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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
II. 고전 문학 (동양)/1. 동양 - 고전 소설

사양 - 다자이 오사무 (오유리 옮김, 문예출판사)

by handaikhan 2023. 2. 2.

문예 세계문학 36

다자이 오사무 - 사양 (1947년)

 

석양이 어머니의 얼굴을 비춰, 어머니의 눈이 검푸르게 빛나고, 두 눈 속에 희미한 분노의 빛이 스쳐, 그 얼굴은 와락 달려들고 싶을 정도로 아름다워 보였다. 그리고......아아, 어머니의 얼굴은 조금 전 그 쓸쓸하고 슬퍼 보였던 뱀과 닮았다. 그리고 내 가슴속에 있는 살무사처럼 꿈틀거리는 흉측한 뱀이, 이 슬픔에 사무쳐 오히려 아름다운 어미 뱀을 언젠가 잡아먹어버리지는 않을까, 왠지, 무엇 때문인지, 그런 기분이 들었다.

나는 어머니의 가냘프고 우아한 어깨에 손을 얹고, 왠지 모를 몸부림을 했다. (p.153)

 

아아, 돈이 없어진다는 것은, 뭐라 표현해야 좋을지 모를, 두려운, 비참한, 살아날 구멍 없는 지옥 같다는 걸 태어나 처음으로 깨닫고는 가슴속에 뜨거움이 복받친다. 속이 꽉 메어와 울고 싶어도, 눈물도 나오지 않는다. 인생의 쓴맛이란 이런 느낌을 두고 한 말이 아닐까. 천장을 향한 채 빳빳이 굳어 나는 그대로 돌이 되어버렸다. (p.157)

 

아아, 무엇 하나 남김없이 모두 털어놓고 싶다. 이 산장의 평온은 전부 꾸며진 허식에 불과하다고, 나는 남몰래 생각할 때도 있다. 이것이 우리 모녀가 신에게 부여받은 순간적인 휴식 기간이었다 하더라도, 이미 이 평화에는 뭔가 불길한 그림자가 밀물처럼 밀려든 것 같아 불안해 견딜 수가 없다. 어머니는 행복을 가장하면서도 하루하루 쇠약해지고, 내 가슴속에는 살무사가 똬리를 틀고 앉아 어머니를 집어삼키면서 점점 더 살이 쪄서, 내가 짓누르고 또 눌러도 계속 커져만 간다. 아아, 이런 내 불ㄹ안을 그저 계절 탓으로 돌릴 수만 있다면 좋겠다. 내겐 이 무렵, 이런 생활을 견디기 어렵게 만드는 일이 있었다. 뱀의 알을 태우는, 그런 조심성 없는 일을 한 것도 그와 같은 나의 초조함이 드러난 것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러고는 그저 어머니의 슬픔을 더욱 깊게 하고, 육체를 사그라들게 만들 뿐이다.

'사랑'이라 썻더니, 그 뒤엔, 아무 말도 쓸 수 없게 됐다. (p.164)

 

다른 생물에게는 절대로 없고, 인간에게만 있는 것. 그건 말이에요, 비밀이란 거에요. 자기만의 비밀. (p.188)

 

뜨개질을 하는 동안, 나는 이 옅은 자주색 털실과 비를 머금은 잿빛 하늘색이 한데 어울려, 뭐라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포근하고 마일드한 배합을 만들어냈다는 걸 깨달았다. 난 몰랐다. 옷은 하늘색과 조화를 이루도록 해야 한다는 중요한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조화란 얼마나 아름답고 멋진 일인지, 새삼 놀라 잠시 멍했다. 비를 머금은 잿빛 하늘색과 옅은 자주색 털실, 이 두 가지를 조합하니 두 색이 동시에 생생하게 살아나 신기하기까지 하다. 손에 쥐고 있는 털실이 갑자기 아주 따뜻하고, 차가운 하늘색도 벨벳처럼 부드럽게 느껴진다. 그리고 그 색깔은 모네가 그린 안개 속 사원을 떠오르게 한다. 나는 이 털실 색깔 덕분에 비로소 '좋은 취향'이라는 게 뭔지 알게 된 것 같다. 좋은 취향.

그리고 어머니는 한겨울 눈을 머금은 하늘에 이 옅은 자주색이 얼마나 아름답게 조화될지 이미 아시고 일부러 손수 골라주셨는데, 나는 어리석게도 그걸 싫다 했고, 하지만 어린아이였던 내게 그것을 강요하지 않고 마음대로 하도록 맡겨주셨던 내 어머니, 내가 이 색의 아름다움을 진정 깨닫게 되기까지, 무려 20년 동안이나 이 색에 대해 한마디도 더 하지 않으시고 묵묵히 모르는 척, 기다려주신 어머니. 정말이지 너무나 좋은 어머니라는 생각이 듦과 동시에, 이런 좋은 어머니를 나와 나오지 둘이서 속 썩이고 곤경에 빠뜨려 사그라들게 만들고, 급기야 이젠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말려버리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참을 수 없는 공포와 걱정이 밀려들어, 이런 저런 상념등를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앞으로는 전부 두렵고 나쁜 일들만 일어날 것 같다. 생각이 거기까지 마치자, 이젠 도저히 숨쉴 수 없을 정도로 불안해져 손가락의 힘마저 다 빠져서, 뜨개바늘을 무릎에 올려놓고는 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쳐들고 눈을 감았다.

"어머니"                         (p.190-191)

 

저는 그저 제 생명이 이런 일상 생활 속에서, 파초의 잎이 지지않고 썩는 것처럼, 산 채로 저절로 썩어들어가는 걸 너무나도 뚜렷이 예감할 수 있다는 게 몸서리쳐집니다. 정말이지 견딜 수 없습니다. 그러니 전 '여대학'에 어긋나더라도, 지금과 같은 생활에서 벗어나고 싶습니다. (p.215)

 

6년 전 어느 날, 내 가슴에 희미한 무지개가 걸려, 그것은 사랑도 뭐도 아니었지만, 세월이 갈수록 그 무지개는 또렷하게 색채의 농도를 더해, 저는 지금까지 한 번도 그것을 마음속에서 지운 적이 없습니다. 소나기가 갠 하늘에 걸려 있는 무지개는 어느 틈엔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지만, 사람의 가슴속에 걸린 무지개는 사라지지 않는 모양입니다. 제발 그분께 물어봐주세요. 그분은 진정, 절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혹시라도 비 개인 하늘의 무지개처럼 그렇게 생각하셨던 걸까요. 그래서 이미 사라져 없어진 것으로, 그렇게?

그렇다면 저도 제 가슴속 무지개를 지워야겠지요. 하지만 제 생명을 먼저 꺼뜨리기 전엔 제 가슴속 무지개는 사라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p.216-217)

 

6년 동안의 나날이 그렇게 흘러가면서, 어느새 당신이란 존재가 물안개처럼 내 가슴속으로 스며든 겁니다. (P.222)

 

조금이라도 칭찬받았던 일은 평생 잊지 않아요. 머릿속에 꼭 담아두는 게 너무 즐거운 걸요. (P.226)

 

재밌는 말이네. 꼬리표가 붙었다면, 오히려 안전하고 좋지 않니? 방울을 목에 매단 아기 고양이같이 귀엽잖아. 꼬리표가 붙지 않은 불량이 진짜 무서운 법이지. (P.227)

 

너희들은 꼬리표가 붙지 않은 정말로 위험한 불량자들 아니냐고. (P.230)

 

기다림. 아아, 인간의 삶에는 기뻐하고, 화내다가, 슬퍼하고, 증오하는 여러 가지 감정이 뒤섞여 있지만, 그래도 그것은 인생의 1퍼센트 정도밖에 되지 않는 감정들이며, 나머지 99페센트는 그저 기다리며 사는 것 아닐까요. 행복의 발소리가 복도를 들려오길, 이제나 저제나 두 손 모아 기다리다가, 텅 빔. 아아, 인생이란, 너무 비참해. 누구나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았을 거라 생각하며 사는 이 현실. 그리고 매일 아침부터 밤까지 끊임없이 무언가를 기다린다. 너무나 비참해. 태어나길 잘했다고, 아아, 이 목숨을, 인간을, 이 세상을, 진정한 기쁨의 웃음을 웃게 해주세요. (P.231)

 

혼자 멀찍이 동떨어져, 불러봐도, 소리쳐봐도, 아무 메아리도 없는, 황혼의 가을 들녘에 초라하게 두 발로 서 있는 듯한, 지금까지 맛본 적 없는 처절한 고독에 휩싸인다. 이것이 그 '실연'이란 것일까. 들녘에 이렇게 홀로 허수아비처럼 서 있는 동안, 해가 완전히져서 마침내는 밤 이슬에 얼어 죽는 것 외에 다른 길은 없는 것일까 생각하면, 메마른 통곡으로 어깨와 가슴이 부서질 듯 요동치고 숨조차 쉴 수 없다. (P.233)

 

사람의 힘으로 어찌해도 안 되는 일이 이 세상엔 얼마든지 있다는, 절망의 벽이 있음을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깨달은 기분이 들었다. (P.238)

 

나는 문득, 어머니는 지금 행복한 게 아닐까, 생각했다. 행복이란 건 비애의 강물 속 깊이 가라앉아 희미하게 빛을 발하고 있는 사금 같은 것이 아닐까. 슬픔의 밑바닥을 뚫고 나와 어슴푸레 밝아오는 불가사의한 기분, 그것이 행복감이라는 거라면, 폐하도, 어머니도, 나도 분명 지금 행복한 것이다. (P.254)

 

"그럼, 이젠 세상을 알게 됐단 말이니?"

"세상은, 몰라."

"나는 몰라. 그걸 앋나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지 않겠니?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모두들 어린아이야. 아무것도 모른다구."

하지만 나는 살아 나가야 한다. 어린애일지 모르지만, 언제까지나 응석받이로 있을 수는 없다. 나는 이제부터 세상과 맞서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

죽어가는 사람은 아름답다. 산다는 것. 살아남는다는 것. 그건 너무나 추잡하고, 생피 냄새 나는, 더럽기 그지없는 일이란 생각도 든다. (P.255)

 

난, 그렇게 굴러다녔어도 전혀 즐겁지 않았어. 쾌락 불감일지도 몰라. 나는 그저, 귀족이란 나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어 발광하고, 시시덕거리고, 타락한 거야....

그저 그 집안에 태어났다는 사실만으로, 우리는 영원히, 예를 들어 유다 집안의 자식처럼, 민중에게 죄스러워하고, 끝없이 사죄하고, 부끄러워하며 살아가야만 해. (P.286)

 

친구들이 모두 빈둥거리며 놀고 있을 때, 나 혼자만 공부하는 건, 어째 거북스럽고 두려워서, 난 도저히 못 하겠으니, 조금도 놀고 싶은 마음은 없어도, 그 무리에 끼어 같이 놀지요.

뭐라구? 그것이 귀족 기질이라는 건가. 탐탁치 않네. 나는 말이야, 남들이 놀고 있는 걸 보면, 나도 놀지 않으면 손해본다 싶어서 더 왁자지껄하게 노는 사람이지.

이 사람의 방탕한 행동에는 고뇌가 없어. 오히려 어리석은 놀음을 자랑으로 알고 있었찌.

진짜 어리석은 방탕아.   (p.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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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해설]

사양은 2차 세계대전 직후 뭐져가는 귀족 가정과 시대 의식을 그리고 있다.

몰락한 귀족의 딸 가즈코와 생활을 유지하기 어려워 도쿄를 떠나지만 고귀한 성품을 잃지 않고 아름다움을 유지한 채 죽어간 어머니, 심약한 성격으로 전쟁에 나갔다 온 후 불량배 같은 생활을 하다가 자살을 선택하는 동생 나오지.

혼자 남은 가즈코는 슬픔 속에서도 '인간은 사랑과 혁명을 위해 살아간다'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동생의 문학 선생이었던 우에하라를 찾아가 관계를 맺는다. 그의 아이를 가진 가즈코는 퇴폐주의와 술 또한 그가 투쟁하는 방법이라는 걸 이해하고 아이와 함께 새로운 삶을 찾으려 한다. (p.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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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자이 오사무(太宰 治, 1909년 6월 19일 ~ 1948년 6월 13일)

일본의 소설가

1909년 6월 19일, 일본 아오모리 현 쓰가루 군 카나기무라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쓰시마 슈지[津島修治]이다. 그는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환경에서 성장했으나 가진 자로서의 죄책감을 느꼈고, 부모님의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해서 심리적으로 불안정하게 성장한다.
1930년, 프랑스 문학에 관심이 있었던 그는 도쿄제국대학 불문과에 입학하지만, 중퇴하고 소설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이후 소설가 이부세 마스지[井伏_二]의 문하생으로 들어간 그는 본명 대신 다자이 오사무[太宰治]라는 필명을 쓰기 시작한다. 그는 1935년 소설 「역행(逆行)」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작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 1935년 제1회 아쿠타가와 상 후보에 단편 「역행」이 올랐지만 차석에 그쳤고, 1936년에는 첫 단편집 『만년(晩年)』을 발표한다. 복막염 치료에 사용된 진통제 주사로 인해 약물 중독에 빠지는 등 어려운 시기를 겪지만, 소설 집필에 전념한다. 1939년에 스승 이부세 마스지의 중매로 이시하라 미치코와 결혼한 후 안정된 생활을 하면서 많은 작품을 썼다.
1947년에는 전쟁에서 패한 일본 사회의 혼란한 현실을 반영한 작품인 「사양(斜陽)」을 발표한다. 전후 「사양」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인기 작가가 된다. 그의 작가적 위상은 1948년에 발표된, 작가 개인의 체험을 반영한 자전적 소설 「인간 실격」을 통해 더욱 견고해진다. 수차례 자살 기도를 거듭했던 대표작은 『만년(晩年)』, 『사양(斜陽)』, 「달려라 메로스」, 『쓰기루(津?)』, 「여학생」, 「비용의 아내」, 등. 그는 1948년 6월 13일, 폐 질환이 악화되자 자전적 소설 『인간 실격(人間失格)』을 남기고 카페 여급과 함께 저수지에 몸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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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양, 인간실격 - 다자이 오사무 (송숙경 옮김, 을유 문화사 2004)

사양 - 다자이 오사무 (유숙자 옮김, 민음사 2018)

인간실격, 사양 - 다자이 오사무 (허호 옮김, 웅진지식하우스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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