 정작 시오니즘을 창안한 테오도르 헤르츨[2]과도 평생에 걸친 절친이었다는 것이다. 빈 대학교에서 철학을 전공한 이후 1차대전 당시에는 자원입대[3]하여 국방부에서 근무한다.
츠바이크는 종전 후에도 언론인 겸 작가로 활발히 활동했지만 나치즘이라는 거대한 폭풍이 다가오고 있었다. 1933년 히틀러가 독일에서 집권한 이후 오스트리아에서도 오스트리아 나치당을 비롯한 극우세력들이 날뛰기 시작했고 츠바이크는 이를 피해 1934년 런던으로 망명한다. 2차대전이 발발하고 독일군이 서유럽을 빠르게 휩쓸자 츠바이크는 다시 미국으로 망명을 떠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아예 남미의 브라질로 거처를 옮긴다. 전황은 여전히 독일에게 유리했고, 이런 현실에 츠바이크의 절망감은 점점 깊어져만 간다. 1942년 2월 23일 츠바이크는 아내와 함께 숨진 채로 발견됐고, 사인은 자살, 정확히는 수면제 과다복용으로 밝혀졌다.
당시 독일의 음악가인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와 친분이 있었고 슈트라우스의 작품인 오페라 '말 없는 여자'(Die schweigsame Frau)의 대본을 작성하는 등 작품 협력을 하기도 했다. 슈트라우스는 유대인 문제를 두고 끝까지 나치와 대립했는데 여기엔 츠바이크의 사례도 있다. 위의 '말 없는 여자'의 초연 때 나치는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제작 명단 중 츠바이크의 이름을 지우라고 강요했으나 슈트라우스는 이를 거절했다. 결국 원래 초연에 참석할 예정이었던 괴벨스는 불참했고, 이후 오페라 자체도 금지 처분이 내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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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스 이야기, 낯선 여인의 편지 - 슈테판 츠바이크 (김연수 옮김, 문학동네, 2010)

초조한 마음 - 슈테판 츠바이크 (이유정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3)

 

광기와 우연의 역사 - 슈테판 츠바이크 (안인희 옮김, 휴머니스트, 2009)

 

마리 앙투아네트, 모르는 여인의 편지 - 슈테판 츠바이크 (양원석 옮김, 동서문화사,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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