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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
II. 고전 문학 (동양)/1. 동양 - 고전 소설

해질녘 보랏빛 - 히구치 아치요 (유윤한 옮김, 궁리)

by handaikhan 2023. 2. 10.

에디션 F 08

하구치 이치요 작품선

목차

섣달그믐・7
키 재기・31
흐린 강・101
열사흘밤・149
가는 구름・175
해질녘 보랏빛・195
달과 꽃과 먼지의 일기・201

옮긴이의 말・247
수록 작품의 원제명・256
히구치 이치요가 걸어온 길・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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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구치 이치요 - 해질녘 보랏빛 (1896년 미완성 유작)>

 

노을 지는 가게 앞에 우체부가 던지고 간 우아한 필체의 편지 한 통. 아내는 고타쓰 방에 켜둔 램프 아래서 편지를 읽고는 둘둘 말아 오비 사이로 집어넣었다. 행동이 머뭇머뭇하고 걱정이 보통은 아닌 듯 절로 얼굴에 드러나니, 사람 좋은 남편이 "왜 그래?" 하고 물었다.

"아니, 별일은 아닌 것 같지만 나카마치에 사는 언니가 무슨 걱정거리가 있나 봐요. '내가 가면 좋겠지만, 잔소리 심한 네 형부가 마침 휴가라서 털끝만큼도 집을 못 비우게 하니 곤란하네. 오늘 밤중에라도 돌아갈 수 있게 보내줄 테니 제부한테 이야기 잘 해서 잠깐 다녀갈수 있겠니? 기다리고 있을게'라고 편지를 보냈어요. 또 의붓딸과 싸운 걸까요? 마음이 약해 할 말도 못하고 가슴앓이만 하는 언니 성격은 정말 골칫덩이예요."

아내는 일부러 대단한 일이 아니라는 듯 소리 내어 웃었다.

"거참, 딱하군."

남편은 굵은 눈썹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당신한테 하나뿐인 자매야. 잘잘못을 따지며 이야기를 들어주는 역할을 그렇게 웃어넘길 건 아니지. 무슨 얘기인지 가서 들어보고 괜찮은지 살펴보는 게 어때? 여자들이란 마음이 좁은 법이야. 기다린다고 했으니 한시도 30년 같을 텐데, 당신이 이렇게 꾸물거리면 처형은 나 때문이라고 생각할 거야. 그런 원망을 사봤자 내게 덕이 될 것은 없지. 밤에는 특별한 일도 없으니, 얼른 가서 얘기를 들어주는 것이 좋겠어."

사랑스러운 아내가 언니의 일을 이야기하니, 남편은 인정 어린 말로 외출을 허락했다. 이제 소원이 풀렷으니 아내는 뛸 듯이 기뻤다. 하지만 일부러 얼굴에 드러내지 않고, "그럼 갔다 올까요?"라고 내키지 않는 듯 마지못해 장롱에 손을 댔다.

"인정 없는 말 그만하고 얼른 가. 처형이 얼마나 기다리겠나 생각해봐."

아무것도 모르는 정 많은 남편이 오히려 재촉하자, 아내의 마음속에 숨어 있는 도깨비의 얼굴이 절로 붉어지고 가슴은 두근두근 요동쳤다.

질긴 명주로 지은 코소데를 겹쳐 입고, 그 위에 고급 비단 하오리를 걸친 뒤 방한용 두건으로 얼굴을 가렸다. 키가 큰 사람이 밤바람을 막기위해 각진 소매의 긴 외투를 걸치고 나서니 자태가 꽤나 멋졌다.

"그럼 다녀올게요"하며, 아내는 고마게타를 가게 입구에 나란히 놓도록 시켰다. 그리고 사환 아이의 등을 엄지손가락으로 콕콕 찌르면서, "다키치, 다키치"하고 불렀다.

"앉아서 꾸벅꾸벅 졸지 말고, 가게 물건 도둑맞지 않게 정신 차려라. 내가 늦더라도 상관하지 말고 문을 닫고, 담요 덮은 화롯불을 계속 잠자리 속에 넣어두면 안 돼. 그리고 식모아이 너는 부엌의 불기 있는 곳을 조심해야 해. 주인어른의 베게 밑에는 늘 하던 대로 자리끼와 담배함을 두어 불편하지 않도록 하고, 되도록 빨리 돌아오기는 하겠지만."

아내가 상점 유리문을 열고 나오려는데 남편이 말을 걸었다.

"인력거를 부르라고 하지 않은 건가? 아무래도 걸어선 못 갈 텐데."

자상한 말투였다.

"아녜요. 상인 마누라가 가게 앞으로 인력거를 불러 타고 가면 사치스럽다고 소문날걸요. 저쪽 길모퉁이로 나가 적당히 값을 깎아 탈게요. 이래 봬도 제가 셈은 잘 하잖아요."

아내가 애교 있게 말하며 웃자, 남편은 "알뜰한 살림꾼이야"하며 은근히 좋아하는 얼굴이었다. 아내는 그 모습을 못 본척하고 문밖으로 나섰다.

넓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후유 한숨을 쉬자, 흐려지는 듯한 아내의 얼굴에는 그림자가 더욱 짙어졌다.

'언니한테 편지가 왔다는 새빨간 거짓말을...'이라 생각하며, 아내는 집 쪽을 돌아보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기분 좋은 얼굴로 보내주니 미안하네. 저렇게 악의 없고, 의심이라고는 이슬만큼도 품지 않는 마음씨 고운 사람을 뻔뻔스럽게 세 치 혀로 속이며, 도리를 벗어나 내 맘 가는 대로 굴다니. 이것이 남편 있는 여자가 할 짓일까.

 아아, 나는 얼마나 나쁜 사람인가. 아니 인간도 아니야. 법도 도리도 모르는 짐승 같은 마음으로 이러는 거지. 못된 짐승 같은 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천지에 둘도 없는 사람인 양 사랑해주며, 내 말이라면 몸을 바쳐 들어주는 남편의 마음이 고맙고, 기쁘고, 또 두렵구나. 너무 미안해서 눈물이 흐르네. 저런 남편을 두고, 무엇이 모자라 칼날 위를 걷는 듯한 위험한 계교를 꾸미는 것일까. 가엾게도 사람 좋은 나카마치의 언니까지 끌어들여 사방팔방 거짓말로 둘러대고, ,도대체 나의 두 다리는 어디를 향하고 있는 걸까. 생각해보면 난 악당이고, 추잡하고, 의리를 모르는 인간이야. 그래. 사람의 도리를 벗어나고 말았어.'

아내는 사거리에 선 채로 발길을 떼지 못했다. 골목길 모퉁이를 두 번 돌아왔기 때문에 이제 자신의 집 처마는 보이지 않았다. 뒤돌아보는 얼굴에는 뜨거운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남편의 이름은 고마쓰바라 도지로. 서양 잡화점은 이름뿐이고, 남아도는 재산을 곳간에 쌓아둔 채 살아가는 정말로 세상물정 모르는 남자였다. 그가 사랑하는 아내 리쓰는 행동이 재빠른 데다가 집 안에서나 가게에서나 일처리가 능수능란했다. 아름다운 눈빛으로는 남편의 노여움을 스르르 녹였고, 사랑스러운 입으로는 손님을 기쁘게하는 말을 술술 해냈다. 나이도 젊은데 참 영리한 안주인이라며 사람들의 칭찬이 자자한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이런 아내 속에는 부정한 마음이 살고 있었다. 남들은 모르겠지 하며 속이고 있지만, 다정한 남편의 마음씀씀이가 오늘따라 계속 떠올라 길가에 못 박히듯 서고 말았다.

'가지 말까. 가지 말까. 그냥 눈 딱 감고 가지 말까. 오늘까지의 죄는 오늘까지일 뿐. 지금부터 내 마음을 고쳐먹으면 그분도 그렇게 미련을 보이시지는 않을 거야. 서로 깨끗이 사귀었고, 이제 남들이 모르고 있을 때 관계를 정리하면, 앞으로 그분을 위해서나 나를 위해서나 좋은 텐데...

애태우며 매달려봤자 떳떳하게 부부로 함께 살 수 있는 사이는 아니잖아. 사랑하는 그분에게 간통이라는 불명예를 남기고, 이 일이 조금이라도 세상에 알려지면 어쩌지. 나야 어떻게 되든 그분이 출세하기도 전에 일생을 암흑 속에 빠뜨려놓고서...그래도 나는 괜찮을까. 아, 정말 싫고 두렵구나.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분을 만나러 온 것일까. 설령 편지가 천 통이 와도 내가 가지만 않으면 서로 상처 입지 않을 텐데. 이제 결단을 내리고 집으로 돌아가자. 돌아가자. 돌아가자. 그래, 이제 난 마음을 정했어.'

아내는 가던 길을 되돌아섰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밤바람이 불어 차갑게 온몸을 스쳤고, 한바탕 꿈같던 생각들은 또다시 바람에 날리듯 사라졌다.

'아니야, 그처럼 마음 약한 쪽으로 끌려가선 안 돼. 처음 그 집에 시집 갈 때부터 도지로를 남편으로 생각하지 않았어. 몸은 가지만 마음은 절대 주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새삼스레 무슨 의리를 찾는 걸까. 악인이 되든 도리에 어긋난 여자가 되든 상관없어. 이런 내가 싫다면 버리라지. 그게 결국 내가 바라던 것이잖아. 왜 그런 아둔한 사람을 남편으로 받들고, 요시오카 상을 버릴 생각을 잠깐이라도 했을까? 살아 있는 한 끝까지 만나요. 우리 인연을 끊을 수야 없지요. 남편을 가지든, 아내가 생기든 이 약속을 깨지 말아요. 이렇게 말해놓고선...누가 아무리 다정하게 대해주든, 고마운 말을 해주든 내 남편은 요시오카 상밖에 없는 것을. 이제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자. 생각하지 말자.'

아내는 두건 위로 귀를 누르며 걸음을 재촉했다. 대여섯 보를 뛰기 시작하자 두근거리는 가슴이 가라앉아 어느새 마음은 고요히 맑아졌다. 핏기 없는 입술에는 차가운 미소마저 띠고 있었다.

이하 미완성..............

(p.195-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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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구치 이치요(樋口一葉, 1872년 5월 2일 ~ 1896년 11월 23일)

일본 근대 소설의 개척자로서 직업 소설가이다.
메이지 5년(1872년) 히구치 노리요시(樋口則義)의 3남 2녀 중 막내딸로 태어났다. 메이지 16년(1883년) 세이카이 소학교(私立青海学校) 고등과 제4급(지금의 초등학교 5학년에 해당)을 수석으로 졸업했지만 여자에게 더 이상의 교육은 필요없다는 어머니의 반대로 더 이상 학업을 잇지는 못했다. 이후 이치요는 바느질을 배우며 집안일을 했지만 아버지는 이치요의 재능과 문학에 대한 열정을 인정해 메이지 19년(1886년) 이치요를 나카지마 우타코가 운영하는 와카를 배우는 사설 기관 하기노야(萩の舎)에 다니게 해 주었다. 당시 하기노샤는 황족, 화족 등 높은 신분의 여성이 많이 다녔기 때문에 신분이 낮은 이치요는 발표회에 입을 옷이 없어 고민하기도 했다. 메이지 20년(1887년) 오빠 센타로가 결핵으로 사망하여 이치요가 17세의 나이로 호주가 되었다. 1889년에는 사업에 실패한 아버지가 사망했고 일가는 둘째 오빠 도라노스케의 집으로 이사했다. 같은 해 이치요는 경제적인 이유로 약혼자 시부야 사부로(渋谷三郎)에게서 파혼당했다. 이듬해 어머니와 오빠의 불화로 이치요는 어머니, 여동생과 함께 오빠의 집을 나와 혼고로 이사했고 생계를 위해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메이지 22년(1891년 4월 14일 노노미야 기쿠코의 소개로 아사히 신문의 기자였던 작가 나카라이 도스이(半井桃水)를 만나 그에게 문학 수업을 받았고, 메이지 23년(1892년) 3월 나카라이가 발간한 잡지 《무사시노》 창간호에 첫 작품 <어둠 속의 벚꽃>을 발표했다. 그러나 당시 이치요와 나카라이 모두 독신이었기 때문에 이치요가 나카라이의 집을 드나드는 것을 두고 좋지 않은 소문이 돌아 이치요는 나카라이와 연을 끊게 되었다. 이후 이치요는 고다 로한의 <풍류불>의 영향을 받아 예술에 대한 도공의 정열을 사실적 문체로 묘사한 <매목>(1893)으로 재능을 인정받았고, 같은 해에 요시와라 유곽 근처로 이사해 가게를 열었지만 장사가 잘 되지 않아 이듬해에 문을 닫았다. 이치요는 생활고를 헤쳐나가기 위해 계속 글을 써야했고《문학계》 등의 잡지에 <섣달 그믐날>(1894), <키재기>(1895~96), <탁류>(1895) 같은 서정성 넘치는 수작을 발표하여 복고적 시대 풍조 속에서 주목을 받았다. 메이지 29년(1896년) 발표한 〈키재기〉가 모리 오가이 등에게 호평을 받으며 작가로서 인정받게 되었지만 같은 해에 폐결핵 진단을 받고 24세의 나이로 요절하였다. 이치요의 작가 생활은 14개월에 불과했지만 근대 문학사에 길이 남을 많은 작품을 남겼다. 주요 작품으로는 <키재기>, <섣달 그믐날>, <흐린 강>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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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재기 - 히구치 이치요 (임경화 옮김, 을유 세계문학)

꽃속에 잠겨 - 히구치 이치요 (강정원 옮김, 민음사)

배반의 보랏빛 - 히구치 이치요 (강정원 옮김, 민음사)

가는 구름 -  히구치 이치요 (강정원 옮김,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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