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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
III. 고전 문학 (서양)/1. 서양 - 고전 소설

첫사랑 – 뚜르게녜프 (최진희 옮김, 펭귄클래식코리아)

by handaikhan 2023. 2. 4.

 

펭귄클래식 코리아 세계문학 마카롱판본

뚜르게녜프 - 첫사랑 (1860년)

 

그때 내 나이 열여섯이었다.

 

그 시절에 내 머릿속에는 여인의 형상이나 사랑의 환영이 구체적인 형태로 떠오른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기억한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모든 것, 내가 느끼는 모든 것 안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이 달콤하고 새로운 여성적인 어떤 것에 대한 예감이, 반쯤은 희미하게 부끄러운 듯 감추어져 있었다……

그 예감, 그 기대감이 나의 몸 구석구석에 스며들었다. 나는 그 예감으로 호흡했고, 그것은 내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스며 혈관을 따로 흘러들었다그 예감은 곧 이루어질 운명이었다. (p34)

 

내 앞으로 몇 발자국 떨어진 풀밭 위 파란 산딸기나무관목사이로, 분홍빛 줄무늬 드레스를 입고 머리에는 흰색 스카프를 두른 키가 크고 날씬한 아가씨가 서 있었다. 그녀의 주위에는 네 명의 젊은 남자들이 몰려 있었다. 그녀는 이름 모를, 그러나 아이들은 잘 아는 작은 회색빛 꽃으로 그들의 이마를 차례로 건드렸다. 그 꽃들은 작은 주머니 모양을 하고 있었는데 단단한 무언가에 부딪히면 소리를 내며 터지는 것이었다. 젊은 남자들은 그렇게 기꺼이 자기 이마를 내밀었다. 그런데 아가씨의 몸짓에는 매혹적이면서 거부할 수 없고, 상냥하면서도 조롱하는 듯한 어예쁜 무언가가 있었다. 나는 너무 기쁘고 놀란 나머지 소리를 지를 뻔했다. 그 아름다운 손가락이 내 이마도 건드려주기만 한다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다 주어도 좋을 것만 같았다. 총이 손에서 미끄러져 풀밭 위로 떨어졌다. 그리고 나는 모든 것을 잊었다. 나는 그녀를 집어삼킬 듯 바라보았다. 날씬한 몸의 선, 가는 목, 아름다운 손, 흰색 스카프 아래 약간 헝클어진 금발머리, 반쯤 감은 영리한 눈과 눈썹, 그 아래 부드러운 뺨

나는 온몸이 떨리고 정신이 아득해졌다….

바로 그 순간에 아가씨가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활달하면서 생기 넘치는 얼굴의 커다란 회색 눈동자가 보였다. 갑자기 그녀의 얼굴 전체가 떨리더니 웃기 시작했다. 하얀 이를 반짝거렸고 눈썹이 우스운 듯 올라갔다나는 얼굴이 달아올라 땅에서 총을 집어 들고 낭랑한, 그러나 악의 없는 웃음소리를 뒤로 한 채 내 방으로 도망쳤다. 나는 침대에 몸을 던지고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심장이 세차게 고동쳤다. 몹시 부끄럽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했다. 나는 전에 없던 흥분을 느꼈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난 뒤 나는 머리를 빗고 옷매무새를 고친 다음 차를 마시러 아래층오 내려갔다. 젊은 처녀의 모습이 눈앞에 떠올랐다. 심장의 요동은 멎었지만 왠지 가슴은 유쾌하게 죄어들었다.

나는 아버지에게 모든 이야기를 다 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다만 혼자 미소를 지었다. 잠자리에 들면서 나는 아무런 이유도 없이 한 발을 딛고 두세 번 뱅그르 돈 다음 머리에 포마드를 발랐다. 새벽녘에 잠깐 잠이 깼지만, 머리를 들어 황홀한 기분으로 주위를 둘러본 뒤 다시 잠이 들었다. (p36-38)

 

나는 그녀가 눈을 들지 않는 틈을 이용해서 그녀의 모습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은밀하게 쳐다보았지만, 점점 더 과감해졌다. 그녀의 얼굴은 어제보다 훨씬 더 아름답게 보였다. 그 얼굴의 모든 것이 섬세하고 총명하며 매력적이었다. 그녀는 흰색 커튼이 쳐진 창을 등지고 앉아 있었다. 햇살이 이 커튼을 통화하여 그녀의 부드럽고 숱이 많은 황금빛 머리카락과 천진한 목, 기울어진 어깨 그리고 부드럽고 평온한 가슴에 가벼운 빛을 뿌리고 있었다. 그렇게 그녀를 바로보는 사이에 그녀는 내게 정말 소중하고 가까운 사람이 되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그녀를 알고 있었고, 그녀가 나타나기 전의 나는 아무것도 몰랐으며, 살아도 산 것이 아니었던 것처럼 느껴졌다그녀는 오래전에 낡아버린 어두운 빛깔의 드레스에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누가 이 드레스의 앞치마의 주름 한자락이라도 만지게 해준다면 기꺼이 그렇게 할 듯했다. 그녀의 신발 코가 드레스 밖으로 보였다. 나는 경건한 마음으로 이 신발에 절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이렇게 나는 그녀 앞에 앉아 있다. 나는 그녀와 알게 되었다행복하다, 세상에, 이런! 나는 환희에 차, 하마터면 자리에서 일어날 뻔했다. 그렇지만 맛난 음식을 먹는 아이처럼 발만 조금 흔들었을 뿐이다.

물 만나 고기처럼 나는 꼼짝도 하지 않고 백 년이라도 이방을 나가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의 눈꺼풀이 조용히 들렸다. 그러고는 다시 그녀의 밝은 눈동자가 내 앞에서 상냥하게 빛났다. 그녀의 또 다시 웃음을 지었다.(p46-47)

 

헤어질 때 지나이다는 내 손을 꼭 잡고 서 다시 수수께끼 같은 미소를 지었다.

몹시 흥분된 내 얼굴 위로 밤의 무겁고 습한 냄새가 불어왔다. 뇌우가 시작될 것만 같았다. 하늘에는 검은 구름이 자욱한 연기처럼 커지며 번져갔다. 바람이 어두운 숲 속에서 불안하게 몸서리를 쳤다. 그리고 멀리 지평선 너머에서 화난 천둥이 마치 혼잣말 하듯 먹먹하게 으르렁거렸다. (p65-66)

 

하인에게 혼자 옷을 갈아입고 자리에 들겠다고 말하고 촛불을 껐다. 그러나 나는 옷을 갈아입지도 않고, 눕지도 않았다.

의자에 걸터앉아서 마술ㄹ에 걸린 듯 오랫동안 그대로 있었다. 내가 느꼈던 것은 너무나 새롭고 달콤한 것이었다아주 잠깐 주변을 둘러보고는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서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간간이 기억을 떠올리며 소리 없이 웃기도 했다. 나는 사랑에 빠졌고 그 상대가 바로 그녀이며, 이것이 곧 사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마음이 알싸해졌다. 지나이다의 얼굴은 어둠속에서 내 앞에 조용히 떠다녔다. 떠다니고 또 떠다녔다. 그녀의 입술은 너무나 수수께끼 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묻고 싶은 게 있는 듯 생각에 잠겨 내 옆에서 부드럽게 나를 바라보았다우리가 헤어지던 그 순간처럼. 마침내 나는 의자에서 일어서서 발끝으로 걸으며 침대로 갔다. 그리고 옷도 벗지 않은 채 조심스럽게 머리를 베개에 얹었다. 격한 몸놀림으로 인해 나를 가득 채운 감정들이 흔들리기라도 할까 봐

자리에 누웠지만 눈조차 감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흐릿한 빛이 내 방을 계속해서 비추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몸을 일으켜 창을 바라보았다. 신비롭고 아련하게 빛을 발하는 창유리 위에서 창살이 선명하게 보였다. 뇌우로군하고 생가했다. 분명 뇌우가 맞긴 했지만 아주 멀리서 일어난 것이어서 천둥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다만 하늘에는 긴 가지를 사방으로 뻗은 듯 선명하지 않은 번개가 끊임없이 번쩍이고 있었다. 번개는 번쩍인다기보다는 죽어가는 새의 날개처럼 바르르 떨렸다. 나는 일어나서 창문으로 다가가 아침까지 계속 서 있었다…..번개는 한순간도 그치지 않았다. 세간에서 말하듯, 참새의 밤이었다. 조용한 모래밭, 네스쿠츠니 정원의 거대한 어둠, 멀리 보이는 건물의 노란색 정면이 흐린 번개 불빛에 전율하는 광경을 바라보았다그 광경에서 눈길을 뗄 수가 없었다. 이 조용한 번개, 이 절제된 섬광은 내 안에서 번뜩이는 침묵의 신비한 충동에 맞추어주는 듯했다. 아침이 밝기 시작했다. 새벽녘이 붉은빛으로 물들었다. 해가 떠오르고 모든 것이 창백해졌다. 번개도 멎기 시작했다. 번개는 점점 잦아들더니 떠오르는 태양의 선명하고 상쾌한 빛 속에 잠기면서 마침내 사라졌다

내 마음속의 번개도 사라졌다. 심한 피로와 적막감이 느껴졌다그러나 내 영혼 위에 승리를 거둔 지나이다의 모습은 사라질 줄 몰랐다. 다만 그 모습 스스로 안정을 찾은 것 같았다. 습지 수풀 위를 날아오르는 백조처럼 그녀의 모습은 보기 흉한 다른 주변 형체들과 선명히 구별되었다. 잠이 들면서 나는 석별의 정과 애정 어린 신뢰를 담아 그녀의 모습에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고개를 숙였다.

, 감동받은 영혼의 상냥한 마음과 부드러운 소리, 선량함과 평안, 그 첫사랑의 감동이 주는 황홀한 기쁨이여! 너는 어디에 있는가, 어디에? (p66-68)

 

나의 열정은 그날부터 시작되었다. 그때 내가 느낀 것은 처음 직장에 근무를 하게 된 사람이 느끼는 감정과 비슷했던 것 같다. 이제 나는 단순히 어린 소년이 아니었다. 나는 사랑에 빠진 남자가 되었다. 그날 이후로 나의 열정이 시작되었으며, 덧붙여 나의 고통도 바로 그날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나는 지나이다가 없는 것에 괴로워했다. 내 머릿속에는 아무 생각도 없었다. 모든 것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갔다. 온종일 그녀를 열렬히 생각했다….괴로웠다….그러나 그녀가 있을 때에도 상황은 더 나아지지 않았다. 나는 질투했고, 보잘것없는 자신을 의식하며 바보처럼 멍청하고 비굴하게 굴었다. 어째든 극복할 수 없는 힘이 나를 그녀에게 이끌었다. 나는 매번 행복에 절로 떨며 그녀의 방 문지방을 넘었다. 지나이다는 내가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리고 나도 숨기려 하지 않았다. 그녀는 나의 열정을 가라앉히고 바보로 만들기도 하고, 응석을 받아주기도 하며 괴롭혔다. 타인에게 위대한 기쁨과 깊은 슬픔의 유일한 원인이자, 화답할 수 없는 강력한 원인이 된다는 것은 달콤한 일이다. 지나이다의 품에서나는 마치 부드러운 밀랍 같았다. 게다가 그녀에게 빠진 것은 나 혼자가 아니었다. 그녀의 집을 방문하는 모든 남자들은 그녀 때문에 미칠 지경이었다. 그녀는 모두를 자기 발목 옆에 묶어두었다. 희망이든, 위험ㅁ이든, 그들을 자극하거나 자신의 변덕에 따라 그들을 뜻대로 하는 것이 그녀에게는 재미있는 일이었다. 그들은 반대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고 그녀의 말에 기꺼이 순종했다. 그녀의 생명력 넘치는 아름다운 존재 안에는 교활함과 부주의함, 꾸며냄과 순박함, 고요와 소란이 특별히 매혹적으로 조합되어 있었다. 그녀가 행하고 말한 모든 것, 그녀의 모든 움직임에는 섬세하고 미묘한 아름다움이 있었다. 모든 것 안에는 특별한 유희적 힘이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끊임없이 변했고, 유희를 벌였다. 조롱, 깊은 상념, 열정이 거의 동시에 그녀의 얼굴에 드러났다. 바람이 살랑이는 햇빛 찬란한 한낮의 구름이 만들어내는 그림자처럼 가볍고 빠르게, 극도로 다양한 감정이 그녀의 눈동자와 입술 위를 줄곧 오르내렸다. (p74-75)

 

혹시 내가 그를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한번은 그녀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아니에요. 내가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봐야 되는 그런 사람들을 좋아할 수는 없지요. 나는 나를 굴복시킬 수 있는 사람을 원해요….하지만, 그런 사람을 만나지 않을 거예요. 신은 자비로우시니까요! 누구의 손아귀에도 잡히지 않을 거예요, 절대!

그건 누구도 사랑하지 않겠다는 뜻인가요?

당신은 어떨까요? 내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을까요? 그녀는 이렇게 말하며 장갑 끝으로 내 코를 건드렸다.

그렇다, 지나이다는 나를 한껏 조롱했다. 3주 동안 나는 매일 그녀를 보았다. 그녀와 나는 온갖 일을 만들어냈다. 그녀가 우리 집에 오는 일은 드물었지만 나는 안타깝게 생각하지 않았다. 우리 집에 온 그녀는 귀족 아가씨, 공작의 딸로 변신했고 나도 그런 그녀를 피했다. 어머니 앞에서 사실이 폭로될까 두려웠다. 어머니는 지나이다를 매우 홀대했으며, 적의에 찬 눈으로 우리를 지켜보았다. 아버지는 그다지 겁나지 않았다. 아버지는 내게 별로 관심이 없어 보였고, 기회는 적었지만 아버지는 그녀와 각별히 지적이고 의미 있는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나는 공부도 독서도 그만두었다. 심지어 집 근처를 산책하는 것도, 말을 타고 나가는 것도 그만두었다. 다리에 딱 붙은 딱정벌레처럼 사랑하는 곁채 주변을 끊임없이 맴돌았다. 그곳에 영원히 머무를 수도 있을 것 같았다….그러나 그런 일은 불가능했다. 어머니가 내게 잔소리를 했고 가끔은 지나이다도 나를 쫓아냈다. 그럴 때면 나는 방문을 잠그고 들어앉거나, 정원의 맨 끝에 자리한, 예전에는 돌로 높게 지었지만 지금은 허물어진 온실에 가곤 했다. 그 온실 잔해 위로 올라가 길에 면한 벽에 다리를 늘어뜨리고 앉아서,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데도 몇 시간씩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내 옆에서는 흰 나비들이 게으르게 날아다니며 먼지투성이 엉겅퀴 위를 이리저리 옮겨다녔다.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반쯤 부서진 붉은 벽돌 위에는 번잡한 참새들이 끊임없이 몸을 뒤척이고 꼬리를 펴대면서 흥분한 듯 지저귀어댔다. 여전히 의심 많은 갈가미귀들은 자작나무의 헐벗은 꼭대기 위에 높이 앉아서 이따금 깍깍거렸다. 태양과 바람은 빈약한 나뭇가지들 사이를 조용히 노닐었다. 때때로 돈스키 수도원에서 평온하면서 구슬픈 종소리가 들렸다. 자리에 앉아서 나는 앞을 바라보며 소리를 들었다. 슬픔, 기쁨, 미래의 예감, 희망과 삶의 공포가 모두 담긴 알 수 없는 감정에 빠지기도 했다. 그때의 나는 이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내 안에서 헤매는 그 모든 것의 이름을 감히 부를 수 없었다. 아니, 모든 것은 하나의 이름으로 부를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지나이다의 이름이었다.

지나이다는 고양이가 쥐를 데리고 놀 듯 나를 데리고 놀았다. 그녀가 내게 교태를 부리면 나는 흥분하여 녹아드는 것 같았다. 때로는 돌연 나를 멀리하기도 했는데, 그럴 때면 그녀에게 가까이 갈 수도 감히 쳐다볼 수도 없었다. (p78-79)

나를 많이 사랑하시나요? 마침내 그녀가 물었다. ?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답할 필요가 있었겠는가?

그렇군요. 그녀는 전처럼 나를 바라보며 되풀이하여 말했다. 그래요. 똑 같은 그런 눈동자. 그녀는 덧붙여 말했다. 그리고 생각에 잠겨서는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모든 것이 싫어졌어요. 그녀가 속삭였다. 세상 끝가지 가버렸으면. 참을 수가 없어요,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어….앞으로 무엇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너무 힘들어요, 너무. 맙소사!

무슨 일이에요? 나는 소심하게 물었따.

지나이다는 대답을 하지 않고 어깨만 으쓱거렸다. 나는 계속 무릎을 끓고 앉아 너무도 고통스러운 마음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내 심장 깊숙이 새겨졌다. 이 순간 나는 그녀가 슬퍼하지 않게만 할 수 있다면 내 목숨이라도 기꺼이 내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쨌든 그녀가 힘들어하는 이유를 몰랐던 나는 그녀가 슬픔을 참지 못하고 갑자기 정원으로 나가 꺽이듯 땅으로 쓰러지는 모습을 머릿속으로 선명히 그려냈다. 사위는 밝게 빛나고 초록빛이었다. 바람은 지나이다의 머리 위에서 때때로 산딸기나무의 긴 가지를 한닥거리며 나뭇잎 사이에서 작은 소리를 냈다. 어디선가 비둘기들이 구구거렸고 꿀벌들은 풀이 듬성한 땅 위를 낮게 날며 웅웅거렸다. 머리 위에서는 하늘이 상냥하게 푸르렀다. 그리고 나는 몹시 슬펐다…. (p80-81)

 

거기 그 높은 곳에서 무얼 하시나요? 좀 이상한 웃음을 지으며 그녀가 내게 물었다.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고 계속 말씀하셨죠. 나를 진정 사랑한다면 나를 향해 아래로 뛰어내려 보세요.

지나이다가 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벌써 나는 아래로 뛰어내렸다. 누군가가 뒤에서 나를 떠민 것 같았다. 담의 높이는 약2사젠이었다. 땅에 닿는 순간 제대로 발을 디디긴 했지만 충격이 너무나 커서 균형을 잡을 수가 없었다. 나는 넘어져서, 순간 정신을 잃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눈을 뜨지는 않았지만 내 옆에 있는 지나이다가 느껴졌다.

사랑스러운 어린애 같으니. 그녀는 내 앞에 머리를 숙이며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럽게 떨리고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을, 어떻게 내 말대로 할 수가 있어….당신을 정말 사랑해일어나.

내 옆에서 그녀의 가슴이 숨을 쉬고 그 손이 내 머리를 매만졌다. 그리고 갑자기….그 순간 대체 무슨 일이 내게 일어난 걸까! 그녀의 부드럽고 신선한 입술이 내 얼굴에 키스를 퍼부었다….그 입술이 내 입술을 건드렸다….그러나 거기서 아마도 내 표정으로 내가 정신을 차린 것을 느낀 지나이다는 빠르게 몸을 일으킨 후 말했다.

, 일어나세요. 거짓말쟁이 같으니. 미치광이. 왜 그런 먼지구덩이에 누워 있는 거죠?

나는 몸을 일으켰다.

내 양산을 집어주세요. 어디로 던져버렸는지 보이죠? 그런 식으로 나를 보지 마세요무슨 바보 같은 짓이에요? 다치지 않았어요? 엉겅퀴에 찔린 것 같은데요? 나를 그렇게 쳐다보지 말라니까, ….그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해. 대답도 하지 않네. 그녀가 마치 혼잣말하듯 덧붙여 말했다. 집으로 가세요, 므슈 볼데마르, 가서 좀 깨끗이 씻으세요. 그리고 내 뒤를 따를 생각일랑은 아예 하지 마세요. 그렇지 않으면 화를 낼 거예요. 그리고 앞으로는 절대로….

그녀는 말을 끝마치지도 않고 재빨리 자리를 떴다. 나는 길우에 웅크리고 앉았다….다리가 풀렸다. 그렇지만 그때 내가 받은 지극한 행복감은 이후 평생 한 번도 다시 느껴보지 못했다. 그 감정은 내 몸 곳곳에 달콤한 고통으로 남았고, 결국 환희에 차서 뛰고 소리를 지르는 것으로 해소되었다. 분명 나는 아직 어린애였다. (p96-98)

 

, 여왕은 사람들의 찬사와 음악 소리를 듣고는 있지만, 손님들 중 누구도 쳐다보지 않습니다. 여섯 개의 창문이 위아래로, 천장에서 바닥까지 열려 있지요. 창문 너머로 커다란 별들이 반짝이는 검은 하늘과 커다란 나무들이 있는 어두운 정원이 보입니다. 여왕은 정원을 바라봅니다. 나무 옆에 분수가 있습니다. 분수가 어둠 속에서 희미한 빛을 냅니다. 유령처럼 길고 긴 분수. 여왕은 말소리와 음악 소리 사이로 조용한 물소리를 듣습니다. 그녀는 바라보고 생각해요. 당신들 모두는 고결하고, 지적이고 부유합니다. 당신들이 나를 에워싸고 있군요. 당신들은 내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귀히 여기지요. 당신들 모두 내 발아래 머리를 조아릴 각오가 되어 있지요. 나는 당신들을 소유하고 있습니다….그런데 저기 분수 옆에, 소리 내어 떨어지는 물 옆에 내가 사랑하는, 나를 소유한 남자가 나를 기다립니다. 그는 값비싼 옷을 입지도, 화려한 보석을 달고 있지도 않습니다. 아무도 그를 모르지만 그는 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내가 올 것을 확신하고 있지요. 그리고 나는 그에게 갑니다. 나는 그에게 가고 싶고 그와 함께 있고 싶어요. 그곳 정원의 어둠 속에서 나무의 속삭임 아래, 분수의 물소리 아래에서 그와 함께 사라지고 싶은 나를 멈추어 세울 수 있는 권력은 없습니다. (p115-116)

 

이것이 사랑인 것이군, 이것이 열정이야! 그날 밤, 그제야 공책과 책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책상 앞에 앉아서 다시 그 말을 되뇌었다. 어떻게 분개하지 않을 수 있어, 무엇이 되든 어떻게 때리는 것을 참을 수 있지? 가장 사랑하는 손이 그런 것이라도사랑하면 그럴 수도 있는 거겠지그렇지만 나는내가 상상한 바로는….

이후 한 달 동안 나는 많이 성숙해졌다. 두 사람의 사랑은, 어렴풋한 어둠 속에서 헛되이 억지로 분간해 내고 싶은 아름답지만 준엄한 미지의 얼굴처럼, 나의 이해수준을 넘어서는 노라운 것이었다. 그런 사랑 앞에서 나의 설렘과 사랑의 고통은 너무나 어린애같이 작고 보잘것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p147)

 

, 청춘이여! 청춘! 네게는 아무것도 상관없겠지. 너는 우주의 모든 보물을 가진 것 같겠지. 슬픔조차도 너를 기쁘게 하지. 네겐 비애조차도 어울려. 너는 자신만만하고 불손하지. 너는 나는 혼자 살아간다, 보아라! 라고 말할 테지. 바로 그날로 흔적도 없이, 계산도 없이 모든 것이 지나가고 사라지게 될 것이다. 네 모든 것은 태양 아래 양초처럼, 눈처럼 사라질 테니아마도 너의 아름다움의 비밀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가능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가능성에 있을 것이다. 바로 네가 다른 곳에다 쓸 생각도 못한 그 힘을 바람결에 자유롭게 놓아 보내는 것에 너의 비밀이 숨어 잇지. 우리 모두는 자신을 진심ㅁ으로 낭비자라고 생각하며,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만 않았더라도 무슨 일이든 다 했을 텐데! 라고 말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확신하지.

그리고 여기 나….순간 나타난 첫사랑의 유령을 한숨 한 번으로, 우울한 느낌 하나로 겨우 배웅하면서 나는 무엇을 기대하고, 무엇을 바라며, 어떤 풍요로운 미래를 예견했던가?

내가 기대했던 모든 것 중 무엇을 이루었던가? 그리고 이제 삶이 저녁 그림자를 향해 달리기 시작한 지금, 그 빠르게 날아가 버린 봄날 아침의 뇌우에 대한 기억보다 더 신선하고 더 귀한 것이 있을까?

그러나 자신을 탓하는 것은 헛되다. 그때, 그 생각이 짧았던 젊은 시절의 나도 나를 부르던 슬픈 목소리에, 무덤에서 내게 날아온 장엄한 소리에 귀를 열었었다. 지나이다의 죽음을 알게 된 며칠 뒤, 나는 거부할 수 없는 이끌림에 이웃에 살았던 가여운 한 노파의 죽음을 지켜보게 되었던 기억이 난다. 딱딱한 판자 위에서 보퉁이로 머릿밑을 받치고 누더기를 덮은 그녀는 힘겹고 고통스럽게 죽어갔다. 그녀는 기쁨도 알지 못했고, 행복의 단 꿀도 맛보지 못했다. 그녀에게는 죽음, 그것이 주는 자유와 안이 어찌 기쁘지 않을까 생각되었다. 그녀의 허약한 몸이 아직 힘겹게 버텨내고 있을 때, 얼음 같은 손 밑으로 심장이 아직 고통스럽게 오르내릴 때, 노파는 연거푸 성호를 그으며 계속해서 신이여, 제 죄를 사하소서 하고 속삭였다. 그리고 마지막 의식의 불꽃과 함께 그녀의 눈에서 죽음의 공포와 두려운 빛이 사라졌다. 거기서, 이 가난한 노파의 추한 모습에서 나는 지나이다를 떠올리며 두려워졌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나는 그녀를 위해, 아버지를 위해 그리고 나 자신을 위해 기도하고 싶어졌다. (p15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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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세르게예비치 투르게네프 (1818 - 1883)

러시아의 대표적인 자유주의 인텔리겐치아 출신으로, 독일에서 유학을 하고 돌아온 뒤, 알렉산드르 푸시킨 , 니콜라이 고골 등 대표적인 러시아 진보 지식인들을 만난 후 '서구파'에 가입하면서 본격적으로 문학 활동을 시작했다. 대표작인 <첫사랑>, <루딘>등의 소설은 세련된 필체와 묘사로 유명하다. 중년기 이 후에는 로마노프 왕조의 구체제에 반대하는 소설을 다수 썼다.
이반 투르게네프의 아버지, 세르게이 니콜라예비치 투르게네프는 굉장한 미남이었다 한다. 세르게이는 자신의 아버지(즉 이반의 할아버지) 니콜라이가 빚을 갚지 못해서 채권자 감옥에 끌려갈 상황이 되자 니콜라이는 아들 세르게이 앞에서 무릎을 꿇고 빌면서(...) 제발 잘생긴 외모를 이용해서 부자 여성과 결혼해 자신을 구해달라고 부탁하고, 결국 아버지의 성화에 못 이긴 세르게이는 자신보다 7살 연상이던 부잣집 유산을 홀로 다 물려받았던 (후에 이반의 어머니가 되는) 바르바라 페트로브나 루토비노바와 결혼했고, 그녀와의 사이에서 아들 이반을 낳았다.
어릴적의 투르게네프는 기병 장교였던 아버지가 계속 외도와 도박을 하며 집 밖을 돌아다니다가 일찍 죽고 난 뒤, 오렐 지방의 대지주 집안 출신으로 유산을 홀로 다 물려받았던 어머니의 양육을 받았다. 투르게네프의 어머니는 프랑스인과 독일인 가정교사를 불러와 투르게네프를 가르치게 했고 프랑스어로 말하게 했다. 그래서 투르게네프는 일상 생활에서도 프랑스어를 써야 했고 신에게 바치는 기도도 프랑스어로 해야 했다. 반면에 러시아어는 농노 하인에게서 배웠고 러시아어로 된 책은 8살 때 처음으로 보았다. 그가 러시아의 대문호로 날리게 되는 미래를 생각하면, 굉장한 아이러니가 따로 없었다.
투르게네프에 대해 가장 유명한 것은 러시아 농노 문제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이다. 대지주였던 그의 어머니는 농장을 관리하면서 사소한 잘못에도 체벌을 가하고 시베리아로 보내버릴 정도로 농노들을 무자비하게 징벌했다. 그리고 그녀는 농노들을 마구 후려쳤던 채찍으로 아들도 함께 때렸을 정도로 차갑고 냉정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투르게네프는 어릴 적부터 이런 어머니의 행동에 대해 반감을 가졌고 1850년에 어머니가 죽자마자 물려받은 농노 약 천 명을 해방시켰다. 투르게네프의 이러한 행동은 러시아 귀족 사회의 주목을 받았다.
농노를 해방하고 몇 년 후에 발표한 <사냥꾼의 수기>는 당시 유럽에서 유행하던 여행기 양식을 빌은 책으로 러시아뿐 아니라 서구권까지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러시아 식자층 사이에서는 농노 역시 다양한 감정을 가진 인간이라는 점을 환기시켰고, 책이 프랑스어로 번역되면서 유럽 각지에 당대 러시아 농노 문제에 대한 심각성을 알렸다. 심지어 당국이 이 책 때문에 그를 체포, 감금할 때, 러시아 전역에서 반대 여론이 거세게 들고 일어났을 정도. 투르게네프가 체포당할 당시 '대체 뭔 내용이길래 난리야?'하고 놀란 대중들에 의해 사냥꾼의 수기 초판이 순식간에 매진되면서 다시 금서로 지정하는 일마저 불가능해졌다. 금새 매진된 책이 재판을 거듭하면서 농노제 폐지 여론에 힘을 더해주었고 결국 투르게네프의 사냥꾼의 수기 출간은 1861년 2월에 농노 해방령으로 이어지는 엄청난 결과로 이어졌다.
결국 러시아 정부로부터 추방당한 투르게네프는 이후 파리에 살면서 러시아 농노제를 반대하는 각종 작품을 발표하여 서구권과 러시아의 인텔리로부터는 찬사를, 정부로부터는 공갈협박을 받았다. 그후, 1883년 친하게 지내던 비아르도 부인의 별장에 있는 별저에서 병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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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르게네프 - 사냥꾼의 수기 (김학수 옮김, 동서문화사)

뚜르게녜프 - 아버지와 아들 (이항재 옮김, 문학동네)

 

투르게네프 - 루진 (이항재 옮김, 열린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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