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책의 향기
II. 고전 문학 (동양)/2. 동양 - 고전 시

중국명시감상 - 이석호.이원규 공저 (위즈온

by handaikhan 2023. 2. 2.


琵琶行 - 白居易 (비파행 - 백거이)

이 밤 심양강가에서 손님을 보내는데,
솔솔 가을바람에 단풍잎 흔들리고 붉은 꽃 흔들린다.
주인은 말에서 내렸고 손님은 배 타려 할 제.
술 한 잔 하려 해도 음악이 없구나.
취해 노래해도 기쁘지 않아 아프게 이별하는데,
망망한 강물에 명월이 잠겼더라.
홀연 강에서 비파 소리 들려와,
주인은 돌아갈 길 잊었고 손님도 떠나지 않네.
소리 좇아 작은 목소리로 물었네. 비파 타는 사람이 누구냐고
비파 소리 끊어지더니 대답 또한 느릿느릿.
배 가까이 옮겨가 그 사람을 맞이하곤,
술 더 내오고 등불 밝혀 다시 잔치를 연다.
천 번 외치고 만 번을 부르니 그제서야 나오는데,
비파 안고 얼굴을 반쯤 가렸네.
목축을 옮기고 현을 퉁기어 두세 소리 울리는데,
곡조가 안 되었어도 정이 가득하네.
한 줄 한 줄 눌러가니 나지막한 소리마다 슬픔이고,
불우한 한평생 하소연하는 듯하구나.
고개 숙이고 손 뻗으며 계속 연주하는데,
마음 속 무한한 심사 다 쏟아 붓는 듯하구나.
왼손은 가볍게 두드리고 느리게 문지르며 오른손은 위로 아래로 퉁겨
올리고 내리며,
처음엔 예상우의곡, 다음엔 육요를 연주한다.
대현 소리는 소나기 오듯 시끌시끌,
소현 소리는 소곤소곤 속삭인다.
시끌시끌, 소곤소곤 뒤섞어 연주하니,
큰 구슬 작은 구슬 옥쟁반에 떨어지듯.
꾀꼴꾀꼴 꾀꼬리 소리 꽃 아래로 미끄러지듯,
졸졸졸 샘물 소리 얼음 밑에서 흘러가기 힘들다.
얼어붙은 샘물 차갑고 껄끄러운지 비파 현 엉켜 끊어지고,
끊어져 잘리니 비파 소리 점점 그친다.

그윽한 슬픔 남모르는 한 달리 일어나니,

비파 소리 없어도 울릴 때보다 더 슬프다.

갑자기 은병이 깨진 듯 샘물이 솟아난 듯,

철기가 뛰쳐나오고 창과 칼이 부딪쳐 울어대듯.

곡조 끝나고 발로 비파를 가로질러 휙 한번 그으니,

명주가 찢어지듯 네 현이 한소리를 내네.

동쪽, 서쪽 배에 탔던 사람 아무 말이 없고,

강 가운데 가을달만 하얗게 밝았다.

가만히 발을 거두어 현 사이에 꽂고,

의상을 정돈하고 얼굴을 가다듬어,

스스로 말하길 저는 본래 장안의 가녀로,

하마릉 아래서 살았답니다.

13세에 거문고 다 배우고,

교방제일부에 이름을 올렸는데,

한 곡조 타고 나면 악사들도 탄복하고,

화장하고 나설 때면 가녀들이 질투했었소.

오릉의 젊은이들 다투어 예물 보내,

비파 한 곡조에 명주, 비단 셀 수 없었다오.

금옥 장식한 비녀 박자 치다 부서지고,

붉은 비단 치마 술 엎질러 더럽혔소.

금년에 기뻐 웃고 다음해에도 그렇게,

봄바람 가을바람처럼 한가로이 지냈는데,

동생은 군에 가고 자매들은 죽어갔고,

저녁 가고 아침 오더니 안색이 시들어가더이다.

문 앞은 냉랭하고 찾아오는 수레 드물어져,

늙어 시집가 상인의 아내가 되었답니다.

장사꾼들 돈은 귀하나 헤어짐은 가벼워,

지난달에 부량으로 차를 사러 가 버렸소.

강나루 오고가며 빈 배만 지키는데,

뱃전에 달은 밝고 강물은 차갑구나.

깊은 밤 홀연히 젊은 날을 꿈꿀 때면,

꿈에서도 울고 울어 눈물이 분에 묻어 온 얼굴에 퍼진다오.

비파 소리 듣고 나서 이미 탄식했었는데,

이 이야기 듣고 나서 다시 또 탄식하네.

실의에 타향을 떠도는 우리들.

오늘 만나 왜 하필 서로의 신세를 알게 되었나!

나도 지난해에 황제 계신 장안을 떠나,

심양성에 귀양 와서 병들어 누웠다네.

심양 땅 외진 곳 음악이 없는 터라.

일년 내내 사와 죽소리 듣지 못하네.

집 근처 분강 땅 낮고 습하여,

누른 갈대 마른 대 집을 에워싸고.

그 안에서 밤낮으로 무엇을 듣겠는가?

두견새 피울음 소리, 원숭이 슬피 우는 소리밖에.

봄날 강가 꽃 피는 아침, 가을 밤 달 뜨는 때에

가끔 술 가져와 혼자서 잔을 기울였네.

어찌 산가, 촌적도 없단 말인가?

뒤섞이고 갈라지는 소리 오래 듣고 있을 수도 없지만.

오늘 저녁 그대 비파 소리 들으니,

신선의 음악을 들은 듯 귀가 잠시 밝아졌다오.

사양 말고 다시 앉아 한 곡조 타주시며,

그대 위해 악보 맞춰 비파행을 지으리라.

내 말 듣고 감격하여 오랫동안 서 있더니,

자리에 다시 앉아 현을 당기니 음은 높아지고 곡조는 빨라진다.

처량하고 처량한 게 전과 같지 않아,

모든 사람 다시 듣고 얼굴 가려 눈물 흘린다.

좌중에서 눈물 제일 많이 흘린 사람,

강주 사마 푸른 적삼 눈물에 젖었다네.

..................................................................................................

<작품해설>

이 시는 당대의 칠언가행으로 비파인이라고도 한다. 815년 백거이는 태자좌찬선대부를 역임했는데, 이 자리는 실은 아무런 할 일이 없는 한직이었다. 이 해 6월 재상 원무형과 어사중승 배도가 새벽에 자객을 만나, 원무형은 피살되고 배도는 중상을 입었다. 그 자객은 대담하게도 누구든지 나를 잡으려는 자가 있으면 내가 그 자부터 먼저 죽여버리겠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조정의 고위 관료들은 아무 일도 없는 듯 미동도 하지 않았고 어떤 이들은 정말로 자객에게 협박 당하기도 했다. 이에 백거이는 매우 분개해 즉시 자객을 체포해야 한다는 상소문을 올렸는데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재상은 이상스럽게도 맥거이의 기개를 칭찬하지 않았다. 칭찬하기는커녕 동궁의 말직에 있는 자가 간관들이 조정에서 의논하기도 전에 상소문을 올렸다고 비방했다. 이로 인해 백거이는 그 해 8월 강주 사마로 폄직되었다.

816년 백거이가 가을밤에 분포구에서 손님을 배웅하다 비파를 잘 타는 여자를 만났는데 그 여자는 원래 장안의 기녀였으나 늙어 상인의 아내가 되어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는 신세였다. 이에 백거이는 장안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으로 폄적된 자신의 신세를 생각하며 시를 지었다고 한다.

송인 홍매는 용재수필권6과권7에서 비파행의 고사는 허구이며 백낙천의 의도는 자신이 천애를 떠돌고 있는 한을 직서하려는 것이었다고 해석했고 당송시순 권22에서도 같은 평가를 하고 있다.

이로 볼 때 비파녀는 허구의 인물로 시인은 비파녀의 비참한 신세의 자술과 천애 떠돌아다니는 신세 한탄을 통해 자신의 비분을 표현하려 했던 것 같다.

이 시는 비유와 선염 등의 수법을 사용해 변화무쌍한 음악 형상을 표현해 고대 시가 중 음악을 묘사한 시 가운데 절창으로 꼽힌다. 그렇기 때문에 또 한 편의 장편 서사시인 장한가와 병칭되어 당 선종 무렵에는 어린아이는 장한가를 부를 수 있고 수염 난 어른들은 비파행을 부를 수 있다라는 말이 나돌 정도로 널리 유행해 후세 서사시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현재 강서 구강시에 있는 비파정은 후인들이 백거이의 비파행 시를 기념하여 지은 것이다.

.........................................................................................................................................

 

琵琶行 - 白居易

 

潯陽江頭夜送客(심양강두야송객)

楓葉荻花秋瑟瑟(풍엽적화추슬슬)

主人下馬客在船(주인하마객재선)

擧酒欲飮無管絃(거주욕음무관현)

醉不成歡慘將別(취불성환참장별)

別時茫茫江浸月(별시망망강침월)

忽聞水上琵琶聲(홀문수상비파성)

主人忘歸客不發(주인망귀객불발)

尋聲暗問彈者誰(심성암문탄자수)

琵琶聲停欲語遲(비파성정욕어지)

移船相近邀相見(이선상근요상견)

添酒回燈重開宴(첨주회등중개연)

千呼萬喚始出來(천호만환시출래)

猶抱琵琶半遮面(유포비파반차면)

轉軸撥絃三兩聲(전축발현삼량성)

未成曲調先有情(미성곡조선유정)

絃絃掩抑聲聲思(현현엄억성성사)

似訴平生不得志(사소평생부득지)

低眉信手續續彈(저미신수속속탄)

說盡心中無限事(설진심중무한사)

輕攏慢撚撥復挑(경롱만연발복조)

初爲霓裳後六(초위예상후육요)

大絃嘈嘈如急雨(대현조조여급우)

小絃切切如私語(소현절절여사어)

嘈嘈切切錯雜彈(조조절절착잡탄)

大珠小珠落玉盤(대주소주락옥반)

間關鶯語花底滑(간관앵어화저활)

幽咽泉流水下灘(유열천류수하탄)

水泉冷澁絃凝絶(수천냉삽현응절)

凝絶不通聲暫歇(응절불통성잠헐)

別有幽愁暗恨生(별유유수암한생)

此時無聲勝有聲(차시무성승유성)

銀甁乍破水漿迸(은병사파수장병)

鐵騎突出刀鎗鳴(철기돌출도쟁명)

曲終抽撥當心畫(곡종추발당심화)

四絃一聲如裂帛(사현일성여열백)

東船西舫悄無言(동선서방초무언)

唯見江心秋月白(유견강심추월백)

沈吟放撥揷絃中(침음방발삽현중)

整頓衣裳起(정돈의상기염용)

自言本是京城女(자언본시경성녀)

家在蝦蟇陵下住(가재하마릉하주)

十三學得琵琶成(십삼학득비파성)

名屬敎坊第一部(명속교방제일부)

曲罷曾敎善才服(곡파증교선재복)

妝成每被秋娘妒(장성매피추랑투)

五陵年少爭纏頭(오릉년소쟁전두)

一曲紅綃不知數(일곡홍초부지수)

鈿頭銀蓖擊節碎(전두은비격절쇄)

血色羅裙飜酒(혈색나군번주오)

今年觀笑復明年(금년관소부명년)

秋月春風等(추월춘풍등한도)

弟走從軍阿姨死(제주종군아이사)

暮去朝來顔色故(모거조래안색고)

門前冷落鞍馬稀(문전랭락안마희)

老大嫁作商人婦(노대가작상인부)

商人重利輕別離(상인중리경별리)

前月浮梁買茶去(전월부량매다거)

去來江口守空船(거래강구수공선)

船明月江水寒(요선명월강수한)

夜深忽夢少年事(야심홀몽소년사)

夢啼粧淚紅闌干(몽제장루홍난간)

我聞琵琶已歎息(아문비파이탄식)

又聞此語重喞喞(우문차어중즐즐)

同是天涯淪落人(동시천애륜락인)

相逢何必曾相識(상봉하필증상식)

我從去年辭帝京(아종거년사제경)

謫居臥病瀋陽城(적거와병심양성)

瀋陽地僻無音樂(심양지벽무음악)

終歲不聞絲竹聲(종세불문사죽성)

住近湓江地低濕(주근분강지저습)

黃蘆苦竹遶宅生(황로고죽요택생)

其間旦暮聞何物(기간단모문하물)

杜鵑啼血猿哀鳴(두견제혈원애명)

春江花朝秋月夜(춘강화조추월야)

往往取酒還獨傾(왕왕취주환독경)

豈無山歌與村笛(기무산가여촌적)

嘔啞啁哳難爲聽(구아조찰난위청)

今夜聞君琵琶語(금야문군비파어)

如聽仙樂耳暫明(여청선악이잠명)

莫辭更坐彈一曲(막사갱좌탄일곡)

爲君飜作琵琶行(위군번작비파행)

感我此言良久立(감아차언양구립)

卻坐促絃絃轉急(각좌촉현현전급)

凄凄不似向前聲(처처불사향전성)

滿座聞之皆掩泣(만좌문지개엄읍)

座中泣下誰最多(취중읍하수최다)

江州司馬靑衫濕(강주사마청삼습)

 

.........................................................................................................................................................................................................................

백거이(白居易, 772년 ~ 846년)

자(字)는 낙천(樂天)이고, 호는 취음선생(醉吟先生), 향산거사(香山居士) 등으로 불리었다. 당나라 때 뤄양(洛陽) 부근의 신정(新鄭)에서 태어났다.
대력(大曆) 7년(772년), 뤄양(洛陽) 부근의 정주(鄭州) 신정현(新鄭県, 지금의 허난성 신정시)에서 가난한 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두뇌가 명석했던 그는 5, 6세때 이미 시를 짓고, 9세 때에 호율(號律)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의 집안은 가난한 학자 집안으로 대부분 지방관은 지방관으로서 관인 생활을 마치는 경우가 많았다. 딱히 특출난 명문가라고 할 수 없었지만, 안록산(安祿山)의 난 이후의 정치 개혁에서 비교적 낮은 가계 출신에게도 기회가 열렸다. 10세에 가족들에게 벗어나 장안(長安) 부근에서 교육을 받았다. 정원(貞元) 16년(800년) 29세로 진사과(進士科)에 합격하고, 32세에 황제 친시(親試)에 합격하였으며, 그 무렵에 지은 「장한가(長恨歌)」는 장안의 자랑거리일 정도로 유명하다.
백거이의 지우였던 원진은 백거이의 문집 《백씨장경집》 서문에서, "계림의 상인이 (백거이의 글을) 저자에서 절실히 구하였고, 동국의 재상은 번번이 많은 돈을 내고 시 한 편을 바꾸었다"고 하여, 당시 백거이의 글이 신라에까지 알려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백거이는 810년에 당 헌종이 신라의 헌덕왕(憲德王)에게 보내는 국서를 황제를 대신해 지었으며, 821년에서 822년 사이에 신라에서 온 하정사 김충량(金忠良)이 귀국할 때 목종(穆宗)이 내린 제서도 그가 지었다.
35세에 주질현위(盩厔縣尉)가 된 것을 시작으로 한림학사(翰林學士), 좌습유(左拾遺)를 역임했다. 이 무렵 당시 사회나 정치에 대한 비판을 담은 「신악부」라 불리는 작품들을 많이 지었다. 관인으로서 그의 경력은 성공적이었지만, 원화(元和) 10년(815년) 재상 무원형(武元衡)이 암살된 사건의 배후를 캐라는 상소를 올렸다가 월권행위라 하여 강주(江州, 지금의 강서 성江西省 구강 시九江市)의 사마(司馬)로 좌천당했다. 그 뒤 다시 중앙으로 복귀하라는 명이 내려지긴 했지만, 그 자신이 지방관을 자처하여 항저우(杭州, 822년부터 824년까지), 쑤저우(蘇州, 825년부터 827년까지)의 자사(刺使)를 맡아 업적을 남기고 그 지역을 성공적으로 다스렸다.
특히 항저우에 재직하는 동안 시후(西湖)에 건설한 백제(바이띠, 白堤)라는 제방은 소동파가 만든 소제(쑤띠, 蘇堤)와 더불어 항주의 명소로 유명하며 그의 애민정신을 엿볼 수 있다. 항저우에서 재직하는 동안 항상 나무 위에 올라 참선하여 새둥지라는 뜻의 '조과'란 별명을 가진 '도림 선사'와의 일화가 재미있으며 다양한 버전이 있다. 약술하자면 백거이가 도림선사에게 불법을 묻자 '나쁜 짓은 하지 말고, 착한 일은 다 하라'고 하였다. 이에 백거이가 '세 살 어린 애도 아는 이야기'라며 일축하자, 도림선사가 '세 살 아이도 알지만, 여든인 노인도 평생을 통해 실천하기 어려운 것'이라고 하였다는 이야기다.
개성(開成) 원년(836년)에 형부시랑(刑部侍郞), 3년(838년)에는 태자소부(太子少傅)이 되었으며, 무종(武宗) 회창(會昌) 2년(842년)에 형부상서(刑部尙書)를 마지막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이때 그의 나이 71세였다. 74세에 자신의 글을 모아 《백씨문집(白氏文集)》(백씨장경집) 75권을 완성한 바로 이듬해 생애를 마쳤다.

 

.................................................

백거이의 신악부와 진중음 - 백거이 (김철수 옮김, 백산출판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