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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
II. 고전 문학 (동양)/1. 동양 - 고전 소설

도련님 - 나쓰메 소세키 (송태욱 옮김, 현암사)

by handaikhan 2023. 2. 2.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2 

나쓰메 소세키 - 도련님 (1906년)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앞뒤 가리지 않는 성격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나는 손해만 봐왔다. 초등학교 다닐 때는 학교 2층에서 뛰어내리다 허리를 삐는 바람에 일주일쯤 일어나지 못한 적도 있다. 왜 그런 무모한 짓을 했느냐고 묻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새로 지은 교사 2층에서 머리를 내밀고 있었더니 같은 반의 한 친구가 농담으로 놀려댔기 때문이다.

"아무리 으스댄다고 해도 거기서 뛰어내리지는 못할걸. 이 겁쟁이야!"

학교 사환에게 업혀 집으로 돌아오자 아버지가 부릅뜬 눈으로 호통을 쳤다.

"겨우 2층에서 뛰어내리다 허리를 삐는 놈이 어디 있어!"

"다음에는 허리를 삐지 않고 뛰어내리는 걸 보여드릴게요"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p.15)

 

아버지는 눈곱만큼도 나를 귀여워해주지 않았다. 어머니는 형만 두둔했다. 형은 얼굴이 유난히 하얘서 여자 역을 하는 가부키 배우 흉내 내기를 좋아했다. 아버지는 나를 볼 때마다 "어차피 제대로 되긴 틀렸어"하고 말했다. 앞뒤 생각 없이 굴어 앞날이 걱정이라고 어머니는 말했다. 역시 제대로 되진 않았다. 보시는 대로 요 모양이다. 앞날이 걱정된다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저 형무소에 가지 않고 살고 있을 뿐이다. (p.17)

 

어머니가 병으로 돌아가시기 2, 3일 전, 부엌에서 공중제비를 넘다가 그만 부뚜막 모서리에 갈비뼈를 부딪쳤는데 무척 아팠다. 어머니가 몹시 화를 내며 이렇게 말했다.

"너 같은 놈은 이제 꼴도 보기 싫다."

그래서 친척집에 가 있었다. 그런데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이 왔다. 그렇게 빨리 돌아가실 줄은 몰랐다.

그렇게 중병이었다면 좀 더 얌전하게 굴 걸 그랬다는 생각을 하며 돌아왔다. 그랬더니 형이 나를 보고 불효자라고, 나 때문에 어머니가 빨리 돌아가신 거라고 했다. 나는 분해서 형의 따귀를 때렸다가 심한 꾸중을 들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로는 아버지, 형, 나 이렇게 셋이서 살았다. 아버지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사내로, 내 얼굴만 보면 "네놈은 틀려먹었어! 네놈은 틀려먹었어!"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뭐가 틀려먹었다는 것인지 아직도 모르겠따. 이상한 아버지도 다 있다. 형은 사업가가 된다면서 열심히 영어 공부를 하고 있었다. 원래 계집애 같은 성격에다 교활해서 나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열흘에 한 번꼴로 싸움을 했다. 어느 날 장기를 두는데 비겁하게 외통수로 몰아놓고 쩔쩔매는 나를 재미있다는 듯이 놀려댔다. 나는 울컥 화가 치밀어 손에 쥐고 있던 차를 형의 미간을 향해 내던졌다. 미간이 터져 살짝 피가 났다. 형이 아버지에게 고자질을 했다. 아버지는 나와 의절하겠다는 말을 꺼냈다.

그때는 어쩔 수 없다며 체념하고 아버지의 말씀대로 의절당할 각오를 하고 있었는데, 지난 10년간 집안일을 해온 기요라는 하녀가 울면서 아버지에게 빌어 간신히 아버지의 노여움이 풀렸다. 그런데도 나는 아버지를 그다지 무서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요라는 하녀가 딱했다. 이 하녀는 원래 지체 있는 가문 사람이었다고 하는데, 막부가 와해될 때 영락하여 결국 남의집살이까지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할멈이다. 무슨 이유에선지 이 할멈이 나를 끔찍이 귀여워해 주었다. 신기한 일이다. 어머니도 돌아가시기 사흘 전에 나에게 정나미가 떨어졌다. 아버지도 일 년 내내 나를 처치 곤란해했다. 동네에서는 난폭자 악동이라고 손가락질했다. 이런 나를 무턱대고 귀히 여겨주었다. 나는 도저히 다른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스스로 포기하고 있었기에 남들이 천덕꾸러기로 취급해도 아무렇지 않았다. 오히려 기요처럼 애지중지해주는 걸 의아하게 생각했다. 기요는 가끔 부엌에서 아무도 없을 때 "도련님은 올곧고 고운 성품을 지녔어요"하며 나를 칭찬해주곤 했다. 하지만 나는 기요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고운 성품이라면 기요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나에게 잘해줄 것이라 생각했다. 기요가 그런 말을 할 때마다 나는 입에 발린 말은 싫다고 대답하는 것이 상례였다. 그러면 할멈은, 그러니 고운 성품인 거라며 기쁜 듯이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힘으로 나를 만들어냈다며 자랑스러워하는 것처럼 보인다. 살짝 기분이 언짢았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부터 기요는 더욱더 나를 애지중지했다. 가끔은 어린 마음에도 왜 그렇게 귀여워하는지 수상하게 생각했다. 달갑지 않아, 그냥 내버려두면 좋을 텐데, 하고 생각했다. 딱하다고도 생각했다. 그래도 기요는 나를 귀여워한다. (p.18-19)

 

기요는 꼭 아버지나 형이 없을 때만 나에게 뭔가를 주었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것은, 사람들 눈을 속여가며 나만 덕을 보는 일이다. 물론 형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형 몰래 기요가 주는 과자나 색연필을 받고 싶지는 않았따.

"왜 나한테만 주고, 형한테는 안 주는 거야?"

기요에게 이렇게 물은 적이 있다. 그러자 기요는 시치미를 뚝 떼고 대답했다.

"형은 아버님이 사다주시니까 괜찮아요."

이건 불공평한 일이다. 아버지는 완고하지만 그렇게까지 편애할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기요의 눈으로 보면 그렇게 보이는 모양이다. 완전히 사랑에 빠져 있음에 틀림없다. 원래 지체 있는 가문 사람이라 하더라도 교육을 받지 못한 할멈이라 어쩔 수가 없다. 단지 이것만이 아니다. 호의적인 눈은 무서운 것이다. 기요는 내가 장래에 출세하여 훌륭한 사람이 될 거라 굳게 믿고 있다. 그런데 공부를 하는 형은 얼굴만 허여멀거니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을 거라고 혼자 단정 짓고 있었다. 이런 할멈이고 보니 당해낼 재간이 없다.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은 반드시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싫어하는 사람은 반드시 영락할 거라 믿고 있다. 나는 그때부터 특별히 뭐가 되겠다는 생각도 없었다. 하지만 기요가 "될 거다, 될 거다"하는 바람에 역시 뭔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 바보스럽다. (p20-21)

 

이런 등신들 같으니라고, 선생도 모르는 게 있는 건 당연하지. 모르는 걸 모른다고 하는 게 뭐가 이상해. (p.40)

 

농담도 도가 지나치면 못된 장난이다. (p.46)

 

비열한 놈들이다. 스스로가 한 짓을 말 못할 바엔 처음부터 아예 하지를 말았어야지. 증거가 없는 이상 시치미를 뗄 심산으로 뻔뻔하게 나온다. 나도 중학교 다닐 때는 어느 정도 장난을 쳤다. 하지만 누가 한 거냐고 물어볼 때 꽁무니를 빼는 비겁한 행동을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한 것은 한 것이고 안 한 것은 분명히 안 한 것이다. 나 같은 사람은 아무리 장난을 쳐도 뒤가 켕기는 게 없다. 거짓말을 하고 벌을 피할 생각이라면 처음부터 장난 같은 건 아예 하지 말아야 한다. 거짓말과 벌은 붙어 다니기 마련이다. 벌이 있기에 장난도 기분 좋게 칠 수 있다. 장난만 치고 벌은 싫다는 비열한 근성이 대체 어느 나라에 유행한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돈을 빌려놓고 갚기 싫다고 하는 건 모두 이런 녀석들이 졸업해서 할 짓임에 틀림없다. 대체 중학교는 뭐하러 들어온 것인가. 학교에  들어와 거짓말을 하고, 속이고, 뒷전에서 살금살금 건방지고 못된 장난이나 치고, 그러다가 젠체하며 졸업을 하면 교육 좀 받았습네, 하고 착각한다. 상대 못할 하찮은 놈들이다. (p.56)

 

이놈들이 서로 짜고 동서 양쪽에서 나를 골탕 먹이려 한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용기가 있는 것에 비해 지혜가 부족하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좋은지 전혀 알 수가 없다. 알 수는 없지만 결코 질 생각은 없다. 이대로 물러선다면 내 체면이 말이 아니다. 도쿄 토박이는 패기가 없다, 는 말을 듣는 건 분하다. 숙직을 서다가 코흘리개들에게 놀림을 당하고도 손쓸 방도가 없어 울며 겨자 먹기로 단념했다는 말이라도 돌면 평생의 불명예다. 이래 봬도 근본은 하타모토다. 그 시조는 세이와 겐지고, 다다노 만주의 후예다. 이런 농사꾼들과는 태생부터가 다른 것이다. 다만 지혜가 없다는 게 안타까울 따름이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는 것이 난처할 뿐이다. 난처하다고 굴복할 수는 없다. 정직하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는 것이다. 이 세상에 정직한 것이 이기지 못하고 달리 이기는 것이 있는지 생각해보라. 오늘 밤 안에 이기지 못하면 내일 이기면 된다. 내일 이기지 못하면 모레 이기면 된다. 모레도 이기지 못하면 하숙집에서 도시락을 가져오게 해서 이길 때까지 이곳에서 버털 것이다. 나는 이렇게 결심을 하고 복도 가운데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날이 새기를 기다렸다. 모기가 애앵거리며 덤벼들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조금 전에 부딪친 정강이를 만져보니 뭔가 끈적끈적하다. 피가 난 모양이다. 피 같은 거야 나고 싶으면 멋대로 나라지. 그러는 사이에 조금 전의 피로가 몰려와 깜빡 잠이 들고 말았다. (p.59-60)

 

푸른 하늘을 보고 있으니 햇빛이 점점 약해지면서 좀 쌀랑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향 연기 같은 구름이 투명한 하늘 위를 조용히 퍼져 나가는가 싶더니 어느새 하늘 속으로 깊이 흘러들어 엷은 안개처럼 되었다. (p.72-73)

 

알랑쇠는 히죽히죽 웃었다. 이자가 하는 말은 하나하나 비위에 거슬리는게 참 묘하다. (p.74)

 

빨간 셔츠는 웃었다. 특별히 내가 웃음을 살 만한 이야기를 한 기억이 없다. 이날 이때까지 살아온 대로 하면 된다고 굳게 믿고 있다. 생각해보면, 세상 사람들 대부분은 나빠지는 일을 장려하고 있는 것 같다. 나빠지지 않으면 사회에서 성공하지 못한다고 믿고 있는 듯하다. 간혹 정직하고 순수한 사람을 보면, 도련님이라는 둥 애송이라는 둥 트집을 잡아 경멸한다. 그렇다면 초등학교나 중학교에서 윤리 선생님이 거짓말을 하지 마라, 정직하라고 가르치지 않는 편이 낫다. 차라리 큰맘 먹고 학교에서 거짓말하는 법이라든가 사람을 믿지 않는 비법, 또는 사람을 이용하는 술책 등을 가르치는 것이 이 세상을 위해서도, 당사자를 위해서도 좋을 것이다. 빨간 셔츠가 호호호호 하고 은 것은 나의 단순함 때문일 것이다. 단숨함이나 진솔함이 비웃음을 사는 세상이라면 어쩔 도리가 없다. 기요는 이럴 때 절대 웃는 법이 없다. 무척 감동하며 들어준다. 기요가 빨간 셔츠보다 훨씬 훌륭하다.

"물론 나쁜 짓을 하지 않으면 좋겠지. 하지만 자기는 나쁜 짓을 하지 않더라도 남의 나쁜 짓을 모르면 역시 봉변을 당하겠지. 세상은 호락호락한 것처럼 보여도, 솔직 담백한 것처럼 보여도, 그리고 친절하게 하숙집을 소개해준다고 해도 절대 방심할 수 없는 사람이 있으니까....." (p.76)

 

집으로 돌아와서 그 자가 한 말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일단 그럴듯한 것 같기도 하다. 분명한 것은 말하지 않아 짐작할 수는 없지만, 잘은 모르나 산미치광이가 좋지 않은 놈이니 조심하라는 말인 것 같다. 그렇다면 그렇다고 확실히 단언하면 될 것을, 사내답지도 못하다. 그리고 그렇게 나쁜 교사라면 얼른 면직을 시키면 될 일이다. 교감이라는 자가 문학사 주제에 퍠기도 없다. 험담을 할 때조차 공공연하게 이름을 말할 수 없는 정도의 사내니 겁쟁이일 게 뻔하다. 겁쟁이는 친절한 법이니 빨간 셔츠도 여자처럼 친절한 사람일 것이다. 친절한 건 친절한 거고 목소리는 목소리니까 목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친절한 것까지 헛되게 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그건 그렇고, 세상은 참 묘하다. 주는 것 없이 미운 놈이 친절하고, 마음에 맞는 친구가 나쁜 놈이라니 사람을 완전히 바보로 만들고 있다. 시골이라서 도쿄와는 모든 게 반대인 모양이다. 뒤숭숭한 곳이다. 조만간 불이 얼고 돌이 두부가 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산미치광이가 학생들을 선동한다니, 그런 장난을 칠 것 같지는 않은데, 학생들에게 가장 덕망 있는 교사라고 하니 마음만 먹으면 어지간한 일은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렇게 빙 둘러서 하지 말고 직접 내게 싸움을 걸면 수고를 덜 수 있을 텐데. 내가 방해가 된다면, 사실은 이러저러해서 방해가 되니 사직해 달라고 하면 될 것이고, 의논하면 어떻게든 되는 법이다. 그쪽 말이 그럴듯하면 내일이라도 당장 사직해주겠다. 밥벌이할 데가 여기만 있는 것도 아니고, 어디를 가든 길바닥에 쓰러져 죽지는 않을 것이다. 산미치광이도 어지간히 답답한 작자다.

이곳에 왔을 때 제일 먼저 빙수를 사준 사람이 산미치광이였다. 그렇게 겉과 속이 다른 놈에게 빙수를 얻어먹었다는 건 내 체면이 걸린 문제다. 딱 한 그릇만 얻어먹었으니까 1전 5리밖에 빚지지 않았다. 하지만 1전이 됐든 5리가 됐든 사기꾼에게 은혜를 입어서는 죽을 때까지 마음이 편치 못하다. 내일 학교에 가면 당장 1전 5리를 되돌려주자. 나는 기요에게 3엔을 빌렸다. 그 3엔은 5년이 지난 지금까지 갚지 않았다. 갚을 수 없었던 게 아니라 갚지 않은 것이다. 기요는 조만간 갚겠지 하며 내 주머니 사정을 헤아려보거나 하지 않는다. 나도 곧 갚아야지 하면서 마치 남처럼 의리를 내세우지는 않을 생각이다. 내가 그런 걱정을 하면 할수록 기요의 마음을 의심하는 일이 되어 기요의 아름다운 마음에 먹칠을 하는 것과 같아진다. 돈을 갚지 않는 것은 기요를  무시해서가 아니다. 기요를 나의 일부분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기요와 산미치광이는 애당초 비교가 되지 않지만, 비록 빙수든 감로차든 남에게 신세를 지고도 가만히 있는 것은, 상대를 어엿한 사람으로 보는 것이고 그 사람에 대한 후의에서 나오는 것이다. 내 몫을 내면 그뿐인 것을 마음속으로 고맙게 여기는 것은 돈으로 살 수 없는 보답이다. 아무런 지위가 없다 해도 나는 한 사람의 독립된 인간이다. 독립된 인간이 머리를 숙이는 것은 백만 냥보다 소중한 감사라고 생각해야 한다.

이래 봬도 나는 산미치광이에게 1전 5리를 쓰게 하여 백만 냥보다 귀중한 답레를 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산미치광이는 고맙게 여겨야한다. 그런데 뒤에서 비열한 짓을 하다니 괘씸한 녀석이다. 내일 가서 1전 5리를 갚아버리면 줄 것도 받을 것도 없게 된다. 그렇게 한 다음에 싸워보자. (p.78-80)

 

나는 교장의 말을 듣고 역시 교장이니 너구리니 하는 사람은 근사한 말을 하는구나, 하고 감탄했다. 그런데 이렇게 교장이 모든 일에 대한 책임을 받아들여 자신의 허물이라느니 부덕이라고 할 정도라면 학생에 대한 처분은 그만두고 우선 자신부터 사직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렇게 하면 이런 귀찮은 회의 같은 것도 열 필요가 없어진다. 무엇보다 상식적으로 봐도 알 수 있다. 내가 얌전히 숙직을 서는데 학생들이 난동을 부렸다면 나쁜 건 교장도 나도 아니고 학생들이다. 만약 산미치광이가 산동을 했다면 학생들과 산미치광이를 내쫓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남의 허물을 자신이 떠맡고 내 허물이다, 내 허룰이다, 하고 떠들어대는 자가 어디 있단 말인가. 너구리가 아니면 할 수 없는 대담한 일이다. 너구리는 이처럼 조리에 맞지 않는 말을 늘어놓고 득의양양하게 모두를 둘러보았다. 그런데 입을 여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박물 선생은 제1 교사 지붕에 앉은 까마귀를 바로보고 있다. 한문 선생은 인쇄물을 접었다 폈다 하고 있다. 산미치광이는 아직도 내 얼굴을 노려보고 있다. 회의라는 게 이렇게 바보 같은 것이라면 빠지고 낮잠이나 자는 게 낫겠다. (p.88)

 

역시 너구리도 너구리지만, 빨간 셔츠도 빨간 셔츠다. 학생들이 난동을 부린 것은 학생 잘못이 아니라 교사 잘못이라고 공언하고 있따. 미친놈이 남의 머리를 후려갈기는 것은 맞은 놈이 맞을 짓을 했기 때문이란다. 성은이 망극할 따름이다. 활기가 넘쳐 주체하지 못하겠으면 운동장에 나가 스모라도 할 일이지, 무의식적으로 이불 속에 메뚜기를 넣었다니 말이 되는가. 그런 식이면 자고 있는 내 목을 베도 무의식적으로 한 일이라며 방면할 생각인가. (p.89)

 

"저는 교감 선생님 및 그 밖의 다른 선생님들의 의견에 절대 동의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건은 어떤 점에서 보나 50명의 기숙사생이 새로 온 교사 모씨를 우습게 보고 골탕을 먹이려 한 짓이라고밖에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교감 선생님께서는 그 원인을 교사의 인물 됨됨이에서 찾으시는 것 같은데, 죄송하지만 그건 실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모씨가 숙직을 하게 된 것은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의 일로, 학생들과 접촉한 지 채 20일도 되지 않은 때였습니다. 그 짧은 20일 동안 학생들이 선생의 학문이나 인물 됨됨이를 평가할 수는 없습니다. 우습게보일 타당한 이유가 있어 우습게보였다면, 학생들의 행위를 참작해줄 수도 있겠지만 아무런 이유도 없는데 새로 오신 선생님을 우롱하는 경박한 학생을 관대하게 처분해서는 학교 위신과도 결부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교육의 정신은 단지 학문을 가르치는 것만이 아니라 고상하고 정직하며 무사적인 기운을 고취시킴과 동시에 야비하고 경솔하며 거칠고 오만한 악습을 소탕하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반발이 무섭다거나 소동이 확대되는 것을 우려하여 임시변통하는 날엔 이런 악습은 언제 교정될 수 있을지 알 수 없습니다. 이런 폐습을 근절시키기 위해 저희가 이 학교에 봉직하고 있기 때문에 이를 묵인할 거라면 처음부터 교사가 되지 말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상과 같은 이유로 시숙사생 일동을 엄벌에 처하고, 해당 교사의 면전에서 공개적으로 용서를 구하게 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p.91-92)

 

잠자코 듣고 있자니 자기 멋대로 열변을 토하고 있다. 바다에 나가 거름을 낚고, 고루키를 러시아 문학자로 만들고, 단골 게이샤를 소나무 아래에 세워두고, 오래된 개구리가 뛰어든다는 것이 정신적 오락이라면 덴푸라메밀국수를 먹고 경단을 먹는 것도 정신적 오락이다. 그런 쓸데없는 오락을 가르치는 것보다 빨간 셔츠나 빨 일이지.

나는 너무 화가 치밀어 이렇게 따져 물었다.

"마돈나를 만나는 것도 정신적인 오락입니까?"  (p.94-95)

(주석)  "오래된 연못이여, 개구리 뛰어드는 물소리" - 마쓰오 바쇼의 하이쿠

(같이 읽으면 좋은 책)

일본 하이쿠 선집 (오석륜 옮김, 책세상)

오랜 연못에

개구리 뛰어드는

물소리 '텀벙'

古池や
蛙飛び込む
水のおと

아주 조용한, 인기척도 없는 오래된 연못가. 이미 봄도 깊어진 무렵의 어느 날. 개구리 한 마리가 물속에 뛰어 들었다. 주위가 너무나도 조용하고 평온했던 만큼 한순간 정적이 깨졌지만 또한 정적의 상태로 되돌아간 것이다. 고요함이 시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개구리와 관련하여 일본의 전통적인 시 형식인 와카나 렌가에 자주 등장하는 것은 울음소리다. 그에 반해 이 구는 물에 뛰어드는 개구리의 소리를 다루었다는 점에서 참신함ㅁ이 돋보인다. 전통적인 서정을 버리고 개구리가 "텀벙" 물에 뛰어든 극히 비근한 장면을 소재로 다룬 이는 바쇼가 최초가 아닐까 싶다. 이 비근한 친밀감은 바로 하이카이 근본의 골계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이 골계에 대해서 "오랜 연못에"라는 다섯 글자를 배치했을 때, 골계는 침잠하고 내면화되어 한적고담의 풍취가 지배하게 된다. "오랜 연못"과 "텀벙"소리는 서로가 미묘한 균형을 취하며 시정을 깊게 한다. 이 작품은 일본의 하이쿠를 얘기할 때마다 소개될 만큼 유명하다. - 계절어: 개구리(봄) (p.21)

하이쿠와 우키요에, 그리고 에도 시절 (김향 옮김, 다빈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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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부터 나는 하기노 집에서 하숙을 하게 되었다. 놀란 것은 내가 이카긴네 하숙방을 비우자 바로 다음 날 나와 교대하듯 알랑쇠가 태연한 얼굴로 내가 쓰던 방을 차지한 사실이다. 만만치 않은 나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세상은 온통 사기꾼들뿐으로 서로 속고 속이며 사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싫어졌다.

세상이 이런 곳이라면 나도 지지 않고 남들처럼 속이지 않으면 살아나갈 수 없다는 얘기가 된다. 소매치기한 돈까지 가로채야 세 끼 밥을 먹고 살 수 있다면, 이렇게 살아 있는 것도 생각해볼 문제다. 그렇다고 팔팔하게 건강한 몸으로 목을 맨다면 조상님 볼 면목이 없는데다 소문이라도 나면 난처하다. 생각해보니 물리학교 같은 데를 들어가 수학 같은 쓸모없는 재주를 배우기보다 그 6백 엔을 밑천으로 우유보급소라도 시작했으면 좋았을 걸 그랬다. 그랬다면 기요도 내 곁을 떠나지 않아도 되었을 거고, 나도 먼 데서 할멈 걱정을 하지 않고 살 수 있었을 것이다. 함께 있을 때는 그렇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시골로 와서 보니 기요는 역시 좋은 사람이다. 그렇게 마음씨 좋은 여자는 일본 전역을 돌아다녀도 좀처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할멈은 내가 떠날 때 약간 감기에 걸려 있었는데 지금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지난번에 보낸 편지를 봤다면 아마 기뻐했을 것이다. 그건 그렇고 이제 답장이 올 때도 되었는데....나는 이런 생각만 하며 2, 3일을 보냈다. (p.98)

(같이 읽으면 좋은 책)

아라비안 나이트 1권 - 리처드 버턴 (고정일 옮김, 동서문화사)

인간세상은 하나의 커다란 악에 지나 않아. (p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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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알랑쇠처럼 나서지 말아야 할 자리에 꼬박꼬박 얼굴을 내미는 건방진 자도 있고, 산미치광이처럼 자기가 없으면 일본이 곤란할 거라는 듯한 상판을 어깨 위에 올려놓고 있는 자도 있따. 그런가 하면 빨간 셔츠처럼 포마드와 호색한의 도매상을 자처하는 자도 있고, 교육이 살아 있는 사람처럼 트록코트를 입으면 바로 자신이 된다고 말하는 듯한 너구리도 있다. 다들 그 나름대로 뽐내고 있지만 끝물호박처럼 있는 듯 없는 듯 마치 볼모로 잡혀온 인형처럼 얌전히 있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 얼굴은 부어 있지만 이렇게 괜찮은 남자를 버리고 빨간 셔츠에게 끌리다니 마돈나도 어지간히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다. 빨간 셔츠가 수십 명이 다가온다고 해도 이렇게 근사한 신랑감이 되즌 못할 텐데. (p.107)

 

먹고 싶은 경단을 먹을 수 없다니 한심하다. 하지만 자신의 약혼녀가 다른 놈에게 마음을 빼앗긴다면 더욱 한심할 것이다. 끝물호박의 처지를 생각하면 경단은 고사하고 사흘쯤 굶는다고 해도 불평할 수 없을 것이다. 정말이지 인간만큼 믿을 수 없는 존재도 없을 것이다. 그 얼굴을 보면 아무래도 그런 몰인정한 일을 할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데...아름다운 사람이 몰인정하고, 물에 퉁퉁 불은 동아같은 고가 선생님이 선량한 군자인 것을 볼 때 방심할 수 없다. 솔직 담백한 줄 알았던 산미치광이가 학생들을 선동했다고 하고, 학생들을 선동한 줄 알았던 산미치광이가 교장에게 학생의 처분을 강력하게 주장하질 않나, 싫은 짓만 하는 빨간 셔츠가 의외로 친절하여 슬며시 내게 충고를 해주는가 싶더니 마돈나를 속였다고 하고, 속였다고 생각했는데 고가 선생님과 파혼하지 않는 한 결혼은 바라지 않는다고 하고, 또 이카긴은 괜한 트집을 잡아 나를 쫓아내나 싶었는데 곧바로 알랑쇠가 그 방으로 들어가질 않나, 아무리 생각해도 믿을 수가 없다. 이런 일을 기요에게 적어 보내면 정말 놀랄 것이다. 하코네 너머라서 요괴들이 모여든 것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p.110-111)

 

신뢰하지 않는 빨간 셔츠와는 말을 하고, 감탄한 산미치광이와는 말을 하지 않는다. 참으로 묘한 세상이다. (p.115)

 

비겁해도 월급을 올려준다면 얌전히 받아두는 게 득일 텐데유우. 젊을 때는 자주 욱하는데, 나이를 먹고 나서 생각해보면 그때 조금만 더 참았더라면 좋았을걸, 화를 내는 바람에 손해를 봤다고 후회하게 되는 거거든유우. 이 할멈이 하는 말을 잘 새겨듣고 빨간 셔츠가 월급을 올려준다고 하면 고맙습니다, 하고 받아두셔유우. (p.120-121)

 

나는 머리가 그렇게 좋지 않은 사람이라 평소라면 상대가 이렇게 교묘한 말을 늘어놓으면 '아, 그런가, 그럼 내가 잘못했구나'하고 송구스러워하며 물러났겠지만, 오늘 밤에는 그럴 수 없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부터 빨간 셔츠는 어쩐지 주는 것 없이 미웠다. 한때는 친절하고 여자 같은 남자라고 고쳐 생각했지만, 그게 친절도 뭐도 아닌 것 같아 오히려 더욱 싫어졌따. 그러므로 그가 아무리 논리적으로 끈질기게 설득한다 해도, 당당한 교감의 방식으로 나를 꼼짝 못하게 하려해도 개의치 않을 것이다. 언변이 좋은 사람이 꼭 좋은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다. 끽소리 못하는 사람이 꼭 악인이라고 할 수도 없다. 표면적으로는 빨간 셔츠의 말이 아주 타당하지만, 겉이 아무리 훌륭하다고 해도 마음속까지 끌리게 할 수는 없다. 돈이나 권력이나 논리로 사람의 마음을 살 수 있다면 고리대금업자나 순사나 대학교수가 사람들에게 가장 호감을 사야 한다. 중학교 교감 정도의 논법에 어떻게 내 마음이 움직인단 말인가. 사람은 좋고 싫은 감정으로 움직이는 법이다. 논리로 움직이는 게 아닌 것이다. (p.125)

 

끝물호박을 위한 송별회를 열어준 것은, 그의 전근을 아쉬워해서가 아니다. 다들 술을 먹고 놀기 위해서다. 끝물호박 혼자 따분해하고 괴로워하게 하기 위해서다. 이런 송별회라면 열지 않는 게 훨씬 낫다. (p.139)

 

나는 숙직 사건으로 학생들에게 용서를 빌게 하여, 뭐 이 정도면 됐겠지,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실제로는 큰 착각이었다. 하숙집 할머니 말을 빌리자면, 정말 착각 대장이다. 학생들이 용서를 빈 것은 진심으로 위우쳐서가 아니었다. 단지 교장의 명령을 받고 형식적으로 머리를 숙였을 뿐이다. 머리만 조아리고 교활한 짓을 계속하는 장사꾼과 마찬가지로 학생들은 대부분 이런 학생들과 같은 자들로 이루어져 있는지도 모른다. 사과를 하거나 용서를 빌 때 진지하게 받아들여 용서하는 사람은 지나치게 정직한 바보라고 할 것이다. 용서를 비는 것도 가짜로 하기 때문에 용서하는 것도 가짜로 용서하는 거라고 생각해도 된다. 만약 정말 용서받기를 원한다면, 진심으로 후회할 때까지 두들겨 패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내가 각 반 사이에 들어가니 덴푸라라든가 경단이라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린다. 게다가 수가 많아서 누가 하는 소리인지 알 수가 없다. 설사 안다고 해도 '선생님을 덴푸라라고 한 게 아니다, 경단이라고 한것도 아니다, 그건 선생님이 신경쇠약이라 곡해해서 그렇게 들리는 것'이라고 말할 게 뻔하다. 이런 비열한 근성은 봉건 시대부터 양성된 이 고장의 습관이어서 아무리 타이르고 가르쳐주어도 도저히 고쳐지지 않는다. 이런 고장에 1년만 있으면 아무리 결백한 나라도 그런 짓을 하게 될지 모른다.상대가 교묘하게 발뺌하여 내 체면을 더럽히는 걸 보고만 있을 얼간이는 없다. 상대가 사람이라면 나도 사람이다. 학생이라고 해도, 아이들이라고 해도 덩치는 나보다 크다. 그러니 어떻게든 형벌로 보복하지 않으면 체면이 서지 않는다. 그런데 내가 보복을 할 때 평범한 수단으로 하면 상대가 반격해올 것이다. 네놈들이 나쁘기 때문이라고 하면, 미리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놓았기 때문에 거침없이 변명을 늘어놓을 것이다. 변명을 늘어놓고는 자신들을 겉으로만 그럴듯하게 만들어놓고 나서 내 허점을 공격해올 것이다. 처음부터 보복에서 시작된 일이니 상대의 잘못이 드러나지 않는 이상 내 변호는 먹혀들지 않을 것이다. 요컨대 상대가 먼저 손을 썼는데도 세상 사람들은 내가 먼저 싸움을 건 줄 알게 되는 것이다. 엄청난 불이익이다. 그렇다고 상대가 뭘 하건 바보처럼 가만히 있으면 상대는 점점 더 못된 짓을 할 뿐이니, 거창하게 말하면 세상에도 유익하지 않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나도 상대의 수법을 이용하여 말려들지 않고도 상대가 손쓸 방도가 없는 보복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되면 도쿄 토박이도 엉망이 된다. 엉망이 되겠지만, 1년씩이나 이렇게 당해온 이상 나도 사람인지라 어떻게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일이 매듭지어지지 않는다. 무슨 일이 있어도 빨리 도쿄로 돌아가 기요와 함께 사는 게 최고다. 이런 시골에 있는 것은 타락하러 온 것이나 다름없다. 신문 배달을 한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타락하는 것보다는 낫다. (p.144-145)

 

신문이란 당치 않은 거짓말을 하는 물건이다. 세상에 신문처럼 허풍을 떠는 것도 없을 것이다. (p.158)

 

나는 걱정 따위 하지 않는다. 학교에서 면직을 시킨다면 그 전에 내가 먼저 사표를 내면 그만이다. 하지만 나에게 잘못이 없는데 내가 먼저 물러난다면 허풍쟁이 신문사를 더욱더 우쭐하게 할 것이니 신문사로 하여금 기사를 정정하게 만들고 오기로라도 계속 근무하는 것이 온당하다고 생각했다. (p.160)

 

"자네가 사표를 낸다고 해도 빨간 셔츠는 곤란할 게 없네."

"그도 그렇군. 어떻게 하면 빨간 셔츠를 곤란하게 할 수 있을까?"

"그런 간사한 놈은 어떻게든 증거를 남기지 않으려고 머리를 쓰니 까 반박하기가 어려워."

"골치 아프게 생겼는걸. 그렇다면 누명을 쓰게 된다는 말이지. 정말 우습지도 않군. 천도시야비야(天道是也非也)인가."

"뭐, 2,3 일은 더 상황을 지켜보세. 그래도 안 되면 그때는 온천 거리에서 덮치는 수밖에 없지."

"싸움으로 벌어진 일은 싸움으로 해결하자는 건가?"

"그렇지. 우리도 우리대로 그쪽의 급소를 노리는 거지."

"그거 좋겠군. 나는 책략에 서투르니까 자네한테 다 맡기겠네. 만일의 경우에는 뭐든 다 할 테니까."

나와 산미치광이는 이렇게 하고 헤어졌다. 산미치광이의 추측대로 정말 빨간 셔츠가 꾸민 일이라면 아주 지독한 놈이다. 도저히 지략으로 당해낼 수 있는 놈이 아니다. 아무래도 완력을 쓸 수밖에 없다. 역시 세상에 전쟁은 끊이지 않는다. 개인 간에도 결국에는 완력이다. 

이튿날 신문이 오기를 기다렸다 펴보니 정정은 고사하고 취소 기사도 보이지 않는다. 학교에 가서 너구리에게 재촉하니 내일쯤에는 나올 것이란다. 다음 날이 되자 가장 작은 6호 활자로 조그맣게 취소 기사가 실렸다. 하지만 물론 신문사 측은 정정 기사를 싣지 않았다. 다시 교장에게 따지자 그 이상의 조치는 취할 수 없다고 했다. 교장은 너구리 같은 얼굴로 어울리지도 않는 프록코트를 입고 있지만 의외로 힘이 없다. 허위 기사를 실은 시골 신문사 하나 사과하도록 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몹시 부아가 치밀었다.

"그렇다면 저 혼자 가서 주필한테 따지겠습니다."

"그건 안 됩니다. 선생님이 가서 따지면 또 험담만 실릴 뿐입니다. 다시 말해서 신문에 실린 기사가 거짓말이든 진짜든 결국 어쩔 도리가 없다는 거지요. 포기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어요."

교장은 중이 설법하듯 나에게 타일렀다. 신문이 그런 거라면 하루 속히 없애버리는 것이 우리에게 이로울 것이다. 신문에 실리는 것과 자라에게 물리는 것이 비슷한 일이라는 걸 오늘 이 자리에서 너구리의 설명을 듣고 알게 된 꼴이다. (p.161-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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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천도시야비야(天道是也非也) - 하늘의 도는 과연 옳은 것이냐 틀린 것이냐 (사기-백이숙제열전)

 

한권으로 보는 사기 - 사마천 (김진연, 김창 편역, 서해문집 1997)

 

수양산에서 고사리를 캔다.

무왕은 폭력으로 폭력을 이겨냈지만

그 그릇됨을 알지 못하고,

신농씨와 순임금, 우임금은 어느새 사라졌으니,

내 어디로 돌아갈거나!

아! 돌아가리, 목숨도 이미 지쳤으니.

 

결국 백이, 숙제는 수양산에서 굶어죽었다. 그런데 이 노래를 살펴보면 과연 백이, 숙제가 남을 원망하는 뜻이 전혀 없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누군가 이렇게 말했다.

'하늘의 뜻이란 사사로움이 없으며 언제나 착한 이의 편이다(天道無親, 常與善人).'

그렇다고 한다면 백이, 숙제는 과연 착한 사람이었는가? 어진 덕을 쌓고 품행을 바르게 했음에도 마침내 굶어죽은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옳고 그름이란 무엇인가?

또한 공자의 70제자 중에 공자는 오직 안회를 가리켜 학문을 즐기는 사람이라고 칭찬했는데, 정작 안회는 끼니조차 제대로 이어갈 수 없었으며 지게미와 쌀겨로도 배를 채우지 못하고 마침내 일찍 세상을 떠났다. 하늘이 착한 사람에게 지불하는 대기가 이런 것이란 말인가! 도척은 날마다 무고한 사람을 죽이고 사람의 간으로 회를 쳐서 먹었으며 포악한 수천 명의 무리를 이끌고 천하를 어지럽혔지만 끝내 아무런 천벌도 없이 제 목숨을 온전히 누리고 살았다.

이러한 것은 도대체 무슨 이유인가? 평생 동안 하는 짓이 못되고 남에게 해꼬지만 하면서도 죽을 때까지 호의호식하고 죽은 이후에도 그 부귀가 자손까지 이어지는 경우가 더욱 많다.

반면에 걸음 한 번 내딛는 데도 땅을 가려서 밟고 말 한 마디를 하는 데도 때를 가려서 하며 길을 가는 데도 지름길을 찾지 않고 공정한 일이 아니면 하지 않는 사람들이 오히려 재앙을 만나는 일이 부지기수이다.

과연 하늘의 도리라는 것이 옳은 것인가, 잘못된 것인가(天道是也非也)!

공자는 말했다.

"실천하는 길이 같지 아니하면 서로 일을 도모하는 것도 같이 하지를 않는다(子曰 道不同 不相爲謀-도가 같지 않으면 함께 일을 꾀하지 않는다)."

이는 자신의 의사에 따라 살아갈 것을 말하고 있는 것ㄷ이다. 그리하여 다시 공자는, "만약 부귀가 뜻하는 바와 같이 이뤄질 수 없다면 내 뜻대로 살 것이다(子曰, 富而可求也, 雖執鞭之士, 吾亦爲之. 如不可求, 從吾所好-부귀란 놈이 구한다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내 비록 남의 말채찍을 잡는 천한 일이라도 기꺼이 하겠다. 하지만 만약 구해도 얻을 수 없는 것이라면 차라리 내가 좋아하는 바에 따르겠다).", "추운 겨울이 되어서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푸르른 것을 알 수 있다(歲寒然後知松栢後彫-날이 추워진 뒤에야 비로소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든다는 것을 안다).", "온 세상이 혼탁해질 때 비로소 청렴한 인물이 드러나게 된다. 세속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무엇보다도 부귀를 위해 살고 있는데 청렴한 인물은 부귀를 가볍게 보기 때문이다(擧世混濁, 淸士乃見. 豈以其重若彼, 其輕若此哉? “君子疾沒世, 而名不稱焉.-세상이 다 흐려졌을 때 비로소 깨끗하고 맑은 사람이 드러난다. 어째서 세상은 부귀한 사람을 그토록 중시하고, 깨끗하고 맑은 사람을 하찮게 여길까?)."

또한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군자는 죽은 후에 이름을 더럽히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또 한나라의 시인 가의는 이렇게 말했따. "탐욕스러운 사람은 재물을 얻기 위해 죽고 의로운 선비는 이름을 위해 죽는다. 그리고 권세를 좋아하는 사람은 권세를 위해 죽으며 보툥 사람들은 그저 하루하루 살아가는 데만 급급하다."

주역에 이른 귀절이 있따. "같은 빛끼리는 서로 비쳐주고, 같은 종류끼리는 서로 찾는다." "구름은 용을 따라 일어나고, 바람은 호랑이를 따라 일어난다. 그리하여 성인이 나타나면 만물이 우러러본다."

참으로 성인이 이 세상에 나타나고서야 비로소 만물도 빛을 얻게 되는 것이다. 백이, 숙제는 분명 현인이었지만 공자의 붓을 통해서 비로소 그 이름이 드러나게 되었고 안회는 학문에 충실했지만 공자의 기미에 붙어서 그 품행이 더욱 돋보이게 되었던 것이다. 함께 동굴에 숨어 사는 선비라도 그 때에 따라서 이로움과 해로움이 있는 것이다.

하물며 촌구석에 살면서 품행을 닦고 이름을 세우고자 하는 사람은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덕 있는 유력자를 만나지 못한다면 어떻게 이름을 후세에 전할 수 있겠는가. (p.80-82)

(추천 사기)

김원중 - 민음사

김영수 - 알마

신동준 - 위즈덤하우스

신동준 - 올재클래식

사기열전 - 김원중 (민음사)

사기열전(상)- 이인호 (천지인) (하권은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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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성급한 성미라 열중하게 되면 밤을 새워서라도 일을 하지만, 그 대신에 무슨 일이든 진득하게 해본 적이 없다. 아무리 하늘을 대신해 불의를 응징하는 일이라도 싫증이 나는 것은 다르지 않았다. (p.166-167)

 

하늘을 대신해서 불의를 응징하는 일도 무척 힘든 일이군그래. 하늘의 그물이 엉성하여 불의가 빠져나가기라도 한다면 어이없겠는걸? (p.168-169)

(주석) 노자 - 도덕경

하늘의 그물이 엉성한 것 같지만 불의는 결코 빠져나갈 수 없다(天網恢恢 疎而不失)

처음부터 새로 읽는 노자의 도덕경 - 문성재 (책미래)

제73장 

勇於敢則殺 勇於不敢則活 此兩者 或利或害 天之所惡 孰知其故 是以聖人猶難之 天之道 不爭而善勝 不言而善應 不召而自來 繟然而善謀 天網恢恢 疏而不失

勇於敢則殺 勇於不敢則活 此兩者 或利或害 天之所惡 孰知其故 是以聖人猶難之

天之道 不爭而善勝 不言而善應 不召而自來 繟然而善謀 天網恢恢 疏而不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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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작품해설]

도련님은 외롭다. 정직하기 때문에, 솔직하기 때문에, 관대하기 때문에, 순응하기 때문에 외롭다. 지금의 세상은 정직하면 손해 보는 곳이고,, 솔직하면 비난받는 곳이고, 관대하면 무시당하는 곳이고, 순응하면 빼앗기는 곳이다. 도련님은 세상에서 손해 보고, 비난받고, 무시당하고, 빼앗기면서도 관대하다. 이는 전혀 인간을 신뢰하지 않는 것의 다른 마음이다. 인간을 윤리나 도덕, 예의 안에서 믿지 않기 때문이다. 허나 이는 슬픈 일이면서도 망가진 세상에서 꼭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p.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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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 1867년 1월 11일 ~ 1916년 1월 9일)

1867년 1월 11일(음력 1월 5일)에 에도의 우시고메 바바시모요코초(오늘날 신주쿠구 기쿠이 정)에서 나쓰메 고효에 나오카쓰(夏目小兵衛直克)의 막내로 태어났다. 자식 많은 집에서 늦둥이로 태어났으므로, 어머니가 부끄럽게 여겼다. 긴노스케라는 이름은 태어난 날이 경신일(庚申日, 이날 태어난 아이는 큰 도둑이 된다는 미신이 있었다)이었으므로, 액을 막는 의미에서 긴(金)이라는 글자가 이름에 들어갔다. 세 살 때쯤 걸린 천연두 흔적은 이후에도 남았다.
당시 에도 막부가 붕괴한 이후 혼란기였고, 생가는 몰락하고 있었으므로 태어난 직후에 요쓰야(四谷)의 낡은 도구점(일설에는 야채가게)에 양자로 갔지만, 늦은 밤까지 물건 옆에서 나란히 자는 것을 지켜본 누나가 불만을 품고 곧 본가로 데리고 왔다. 이후 1세 때 부친의 친구였던 시오바라 쇼노스케(塩原昌之助)의 양자로 갔지만, 양부였던 쇼노스케의 여성 문제가 들통나는 등 가정불화가 불거지면서 7세 때 양모가 잠깐 생가로 데려왔다. 이후 양부모 이혼과 함께 9세 때 생가로 되돌아오지만, 친부와 양부 대립으로 말미암아 나쓰메가로 복적한 게 21세 때 일이다. 이러한 양부모와 관계는 이후 소설 《한눈팔기》의 소재가 되었다.
어수선한 집안 분위기 속에서 이치가야 학교(市ヶ谷学校)를 거쳐 니시키하나 소학교(錦華小学校)로 전학했다. 12세 때인 1879년에 도쿄부 제1중학 정칙과(正則科, 훗날 부립 1중, 오늘날 도쿄도립 히비야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대학 예비문 수험에 필수였던 영어 수업이 없던 것과 함께 한학과 문학에 뜻을 두었으므로 2년 뒤 중퇴했다. 1883년에 대학 예비문 수험을 위해 영어를 가르치던 영학숙 세이리쓰 학사(成立学舎)에 입학해 두각을 드러냈다.
1884년에 무사히 대학 예비문 예과에 입학했다. 당시 하숙 동료로 훗날 남만주 철도 총재가 되는 나카무라 요시코토가 있다. 1886년에 대학 예비문이 제1고등중학교로 개칭하고, 이후 맹장염 등으로 인해 예과 2급의 진급시험을 통과하지 못하고 요시코토와 함께 낙제하였다. 이후 사립학교 교사를 지냈으며, 영어실력이 우수했다.
1889년에 동창생으로 소세키에게 문학적·인간적으로 많은 영향을 준 마사오카 시키와 처음으로 만났다. 시키가 손수 쓴 한시나 하이쿠 등을 묶은 문집 《나나쿠사슈》(七草集)가 돌고 있을 때 소세키가 그 비평을 권말에 한문으로 쓴 게 우정의 시작이었으며, 이때 처음으로 ‘소세키’라는 호를 사용했다. 소세키라는 이름은 《진서》(晉書)의 고사 ‘수석침류’(漱石枕流, 돌로 양치질하고 흐르는 물을 베개로 삼겠다)에서 유래한 것으로, 억지가 강하거나 괴짜라는 것의 대표적인 예이다. 소세키는 원래 시키의 수많은 필명 가운데 하나였으나, 이후에 소세키는 시키로부터 이를 물려받았다.
1890년에 창설된 지 얼마 안된 제국대학(이후 도쿄 제국대학) 영문과에 입학하며, 이즈음에 염세주의와 신경쇠약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1887년에는 큰 형 다이스케(大助)를 잃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는 둘째 형 에이노스케(榮之助)를 잃는다. 1891년에는 셋째 형 와사부로(和三郎)의 아내 도세(登世)가 스물다섯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1892년에는 병역을 피하기 위해 분가하였으며, 홋카이도로 적을 옮겼다. 같은 해 5월에는 도쿄 전문학교(지금의 와세다 대학)의 강사를 시작한다. 이후 시키가 대학을 중퇴하지만, 소세키는 마쓰야마의 시키의 집에서 뒤에 소세키를 직업작가의 길로 이끄는 다카하마 교시와 만나게 되었다.
1893년에 도쿄 제국대학을 졸업하고, 도쿄 고등사범학교 영어교사가 되었으나 일본인이 영문학을 가르치는 것에 위화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잇단 가족 죽음과 함께 폐결핵, 극도의 신경쇠약 등이 나타난 게 이때다. 1895년에 도쿄에서 도망치듯 고등사범학교에서 사직하고, 스가 도라오(菅虎雄)의 주선으로 에히메현 심상 중학교로 부임한다. 마쓰야마시는 시키의 고향으로, 이 즈음에 시키와 함께 하이쿠나 작품을 남기고 있다.
1896년에는 구마모토현 제5고등학교(구마모토 대학의 전신)의 영어교사로 부임하고, 친족들의 권유로 귀족원 서기관장이던 나카네 시게카즈의 장녀 교코와 결혼하지만, 좋은 관계는 맺지 못하는 등 원만한 부부는 아니었다.
1900년 5월에 문부성에 의해 영문학 연구를 위해 영국 유학을 떠나게 된다. 메리디스나 디킨스 등을 주로 읽었다. 《긴 봄날의 소품》(永日小品)에서도 등장하는 셰익스피어 연구가 윌리엄 크레이그의 지도를 받거나, 《문학론》(文学論) 연구 등을 하지만 영문학 연구와의 위화감은 지속되어 신경쇠약은 심해졌다. 또한 동양인이라는 이유에서 인종차별을 받는 등의 초조함도 쌓여 몇 번이나 거처를 옮겼다.
1901년에 물리화학 연구를 위해 2년간 독일로 유학해 있던 화학자 이케다 기쿠나에가 베를린에서 소세키를 찾아와 잠시 동거한 것으로 인해 깊은 자극을 받고, “기쿠나에에게 받은 자극을 계기로 소세키가 과학이라는 학문을 강하게 의식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시기에 혼자서 연구에 몰두하는 등으로 인해 주변의 일본인들에게서 “나쓰메가 미쳤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고, 이를 계기로 문부성에서 귀국 명령을 내린다. 1903년에 결국 일본으로 귀국하게 되었으며, 소세키가 마지막으로 살았던 집의 맞은 편에 1984년에 쓰네마쓰 이쿠오에 의해 런던 소세키 기념관이 설립되었다.
귀국 이후 도쿄 제국대학의 강사나 메이지 대학의 강사 등을 전전하던 소세키는, 신경쇠약을 완화하기 위해 데뷔작인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집필하고 시키 문하의 모임에서 발표하여 호평을 얻었다. 1905년 1월에 《호토토기스》에 1회만 게재할 계획이었지만, 호평으로 속편을 집필한다. 이때부터 작가의 길을 열망하기 시작했고, 이후 〈런던탑〉이나 《도련님》 등을 연달아 발표하면서 인기를 얻어간다. 소세키의 작품은 세속을 잊고 인생을 관조하는, 이른바 저회취미(低徊趣味, 소세키의 조어)적 요소가 강해 당시 주류였던 자연주의와 대립된 여유파로 불렸다.
1907년에 도쿄 아사히 신문의 주필이던 이케베 산잔의 초청으로 아사히 신문사에 입사해 본격적인 직업작가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같은 해에 직업작가로서의 첫 작품 《우미인초》의 연재를 시작하고, 집필 도중에 신경쇠약이나 위병 등으로 고생했다. 1909년에 친우였던 남만주 철도 총재 나카무라 요시코토의 초청으로 만주와 조선을 여행한다. 이 여행의 기록은 《아사히 신문》에 〈만한 이곳저곳〉(満韓ところどころ)이란 이름으로 연재되었다.
1910년 6월, 《산시로》와 《그 후》에 이은 전반기 3부작의 세 번째 작품 《문》을 집필하던 중에 위궤양으로 입원하게 된다. 같은 해 8월에는 이즈의 슈젠지로 요양을 떠난다. 그러나 거기에서 병이 악화되어 각혈을 일으키고, 위독한 상태가 된다. 이것이 바로 ‘슈젠지의 큰 병’(修善寺の大患)으로 불리는 사건이다. 이때 사경을 헤메던 것은 이후의 작품에 영향을 주게 되었다.
같은 해 10월에 용태가 안정되었고, 다시 입원하였으나 이후에도 위궤양 등으로 수차례 고통을 겪는다. 1912년 12월에는 병으로 《행인》의 집필도 중단한다. 이후의 작품은 인간의 이기적인 마음을 따라가면서, 후반기 3부작이라고 불리는 《피안이 지날 때까지》, 《행인》, 《마음》으로 연결되었다.
1915년 3월에 교토에서 놀던 중 다섯 번째의 위궤양으로 쓰러진다. 6월부터는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집필 당시의 환경을 돌아보는 내용인 《한눈팔기》의 연재를 시작하지만 1916년에는 당뇨병도 앓게 된다. 그해 1월 9일에 큰 내출혈을 일으키면서 《명암》 집필 중 향년 48세로 요절하였다.
소세키가 요절한 다음 날, 사체는 도쿄 제국대학 의학부 해부실에서 나가요 마타로에 의해 해부되었다. 이때 적출된 뇌하고 위는 기증되어, 뇌는 현재도 에탄올에 담긴 상태로 도쿄 대학 의학부에 보관되어 있다. 묘는 도쿄도 도시마구 미나미이케부쿠로의 조시가야 묘원(雑司ヶ谷霊園)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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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쓰메 소세키 전집 (현암사 14권)

도련님 - 나쓰메 소세키 (오유리 옮김, 문예 세계문학)

도련님 - 나쓰메 소세키 (권남희 옮김, 책만드는집)

도련님 - 나쓰메 소세키 (박현석 옮김, 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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