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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
II. 고전 문학 (동양)/1. 동양 - 고전 소설

라쇼몽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양윤옥 옮김, 좋은생각)

by handaikhan 2023. 2. 2.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단편집

 

목차
제1부 라쇼몽 / 코 / 덤불 속 / 지옥변 / 투도
제2부 점귀부 / 갓파
제3부 난쟁이 어릿광대의 말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 라쇼몽 (1915년)

 

어느 날 해 저물 녘의 일이다. 한 백성이 라쇼몽 아래에서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p.29)

 

성안이 그런 판이었으니 라쇼몽의 수리 같은 건 애초에 관심을 가질 리가 없는지라 되는 대로 내팽개쳐 둘 뿐 아무도 돌아보는 이가 없었다. 그러자 그 황폐한 꼴을 얼씨구 좋아라 하면서 너구리가 와서 살고, 도적들이 와서 살았다. 그러다가 끝장에는 거둬줄이 없는 시체를 떠메고 와 이 문의 누각 위에 내버리는 풍습마저 생겼다. 그러니 사람들은 해만 떨어졌다 하면 모두 무서워서 라쇼몽 근처에는 아예 발걸음을 하지 않게 되었다.

그 때신 까마귀가 어디선가 떼로 몰려들었다. (p.30)

 

필자는 앞서 '한 백성이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라고 적었다. 그러나 이 백성은 비가 그친 다음에도 딱히 뭘 어떻게 하겠다는 작정이 없었다. 평소에 하던 대로라면 당연히 주인집에 돌아가야 할 참이었다. 그러나 사나흘 전에 그 주인에게서 이제 그만오라는 소리를 들었다. 앞서 말했듯이 당시 교토는 예삿일이 아닐 만큼 쇠토해 있었다. 이 백성이 오랜 세월 일해 왔던 주인에게 그만오라는 소리를 들은 것도 실ㄹ은 그 쇠퇴의 작은 여파였다. 그러니 '한 백성이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라고 하기 보다 '비에 몰린 한 백성이 갈 곳ㅎ이 없어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라고 하는 편이 적당할 것이다. 그런데다 그날의 하늘 꼬락서니도 적잖이 이 헤이안 조 백성의 센티멘털리즘에 영향을 끼쳤다. 신시무렵부터 뿌리기 시작한 비는 아직껏 걷힐 기미가 없었다. 그래서 이 백성은 다른 건 고사하고 당장 내일 입에 풀칠할 방도를 어떻게든 궁리해보자 싶어서, 말하자면 어떻게도 할 수 없는 일을 어떻게든 해보겠다고 두서없이 생각을 더듬어 가며 아까부터 이곳에 앉아 스자쿠 대로에 내리는 빗소리를 듣는 둥 마는 둥 듣고 있었던 것이다. (p.30-31)

 

어떻게도 할 수 없는 일을 어떻게든 해보기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고 자시고 할 여지가 없다. 이래 가리고 저래 가리다 가는 남의 집 토담 밑이나 길가 맨땅에서 굶어죽기 딱 좋다. 그 다음에는 이 라쇼몽에 개처럼 버려지는 수밖에. 그러니 무슨 일이건 가리지 않는다면......백성의 생각은 수없이 같은 자리를 맴돌던 끝에 가까스로 이 지점ㅁ에 다다랐다. 그러나 이 "....않는다면'은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결국 '......않는다면'이렀다. 백성은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을 긍정하면서도 '......않는다면'을 매듭 짓자면 당연히 따르게 될 '도둑놈이 되는 수밖에 없다'라는 것을 적극적으로 긍정할 용기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p.31-32)

 

백성은 썩어 문드러진 주검들이 풍기는 악취에 자기도 모르게 코를 싸쥐었다. 그러나 그 손은 다음 순간 코를 싸쥐는 것마저 잊었다. 어떤 강렬한 느낌이 이 사내의 후각을 거의 송두리째 빼앗아버렸기 때문이다.

백성은 눈은 그제야 비로소 주검들 속에 웅크리고 있는 인간을 보았다. 노송나무 껍질 색깔의 옷을 입은, 키가 작고 말라빠진 백발의 원숭이 같은 노파였다. 노파는 오른손에 불붙인 소나무 막대기를 들고 한 시체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머리가 긴 것을 보면 아마도 여자의 시체일 것이었다.

백성은 열에 여섯은 공포감에, 나머지 넷은 호기심에 휩싸여 잠시 숨쉬는 것마저 잊었다. 옛 기록자의 말을 빌리자면 '머리털이 쭈뼛 곤두섰다'고 느낀 것이다. 노파는 소나무 막대기를 나무 바닥의 틈새에 꽂고는 지금까지 들여다보던 시체의 머리를 두 손으로 잡더니 마치 원숭이 어미가 새끼 원숭이의 이라도 잡아주듯이 그 긴 머리카락을 뽑아내기 시작했다. 머리카락은 손에 집히는 대로 뭉텅뭉텅 뽑히는 모양이었다.

머리카락이 한 번씩 뽑힐 때마다 백성의 마음에서 서서히 공포감이 사라져 갔다. 그와 동시에 노파에 대한 격한 증오감이 조금씩 커졌다. 아니, 노파에 대한 증오감이라고 하는 건 어폐가 있다. 오히려 온갖 악에 대한 반감이 시시각각 강렬해졌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때 누군가가 아까 문 아래에서 이 백성이 궁리했던, 굶어죽을 것인가 도둑놈이 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새삼 들고 나온다면 아마도 백성은 아무 미련 없이 굶어죽기를 선택했을 것이다. 그럴 만큼 이 사내의 악에 대한 증오는 노파가 바닥에 꽂아둔 소나무 막대기처럼 거세게 타올랐던 것이다.

물론 백성은 어째서 노파가 죽은 사람의 머리카락을 뽑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따라서 합리적으로는 그것을 선악의 어느 쪽으로 정리해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백성에게는 이 비 오는 밤에 라쇼몽 누각에서 죽은 사람의 머리카락을 뽑는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용서할 수 없는 악이었다. 물론 조금 전까지 자신도 도둑놈이 될 생각이었다는 것 따위는 까맣게 잊어버렸다. (p.34-36)

 

"나는 관리가 아니오. 마침 이 문 아래를 지나가던 나그네요. 그러니 할멈을 오랏줄에 묶어 끌고 가겠다는 게 아니오. 그저 방금 여기서 무얼 했는지 그걸 내게 말해주기만 하면 되는 거요."

"이 머리카락을 뽑아서, 이 머리카락을 뽑아서 말이지, 가발을 만들려고 그랬어."

백성은 노파의 대답이 뜻박에도 평범한 데 실망했다. 그 실망과 동시에 조금 전의 증오심이 차디찬 모멸감과 함께 다시 가슴속에 밀려들었다. 그런 기미가 상대방에게도 전해졌던 것일까. 노파는 한 손에 아직도 시체의 머리에서 뜯어낸 길다란 머리칼을 쥔 채 두꺼비가 골골거리는 듯한 소리로 우물우물  이런 말을 쏟아놓았다.

"그야 죽은 사람의 머리카락을 뽑는 것은 나쁜 일이겠지. 그렇지만 여기 죽은 사람들은 모두 그런 일을 당해도 괜찮을 사람들이여. 지금, 내가 지금 머리카락을 뽑아낸 이 여자는 말아여, 뱀을 잡아다가 네 마디씩 잘라서 말린 것을 건어물이라고 궁성 호위대에 팔러 다녔단 말이여. 역병에 걸려 뒈지지 않았으면 아직도 그걸 팔러 다녔을 거여. 그럿도 말여, 이 여자가 파는 건어물은 맛있다고 소문ㄴ이 나서 호위대 사람들이 너나없이 찬거리로 사들였대. 이 여자가 한 짓거리가 나쁘다고는 안 하겠어. 안 그러면 굶어 죽을 테니 할 수 없이 한 짓이여. 이런 할 수 없는 사정을 잘 알던 이 여자는 내가 한 짓도 아마 너그럽게 봐줄 것이여."

노파는 대충 그런 뜻의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백성은 칼을 칼집에 집어넣고 그 칼자루를 왼손으로 잡은 채 냉랭한 표정으로 그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물론 오른손으로는 불그레하게 고름이 잡힌 큼직한 여드름을 만지작거려 가며. 그러나 그 이야기를 듣다보니 백성의 마음에 어떤 용기가 생겨났다. 그것은 아까 라쇼몽 아래에서 한없이 망설이던 때는 도무지 생겨나지 않던 용기였다. 또한 아까 이 누각 위에 올라와 노파를 붙잡던 때의 용기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작용하는 용기였다. 백성은 굶어죽느냐 도둑놈이 되느냐에 대한 망설임만 사라진 게 아니었다. 그 순간 이 사내의 마음속에서 굶어죽는다는 따위의 일은 아예 생각해본 적조차 없었던 것처럼 의식 밖으로 멀리 밀려나 있었다.(p.38-40)

 

"그래요? 그 말이 틀림없지요?"

노파의 이야기가 끝나자 백성은 비웃는 듯한 목소리로 다짐을 했다.

"그렇다면 내가 옷을 홀랑 벗겨 가도 원망은 못하리다. 나도 그렇게 안 하면 당장 굶어죽을 처지요."

백성은 잽싸게 노파의 옷을 벗겨냈다. 그리고는 다리를 붙잡고 늘어지려는 노파를 거칠게 시체 위로 밀쳐버렸다. 사라디까지는 겨우 대여섯 걸음이면 되는 거리였다. 백성은 벗겨낸 노송나무 껍질 색 옷가지를 옆구리에 낀 다음 눈 깜짝할 사이에 경사 급한 사다리를 짚고 어둠의 밑바닥으로 뛰어내려갔다. (p.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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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 龍之介, 1892년 3월 1일 ~ 1927년 7월 24일)

일본의 근대 소설가.

호는 징강당주인(澄江堂主人)이며 하이쿠 작가로서의 호는 가키(我鬼)이다.
일본 도쿄 출생. 본래 성은 니하라(新原)이나, 12세에 외삼촌에게 입양되어 외가의 성인 아쿠타가와를 쓰게 된다. 아버지의 사업실패, 누나의 요절로 인한 어머니의 발광 때문에 제대로 된 양육을 받을 수 없어서라고 한다. 양아버지인 외삼촌이 에도 시대 문예에 관심이 있어, 그에 영향을 받았다.
1913년 도쿄제국대학에 입학. 1914년 고등학교 동창이던 쿠메 마사오(久米正雄), 키쿠치 칸(菊池寬)[3] 등과 제3차 '신사조(新思潮)'를 발간하여 첫작품 〈노년〉(老年)을 발표하였다. 이어서 1915년 '데이코쿠분가쿠(帝国文学)'에 대표작 〈라쇼몽〉을 발표하고 그 해에 나쓰메 소세키의 '목요회'에 참석하게 된다.1916년 제 4차 신사조에 〈코〉(鼻)를, 신소설에 〈참마죽〉(芋粥)을 발표하여, 나쓰메 소세키의 격찬을 받으며 문단에 진출했다.
대학을 졸업한 후, 해군기관학교에 들어가 영어교관으로 근무했다. 그러나 군인들에게 영어강의를 하면서 무기여 잘 있거라와 같은 반전(反戰)소설만 잔뜩 소개하다가 1년 뒤, 교직에서 물러났고, 오사카의 마이니치 신문에 사우(社友)로 들어가 본격적인 창작활동에 돌입하며, 해외 특파원도 겸 하는 등, 이 시기가 아쿠타가와에게 있어서 가장 윤택한 시기였다고 한다.
그러나, 본래 늑막염, 위장병 등으로 병약했던 체질과, 어머니의 발광에 따른 신경쇠약의 악화로 인해 요양생활을 하게 된다. 거기에 집안사정, 만년에는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대두 등 시대의 동향에 적응하지 못하여 회의와 초조, 불안감,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이 시점에 동료 문인이자 정신과 의사였던 사이토 모키치에게 진료를 받고 조언을 듣기도 했다. 사이토 모키치는 아쿠타가와의 신경쇠약과 불면증을 걱정하며 수면제인 바르비탈을 처방해줬는데, 후술하겠지만 이는 불행의 씨앗이 되었다.
모키치의 진료에도 결국 심한 신경쇠약에 빠져 몇몇 지인들에게 편지와 원고, 그리고 〈나의 장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僕の将来についたぼんやりとした不安)이라는 내용이 담긴 유서 <어느 옛 벗에게 남기는 수기(或舊友へ送る手記)>를 남기고 1927년 7월 24일 35세의 젊은 나이에 수면제 바르비탈 과다 복용으로 음독 자살하였다. 같은 소세키 문하의 친구이자 선배인 우치다 햣켄(内田百閒)에 따르면, 아쿠타가와가 자살하기 며칠 전 찾아갔을 때 그는 그 시점에서 이미 대량의 수면제에 취해 몽롱한 상태로, 깨어 있는가 싶으면 어느샌가 다시 잠들어 있는 상태였다고 한다. 또한 아쿠타가와는 죽기 직전 즈음에 가까운 지인과 친구들을 방문했으나 결국 모두 만나지 못한 채 생을 마감했는데, 7월 초에는 기쿠치 칸을 만나려고 두 차례 문예춘추사를 찾아갔지만 만나지 못했고, 자살하기 바로 전날에는 한동네에 살았던 시인 무로오 사이세이(室生犀星)를 찾아갔으나 그 때 사이세이는 잡지 취재로 우에노에 나가 있었던지라 역시 만나지 못했다. 이 때문에 사이세이는 당시 아쿠타가와를 만나지 못했던 일을 두고 "만약 내가 외출하지 않았다면 아쿠타가와 군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자살을 말리고 싶었다"라며 만년까지 두고두고 후회했다고 한다.
죽기 전, 친구였던 구메 마사오에게 〈어떤 바보의 일생〉(或阿呆の一生)이란 작품을 건네었다. 해당 작품을 읽어보면 냉소적인 자세와 삶에 대한 열망이 어지럽게 교차되어 묘사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마지막 작품이라고도 일컬어지는 〈톱니바퀴〉는, 그가 만년에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 어떠한 것에 시달렸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의 사후 수면제를 처방했던 모키치는 큰 충격에 빠져 그의 빈소를 방문한 이후 한동안 모습을 비추지 않았다고 한다. 자세한 내용은 사이토 모키치 문서로 영화화된 '남경의 그리스도'의 남자 주인공(여기서는 양가휘가 연기했다.) 오카가와 유이치로의 캐릭터 설정이나 결말부분도 아쿠타가와를 모티브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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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쇼몽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김영식 옮김, 문예 세계문학)

라쇼몽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서은헤 옮김, 민음사 세계문학)

아쿠타가와 작품집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진웅기, 김진욱 옮김, 범우사 세계문학)

지옥변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양윤옥 옮김, 시공사 세계문학의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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