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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
III. 고전 문학 (서양)/1. 서양 - 고전 소설

사랑에 관하여 – 안톤 체호프 (안지영 옮김, 펭귄클래식)

by handaikhan 2023. 2. 4.

 

안톤 체호프 단편집 (펭귄 클래식 70)

 

안톤 체호프 -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 (1899년)

 

사실상 쓰디쓴 경험이라 할 수 많은 경험을 통해 이미 오래전에 그가 깨달은 사실은, 여자들과의 만남이 처음에는 인생을 다채롭게 해주는 유쾌하고 사랑스럽고 가벼운 모험일 뿐이지만, 이른바 신사들, 특히 우유부단하고 소심한 모스크바 남자들에게는 반드시 아주 복잡한 문제들 일으키고, 결국 그들을 곤경에 몰아넣는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흥미로운 여인과 새로이 만날 때마다 이런 경험은 기억속에서 사라지고, 다시 살고 싶어지며, 모든 것이 너무도 단순하고 우습게 여겨지곤 했다. (p206)

 

구로프는 그녀를 바라보며 살다보면 얼마나 많은 만남이 있는지!’라고 생각했다. 그의 기억 속에는 태평하고 선량하며 사랑을 즐기고, 비록 짧을지라도 그가 준 행복에 감사하는 여인들에 대한 추억이 남아 있다. 또 예를 들어 그의 아내처럼 진심 없이 사랑하고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고 히스테리와 가식을 부리고, 그들이 나눈 것이 사랑이나 열정이 아니라 그보다 더 의미 있는 것이었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 여인들에 대한 기억도 있다. 또 두세 명쯤, 정말 아름답고 차가운 여인들에 대한 기억도 있다. 그들은 얼굴에 갑작스레 맹수 같은 표정을 지으며 삶에서 인생이 줄 수 있는 것 이상을 얻고 쟁취하려는 듯한 고집스러운 욕망을 드러내곤 했다. 그들은 나이가 제법 든 변덕스럽고 비이성적이며 강압적이고 어리석은 여자들로, 감정이 식고 나자 그들의 아름다움은 증오를 불러일으켰고 속옷에 달린 레이스마저도 고기비늘처럼 보였다.

하지만 안나 세르게예브나는 여전히 똑 같은 소심함, 경험 없는 젊음의 서툰 대응, 어색한 감정만을 보이고 있다. 마치 누군가 갑자기 문을 두드리기라도 한 듯 당황한 기색을 보이기도 했다. 안나 세르게예브나, 그러니까 이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은 지금 일어난 일을 좀 특별하게, 아주 진지하게, 그러니까 자신의 타락이라 생각하는 듯했고, 구로프에게는 그것이 이상하고 부적절해 보였다. 그녀는 기가 빠지고 시들어버린 얼굴을 하고는 얼굴 양옆으로 긴 머리를 서글프게 늘어뜨린 채, 오래된 그림에 나오는 타락한 여인처럼 우울한 자세로 생각에 잠겼다. (p211)

 

뭘로 변명을 할 수 있겠어요? 전 저속하고 나쁜 여자예요. 제 스스로 저를 경멸하니 변명할 생각은 없어요. 전 남편을 속인 게 아니라 저 자신을 속인 거예요. 사실 지금만이 아니라 이미 오래 전부터 그래 왔어요. 어쩌면 제 남편은 성실하고 좋은 사람인지도 몰라요. 하지만 그인 그저 하인이에요! 그 사람이 거기서 뭘 하는지, 어떻게 일을 하는지 전 몰라요. 하지만 그 사람이 하인이라는 건 알아요. 그 사람하고 결혼했을 때 전 스무 살이었어요. 전 호기심 때문에 답답했고, 뭔가 더 나은 걸 원했어요.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어요. 이것과 다른 삶도 있잖아…..제대로 살고 싶어! 살고, 또 살고 싶어….. 그런 호기심으로 미칠 지경이었어요. 당신은 그런 걸 이해 못 하실 거예요. 하지만 맹세 할 수 있어요. 전 더 이상 자신을 제어할 수가 없었어요. 제 안에서 분명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고, 더는 참을 수가 없어서 남편에게 아프다고 말하고 이곳으로 온 거예요…. 그러곤 여기서 열에 들떠서 미친 여자처럼 쏘다녔죠….그리고 이렇게 누구라도 경멸할 수 있는 저속하고 형편없는 여자가 되어버린 거예요. (p212-213)

 

오레안다에서 그들은 교회 가까이에 있는 벤치에 앉아 말없이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아침 안개 속으로 희미하게 얄타가 보였고, 산 정상에는 흰 구름이 미동도 없이 걸려 있었다. 나뭇잎들이 사각거리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고, 그저 매미들만 소리쳐 울었다. 그리고 아래에서 들려오는 단조롭고 황량한 파도 소리는 우리를 기다리는 안식, 영원한 잠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직 얄타도 오레안다도 없었을 때도 이렇게 소리를 냈을 것이고, 지금도 소리를 내고 있으며, 우리가 존재하지 않을 그때에도 이렇게 무심하고 황량한 소리를 낼 것이다. 이 항상성 속에, 삶과 죽음에 대한 전적인 무관심 속에 우리의 구원과 이 땅에서의 삶 그리고 끊임없는 진보가 약속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새벽 빛을 받아 너무도 아름다워 보이는 젊은 여인과 나란히 앉은 구로프는 바다, , 구름, 드넓은 하늘이라는 이 환상적으로 아름다운 배경에 매혹되어 마음이 평온해졌다. 진지하게 생각해 보면, 우리 스스로 존재의 고상한 목적과 인간의 가치를 망각한 채 생각하고 저지르는 일들을 제외하면, 사실 이 세상 모든 것은 아름답지 않은가. (p214-215)

 

하느님이 함께해 주시길. 몸조심 하세요. 절 나쁘게 생각하지 마세요. 우린 영원히 헤어지는 거예요. 그래야 해요. 왜냐면 아예 만나지 말았어야 했으니까요. 하느님이 함께해 주시길.

자신의 인생에서 또 한 건의 편력, 혹은 모험을 치렀고, 그것이 이미 끝났으며, 이제는 추억만이 남았다는 생각을 했다. 마음이 저리고 서글펐으며 가벼운 회환을 느꼈다. 사실 이제 더 이상 볼 수 없을 이 젊은 여인은 그와 있을 때 행복하지 않았다. 그는 그녀에게 친철했고 진심으로 대했지만, 그녀를 대하는 그의 어조와 애무에는 가벼운 조롱, 그리고 그녀보다 나이가 두 배는 많은 행복한 남자의 저속한 오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녀는 항상 그를 선량하고 특별하며 고결한 사람이라고 불렀다. 그녀가 그의 실체를 못 본게 분명하니,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결국 그녀를 속여 온 것이다. (p216-217)

 

이제 어찌어찌 한 달만 지나면 안나 세르게예브나도 그의 기억 속에서 안개에 덮이고, 다른 여자들처럼 어쩌다 꿈속에서나 가슴을 치는 그 미소로 나타날 것 같았다. 하지만 한달이 더 지나고 한겨울이 되었는데도 바로 어제 안나 세르게예브나와 헤어진 듯 기억 속의 모든 것이 너무도 선명했다. 그녀에 대한 회상은 점점 더 거세게 불타올랐다.

그는 오랫동안 방 안을 서성이며 회상하고 미소 지었다. 그러면 회상은 꿈으로 변하고 상상 속에서 과거는 미래의 일과 섞여 들었다. 안나 세르게예브나는 꿈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와 어디든 동행하며 그림자처럼 그를 따랐다. (p218)

 

얼마나 야만적인 사람들인가! 도대체 이 무의미한 밤과 지루한 날들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미친 듯 빠져드는 카드놀이, 폭식, 만취, 항상 똑 같은 이야기들. 불필요한 일과 늘 똑같은 대화가 인생 최고의 시간, 최고의 힘을 앗아가 버리고, 결국에는 날개도 꼬리도 잘려버린 삶, 웬 헛소리 같은 삶만 남는다. 하지만 거기서 도망치거나 떠나는 것도 불가능해, 정신병원이나 수인부대에 갇힌 듯 살아가는 것이다! (p220)

 

마침내 안나 세르게에브나가 들어왔다. 그녀는 세 번째 줄에 앉았다. 그녀를 본 그는 심장이 오그라드는 듯했고, 이 세상에 그녀보다 더 가깝고 소중하고 중요한 사람은 없다는 것을 명확히 깨달았다. 지방 도시의 촌스러운 인파에 섞여 잘 보이지도 않은 이 작은 여자, 손에는 조야한 오페라글라스를 든 이 평범한 여자가 그의 삶 전체를 채우는 슬픔이자 기쁨이요, 그가 원하는 유일한 행복이었다. 그리고 형편없는 오케스트라 연주와 한심하도록 저속한 바이올린 소리를 들염 그는 그녀가 너무나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p222-223)

 

그에게는 두 개의 삶이 있었다. 하나는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보고 알 수 있는 삶, 조건부의 진실과 기만으로 가득 차 누구에게나 명백한 삶이었다. 그 삶은 지인이나 친구들의 삶과 아주 비슷했다. 하지만 또 하나의 삶은 비밀스레 흘러갔다. 상황이 기이하게, 어쩌면 우연히 흐르다 보니 그가 중요하고 흥미롭고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스스로를 속이지 않으며 진실할 수 있는 것, 어쩌면 우연히 흐르다 보니 그가 중요하고 흥미롭고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스스로를 속이지 않으며 진실 할 수 있는 것, 삶의 핵심인 것은 다른 사람 몰래 이루어졌고, 진실을 숨기기 위해 숨어들었던 거짓이자 껍질, 예를, 은행에서의 업무, 클럽에서의 논쟁, 예의 그 ‘저급한 종족 이야기’, 아내와 함께 지인들의 기념일에 참석하는 일 등은 모두에게 명백했다. 그는 자기 기준으로 남들을 판단했기에 보이는 것을 믿지 않았고, 모두들 마치 밤 같은 비밀의 덮개 아래 흘러가는 진짜 인생, 가장 흥미로운 인생을 숨기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모든 사람의 개인적인 삶은 비밀스레 유지되고 있고, 부분적으로 그 때문에 문화적인 인간은 사적인 비밀을 지키는 일에 그토록 예민하게 구는지도 모른다. (p226-227) 

 

그는 이 사랑이 곧 끝나지는 않을 것이며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음을 확신했다. 안나 세르게예브나는 점점 더 많이 그에게 의존했으며, 그를 사랑했다. 그녀에게 이 모든 일이 언젠가 끝날거라고 말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조차 없는 일이었다. 아마 그녀는 그 말을 믿지도 않을 것이다.

그는 그녀에게 다가가 어깨를 어루만지며 장난을 쳤다. 그리고 그 순간 거울 속의 자신을 보았다.

그의 머리는 이미 세기 시작했다. 최근 몇 년간 자신이 이렇게 늙고 추해져 버린 것이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그의 손이 놓인 따스한 어깨는 떨리고 있었다. 그는 이 인생, 아직 이렇게 따스하고 아름답지만, 그의 삶처럼 이미 퇴색하고 시들기 시작하는 시점에 더 가까운 이 인생에 연민을 느꼈다. 도대체 그녀는 왜 이토록 그를 사랑하는 것일까? 여자들은 항상 그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보지 않았고, 그에게서 그 자신이 아니라 자신들의 상상이 만들어낸 사람, 삶 속에서 그들이 애타게 찾아 헤매던 그 사람을 만나 사랑했다. 그리고 자신들의 실수를 깨달은 후에도 여전히 사랑했다. 그중 단 한 여인도 그와 있어 행복하지 못했다. 세월이 흐르며 사람을 만나고 사귀고 헤어졌지만, 단 한 번도 사랑한 적은 없었다. 뭐라 불러도 좋지만, 그건 절대 사랑은 아니었다.

그리고 머리가 세기 시작하는 지금에야 그는 난생처음으로 제대로 된 진짜 사랑을 하게 되었다.

안나 세르게예브나와 그는 정말 가까운 친지들이, 남편과 아내가, 애틋한 친구들이 서로에게 하듯 그렇게 서로를 사랑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만남이 운명이라 믿었다. 그래서 도대체 왜 그가 결혼을 하고 그녀가 시집을 갔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은 서로 다른 새장에 갇혀 살게 된 두 마리의 암수 철새 같았다. 과거의 부끄러운 죄들을 서로 용서해 주었고, 현재의 모든 것을 용서했으며, 이러한 사랑이 자신들을 변화시켰음을 느꼈다.

전에는 이런 서글픈 순간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온갖 논리로 스스로를 안심시키려 했다면, 이제는 그런 논리를 펼 겨를이 없었다. 그는 그녀에게 깊은 연민을 느꼈고,, 진실하고 다정한 존재가 되고 싶었다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그러자 조금만 지나면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 것이고, 그러면 새롭고 아름다운 인생이 시작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멀고도 먼 길이 남아 있으며, 가장 복잡하고 어려운 것이 이제 막 시작되었음을 두 사람 모두 분명히 알 수 있었다. (p228-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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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Анто́н Па́влович Че́хов, 1860년 1월 29일 ~ 1904년 7월 15일)

러시아의 의사, 단편 소설가, 극작가이다.
체호프는 1860년 흑해 위에 있는 아조프 해 연안의 항구 도시 타간로크(Taganrog)에서 식민지 수입 상품점을 하는 아버지 파벨 예고로비치 (Pavel Egorovič)와 어머니 예브게니야 야코브레브나 모로조바 (Evgenija Jakovlevna Morozova)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난다. 조부는 원래 농노였으며 부친은 조그마한 채소가게를 했었다. 체호프는 어릴 때부터 가게를 도와야만 했다.
1867년 고향에서 고대 그리스어를 가르치는 예비학교를 다닌 후, 1869년 고전 교육을 목표로 하는 타간로크 인문학교에 입학한다. 1872년 성적 불량으로 3학년 과정을 반복하며, 3년 뒤 고대 그리스어 시험에 낙제하여 다시 5학년 과정을 반복한다.
지방정치와 교회합창에 너무 열중한 부친은 파산, 체호프 가족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기 시작하며, 학교 때문에 홀로 남은 체호프를 제외하고는 모두 모스크바로 나왔다. 15세의 체호프는 큰 형 알렉산드르와 함께 문학 창작에 열중한다. 두 형 알렉산드르와 니콜라이 그리고 동생 이반이 5년 과정으로 타간로크 학교를 졸업한 반면, 체호프는 1879년 8년 과정으로 학교를 졸업함으로써 대학 진학 자격을 얻는다. 같은 해 타간로크 모교로부터 장학금을 받아 모스크바로 올라가 그 곳에 이미 자리를 잡은 부모 형제들과 재회하며, 같은해 10월 모스크바 대학의 의학과에 입학한다. 그러나 이 때부터 체호프는 의학공부를 하는 한편 타간로크에서 받는 장학금과 상트페테르부르크나 모스크바의 잡지에 유머 단편을 써서 그 기고료로 부모와 세 동생의 뒷바라지를 한다.
1887년 연극 이바노프의 첫 상연이 있기까지 체호프는 문학잡지 《귀뚜라미(Strekoza)》, 《파편(Oskolski)》, 《자명종(Budilnik)》, 《페테르부르크 신문》 등에 100줄에서 150줄로 한정된 짧은 단편과 수필을 일주일이 멀다하고 기고한다. 특히 1883년에는 《Oskolski》에 매 이주일마다 모스크바의 일상을 스케치하는 컬럼을 맡는다. 체호프의 글은 호평을 받았으며 대학을 졸업할 무렵에는 이미 신진 소설가로서의 명성이 높았다.
이처럼 글을 써 돈벌이를 하는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1883년 10월부터 의학 졸업시험 준비에 열중하여 다음해 9월 졸업을 했다. 그러나 23세 때 걸린 폐결핵[1] 이 체호프의 건강을 늘 위협하게 된다. 그 해 11월에 처음 결핵 증세로 요양하게 되었다. 1884년에는 또한 첫 단편집 《멜포네네의 우화》가 출판된다.
톨스토이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체호프는[2] 시베리아, 사할린섬 여행을 계획하고 치밀한 준비를 한 끝에 1890년 4월 모스크바를 출발했다. 사할린 섬에 유배된 수인(囚人)들의 비참한 생활은 체호프의 마음에 강렬한 인상을 새겼다. 그는 후에 이때의 기행문을 쓴 바 있다.
7개월 이상이나 걸려 모스크바에 다시 돌아와 1892년, 교외에 저택을 사서 양친·누이동생과 함께 살게 된다. 의사로서 이웃 농부들의 건강을 돌보거나 마을에 학교를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1899년, 건강상태가 좋지 않아 얄타를 마주보는 크림 반도로 옮겼다.
1900년에는 러시아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되나 1902년 정부가 고리키의 아카데미회원자격을 박탈하였을 때 이에 항의하는 뜻으로 아카데미회원자격을 반납하였다. 1904년에 체호프는 폐결핵으로 말미암아 44년의 생애를 마쳤다.
체호프의 만년은 연극, 특히 모스크바 예술극단과의 유대가 강했고, 1901년에 결혼한 올리가 크니페르는 예술극단의 여배우이기도 했다.
그러나 체호프는 타간록 시대에 이미 연극에 흥미를 가졌으며, 직접 무대에 서기도 했다. 이 시기에 장막물(長幕物) 2편, 1막물 희극 1편을 썼으나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모스크바에 나와서는 4막물의 것을 써서 상연하려고 꾀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이 작품[3] 은 19세기 말의 러시아 사회상태를 배경으로 하여 태만한 환경에 반항하면서도 스스로는 아무런 의욕도 갖지 못하는 인물을 묘사하고 있다.
1887년에 쓰여진 <이바노프>는 모스크바 및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대성공을 거두었다. 기교적으로는 <프라토노프>보다 앞섰으나 아직도 과잉된 극적 효과를 노리는 낡은 수법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며, 다음의 <숲의 정(精)> 실패는 체호프의 극작을 한때 멈추게 했으나 이 무렵에 쓰인 1막물에는 <곰>(1888)이나 <결혼신청>(1889) 등 뛰어난 희극이 있다.
체호프의 극작 후기는 1896년의 <갈매기>에서 시작된다. 이 작품 및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바냐 아저씨>(1899), <세 자매>(1901), <벚꽃동산>(1903) 등은 모두 체호프의 대표작일 뿐만 아니라 근대극 가운데 걸작이며 이러한 작품에서 체호프는 일상생활의 무질서를 그대로 무대에 옮긴 듯한, 이른바 극적 행위를 직접적 줄거리로 삼지 않는 전혀 새로운 형태의 회화극(會話劇)을 확립했다.
<갈매기>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의 초연 때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으나 2년 후에 다시 새로 설립된 모스크바 예술극단이 다루었을 때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희극으로서 쓰여진 이 작품을 오히려 비극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린 연출가 스타니슬랍스키가 진정으로 작가의 의도를 이해하고 있다고 체호프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무튼 이후 체호프의 작품은 모두 모스크바 예술극단이 상연하게 됐다.
<바냐 아저씨>는 앞서의 <숲의 정>을 다시 쓴 것으로서 그 톨스토이즘이나 멜로드라마의 성격에서도 완전히 벗어나고 있다. <세 자매>는 초연 후 전집에 수록되자 다시 고쳐쓴 바 있다. 마지막 작품 <벚꽃동산>은 체호프의 44세 생일에 초연의 막이 올랐다.
체호프의 희곡(주로 후기의 4작품)은 오랫동안 러시아나 외국에서도 작자의 페시미스틱한 인생관을 반영한 러시아 귀족사회에 대한 만가(挽歌)로 간주되어 왔다. 그러나 체호프 자신은 그러한 견해에 거의 놀라움을 금하지 못할 정도였으며, 작품 안에 작자의 미래에 대한 희망이 넘칠 정도로 깃들여 있다는 것이 그 후의 정정(訂正)된 해석이다. <세 자매>나 <벚꽃동산>에서 서술되는 새로운 시대의 도래(到來)에 대한 전망은 체호프가 죽은 지 얼마 후에 실현된 러시아 혁명을 예언한 것이라고도 생각되고 있다.
그러나 체호프를 다만 비관적인 작가로부터 낙관적인 작가로 그 정의를 고치는 것만으로는 무의미할 것이다. 얼핏 보면 비극적이며 사진적(寫眞的)인 모방처럼 보이는 이러한 희곡이 사실은 매우 정교하게 계산된 극적 형식을 지니고 있다고 하는 체호프의 작극술(作劇術)을 구명한다는 것이 그를 이해하려는 첫걸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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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호프 단편선 - 안톤 체호프 (박현석 옮김, 민음사 세계문학 70)

체호프 단편선 - 안톤 체호프 (김학수 옮김,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35)

체호프 희곡 전집 - 안톤 체호프 (김규종 옮김, 시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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