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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
III. 고전 문학 (서양)/1. 서양 - 고전 소설

인간의 조건 – 앙드레 말로 (박종학 옮김, 홍신문화사)

by handaikhan 2023. 2. 4.

앙드레 말로 - 인간의 조건 (1933년)

 

부상자의 반은 죽었겠지. 고통이란 그것이 죽음으로 끝나지 않을때에만 의미가 있는 법이야. 그런데 대개 고통은 죽음으로 끝나거든.

그렇군요. 하지만 그것은 아마 남자들의 생각이겠죠. 나로서는, 말하자면 한 여자로서는 고통이란 죽음보다는 삶을 생각하게 하거든요. 아마 여자는 애를 낳기 때문인지….

부상자가 늘면 늘수록, 봉기가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사람이란 이성과의 결합을 원하나 봐요.

그런 모양이야

이 얘기를 들으면 기분이 좀 나쁘겠지만, 당신한테 해둘 이야기가 있어요.

나 오늘 오후에 랑글랑과 자고 말았어요.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육감적인 표정은 저 젖은 듯한 눈과 도톰한 입술이 얼굴의 다른 표정과 뚜렷이 대조되어 여자다움을 돋보이게 하기 때문이 아닐까, 하고 그는 생각했다.

당신, 기분 나빠요?

지금까지 내가 말해오지 않았어. 당신은 당신 마음대로라고. 더 이상 묻지 말아줘.

그는 괴로운 듯이 대꾸했다.

당신은 언제나 자유로운 몸이야. 아무러면 어때.

하지만 난 당신한테 그 말을 안 할 수가 없었어요. 나 자신을 위해서도요.

알겠소.

그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고 싶어졌다. 그러나 무엇 때문에 일어난단 말인가? 모든 것이 이렇게 허무한데….그래도 그는 여전히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앞으로도 아내는 그를 괴롭힐 것이라는 생각이 그를 고통스럽게 했다. 그런데 요 몇 달 전부터 그는 아무리 메이의 얼굴을 찬찬히 쳐다보려 해도 이미 그녀를 볼 수 없게 되었다. 때때로 어떤 표정을 제외하고는 가끔 초조해하면서도 둘을 병든 어린아이처럼 만들어주던 그 사랑, 서로의 삶과 죽음을 같이하겠다고 생각하던 공통의 의식, 서로의 육체적인 결합, 그러한 모든 것도, 우리들의 눈이 흡족하게 즐겨웠던 그 모습들을 점차 퇴색시켜버리는 그 숙명 앞에서는 사실 허무한 것이었다. 내가 생각한 것만큼 메이를 사랑하지 않은 게 아닐까? 하고 그는 생각했다. 아니 그럴 리 없다. 지금이라도 만약 그녀가 죽는다면 나는 희망을 가지고 정의를 위해 더 일할 수가 없으리라. 일한다 하더라도 죽은 사람처럼 절망적인 기분으로밖에 일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기요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마치 안개 속이나 땅속에 파묻혀 있듯이 그들의 동거생활 밑바닥에 파묻혀 있는 그 얼굴이 자꾸 퇴색되어가는 데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근 한 친구의 사랑하는 아내가 두뇌 작용이 마비되어 몇 달 동안 전혀 의식을 상실했던 일이 생각났다. 그도 지금 그 친구의 경우처럼 메이가 죽어버려서 그의 행복의 형태가 잿빛 하늘에 녹아드는 구름처럼 허망하게 사라져버리는 것을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한 번은 시간의 힘에 의하여, 또 한 번은 방금 자기에게 한 고백에 의해.

하지만 기요, 오늘이기 때문에 그것이 큰 의미가 없는지도 모르죠. ….그리고….

그녀는 그 사람이 어찌나 졸라대던지라고 덧붙이려다가 그만 두었다. 죽음을 앞에 둔 사람에게 그런 것은 대단한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그년는 이 말 한마디만은 했다.

나도 내일 죽을지 몰라요….

그렇다면 더욱 좋다. 기요는 더 할 수 없는 굴욕적인 고통을 참고 있었다. 스스로 느끼기에도 굴욕적인 그런 고통을. 사실 그녀가 누구와 자건 그것은 그녀의 자유였다. 그렇다면 이 고통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걸까? 그로서도 어쩔 수 없는, 마구 그를 덮쳐누르는 이 고통은?

내가내가 당신을 좋아한다는 걸 당신이 알았을 때 그때 언젠가 나에게 물으신 적이 었었죠. 농담조로. 하지만 아주 농담은 아니었어요. 당신이 감옥에 붙들려간다면 나도 같이 가겠느냐고요. 그때 난 뭐라고 말할 수가 없다고, 아마 거기 남아 있기가 어려울 거라고 대답했죠…..하지만 그때 당신은 내가 긍정한 것으로 아셧죠. 그건 그때 당신이 나를 사랑했기 때문이었어요. 그런데 어째서 지금은 그걸 믿어 주시지 않죠?

감옥에 가는 인간형은 정해져 있어. 카토프 같은 친구가 감옥에 갈 인간이지. 누구를 열렬히 사랑하지 않더라도 말이야. 그는 인생에 대해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사상을 위해서 가는 거야….사람이 감옥에 가는 것은 남을 위해서가 아니거든.

기요, 그것은 어디까지나 남자들 생각이에요

그러나 그런 사람을 사랑하고, 또한 그런 사람에게 사랑을 받는다면, 사랑에서 그 이상 무엇을 바라겠는가 말이야? 그 이상 설명을 요구한다는 건 어리석은 짓이야. 비록 그들이 그것을그들의 윤리를 위해서 그런다 치더라도 말이야….

윤리 때문이 아니에요. 윤리적인 사랑은 난 도저히 할 수 없을 것 같아요.

그렇지만, 그러한 당신의 사랑도, 그 남자와 자는 걸 방해하지는 못했어. 당신 말대로 그것이 나를 불쾌하게 하리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말이야.

기요, 좀 묘한 이야기지만 사실을 말하겠어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런 일쯤은 당신에겐 아무렇지도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아마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나로서는 마음이 편했던 모양이죠. 너무 죽음 가까이에 있으니까, 내가 항상 보아온 것은 남의 죽음이지만….

그렇지만 질투심은 존재하고 있었다.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육감적인 욕망이 애정에 기초를 두고 있는 만큼 그 질투심은 더욱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그는 여전히 턱을 괸 채 눈을 감고 이해하려고 애를 썼다. 그것은 괴로운 노력이었다. 귀에는 메이의 가쁜 숨결과 강아지의 발톱 긁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의 마음의 상처는 첫째로 메이와 잔 사내가 그녀를 멸시했으리라는 것에서 오고 있었다.

그 사내는 메이의 오랜 친구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그에 대해 거의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대개 모든 사내들의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여자를 귀찮게 하는 감정을 알고 있었다. 그 녀석도 메이와 자고 나서 틀림없이 그녀를 바람둥이라고 생각했을 거다. 이런 생각을 하면 그 녀석을 패 죽이고 싶다. 그러나 사람은 남을 제멋대로 상상하고서 질투를 느끼는 게 아닐까? 사람이란 왜 이렇게도 한심한 존재일까메이로서는 육체관계가 하등 무엇을 약속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 녀석도 그것은 알아두어야 할 것이다.

그 녀석이 메이와 잤다. 그것은 하는 수 없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녀를 완전히 소유한 것처럼 생각한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나도 감상적인 놈이 되었군그러나 그것은 그의 힘으로는 어쩔 수도 없는 일이었고 또 중요한 일도 아니었다. 그도 그것은 알고 있어다. 중요한 것은, 그를 불안스럽도록 괴롭히는 것은 그가 별안간 그녀로부터 떨어져나간 것 같은 그런 기분이었다. 그것은 증오 때문도 아니며-마음속에 증오가 전혀 없는 것도 아니지만-또한 질투 때문도 아니었다.

질투심이란 이런 것일까? 시간이나 죽음만큼 파괴력을 지닌 그 어떤 이름 모를 감정의 힘 때문이었다. 아무튼 지금의 그는 이전의 자기 아내를 다시 찾아볼 수 없게 된 것이었다.

그는 눈을 떠보았다. 그러나 그의 눈앞에 있는 이 낯익은 상큼한 여자, 이 부드러운 옆얼굴의 소유자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관자놀이에서 넓은 이마와 광대뼈 사이에 움푹 꺼진, 이 갸름하고 큰 눈은? 이것이 방금 어떤 사내와 자고 온 여자란 말인가? 그러나 또한 이것이 그의 연약함과 고통, 그리고 초조함을 참고 견디어온 여자, 그와 함께 부상자를 돌보아준 여자, 그와 함께 죽은 동지들 옆에서 밤을 새워온 여자란 말인가? 그녀의 부드러운 목소리는 지금도 방 안에 감돌고 있었다. 인간이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그러나 이 육체는 눈에 익은 것이 갑자기 변모하였을 때의, 그 비통한 신비감-벙어리나 장님, 미치광이들이 갖고 있는 그 신비감-을 몸에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여성이었다. 남성다운 거서은 거기에 없었다. 무엇인가 그것과는 다른 것이었다.

메이는 그에게서 완전히 유리되어 있었다. 아마도 이것 때문이었으리라. 그녀와의 강렬한 접촉의 미칠 듯한 충동 때문일 것이다. 그는 일어나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그는 자기가 지금 신경의 발작 상태에 있다는 것. 그래서 내일이면 아마도 현재의 이 기분 따위는 모르게 되어버릴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는 그녀 앞에서 단말마의 고통에 직면하고 있는 듯한 심정이었다. 본능은 그를 단말마의 고통으로 몰아넣듯이 그녀 쪽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달아나려는 것을 붙잡아 어루만지고 그것에 매달리고 싶다그녀는 자기 앞에서 두어 걸음 앞에 서 있는 그를 얼마나 괴로운 심정으로 바로보았을 것인가. 그는 자기가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똑똑히 알았다. 그것은 그녀와 함께 자고 싶다, 그녀의 전체를 잃어버린, 이 현기증에 대한 피난처를 그녀의 육체속에서 찾고 싶다는 욕망이었다. 있은 힘을 다하여 서로가 곽 껴안을 때만은 서로가 상대방을 이해하는 일조차 문제되지 않는 것이다. (p58-65)

 

남의 소리는 귀로 듣고, 자기 소리는 목구멍으로 듣는다는 아버지의 말. 그렇다. 자기 생명도 목구멍으로 듣는 것이다. 그렇지만 남의 생명은? 우선 무엇보다도 인간에게는 고독이 있다. 고독은 무수한 인간들의 배후에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 마치 희망과 증오로 충만한 황량한 도시를 뒤덮고 있는 이 깊은 밤의 배후에 커다란 원시의 밤이 존재하듯이.

그런데 나라는 존재는 무엇인가? 나 자신에 대해서, 목구멍에 대해서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은 일종의 절대적인 긍정이다. 미치광이의 긍정이다. 다른 무엇보다도 훨씬 강력한 힘이다. 하지만 남들에게는 나라는 존재는 결국 내가 한 일만이 전부인 것이다. 그러나 메이에게만은 기요라는 존재는 그가 해온 행위만이 아니었다. 포옹은 사랑에 의해서 남녀를 결속시켜 고독을 잊게 해주기는 하지만, 그에게,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괴물에게 구원을 베풀어주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소중한 그 괴물 말이다. 기요의 어머니가 죽은 뒤로는, 메이만이 그를 기요 지조르로 보지 않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그의 둘도 없는 긴밀한 반려자였다. 내가 자진하여 승낙한 반려, 정복한 반려, 선택한 반려라고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기묘하게도 어둠을 자기감정과 꼭 들어맞는 것으로 느끼고 있었다. 마치 자기 생각은 이미 밝음과는 어울리지 않게 되어버린 것처럼. 세상 사람은 나의 동지가 아니다. 그들은 나를 보고 나를 심판하는 인간들이다. 내 동지는 나를 보지 않고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다. 어떤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다. 내가 실패를 하더라도, 아무리 비열한 짓을 하더라도, 또한 비록 배반하는 일이 있다 할지라도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다. 과거의 나의 행위라든가 미래의 나의 행위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다. 내가 나 자신을 사랑하는 만큼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다. 그렇지, 같이 죽을 수 있을 만큼…..나는 오직 그녀하고만 이 애정-비록 그것이 상청투성이의 것일지라도-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죽을지도 모르는 병든 자식을 부모가 같이 지켜보고 있듯이이런 기분은 결코 행복한 기분은 아니었다. 그것은 어둠과 일맥상통하는 원시적인 그 무엇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육체 속에 뜨거운 것을 왈칵 치밀어 오르게했다. 그 뜨거운 것은 언제나 볼에다 볼을 갖다 대듯이 꼼짝도 않는 포옹으로 끝났다. 그리고 그것만이 그 자신의 내부에 있어서 죽을만큼 강한 유일한 것이었다. (p67-69)

 

우리는 과연 우리 자신을 위해 살고 있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죠. 우리는 현재의 국가를 위해, 여러 세기에 걸쳐 엄존해 있는 죽은 자의 질서를 위해 살고 있는 겁니다… (p70)

 

 그는 어떠한 명예도 어떠한 행복도 바라고 있지 않는 것이다. 적을 무찌를 수는 있어도 그 승리 속에서는 살아갈 수 없는 그가 죽음 외에 무엇을 바랄 것인가? 틀림없이 그는 다른 사람들이 인생에 부여하고 있는 의미를 죽음에 부여하려 하는 것이다. 그는 되도록 고귀한 죽음을 선택하려 하고 있다. 그는 야심적인 인간인데, 야심의 모든 대상을, 그리고 야심 그 자체까지도 경멸할 만큼 다른 인간들로부터 유리된, 병적일 만큼 투철한 영혼의 소유자일까?

 

자네가 그.. 숙명과 함께 살려면 수단은 단 하나밖에 없어. 그것은 그 숙명을 남에게 전해주는 거야. (p77)

 

 그의 모든 것이 전혀 다른 세계에 대한 기대와, 아무리 비참한 생활을 해도 먹고살 수 있다는 자신감과-그는 천성이 엄격했다. 아마 자존심 때문이겠지만-그리고 그의 증오심과 사상과 자만심이 그를 정치 활동으로 몰아갔다. 정치 활동은 그의 고독에 하나의 의미를 부여해주었다. 그러나 기요에게는 모든 것이 훨씬 간단했다. 영웅적인 의식은 그에게 정당성 같은 것이 아니라 규율 같은 것을 부여해주었다.

그는 불안에 사로잡혀 있지는 않았다. 그의 생활은 하나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자신은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페스트에 걸려 죽듯이, 굶주림 때문에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부여해주고자 하였다. 그는 그들의 동지였다. 그들은 그와 공동의 적을 갖고 있었다. (p82)

 

첸은 그들과 똑 같은 무리는 아니었다. 그렇게 살인을 했고, 지금 함께 어울려 있긴 하지만, 만일 오늘 죽는다면 그는 홀로 죽어갈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문제는 간단했다. 그들은 자기들의 빵과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획득하러 가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들의 고통과 그들과 공동 투쟁을 하고 있다는 것 이외에는 그들에게 어떤 말을 해 볼 수도 없었다. 그가 알고 있는 것은 자기와 이들을 연결하고 있는 가장 강한 유대는 투쟁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투쟁이 바야흐로 눈앞에 닥쳐온 것이다. (p108-109)

 

에멜리크는 이것은 유양돌기염이라는 병이에요. 뼈를 잘라내야 합니다.’라는 메이의 말이 생각났다. 이 아이는 아직 젖먹이나 다름없는데, 이 세상에서는 고통밖에 겪은 게 없다. 이 녀석에게 설명해주어야 한다. 그렇다고 무엇을? 두개골을 깍아내야 한다는 말을? 그러면 죽지 않아도 된다.그리고 아비처럼 귀중하고 즐거운 생애로 보상을 받는다는 말을? 에멜리크는 20년 동안 줄곧 욕된 젊음!’ 이라는 말을 되풀이해왔다. 그러면 얼마나 있어야 욕된 늙음!’ 이라고 말하게 될까? 이 두 가지 완전한 인생의 포현을 이 가엾은 어린아이에게 전하기까지에는 앞으로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인가? 지난달의 일이었다. 고양이가 다리를 삐었다. 그래서 중국인 수의사가 치료하는 동안 고양이를 안고 있어야 했다. 그동안 고양이는 울부짖으며 몸부림쳤다. 고양이는 영문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에멜리크는 아마 사람이 자기를 학대하는 줄 알고 있을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고양이는 사람의 자식이 아니라서 , 조금도 아프지 않았는걸..’이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에멜리크는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골목 바로 옆에서 아마도 개들이 시체를 뜯어먹고 있는지 송장 냄새가 둔한 햇빛과 더불어 가게 안에 흘러들어왔다. ‘어디에나 고통은 따른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조금 전에 첸을 거절한 자기를 용서할 수 없었다. 고문을 당하여 비밀을 털어놓은 인간처럼 앞으로도 그와 같은 일을 저지르리란 것을 자기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다.

그는 자기의 청춘을, 자기의 욕망을, 자기의 꿈을 배신한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배신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중요한 것은 자기에게 가능한 일을 바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가 바란 것은 자기가 할 수 없는 일뿐이었다. 이를테면, 첸을 숨겨주었다가 그와 함께 밖으로 나가버리는 것을. 나가서 그 어떤 폭력으로든, 폭탄으로 견딜 수 없는 처참한 생활에 복수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 태어난 이래 줄곧 그에게 해독을 끼쳐오고 있는 생활, 마찬가지로 아이들에게도 해독을 끼칠 이 생활에. 자기만의 고통이라면 참을 수 있다. 그것에는 습관이 되어 있으니까그러나 아이들의 고통은 참을 수가 없다.

그 애는 앓으면서부터 몰라볼 만큼 영리해졌어요.하고 메이는 말했었다. 우연히 입 밖으로 나온 것처럼..

첸과 함께 밖에 나간다. 가방에 숨겨둔 폭탄을 하나 꺼내어 던진다. 그것은 근사한 일이었다. 아니. 그뿐 아니다. 현재의 그의 생활에서는 뜻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그는 37. 아마 아직도 30년은 더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살아간다? 가게의 레코드를 팔아서? 그 쥐꼬리만 한 이익을 루 위쉬안과 나누기 때문에 늘 허덕일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나이를 먹으면그는 지금 서른 일곱이다. 기억할 수 있는 한 이라고 사람들은 흔히 말한다. 그런 그에게는 돌이켜 기억해볼 아무것도 없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빈곤의 연속이었다.

학교에서는 열등생. 이틀에 하루는 결석했다.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여유있게 술을 마시고 싶어 그에게 자기가 할 일까지 시켰다. 공장에서는 노동을 했고 불한당 패거리들과 어울렸다. 군대에서는 줄곧 영창만 드나들었다.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 그는 독가스를 마셨다. 누구를 위해서? 무엇 때문에? 조국을 위해선가? 그는 벨기에인도 아무것도 아니었다. 오직 밑바닥 인간이었다. 그러나 전쟁 중에는 별로 일하지 않아도 먹을 수 있었다. 그리고 제대를 하여 최하급의 갑판 선객으로 인도차이나까지 흘러갔다. 거기서는 기후 때문에 육체노동은 할 수 없었다. 그뿐 아니라 이 기후 때문에 모두 이질에 걸려 죽기 십상이었다. 특히 불한당으로 이름난 인간들은 더했다. 그래서 그는 다시 상하이로 흘러들어온 것이다. 이런 인생에 복수라는 것은 폭탄뿐이다! 그렇다, 폭탄이다!

에멜리크에게는 아내가 있었다. 그녀 이와에 이 세상에서 그에게 주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는 처음 12달러에 팔려갔었다. 그런데 그녀를 산 작자가 싫다고 해서 버림을 받았다. 그래서 그녀는 먹을 것과 잠자리를 얻기 위하여 두려워하면서도 에멜리크를 찾아온 것이다. 처음 한동안 그녀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유럽인들은 지독한 짓을 한다고 들어왔기 때문에 그도 그런 줄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는 그녀에게 친절했다. 차차 두려움에서 벗어난 그녀는 그가 아플 때 간호도 해주고, 대신 일도 해주며 그의 무기력한 증오의 발작에도 잘 견디었다. 그녀는 마치 학대받은 눈먼 개와 같은 애정으로 그에게 매달려 있었다. 당신도 나와 같이 학대받은 눈먼 개가 아닌가?하고 속으로 생각하면서. 그러다가 아이도 생겼다. 그런데 그는 아이게게 무엇을 해줄 수 있었던가? 간신히 먹여주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에게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고통을 주는 것뿐이었다. 이 세상에는 하늘의 별보다 고뇌가 더 많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쓰라린 괴로움을 아내에게 남겨줄지도 몰랐다. 그녀를 남겨두고 자기만 죽어버린다면 말이다. 이웃에 살고 있던 그 굶주린 러시아인처럼. 그는 품팔이 일을 하고 있었는데, 지독한 가난 끝에 어느 날 자살해버렸다. 미치다시피 격분한 아내는 자기와 네 아이를 남겨두고 가버린 남편의 시체를 마구 때렸다. 그때 아이들은 방구석에 있었는데, 그중의 한 아이가 엄마, 싸워? 하고 물어보는 것이다.

에멜리크는 아내와 아이를 죽게 하지는 않았다. 만일 돈만 있고, 그것을 그들에게 남겨줄 수만 있다면, 마음대로 죽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은 여태까지 한 번도 그의 옆구리를 걷어찬 적이 없는 것처럼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지금 또다시, 지금까지 그가 겨우 가지고 있는, 유일한 인간으로서의 존엄, 다시 말해서 그의 죽음마저 그에게서 빼앗아버린 것이다. 송장 냄새가 바람이 휙 불어올 때마다 움직이지 않는 햇빛 속으로 흘러들어왔다. 그는 송장 냄새에는 익숙해 있었지만, 생존자의 본능적인 반감을 가지고 그 냄새를 맡았다. 그것이 몸에 스미자 으스스 전율을 느꼈다. 그는 마치 죽어가는 친구의 영상에 사로잡힌 것처럼 첸의 모습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그는 자기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 과연 치욕인가, 우정인가, 아니면 흉포한 욕망인가를 매우 중대한 일처럼 곰곰히 생각하고 있었다. (p213-217)

 

고뇌 그 자체는 사람을 갈라놓지만, 서로 고뇌를 알아봄으로써 사람들을 접근시킨다. (p241)

 

적이건 남이건, 노동자는 어디까지나 노동자 입니다. 죽지 않는 한 말이지요. 인간이 단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어떤 사상을 위해서 버린다는 것은 인류의 독특한 어리석음이라고 생각지 않으십니까?

인간이, 글쎄요. 어떻게 말하면 좋을까요? 인간으로서의 조건을 견디어낸다는 것은 아주 드문 일이겠지요.

인간이 이해타산을 초월하여 기꺼이 목숨을 내던지는 모든 사상은 이 조건의 바탕을 막연하나마 인간의 존엄 위에 놓고, 그 올바름을 증명하려고 하고 있다. 이를 테면 옛날의 노예에게는 그리스도교가, 시민에게는 국가가, 그리고 노동자 계급에게는 코뮤니즘이 그것이다. (p273)

 

인간은 그 행위의 총화입니다. 해놓은 일, 해낼 수 있는 일의 총화입니다. 그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죠. 나는 어떤 여자나 혹은 어떤 남자와의 만남으로 생활이 규정되는 그런 인간이 아닙니다. 나는 길을 갑니다. …..

길은 만들어져야 하는게 아닙니까?

당신에 의해서 만들어지지 않으면 다른 사람에 의해서라도 말입니다. 마치 그것은 어느 장군이 나는 내 군대로 이 도시를 포격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만일 그 자신이 포격할 수 있었다면 그는 장군이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인간은 아마도 권력에 무관심한지도 모르지요. 권력이라는 생각이 인간을 매혹하는 것은, 말하자면 현실의 권력이 아니라 권력 덕분에 이것저것 즐거운 일을 할 수 있다는 환상 때문입니다. 왕좌의 권력은 다스리는 데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보통 인간에게는 다스린다는 욕망은 없어요. 그야말로 당신이 말씀하신 것처럼 다른 사람을 강제하고 싶어합니다. 인간 세계에서 인간 이상의 것이 되고 싶어하는 것이죠. 앞에서 말했듯이 인간의 조건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것입니다. 단지 권력을 갖는다는 것이 아니라, 전능해지려고 말입니다. 이 가공의 병  권력에의 의지는 지적인 변명에 지나지 않습니다만  신이 되고자 하는 의지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신이 되기를 꿈꾸고 있으니까요. (p274-275)

 

방 안의 모습이 왠지 달라져 있었다. 그는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으려고 애썼다. 어떤 물건이 이상하게 없어졌다면 심히 걱정만 될 테니까. 그는 세상 사람들이 생활의 기반으로 삼는 거의 모든 것, 이를테면 애정이나 가정이나 노동 같은 것에서 초연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공포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공포가 고독의 날카로운 의식처럼 마음속에 솟아올랐다. 그는 그것을 뿌리치기 위해 언제나 바로 가까이에 있는 블랙 캣으로 달려갔었다. 그러나 오늘 밤에는 그것도 할 수 없었다. 녹초가 된데다가 거짓과 일시적인 우정에는 진절머리가 났다.. 그는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려고 다가갔다.

그래도 말이야. 하고 클라피크는 거울 속의 자기에게 말했다. 넌 왜 그렇게 비겁하니? 도망치는 일이 언제까지 계속될까? 너에게도 아내는 있었지. 그건 아무래도 좋아! 오오! 그런 건 아무래도 좋고말고! 정부와 돈 말씀이야. 너를 우롱할 환영이 갖고 싶을 때는 넌 언제나 그걸 생각하지. 아무튼 닥쳐라. 너에게는 사람들의 말대로 온갖 재능이 있어. 기지도 있고, 놀고 먹으며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능력은 모두 가지고 있다는 말씀이야. 철이 들 나이가 되면 언제라도 페랄의 종살이를 할 수 있겠지. 룸펜 신사라는 직업도 있잖은가. 경찰도 있고 자살도 있어. 뚜쟁이는 어떨까? 아니, 이건 또 어이없는 미친 짓이로군. 이제 남은 건 자살뿐이야. 하지만 너는 죽고 싶지 않지, 죽고 싶지 않은 게지, , 이 놈팽이야! 아무튼 얼굴을 잘 보라구, 너는 어쩌면 그렇게도 송장에 꼭 알맞은 낯짝을 하고 있을까….(p309)

 

세계에 현실성은 없더라도 인간들은  가장 세계에 반항하고 있는 인간조차도  매우 강렬한 현실을 갖고 있는 법이다. 그런데 클라피크는 바로 그 현실을 전혀 갖고 있지 않은 극히 드문 인간 중의 하나라고. 지조르는 이 생각에 괴로워했다. 왜냐하면 기요의 운명을 이런 어설픈 인간의 수중에 맡겨놓았기 때문이다. 어떤 인간이라도 태도 이면에는 사람들이 감동할 수 있는 밑바탕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고뇌를 생각하면 그 고뇌의 성질까지 짐작하게 되는 법이다. 그런데 클라피크의 고뇌는 마치 어린아이의 고뇌처럼 그 자신과 동떨어져 있었다. 자신은 그 고뇌에 하등의 책임도 느끼지 않았다. 고뇌는 그를 파멸시킬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를 개조시킬 수는 없었다.그의 생존이 끝날 수도 있을 것이다. 악덕과 편집 속에 사라져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 사람의 인간이 될 수는 없었다. 아름답지만 텅 빈 마음이다. 지조르는 클라피크의 마음 밑바닥에는 다른 사람같이 고되도 고독도 없고 다만 감각이 있을 뿐이라고 인정했다. 이따금 지조르는 인간을 그 노후까지 상상하여 평가했다. 클라피크는 늙을 수 없는 인간이다. 나이도 그에게는 경험을 쌓게 하지 못하고, 다만 에로티시즘이나 약품의 중독을 가져다 줄 뿐이며, 마침내는 생활을 무시하는 모든 방법이 거기서 연구되어질 것이다. (p315-316)

 

그는 이 시대에 가장 깊은 의미와 가장 큰 희망을 걸머지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싸운 것이다. 그리고 지금 서로 손을 잡고 살아가자고 생각하던 자들과 섞여서 죽어가려는 것이다. 여기에 쓰러져 있는 누구나와 마찬가지로 자기 인생에 의미를 부여했기 때문에 죽어가려는 것이다. 죽음을 각오할 수 없는 인생이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혼자만이 죽는 것이 아닐 때, 사람은 쉽게 죽을 수 있는 법이다. 이와 같이 동지의 떨리는 말소리로 가득 찬 죽음, 많은 사람들이 마침내 순교자로 발견하게 될 패배자의 집합, 황금전설을 만들 이 피비린내 나는 전설! 이미 죽음에 직면하고 있는 그가 어떻게 생명을 바친 인간의 중얼거림을 듣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 중얼거림은 죽어가는 자들에게는 인간의 씩씩한 마음이야말로 영혼의 세계 못지않은 은신처라고 부르짖는 것 같았다. (p365)

 

수형자들은 이제 서로의 얼굴조차 볼 수 없었다. 신음소리가 들려와도, 자기와 똑같이 싸워온 동지들이 그곳에 있어도 카토프는 역시 고독했다. 그러나 인간은 그러한 고독을 이길 수 있는 것이다. 아니, 아마도 저 잔인한 기적 소리조차도 이길 수 있을 것이다. 공포가 그의 가슴속에서 그의 생애 중 가장 무서운 생명의 유혹과 싸우고 있었다. 마침내 그도 허리띠의 버클을 끌렀다.(청산가리) (p368)

 

지조르는 문을 열고 어둠 속에 아편을 던져버렸다. 그리고 되돌아와서는 힘없이 어깨를 늘어뜨린 채 날이 새기를 기다렸다….지나친 고통에 입은 반쯤 벌어지고 평소의 그 근엄한 표정도 망연한 표정으로 바뀌어 있었지만, 자제력까지 모두 잃은 것이 아니었다. 오늘 밤 그의 인생은 변하려 하고 있었다. 사상도 죽음이 인간에게 강요하는 급격한 변화에 대해서는 거의 무력한 것이었다. 오늘부터 그는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간 것이다. 외계는 이제 의미를 상실하고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다. 이제까지 그를 이 세상에 결부시켜왔던 아들의 시체 곁에서 언제까지나 꼼짝도 않고 있다는 것은 신의 자살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는 기요에게 출세도, 아니 행복조차도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기요가 없는 세계는

나는 시간 저편에 던져져 있다. 하고 그는 생각했다. 자식은 시간과 사상의 흐름에 순응하는 것이었다.

아마 지조르도 마음 밑바닥에서는 고뇌와 더불어 희망을, 별로 이렇다 할 것도 없는 희망과 기대를 느끼고 있었을 것이 틀림없다. 그는 그의 애정이 짓밟힌 뒤에야 비로소 그런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를 파괴한 모든 것은, 그의 마음속에서 열광적인 환대를 받고 있었다. 죽음에는 아름다운 무엇이 있다. 하고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는 인간의 근원적인 고괴가 자기 내부에서 떨고 있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외계의 존재나 사물에서 오는 고뇌가 아니라 인간 자체에서 솟아오르는 고뇌, 삶이 우리를 거기서 벗어나게 하려고 노력하는 고뇌였다. 지조르는 그런 고뇌에서 빠져나올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오직 잊는 방법으로만 가능했다. 그런데 그는 거꾸로 점점 더 그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마치 그러한 무서운 고뇌야말로 죽음이 들을 수 있는 유일한 음성인 것처럼. 마치 그의 마음속까지 스며든 이 고뇌가 살해된 아들의 시체가 들을 수 있는 유일한 기도인 것처럼. (P376-377)

 

인간은 오랫동안 인생을 속일 수 있어. 하지만 결국에는 인생이 언제나 우리들을 본연의 모습으로 되돌려주지. 모든 늙은이들이 그것을 증명해주고 있는 셈이야. 그렇지 않니? 많은 노후가 공허하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공허하다는 것이지. 사람들은 그것을 숨기고 있을 뿐이야. 하기야 그런 일도 별로 대단할 건 없지만. 인간은 현실이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해. 있는 것은 관조의 세계라는 것을 알아야 할 거야. 아편을 피우건 안 피우건, 그리고 그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공허하다는 것도… (p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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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드레 말로(André Malraux, 1901년 11월 3일 ~ 1976년 11월 23일)

프랑스의 작가, 정치가이다.
파리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동양어학교(東洋語學校)에서 산스크리트어와 중국어를 배웠다. 열일곱 살에 대학입학 자격시험을 포기한 후에는 도서관, 미술관, 동양어학교 등을 꾸준히 드나들며 일찌감치 문학계, 미술계 인사들과 교류했다.
1923년에 앙드레 말로는 인도차이나 반도의 고고학적 조사에 참가하였고 캄보디아 등에서 많은 조각상을 발굴, 프랑스로 가져오는데, 이는 나중에 발견이 아니라 제국주의 국가의 ‘도굴’과 강탈이라고 평가되기도 한다.[1] 한편 이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소설 《왕도로 가는 길》(La Voie royale, 1930)에서는 행동과 사색을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타입의 모험가를 등장시키기도 했다. 말로는 총파업 사태 이후 광둥(廣東)에 국공합작(國共合作) 정부가 성립하였을 때, 1925년 그 정부의 위원이 되었다고 전한다. 이는 소설 《정복자》(1928)의 첫머리에 묘사되고 있기도 하다. 1926년에 귀국하였다. 에세이 〈서 유럽의 유혹〉(1926)에서는 신과 내재적 가치를 부정할 수밖에 없는 유럽적 인간주의의 한계와 고뇌를 호소하였다.
귀국 후에도 파리와 사이공을 때때로 왕복하고, 그곳 혁명주의자들을 원조하였다. 이어 중국에 부임하여 국민당에 참가하고 광둥 혁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나, 1927년 장제스(蔣介石)의 공산당 탄압사건으로 중국 국민당과 손을 끊었다.
히틀러 정권이 탄생하자 반파시즘 운동에 투신하였고, 에스파냐 내란에는 공화국 공군을 조직,지휘하였다. 이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소설 <희망>(1937)은 불안과 죽음에 떠는 인간에게 '혁명'이 부여하는 '희망과 우애'의 개인주의적 신화를 열띤 충격적 문체로 전개하고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엔 대독저항(對獨抵抗)운동에 전차대여단장(戰車隊旅團長)의 임무를 수행하였고 제5공화국의 드골 정권에서 문화상(文化相)을 역임하는가 하면, 이후 동파키스탄의 독립운동에 의용군으로 지원하는 등 다채로운 일생을 점철하였다.
아시아 3부작으로 불리는 초기 소설로는 《정복자》(1928), 《왕도로 가는 길》(La Voie royale, 1930), 《인간의 조건》(La Condition humaine, 1933)이 있다. 《인간의 조건》으로 말로는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공쿠르상을 수상하여 프랑스의 대표적 소설가로서 명성을 굳히게 됐다.
1935년에 이미 ≪모멸의 시대(Le Temps du mépris)≫를 통해 파시즘을 고발했던 말로는, 르포 형식의 소설 ≪희망(L'Espoir)≫(1937)을 발표한 직후에는 이를 영화로 만드는 작업에 착수했다. 영화미학자이기도 한 말로는 <테루엘 산맥(Sierra de Teruel)>을 찍었다. 1945년에 <희망>이라는 제목으로 개봉된 이 영화는 그해의 가장 창조적인 영화로 인정받아 루이ᐨ들뤼크 상을 수상했으며 1970년에 재개봉되어 또 한 번 극찬을 받은 바 있다.
1943년에 소설 ≪알텐부르크의 호두나무들(Les Noyers de l'Altenburg)≫을 출간했고, 1944년부터 ‘베르제 대령’이라는 이름으로 레지스탕스를 지휘, 알자스 해방의 주역이 되기도 했다. 1945년에 드골을 만난 이후부터 시작된 말로의 정치 참여는 1969년 드골의 대통령직 사임 때까지 이어진다. 이 기간에도 ≪침묵의 소리(Les Voix du silence)≫, ≪신들의 변모(La Métamorphose des dieux)≫ 제1권 등 방대한 예술론을 집필하는가 하면, 1967년에는 허구와 체험의 경계를 넘나드는 ≪반회고록(Antimémoires)≫을 발표해 작가 말로의 건재함을 확인시켰다. 1959년부터 10여 년간 세계 최초의 문화부 장관직을 수행한 말로는 “국가는 예술을 감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술에 봉사하기 위해서 존재한다”라는 원칙을 지켜나갔던 것으로 평가된다.
〈예술심리학〉 3권(1947-50)으로 시작하는 미술론에서는 인간이 '인간성이라는 감옥'에서 탈출하여 역사와 운명을 초월하는 한 수단은 동서고금의 '예술 창조' 외에는 없다고 역설하여 그 비밀의 해명에 정력을 경주하였다. 카뮈나 사르트르와 더불어 말로 또한 신이 죽은 뒤에 사람이 살아가는 이유와 근거를 찾고 있다.
그는 행동파로서 문단에서 활약하였으며, 연극·영화 등 문화 발전에 노력하였다. 그의 문학은 언제나 그 자신의 행동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고, 현대 프랑스 문학의 주류가 되어 있는 '행동의 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저서로 평론 <서 유럽의 유혹>, 소설 <정복자> <인간의 조건> 등이 있다.
정계에서 은퇴한 이후에도 ≪신들의 변모≫ 제2권과 제3권, ≪덧없는 인간과 문학(L'Homme précaire et la Littérature)≫ 등을 집필했으며, 1976년 11월 23일, 파리 근교의 한 병원에서 사망했다. 1996년 11월 23일, 말로의 20주기를 맞아 프랑스 정부는 그의 유해를 팡테옹에 이장함으로써 앙드레 말로를 위인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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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조건 - 앙드레 말로 (김봉구 옮김, 지만지)

왕도로 가는 길 - 앙드레 말로 (김봉구 옮김, 지만지)

 

인간의 조건 - 앙드레 말로 (홍순호, 윤옥일 옮김, 동서 월드북 188)

정복자들 - 앙드레 말로 (최윤주 옮김, 민음사 세계문학 328)

희망 - 앙드레 말로 (김웅권 옮김, 문학동네 세계문학 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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