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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
II. 고전 문학 (동양)/2. 동양 - 고전 시

루바이야트 - 오마르 하이얌, 에드워드 피츠제럴드(영역), 에드먼드 조지프 설리번 (그림) (윤준 옮김, 지만지)

by handaikhan 2023. 2. 2.

오마르 하이얌 - 루바이야트 (1872년)

 

<작품 해설>

11세기 페르시아의 시인들은 벗들과 흥겹게 어울리며 즉흥적으로 ‘루바이’를 지었다. 루바이는 4행시를 뜻한다. 페르시아의 시인이자 천문학자인 오마르 하이얌은 수백 편의 루바이를 남겼다. 그로부터 7세기가 지나 영국 시인 피츠제럴드는 친구로부터 하이얌의 루바이가 적힌 필사본을 선물받는다. 그는 약 600년 전의 이 ‘쾌락주의적 불신자’ 하이얌에게 동질감을 느끼고 루바이들을 번안해 ‘루바이야트’라는 이름으로 출간한다. 말이 번안이지 피츠제럴드는 거의 자신만의 빼어난 창작물을 만들어 낸다. 평론가들은 피츠제럴드가 하이얌의 정신 속으로 들어가는 데 성공했다는 평가를 내린다.
이 책에 실린 75편의 루바이들은 우리 삶의 불확실성에 대안을 제시한다. 우리는 어떻게, 왜 이 세상에 왔는지, 그리고 덧없는 열정의 삶이 순식간에 지나가면 어떻게 될 것인지 알 수 없지만, 향긋한 꽃들과 사랑하는 벗들과 감미로운 포도주가 있다면 충분히 기쁨을 누릴 수 있다고 역설한다. 이 책의 각 루바이에는 영국의 삽화가 조지프 설리번이 1913년 출간한 판본에 그린 삽화가 함께 실려 있다. 이 삽화들은 이후 숱한 판본에 재수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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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수탉이 울자, 술집 앞에 늘어선 이들이

외쳐 댔다 - 문을 열어라!

우리가 머물 수 있는 시간은 잠깐이고,

한번 떠나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테니까.

 

5

그 숱한 장미꽃들과 함께 이람 화원은 정말로 사라지고,

일곱 테를 두른 잠시드의 술잔의 행방 아는 이 없지만,

여전히 포도 덩굴은 옛적의 홍옥을 내놓고,

여전히 물가 정원에선 꽃들이 피어나네.

 

7

와서, 잔을 채우고, 봄의 불길 속에

뉘우침의 겨울옷을 내던져라.

시간의 새는 멀리 날 수 없는데.

보라! 그 새는 벌써 날고 있으니.

 

11

여기 나무 그늘 아래 빵 한 덩어리,

포도주 한병, 시집 한권 - 그리고 황야에서도

내 곁에서 노래하는 그대가 있으니 -

황야도 낙원이나 다름없구나

12

"현세의 권세는 이 얼마나 달콤한가!"라고 어떤 이들은 생각하고,

"다가올 낙원은 그 얼마나 복될까!"라고 다른 이들은 생각하네.

아, 현금을 손에 쥐고 나머지는 내던져라.

오, 저 먼 곳의 요란한 북소리는 귓전만 울릴 뿐.

 

20

아! 임이여, 잔을 가득 채워 오늘에게서 씻어 내자

지난날에 대한 후회와 앞날에 대한 두려움-

내일이라고? - 이런, 내일이면 나 자신

어제의 7000년에 묻힐지도 모르는데.

 

24

오늘을 준비하는 이들이나

내일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이들에게 하나같이

어둠의 탑에서 외쳐 대는 무에진의 목소리

"어리석은 이들이여, 이곳에도 저곳에도 보상은 없다네!"

 

26

오, 현자들은 떠들게 내버려 두고, 늙은 하이얌과 함께 오라.

인생은 쏟살같이 지나간다는 그 한 가지는 확실하다네.

한 가지만 확실하고, 나머지는 거짓이라네

한때 피었던 꽃은 언젠가 시들기 마련인 법.

 

27

나 자신 젊을 적 열심히 성현들을

찾아다니며, 이런 저런 고담준론을

듣고 또 들었지만, 언제나

들어갔던 바로 그 문으로 도로 나왔다네.

 

28

그들과 함께 지혜의 씨를 뿌리고

내 손으로 애써 키워 보았지만,

거둔 수확이래야 오직 이것뿐

"나, 물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가네"

 

32

문이 있었지만 내겐 열쇠가 없었네.

장막이 드리워져 볼 수 없었네.

그저 나와 그대에 관한 하찮은 얘기가 잠깐 나왔나 싶었는데

그러고는 그대도 나도 더는 없다네.

 

33

그래서 돌고 도는 하늘에게 소리쳐 물었네

"어둠 속에서 비틀거리는 제 어린아이들을

인도할 어떤 등을 운명은 갖고 있는가?

그러자 하늘이 대답했네 - "눈먼 지성뿐이로다!"

 

34

그러고는 이 옹기그릇에 입술을 갖다 댔네

숨겨진 생명의 샘을 알아내려고

그러자 입술에 입술 대고 옹기그릇이 속삭였네 - "살아 있을 때

마셔라! - 죽고 나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테니까."

 

37

아, 잔을 가득 채워라 - 시간이 우리 발밑에서

얼마나 빨리 미끄러져 가는지 되뇌어야 무슨 소용인가.

내일은 태어나지 않았고 어제는 죽었는데,

오늘이 즐거우면 왜 내일과 어제에 대해 안달복달할 것인가!

 

41

'있음'과 '없음'은 자와 선으로,

'오르내림'은 그것들 없이도 명확하게 밝힐 수 있었지만,

내가 알고자 했을 뿐인 모든 것에서는

결코 깊이 들어간 적은 없었으니까 - 포도주만 빼고는.

 

45

하지만 현자들은 서로 다투게 내버려 두고,

나와 함께 우주에 대한 논쟁도 다 잊어버리고,

시끌벅적한 소음 속 한쪽 구석에 누워

그대를 놀리는 이들을 놀려 먹자꾸나.

 

46

세상살이래야 들락날락 위아래로 번갈아 나타나는,

기껏해야 주마등 놀이에 불과하니까.

해 노릇 하는 촛불이 든 상자 속에서 상연되고,

그걸 에워싸고 허깨비인 우리는 나타났다 사라졌다 할 뿐 이니까.

 

47

만일 그대가 마시는 포도주, 그대가 눌러 대는 입술이

만물의 끝인 무로 끝난다면 - 맞아 -

그렇다면 바로 오늘 이렇게 생각하라. 오늘의 그대는

그저 무와 다름없는, 내일의 그대일 뿐이라고.

 

60

그런데,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그 진흙 덩이 무리 구역에는

말할 줄 아는 옹기그릇들도, 그렇지 않은 것들도 있었네.

그러더니 갑자기 더 성마른 옹기그릇이 소리쳤네

"정말이지, 도대체 누가 옹기장이고, 누가 옹기그릇인가?"

 

72

슬퍼라, 장미와 더불어 봄이 사라지다니!

젊음의 향긋한 원고를 덮어야 하다니!

나뭇가지에서 노래하던 나이팅게일,

아, 어디에서 날아와 어디로 다시 날아가 버렸는가!

 

73

아, 임이여! 그대와 내가 운명과 짜서

이 보잘것없는 우주의 체계를 통째로 움켜쥘 수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산산조각 내서 - 그러고는

좀 더 마음이 바라는 대로 다시 빚을 수 있을 텐데!

 

74

아, 이울 줄 모르는 내 기쁨의 달,

하늘의 달은 또다시 떠오르네.

앞으로 저 달은 몇 번이고 떠오르며

바로 이 정원에서 나를 얼마나 찾을 것인가 - 헛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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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르 하이얌(‏ غیاث ‌الدین ابوالفتح عمر ابراهیم خیام نیشابورﻯ기야스 앗딘 아불팟흐 우마르 이븐 이브라힘 하얌 니샤푸리, 1048년 5월 18일 ~ 1131년 12월 4일)

페르시아의 수학자, 천문학자, 철학자, 작가, 시인이다. 이항정리를 증명하였다.
그가 만든 달력은 16세기에 나온 그레고리 달력보다 더 정확하였으며, 3차 방정식의 기하학적 해결을 연구하였다. 시집 《루바이야트》가 있는데, 후에 에드워드 피츠제럴드가 영어로 번역하여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오마르 하이얌은 오늘날의 이란의 북동부에 자리한 호라산주 니샤푸르에서 1048년에 태어나 여러 지역에서 활동하다가 1131년경 고향에서 세상을 떠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천문학자와 수학자와 철학자로 널리 알려졌던 하이얌은 당대에는 시인으로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고, 그의 생애에 관해서는 더더욱 알려진 바가 많지 않다. 피츠제럴드의 서문에 제시된 하이얌과 셀주크 왕조의 재상 니잠 알 물크와 암살단의 수장 하산 이 사바흐 간의 우정에 관한 흥미로운 스토리에 의문을 품는 학자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하이얌은 셀주크 왕조 군주들의 궁정에서 일했고 또 그의 사상이나 저작들은 당대의 만만찮은 정치적·종교적 환경에서 형성되었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종교는 하이얌이 활동하던 시대의 사회와 권력 구조를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였는데, 특히 11세기로 접어들면서 페르시아의 궁정에서 기존의 종교관과 다른 견해를 갖는 것은 무척 위험한 일이 되었다. ≪루바이야트≫의 내용과 의의는 그 같은 맥락에서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당대의 역법을 개혁하는 데 큰 역할을 했던 천문학자로서, 또 대수학에 관한 선구적인 저작들을 남긴 수학자로서 하이얌의 명성은 당대에도 무척 확고한 것이었지만, 시인으로서의 명성은 극히 미미한 수준이었다. 그가 세상을 떠나고 반세기 가까이 지난 1170년대에 처음으로 아랍어로 쓴 시 네 편이 그의 이름으로 한 사화집에 수록되었고, 13세기로 접어들면서 몇몇 저자들이 상당수의 페르시아어 시편들을 그가 지은 것으로 언급했다. 이후 시간이 갈수록 그의 이름이 적힌 필사본들에 수록된 페르시아어 시편들은 점점 늘어나게 되었는데, 그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현재 옥스퍼드대학교 보들리언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아우즐리 필사본’이다. 1460∼1461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필사본에는 158편의 4행시(‘루바이’)가 수록되어 있고, 피츠제럴드가 벗 에드워드 카우얼을 통해 하이얌의 4행시들을 처음 접하게 된 것도 바로 이 필사본을 통해서였다. 물론 이후에 발견된 필사본들에 수록된 루바이들까지 합치면 하이얌의 작품들로 알려진 것이 1000여 편이나 되지만, 많은 학자들은 하이얌의 실제 작품이 200편이 채 못 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피츠제럴드의 삶의 성격과 그 배경은 하이얌의 4행시편들에 대한 그의 해석과 번역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고, 이 점은 그가 창조한 ≪루바이야트≫의 특질과 성공에 관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1809년 서포크주 우드브리지 근처 브레드필드의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영국 전역과 대륙을 여러 차례 여행하긴 했지만, 거의 평생 동안 이스트앵글리아 지방에 거주하면서 생계에 대한 걱정 없이 고전 작품들을 읽고 정원을 가꾸며 이른바 ‘초야의 학자’로 살았다. 베리 센트 에드먼즈에 있는 킹 에드워드 6세 문법학교에서 수학한 그는 1826년 케임브리지대학교 트리니티칼리지에 입학했는데, 문법학교와 대학에서 만난 벗들과 세상을 떠날 때까지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의 교우 관계는 그의 지적이고 문학적인 탐구를 잘 보여 준다. 그는 빅토리아기 문단에서 활약하던 소설가 윌리엄 메이크피스 새커리, 시인 앨프리드 테니슨, 역사가이자 저술가인 토머스 칼라일과 교유했다. 그는 그들과 자주 매력적인 편지들을 주고받았고, 새커리와 테니슨이 어려움을 겪던 젊은 시절에는 그들에게 경제적인 도움을 주기도 했다. 또 당시 올리버 크롬웰의 전기를 집필 중이던 칼라일을 위해 자신의 가문 영지에 들어 있던 네이스비 들판에 대해 조사해 주기도 했다.
1851년에 플라톤풍 대화록인 ≪유프라노어−젊음에 관한 한 대화≫를 자비로 발간했던 피츠제럴드는 자신이 거주하던 지역의 방언들과 고전어에 관심이 많았고, 고전 작품들을 번역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를 진지한 번역의 길로 들어서게 만들고 또 궁극적으로 ≪루바이야트≫의 발간으로 이어진 중요한 계기가 된 것은 자신보다 훨씬 나이 어린 에드워드 카우얼과의 만남이었다. 1844년에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 카우얼은 18세, 피츠제럴드는 35세였다. 보기 드문 언어 재능을 지닌 카우얼은 이미 라틴어·그리스어·스페인어·페르시아어에 능통해 있었고 산스크리트어를 공부하는 중이었다. 카우얼로부터 스페인어를 배운 지 3년 만에 피츠제럴드는 스페인 극작가 칼데론의 희곡 6편을 번역해 자비로 발간했고, 1852년 12월부터 옥스퍼드에서 카우얼에게 페르시아어 교습을 받기 시작했다. 페르시아어에 어느 정도 친숙해진 그는 1856년에 페르시아 시인 자미의 ≪살라만과 압살≫을 번역해 자비로 발간했다.
오마르 하이얌이 피츠제럴드의 삶 속으로 들어올 무렵 그가 이미 페르시아어를 번역할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은 커다란 행운이었다. 1856년 옥스퍼드대학교 보들리언도서관에서 조수로 일하던 카우얼은 하이얌의 것으로 추정되는 한 필사본을 발견했다. 그는 이 ‘아우즐리 필사본’을 베낀 작은 노트를 보냈는데, 피츠제럴드는 ‘약 500년 전의 한 쾌락주의적 불신자’인 하이얌에게 동질감을 느꼈던 것처럼 보인다. 또 같은 해 가을 인도 캘커타의 프레지던시칼리지 교수로 임명되어 아내와 함께 인도에 도착한 카우얼은 현지에서 또 다른 필사본을 발견해 그것을 베껴 쓴 후 피츠제럴드에게 보냈고, 피츠제럴드는 2년에 걸쳐 이 하이얌의 루바이들을 번역했다. 사실 자신의 페르시아어 멘토였던 카우얼이 인도로 떠나 버리고 또 얼마 후 결혼한 루시 바턴과의 불행한 결혼 생활(이듬해인 1857년 8월, 부부는 별거하기로 합의했다.)을 이어 가던 그로서는 이 번역 작업이야말로 힘겨운 시기를 견딜 수 있게 해 준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피츠제럴드는 평생 동안 우드브리지에서 유복하게 살면서 독서와 외국어 공부와 번역에 전념했고, 이웃들에게는 ‘약간 얼빠진’ 괴짜로 여겨졌다. 그가 남긴 숱한 편지들은 그가 점점 떨어지는 시력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지적 호기심과 탐구심을 유지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그는 벗들과의 교유를 계속하면서 가끔 런던과 다른 지역을 여행하기도 했고, 테니슨 부자는 1876년 우드브리지의 자택으로 그를 찾아오기도 했다. 그는 1883년 5월 노포크주 머튼에 거주하던 벗 크래브(시인 조지 크래브의 손자)를 방문하던 중 세상을 떠났고, 우드브리지 인근의 보울지의 교회 묘지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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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바이야트 - 오마르 하이얌 (최인자 옮김, 필요한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