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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
III. 고전 문학 (서양)/1. 서양 - 고전 소설

페스트 – 카뮈 (이혜윤 옮김, 동서월드북)

by handaikhan 2023. 2. 4.

 

알베르 카뮈 - 페스트 (1947년)

 

사람이란 일단 습관을 붙이고 나면 그날그날을 힘들이지 않고 지낼 수 있는 법이다. (p.121)

 

그 광경은 마치 우리의 집들이 자리잡고 서 있는 대지가 그 속에 있던 고름을 짜내고 지금까지 안으로 곪고 있던 종기나 피고름을 표면으로 내뿜고 있는 것만 같았다. (p.129)

 

극장 매표소 앞에 줄을 서서 기다렸다가 차례가 오면 표를 사지 말 것. (p.138)

 

누구나 다 당하는 일인데요.

바로 그겁니다. 우리는 이제 누구나와 마찬가지 꼴이 되었다. 이겁니다. (p.140)

 

전쟁이 일어나면 사람들은 말한다. 오래 가지는 않겠지, 너무나 어리석은 짓이야.

전쟁이라는 것이 너무나 어리석은 짓임에는 틀림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전쟁이 오래 가지 않는 다는 법도 없는 것이다. 어리석음은 언제나 집요하게 이어진다. 만약 사람들이 늘 자기 생각만 하고 있지 않는다면 그 사실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 시민들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자기네들 생각만 하고 있는 셈이다. 달리 말하면 그들은 휴머니스트들이었다. 즉 그들은 재앙의 존재를 믿지 않았다. 재앙이란 인간의 척도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재앙이 비현실적인 것이고 지나가는 악몽에 불과하다고 여긴다. 그러나 재앙이 항상 지나가버리는 것은 아니다. 악몽에 악몽을 거듭하는 가운데 지나가버리는 쪽은 사람들, 그것도 휴머니스트들이 제일 첫 번째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대비책을 세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 시민들도 다른 사람들보다 잘못이 더 많았던 것은 아니고 겸손할 줄 몰랐다는 것뿐이다. 그래서 자기에게는 아직 모든 것이 다 가능하다고 믿고 있었으며 그랬기 때문에 재앙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추측하게 된 것이었다. 그들은 사업을 계속했고 여행 준비를 했고 제각기 의견을 지니고 있었다. 미래라든가 장소 이동이라든가 토론 같은 것을 금지시켜버리는 페스트를 어떻게 그들이 생각할 수 있었겠는가? 그들은 스스로 자유롭다고 믿었지만 재앙이 존재하는 한 누구도 결코 자유로울 수는 없다. (p.147-148)

 

마땅히 해야 할 일은, 인정해야 할 것이면 명백하게 인정하여, 쓸데없는 두려움의 그림자를 쫓아버린 다음 적절한 대책을 세우는 것이다. (p.150)

 

의사가 창문을 열자 거리의 소음이 대뜸 커졌다. 이웃에 있는 어떤 공장에서 기계들의 짧고 반복되는 소리가 싸각싸각 들려왔다. 리외는 몸을 움추리며 놀랐다. 저 매일매일의 노동, 바로 거기에 확신이 담겨 있는 것이었다. 그 나머지는 무의미한 실오라기와 동작에 얽매여 있을 뿐이었다. 거기서 멈출 수는 없는 일이었다. 중요한 것은 저마다 자기가 맡은 직책을 충실해 행해나가는 일이었다. (p.150-151)

 

이처럼 우리 각자는 그날그날 하늘만 마주 보며 고독하게 살아가기를 감수해야만 했다. 그 전반적인 포기 상태는 결국에 가서는 사람들의 성격을 단련시킬 수도 있었지만 오히려 사람들을 줏대 없게 만들어놓기도 했다. 예를 들어서 몇몇 시민들은 또 다른 노예 상태에 빠져 해가 나거나 비가 오면 그에 따라 마음이 변하게 되었다. 그들의 표정을 보면 태어나 처음으로, 그것도 바로 날씨에 대해 반응을 보이는 것 같았다. 그들은 그저 황금빛 햇빛이 비치기만 해도 즐거워했다가, 반대로 비오는 날이면 그들의 표정과 생각은 두꺼운 베일에 싸이는 것이었다. 몇 주일 전만 해도 그들은 그런 허약함이나 어처구니없는 노예 상태에 빠지지 않았는데, 그것은 자기들 혼자만이 고독하게 세계와 대면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그들과 함께 살고 있는 사람이 그들의 세계 앞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제부터 그들은 아무리 보아도 하늘의 변덕에 좌우되는 형편이 되고 만 것 같았다. , 이유 없이 괴로워하거나 희망을 품는 것이었다.

그러한 극도의 고독 속에서 결국 아무도 이웃의 도움을 바랄 수는 없었기에 제각기 혼자서 저마다의 근심에 잠겨 있었다. 만약 우리 가운데 누가 우리연히 자기 내심을 털어놓거나 어떤 감정을 표현해도, 그 사람이 받을 수 있는 대답은 무엇이건 간에 대개는 마음을 아프게 하는 대답이었다. 그래서 그 사람은 상대방과 자기가 같은 이야기를 하지 않았음을 알게 되는 것이었다. 사실 그는 오래도록 되새기고 괴로워하던 끝에 그 심정을 표현한 것이었으며, 그가 상대방에게 전달하고자 한 이미지는 기대와 정열의 불 속에서 오래 익힌 것이었다. 그와 반대로 상대방은 습관적인 감동이나 시장에 가면 살 수 있을 상투적인 괴로움이나 판에 박은 감상을 마음에 그리는 것이었다. 호의에서건 악의에서건 그 응답은 언제나 빗나가는 것이었기 때문에 단념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적어도 침묵이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느껴지는 사람들의 경우, 남들이 정말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말을 쓸 줄 모르게 된 이상 자기들도 차라리 시장에 굴러다니는 말로 쓰고, 그들 역시 상투적인 방식으로 단순한 이야기나 잡보, 이를테면 일간신문의 기사 비슷한 말투로 이야기하고 마는 것이었다. 그 경우에도 가장 절실한 슬픔이 흔해빠진 대화의 상투적인 표현으로 변해버리기 일쑤였다. 페스트이 포로가 된 사람들은 바로 그런 대가를 치르고서야 겨우 아파트 수위의 동정이나 옆사람의 관심을 끌 수가 있었다. (p.176-177)

 

동정이 아무 소용없게 되면 동정하는 것도 피곤해지는 법이다. (p.189)

나는 그 호의적인 열정을 이해한다. 재앙이 처음 일어났을 때와 그것이 끝났을 때, 사람들은 으레 약간은 말을 다듬고 꾸미는 법이다. 전자의 경우에는 아직 습관을 털어버리지 못해서 그렇고 후자의 경우에는 습관이 이미 회복되어서 그렇다. 불행의 순간에서야 비로소 사람들은 진실에, 즉 침묵에 익숙해진다. 앞으로를 기다려보자. (p.210)

 

세계의 질서는 죽음에 의해 지배되는 것이니만큼 아마 신으로서는 사람들이 자기를 믿어주지 않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신이 그렇게 침묵하고만 있는 하늘을 쳐다볼 것이 아니라 있는 힘을 다해 죽음과 싸워주기를 더 바랄지도 모릅니다. (p.220)

 

(보건대의) 훌륭한 행동에 너무 지나친 중요성을 부여하다 보면 결국에는 악의 힘에 대하여 간접적이며 강렬한 찬사를 바치게 되는 것이라고 믿고 싶다. 왜냐하면 그런 훌륭한 행동이 그렇게 대단한 가치를 갖는 것은 그 행위들이 아주 드문 것이고, 악의와 냉정함이야 말로 인간 행위에 있어서 훨씬 더 빈번한 원동력이기 때문이라는 말밖에 되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그런 것은 서술자가 공감할 수 없는 생각이다. 세계에 존재하는 악은 거의 무지에서 오는 것이며, 또 선의도 풍부한 지식 없이는 악의와 마찬가지로 많은 피해를 입히는 일이 있는 법이다. 인간은 안하기 보다는 차라리 선량한 존재이지만 사실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조금 무지한데 그것은 곧 미덕 또는 악덕이라고 불리는 것으로서, 가장 절망적인 악덕은 자기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고 믿고서, 그러니까 자기는 사람을 죽일 권리가 있다고 인정하는 따위의 무지의 악덕인 것이다. 살인자의 혼은 맹목적인 것이며, 최대한의 성찰이 없고서는 참된 선도 아름다운 사랑도 없다. (p.222)

 

시의 문들은 밤에 몇 번씩이나, 그것도 이번에는 무장한 소규모 그룹에 의해서 습격을 받았다. 총격전이 벌어졌으며 부상자가 생겼고 약간의 도망자도 있었다. 감래서 시 초소들이 강화되자 그러한 시도는 곧 완전히 없어졌다. 그래도 이것은 시내에 일종의 혁명과 비슷한 분위기를 만드는 데 충분했고, 그것으로 인하여 폭력 사건 몇 건을 야기하기에 충분했다. 보건상의 이유로 폐쇄되었거나 화재가 난 집들이 약탈을 당했다. 사실 그런 행위가 계획적인 것이었다고 추측하기는 어려웠다. 대개 여태껏 점잖았던 사람들이 돌발적인 기회에 비난을 받을 만한 일을 저지르게 되었으며, 그런 행위에 이어서 이내 딴 사람들이 흉내를 내게 되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슬픔이 극에 달해 얼이 빠진 집주인 눈앞에서, 아직도 불타고 있는 집으로 정신없이 뛰어드는 미치광이들도 있었다. 집주인이 무관심한 것을 보자 구경꾼들도 그들이 하는 짓을 따라 했고, 그래서 그 어두운 거리에는 꺼져가는 불길과 어깨에 걸머진 물건, 또는 가구들 때문에 생긴 일그러진 그림자들이 화재의 불빛을 받으며 사방으로 도망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러한 불미스러운 사건들로 말미암아 당국은 부득이 페스트령을 계엄령과 동등하게 다루어, 거기에 입각한 법률을 적용하기에 이르렀다. 절도범 두 명이 총살되었는데, 이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는지 어떤지는 의심스럽다. 왜냐하면 그렇게 사망자가 많은 판국에 두 명의 사형 집행쯤은 거의 눈에 띄지도 않았으니 말이다. 그것은 마치 바다에 떨어뜨린 물 한 방울과 같았다. 사실 당국은 개입할 엄두도 못 내는 가운데 그와 비슷한 광경이 상당히 자주 되풀이되었던 것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충격을 준 듯싶은 유일한 조치는 등화관제 제도였다.  11시부터 완전히 암흑 속에 잠겨버린 시가는 마치 돌덩이처럼 되어버렸다. (p.254)

 

자기가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몸을 돌릴 만한 가치가 있는 건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지요. 그렇지만 나 역시 왜 그러는지 모르는 채 거기서 돌아서 있죠. (p.285)

 

우리를 한데 묶어주고 있는 그 무엇을 위해서 함께 일하고 있어요. 그것만이 중요합니다. (p.292)

 

베르나르야. ? 피곤하지 않느냐? 아뇨.

그 순간 그는 어머니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리고 어머니가 자기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또한, 한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은 대수로운 일이 아님을, 적어도 사랑이라는 것이 자신의 표현을 발견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강력한 것이 못 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고는 어머니는 혹은 그는 일생 동안 자기네들의 애정을 그 이상으로 드러내 보이지 못한 채 죽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는 타루의 바로 곁에서 살아왔는데도, 자신들의 우정을 정말 우정답게 체험할 시간도 미쳐 갖지 못한 채 그날 저녁에 타루는 죽어갔던 것이다. 타루는 자기 말마따나 내기에 졌던 것이다. 그러나 리외는 대체 뭘 이긴 것인가? 단지 페스트를 알았고, 그리고 그것에 대한 기억을 가진다는 것, 우정을 알게 되었으며 그것에 대한 추억을 가진다는 것, 애정을 알게 되었으며 언젠가는 그것에 대한 추억을 갖게 되리라는 것, 그것만이 오로지 그가 얻은 점이었다. 인간이 페스트나 인생의 노름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것에 관한 인식과 추억뿐이다. 아마 이것이 내기에 이기는 것이라고 타루가 말했던 것이리라!

그러나 내기에 이긴다면, 그것이 결국 이런 것을 말하는 것이라면, 단지 자기가 알고 있는 것, 추억만을 가지고 살아갈 뿐 바라는 것은 다 잃어야하니 그 얼마나 괴로운 일이랴. 타루는 아마 그렇게 살아왔던 모양이어서 환상 없는 생활이 얼마나 메마른 생활인가를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희망 없이 마음의 평화는 없다. 그런데 아무도 단죄할 권리를 인간에게 주지 않았던 타루, 그러면서도 누구도 남을 단죄하지 않을 수 없으며, 심지어 희생자가 때로는 사형 집행인 노릇을 하게 됨을 알고 있었던 타루는 분열과 모순 속에서 살아 왔던 것이며, 희망이라곤 전혀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성스러움을 추구하고, 인간에 대한 봉사에서 마음의 평화를 찾으려고 했던 것일까? 사실 리외는 그런것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고 그런 것은 별로 문제가 아니었다. 타루에 대해서 자기가 앞으로 간직할 유일한 이미지, 자기 자동차의 핸들을 두 손으로 확 움켜잡고 운전하고 있는 한 남자의 이미지이거나, 이제는 움직이지 않고 뻗어 있는 그 육중한 육체에 대한 이미지이리라. 삶의 체온과 죽음의 이미지, 그것이 바로 인식이었던 것이다. (p.350-351)

 

인간에게는 경멸해야 할 것 보다도 찬미해야 할 것이 더 많다. (p.365)

 

사실, 시내에서 올라오는 환희의 외침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리외는 그러한 환희가 항상 위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있었따. 왜냐하면 그는 그 기뻐하는 군중이 모르고 있는 사실, 즉 페스트균은 결코 죽거나 소멸하지 않으며, 그 균은 수십 년 간 가구나 옷가지들 속에서 잠자고 있을 수 있고, 방이나 지하실이나 트렁크나 손수건이나 낡은 서류 같은 것들 속에서 꾸준히 살아남아 있다가 아마 언젠가는 인간들에게 불행과 교훈을 가져다주기 위해서 또다시 저 쥐들을 불러내 어느 행복한 도시로 그것들을 몰아넣어 거기서 죽게 할 날이 온다는 것을 알고 있어기 때문이다. (p.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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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 카뮈 (Albert Camus, 1913년 11월 7일 ~ 1960년 1월 4일)

프랑스의 피에 누아르 작가, 저널리스트이자 철학자이다.
알베르 카뮈는 1913년 알제리의 몽도비(Mondovi)에서 프랑스계 알제리 이민자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뤼시앵 카뮈는 1885년생으로, 제1차 세계대전의 전투 중 하나인 마른 전투에서 1914년 사망했다. 그의 어머니 카트린 엘렌 생테스(Catherine Hélène Sintès)는 스페인인으로 문맹이며 청각장애를 가졌다. 그는 스페인을 좋아했으며 어머니를 무척 사랑해 공공연하게 알제리 독립 반대의 이유가 어머니의 생활 터전이기 때문이라고 할 정도였다.
카뮈는 어린 시절 알제리에서 가난하게 지냈다. 한 집에서 할머니, 어머니, 형 그리고 두명의 외삼촌들과 살았다. 1923년 그는 프랑스의 중등학교인 리세에 들어갔으나 빈부격차를 크게 느꼈고 어머니가 하녀라는 사실을 부끄러워 했다. 후일 알제리 대학에 입학했으나 1930년 폐결핵으로 중퇴하였다. 재학 중에도 각종 임시직을 전전하였으며 대학 중퇴 이후에도 가정교사, 자동차 수리공, 기상청 인턴과 같은 잡다한 일을 하였다. 이 시기 평생의 스승인 장 그르니에를 만난다. 그는 1935년 플로티누스(Plotinus)에 관한 논문으로 철학 학사 학위 과정을 끝냈다. 그 동안에 아마추어 극단을 주재했다. 가난했지만 멋부릴줄 아는 멋쟁이였으며 축구팀 골키퍼를 할 정도로 운동을 좋아했다. 훗날 외모면에서 종종 험프리 보가트에 비교되곤 했다.
1935년 카뮈는 명백히 마르크스주의의 강령에 대한 지지보다는 에스파니아 내전의 원인이 된 스페인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관심때문에 프랑스 공산당에 가입했다. 1936년 좀 더 독립적인 성향의 알제리 공산당이 수립되자 카뮈는 알제리 공산당에 가입하였고, 이로 인해 그의 공산당 동료들과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그 결과 그는 트로츠키주의자로 비난받았고 1937년 당에서 제명당했다. 그는 공산당의 교조적인 태도를 혐오했다.
1934년 시몬 이에(Simone Hie)와 결혼했으나 서로간의 불륜과 시몬의 모르핀 중독으로 인해 1940년 이혼한다. 1940년 카뮈는 수학자이자 피아니스트인 프랑신 포르(Francine Faure)와 결혼했다. 비록 그는 프랑신을 사랑했지만 카뮈는 결혼제도에 대하여 극렬히 반대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결국 이 부부의 관계는 비끄덕 거렸다. 심지어 프랑신이 1945년에 케서린과 잔이라는 쌍둥이 아이를 낳은 후에도 혼외 관계를 가졌으며 그중 널리 알려진 스페인의 배우 마리아 카자레스와의 관계도 있었다. 이러한 카뮈의 불륜은 프랑신에게 더 고통을 주었다.
1935년부터 1939년까지 운영된 '노동자의 극장'(Théâtre du Travail)을 설립했다. 공산당과의 결별 이후에도 이 극단은 에키프 극단으로 이름을 바꾸어 지속되었다. 1937년부터 1939년까지 그는 사회주의자를 위한 소품을 썼으며, 1938년부터는 좌익 성향의 신문 알제 뤼페블리껭(Alger-Republicain)에서 기자로 활동했다. 문화기사와 르포를 주로 썼다. 사르트르의 책 '구토'에 대한 서평도 알제 뤼페블리껭에 쓴 것이다.
카뮈는 1939년 독일에 저항하기 위해 참전을 신청했지만 폐결핵으로 프랑스 군대입대를 거절당했다. 이후 카뮈는 파리스와(Paris-Soir) 잡지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초기, 소위 포니 워(Phony war)라고 불리는 시기에 카뮈는 반전론자였다. 그러나 그는 1941년 11월 15일 파리에서 베르마흐트(독일육군)가 저지른 가브리에 페리의 처형을 목격하고 독일에 대한 저항을 결심했다. 그 후 그는 보르도로 이동하여 그 근교에서 파리스와의 활동을 끝냈다. 이 해, 그의 첫 책인 《이방인》과 《시지프 신화》를 저술하였다. 그는 1942년에 잠시 동안 알제리의 오랑으로 돌아갔다.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카뮈는 지하에서 같은 이름의 신문을 출판하던 레지스탕스 조직 콩바(Combat)에 가담하였다. 이 그룹은 나치에 저항하여 활동하였고 여기서 카뮈는 보샤르(Beauchard)라는 필명을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카뮈는 연합군이 파리를 해방한 1943년 신문의 편집자가 되어 전투 이후를 보도했다. 그러나 그는 프랑스 편집인으로서는 드물게 1945년 8월 8일에 일어난 사건 직후에 히로시마 원자폭탄 사용에 대한 반대를 주장하는 논설을 실었다. 카뮈는 콩바가 상업적인 신문이 되자 1947년 사임했다. 이때부터 카뮈는 장폴 사르트르를 알게 되었다.
전쟁 이후에 카뮈는 사르트르와 함께 생제르망 가에 있는 카페 드 플로르(Café de Flore)를 자주 찾기 시작했다. 카뮈는 프랑스적 사고에 대한 강의를 하기 위해 미국을 여행하기도 했다. 비록 그는 좌익의 정치학을 배웠지만 공산주의 사상에 대한 그의 강한 비난으로 인해 사르트르와 소원해지게 되었다.
1949년 카뮈의 폐결핵이 재발하여 2년간 은둔상태로 살았다. 1951년 그는 공산주의에 대하여 명쾌하게 반대하는 반란과 반역에 관한 철학적 분석의 내용을 담은 《반항하는 인간》를 발표했다. 이 책은 프랑스에 있는 그의 많은 좌익 성향의 지식인 동료들을 화나게 했고 결국 사르트르와의 논쟁을 통하여 그와 사실상 절교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카뮈를 고통스럽게 했지만, 그는 문학 활동을 멈추지 않고 연극들을 번역에 집중했다.
철학에 대한 카뮈의 기여 중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그가 《시지프 신화》에서 설명하고 《이방인》과 《패스트》와 같은 많은 작품에서 설명한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은 상태, 세계의 의미, 정순함에 대한 우리의 열망의 결과에 따른 부조리에 대한 카뮈의 사상이다. 그의 학문적 동반자 사르트르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들은 카뮈가 실존주의자들의 캠프로 굴러 떨어졌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그의 에세이 에니그마와 다른 작품들을 통해 그에 대해 이념적 꼬리표를 붙여 분류하는 것을 거부했다. 그러나 그의 사상 중 많은 중요 부분은 실존주의와 깊은 관계가 있다.
작품으로는 <이방인(異邦人)> <시지프의 신화>로 사상가로서의 인정을 받았고, 극작가로서는 해방 후 <오해>(1944)와 <칼리귤라>(1945)로 성공을 얻었다. <계엄령(戒嚴令)>의 각색이 바로에 의해 상연되고, 그 다음에는 <정의의 사람들>이 나왔는데, 작품 수는 얼마 안되지만 순도(純度)가 높은 고전적 문체의 실존주의 연극으로 호평을 받았다. 그 후에는 자작보다는 각색·번안 등에 힘을 쏟아, 라리베의 <정령>, 칼데론의 <십자가에의 예배>, 도스토옙스키의 <악령> 등이 있다.
그는 1957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였으며 1967년 몬트리올에서 열리는 세계 박람회에서 에드몽 자베스, 장 폴 사르트르,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와 함께 네 명의 프랑스 작가 중 하나로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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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트 - 카뮈 (김화영 옮김, 민음사 세계문학 267)

페스트 - 카뮈 (최윤주 옮김, 열린책들 세계문학 229)

페스트 - 카뮈 (이휘영 옮김, 문예 세계문학 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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