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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
II. 고전 문학 (동양)/2. 동양 - 고전 시

백거이 시선 (김경동 편저, 문이재)

by handaikhan 2023. 2. 2.

 

백거이 시선 (중국시인총서-당대편)

 

白居易 - 夜 (백거이 - 촌야)

 

달밤 서리맞은 풀 파르스름하고

가을 벌레들 울음소리 애절한데

시골 마을 어디에도

오가는 사람 하나도 없다

홀로 문 앞에 나가

들판을 바라보니

밝은 달 아래

메밀꽃이 눈처럼 하얗다

 

霜草蒼蒼蟲切切 (상초창창충절절)
村南村北行人絶 (촌남촌북행인절)
獨出門前望野田 (독출문전망야전)
月明蕎麥花如雪 (월명교맥화여설)

 

[작품해설]

원화 9년 (814년) 43세, 하규

811년 4월, 모친이 서거하자 백거이는 관직에서 잠시 물러나 고향인 하규(협서성 위남시)에서 3년간 복상하였다. 이 시는 바로 814년 하규에서 시골 마을의 가을 야경을 노래한 서경시이다. 이미 인적이 끊어져 사방은 고요한데, 오직 가을 벌레들의 애절한 울음소리만이 들려오는 깊은 밤, 그 밤 들판에는 눈처럼 하얀 메밀꽃이 밝은 달 아래 피어 있다. 밝은 달빛 속에 드러나는 흰색은 왠지 깊은 슬픔을 담고 있는 색이다. 어머니를 여윈 시인의 섬세한 감성이 느껴지는 이 작품에는 쓸쓸한 가을 밤 정경이 담담한 필치로 그림처럼 아름답게 묘사되어 있다. (p.5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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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거이(白居易, 772년 ~ 846년)

자(字)는 낙천(樂天)이고, 호는 취음선생(醉吟先生), 향산거사(香山居士) 등으로 불리었다.
대력(大曆) 7년(772년), 뤄양(洛陽) 부근의 정주(鄭州) 신정현(新鄭県, 지금의 허난성 신정시)에서 가난한 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두뇌가 명석했던 그는 5, 6세때 이미 시를 짓고, 9세 때에 호율(號律)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의 집안은 가난한 학자 집안으로 대부분 지방관은 지방관으로서 관인 생활을 마치는 경우가 많았다. 딱히 특출난 명문가라고 할 수 없었지만, 안록산(安祿山)의 난 이후의 정치 개혁에서 비교적 낮은 가계 출신에게도 기회가 열렸다. 10세에 가족들에게 벗어나 장안(長安) 부근에서 교육을 받았다. 정원(貞元) 16년(800년) 29세로 진사과(進士科)에 합격하고, 32세에 황제 친시(親試)에 합격하였으며, 그 무렵에 지은 「장한가(長恨歌)」는 장안의 자랑거리일 정도로 유명하다.
백거이의 지우였던 원진은 백거이의 문집 《백씨장경집》 서문에서, "계림의 상인이 (백거이의 글을) 저자에서 절실히 구하였고, 동국의 재상은 번번이 많은 돈을 내고 시 한 편을 바꾸었다"고 하여, 당시 백거이의 글이 신라에까지 알려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백거이는 810년에 당 헌종이 신라의 헌덕왕(憲德王)에게 보내는 국서를 황제를 대신해 지었으며, 821년에서 822년 사이에 신라에서 온 하정사 김충량(金忠良)이 귀국할 때 목종(穆宗)이 내린 제서도 그가 지었다.
35세에 주질현위(盩厔縣尉)가 된 것을 시작으로 한림학사(翰林學士), 좌습유(左拾遺)를 역임했다. 이 무렵 당시 사회나 정치에 대한 비판을 담은 「신악부」라 불리는 작품들을 많이 지었다. 관인으로서 그의 경력은 성공적이었지만, 원화(元和) 10년(815년) 재상 무원형(武元衡)이 암살된 사건의 배후를 캐라는 상소를 올렸다가 월권행위라 하여 강주(江州, 지금의 강서 성江西省 구강 시九江市)의 사마(司馬)로 좌천당했다. 그 뒤 다시 중앙으로 복귀하라는 명이 내려지긴 했지만, 그 자신이 지방관을 자처하여 항저우(杭州, 822년부터 824년까지), 쑤저우(蘇州, 825년부터 827년까지)의 자사(刺使)를 맡아 업적을 남기고 그 지역을 성공적으로 다스렸다.
특히 항저우에 재직하는 동안 시후(西湖)에 건설한 백제(바이띠, 白堤)라는 제방은 소동파가 만든 소제(쑤띠, 蘇堤)와 더불어 항주의 명소로 유명하며 그의 애민정신을 엿볼 수 있다. 항저우에서 재직하는 동안 항상 나무 위에 올라 참선하여 새둥지라는 뜻의 '조과'란 별명을 가진 '도림 선사'와의 일화가 재미있으며 다양한 버전이 있다. 약술하자면 백거이가 도림선사에게 불법을 묻자 '나쁜 짓은 하지 말고, 착한 일은 다 하라'고 하였다. 이에 백거이가 '세 살 어린 애도 아는 이야기'라며 일축하자, 도림선사가 '세 살 아이도 알지만, 여든인 노인도 평생을 통해 실천하기 어려운 것'이라고 하였다는 이야기다.
개성(開成) 원년(836년)에 형부시랑(刑部侍郞), 3년(838년)에는 태자소부(太子少傅)이 되었으며, 무종(武宗) 회창(會昌) 2년(842년)에 형부상서(刑部尙書)를 마지막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이때 그의 나이 71세였다. 74세에 자신의 글을 모아 《백씨문집(白氏文集)》(백씨장경집) 75권을 완성한 바로 이듬해 생애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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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파행 - 백거이 (오세주 옮김, 다산초당)

당시 삼백수 (안병렬 옮김, 계명대학교출판부, 개정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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